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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농부 안철환의 땅 이야기 5] 윤작과 혼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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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작과 혼작
안철환 (전통농업연구소 대표)
흙에서 살며 흙을 살리고 내가 사는 제일 중요한 방법은 흙에서 먹을거리를 얻는 일이라 봅니다. 그게 흙과 소통하는 일이에요. 먹을거리를 얻기 위해 흙과 소통하는 방법으로는 경작과 채집이 있어요, 이 둘 다를 농사라 할 수도 있고 경작만 농사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론적으론 경작만 농사일 수 있지만 우리 전통 문화에선 채집도 농사의 한 부분이었지요.
아무튼 이번 글에선 흙에서 살며 흙과 소통하는 것으로 경작과 채집을 얘기하려 하구요, 경작에선 먼저 윤작과 혼작을 살펴봅니다.
얘기에 앞서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은 우리나라의 미개한 농법을 계몽한다는 미명으로 권업모범장이라는 기관을 만들어 자기들 농학자들을 파견했습니다. 권업모범장은 지금의 농촌진흥청 전신입니다. 그래서 농진청의 태생적 한계를 지적하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농진청이 원래 있던 자리는 정조대왕이 천도 목적으로 수원 화성을 지으며 관개용수로 서호라는 저수지를 만든 주변 농경지 일대에요. 그러니까 농진청의 역사를 거슬러올라가면 정조대왕이 나오니 권업모범장만 떠올릴 일은 아니죠.
아무튼 권업모범장을 통해 일본의 실력있는 농학자들이 조선에 들어와 조선의 농업을 식민정책에 맞게 식량 공출기지로 바꿔 나가려 했을 때 들어온 사람 중에 다카하시 노보루(高橋 昇)라는 농학박사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좀 남달랐습니다. 조선 농법을 살펴보니 들은 바와 달리 미개한 농법이 아니라 일본 이상 가는 지혜로운 농법이라는 걸 간파한 겁니다. 그 중에 이 사람이 크게 평가한 것은 2년3작이라는 윤작법이었습니다. 조선 농부들은 2년에 두 번 농사짓는 게 아니라 세 번 지었다는 얘깁니다. 두 번 해 먹을 걸 세 번 지어먹는다고 토양이 고갈되는 것도 아니었어요. 오히려 반만년 같은 자리에서 농사지어도 지력이 고갈되기는커녕 보존을 넘어 더 증진되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요. 그런데 이른바 녹색혁명, 백색혁명으로 농업을 현대화한다면서 우리 농경지 지력은 반토막이 났습니다. 보리고개를 극복했다지만 땅심은 반토막이 났으니 그게 농업 현대화일까요? *
아무튼 다카하시 노보루 박사는 사비를 들여 함경북도에서 제주도까지 샅샅이 돌며 조선의 농법과 농민들의 삶을 살펴 본 책을 썼습니다.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이란 책이 그것입니다. 1천여쪽에 달하는 방대한 책인데 사비를 들여 썼으니 바로 출간을 못하고 죽은 뒤 아들이 유고를 갖고 있다 1983년도에야 민간출판사에서 낼 수 있었습니다.
그 책이 2000년대 들어와 우리에게도 소문이 나면서 복사판 책이 돌았습니다. 해적판이라고 하지요. 그 소식을 들은 다카하시 아들이 꽤나 화가 났던 모양입니다. 농진청의 직원 한 분이 그 아들을 찾아가 선친의 유고를 우리 농진청에 기증해달라는 부탁을 했을 때 무조건 거절한 것은 너무도 당연했을 겁니다. 자세한 경위는 못 들었지만 결국엔 우리 농진청에 기증하기로 결정했어요. 그걸 끝까지 설득한 농진청 직원이나 결국엔 기증하기로 결정한 아드님이나 모두 대단한 분들이다 했어요. 기증식에 저도 가 보고 유고도 살펴보고 그 아드님과도 인사 나누고 기념촬영도 했는데, 점잖고 온화한 인상을 가지신 분이다 싶었습니다.
다카하시 노보루 박사에게 영향 끼친 미국의 유명한 농학박사가 있었습니다. 프랭클린 히람 킹(Franklin Hiram King)이란 분으로 1909년 한 중 일 3국을 1년에 걸쳐 돌면서 이 지역의 농업을 소개한 책을 썼지요. 휴경하지 않고도 같은 땅에서 4천여년 농사지어 왔지만 지력을 고갈시키지 않고 농사지어 온 동양 농부들의 지혜를 현장을 돌며 파악한 책으로 그 중 앞의 다카하시 박사가 본 윤작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어요. 윤작 중에도 콩을 중심으로 한 작부체계를 매우 중요시하고 있지요. 거름도 만들어주면서 토양의 물리성도 좋게 해주는 콩을 중심으로 지력을 고갈시키는 작물을 혼작 또는 윤작을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지력을 아주 많이 빼먹는 옥수수는 콩 밭 둘레로 심고, 물과 땅심을 엄청 빼먹는 목화는 반드시 옆에 콩을 심는 식입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없던 시절, 배로 몇 달이나 걸리는 태평양 반대편의 지역을 미국의 농학자는 왜 왔을까요? 거름도 주지않고 목화 담배 같은 지력 수탈작물의 거대한 광작(廣作)으로 토양을 망가뜨리고도 그걸 살리려 노력하기보다 서부의 미지의 땅을 개척하는 데에만 관심을 갖는 미국의 농업문제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였죠. 킹 박사는 윤작 말고도 똥을 비롯한 모든 부산물을 퇴비화하여 땅으로 되돌리는 순환농사, 인위적인 관개시설 없이 천수답 논의 지혜로운 물관리도 소개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이미 하버, 보쉬라는 과학자들이 공기 중의 질소를 인위적으로 고정시켜 질소비료를 만드는 기술을 발명하는 바람에 이들의 아이디어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질소비료 생산은 농 기계화와 함께 단작(單作), 광작(廣作), 연작(連作)을 통한 대량 생산체제를 뒷받침하며 농업의 현대화를 더욱 가속화시켰습니다. 그렇다면 농업의 현대화는 토양의 지력도 함께 증진시켰을까요? 아니죠, 농업의 현대화는 토양의 고갈을 속으론 심화시키면서 그걸 임시로 가렸을뿐입니다. 조상들이 물려 준 지력이 뒷받침되었기에 질소비료가 효과를 본 것인데 그걸 애써 외면하다 지력의 고갈이 한계점에 도달하면 질소비료도 아무 소용 없는 때가 올 것이거든요.
땅심을 지켜주는 윤작, 혼작
인삼과 산삼의 차이를 아시죠? 인삼의 원종이 산삼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게 산에서 야생으로 자라면 산삼이고 밭에서 인간에 의해 재배되면 인삼인 것이죠. 그런데 둘 사이엔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인삼은 같은 자리에서 잘 해야 5~6년 자라고 산삼은 같은 자리에서 몇 십년을 살고 더 오래 살면 가치가 더 높아지죠. 말하자면 인삼은 지력 수탈로 연작피해가 생겨 5~6년밖에 키우지 못하지만 산삼은 그런 게 전혀 없는 거에요, 그래서 그런지 인삼은 6년간 80g 자라는데 산삼이 그만큼 자라려면 60년 정도 걸린다네요.
이 둘의 차이는 다르게 보면 자연산(야생)과 재배(양식)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연산은 크게 자라지 않지만 오래 살 수 있고 재배한 것은 크게 자라지만 오래 살 수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크게 자란다는 것은 수확량이 많다는 것이고 오래 산다는 것은 같은 토양에서 옮기지 않고 연작이 가능하다는 것이라 할 수 있어요.
좀 더 따져볼까요. 사실 수확량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토양을 수탈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토양 수탈이 일정 기간 지속되면 당연히 토양이 망가집니다. 토양이 작물 재배에 의해 수탈된다는 의미는 특정 작물에 맞는 토양의 양분이 편중되게 고갈된다는 것입니다.
특정 작물을 재배하여 많은 수확량을 얻으려면 단작(單作)은 필수입니다. 그에 따라 넓은 면적의 재배, 곧 광작(廣作)으로도 이어지고 계속 한 작물을 심는 연작(連作)도 불가피한 선택이 됩니다. 그리고 과도한 비료 투입과 화학자재 및 에너지도 많이 투입되기 마련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장기간 재배하게 되면 토양은 산성화되기 쉽고 고투입으로 인한 염류집적도 피할 수 없죠. 더 오래되면 농사가 불가능해지는 지경까지 갈 수도 있고 이미 그 전에 자연 재난에 의한 토양 유실, 침식으로 더 빠르게 망가질 수도 있어요.
반면 산삼이 크기와 수확량은 적더라도 같은 자리에서 몇 십년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전혀 토양을 망가뜨리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수확량이 적다는 것은 토양을 별로 수탈하지 않는다는 얘기와 통합니다. 또 산삼은 군락하지 않죠. 한쪽 구석에 숨어서 몇 포기만 자생하니 찾기 힘든 걸겁니다. 작물로 비유하면 단작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거에요. 주변 여러 풀들과 공생하고 있는 거지요. 작물로 치면 혼작인 셈이에요. 이러니 토양이 수탈되지 않아 앉은 자리에서 오래 살 수 있는 것이죠.
그렇지만 먹고살아야 할 식량을 구해야 한다는 점에선 산삼 같이 구하기도 힘들고 양도 적은 것을 토양을 수탈하지 않는다는 근거로 무조건 환영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많은 식량을 얻기 위해선 단작, 광작, 연작 방식이 불가피할 수 있습니다만 그 재배방식을 오래 지속하다 토양이 고갈되 결국 아무 식량도 얻을 수 없게 된다면 다수확 방식이라고 무조건 환영할 수 있을까요? 기후위기 시대에 이런 단작 방식은 특히 취약하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먹을 식량도 지속가능하게 얻으면서 토양도 고갈시키지 않는 방식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바로 인삼과 산삼 사이에서 찾으면 됩니다. 넘쳐나도록 잉여식량이 많지는 않지만 굶지는 않을 정도의 식량을 얻으면서 토양은 망가뜨리지 않는 방식이죠. 그게 뭐냐고 물어보면 저는 과감히 윤작과 혼작, 그리고 채집이라고 말합니다. 말이 길어져 이의 자세한 방법에 대해선 다음 글로 미루어야 겠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 통계자료를 보면 1922년경에는 우리 농토의 논토양유기물함량이 4.4%(밭토양3.4%)까지 올라간 때도 있었는데 점점 낮아져 2000년대에 들어와서 2.2%대로 낮아졌다. “친환경농업과 토양유기물 함량”(흙살림연구소:
http://www.heuk.or.kr/info/sub1_3.asp?seq=636&boardId=info01_3&page=12&searchField=2&searchValue=&sCategory=&mode=read)
** 2014년에 같은 이름으로 국내 민속원이란 출판사에서 번역 출간하였습니다.
글을 쓴 안철환 선생은 온순환협동조합, 전통농업연구소 대표이고 경기도 안산에서 ‘산림생태텃밭 먹거리숲 농장’을 운영한다. 남은 음식물과 똥오줌, 커피 찌꺼기를 받아 직접 거름 만들기를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 토종 종자와 전통 농업 살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25년 전, 처음으로 심은 배추 씨가 3일 만에 싹 트는 걸 보고 ‘씨 안에 누가 있었구나!’ 깨닫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우리가 먹는 배추는 단순히 물질적인 먹을거리가 아니라 나와 별 차이 없는 생명이며, 그래서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먹고, 생명과 소통하고, 생명과 하나 되는 일이라고 믿는다.
쓴 책으로 《시골똥 서울똥》(2009), 《24절기와 농부의 달력》(2011), 《호미 한자루 농법》(2016), 《토종농법의 시작》(2020)이 있고, 옮긴 책으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2004)이 있다.
이 글은 전국도시농업시민협의회 홈페이지에도 연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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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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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농부 안철환의 땅 이야기 4] 오행론으로 본 땅과 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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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론으로 보는 땅과 흙 이야기
안철환 (전통농업연구소 대표)
토양학을 어깨 넘어로 공부해보니 대부분 서양의 학문이라는 걸 알고 은근히 아쉬웠어요. 서양의 지질학, 미생물학, 화학, 생물학 등에 기반한 것이죠. 동양의 토양학, 아니 우리의 토양학을 찾고 싶었지만 언감생심이었죠. 풍월을 읊는 3년 넘은 서당개 수준도 못 되어 본격적인 논지는 풀지 못하고 몇 가지 문제제기와 시사 정도에서 그치는 게 이번 글이 될겁니다.
일단 간단하게 짚고 싶은 문제제기는, 서양에서 들어온 기존 토양학엔 미시적인 과학 얘긴 탁월하지만 거시적인 얘긴 부족해 보인다는 겁니다. 그 중 흙 얘기하는데 하늘 얘기가 없고 사람 얘기가 없다는 겁니다. 이게 아마도 서양의 학문은 나누는 데 기반한 곧 분류학에 기반한 한계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통합과 연계학이 빠진 거죠. 그런 얘길 이번 글에서 조금 얘길 해볼까 합니다.
오행론으로 본 땅 이야기
오행론(목, 화 토, 금, 수)은 하늘을 5가지로 나눈 얘기애요. 하늘의 주인공은 태양이죠. 동(木) 서(金) 남(火) 북(水)을 가르는 태양의 운행에 맞춘 것입니다. 중앙에 바로 흙(土)이 있고 그 위에 사람이 있는 꼴입니다. 나(사람) 있는 곳이 중심(土)이고 그 중심으로 네 개의 하늘이 펼쳐져 있고 그 하늘에 따라 대지도 네 개로 나눠지는 것입니다.
전형적인 예가 4 대문으로 둘러싼 서울입니다. 동대문은 해가 뜨는 동쪽에 있어 오행의 목에 해당하고 그것은 씨앗의 발아 기운이고 파종의 힘입니다. 그래서 동대문의 다른 이름인 흥인지문(興仁之門)의 인(仁)이 바로 씨앗을 뜻하는 것입니다. 과일의 씨를 행인(杏仁)이라 하잖아요. 인(仁)이란 글자는 아이를 밴 임신부의 모습을 상형한 것으로 씨앗이라 하기에 적당하죠. 그래서 인은 씨앗, 파종 등을 뜻하고 큰 의미로는 사랑(love)에 해당하기에 널리 사랑의 기운을 흥하게 하는 문, 또는 그런 대지의 입구라는 뜻이 되는 겁니다.
이런 기운이 흥한 땅은 바로 동향이거나 동남향의 땅입니다. 제가 처음 농사지은 땅이 바로 동남향이었습니다. 위치가 그러하다보니 일출 장면이 장관이었습니다. 일주일이 멀다하고 동트기 전 밭에 해뜨는 걸 보려고 달려갔지요. 새 해 보러 동해안으로 가는 건 의미없는 일이라는 걸 바로 알았어요. 밭에서 일출이 장관인 것은 해 자체보다도 해 뜨기 전부터 일출을 알려주는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그에 맞춰 흙에서 꼼지락거리는 벌레와 풀들의 몸짓들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아침의 기운이 강한 곳이 동향, 동남향의 땅이라는 거지요. 그런 땅은 아침과 오전, 계절로는 봄에 강하죠.
이런 곳의 해는 자외선이 강하고 오방색 중 파란색 부분이 강해 햇빛 파장이 짧습니다. 파장이 짧다보니 깊숙이 파고들진 못하고 잎사귀 표면에 영향을 많이 주어 줄기와 잎 생육에 좋습니다. 이런 곳에선 잎사귀 먹는 채소류와 나물류가 잘 됩니다. 봄부터 절로 올라오는 냉이에서부터 쑥까지 야생 나물류가 좋지요. 상추나 시금치 배추도 좋습니다. 제가 태어난 왕십리는 성동구에 있어 서울에서 보면 동쪽 땅입니다. 그래서인지 옛날 이곳은 4대문안 사람들 먹을 채소농사를 많이 했어요.
남대문은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남쪽에 있어 오행으로는 화(火)에 해당합니다. 계절로는 뜨거운 더위의 여름에 해당합니다. 근데 이름이 왜 숭례문(崇禮門)일까요? 더운데 뜬금없이 예를 숭상할까요? 근데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덥다고 아무 데서나 옷을 확확 제껴 던지면 곤란하잖아요. 더울수록 예를 갖춰야 한다는 거죠. 또 우리의 여름은 습하면서 더워 만물이 극 성장을 합니다. 이른바 몬순기후의 특징입니다. 건조하면서 더운 유럽이나 중동지방 같은 경우는 뜨겁기만 한 태양의 화 기운 때문에 다 죽지요. 모든 게 극성장하는 우리 여름은 농번기인 것과 달리 그 지역은 여름이 농한기입니다.
암튼 이렇게 모든 게 왕성하게 성장할 때에는 마찬가지로 예의 덕목이 필요합니다. 무조건 성장만 할 게 아니라 완급을 조절하며 성장하라는 거죠. 무조건 성장만 하면 웃자라기만 합니다. 내실을 다지면서 성장해야 하는데 그럴 때 예가 필요합니다.
이런 남향의 땅에선 열매나 이삭을 맺는 작물이 잘 됩니다. 고추나 오이 호박 같은 과채류나 벼나 옥수수 수수 조 기장 같은 곡식이 잘 되지요. 일조량이 풍부해 생육에도 좋지만 잘 자란 잎과 줄기의 광합성 활동으로 뿌리의 양분 축적이 활발해 그 힘으로 열매와 이삭을 많이 다는 거죠.
서대문은 독립문이 아니고, 돈의문(敦義門)이라고 있었어요. 경향신문 앞 정동사거리에 있었죠. 말 그대로 의(義)를 돈독히 하는 문입니다. 서쪽의 기운은 오행으로 금(金)에 해당합니다. 서쪽의 기운은 저녁의 기운이고 계절로는 가을의 기운입니다. 농사의 입장에선 수확의 시기입니다. 금(金)은 쇠라 차갑죠. 벼를 베어 거두는 낫의 기운입니다. 차가우면서도 햇살은 따갑습니다. 곡식을 바짝 말려 겨우 내 곳간에서 저장이 잘 되도록 합니다. 의(義) 글자는 양(羊)을 내 손(手)으로 죽여(戈) 신에게 바치는 모습을 상형한 것으로 양을 죽이든 벼를 수확하든 그 기운은 냉정해야 할 것입니다.
서향의 땅에선 과일이 잘 됩니다. 서향의 햇빛엔 붉은 빛과 원적외선이 많지요. 파장이 길어 과일이 잘 익습니다. 서향에선 아침 동트는 햇빛보다 노을이 멋있죠. 늙어서는 서향의 땅에서 사는 게 좋답니다. 아마 파장이 길고 따뜻한 붉은 기운이 차가워진 늙은 몸에 좋기 때문일거에요. 반면 젊을 때는 동향, 동남향의 왕성한 기운이 좋답니다. 역동적인 젊은 기운과 맞기 때문일 겁니다.
북쪽의 땅에는 추운 겨울의 북풍 기운이 강하기 때문에 그것을 이기려면 지혜가 필요하다 했습니다. 그래서 북대문엔 홍지문(弘智門)을 두었지요. 원래 북대문은 숙정문인데 나중에 별도로 홍지문을 세웠어요. 북향의 땅은 선호하질 않았어요. 아무래도 춥죠. 그렇다고 무조건 남향을 추구하진 않았습니다. 남향에 산이 가로막고 있고 북향 쪽이 열려 있는데 남향이 좋다고 해서 산을 향하진 않았어요. 말하자면 우리는 산을 등지고(배산背山) 살아야지 산을 마주하고 살진 않았다는 겁니다.
한번은 토종씨앗 수집하러 시골 구석을 돌다 북향을 하고 있는 집을 가 보았습니다. 남쪽에 산이 가로막고 있고 북쪽에 밭이 있으니 배산북향을 하고 있는 집이었죠. 그런데 재밌는 것은 뒤뜰이 좀 이상하다 싶게 넓었다는 겁니다. 주인장께 여쭤보니 뒤뜰이 남향을 하고 있어 그랬다는 거였어요. 원칙에 얽매이지 않는 지혜로움을 엿볼 수 있었지요. 북향의 땅엔 아무래도 산채나 약초가 잘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 식물은 음지나 반음지를 좋아하니까요.
이런 사방 중심의 오행론 세계관은 특히 우리나라처럼 산악이 발달한 환경에 잘 맞았을 것 같습니다. 이런 환경에선 향에 따라 토양의 성격도 분명하게 드러나 그에 맞는 작물과 재배법이 발달했겠지요.
오행론으로 살펴본 흙 이야기
앞에선 오행론으로 땅의 공간을 나눠봤습니다. 이번엔 좀 더 미시적으로 들어가 토양 속에 들어간 오행론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흙 속엔 크게 네 가지 있는데 하나는 물이고 둘은 공기이고 셋은 흙 알갱이이고 넷은 유기물입니다. 여기에서 흙알갱이는 오행론의 토(土)이고 물은 수(水)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어요. 그럼 나머지 목(木), 화(火), 금(金)은 어떻게 존재할까요? 일단 금은 조금만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미네랄이라는 무기질 양분입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게 철(Fe)입니다. 철은 지구 어디에나 있는 보편적인 토양 금속입니다. 사람이 흙에서 났다고 할 때 가장 확실한 증거가 바로 철입니다. 사람 몸 속 피에는 바로 철로 된 헤모글로빈이 있기 때문이죠.
하늘의 화(火)는 햇빛과 그로 데워진 따뜻한 대기입니다. 따뜻한 대기가 흙 속에 들어가 공기층을 형성하죠. 빛은 어떨까요? 빛도 흙 속으로 들어갑니다, 물론 깊게는 못 들어가요. 표토에 닿죠. 별 영향이 없을 것 같지만 이 한 줌 빛이 광합성세균 같은 미생물에겐 아주 중요합니다. 이산화탄소를 먹고 산소를 내주거든요.
또한 햇빛은 토양 속 지열을 높여줍니다. 그래서 비닐 같은 것으로 무조건 흙을 덮어주는 건 신중해야 합니다. 많은 면적일 경우 불가피할 수 있지만 도시농부처럼 소농일 경우는 소탐대실할 우려가 있지요. 비닐 덮으면 지열은 올라가요. 그러나 햇빛은 차단되죠. 미생물이 산소를 만들기도 힘들고 대기의 산소가 토양 속으로 들어가기도 힘듭니다.
목(木)은 흙 속에서 올라오는 싹의 모습이에요. 토양학에선 흙의 구성으로 공기, 물, 흙알갱이 그리고 유기물만 얘길 해요. 흙 속만 얘길하는 거죠. 흙에 뿌리내리고 흙 위로 싹을 내미는 식물을 얘기 안 하면 반쪼가리 토양학이 되는 겁니다. 표토에 닿는 햇빛 얘길 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이지요.
목(木)을 얘기할 때 빠져서는 안 되는 게 바람입니다. 발아를 촉진해주는 바람은 생명의 바람이자 사랑의 바람입니다. 봄에 표토에서 살살 부는 봄 바람은 땅 속의 습기를 하늘로 끌어올립니다. 이게 씨앗의 뿌리 발육을 촉진하고 새싹과 새움의 발아를 자극하죠.
바람은 발아뿐만 아니라 작물의 생육도 촉진합니다. 작물을 심을 때 오와 열을 맞추는 것은 통풍이 잘되게 하기 위해서지요. 바람은 작물 성장에만 좋은 게 아닙니다. 토양 속 공기의 소통도 좋게 해주어 호기성 미생물 증진에도 좋습니다.
이렇게 오행론으로 토양을 보면 우리의 시야를 넓혀줍니다. 토양학은 토양 속만 보는 게 아니라 표토를 경계로 대기와 끊임없이 소통하는 열린 체계로 확대됩니다. 또한 오행론은 대지의 공간학(지리학)으로도 확장되니 비로소 토양학은 하늘과 사람과도 연결된 통합체계로 확장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입니다.
글을 쓴 안철환 선생은 온순환협동조합, 전통농업연구소 대표이고 경기도 안산에서 ‘산림생태텃밭 먹거리숲 농장’을 운영한다. 남은 음식물과 똥오줌, 커피 찌꺼기를 받아 직접 거름 만들기를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 토종 종자와 전통 농업 살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25년 전, 처음으로 심은 배추 씨가 3일 만에 싹 트는 걸 보고 ‘씨 안에 누가 있었구나!’ 깨닫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우리가 먹는 배추는 단순히 물질적인 먹을거리가 아니라 나와 별 차이 없는 생명이며, 그래서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먹고, 생명과 소통하고, 생명과 하나 되는 일이라고 믿는다.
쓴 책으로 《시골똥 서울똥》(2009), 《24절기와 농부의 달력》(2011), 《호미 한자루 농법》(2016), 《토종농법의 시작》(2020)이 있고, 옮긴 책으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2004)이 있다.
이 글은 전국도시농업시민협의회 홈페이지에도 연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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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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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농부 안철환의 땅 이야기3] 바람과 물, 대지의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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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물, 대지의 피
도시농부 안철환의 땅 이야기 3
안철환 (전통농업연구소 대표)
물보다 공기
물 다음으로 숲 속의 흙을 살아있게 하는 건 공기와 바람입니다. 제가 앞 글에서 물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글에선 물보다 공기가 더 중요함을 말하려 합니다. 살아있는 흙에는 살아있는 물이 있어야 한다는 거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살아있는 공기입니다.
도시텃밭에 가보면 물 주기를 열심히 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채소 잎사귀에 물 주는 소리가 참으로 좋다고 합니다. 농부는 논두렁에 물 들어가는 소리와 자식 입에 밥들어가는 소리가 제일 듣기 좋다는 말과 상통합니다. 저도 모종 키우다보면 참 물 주는 소리가 좋습니다. 이파리에 물 닿는 차르르 차르르 소리가 마치 즐겁게 채소가 먹는 것 같지요.
그렇지만 물 좋아하길 너무 좋아하면 농사 망치기 십상이에요. 집의 화초도 마찬가지로 초보자의 제일 큰 악덕(미덕의 반대)은 물 많이 줘 물 배 터지게 하는 거잖아요. 물 많이 주면 땅 속에 공기가 부족해져 숨막혀 죽거나 과습 피해로 병들어 죽기 아주 쉽죠. 대개 밭의 경우 만병의 근원은 과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과습 상태의 밭을 보면 흙 표면에 이끼가 낀 것처럼 녹색끼가 살짝 돕니다. 공기가 부족해 숨이 막힌다고 흙이 호소하는 모습입니다.
흙에 물 대신 공기를 넣어주는 행위는 뭘까요? 바로 호미질입니다. 호미질은 단지 제초에만 목적이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호미질은 풀만 제거하지 않습니다. 풀 없는 곳도 호미질 해주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풀이 없는 건 아니에요. 그렇게 풀 있는 곳 없곳 작물만 빼고 다 긁어줍니다. 그리고 작물에게 북을 주지요. 그러면 제초 외에도 공기를 넣어주는 효과와 흙 속의 습기가 날아가는 길을 끊어주어 간접적으로 물을 공급해주는 효과, 북주기를 통해 작물에게 양분을 몰아주는 효과까지 있어요. 그래서 풀을 뽑는다고 하지 않고 매준다고 합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럼 왜 숲의 공기가 들녘 공기보다 더 살아있는 걸까요? 그 또한 답은 간단합니다. 숲의 공기는 나무들이 뱉어 낸 것이기 때문이지요. 나무야말로 살아있는 공기 정화기에요. 대기 중 탄소를 흡수해 광합성을 하고 그것의 결과로 산소를 잎으로 배출하죠. 뿌리에서 흡수한 물까지 배출하니 적당한 습기를 머금은 아주 쾌적한 공기를 내뿜습니다. 뿐입니까? 피톤치드라는 방어물질까지 함께 배출하니 나무가 뱉어내는 공기야말로 생명의 공기인 겁니다.
원래 들녘의 논에도 나무가 있었어요. 버드나무와 미류나무가 많았지요. 논을 바둑판처럼 개간하면서 이 나무들이 다 사라지고 논의 경관은 벼만 남고 말았어요. 이 나무들이 논을 둘러싼 대기(미기후)를 건강하게 해 주었는데 햇빛을 가린다는 이유로 없애버린 겁니다.
나무에 관한 재밌는 시가 있어 소개해볼까 합니다. 다들 잘 아시는 윤동주 시인의 시입니다.
나무
나무가 춤을 주면
바람이 불고
나무가 잠잠하면
바람도 자오
바람이 불어야 나무가 춤을 추는 게 상식일텐데 거꾸로 얘기를 하고 있어요. 일제 강점기 저항시인의 시이기 때문에 아마 나무(민족)의 주체성을 말한다고 해석하는 게 자연스러울 겁니다. 근데 저는 말 그대로 해석합니다. 나무가 춤을 춘다는 건 공기와 물을 잎사귀로 내뿜는 모습이라고 보는 거지요.
한 여름 느티나무 밑 그늘에 가 본 사람은 알 겁니다. 자연 에어콘 바람이 얼마나 시원한지요. 나무가 춤을 추니 바람이 부는 시 그대로의 현장입니다. 이런 바람은 생명을 살리는 바람입니다. 이런 생명의 바람이 풍부한 곳이 바로 숲이지요.
그렇지만 우거진 숲이 최고는 아닙니다. 숲 속 야트마한 동산 밭이거나, 숲과 들녘이 만나는 경계선, 곧 산 밑 밭이지요. 에덴동산에서 흙으로 인간을 빚고는 숨을 불어넣은 바로 그 바람이 부는 곳입니다.
신의 숨, 바람
옛 사람들은 바람을 신이 숨쉬는 것이라 했습니다. 신이 화나면 무서운 숨을 쉽니다. 태풍 같이 습한 바람이거나 건조한 바람을 일으켜 때로는 물 난리, 때로는 불 난리를 가져다 주지요.
신은 성난 바람만 불지는 않아요. 곡식의 싹을 틔우고 곡식의 성장을 돕고 이삭을 영글게 해주며 마침내 긴 긴 겨울 생명을 이어주는 식량으로 남게 해 주지요. 그래서 바람을 불어오는 곳에 따라 크게 동서남북에 맞춰 네 종류로 나누었습니다.
동쪽에서 불어오는 동풍은 해가 뜰 때 부는 바람이라 해서 날 새우는 바람, 곧 샛바람이라 했지요. 날을 새워 동(東)이 트는 바람이니 동풍이고 봄 바람이기도 합니다. 곡식의 싹을 틔워주는 바람이기도 하지요. 서쪽에서 부는 서풍은 하늬바람이라 해서 건조하고 서늘한 바람으로 곡식을 익게 해주는 가을 바람입니다. 남쪽에서 부는 남풍은 마파람이라 하는데 맞바람에서 왔답니다. 맞은편 남쪽에서 불고 주로 여름 장마철에 불어오므로 곡식을 무럭무럭 자라게 해 줍니다. 북쪽에서 부는 북풍은 된바람이라 해서 몹시 춥고 세게 부는 뱌람이죠. 힘든 일을 하고 나면 ‘몸이 되다’는 말과 상통해 보입니다. 추우니 곡식은 곳간에서 휴면에 들어가 사람에게 소중한 식량이 되어주겠지요.
이 중 샛바람이 백두대간을 넘어오면 높새바람이라 해서 고온건조한 바람이 됩니다. 푄 현상이라고 들어보셨을 겁니다. 바다에서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내륙으로 불다 큰 산을 만나면 해안쪽은 비를 내려주지만 산을 넘으면 습기는 말라 건조한 바람이 되어 내륙 쪽에 가뭄을 일으키고 심하면 산불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강원도나 경북도 동해안 쪽에선 샛바람이라 하지만 산넘은 내륙쪽에선 높새바람이라 부릅니다. 늦봄에서 초여름, 절기로는 하지 전에 찾아오는 가뭄을 일으키는 바람이 되지요.
그렇지만 우리가 평상시에 느끼는 보통의 바람은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과 산으로 올라가는 바람입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은 나무가 뱉어내는 공기와 계곡의 물이 뱉어내는 공기입니다. 그래서 순하고 깨끗하고 농사에 아주 좋은 바람이지요.
반면 산으로 올라가는 바람은 바다 또는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인데 이 바람은 세고 들녘의 온갖 것들을 쓸고 오기에 그리 좋은 바람은 아니에요.
김광석이라는 유명한 가수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 노래말에도 이런 차이가 묘사되고 있어 재밌게 되새겨 보게 되더라구요.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 중략 .....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출렁이는 파도에 흔들려도 수평선을 바라보며
나무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그대의 머리결처럼 부드럽지만,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파도가 출렁거려 흔들린다 하잖아요.
그래서 숲에서 부는 바람은 생명의 바람이라는 거지요.
이러한 바람은 흙 속으로 들어가 생명의 공기(기상)가 됩니다. 그렇지만 바람이 직접 흙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반대로 흙이 스펀지처럼 대기 중 공기를 빨아들인다고 해야 맞을 겁니다.
흙 속에서 공기를 빨아들이는 것은 유기물,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호기성 미생물입니다. 호기성 미생물들은 유기물을 분해하면서 공기를 만들어냅니다. 기본적으로 호기성 미생물들은 공기 중에도 흙 속의 산소를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흙 속에 산소가 잘 들어가도록 조건을 만들어주어야 하지요.
그 조건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풍부한 유기물의 존재입니다. 유기물을 단순히 거름이나 비료라고만 이해하면 곤란해요. 유기물의 핵심은 탄소질입니다. 유기물을 정의하기를 탄소화합물이라 하지 않습니까. 유기물의 뼈대라고 이해해도 돼요. 그 뼈에 살처럼 붙는 것이 질소질 재료인데 똥이 대표적이죠. 보통은 거름이나 비료를 똥 중심의 질소질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유기질비료를 말하면 대개 계분, 돈분, 우분 등 축분으로 이해하는 게 그것입니다. 근데 그것은 살이지 뼈가 아니에요.
질소질은 작물을 빠르게 잘 키울 수는 있어도 흙을 살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먼저 흙에 뼈 역할을 하는 탄소질 재료를 잘 넣어주어야 합니다. 그럼 어떤 게 탄소질 재료일까요? 톱밥이나 숯가루, 재 같은 재료입니다. 이른바 목질부 재료이지요. 이 중에 리그닌이라는 탄소질 재료가 핵심인데 이유는 앞에서 말한 호기성미생물이 아주 좋아하는 유기물이기 때문이에요. 이 리그닌을 미생물이 먹고 분해하면 접착제를 만들고 이 접착제는 흙 알갱이들을 몽글몽글하게 뭉쳐줍니다. 홑알의 흙 알갱이를 떼알로 만들어주는 거죠. 떼알의 흙에는 틈새가 많습니다. 그 틈새로 공기가 들어오는 거죠. 물론 물도 들어옵니다.
이 틈에 물이 공기보다 많이 들어오면 혐기상태가 많아져 호기성미생물들이 떠납니다. 그 자리에 곰팡이나 병원성 세균이 들어오지요. 그리고 흙은 병이 드는 겁니다. 물론 공기가 더 많으면 흙은 가뭅니다. 흙에 물이 모자라면 흙 속에 있는 영양분을 작물이 제대로 먹질 못합니다.
숲 속의 흙에는 이런 탄소질 재료가 많습니다. 나무 잔가지에서부터 낙엽까지 수도 없지요. 반면 들녘엔 숲이 적어 탄소질 재료는 적고 질소질 재료는 많습니다. 아무래도 인구도 많아 인분도 많고 목축도 많이 해 축분도 많지요. 그래서 당장은 들녘의 땅에서 농사가 잘 됩니다. 탄소질 재료는 비에 의해 숲에서 떠 내려 오지요, 질소질 재료는 많은 사람의 인분, 많은 가축의 축분까지 해서 매년 풍년이 끊이질 않습니다. 그렇지만 장기적으로 가면 들녘의 땅엔 염류집적, 연작피해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기후위기에 아주 위험한 구조를 축적해갑니다. 토양의 생산력은 한계에 다다르고 기후위기로 농사가 되지 않으니 식량위기가 극에 다다릅니다.
토양에 질소질이 많지 않은 숲의 땅에선 풍년이 흔하질 않습니다. 그렇지만 흉년도 많지 않습니다. 기후위기가 와도 피해 갈 구멍이 있습니다. 흙도 잘 견뎌 작물 피해도 덜하지만, 야생의 먹거리가 풍부하기 때문입니다. 야생의 식물들은 작물보다 기후위기에 아주 강하지요. 힘이 세서가 아니라 적응을 잘 하기 때문입니다.
글을 쓴 안철환 선생은 온순환협동조합, 전통농업연구소 대표이고 경기도 안산에서 ‘산림생태텃밭 먹거리숲 농장’을 운영한다. 남은 음식물과 똥오줌, 커피 찌꺼기를 받아 직접 거름 만들기를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 토종 종자와 전통 농업 살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25년 전, 처음으로 심은 배추 씨가 3일 만에 싹 트는 걸 보고 ‘씨 안에 누가 있었구나!’ 깨닫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우리가 먹는 배추는 단순히 물질적인 먹을거리가 아니라 나와 별 차이 없는 생명이며, 그래서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먹고, 생명과 소통하고, 생명과 하나 되는 일이라고 믿는다.
쓴 책으로 《시골똥 서울똥》(2009), 《24절기와 농부의 달력》(2011), 《호미 한자루 농법》(2016), 《토종농법의 시작》(2020)이 있고, 옮긴 책으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2004)이 있다.
이 글은 전국도시농업시민협의회 홈페이지에도 연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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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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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농부 안철환의 땅 이야기 2] 들녘엔 갑(甲)이 살지만 숲엔 정령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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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녘엔 갑(甲)이 살지만 숲엔 정령이 산다
안철환(전통농업연구소 대표)
한 동안 귀농하려는 분들께 가급적 들녘보다는 숲으로 귀농하시라 했습니다. 왜냐고 물으면 농반진반으로 했던 말이지요.
인류 역사상 인간들이 꿈꾸던 유토피아는 거의 숲에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어요. 들녘의 숲이 아니라 야트막한 동산 속 숲 말이죠. 에덴동산이 그렇고 무릉도원, 샹그리라가 그렇습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수필가로 유명한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Walden, or Life in the Woods)이란 책에서 저자가 그리는 곳도 숲 속이고, 하다못해 웰컴투 동막골이란 영화에서 그리는 이상향 마을도 산 숲속에 있었습니다.
유토피아까지는 아니라도 속세를 떠나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공간들 또한 거의 들녘보다는 숲 속 전원이었습니다. 조선 시대 낙향한 유학자가 쓴 대표적인 농사 책 “산림경제(山林經濟)”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책 제목에서 그리는 곳도 들녘이 아닌 숲이었습니다. 요즘 인기있는 TV 프로그램으로 “나는 자연인이다”도 대부분 산의 숲속으로 들어간 사람의 얘기인 것을 보면 숲 속의 삶은 인류 모두의 로망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마도 인류의 조상이 숲 속에서 살다 내려와 원초적 고향인 숲으로 돌아가고픈 지향이 유전자에 새겨져 있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추상적인 얘기보다는 숲에는 흙이 살아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럼 왜 숲엔 흙이 살아있다는 걸까요? 그럼 숲이 아닌 곳의 흙은 살아있지 않다는 걸까요?
저는 살아있는 흙과 비옥한 흙을 구별하고자 합니다. 아마 비옥한 흙으로 치자면 당연히 들녘의 흙일겁니다. 특히 삼각주(델타)의 흙 곧 충적토가 그렇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나일강 삼각주,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강의 메소포타미아 유역, 인더스 강 유역, 황하 화북지방의 토양이 대표적이죠. 이른바 4대강 문명 발원지입니다. 그 외에도 인도차아나 반도의 메콩강, 미 서부평원의 미시시피강, 남미의 젓줄 아마존강이 대표적입니다. 이런 거대 문명을 일군 강 주변의 충적토양은 강 상류지역의 숲에서 영양물질들이 흘러내려와 강의 범람으로 생긴 땅들입니다. 그러니까 강 주변 비옥한 흙도 따지고 보면 숲 속 상류에서 흘러온 것입니다.
그럼 무슨 근거로 숲 속의 흙은 살아있고 강 주변 들녘의 흙은 그렇지 않다는 걸까요?
흙이 살아있으려면 하늘과 소통해야 합니다. 하늘과 소통하는 핵심은 앞 글에서 말한 바람이고 그로 인해 물과 불이 소통을 합니다. 바람이 세게 불면 물과 불은 소통하지 않고 싸우기만 합니다. 태풍이 불어 물이 불을 이기면 수재가 나고 건조한 바람이 불어 불이 물을 이기면 화재가 납니다. 그러나 흙을 기반으로 하면 물과 불은 소통합니다. 물과 불이 소통한다고 하니 그 말도 좀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살아있는 흙의 구조를 살펴보면 바위에서 부서져 나온 흙 알갱이 고상(固相)이 반을 구성하고 그 중 반의 반을 물이 액상(液相)을 이루며 또 그 만큼의 공기가 기상(氣相)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 외에 5% 이하로 아주 일부인 유기물이 존재합니다. 이런 흙을 떼알의 흙이라고 하고 입단화된 흙이라고도 합니다. 떼알이란 낱알(홑알)의 흙들이 뭉글뭉글 뭉쳐진 흙으로 특징은 틈새(공극)가 많다는 겁니다. 이 틈새가 살아있는 흙의 본 모습이고 이 틈새를 유지해 주는 게 흙 알갱이 표면에 코팅되어 있는 유기물입니다. 여기서 액상은 물이고 기상은 하늘에서 바람이 흙에 스며든 따뜻한 불입니다. 그리고 이 물과 불이 흙에서 만나 소통한 결과가 바로 유기물입니다. 그런데 이런 흙이 숲에만 있는 건 아니죠. 숲이든 들녘이든 농경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생명수의 기원
그러나 숲에는 남다른 게 있습니다. 바로 남다른 물과 불, 물과 바람, 물과 공기입니다. 우선 물을 살펴보겠습니다. 숲의 물은 어떨까요? 금방 눈치채셨겠지만 깨끗하죠. 왜 깨끗할까요? 그것은 산의 흙과 나무와 풀들이 뱉어낸 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물이 깨끗한 것은 각종 미네랄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지하 암반수가 깨끗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깨끗한 지하수는 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위험한 경우가 많지요. 지하수엔 중금속이 많기 때문입니다. 무겁기 때문이죠. 화강암이 많은 우리나라 지하수엔 철분이 많고 우라늄도 적지 않습니다. 겉으론 맑고 깨끗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지하수 말고 맑고 깨끗한 물로 증류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시겠지만 이런 물들은 겉만 깨끗하지 실제로는 위험한 물입니다.
반면 미네랄이 풍부한 물이야말로 살아있고 그래서 진짜로 깨끗한 물입니다. 이런 물이 생명을 살리고 기르기 때문입니다. 물은 하늘의 비로 시작되기 때문에 물 또한 하늘과 땅의 소통의 산물입니다. 그 하늘의 물이 제일 먼저 내려 모이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설산입니다. 만년설이죠. 굳이 설산이 아니라도 하늘의 물은 산으로 내려와 생명수로 재탄생합니다. 산에는 바로 흙이 있고 나무가 있기 때문이죠.
그 생명수가 산에서 내려오다 용출하는 곳에 에덴동산이 있고 무릉도원이 있고 샹그리라 동막골이 있습니다. 아마 페루의 마추픽추도 그런 곳일 겁니다. 우리의 전통 마을도 그 생명수가 용출하는 곳에 만들어집니다. 다만 다른 점은 산 속은 아니고 산 밑이죠. 들녘과 숲의 경계에 위치합니다. 마을을 동네라 했죠. 동은 한자로 동(洞)입니다. 골짜기죠. 동네는 같은 물을 먹는 사람들인셈입니다. 앞에서 말한 4대강 문명도 다 이런 설산이나 골이 깊은 산에서 기원했습니다. 그러나 국가권력이라는 거대 문명은 강에서 발원했을지는 몰라도 인류의 근본 문명은 산에서 시작했다고 봅니다. 종자학자로 유명한 바빌로프는 강이 아닌 계곡과 산악지대에서 생물학적, 문화적 다양성의 기원을 찾았습니다. (게피 폴 나브한 지음, 강경이 옮김 "세상의 모든 음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참조)
우리 민족의 고향이라는 백두산도 이름을 보면 원래 설산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머리가 하얀 산, 바로 백두(白頭)산, 설산이란 뜻입니다. 백두산과 같은 산이 알프스의 몸블랑입니다. 몽(Mont)은 프랑스 말로 "산"이고, 블랑(Blanc)은 "하얀 색"이라는 뜻이니 바로 백두산인 것이죠. 화산이 터져 천지가 만들어졌지만 물의 기원은 변함이 없지요.
반면 4대강 유역은 비옥합니다. 산에서 물만 발원한 게 아니라 물이 각종 영양물질을 실어오기 때문입니다. 물과 영양이 풍부해 농사가 아주 잘 됩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먹는 물로 볼 때는 깨끗한 물은 아닙니다. 강물은 농업용수로는 훌륭하나 식용수로는 적당지 않아 사람은 산의 골짜기 물을 직접 받아 먹어야 합니다. 골짜기 물이 있는 산으로 들어가던가, 그 물이 용출되는 곳, 산 밑을 찾아 우물을 파 먹든가 해야 합니다. 그곳과 멀리 떨어진 들녘에서 그 물을 먹으려면 수로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수로로 유명한 게 바로 로마의 수도교지요.
예로부터 치수정책의 핵심은 농업용수와 식용수 확보에 달려있었습니다. 비옥한 강 유역에서 발달한 거대 문명은 로마처럼 식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수도교를 설치해서 먼 산의 골짜기에 빨대를 꽂아 빨아 먹었습니다. 독점한 것이죠.
중국에선 제방을 쌓아 큰 강을 다스리고 운하를 파서 지천들을 연결해 마을 곳곳에 물을 공급했습니다. 그 일에 성공해 중국 최초의 왕조를 세운 사람이 바로 우(禹)왕입니다. 수시로 범람하는 황하의 본류를 다스리려면 제방 쌓아 막아서만 될 게 아니라 강의 지류들을 소통시켜 강물을 흐르게 함으로써 범람을 근본적으로 막는 전략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지류를 다스려 본류까지 다스렸다는 것은 농업용수와 식용수 확보 둘 다에 성공했다는 뜻입니다. 지류를 통하게 해서 식용수 확보도 원활해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임원경제지라는 백과사전을 집필한 조선 후기 유학자 서유구는 우왕보다 더 근본을 파악한 사람입니다. 본류보다 지류의 치수를 강조한 우왕의 정책을 겨우 홍수만 억제한 것으로 보고 더 근본은 밭 도랑과 밭 주변 물길 다스리는 일이라 했지요. 강의 본류가 대동맥이라면 밭 도랑은 모세혈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밭 도랑을 잘 다스리면 밭 사이에 물을 고르게 대어 흙과 물이 잘 섞이면 구름과 안개가 일어나 비가 내리고 가뭄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고 물을 잘 저장하면 홍수도 예방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에게 밭을 일구게 하는 것은 그 사람들 모두 다 하천을 관리하게 하는 것과 같다 했으니 치수의 근본이 무엇인지 깨우쳐 주었다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한 모세혈관 같은 밭 도랑과 물길이 바로 강, 하천 발원지라 할 산 중턱 숲인 것입니다.
보통 땅심(지력)이라 하면 거름 또는 유기물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서유구 선생은 거름보다 중요한 게 있으니 바로 물이라 했습니다. 아무리 땅 속에 거름이 많다 해도 물이 없으면 전혀 쓸모가 없어요. 그래서 비옥한 흙이 아니라 살아있는 흙의 관건은 바로 물에 달려 있다는 겁니다.
글을 쓴 안철환 선생은 온순환협동조합, 전통농업연구소 대표이고 경기도 안산에서 ‘산림생태텃밭 먹거리숲 농장’을 운영한다. 남은 음식물과 똥오줌, 커피 찌꺼기를 받아 직접 거름 만들기를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 토종 종자와 전통 농업 살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25년 전, 처음으로 심은 배추 씨가 3일 만에 싹 트는 걸 보고 ‘씨 안에 누가 있었구나!’ 깨닫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우리가 먹는 배추는 단순히 물질적인 먹을거리가 아니라 나와 별 차이 없는 생명이며, 그래서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먹고, 생명과 소통하고, 생명과 하나 되는 일이라고 믿는다.
쓴 책으로 《시골똥 서울똥》(2009), 《24절기와 농부의 달력》(2011), 《호미 한자루 농법》(2016), 《토종농법의 시작》(2020)이 있고, 옮긴 책으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2004)이 있다.
이 글은 전국도시농업시민협의회 홈페이지에도 연재되고 있다. 지난해 5월11일에 게재한 '흙에서 나고 흙에서 살다 흙으로 돌아가는 삶
-도시농부 안철환의 땅 이야기'에 이어 쓰여졌다. 앞으로 안철환 선생의 후속 글을 2주 간격으로 연재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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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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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농부 안철환의 땅 이야기 1] 흙에서 나고 흙에서 살다 흙으로 돌아가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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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에서 나서, 흙에서 살다, 흙으로 돌아가는 삶
안철환(전통농업연구소 대표)
흙에서 나다
하나님은 왜 인간을 흙으로 만드셨을까요? 더럽고 비만 오면 허물어질 흙으로 말이죠. 만약에 금으로 만드셨다면 평생 가난하지 않게 살 수 있고 대리석으로 만드셨다면 얼마나 멋진 모델처럼 살 수 있겠습니까? 참 이상하죠?
그렇지만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가 있을 겁니다. 금과 대리석에는 생명이 깃들어 있지 않잖아요. 반면 흙에는 무궁무진한 생명들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주의 별만큼이나 있을 미생물이 그것이고요, 그 말고도 지렁이를 비롯 작은 벌레와 두더쥐 같은 작은 동물이 흙에 의지해 살고 있습니다. 우리 몸에도 세포 수보다 더 많은 미생물이 살고 있고 나쁜 놈이긴 하지만 옛날엔 대장에 회충 같은 작은 동물도 살고 있었죠. 어쩌면 흙과 우리 몸은 비슷한 점이 의외로 많습니다. 우리 몸에 없어선 안되는 피도 흙에서 왔답니다. 바로 철이죠. 피의 주성분인 헤모글로빈이 철로 되어 있잖아요? 빨간 피의 색은 바로 산화된 철의 색깔이죠. 철은 지구 어디에나 고르게 있답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흙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은 흙에서 싹이 나는 걸 보고 떠올렸을 겁니다. 봄만 되면 길고 추운 겨울 동안 죽어 있던 생명들이 흙 틈을 비집고 올라오죠. 옛날 사람들에겐 아주 신기한 일이었을 겁니다. 사실 저도 우연히 심은 배추씨가 3일만에 땅 속을 비집고 올라와 싹을 틔우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그에 미쳐 농사를 짓게 되었어요.
씨가 싹이 트는 건 저에게 더 이상 과학이 아니라 생명의 부활이었어요. 속으로 그랬지요. 씨 안에 누가 있었구나!
사실 기독교만이 아니라 인류의 초기 종교나 신화나 전설에선 흙과 대지를 생명의 어머니로 여겼습니다. 흙으로 인간을 빚고선 하나님은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저는 그 숨을 씨앗으로 해석하지요. 흙에다 씨앗을 심은 겁니다. 그리고 봄에 싹이 올라오듯 인간(생명)이 움터 올라온 거지요.
그럼 흙이 어떻기에 수많은 생명을 품고 낳을 수 있을까요? 저는 흙 속에 물이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사막의 흙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물이 없어서입니다. 그렇지만 물이 있다고 해서 저절로 생명이 탄생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작용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하늘의 작용은 불입니다. 그렇습니다. 물과 불이 만나야 생명이 나옵니다. 어떻게 만날까요? 바로 바람입니다. 하느님의 숨이죠.
물은 아래로 향하고 불은 위로 향하려 하죠. 그러면 만날 수가 없습니다. 바람은 하늘이 불의
기운을 아래로 향하게 합니다. 그리고 땅 속의 물을 위로 끌어올리는 작용도 합니다. 과학으로 말하면 베르누이 법칙, 유체역학입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저 어릴 때는 모기약을 입으로 불었어요. 티(T)자처럼 생긴 빨대를 모기약이 든 병에다 꽂아 한쪽에서 훅~ 하고 불면 압력의 차가 생겨 병 속의 모기약이 위로 빨려지고 반대쪽 빨대 구멍으로 분사되어 나아가죠. 세게 불려고 큰 숨을 들이마시다간 모기약이 내 입으로 쳐 들어오는 낭패를 겪기도 했습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부는 바람은 땅 속으로도 들어갑니다. 태풍처럼 센 바람은 흙을 날려 버리지만 봄바람처럼 살살 부는 바람은 땅 속으로도 스며 들어 숨길을 만들고 그길 따라 물길도 만들어집니다. 그 물길 따라 드디어 땅 속에서 올라온 물은 바람 따라 내려온 하늘의 불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물과 불이 만날 때는 회오리처럼 만납니다. 그 형상을 표현한 게 태극 마크입니다. 빨간 것은 불이고 파란 것은 물입니다. 물고기처럼 머리와 꼬리가 있어 불의 머리는 땅을 향하고 물의 머리는 하늘을 향하고 있죠. 그렇게 서로 기운을 받아 불의 머리는 싹을 만들어내 다시 하늘로 향하고 물의 꼬리는 뿌리를 만들어내 다시 땅으로 향합니다.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물론 싹을 올리고 뿌리를 내리는 것은 식물이겠지요. 사람이 어떻게 식물처럼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못 움직이는 것이 식물의 본질이 아니라 늘 하늘과 땅과 소통하는 것이 식물의 본질이라고 저는 봅니다. 그러면 인간도 식물처럼 살 수 있습니다. 늘 머리는 하늘과 소통하고 발은 늘 땅과 소통하는 삶 말이죠.
이것이 저는 하느님이 인간을 흙으로 만든 이유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늘의 기운을 넣어 흙으로 빚었으니 하늘과 소통하고 흙과 소통하며 살라는 것이죠.
흙에서 살다
흙에서 났으니 흙에서 살아야겠죠? 그럼 어떻게 하는 게 흙에서 사는 걸까요? 말 그대로 흙을 밟고 살면 됩니다. 간단하죠? 그런데 그게 어려워진 게 지금의 복잡한 우리네 삶입니다. 귀농운동을 하면서 저는 그랬습니다. 귀농하기가 이민 가기보다 어렵다고요.
그렇다고 귀농해서, 땅을 샀다고 해서 흙만 밟고 살면 흙의 삶이 되는 것일까요? 흙을 밟더라도 하늘과 소통해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현재로는 그것에 가장 가까운 삶이 농사입니다. 지금은 고인이신 신영복 교수님은 농사를 공부와 같다고 했습니다. 한자 문화권인 한중일 나라 중에 공부(工夫)를 학습의 의미로 쓰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습니다. 일본에선 학습을 면강(勉强)이라는 한자로 씁니다. 중국에서 공부는 쿵푸입니다. 무예죠. 단련한다는 의미에서는 상통합니다. 공부(工夫) 글자의 상형은 대장간의 모루(工) 위에 불로 달군 쇠덩이를 대장장이(夫)가 망치로 두드리는 모습입니다. 두드려 단련해서 목적한 모양을 이루는 것이니 공부의 뜻 답죠?
그런데 왜 농사를 공부와 같은 일이라 했을까요? 단련해서 목적을 이루는 뜻이 농사에도 있다는 걸까요? 신영복 교수님의 또 다른 설명을 이어가보겠습니다. 교수님은 공부를 머리에서 시작해 가슴을 거쳐 발로 가는 여행이라 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보고 공(工)의 뜻을 딱 떠올렸습니다. 공(工) 글자에서 위의 일(一)자는 하늘입니다. 머리와 맞닿아있지요. 머리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하늘의 뜻을 말합니다. 어떤 면에선 이론이자 말씀(Logos, 道)입니다. 가슴은 곤(丨)으로 사람이자 따뜻한 열정이며 실천입니다. 이론은 따뜻한 마음으로 실천해야 하는 겁니다. 발은 공의 아래에 있는 일(一)자로 땅이자 사람이 발 딛고 있는 현실을 뜻합니다. 하늘의 뜻이 사람의 실천을 통해 현실화되는 것입니다. 흙의 입장에서 보면 하늘의 뜻이 농부의 실천을 통해 흙에서 구현되는 것입니다. 비로소 흙의 삶이 하늘의 뜻과 만나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하늘엔 길이 있고 땅엔 흐름이 있습니다. 하늘의 길은 도(道)입니다. 도는 관념적인 게 아닙니다. 태양의 길은 황도이고 달의 길은 백도이며 지구의 길은 적도입니다. 덧붙여 목성을 비롯한 태양계 오행성의 길이 있으며 우주 전체의 별자리들도 길이 있지요.
땅의 흐름은 물과 바람입니다. 하늘의 길처럼 정해져 있지 않지만 흐름이 있고 이치가 있습니다. 천문지리(天文地理)라고 하죠. 별들의 길이 무늬(文)를 만들고 땅의 흐름이 이치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늘의 도가 땅의 흐름과 만나 비로소 대지에 우주만큼 무수한 생명의 세계를 열게 됩니다.
흙의 생명의 세계, 곧 토양 미생물의 세계는 인간이 아직도 5% 정도밖에 밝혀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주만큼이나 미지의 세계입니다. 특히 살아있는 흙에는 무궁무진한 생명의 세계입니다.
흙의 미생물 중에 흙을 살아있는 생명의 세계로 만드는 것으로 방선균이라는 게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항생제는 바로 방선균이 내뿜는 냄새에서 추출한 것입니다. 그러나 화학적으로 만든 항생제는 부작용이 있지만 방선균의 냄새에는 부작용이 없지요. 더구나 방선균의 냄새에는 항우울제 작용이 있다니 행복약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 흙에서만 살아도 병원이 필요없고 스트레스가 발 붙일 곳이 없습니다. 에덴 동산, 유토피아, 샹그릴라, 무릉도원이 별거 아닌거죠.
흙이 이렇게 살아있으려면 하늘과 소통해야 한다고 했죠. 그 하늘이 알 수 없는 도(道)라고 하면 황당하지요. 하늘과 소통하는 구체적인 모습은 탄소와 질소의 순환입니다. 날씨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게 크게 보면 기후입니다. 날씨는 물과 바람의 작용입니다. 기후와 날씨는 태양과 달과 별들의 영향을 받지요.
아무튼 오늘날 기후위기는 바로 이 탄소와 질소의 순환에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땅으로 가고 싶어하는 탄소는 하늘에 정체되어 있고 하늘로 돌아가야 할 질소는 땅에 과잉되어 흙과 물을 오염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질소는 탄소가 땅으로 돌아가는 데 도움을 줍니다. 미생물이 지표상의 탄소들을 땅으로 돌아가게 하는 주역인데 미생물의 먹이이자 에너지인 질소가 꼭 있어야 합니다. 또 식물은 질소가 주성분인 엽록소를 통해 대기의 이산화탄소를 고정해 뿌리에 저장을 해둡니다. 바로 광합성입니다.
땅 속에서 유기물로 잘 저장된 탄소는 질소를 가둬두는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식물이 먹을만큼 내어주어 질소의 순환을 돕지요. 과잉된 질소가 그대로 용출되어 물을 오염시키고 땅을 망가뜨리는 일을 예방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공(工)의 뜻을 해석할 때 일방통행만 얘기했습니다. 하늘의 뜻이 땅으로 향하는 것만 말한 거죠. 사실 반대방향도 일어납니다. 땅의 좋은 기운이 하늘을 이롭게 할 수도 있고 나쁜 기운이 하늘을 노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기후위기는 후자에 속한다 할 수 있겠죠.
그럼 어떻게 하면 하늘을 이롭게 하고 어떻게 하면 하늘을 노하게 할까요?
바로 앞에서 흙의 삶을 농사짓는 일이라 했지요. 그런데 사실 지금의 기후위기와 흙의 삶을 왜곡시킨 원조는 바로 농사입니다. 농사로부터 잉여곡식이 생기니 소유와 독점이 생기고 빈자와 부자가 생기고 계급과 국가가 생기고 급기야 전쟁이 발발하기까지 했어요. 그 뿐입니까? 붙박이 삶으로 같은 땅을 지속적으로 수탈하고 숲을 파괴해 자연환경의 면역력이 감퇴하여 역병이 퍼집니다. 기후위기 같은 재앙이 오면 더욱 위기관리 능력이 고갈되어 피해는 급증합니다. 사실 농사가 아니더라도 기후위기는 주기적으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빙하기 소빙하기 간빙기 온난기 등 기후는 항상 변화합니다. 농사의 삶이 기후 변화에 대응력을 떨어뜨리고 기후위기를 더 부추기는 것이죠.
인류는 농경사회로 들어서면서 몇 가지 삶의 중요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채소와 과일, 견과류 중심의 먹을거리에서 곡물 중심의 먹을거리로 변화한 게 제일 큰 변화입니다. 사실 채집사회에서 농경사회로 들어선 중심엔 곡물이 있었습니다. 인류가 농사짓기 시작했다는 것은 곡물농사를 짓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곡물 중심의 먹거리 변화는 먹거리 다양성이 줄었다는 뜻이고 미네랄 섭취는 줄고 단백질과 탄수화물 섭취는 증가했다는 뜻이 됩니다. 에너지 섭취는 증가했을지 모르지만 면역력은 분명 감퇴되었을 겁니다. 역병이 농경의 산물이라는 근거입니다. 붙박이로 몰려 사는 삶이 더 역병을 부추겼을 겁니다.
곡물 중심의 농사는 필연적으로 단작(광작)과 연작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더욱 필연적으로 토양의 침탈과 숲의 파괴로 이어집니다. 단작으로 인한 식량의 증대는 인구수의 급격한 증가로 이어지지요. 단작 농사는 고대엔 노예제를 낳고 현대에 와서는 자본주의를 낳고, 고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전쟁을 일상화했습니다. 주기적으로 오는 기후위기는 더욱 폭발력이 커지고 주기도 빨라집니다. 인간이 땅을 망가뜨려 하늘을 더욱 노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농사를 잘 지으면 땅을 살릴 수도 있고 그러면 하늘을 이롭게 할 수도 있다고 믿습니다. 이런 농사는 앞의 농사와 다릅니다. 단작과 연작이 아닌 혼작과 윤작을 짓고, 혼작과 윤작은 숲에도 적용되어 숲을 파괴하지 않고 숲과 공생하며 곡식농사만 하는 게 아닌 채소와 과일농사도 짓습니다. 뿐만아니라 농사만 짓는 게 아니라 구석기 채집의 전통을 이어갔습니다. 들에선 냉이와 쑥을 캐고 산에선 취와 곤드레를 캡니다. 갯벌에선 조개를 캐고요.
그런 사회가 얼마나 되겠는가? 있어도 매우 미미한 것에 불과할 것이라 폄하할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주류 문명사회는 분명 단작 중심의 농경을 했지만 지구 전체로 보면 소수였습니다. 대부분의 인류는 적어도 근대까지 흙의 삶을 살았습니다. 소수의 문명사회가 일찍이 고대부터 문명을 발달시켰다지만 그 말을 뒤집 보면 일찍부터 전쟁을 하고 숲을 파괴하며 대지를 침탈하고 선량한 백성과 소중한 뭇 생명을 수탈해 왔다는 뜻입니다. 그런 나라들 중심으로 역사가 쓰여졌습니다. 그러니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그만큼 평화롭고 소박한 흙의 삶을 살아 온 것입니다. 역사로 기록할 것도 없고 기록할 필요도 없었겠지요. 소위 근대화가 늦었거나 실패하여 소위 빈곤 국가와 지역들입니다. 그렇지만 그 면적은 지구 대부분에 걸쳐 있었어요. 아프리카 원주민, 북남미 인디언, 호주의 에보리진들 뉴질랜드의 마오이족 , 남아시아 및 남태평양 폴리네시안, 북극의 이누이트인 및 시베리아 냉대지역 원주민들이 그들입니다.
그 중 특히 남미 아마존 숲을 지켜 온 원주민 얘기가 감동적입니다. 열대 우림지역의 흙이 비옥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비가 지력을 빼앗아 강 하류 온대지방으로 옮겨 놓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부자 나라들이 이 지역에 자리하고 있는 것도 자기들이 잘 나서 부자가 된 게 아니라 이들 열대 지역 덕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런데 아마존 숲은 좀 달랐습니다. 생태학자들이 아마존 땅의 지력을 조사해보니 의외의 비옥한 땅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도 어쩌다 생긴 특이한 지역이 아니라 자그마치 아마존 전체 중 약 12%에 육박하는 거대한 규모의 면적이었습니다. 처음엔 미스테리라고만 봤다가 자세히 조사해 보니 그것은 다름아닌 농경지라는 사실을 알고는 더욱 놀랐죠. 겉으론 보기엔 농경지가 아니었어요. 그냥 숲이나 다름없었죠. 그런데 자세히 조사해보니 숲을 파괴하지 않고 숲에 맞게 농사지은 것입니다. 당연히 농부는 원주민이었습니다. 우리식으로 하면 화전입니다.
화전은 숲의 파괴 현장이 아닙니다. 화전을 일구어 2~3년 농사를 지으면 다시 지력이 살아날 때까지 방치합니다. 나무에 불을 질렀기 때문에 숲을 파괴한 것이라 볼 수 있지만 넓게 보면 그 공간은 숲의 완충지대입니다. 숲이 너무 우거지면 빛도 들어가지 않아 숲 속은 생명이 살기 힘듭니다. 산불에도 위험하고요. 그래서 저는 인간이 이용하지 않아 우거진 숲을 비만병 걸린 숲이라 얘기합니다.
그런데 아마존 숲을 보전하기 위해 원주민을 내쫓고 있습니다. 그리곤 대규모의 단작 농장을 만들기 위해 숲을 파괴합니다. 하늘이 노하지 않을 수 없지요.
참으로 개탄스런 일이지만 그래도 아직 우리 주변엔 이런 지역과 사람들이 그 명맥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게 희망입니다. 우리나라도 비교적 몇십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살아있는 흙의 문화와 삶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급속히 사라지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희망의 불씨는 남아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흙의 삶이고 그것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 살펴보겠습니다.
앞에서 말한 혼작 윤작의 농부, 곧 소농(小農)의 삶입니다. 그리고 이 소농은 신석기 농경의 산물인 면도 있지만 구석기 채집문화의 연속적 발전 형태인 면에 저는 더 주목합니다. 그런데 귀농귀촌하기가 이민가기보다 어렵다고 푸념했듯이 도시민이 당장 소농의 삶을 선택하기는 만만치 않습니다. 잘못하면 넓디넓은 태평양 바다에 오줌 한 방울 더하는 정도에 불과할 우려가 있지요.
저는 그래서 도시농부의 삶을 권합니다. 사실 흙의 삶은 도시가 더 절실합니다. 서울시의 경우 유엔이 권장하는 콘크리트 피복율 20%를 넘어 50%나 된답니다. 그것도 외곽을 둘러싼 산들을 제외하면 피복율이 80% 넘는다고 합니다. 도시의 흙을 살리는 일은 기후위기 시대에 절실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힘든 귀농귀촌만큼은 아니어도 도시농부의 삶도 만만치는 않습니다, 도시엔 땅도 부족하거니와 콘크리트를 거둬내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도시농업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먹거리 운동입니다. 참 먹거리를 찾는 운동은 흙의 삶을 복원하는 간접적인 운동이 될 겁니다. 아마 도시민이 가장 접근하기 쉬운 운동이 될 것이고 나아가 흙을 복원하는 강력한 운동이 될 수 있지요. 그럼 참 먹거리는 무엇을 말할까요?
하늘의 뜻을 담아 대지에 구현하고 그렇게 살린 흙은 다시 하늘을 이롭게 하는 먹거리입니다, 이런 먹거리에 가장 근접한 것은 소농의 먹거리이고 로컬푸드, 곧 지역먹거리이며 토종 먹거리이자 친환경 먹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용적으론 육식을 최소화하고 채식, 그것도 재배한 채소 외에 야생에서 절로 자라는 거친 자연산 채소들, 밥은 백미를 지양하고 깎지 않은 곡식들이 그나마 흙을 덜 수탈한 먹거리들이라 봅니다.
앞에서 공부를 정의할 때 신영복 교수의 얘기를 소개했죠. 그 중 마지막으로 소개할 게 있는데 아주 놀라운 얘깁니다. 바로 달팽이도 공부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공부는 공자님 같이 머리 좋은 군자(엘리트)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들의 존재 형식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달팽이도 공부한다고 역설한 것이죠.
어느 날 저희 농장 옆의 산에서 하루종일 망개버섯을 쳐다보며 면벽수도하는 두꺼비를 발견했습니다. 아침 9시 쯤 처음 발견한 분이 그 때부터 제게 보여준 오후 4시까지 꼼짝않고 그러고 있었답니다. 아는 곤충박사에게 사진을 보냈더니 망개버섯에 자기가 먹을 곤충이 내려 앉기를 기다리는 중이랍니다. 그래서 알게 되었습니다. 달팽이도 공부한다는 말을요. 두꺼비도 하루종일 공부하고 있던 겁니다. 먹거리를 얻기 위한 인내 과정이 공부라는 거지요. 어떻게 보면 공부의 시작은 먹거리 공부이고 공부의 완성도 먹거리 공부일 겁니다.
귀농하지 않고 도시농부도 아닌 그냥 도시의 소비자일지라도 한계는 있겠지만 흙의 삶을 간접적으로 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바로 먹거리 공부입니다. 흙에서 나오고 흙을 살리며 결국 흙으로 돌아갈 먹거리를 먹는 일일 겁니다.
흙으로 돌아가다
죽으면 다 흙으로 돌아간다고 하지요.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흙으로 돌아가 좋은 거름이 되어야 할 몸이 에너지를 소모해 태워져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마니 말이죠.
저는 웬만하면 매장하기를 권합니다. 거름이 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거죠. 물론 모든 매장이 다 흙으로 돌아가는 좋은 방식이라 보진 않습니다. 저는 제일 좋은 매장 형태는 밭에다 모시는 것이라 봅니다. 묘비도 필요없고 돌로 성역화할 일도 없습니다.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만 남아있을 봉분이면 충분하죠. 결국 산소자리는 다시 밭으로 완벽히 돌아갑니다.
요즘은 너무 죽음을 멀리하는 문화가 자리잡았습니다. 원래는 늘 죽음이 우리 옆에 있었지요. 그래야 삶이 경건하고 신중하며 소중해집니다. 죽음은 피할 수가 없지요. 그렇다면 죽음을 삶의 한 과정으로 이해하고 삶은 죽음으로 가는 여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쩌면 삶도 죽음의 한 과정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태어나고 늘 죽는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태어나고 밤에 죽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또 태어나는 겁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이 이걸 말하는 것이라 저는 봅니다.
웰 빙(well-being)을 주 이슈로 퍼진 친환경유기농 운동이 저는 늘 아쉬웠습니다. 거기엔 흙이 없어요. 내 건강에 좋은 것인가 아닌가만 있죠. 이젠 웰다잉(well-dying)을 주제로 했으면 합니다. 단지 편안한 죽음이 아닙니다.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을 말하는 거죠.
먼저 웰빙에서 말하는 건강을 살펴보죠. 건강을 정의한다면 아프지 않은 상태, 에너지가 넘치는 상태, 늙어 회춘하는 능력 등을 말할 겁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정의하지 않습니다. 건강이란 나이에 따라 변화하는 몸과 마음에 적응하는 능력이라고 저는 정의합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늘 아픕니다. 아프지 않으면 로봇이죠. 에너지는 젊은 한 때 넘치는 거지 늙어서도 넘쳐 늦둥이 나을 정도로 회춘한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일 겁니다. 그래서 아프지 않은 게 건강한 게 아니라 아픈 것에 적응하는 것이 건강한 것입니다. 이것이 깊어지면 죽음에도 적응할 수 있을 겁니다.
늙는다는 것도 추한 일이 아닙니다. 토종 구하러 시골 구석을 돌아다니는데 어느 마을에 갔더니 늙은호박을 익은호박이라고 부르는 걸 봤어요,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이었지요. 늙는다는 것은 점점 흙과 하나되는 과정일 때 익는 과정이라 생각해봅니다.
콘크리트에 사느라 흙과 멀어진 늙은이의 몸에서 나는 냄새는 역합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흙의 무수한 항생 작용은 늙은이의 냄새를 구수한 익은 냄새로 바꿔줍니다. 옛날엔 메주를 띄울 때 가장 따뜻한 방에 두었습니다. 그 방엔 그 집의 제일 어른이 주무시죠. 메주 띄워주는 고초균(바실러스)은 노인의 냄새를 중화시켜주고 노인의 냄새는 메주를 더욱 구수하게 익게 해 줍니다. 구들방 데우는 장작 태우는 연기 냄새도 노인의 냄새를 중화시켜줍니다. 살아있는 흙에서 나는 건강한 먹거리들은 노인의 면역력을 높여 주어 악취의 역한 냄새를 줄여줍니다. 그래서 저는 늙는다는 건 썩는 게 아니라 발효되는 것이라 정의하고자 합니다. 발효되는 삶은 무수한 발효 미생물들과 함께 살 때 가능한 것이겠죠.
이렇게 점점 흙과 가까워지는 삶이 늙는 과정이라면 결국 흙과 하나되는 일이 자연스러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해봅니다. 죽음이 전혀 무서울 필요 없는, 그 또한 삶의 한 과정이라는 걸 도 닦지 않아도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늘 태어나듯이 늘 죽는 실천이 있습니다. 바로 거름 만드는 일입니다. 무슨 거름일까요? 내 똥과 오줌입니다. 똥과 오줌은 또 다른 나의 분신입니다. 나를 어제 먹은 음식이라고 정의하는 말이 있지요. 그 음식의 또 다른 모습이 똥 오줌이니 나의 또 다른 분신이 되는 겁니다. 그 분신을 어쩌다 외출 나갔을 때 불가피하게 수세식 변기에다 누기라도 하면 영 찝찝합니다. 나의 분신이 블랙홀 같은 물 구멍에 휘리릭 빨려들어가 어딘가에서 자연을 더럽힐 것 생각하니 불편하지 않을 수 없지요. 웬만하면 집에서 거름 만드는 뒷간에 누려고 꽤나 애쓰는 이유입니다. 밥은 나가 먹어도 똥은 집에 와 누라는 옛말이 심상치 않게 느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겁니다.
이렇게 똥을 정성껏 발효시켜 땅에 묻는 과정이 나를 매일 땅에 묻는 과정입니다. 늘 죽음을 간접적으로 실천하는 일인 것이죠. 그리고 열심히 내 똥을 전혀 냄새나지 않고 오히려 풋풋한 흙냄새 나게 발효시킨 후 작물을 키워 다시 내가 먹게 되니 이는 내가 부활하는 과정입니다.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자연스레 순환하는 모습입니다. 흙의 삶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글을 쓴 안철환 선생은 온순환협동조합, 전통농업연구소 대표이고 경기도 안산에서 ‘산림생태텃밭 먹거리숲 농장’을 운영한다. 남은 음식물과 똥오줌, 커피 찌꺼기를 받아 직접 거름 만들기를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 토종 종자와 전통 농업 살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25년 전, 처음으로 심은 배추 씨가 3일 만에 싹 트는 걸 보고 ‘씨 안에 누가 있었구나!’ 깨닫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우리가 먹는 배추는 단순히 물질적인 먹을거리가 아니라 나와 별 차이 없는 생명이며, 그래서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먹고, 생명과 소통하고, 생명과 하나 되는 일이라고 믿는다.쓴 책으로 《시골똥 서울똥》(2009), 《24절기와 농부의 달력》(2011), 《호미 한자루 농법》(2016), 《토종농법의 시작》(2020)이 있고, 옮긴 책으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2004)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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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