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3-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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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지리산 편지 기사

  • 2026 지리산에서 보내는 편지3-진눈깨비 속 봄 편지
    ■ 2026 지리산에서 보내는 편지 3 진눈깨비 속 봄 편지 어제까지 3일 동안 지리산 함양의 산들이 타는 동안 맘이 편치 않았다. 몇몇 지인들이 가까운 산자락에 살고 있어서 더 그랬다. 다행히 오늘부터 비가 온다고 해서 조금 안심은 되었는데 아침부터 반가운 빗님이 오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늘은 『지리산人』 편집위원들이 한 달에 한 번 산행하는 날이어서 망설였는데 모두 비를 맞으며 그냥 산행을 하기로 했다. 산불을 잡아주는 고마운 비라는 생각과 봄의 기운을 흠뻑 몰아줄 비라는 걸 모두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느낌을 몸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봄을 이루려는 모든 나무며 사물들의 빛깔을 통해 공감의 징후를 느끼고 싶었다. 이른바 제러미 리프킨이 말한 공감능력,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이 맞다면 이 공감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봄의 시작으로 넘어가는 경계의 지점에서 모든 생명이 서로 변화를 공감하며 연대하는 것은 서로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고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서로에 도움을 주고 싶은 것이다. 리프킨은 이런 공감의식을 갖게 되고 확장하는 데는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만물 모두의 안에 존재하는 신성을 이해하게 해준다고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 삶은 이런 경외와 신성은커녕, 생명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과 함께 동등하다는 인식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어쨌거나 나는 모든 생명이 하나로 연결되어 봄이라고 불리는 이 신비하고 거대한 우주 자연의 자연스럽고 타당한 변화에 모두가 연결되어 집중하는 그 공감의 시간과 현장을 생생하게 느끼고 싶었다. 나 자신(개체의식)도 모든 타자(전체의식)에 스며들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스스로의 공감능력을 검증하고 싶었다. 비옷을 입고 우산을 쓰고 산을 오르니 비는 점차 진눈깨비가 되었다. 그래도 검게 마른 가지들이 촉촉해지면서 움을 틔우는 미소를 느낄 수 있었다. 겨우내 얼어붙은 폭포수도 개울물처럼 졸졸 흐르듯 수직으로 녹아내리며 목소리를 틔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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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01
  • 2026 지리산에서 보내는 편지 2 - 하늘은 온통 푸른 색
    ■ 2026 지리산에서 보내는 편지 2 - 박두규 고등학교 때, 『글내』 라는 동인지를 만들며 함께 문학을 했던 친구 중 이재형이라고 있다. 문학적 감수성이 나보다 한 수 위였던 이 친구의 글을 부러워하며 시를 썼던 기억이 난다. 그는 대학생 시절(한국외대 불문과)부터 번역을 하며 졸업 후에도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간행하는 대부분의 프랑스 소설들을 번역해왔다. 그리고 결국은 프랑스로 넘어가 현재는 파리에 살고 있다. 그가 요번에 현재 프랑스에서 가장 성공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는 멜리사 다 코스타의 작품을 번역하였다. 『하늘은 온통 푸른색 Tout le bleu du ciel』이라는 제목의 이 소설은 프랑스에서 1백만 부 이상 팔린 책이라고 한다. 나는 다 코스타라는 작가도 모르고 그의 소설도 읽어보지 않았지만 아래의 이재형이 올린 글을 읽고 이 작품은 요즘 내가 삶의 화두로 생각하고 있는 ‘존재의 새로움, 새롭게 살기’에 어떤 영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끝에서 시작되는 삶을 위하여 이재형 1. 모든 끝은 사실 시작이었다. 우리는 흔히 ‘마지막’이라는 단어 앞에서 움츠러든다. 마치 그것을 인정하는 일 자체가 패배나 단념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멜리사 다 코스타의 소설 『하늘은 온통 푸른색』은 이 단어를 뒤집는다. 이 책은 끝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독자가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쯤 깨닫는 것은 이것이다. 끝은 종착지가 아니라, 삶이 비로소 자기 자신의 속도로 걸어가기 시작하는 문턱이라는 사실. 에밀, 서른 살의 젊은 남자는 치명적인 병을 진단받는다. 인생을 다시 설계할 시간을 허락받지 못한 채, 그는 조용하게 사라질 준비를 하는 대신, 뜻밖의 선택을 한다. 그는 광고를 하나 올린다. “중고 캠핑카 동행자 구함. 긴 여행. 목적 없음. 조건: 지나치게 말이 많지 않을 것.” 세상에 둘도 없는 엉뚱한 제안이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대신, 그는 마지막 시간에 ‘여정’을 입히기로 한다. 그리고 그 광고에 응답하는 한 여자, 조안. 두 사람은 서로의 과거를 절대로 묻지 않겠다는 약속 아래 하나의 삶을 함께 굴려 나가기 시작한다. 이 책은 이 만남을 통해 삶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는다. 또한 삶의 마지막에서 바라본 세계가 얼마나 새롭고, 얼마나 넓고, 얼마나 맑은 푸른색을 띠는지 보여준다. 이 에세이는 바로 그 푸른색에 대한 이야기이다. 끝이 시작이 되는 그 지점에서, 인간이 비로소 자기 삶을 회복해 가는 순간들에 대하여. 2. 인간은 언제 진짜로 ‘살기’ 시작하는가? 『하늘은 온통 푸른색』의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이 질문을 회피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살아 있는 우리가, 언제부터 진짜로 살기 시작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질문을 미루며 살아간다. 우리는 계획과 의무, 사회적 기대 속에서 ‘살아가는 척’을 하다가 어느 순간 나이를 먹는다. 그리고 멀리 보내고 싶었던 감정이나 회피했던 상처들은, 침묵 속에서 슬그머니 무게를 늘려 우리의 영혼을 서서히 잠식한다. 그러나 병이라는 돌발적 통지가 남긴 폭력성 앞에서, 인간은 종종 다른 눈을 얻게 된다. 에밀이 선고받은 병은 다른 말로 하면, 다시 살아가기 위한 유예된 시간이었다. 과연 삶을 바꾸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멜리사 다 코스타는 이렇게 답한다. 삶을 바꾸는 힘은 ‘끝에서 바라본 세계의 시선’에서 온다. 죽음을 아는 사람은 비로소 삶을 본다. 잃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자신이 가진 것의 진짜 명징함을 깨닫는다. 에밀은 죽음을 향해 떠나는 동시에 삶을 향해 떠난다. 그가 캠핑카에서 매일 마주하는 풍경들은, 벼락처럼 의미가 생겨난다. 한 줄기의 빛, 바람의 자잘한 떨림, 나무의 냄새, 모닥불의 소리, 서로에게 말을 아끼는 낯선 사람의 동행. 이 소설은 거창한 사건 대신, 생의 가장 미세하고 사소한 것들이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문학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가 매일 지나치던 세계는, 사실은 아직 단 한 번도 온전히 바라본 적 없는 순수한 푸른색이 아니었을까? 3. 멜리사 다 코스타의 문장은 감정이 아니라 ‘체온’을 갖고 있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언어가 감정을 전달한다는 사실을 넘어, 언어가 체온을 갖는 순간을 경험한다. 멜리사 다 코스타의 문체는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다. 그녀의 문장은 절제되어 있지만, 그 절제는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채워져 있다. 잔잔함과 고요함으로 밀려오는 침묵의 문장들. 폭발적인 묘사가 아닌, 거의 속삭임에 가까운 사유의 파동. 독자는 이야기와 함께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숨결을 함께 쉰다. 문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 소설의 강점은 바로 이 미묘한 정서적 진동이다. 그녀는 서정성을 전략적으로 사용한다. 풍경은 사건을 설명하기 위한 장식이 아니라, 인물의 내면을 비추는 구조적 장치다. 기억, 후회, 상실, 용기, 그리고 다시 살아갈 힘. 모든 것은 자연과의 동행 안에서, 풍경의 움직임에 맞춰 천천히 밝히고 또 천천히 치유한다. 독자로 하여금 이렇게 느끼도록 만든다. “나는 지금 누군가의 영혼이 스스로 정화되는 과정을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구나.” 이것이 멜리사 다 코스타 문장의 고유한 힘이다. 4. 두 개의 상처, 두 개의 비밀, 그리고 하나의 길 에밀의 병만이 이 소설의 중심 축은 아니다. 그와 동행하는 조안 역시 깊고 어두운 곳에 자신의 과거를 묻어둔 사람이다. 이 소설이 단순한 ‘치유’나 ‘여행’ 이야기를 넘어서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조안은 에밀의 여행에 합류하지만, 그녀 역시 무언가로부터 도망쳐 나온 사람이다. 그들은 서로의 비밀을 묻지 않는다. 묻지 않는다는 약속이 서로를 가볍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묻지 않는다는 것이 잊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 코스타는 이 아이러니를 천천히, 그러나 매우 아름답게 풀어낸다. 두 사람은 서로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은 자신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장소’를 서로에게 제공한다. 이것은 자기 구원의 이야기다.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돕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옆에서 말없이 존재해준다는 사실이 어떻게 한 개인을 구원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결국, 이 두 인물의 여정은 죽음과 삶, 상처와 회복, 도망과 귀환, 상실과 선택의 문제를 모두 품어낸다. 그리고 그 끝에서, 문학 독자는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과연 누구의 손을 잡아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아니, 누가 우리의 곁을 묵묵히 지켜만 주어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는가?’ 5. 풍경이라는 문학, 자연이 인물의 내면을 대신 말하는 순간들 『하늘은 온통 푸른색』의 가장 빼어난 문학적 특징은 풍경과 인물 내면의 동조율이다. 이 소설에서 풍경은 단지 배경이 아니다. 그것은 대사의 다른 형태이며, 침묵의 서술자다. 숲의 색이 변하는 순간 인물의 감정도 달라진다. 바람이 갑자기 거세지는 순간, 인물의 갈등도 더 깊어진다. 하늘의 푸른색이 짙어지면, 생에 대한 의지가 되살아난다. 이 모든 연결은 인위적이지 않다. 소설은 풍경을 통해 인물의 내면을 ‘보여주기’만 할 뿐, ‘설명’하지 않는다. 그 절제는 오히려 독자의 감각을 확장시킨다. 특히 조용한 장면들—나무 사이로 비가 스며드는 소리, 모닥불 앞에서의 침묵, 도로 위 캠핑카의 흔들림, 안개가 걷히는 새벽의 산등성이—이런 묘사들은 인물의 말을 대신해 서사적 결정을 내린다. 문학적 쾌감은 바로 이 지점에서 폭발한다. 보이지 않는 감정이 보이는 풍경 속에 녹아들어, 독자의 눈앞에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는 순간. 멜리사 다 코스타는 풍경 묘사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마음도 자연처럼 회복된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러나 반드시.” 6. 이 책이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깊은 질문 소설을 읽고 난 뒤 남는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삶의 핵심을 향한 질문이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무엇을 위해 떠나는가. 삶의 의미는 어디에서 다시 태어나는가. 『하늘은 온통 푸른색』은 거창한 해답을 내놓지 않는다. 대신 삶의 한복판에서 작고 사소한 것들을 건져 올린다. 한 사람의 미소, 조용한 아침 공기, 함께 타는 불빛, 누군가가 말없이 내 곁에 있는 시간. 인생은 사실 거대한 목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단지 천천히 살아가는 법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제목처럼, 인생은 어느 날 문득 온통 푸른색으로 확장될 수 있다. 그것을 바라볼 여유를 허락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인지도 모른다. 7. 이 소설을 왜 읽어야 하는가 — 문학 독자를 위한 마지막 권유 문학을 읽는 사람은 단순한 ‘이야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너머에 있는 세계의 구조, 감정의 층위, 삶의 깊이를 탐색한다. 『하늘은 온통 푸른색』은 그런 독자를 위한 작품이다. 이 책은 인간 존재의 본질, 상실을 대하는 태도, 삶이 자기 자신을 회복하는 과정,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서야 비로소 찾아오는 진실된 시선을 탐구한다. 문학적 완성도, 서정성, 구조적 탄탄함, 정서적 깊이. 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룬 작품이다. 읽는 동안 우리는 여행자가 된다. 에밀과 조안이 보는 풍경을 함께 보고, 그들의 침묵을 함께 들으며, 세상의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삶을 함께 느낀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독자는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하늘은 언제나 우리 위에 있었다. 우리가 고개를 들지 않았을 뿐.’ 글쓴이 : 박두규 시인, 지리산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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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15
  • 지리산에서 보내는 편지 1
    ■ 2026 지리산에서 보내는 편지 1 * 2026 병오년 새해부터 이곳에서 새롭게 편지를 쓰려고 한다. 지리산 자락에 몸 붙이고 살면서 그 입은 은혜가 크니, 무엇이라도 좀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무슨 대단한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어 몸으로 품팔아 갚기는 어려운 처지이니 편지라도 써서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스스로 달래려는 수작인 것이다. *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구례인데 내 고향은 아니지만 아버지의 고향이다. 나는 전북 임실에서 태어나 전주에서 자랐지만, 결혼과 함께 내려와 지금까지 전남 사람으로 살고 있다. 그리고 고흥, 구례, 순천, 보성 등을 전전하다 은퇴하고 지금은 구례의 섬진강 하류 두텁나루숲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구례에서 보낸 세월이 20여 년이고 두 아이의 고향이 구례이다. 그리고 구례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뼈를 묻을 곳도 구례이니 나는 구례 사람이 분명하다. * 구례에 살며 젊은 날에는 주로 지리산을 오르내렸다. 시름에 겨워 힘든 날에도 산은 늘 내 곁에 있어 주었고 먼저 말을 걸어왔고 묻지 않아도 대답해 주었다. 친구처럼 스승처럼 어머니처럼 산은 늘 그렇게 나를 살아 주었다. 그러다 나이가 들며 두텁나루숲에 거처를 마련하면서 강을 바라보는 날이 많아졌다. 구례를 사는 일은 지리산과 섬진강을 사는 일이기도 해서, 나는 분에 넘치는 이 고마움을 어떻게라도 보답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처음의 문을 이렇게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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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29
  • 지리산 동짓날 이야기 잔치
    지리산 동짓날 이야기 잔치 동짓날, 지리산 자락에 사는 활동가들이 모였다.. 지리산권의 전체 활동가들로 1년에 하지와 동짓날, 두 번 만난다.. 20대부터 70대까지 나이에 관계없이 모여 동지팥죽을 끓여 먹고 노래도 부르고 놀면서 이야기잔치마당을 연다.. 도시 사람들은 관심이 1도 없을 이야기를 3시간 동안 진지하게 말하고 또 듣는다..케이블카 대책위원회, 양수댐 대책위원회, 생수난개발 대책위원회, 골프장 대책위원회..등 무슨 세워야 할 대책이 이리도 많은지.. 그만큼 지리산은 여기저기 많이 아프다.. 그래서 우리가 내건 슬로건은 ..지리산을 그대로..이다.. 우리가 살면서 어쩌면 가장 많이 하는 말이..제발 나 좀 그냥 내버려 둬!..가 아닐까? 이 모임에 온 활동가라는 사람들은 사실 지리산 자락에 둥지를 틀고 오롯이 자신을 살고 싶은 사람들이기도 하다.. 어쩌면 ..지리산을(나를) 그대로..는 자신들 존재의 슬로건이기도 하다..지리산을 사랑하고 그런 自然스러운 삶을 살며 대자유를 꿈꾸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지리산 ..행사장은 구례의 산책 도서관.. 산 보고 책 보고 산,책.. 완성 된 팥죽.. 20대부터 70대까지 어울려 노래하고 이야기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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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23
  • [지리산편지] 고마움은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고마움은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글의 제목은『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라는 책 제목의 패러디다. 이 책은 36년 옥살이를 한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 선생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만델라가 27년 옥살이 하고 대통령이 되었을 때 아직도 대한민국 교도소에는 30년이 넘은 장기수들이 수두룩하였고 선생은 그 중의 한 분이셨다. 하지만 나는 허영철 선생을 민족의 현대사를 정면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역사의 증인으로서보다 인간이라는 종(種)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가를 보여준 한 사람으로, 또는 삶 속에서 ‘고마움’이란 진정 무엇인가를 알려준 스승으로, 내 마음 속에는 그렇게 남아 있다. 오래 전 일이다. 어느 늦겨울 전주의 젊은 친구들이 장기수 선생님들을 모시고 구례 지리산 자락으로 나들이 와서 하룻밤 같이 보낸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이틀 동안 내내 한 순간도 놓치지 않는 그분들의 ‘고마워하는 마음’을 보았다. 맑게 갠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다는 고마움, 이마를 스치는 신선한 바람 한 줄기의 고마움, 그 표정이며 몸짓 자체에 깊게 배어 있는 그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선생의 말투 하나 행동 하나가 티끌만큼의 가식도 없이 너무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몸에 배인 고마움이라는 것을 누구라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하기야 36년을 오로지 수행으로만 보낸 세월인데 오죽하랴. 사과 하나를 건네받으며 사과 꽃을 피우게 한 햇볕과 뿌리를 적시게 한 비와 흙과 사과를 건넨 사람의 고마움까지, 사과 하나를 얻기까지에 기여한 세상의 모든 존재에 대한 고마움을 뼛속 깊이 새긴 자의 마음을 보았다. 고마워하는 마음은 겸허한 마음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마워하는 마음은 내 안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자아의 영역에 타자의 영역을 내어준 것이고, 겸허한 마음은 내 안에 타자의 영역이 자아의 영역보다 더 넓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처럼 삶 자체가 경쟁이고 살기 위해 경쟁력을 갖추려다 보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기적으로 살게 되고, 내 스스로 경쟁력을 갖춰 이만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스스로의 자만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상대방을 고마워하기 보다는 내가 그만큼 노력해서 경쟁력을 갖춰 얻은 것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타자는 경쟁의 상대요 대립적 존재이지 내 안에서 품어야 할 상대가 아닌 것이다. 우리가 고마워하는 마음과 겸허한 마음을 꾸준히 잃어온 것은 이러한 변화된 일상의 탓이 크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부를 창출하는 것만이 미덕이 되어버린 자본 중심으로 인간의 질서가 재편되면서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마음은 바닥을 치는 상태에 이르렀다. 사실 이 시대에 스스로 겸손해져서 상대를 진정으로 고마워할 줄 알고 낮은 자세를 취하며 사는 이가 얼마나 될까. 나를 내어주고 타자를 섬기는 겸허함은 현대의 일상에서 얼마나 유효한 덕목으로 남아 있을까. 나는 자아의 감옥을 벗어나 타자를 섬기는 선생의 그 텅 빈 마음의 ‘겸허함’을 보며 그것은 분명 36년의 옥살이 명상이 가져다준 깨달음일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렇게 사는 것이 진리의 삶이요, 나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라는 절박함을 우리는 언제나 스스로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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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01
  • [지리산편지] 단 한 명을 위한 간이역 콘서트
    단 한 명을 위한 간이역 콘서트 ‘율촌역’이라는 곳이 있었다. 지금은 폐쇄된 율촌역은 전국의 12개 역사(驛舍)와 함께 문화재청에 의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한다. 1930년 전라선이 개통되면서 만들어졌고 폐쇄되기 직전에는 열차가 하루에 2번 쉬었던 곳, 하루 열차 이용자가 다섯 손가락을 넘지 못했다는 초라한 간이역, 폐쇄일이 통보된 그날 그곳 역 마당에서 시노래 콘서트가 있었다. 그것은 지역의 이름 없는 가수와 시인 그리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 하는 하나의 기도 같은 거였다. 작고 초라하고 소멸되어가는 것들을 위한 기도를 시와 노래로 하는 콘서트였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사가 아니었기에 우리는 노을이 지는 주위의 편안한 시골 풍경과 잘 어우러질 수 있었다. 이 콘서트는 근대가 형성되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소멸되어 온 것들에 대한 레퀴엠에 다름 아니었다. 과학의 축적과 함께 근대가 진행되면서, 사과가 떨어지거나 강물이 흐르는 모든 자연현상을 수학적으로 계산해내고, 그 계산을 통해 자연을 착취하는 가운데 꾸준히 도태되어온 것들, 작고 힘없고 화폐가치로 환산이 안 되는 것들, 첨성산의 도롱뇽 같은 것들, 이 간이역처럼 끝내는 사라져야 할 것들, 그리고 또 그것들과 똑같은 처지의 사람들까지, 이 소외되고 소멸되는 것들을 위한 콘서트는 간이역 너머의 노을빛만큼이나 아름답고 슬펐다. 나는 이 콘서트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가 삶 속에서 꾸준히 잃어온 ‘가여워하는 마음’을 생각했다. 누군가, 무엇인가 그 대상과의 관계라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상대방의 ‘가여움’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 몸의 어느 구석에 힘겹게 숨 쉬며 남아있을 사랑의 마음, 자비의 마음이 바로 그 ‘가여워하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나는 내게서 버려진 안쓰러운 나를 가까스로 돌아볼 수 있었다. 콘서트의 막바지에 붉은 노을이 지고 막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율촌역에 드디어 하루에 두 번 쉰다는 그 두 번째 기차가 잠깐 멈추고 떠났다. 그리고 그 열차에서 단 한 명의 손님인 작고 꼬부라진 할머니가 내리더니 작은 보따리 하나를 들고 느릿느릿 역사(驛舍)를 빠져 나왔다. 우리는 그 단 한 명의 소중한 관객을 위해 시를 읽고 노래를 불렀다. 할머니 한 명을 위해서 존재할 수 있는 열차, 할머니 한 명을 위해서 열차가 멈추는 간이역, 그리고 할머니 한 명을 위해서 노래할 수 있는 콘서트를 위해서, 근대 이후 줄곧 잃어온 그 ‘가여워하는 마음’을 위하여, 우리는 혼신을 다해 노래했다. ......세상의 작고 가여운 것들의 어머니/ 서로 욕하고 싸우며 스스로 절망하는 것들의 어머니/ 어머니, 따뜻한 저녁밥을 지어놓고 애타게 우리를 찾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노을 속으로 흩어집니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의 그 따뜻한 목소리에 화답할 수 없습니다./ 아직은 어머니의 품으로 달려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나는 강남의 아파트가 부러워 보이고/ 누군가가 앞서 나가면 질투를 하고/ 내 자식만큼은 서울대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그러한 마음 때문입니다./ 세상의 불의와 폭력에는 분노하면서도/ 나의 불의와 나의 폭력에는 한없이 너그럽기 때문입니다......(졸시「어머니, 때죽나무꽃이 피었습니다」부분)...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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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03
  • 파탄잘리의 『요가 수트라』 에 대하여
    파탄잘리의 『요가 수트라』에 대하여 『요가 수트라』는 고대 인도에 난무하던 다양한 요가 철학을 통합하여 총 4장 195절의 수트라로 구성한 짧고 함축적인 요가 경전이다. ‘요가’라는 말은 ‘합일’이라는 뜻으로 제한된 에고 의식(개체의식)을 높은 영적 의식 수준(지고 의식인 전체의식)으로 끌어올려 합일을 이루는, 그래서 궁극의 자유로움(해탈,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수행의 한 방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요가 수행을 통해 몸과 마음과 영혼을 하나로 묶어주는 삼위일체의 조화와 균형을 이룰 수 있게 된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몸의 자세나 호흡법 등의 바디 요가(하타요가)는 이 궁극의 합일을 위해 몸을 만드는 수단이며 마인드 요가와는 다르다. 전통적으로 요가는 의식의 자기 변형을 이루어 깨달음, 자유, 해탈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이라고 보면 된다. 요가 지식은 전통적으로 밀교의 형태로 스승이 제자에게 직접 가르치는 방법으로 전수되었다. 그러다 보니 혼란이 없지 않았는데 약 2500년 전에 파탄잘리(붓다 이후 2~3백년 사람으로 봄)가 『요가 수트라』를 지어 요가를 집대성하면서 요가의 마스터, 요가의 대부라고 불리게 되었다. 파탄잘리는 『요가 수트라』에서, 요가란 늘 움직이고 있는 마음을 고요 속으로 가라앉히는 것이며 그 고요는 유체 이탈이나 황홀경 같은 무의식적 상태가 아니라 완전하게 깨어 있는 의식의 상태라고 말한다. 완벽한 고요함과 완전한 의식으로 현재의 순간에 깨어 있는 그러한 의식 상태가 요가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요가는 우리가 현실에서 깨어 있으면서 보다 큰 의식적 단계에서 작용할 수 있도록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요가 수트라』2장 2~8 ►크리야 요가의 목적은 집중하는 힘을 기르고 깨달음에 장애가 되는 번뇌의 원인을 제거하는 데 있다. ►번뇌의 원인, 곧 깨달음을 방해하는 다섯 가지 장애물은 무지, 에고의식, 집착, 증오, 그리고 목숨에 대한 애착이다. ►무지는 번뇌의 밭이다. 다른 번뇌가 잠자고 있든지, 요가 수행으로 미약하게 되든지, 억눌려서 중단되든지, 혹은 활동하든지 간에 항상 그의 밭으로써 존재한다.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한 것으로, 깨끗하지 않은 것을 깨끗한 것으로,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참 자기가 아닌 것을 참 자기로 잘못 생각하는 것이 곧 무지이다. ►의식 자체(아트만, 참 자아의 순수의식)와 의식을 반영하는 마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동일시하는 것이 곧 에고 의식이다. ►집착은 쾌락에 머물려고 하는 마음에서 생긴다. ►증오는 괴로움에 따라서 일어나는 마음이다. 위의 말씀은 『요가 수트라』의 2장에 실린 것인데 2장의 전체 구성은 요가의 수행에 대한 장으로 먼저 요가 수행의 첫걸음인 행위의 요가(크리야 요가)에 대해 말한다. 이어서 과거의 생각과 행동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카르마의 잠재적 경향(업, 삼스카라)에 대해 말하며 다음으로 제거되어야 할 괴로움의 원인인 '에고 의식'과 함께 아트만(진아)에 대해서 말한다. 마지막으로는 구체적인 수행법인 아스탕카 요가 8가지를 자세히 설명한다. 이 글에서는 인용한 구절에 대한 생각과 함께 요가 수행의 핵심인 아스탕카 요가를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위에 인용한 제2장 2절에서 8절까지에는 요가 수행을 방해하는 번뇌의 원인 5가지를 제시한다. 깨달음을 방해하는 이 다섯 가지 장애물은 무지, 에고의식, 집착, 증오, 그리고 목숨에 대한 애착 등이다. 여기서 무지는 우리의 본성(순수의식)에 대한 무지를 의미하며, 에고를 중심에 두고 에고 의식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판단하고 행동하는 무지를 의미한다. 이것은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 나와 참나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말하자면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의 엄청난 세상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며, ‘나’가 나의 전부라고 알며 살 뿐 ‘참나’에 대한 의식의 확장 자체를 아예 모르고 사는 것이 무지이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번뇌의 근원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생존본능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이미 우리의 의식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그것이다. 이 강력한 두려움의 본능이 사는 동안 끊임없이 번뇌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는 살고자 하는 강한 집착의 본능적인 힘이 아주 집요해서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압도적이고 저절로 이루어지는 자동적인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자신의 생존과 안위를 가장 먼저 중요하게 생각하는 본능적이고 자동적인 감각이기 때문에 번뇌와 고통의 원인이 된다. 이렇게 파탄잘리는 요가의 수행에서 깨달음을 방해하는 번뇌의 원인으로 불가에서 말하는 탐, 진, 치, 3독(三毒)과 에고와 죽음, 다섯 가지를 말하고 있다. 파탄잘리는 이러한 요가를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번뇌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8가지의 탁월한 처방을 내놓는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을 얻게 해준다는 아쉬탕카 요가이다. 이 요가를 수행하면 몸과 신경계에 누적된 불순함이 깨끗이 정화되고 순수의식(푸르샤)과 현상세계(프라크르티)를 식별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긴다고 한다. 그리고 3단계로 의식의 변형이 오며, 이처럼 물질계(5원소)와 감각기관들도 같은 단계로 변형이 이루어져 완벽한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다만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마음이 관여하지 않으면 아무런 감각적 반응이나 충동 작용도 일으킬 수 없는 것처럼, 마음이 이들과 연결되어 작용하지 않는다면 감각기관들이 일으키는 감각적 충동들이 의식에 전달되지 않아 깨달음에 이르기 어렵다. 그 아스탕카 요가는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 부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금지하는 계율인 금계(야마), 행해야 하는 계율인 권계(니야마), 앉는 자세인 좌법(아사나), 호흡을 통해 프라나를 조절하는 조식(프라나야마), 감각에 끌리는 마음을 제어하는 제감(프라티야하라), 마음을 집중하는 응념(다라니), 깊은 명상인 선정(디엔), 아트만에 녹아드는 삼매(사마디) 등이 그것이다. 이 아스탕카 요가 8가지 중 처음부터 5번째까지는 외부적 파트이고 나머지 세 파트는 내부적 파트이다. 좀더 부연하면 첫 번째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사회적 도덕률인 5가지 계율이고(야마), 두 번째는 자신의 완성된 삶을 위해 필요한 5가지 계율이다(니야마). 그리고 세 번째는 명상 수행을 돕기 위한 다양한 몸의 자세를 계발하는 것이다(아사나). 네 번째는 마음의 활동을 잘 컨트롤 할 수 있는 바른 호흡법이며(프라나야마) 다섯 번째는 마음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흩어지게 만드는 감각기관의 활동을 컨트롤하여 의식이 한 방향으로 바르게 집중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프라티야하라). 그리고 여섯 번째는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을 하나로 집중시키는 것이며(다라니), 일곱 번째는 마음이 가라앉아 고요해진 상태에서 바른 의식을 유지하는 것이고(디엔), 여덟 번째는 고요히 가라앉은 마음이 그대로 순수의식으로 머물러 있는 상태(사마디)를 말한다. 이것이 7천 년 전 고대 인도의 시바로부터 시작된 그리고 이후 개인으로 전수되어 오던 탄트라 요가를 파탄잘리가 대중을 위해 8가지로 정리한 아스탕카 요가다. 이러한 수행이 깊어지고 사마디(삼매)의 경험을 조금씩 쌓게 되면, 삶에서 고통을 초래하는 원인들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 있음을 점차적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의식에 주의를 기울이면 척추를 통해 흐르는 차크라 에너지들(쿤달리니 파워)이 서서히 깨어나고 의식의 가장 깊은 상태에 이르러 몸과 마음이 순수의식 자체를 경험하고 영혼과 하나가 되는 합치(요가)가 마침내 이루어질 것이다. 이처럼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일상의 자신을 섬세하게 들여다 봄으로써 내면의 지혜가 점점 깊어지고 삶의 번뇌를 모두 극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렇게 일상의 삶 속에서 육체와 호흡을 정화하고 에고의 무지를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순간순간 깨어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 마음으로 몸과 마음과 영혼의 조화를 이루는 수련을 하며 흔들림 없이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박두규. 시인>
    • 문화예술
    • 지리산 편지
    2025-07-11
  • 두려움이라는 껍질
    두려움이라는 껍질 사람들은 대부분 죽을 때까지 두려움이라는 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한 생을 보낸다. 많은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으니, 두렵지 않다’라는 말을 하는데 이런 사람도 잃을 게 하나 더 있다. 그게 바로 목숨이다. 목숨, 태어나는 순간부터 목에 숨이 붙으면서 인생이 시작되고 그 목의 숨을 부지하려고 한 생을 바둥거리다 그 숨이 떨어지는 순간 생이 끝난다. 다시 말하면 숨을 붙이는 순간 두려움이 시작되고 그 두려움은 숨이 떨어져야만 끝난다. 그렇게 두려움은 죽음의 다른 이름이다. 너무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살아있는 내내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데리고 살아야 하는 운명이. 그리고 이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포장하고 있는 두려움의 껍질 중 하나가 ‘늙음’이다. 하지만 늙기 때문에 죽음에 이른다는 생각은 잘못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의사이며 명상가인 디펙초프라는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은 그렇지 않은데 인간만이 노화현상을 인식하는 유일한 신경계를 소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늘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천 년 된 은행나무는 스스로 늙는다거나 그래서 죽게 된다거나 하는 생각을 하며 살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두려움이라는 정신적 작용이 없는 상태에서 죽음을 맞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죽음의 공포 없이 죽음에 이를 수 있다면 인간은 지금보다 훨씬 행복한 존재가 될 것이다. 여행하는 동안 내내 웃으며 즐겁게 보내다 집으로 돌아가듯이, 말하자면 아무런 두려움 없이 소풍을 끝내고 즐거웠다며 하늘로 가는 어떤 시인처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인생이라면 정말 행복하지 않겠는가. 늙는다는, 죽음이라는 두려움의 정신적 작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명상이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그것은 주변의 모든 것에 끌려다니는 사고에서 벗어나 역으로 주변의 모든 것을 이끄는 사고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각과 느낌으로 자신의 신체 상태를 바꿀 수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생명체라고 한다. 노화현상을 인식하는 유일한 신경계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 정신적 상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 영향을 끼친다고 하는데 명상은 바로 이런 것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나는 어떤 계기로 아난다마르가 수행공동체를 접하게 되어 십여 년 명상을 해오고 있는데 명상은 고도의 정신적 집중이 필요한 것이어서 그것만으로도 의식이 고양되어 삶의 강한 자신감과 활력을 얻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명상을 통해 마음을 집중하면 몸속에 있는 각각의 세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몸의 세포들은 우리의 생각들을 낱낱이 엿듣고 있어서 그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내 몸이 시간과 함께 쇠퇴해 간다는 생각 대신 시시각각 새로워진다는 신념을 키워야 하는 것이다.인체는 끊임없이 새로 만들어지는데 피부는 한 달에 한 번씩 새롭게 교체되고 위벽은 5일마다, 간은 일주일마다, 골격은 3개월마다 새롭게 바뀐다고 한다. 그러니 몸은 매일 새로워진다는 것을 생각하며 삶은 현재에 고도로 집중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지금 여기’를 산다는 말에 근접한 것이기도 하다. 존재의 근본을 덮고 있는 두려움이라는 껍질을 벗을 수 있는 것은 부귀영화를 뒷받침하는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정신, 마음 하나에 달린 것이다. 불가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박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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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편지
    2025-06-11
  • 풀잎의 겸손
    풀잎의 겸손 한세상 살면서 훌륭한 참스승을 만나는 것은 참으로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런 면에서 보면 억세게 운이 좋은 편이다. 아직도 살아계시는 세 분의 스승이 계시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일방적인 외사랑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를 내치지는 않으니 고마울 뿐이다. 이 세 분은 살아오며 인연을 맺은 후 마음속으로 늘 본받고 배우고자 애썼던 분들이고 지금도 그러하다. 교사로 지내던 때에 만났던 정해숙 선생님, 자기완성을 위한 수행 과정에서 만났던 칫따란잔아난다 다다지, 그리고 자기 수행과 사회적 실천이라는 삶의 균형감을 가르쳐주신 도법스님이 그분들이다. 이 세 분의 스승 모두 겉으로 보여주는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겸손이다. 그분들의 겸손은 사람들을 만나 그저 자신을 낮추는 그런 겸손이 아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는 그런 겸손도 아니다. 내 말을 아끼고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그런 겸손도 아니며 위선과 가식이 먼지처럼 내려앉아 있는 겸손과는 다르다. 그분들의 겸손은 상대방이 없어도 스스로에게 하는 겸손이다. 자기 자신을 모시는 겸손이고 생명이 있는 것들과 없는 것들까지도 모두 모시는 겸손이다. 세상을 살며 누구에게나 삶의 상처처럼 얻게 되는 작은 가식과 위선까지도 벗어나 본래 모습 그대로 숨 쉬는 겸손이다. 평생을 수행자로 사시면서 저절로 그러하듯 생겨난 겸손이다. 청화스님이라고 계셨다. 불가 쪽에서는 살아계실 때 많은 사부대중이 따랐던 큰스님인데 정해숙 선생님은 이분을 스승으로 모셨다. 그 청화스님이 살아계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수행자가 겸손 빼놓으면 뭐 남는 게 있겠나’라고. 생각해 보니 그렇다. 정말 오랜 수행으로 내공이 깊어진 자의 겉모습에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다만 누가 보아도 그냥 평범하면서 겸손하게만 보일 것이다. 길가 어느 구석에 놓여 있는 돌멩이 같은 그런 평범과 겸손 말이다. 내가 마음속으로 모시는 세 분의 스승님들이 그렇다. 그분들은 삶 자체가 수행이기도 하신 분들이고 각자의 분야에서 높은 수행과 함께 세상일을 거침없이 해오신 분들이다. 그런 그분들의 겸손은 오랜 수행 속에서 얻은 ‘탈 에고(脫 ego)’의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풀잎처럼 겸손하라’(Ánanda Vacanámrtam Part 9)는 말이 있다. 아난다마르가의 경전에 나오는 말인데 설명이 없어도 느낌이 강하게 오는 아포리즘 구절이다. 나는 여기서 풀잎을 땅이라는 근원(본성, 진리)에 뿌리내리고 지상의 모든 것을 받아내는 존재로 읽었다. ‘풀잎처럼 겸손하라’는 그런 겸손을 말하며 그것은 결국 모든 수행자가 목표로 하는 탈 에고(脫 ego)의 그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안에서 에고를 지워내고 ‘참나’(true self)에 이르게 된다면 저절로 ‘풀잎처럼 겸손’해질 것이다. 청화스님은 아마도 이 ‘풀잎의 겸손’에 닿은 수행을 이루셨을 것이다. 처음 명상을 시작할 때만 해도 나는 비속(非俗)이나 비범(非凡)의 무엇을, 어떤 성취를 꿈꾸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니 잘못되어도 많이 잘못된 생각이다. 그것은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끝없이 생겨나는 집착과 그 에고(ego)를 지우는 일이고, 한 생을 살며 매일 군살처럼 달라붙는 위선의 껍질을 벗겨내는 일이며 풀잎처럼 근본에 뿌리내리는 일이다. 바로 스승들의 그 겸손에 이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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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편지
    2025-05-15
  • 1m의 세상
    1m의 세상 바야흐로 텃밭을 일구는 계절이 왔다. 손바닥만 한 밭이니 괭이로 파고 호미로 골라서 파종하거나 모종을 심는다. 그리고 농약과 비료를 쓰지 않고 퇴비만 뿌려 밭을 일구다 보니 지렁이를 자주 보게 된다. 괭이를 쓰다 보면 나도 모르게 땅속에 있는 지렁이를 놀라게 하거나 상처를 입히게 되는 경우가 있다. 지렁이 편에서 보면 날벼락을 맞은 셈인데 어느 때는 땀도 좀 식힐 겸 지렁이가 다시 땅속으로 들어가 스스로 몸을 감출 때까지 앉아 쉬며 그냥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지렁이나 나나 별반 다를 바 없는 한 목숨이라는 생각에 이르기도 한다. 지렁이가 하루 종일 꿈틀거리며 생명 활동을 하는 땅속 반경이 1m라고 해도 내가 하루 종일 이곳에서 밭을 일구며 보내는 삶의 반경과 무슨 차이가 있을 것인가. 저는 부지런히 저의 세계를 살았다 해도 겨우 1m의 땅속 반경을 기어다닌 것이고, 나 또한 열심히 나의 세상을 살았다 하지만 우주의 한 점인 지구별의 어느 귀퉁이에서 평생을 맴돌고 있을 뿐이다. 이렇듯 저는 저대로 나는 나대로 스스로의 하루를 살다가는 객(客)일 뿐이다. 참으로 이런 허접하고 싱거운 생각을 하다 보면 그래도 마음은 충분히 여려져서 조금은 자유로워지기도 한다. 우리는 그야말로 아등바등 죽네 사네 하며 한 생을 살고 있지만 조금만 물러서서 보면 우주의 지구별에 잠깐 손님처럼 왔다가 하룻밤 머물고 가는 것이다. 지렁이처럼 평생 1m의 어두운 땅속 세상을 꿈틀거리다 가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어쨌거나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마음도 어느 정도 편해지고 정말 복잡하고 힘든 세상살이가 조금 가벼워지면서 주변의 풍광 또한 아름답고 신비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나는 아무런 뜻도 없고 잡아도 잡히지 않는 물이나 공기와도 같은 처지가 되어, 그 뜬구름 같은 생각만으로도 존재 자체가 벅차올라 눈앞에 펼쳐진 이 구체적으로 눈부신 봄날이 그렇게 경이로울 수 없다. 마른 가지를 비집고 올라오는 초록빛 새잎의 현실에 눈물이 나고, 온 세상을 초록 바다로 만들어 출렁이는 봄 산을 보면 이 비루한 몸뚱어리가 숨 쉬고 있는 세상이 그렇게 아름답고 고마울 수 없는 것이다. 감정이 이 정도 차오르면 푸르릉 날아오르는 감나무의 새 한 마리만 봐도 괜히 서럽고 아무에게나 무엇에게나 손과 발이 다 닳도록 수없이 절을 하고 싶은 심정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고마움도 어쩌다 제 감정에 겨워 세상이 만만해지니 그러는 것이리라. 일상 속 또 다른 일상을 보는 일이 항상 그런 것이다. 그래도 사실 나는 늘 그 일상으로 건너가고 싶다. 텃밭의 지렁이가 되어 아무런 뜻 없이 종일토록 1m의 세상을 기어가고 싶은 것이다. 살아야 이승이고 죽으면 저승일 뿐이라는 말이나, 개똥밭에 뒹굴어도 이승이 좋다는 말은 이런 심정에서 나오지 않았나 싶다. 찰나의 한 生인데 권력과 부와 명예를 좇으며 불안하고 분노하며 고통스럽게 보내는 것보다 눈앞의 눈부신 봄날, 존재의 경이로움을 느끼며 설레는 마음으로 살기에도 부족한 세월이 아니겠나. 글을 보내는 오늘, 그렇게 기다리던 윤가의 파면 소식이 왔다. 별의별 추측과 가짜 뉴스들이 난무하는 불신의 사회, 억지와 비상식의 나라가 되어 대혼란에 빠진 대한민국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모두가 지혜롭고 용기 있는 국민 덕분이다. (박두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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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편지
    2025-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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