평화의 걸음걸이
나희덕
1.
1950년 늦여름
지리산 어느 마을에서의 일이다
새벽녘 동구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마을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그 외길을 지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한다
국군과 인민군이 총구를 겨누며 대치하고 있는
양쪽 산자락 사이 좁은 오솔길
주민들은 숨죽이고 총탄의 여울을 건너갔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외쳤다
아가, 뛰지 마라, 절대 뛰어서는 안 된다!
천천히, 천천히 걸어야 한다!
그 외침을 방패삼아 걷고 있는 소년 앞으로
한 청년이 겁에 질려 뛰기 시작했다
문득 총성이 들렸고 청년은 쓰러졌다
숨죽여 걷는다는 일
그것이 소년에게는 가장 어려운 싸움이었다고 한다
2.
평화의 걸음걸이란
총탄의 여울을 건너는 숨죽임과도 같은 것
두려워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두려움과 싸우며
총탄의 속도와는 다른 속도나 기척으로 걸어가는 것
심장을 겨눈 총구를 달래고 어루만져 거두게 하는 것
양쪽 산기슭의 군인들이 걸어 내려와
서로손 잡게 하는 것
그날까지 무릎으로 무릎으로
이 땅의 피먼지를 닦아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