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지리산에서 온 편지 10

 

피밭마을의 골짜기

 

 

어머니의 단풍구경

 

나이 80대 중반 무렵이었을까, 어머니는 바람이 쌀쌀해지는 가을이 오면 단풍구경 가자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나는 그때만 해도 바쁘게 밖으로만 돌던 때여서 , 그래요. 언제 피아골에라도 한번 가게요.’ 하면서도 그냥 스쳐지나가기 일쑤였다. 구례에 살 때여서 한두 시간만 시간을 내도 금방 다녀올 수 있다는 생각에 더 소홀했던 것 같다. 막상 이제 돌아가시고 나니 가을이 오고 피아골에 단풍이 곱게 물들기라도 하면 그 말씀이 늘 밟힌다. 그래도 언젠가 한번 어머니를 모시고 피아골에 갔던 적이 있었다. 피아골 초입의 단풍잎들이 처연하리만큼 붉게 물든 나무 아래로 모시고 가면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은 고작 , 참 곱다한마디였다. 그리곤 별 말씀도 없이 그냥 한참을 앉았다 돌아오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만 해도 노인네의 짧은 한마디에는 한 생이 다 담겨있기도 하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젊은 것들은 지금 여기의 현재를 살아내기도 바빠서 울긋불긋 현란한 색들을 보며 그저 가을이니까 하는 정도의 계절감각을 가졌었다면 어머니 같은 노인네들은 저 화려한 시절의 절정기 뒤에 있는 인생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절절하게 느끼셨을 것이다. 지금 여기의 붉디붉은 절정의 단풍이지만 당신에게는 젊은 날의 과거로만 보였을까. 씁쓸한 듯 가늘게 뜬 눈빛과 오랜 풍상의 눈가 잔주름이 아직도 생생하다.

 

붉은 골짜기 피아골

 

피아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끝 마을은 직전마을이다. 피 직()에 밭 전()을 쓰니 그 옛날 곡식이 귀했던 시절의 이름이다. 그 피밭골이 육이오 전쟁을 거치면서 너와 나, 적군과 아군, 좌익과 우익의 갈등과 대립을 함축하고 있는 이름인 피아골로 불리게 되었다. 피아골은 전쟁 당시 한때 인민공화국의 구례 군당이 숨어들었던 곳이며 그 비트는 피아골 삼홍소에서 계곡 좌측의 지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지금도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전투가 잦았을 것이니 계곡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피아골의 피아는 한자로 상대방()과 나()를 뜻하는 말이건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붉은 피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떠도는 말로 전쟁 이후 이 골짜기에서 한 트럭분의 유골이 나왔다고도 하니 어쨌거나 그 상처가 골짜기만큼이나 깊다고 할 것이다.

전쟁 훨씬 전에도 피아골의 붉은 골짜기 이미지는 있었다. 골짜기의 중간쯤에 있는 삼홍소가 그렇다. 삼홍소는 한자로 三紅沼라고 쓰는데 셋이 붉은 물웅덩이라는 뜻이다. 조선조의 생육신이며 선도의 맥을 이었다는 김시습이 이곳에서 시를 한 수 지었는데 단풍이 붉고, 그 빛이 물에 어려 계곡물이 붉고, 도도한 흥취에 술 한 잔 걸친 얼굴이 붉다하여 삼홍이라고 노래했다는 것이다.

온 천지가 붉은 이 삼홍소의 계곡에 앉아 있으면 당시 왕권을 둘러싸고 진행되던 피비린내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뇌하는 지식인 김시습이 보이는가 하면 한편으론 현실을 극복하고 인생을 관조하며 지혜롭게 한 생을 건너는 현자 김시습의 풍모가 그려지곤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혹은 어느 시대라 할지라도 현실의 삶과 이상의 삶은 늘 함께 하는 것이 아니던가. 어느 한쪽에 빠져 허우적이는 것이 어리석은 삶이라면 어쩌면 김시습은 자신이 처한 현실과 자아가 추구하던 이상을 아우르며 균형 잡힌 삶을 꾸려낸 각자覺者가 아니었나 싶다.

 

계곡등반의 허와 실

 

20년도 훨씬 전이었을 젊은 시절, 한동안 계곡등반을 즐겨했는데 피아골도 계곡등반을 했던 적이 있다. 직전마을에서 피아골 대피소까지는 등산로로 가고, 대피소를 지나서 바로 등산로를 벗어나 계곡만을 타고 주능선까지 오르는 길이었다. 대피소에서 지정 등산로를 타고 오르면 주능선의 피아골 삼거리에 이르지만, 계곡을 타고 오르면 반야봉 바로 밑에 있는 주능선의 노루목 근처에 이르게 된다.

계곡등반을 하는 것은 다들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계곡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 그 물줄기의 시원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물줄기의 처음은 어떻게 시작될까, 어디서부터일까, 하는 일반적인 궁금증과 함께 어떤 존재의 시원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 같은 것이 강했던 것 같다. 일반적으로 모든 자연의 사물에 대한 존재의 근원은 확인하기 어려운 것이어서 설화나 전설 같은 상상력들이 포진하게 된다. 그래서 더 궁금증을 자극하고 괜한 동경이 생기는 것 아니던가. 하지만 계곡등반 같은 경우에는 반드시 분명한 그 처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 나름 후련한 맛은 있었다. 하지만 처음이라는 막연한 시원에 대한 그리움의 의미는 깨지게 된다. 계곡의 끝자락에 이르게 되면 물도 없는 그저 돌멩이 몇 개 있는 평범한 지형일 뿐이었으니 말이다.

 

삶의 균형감각

 

나의 계곡등반은 어쩌면 이런 미화되고 포장된 의미들을 깨고 싶은 심정의 발로였는지도 모른다. 한 세상을 살며 이상과 동경은 꿈과 희망이라는 단어로 치환되면서 답답한 현실을 헤쳐 나가는 힘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환상과 비현실 속의 막연한 기대감으로 현실적이고 실질적 삶을 꾸려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계곡등반으로 계곡의 끝 지점을 확인하며 나의 현실인식을 다그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문학의 허구적 상상을 앞세워 살며 현실을 나의 에고로 왜곡하여 인식하거나 또는 그 현실을 외면하거나 도피하지는 않고 있는가 하는 자기점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떤 뚜렷한 인식과 의도성을 가지고 계곡등반을 하지는 않았지만 돌아보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얼마나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으로 살고 있을까. ‘실사구시라는 말은 도법스님께서 많이 쓰시던 말씀이다. 나는 나름대로 주어진 이 생의 현실을 진리의 눈으로 바로 보고 그렇게 세상살이를 해내야 한다는 말로 해석하며 들어왔다. 계곡등반을 그렇게 철학적으로 했다는 말은 아니고 그 행위의 저 깊은 안쪽에 그런 무의식적 발로가 있었기를 바라는 심정인 것이다. 모든 존재의 본성이 가지고 있다는 삶의 균형감각 같은 것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피아골을 자주 올랐다. 구례에 있는 가까운 곳이어서 그러기도 했지만 팔구십 년대라는 시대적 격동기를 살았던 내 존재의 현실을 올바로 가늠하고 또 그렇게 살기 위한 몸짓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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