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평화의 걸음걸이

 

나희덕

 

 

1.

 

1950년 늦여름

지리산 어느 마을에서의 일이다

새벽녘 동구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마을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그 외길을 지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한다

국군과 인민군이 총구를 겨누며 대치하고 있는

양쪽 산자락 사이 좁은 오솔길

주민들은 숨죽이고 총탄의 여울을 건너갔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외쳤다

아가, 뛰지 마라, 절대 뛰어서는 안 된다!

천천히, 천천히 걸어야 한다!

그 외침을 방패삼아 걷고 있는 소년 앞으로

한 청년이 겁에 질려 뛰기 시작했다

문득 총성이 들렸고 청년은 쓰러졌다

숨죽여 걷는다는 일

그것이 소년에게는 가장 어려운 싸움이었다고 한다

 

2.

 

평화의 걸음걸이란

총탄의 여울을 건너는 숨죽임과도 같은 것

두려워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두려움과 싸우며

총탄의 속도와는 다른 속도나 기척으로 걸어가는 것

심장을 겨눈 총구를 달래고 어루만져 거두게 하는 것

양쪽 산기슭의 군인들이 걸어 내려와

서로손 잡게 하는 것

그날까지 무릎으로 무릎으로

이 땅의 피먼지를 닦아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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