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02-05(일)
 

KakaoTalk_20230119_102110442_11.jpg

디자인.칩코

 

 

 

 

<잘 보이고 싶은 산달에게>


산달! 어떻게 편지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 첫문장을 쓰기까지 어찌나 오래 걸렸는지. 산달씨라고 해야 할지, 산달님이라고 해야 할지, 산달쌤이라고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산달이라고만 적었습니다. 소리내어보면 참 어색한데, 너그러운 마음으로 읽으면 퍽 자연스럽게도 들린답니다.


저는 덕복희예요. 된소리로 읽는 것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이 필명을 짓기까지도 아주 오래 걸렸는데… 방금 속으로 좀 구리다고 생각하셨나요? 호기롭게 결정한 이름 치고는 저도 마음에 쏙 들진 않지만, 세상에 이미 있는 이름일 수도 있으니 말을 가리겠습니다. 제가 참 존경하는 분이 있는데요. 그분에게 존함을 물었을 때 ‘똥폼’이라는 별칭을 알려주셨어요. ‘똥폼’이라니…. ‘방구뿡’도 아니고… 전 그렇게 멋진 분을 제가 감히 그런 외람된 이름으로 불러도 되나, 아주 당황스러웠는데요. 다행히도 이름이란 건, 습관처럼 익숙해지니까요. 이젠 똥이 그분처럼 멋지게 보이기에 이르렀어요.(농담 아닙니다) 똥폼! 아주 멋진 이름이죠. 덕복희란 이름도 그리 되길 바라요. 산달에게도 제게도.


쪼그려 앉은 채로 글을 적고 있어요. 오래 있으면 다리에 쥐가 나는, 낮은 변기에 앉은 모양으로요. 제가 이런 꼴로 글을 종종 쓴다는 걸, 주위 사람이 ‘편하게 앉아서 해’라고 말해주기 전까지는 잘 모르곤 합니다. 제겐 불편하지 않거든요. 내친 김에 하나 더 고백하자면, 저는 요리할 때 발꿈치를 드는 습관이 있습니다. 평생 모르고 살다가, 삼년 전 애인이 ‘그거 알아?’라면서 말해주고서야 깨달았습니다. 글쎄, 이 요상한 발동작은 뭐라하면 좋을까요? 긴장의 증거일까요? 오늘도 요리하며 어김없이 발꿈치를 들고 칼질하다가, 이젠 도리어 발꿈치를 내린 채로 요리하는 게 더 불편하다는 걸 새삼 느꼈답니다. 산달은 발꿈치를 들고 칼질을 하실 수 있으신가요? 언젠가 제게 도전을 해보셔도 좋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습관이 된다는 건 무엇일까요?


습관으로 나를 설명하는 건, 늘 망설이게 됩니다. 변명할 거리가 많아지기 때문이에요. 습관이란 익숙함을 너머 무의식의 영역에 도달한 것이 아닌가요? 코를 후비거나, 웃을 때 코를 찡긋하거나, 걸음걸이가 둥실둥실한다거나, 전화를 받을 때 순식간에 성대를 갈아끼우는 습관들. 습관을 나열하자면 그게 절대로 저라고는 인정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나의 아주 일부만을 설명할 뿐이라고 매정히 선을 긋지만, 사실은 언제나 그렇지 않은가 싶어요. 언제나 작은 조각만을 보고 나를 이해하고, 오해하고, 그 조각이 나를 대신하고, 나 자신조차 나를 착각하고 마는 일들 투성이라고요. 


올해 저와 쌍둥이처럼 붙어다니며 활동한 친구가 있는데요. 하루는 제게 이런 말을 했어요. “너 이젠 스스로를 환경운동가라고 하네?”라고요. 전 솔직히 ‘내가 환경운동가라고 말하길 꺼려했던가?’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했답니다. 분명 돌이켜보면 전 작정하고 환경운동가가 된 건 아니었어요. 여느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어릴 적부터 재능을 갈고 닦아서 꿈을 이룬 직업은 아니란 뜻이에요. 그냥… 어느 날 그렇게 된 거죠. 마침 제가 만사를 제쳐두고 자꾸 몰두하던 일들을 다들 환경운동이라고 불렀을 뿐인 거죠. 여전히 환경운동가라는 이름은 무겁기는 해요. 누가 실버버튼을 주는 것도 아닌데 괜히 ‘내가 뭐라고…’하는 위축감이 들어요. 그래도 매순간 제가 습관처럼 내린 선택이 모여 저를 이런 삶으로 이끌었다고 여겨요. 부피만 크고 구멍은 숭숭 난 뽁뽁이 포장지처럼 느껴져도 어쩔 수 없죠.


제가 발꿈치를 드는 줄도 모르고 칼질하는 것처럼, 환경운동을 하는 줄도 모르고 환경운동가가 되버린 것처럼, 제 삶은 저를 자꾸 어떤 모양으로 주물러 놓고는 해요. 저는 시시때때로 무언가를 돌보아야만 한다고, 그게 어느 새파란 잠자리 모습을 한 지구용사가 제게 심어놓은 사명이라고도 여기면서 살아요. 제 삶을 꼭 흥미로운 영화를 분석하듯이, 사사로운 일상의 모든 조명과 배우와 사건의 단서를 집요하게 주워담으려고 해요. 알쏭달쏭하게 들리지만, 한 마디로 삶을 ‘경이롭게’ 바라보는 거죠. 이 근사한 말을 산달이 해주었잖아요. 산달이 이 펜팔을 신청할 적에요.“모든 것이 사라지고 무너지는 시간 속에서 굳건히 경이로운 우리를 돌보고 싶다”고요. 


익숙함은 일상을 경이롭게 바라보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듯이 보이지만…실은 익숙함이야말로 경이로움인것 같아요. 작은 물방울이 모여 커다란 바위를 쪼개고, 가벼운 눈송이가 쌓여 기어코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듯이요. 삶이 습관처럼 내게 보여주는 장면들을 새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거죠. 집구석에서 돈벌레를 만나면, 혹은 두 번이나 만나면 지독한 운명이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씨익 웃고는 ‘못말리는 녀석이군’하는 거죠. 마치 어린 시절 좋아하던 애와 어쩌다 눈만 마주쳐도 ‘뭐지? 나 좋아하나?’하던 양, 이마에 빗방울만 떨어져도 ‘뭐지? 계시인가?’하는 거죠. 조금 오바해버렸지만… 경이롭다는 말이예요.


저는 산달의 이 문장이 반짝 윤이 난다고 느꼈어요. 이 문장 때문에 제가 지금 쪼그린 자세로 ‘산달쌤’과 ‘산달님’과 ‘산달씨’를 썼다 지웠다 하는 거겠죠. 잘 보이고 싶어서요. 누군가가 제가 뱉은 한 마디로 저를 단단히 오해한다면 말리고 싶을 텐데, 제가 그러고 있으니 아마 산달도 부담스럽겠죠? 그래서 밑밥을 깔아둔 거예요. 언제나 결국 그렇지 않느냐고요. 작은 조각으로 한 사람을 향한 이해와 오해를 견주는 일이요. 그러나 이해도 오해도 실은 ‘바라봄’이 바탕이 되는 법이니까요. 반 년간 제게 깊이 바라볼 문장이 되어주셔서 참 고맙습니다.


휴… 드디어 첫 편지를 채워가요. 아직은 낯선 분에게 보내는 편지가 어색해요. 그래도 환경운동을 하다보면, 꼭 군중 속에서 메가폰 없이 떠든다고 느껴질 때가 있어요. 수신자가 없는 거죠. "아무나 들어라!!! 누가 내 말에 동의해줄진 모르겠는데 일단 떠들겠다!!!" 그래도 이 편지는 수신자가 있어 좋아요.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이 편지가 닿을 발끝에 서 계셔서 고맙습니다. 어색한 편지도 시나브로 편안한 습관처럼 나누게 되길 바라요. 앞으로 겨울과 봄을 지나면서, 우체통에 찾아올 산달의 문장들을 새파란 잠자리처럼 바라보기를 약속할게요.

 

 단단히 오해한 덕복희 올림

  

<익숙함을 약속해준 덕복희에게>


복희! 벌써 저에게 그 이름은 아주 멋진 이름이 되어 버린 것 같아요. 얼굴도 목소리도 알 수 없는 편지에서 저는 오직 복희가 쓰는 단어들로 복희의 윤곽을 상상하게 되거든요. 글이란 건 사실 굉장히 솔직하기도 하죠. 평소에 그 사람이 어떤 낱말들을 수집해왔는지 어렴풋이나마 엿볼 수 있기 때문이에요. 복희의 말들에는 사랑을 고민해 온 흔적들이 화석처럼 남아 있다고 느꼈어요. 그리고 저는 그 화석에 덕복희라는 이름표를 붙일 뿐이겠죠.


저는 한 번도 제 이름을 다른 방식으로 불러 본 적이 없는데요. 그래서 이번에 새 이름을 찾는 것도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생각나는 이름만 많아서 6가지를 펼쳐놓고 친구들에게 뭐가 좋을까 같이 고민해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러다가 한 친구가 정해준 이름을 골랐는데, 끝내 입에 붙지 않아서 편지를 시작하기 직전에 다른 이름으로 바꿨고, 그게 ‘산달’이라는 이름이에요. 이름을 고민하던 중 제 눈 앞에 있던 트리트먼트의 향, SANDAL WOOD에서 따온 이름이랍니다. 향이 참 좋더라고요. 그러고나서 생각해보니 ‘산처럼 달처럼’ 이라는 뜻도 붙여볼 수 있었어요. 그 이름이 지리산과 그곳에 사는 반달가슴곰을 연상하게 만든다는 것은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에요. 그렇게 짓고 나니 참 흡족하더군요.


가벼운 고민일지도 모르지만, 이름을 짓는다는 건 꽤 의미있는 일일지도 몰라요. 우리의 언어 세계에서 무언가로부터 이름을 가져다 쓴다는 것은 그 기표에 대해, 표상에 대해 책임지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니까요. 저는 앞으로도 떡볶이를 먹을 때마다 자신의 이름을 된소리로 발음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는 복희의 당부를 떠올리겠죠. 복희가 이제 똥을 멋진 존재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처럼요. 복희는 어떤 순간에 저를 떠올리게 될까요? 아무튼, 제게 대체할 수 없는 하나의 의미가 되어주어 고맙습니다. 휘영청 달 밝은 날 지리산에서 복희와 떡볶이를 노나 먹을 수 있기를.


이름 하나 정하는 것 가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네요. 어쩌면 이게 제 습관일지도 몰라요! 언어를 지나치게 세심하게 쓰려고 하는 버릇 말이에요. 저는 대화할 때 ‘음,,,’, ‘뭔가,,,’ 라는 추임새들을 자주 붙이는데, 그런 저를 세심히 지켜봐 준 한 친구는 ‘또 말들을 고르는 중이구나?’ 라고 얘기해줘요. 생각해보면 저 스스로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를 모르겠어.’라는 말을 자주 하거든요. 제 문장들이 종종 준비되지 않아 투박하고 거칠다고 느껴요. 제 안에 스며든 여러 생각의 조각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전달하는 일은 제게 아직 어려운 일이에요. 저도 누군가가 저를 오해하는 일이 정말 무섭거든요. 늘 충분히 이야기할 시간이 제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모든 사람이 서툰 우리의 이야기를 조금씩만 기다려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요새 저는 충분히 이야기하지 못 하는 상황에서 그냥 입을 닫고는 합니다.


그래서 기후 운동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기다리는 일일지도 모르겠어요. 사람들에게 나의 말이 가닿기를 기다리는 일이기도 하고요. 기후위기를 만들어낸 세상에게 입을 가로막힌 생명들이 충분히 이야기를 꺼낼 수 있도록 기다리는 일이기도 해요. 그리고 우리는 그 이야기들을 차분히 듣고, 수집하고, 번역하는 거죠. 복희의 말처럼, 이해와 오해를 넘나들지만 차분히 바라보며 기다리는 거에요. 그들의 말들이 우리에게 충분히 익숙해질 때까지요. 우리가 바라는 민주주의가 바로 그런 모습이 아닐까요?


복희가 또 그런 말을 했잖아요. “익숙함이야말로 경이로움”인 것 같다고요. 참으로 그래요. 무엇이 익숙해진다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에요. 낯설고 생경한 것들이 내게 익숙해진다는 것은 그것이 익숙해질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있었다는 말이잖아요. 오늘 좀 어색했지만, 내일 다시 만나고, 모레 또 인사하고. 그렇게 하루하루에 이해와 오해를 반복하다 보면 결국 우리는 친구가 되겠죠. 처음이 어렵지, 익숙해지면 어렵지 않을 거에요. 우리는 그런 사랑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잖아요!


그런데 복희, 사랑은 어떤 걸까요? 우리는 우리가 사랑을 받은 방식대로 다른 존재들을 사랑하잖아요. 저는 궁금해요. 사랑이 과연 그런 형태만 있는 것인지, 우리는 사랑이 아닌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을지. 제 고등학교 때 문학 선생님이 이런 문장을 전해주셨거든요.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상상력이다.” 라고요. 우리는 또 다른 사랑의 방법을 상상해볼 수 있을까요? 사랑의 새로운 길들을 찾아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이야기는 기회가 있다면 다시 제대로 하기로 해요. 복희에게 사랑은 어떤 것인지도 궁금해요.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 어느덧 우리의 말들이 소복히 쌓인다면, 복희는 제게, 저는 복희에게 그런 익숙함을 선물할 수 있을 거에요. 그리고 그곳에서 또 하나의 세상이 열린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 글을 쓰고 있어요. 제가 복희의 이야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복희도 저의 이야기를 기다릴까요? 제가 복희의 글을 읽고 침대 위에서 깔깔 웃었던 것처럼 복희도 그럴까요? 궁금한게 참 많지만, 조급하지 않으려고 해요. 차분하게 바로보고 기다리면서 복희의 세계를 만나볼래요. 사랑해보려구요. 그럼 또 이야기 나눌 때까지 건강하세요.


p.s. 새파란 잠자리는 어디서 날아오나요?


궁금한 게 많은 산달이.

태그

전체댓글 0

  • 45418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소한 편지 : 덕복희와 산달] 익숙함이야말로 경이로움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