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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지리산 편지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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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하고 물을 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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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하고 물을 긷는다
‘사유의 방’에 들어가니 전체적으로 어두운 조명 속에 미륵반가사유상 두 점이 놓여있었고 빛과 어둠의 조화 속에 스며드는 고요를 잘 연출해 내고 있었다. 고요는 사유의 시작이니 그렇다. 그런데 반가사유상은 왜 두 점을 놓았을까? ‘사유의 방’의 ‘사유’는 불가의 ‘깨달음’으로 이어지니 오히려 한 점을 놓고 지금처럼 빛과 어둠의 비율을 잘 조절하면 깨달음을 위한 ‘집중’을 더 깊고 강하게 연출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두 점이기 때문에 오는 느낌도 있었는데 그것은 따뜻한 어울림이었다. 우선 홀로가 아니라 둘이니 그렇다. 그리고 두 분의 보살은 나란히 앞을 바라보며 전시되어 있는데도 룸메이트라도 되는 듯 편안하게 어울렸다. 그것은 아마도 앉은 자세와 얼굴의 방향, 그리고 표정이 연출해 내는 자연스러운 어울림의 효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 인해 ‘사유의 방’의 고요한 분위기는 ‘집중’과 함께 부드럽고 따뜻한 어울림을 함께 품고 있었다. 반가사유상 자체의 미소가 절정의 포용력과 따뜻함을 충분히 느끼게 하지만 두 보살의 어울림으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적 친연성이 주는 상징적 효과가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서울 나들이는 오롯이 ‘사유의 방’을 만나기 위한 것이어서 이 방에 좀 오래 머물렀다. 탑돌이를 하듯 반가사유상을 천천히 돌며 걸으니 이런저런 떠오르는 생각들을 즐길 수 있었다. 사실 ‘깨달음’이라는 것도 ‘지금여기’라는 현실을 떠나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언젠가 봤던 어느 선사의 시를 떠올리니 그런 생각이 강하게 왔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나무를 하고 물을 길었다.//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나무를 하고 물을 긷는다.
이 시를 보면 깨달음을 얻기 전이나 얻은 후에나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 깨달음을 얻었다면 무언가 달라져야 할 텐데 물을 긷고 나무를 하는 일상의 현실에는(당시는 물을 길어 독에 채우고 나무를 해서 밥을 해 먹는 것이 먹고 사는 일의 가장 중요한 일상이었을 것이다)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이다. 현실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뭘까? 선사의 깨달음은 ‘지금여기’의 일상을 새롭게 보고 또 새롭게 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 고통스럽고 덧없는 현실을 늘 ‘새로움’의 변화로 읽어낼 수 있다면 그 변화의 경이로움으로 세상은 신기롭고 즐거우며 의욕적일 것이다. 그렇게 늘 새롭게 현재의 일상을 살아낸다면 그런 행복이 어디 있으며 그것이 깨달음의 경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해가 바뀌는 첫날의 일출을 보기 위해 야단법석을 떨며 정동진의 바다를 찾는 데는 새로운 한 해를 맞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이 있다. 후회와 회한이 없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다. 그러니 매일 매 순간 새롭게 오는 시간을 새롭게 살아낸다면 깨달은 자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오늘도 내일도 ‘나무를 하고 물을 긷는’ 똑같은 일상이지만 완전히 다른 일상인 것이다.
사실 우리의 몸 또한 늘 새롭게 변하는 물질이기도 하다. 명상 의학자인 디펙초프라는 우리 몸속의 원자는 매 순간 새롭게 창조되며 피부는 한 달에 한 번씩 새롭게 교체되고 위벽은 5일마다, 간은 6주마다 새롭게 바뀐다고 한다. 언제나 같아 보이지만 실은 항상 변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변한다는 것은 새로움에 다름 아니다. 변화를 새로움으로 받아낼 수 없다면 우리는 덧없는 세월의 허무를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삶의 무상함이 아니라 무엇인가 영구하기를 바라는 그 마음에 있다. ‘덧없음’을 ‘새로움’으로 읽어내고 실천할 수 있다면 ‘물을 긷고 나무를 하는’ 반복되는 일상도 경이로움으로 오는 ‘깨달음’이 되는 것이다.
‘사유의 방’에서 한참을 머물다 나오는데 문득 오래전에 ‘미륵반가사유상’이라는 제목의 시를 썼던 것이 생각났다. 내용이 가물가물했는데 그 궁금증이 가시지 않아 노트북을 꺼내 찾아보니 2001년에 낸 시집에 실려 있었다. 물론 그때도 미륵반가사유상을 실견(實見)하지 못했었는데 당시 어떤 심정을 풀어냈는지가 궁금했다.
흐르고 있구나./ 무량의 속된 세월을 만나/ 그대는 줄곧 흐르고 있었구나./ 푸르고 푸른 그대 사유의 강에/ 발목을 적신다 해서/ 정토의 땅을 밟을 수 있을까만/ 나는 그대 앞에 넋을 놓고/ 때에 절은 그리움 하나를 벗는다./ 내 어둠을 밝혀 온/ 단 하나의 오랜 불빛을 여읜다./
25년 전, 막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막연하게나마 동경해 왔던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하고 평등, 인권, 통일, 민주, 정의 등의 가치지향이 자본에 무너지던 그 무렵에 나온 시집이었다. 급변하는 현실을 맞아 치열하게 건너온 시대와 동지들에게 등을 돌리는 ‘훼절’이 있던 시절, 혼란스럽고 출구가 잘 안 보이던 그때 미륵반가사유상을 떠올려 시를 쓴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때에 절은 그리움을 벗’고, ‘내 어둠을 밝혀 온 단 하나의 오랜 불빛을 여의’어 다시 새롭게 흘러야 했을 것이니 그렇다. ‘새로움’이라는 출구가 절실했을 것이다. 여기의 미륵반가사유상이 누군가에게는 ‘삶의 새로움’을 발견하는 출구가 되기를 바라며 사유의 방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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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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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앞을 지나면서도 들여다보지 않은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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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 지리산에서 보내는 편지 6
문 앞을 지나면서도 들여다보지 않은 죄
딸과 아들과 며느리 손주가 함께 하니 절간 같던 집이 떠들썩하다. 분주함은 분주함 대로 나는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 익숙해져 있어서 이런저런 사소한 즐거움이 좋다. 두텁나루숲은 오랫동안 혼자 관리해 와서 내 손이 가지 않으면 어려움이 많아지고 그러다 보니 누가 오면 내가 제일 바쁘기는 하지만 즐거운 비명이다. 아픈 아내는 손주를 봐주며 놀고 아이들은 서로 오랜만에 만나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데 이 바쁜 와중에 반가운 문자가 왔다. 마음으로 존경하는 선배가 휴가 동안 구례를 거쳐 가는 일정인 듯했다. 바로 나가서 반갑게 맞이하고 술 한 잔이라도 나눠야 맞는데 나는 왠지 망설이다가 문자로 답만 하고 나가서 만나지 못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개운치 않았는데 그냥 바쁘게 하루가 지나갔다. 그리고 잠시 틈이 나서 페북을 읽는데 박00 선생(페북에서 만난 분)의 글이 나를 질타하고 있었다. 과문불입지죄過門不入之罪‘문 앞을 지나면서도 들여다보지 않은 죄’ 라는 글이었는데 꼭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대문을 스쳐 지나며 벗을 찾지 않는 마음의 게으름을 옛사람들은 하나의 죄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인간의 도리를 하지 않았다는 거다. 그것도 마음속으로 존경한다는 선배에게. 선배는 문을 두드렸는데 나는 문을 두드리지 못한 것이다. 살면서 사람과 사람이 서로 스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서로 손을 내밀어야 벗도 되고 연인도 되는 것 아니겠는가. 내가 적막하다면 그것은 나의 탓일 뿐 누구 때문도 아니고 어느 무엇 때문도 아닐 것이다. 우연히 큰 배움과 깨달음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게 해준 선배와 페친이 정말 스승처럼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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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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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가 너무 슬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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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 지리산에서 보내는 편지 5
오늘은 병원에 가는 날
오늘은 병원에 가는 날, 아내가 아픈지 벌써 3년째다. 다행히 열흘에 한 번 통원 치료하며 병을 어느 정도 관리, 유지하고 있는 편이다. 날씨가 좀 풀리니 아내는 걷기운동도 하고 봄나물도 캐면서 봄기운을 받아낸다. 나도 밭에 퇴비를 넣고 뒤집어 고르며 텃밭일을 시작했다. 감자와 생강을 심고 상추, 케일, 청경채, 아옥, 쑥갓.. 등 모종들을 시장에서 사와 심었다. 고장 난 외등도 고치고 마사토를 1톤 트럭 분 들여와 패인 잔디밭에 고루 뿌렸다. 집안일은 하다 보면 끝이 없다더니 과연 그랬다.
아내는 아내대로 나는 나대로 많이 달라진 일상 현실에 잘 맞춰 살고는 있으나 언뜻언뜻 어떤 결핍감에 시달리곤 한다. 누구나 그렇듯 갇힌 듯 사는 시간과 공간 아니냐고 달래보지만 크게 위안이 되지는 않는다. 오늘, 의사는 마냥 수혈에만 의지할 수는 없게 되니 골수 이식에 대비해서 대상자를 찾는 등 준비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준다. 그래, 지금까지만 해도 고마운 일이다 싶다. 20대 청춘에 만나 함께 살아온 날이 얼만데 이제야 부부의 깊은 정이라는 게 무언지 느끼게 해주는 날들이다. 같이 외출할 읍내의 오일장을 기다리는 하찮은 일상마저 사소한 기쁨으로 오는 하루하루가 소중한 날이니 그렇다.
전에는 아내를 시에 올리는 일을 꺼렸었는데 요즘은 아내를 대상으로 쓴 시가 많아졌다. 예전 같은 마음에 걸림이 없어진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내 삶의 중심으로 깊게 들어와 버렸기 때문이다. 아내와 관련된 시 2편을 첨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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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가 너무 슬프네
아내를 태우고 화순 암센터 다녀오는 길
가로수 화려한 나무들은 바람에 꽃잎을 날리고
옆자리에서 아내의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끊어질 듯 가녀린 노래가 가까스로 이어지는데
.. 알뜰한 그 맹서에 봄날은 간다
겨우 한 소절 중얼거리더니
가사가 너무 슬프네, 하며
몸을 차창 쪽으로 뒤척이더니 말이 없다.
아마 아내는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을 것이다.
모처럼 밖으로 드러낸 아내의 마음에
나는 피할 수 없는 과녁이 되어
깊고 선명하게 박히는 화살 하나를 받아냈다.
누군가의 안으로부터
농축된 오랜 슬픔이 새어나 올 때
사람이 지극히 사랑스러워진다는 것을 알았다.
목까지 차오른 심정心情으로
차를 세우고 안아주고 싶었는데
차창을 스치는 가로수처럼
일상은 늘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간다.
사는 일의 무상無常함이야 일러 무엇하랴
어느새 두텁나루숲이 가까웠나
차창에 지리산 자락들이 가득 차 있고
저무는 빛들이 능선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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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한 세월
그렇게 사랑을 얻고 또 여읜다.
화려한 세상에 눈멀어 한세상 꿈속을 살며
사랑도 하며 꿈의 실상實相을 짐작해 보건만
서투른 사랑은 늘 구름처럼, 구름의 그림자처럼
시시각각 변하며 흩어지고
그렇게 형해形骸도 없이 사라지는 사랑이다.
사람들은 그래도 그 사랑에 대한 기억 하나로
아슬아슬한 세월을 건너고
그렇게 사랑을 얻고 또 여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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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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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좀더 친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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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 지리산에서 보내는 편지 4
죽음과 좀 더 친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얼마 전 구례 공설 자연장지에 다녀왔다. 「지리산사람들」의 멤버였던 지인을 흙으로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49세의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버렸다. 자식을 먼저 보낸 어머니의 통곡에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돌아오는 차 속에서 슬픔의 감정이 진정되는 즈음에 우리는 죽음을 두렵고 피해야만 한다는 소극적인 삶에서 벗어나 죽음과 좀 더 친해져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삶의 적극성을 생각해 보았다.
생명을 오로지 물질적인 몸으로만 보기 때문에 죽음이란 곧 끝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늘 정신, 마음, 영혼 등을 말하며 생명을 물질로만 인식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죽음은 유한의 시간을 무한의 시간으로 바꾸며 죽음은 공간의 경계를 무한으로 확장 시키는 통로이기도 하다. 죽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물질적인 우주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비물질적인 영역이 같이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그렇듯 삶이 끝나고 죽음이 시작되는 게 아니라 삶과 함께 의식 속에는 항상 죽음이 같이 흐르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영원한 것, 무한한 것, 변하지 않는 것의 실재는 결코 개인적인 것일 수 없지만 업보나 윤회 같은 종교적 세계관을 통해 죽음은 내가 무엇(이승의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어떤 무엇)이 되느냐에 대한 문제로 늘 가까이에 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도 있지만 삶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죽음은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랑과 진리는 신성의 영역이지만 현실에 존재하듯이 죽음 또한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현재로 초대하고 어쩌면 그것을 사랑이라는 것처럼 동등한 가치의 고귀한 개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떻게든 의식적으로라도 죽음과 좀 더 친해져야 삶의 균형을 잘 이루게 될 거라는 생각이다.
사진 unsplash의 Diago Nu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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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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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지리산에서 보내는 편지3-진눈깨비 속 봄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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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 지리산에서 보내는 편지 3
진눈깨비 속 봄 편지
어제까지 3일 동안 지리산 함양의 산들이 타는 동안 맘이 편치 않았다. 몇몇 지인들이 가까운 산자락에 살고 있어서 더 그랬다. 다행히 오늘부터 비가 온다고 해서 조금 안심은 되었는데 아침부터 반가운 빗님이 오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늘은 『지리산人』 편집위원들이 한 달에 한 번 산행하는 날이어서 망설였는데 모두 비를 맞으며 그냥 산행을 하기로 했다. 산불을 잡아주는 고마운 비라는 생각과 봄의 기운을 흠뻑 몰아줄 비라는 걸 모두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느낌을 몸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봄을 이루려는 모든 나무며 사물들의 빛깔을 통해 공감의 징후를 느끼고 싶었다. 이른바 제러미 리프킨이 말한 공감능력,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이 맞다면 이 공감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봄의 시작으로 넘어가는 경계의 지점에서 모든 생명이 서로 변화를 공감하며 연대하는 것은 서로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고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서로에 도움을 주고 싶은 것이다. 리프킨은 이런 공감의식을 갖게 되고 확장하는 데는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만물 모두의 안에 존재하는 신성을 이해하게 해준다고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 삶은 이런 경외와 신성은커녕, 생명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과 함께 동등하다는 인식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어쨌거나 나는 모든 생명이 하나로 연결되어 봄이라고 불리는 이 신비하고 거대한 우주 자연의 자연스럽고 타당한 변화에 모두가 연결되어 집중하는 그 공감의 시간과 현장을 생생하게 느끼고 싶었다. 나 자신(개체의식)도 모든 타자(전체의식)에 스며들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스스로의 공감능력을 검증하고 싶었다.
비옷을 입고 우산을 쓰고 산을 오르니 비는 점차 진눈깨비가 되었다. 그래도 검게 마른 가지들이 촉촉해지면서 움을 틔우는 미소를 느낄 수 있었다. 겨우내 얼어붙은 폭포수도 개울물처럼 졸졸 흐르듯 수직으로 녹아내리며 목소리를 틔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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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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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지리산에서 보내는 편지 2 - 하늘은 온통 푸른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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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 지리산에서 보내는 편지 2 - 박두규
고등학교 때, 『글내』 라는 동인지를 만들며 함께 문학을 했던 친구 중 이재형이라고 있다. 문학적 감수성이 나보다 한 수 위였던 이 친구의 글을 부러워하며 시를 썼던 기억이 난다. 그는 대학생 시절(한국외대 불문과)부터 번역을 하며 졸업 후에도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간행하는 대부분의 프랑스 소설들을 번역해왔다. 그리고 결국은 프랑스로 넘어가 현재는 파리에 살고 있다. 그가 요번에 현재 프랑스에서 가장 성공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는 멜리사 다 코스타의 작품을 번역하였다. 『하늘은 온통 푸른색 Tout le bleu du ciel』이라는 제목의 이 소설은 프랑스에서 1백만 부 이상 팔린 책이라고 한다. 나는 다 코스타라는 작가도 모르고 그의 소설도 읽어보지 않았지만 아래의 이재형이 올린 글을 읽고 이 작품은 요즘 내가 삶의 화두로 생각하고 있는 ‘존재의 새로움, 새롭게 살기’에 어떤 영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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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에서 시작되는 삶을 위하여
이재형
1. 모든 끝은 사실 시작이었다.
우리는 흔히 ‘마지막’이라는 단어 앞에서 움츠러든다. 마치 그것을 인정하는 일 자체가 패배나 단념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멜리사 다 코스타의 소설 『하늘은 온통 푸른색』은 이 단어를 뒤집는다.
이 책은 끝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독자가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쯤 깨닫는 것은 이것이다. 끝은 종착지가 아니라, 삶이 비로소 자기 자신의 속도로 걸어가기 시작하는 문턱이라는 사실. 에밀, 서른 살의 젊은 남자는 치명적인 병을 진단받는다. 인생을 다시 설계할 시간을 허락받지 못한 채, 그는 조용하게 사라질 준비를 하는 대신, 뜻밖의 선택을 한다. 그는 광고를 하나 올린다.
“중고 캠핑카 동행자 구함. 긴 여행. 목적 없음. 조건: 지나치게 말이 많지 않을 것.”
세상에 둘도 없는 엉뚱한 제안이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대신, 그는 마지막 시간에 ‘여정’을 입히기로 한다. 그리고 그 광고에 응답하는 한 여자, 조안. 두 사람은 서로의 과거를 절대로 묻지 않겠다는 약속 아래 하나의 삶을 함께 굴려 나가기 시작한다. 이 책은 이 만남을 통해 삶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는다. 또한 삶의 마지막에서 바라본 세계가 얼마나 새롭고, 얼마나 넓고, 얼마나 맑은 푸른색을 띠는지 보여준다. 이 에세이는 바로 그 푸른색에 대한 이야기이다. 끝이 시작이 되는 그 지점에서, 인간이 비로소 자기 삶을 회복해 가는 순간들에 대하여.
2. 인간은 언제 진짜로 ‘살기’ 시작하는가?
『하늘은 온통 푸른색』의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이 질문을 회피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살아 있는 우리가, 언제부터 진짜로 살기 시작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질문을 미루며 살아간다. 우리는 계획과 의무, 사회적 기대 속에서 ‘살아가는 척’을 하다가 어느 순간 나이를 먹는다. 그리고 멀리 보내고 싶었던 감정이나 회피했던 상처들은, 침묵 속에서 슬그머니 무게를 늘려 우리의 영혼을 서서히 잠식한다. 그러나 병이라는 돌발적 통지가 남긴 폭력성 앞에서, 인간은 종종 다른 눈을 얻게 된다. 에밀이 선고받은 병은 다른 말로 하면, 다시 살아가기 위한 유예된 시간이었다. 과연 삶을 바꾸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멜리사 다 코스타는 이렇게 답한다. 삶을 바꾸는 힘은 ‘끝에서 바라본 세계의 시선’에서 온다. 죽음을 아는 사람은 비로소 삶을 본다. 잃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자신이 가진 것의 진짜 명징함을 깨닫는다.
에밀은 죽음을 향해 떠나는 동시에 삶을 향해 떠난다. 그가 캠핑카에서 매일 마주하는 풍경들은, 벼락처럼 의미가 생겨난다. 한 줄기의 빛, 바람의 자잘한 떨림, 나무의 냄새, 모닥불의 소리, 서로에게 말을 아끼는 낯선 사람의 동행. 이 소설은 거창한 사건 대신, 생의 가장 미세하고 사소한 것들이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문학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가 매일 지나치던 세계는, 사실은 아직 단 한 번도 온전히 바라본 적 없는 순수한 푸른색이 아니었을까?
3. 멜리사 다 코스타의 문장은 감정이 아니라 ‘체온’을 갖고 있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언어가 감정을 전달한다는 사실을 넘어, 언어가 체온을 갖는 순간을 경험한다. 멜리사 다 코스타의 문체는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다. 그녀의 문장은 절제되어 있지만, 그 절제는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채워져 있다. 잔잔함과 고요함으로 밀려오는 침묵의 문장들. 폭발적인 묘사가 아닌, 거의 속삭임에 가까운 사유의 파동. 독자는 이야기와 함께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숨결을 함께 쉰다.
문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 소설의 강점은 바로 이 미묘한 정서적 진동이다. 그녀는 서정성을 전략적으로 사용한다. 풍경은 사건을 설명하기 위한 장식이 아니라, 인물의 내면을 비추는 구조적 장치다. 기억, 후회, 상실, 용기, 그리고 다시 살아갈 힘. 모든 것은 자연과의 동행 안에서, 풍경의 움직임에 맞춰 천천히 밝히고 또 천천히 치유한다. 독자로 하여금 이렇게 느끼도록 만든다.
“나는 지금 누군가의 영혼이 스스로 정화되는 과정을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구나.”
이것이 멜리사 다 코스타 문장의 고유한 힘이다.
4. 두 개의 상처, 두 개의 비밀, 그리고 하나의 길
에밀의 병만이 이 소설의 중심 축은 아니다. 그와 동행하는 조안 역시 깊고 어두운 곳에 자신의 과거를 묻어둔 사람이다. 이 소설이 단순한 ‘치유’나 ‘여행’ 이야기를 넘어서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조안은 에밀의 여행에 합류하지만, 그녀 역시 무언가로부터 도망쳐 나온 사람이다.
그들은 서로의 비밀을 묻지 않는다. 묻지 않는다는 약속이 서로를 가볍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묻지 않는다는 것이 잊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 코스타는 이 아이러니를 천천히, 그러나 매우 아름답게 풀어낸다. 두 사람은 서로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은 자신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장소’를 서로에게 제공한다.
이것은 자기 구원의 이야기다.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돕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옆에서 말없이 존재해준다는 사실이 어떻게 한 개인을 구원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결국, 이 두 인물의 여정은 죽음과 삶, 상처와 회복, 도망과 귀환, 상실과 선택의 문제를 모두 품어낸다. 그리고 그 끝에서, 문학 독자는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과연 누구의 손을 잡아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아니, 누가 우리의 곁을 묵묵히 지켜만 주어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는가?’
5. 풍경이라는 문학, 자연이 인물의 내면을 대신 말하는 순간들
『하늘은 온통 푸른색』의 가장 빼어난 문학적 특징은 풍경과 인물 내면의 동조율이다. 이 소설에서 풍경은 단지 배경이 아니다. 그것은 대사의 다른 형태이며, 침묵의 서술자다. 숲의 색이 변하는 순간 인물의 감정도 달라진다. 바람이 갑자기 거세지는 순간, 인물의 갈등도 더 깊어진다. 하늘의 푸른색이 짙어지면, 생에 대한 의지가 되살아난다. 이 모든 연결은 인위적이지 않다.
소설은 풍경을 통해 인물의 내면을 ‘보여주기’만 할 뿐, ‘설명’하지 않는다. 그 절제는 오히려 독자의 감각을 확장시킨다. 특히 조용한 장면들—나무 사이로 비가 스며드는 소리, 모닥불 앞에서의 침묵, 도로 위 캠핑카의 흔들림, 안개가 걷히는 새벽의 산등성이—이런 묘사들은 인물의 말을 대신해 서사적 결정을 내린다. 문학적 쾌감은 바로 이 지점에서 폭발한다. 보이지 않는 감정이 보이는 풍경 속에 녹아들어, 독자의 눈앞에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는 순간. 멜리사 다 코스타는 풍경 묘사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마음도 자연처럼 회복된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러나 반드시.”
6. 이 책이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깊은 질문
소설을 읽고 난 뒤 남는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삶의 핵심을 향한 질문이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무엇을 위해 떠나는가. 삶의 의미는 어디에서 다시 태어나는가. 『하늘은 온통 푸른색』은 거창한 해답을 내놓지 않는다. 대신 삶의 한복판에서 작고 사소한 것들을 건져 올린다.
한 사람의 미소, 조용한 아침 공기, 함께 타는 불빛, 누군가가 말없이 내 곁에 있는 시간. 인생은 사실 거대한 목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단지 천천히 살아가는 법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제목처럼, 인생은 어느 날 문득 온통 푸른색으로 확장될 수 있다. 그것을 바라볼 여유를 허락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인지도 모른다.
7. 이 소설을 왜 읽어야 하는가 — 문학 독자를 위한 마지막 권유
문학을 읽는 사람은 단순한 ‘이야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너머에 있는 세계의 구조, 감정의 층위, 삶의 깊이를 탐색한다. 『하늘은 온통 푸른색』은 그런 독자를 위한 작품이다.
이 책은 인간 존재의 본질, 상실을 대하는 태도, 삶이 자기 자신을 회복하는 과정,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서야 비로소 찾아오는 진실된 시선을 탐구한다. 문학적 완성도, 서정성, 구조적 탄탄함, 정서적 깊이. 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룬 작품이다. 읽는 동안 우리는 여행자가 된다. 에밀과 조안이 보는 풍경을 함께 보고, 그들의 침묵을 함께 들으며, 세상의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삶을 함께 느낀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독자는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하늘은 언제나 우리 위에 있었다. 우리가 고개를 들지 않았을 뿐.’
글쓴이 : 박두규
시인, 지리산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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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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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보내는 편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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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 지리산에서 보내는 편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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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병오년 새해부터 이곳에서 새롭게 편지를 쓰려고 한다. 지리산 자락에 몸 붙이고 살면서 그 입은 은혜가 크니, 무엇이라도 좀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무슨 대단한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어 몸으로 품팔아 갚기는 어려운 처지이니 편지라도 써서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스스로 달래려는 수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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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구례인데 내 고향은 아니지만 아버지의 고향이다. 나는 전북 임실에서 태어나 전주에서 자랐지만, 결혼과 함께 내려와 지금까지 전남 사람으로 살고 있다. 그리고 고흥, 구례, 순천, 보성 등을 전전하다 은퇴하고 지금은 구례의 섬진강 하류 두텁나루숲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구례에서 보낸 세월이 20여 년이고 두 아이의 고향이 구례이다. 그리고 구례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뼈를 묻을 곳도 구례이니 나는 구례 사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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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에 살며 젊은 날에는 주로 지리산을 오르내렸다. 시름에 겨워 힘든 날에도 산은 늘 내 곁에 있어 주었고 먼저 말을 걸어왔고 묻지 않아도 대답해 주었다. 친구처럼 스승처럼 어머니처럼 산은 늘 그렇게 나를 살아 주었다. 그러다 나이가 들며 두텁나루숲에 거처를 마련하면서 강을 바라보는 날이 많아졌다. 구례를 사는 일은 지리산과 섬진강을 사는 일이기도 해서, 나는 분에 넘치는 이 고마움을 어떻게라도 보답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처음의 문을 이렇게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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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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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동짓날 이야기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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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동짓날 이야기 잔치
동짓날, 지리산 자락에 사는 활동가들이 모였다.. 지리산권의 전체 활동가들로 1년에 하지와 동짓날, 두 번 만난다.. 20대부터 70대까지 나이에 관계없이 모여 동지팥죽을 끓여 먹고 노래도 부르고 놀면서 이야기잔치마당을 연다.. 도시 사람들은 관심이 1도 없을 이야기를 3시간 동안 진지하게 말하고 또 듣는다..케이블카 대책위원회, 양수댐 대책위원회, 생수난개발 대책위원회, 골프장 대책위원회..등 무슨 세워야 할 대책이 이리도 많은지.. 그만큼 지리산은 여기저기 많이 아프다.. 그래서 우리가 내건 슬로건은 ..지리산을 그대로..이다.. 우리가 살면서 어쩌면 가장 많이 하는 말이..제발 나 좀 그냥 내버려 둬!..가 아닐까? 이 모임에 온 활동가라는 사람들은 사실 지리산 자락에 둥지를 틀고 오롯이 자신을 살고 싶은 사람들이기도 하다.. 어쩌면 ..지리산을(나를) 그대로..는 자신들 존재의 슬로건이기도 하다..지리산을 사랑하고 그런 自然스러운 삶을 살며 대자유를 꿈꾸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지리산
..행사장은 구례의 산책 도서관.. 산 보고 책 보고 산,책..
완성 된 팥죽..
20대부터 70대까지 어울려 노래하고 이야기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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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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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편지] 고마움은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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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움은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글의 제목은『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라는 책 제목의 패러디다. 이 책은 36년 옥살이를 한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 선생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만델라가 27년 옥살이 하고 대통령이 되었을 때 아직도 대한민국 교도소에는 30년이 넘은 장기수들이 수두룩하였고 선생은 그 중의 한 분이셨다. 하지만 나는 허영철 선생을 민족의 현대사를 정면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역사의 증인으로서보다 인간이라는 종(種)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가를 보여준 한 사람으로, 또는 삶 속에서 ‘고마움’이란 진정 무엇인가를 알려준 스승으로, 내 마음 속에는 그렇게 남아 있다.
오래 전 일이다. 어느 늦겨울 전주의 젊은 친구들이 장기수 선생님들을 모시고 구례 지리산 자락으로 나들이 와서 하룻밤 같이 보낸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이틀 동안 내내 한 순간도 놓치지 않는 그분들의 ‘고마워하는 마음’을 보았다. 맑게 갠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다는 고마움, 이마를 스치는 신선한 바람 한 줄기의 고마움, 그 표정이며 몸짓 자체에 깊게 배어 있는 그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선생의 말투 하나 행동 하나가 티끌만큼의 가식도 없이 너무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몸에 배인 고마움이라는 것을 누구라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하기야 36년을 오로지 수행으로만 보낸 세월인데 오죽하랴. 사과 하나를 건네받으며 사과 꽃을 피우게 한 햇볕과 뿌리를 적시게 한 비와 흙과 사과를 건넨 사람의 고마움까지, 사과 하나를 얻기까지에 기여한 세상의 모든 존재에 대한 고마움을 뼛속 깊이 새긴 자의 마음을 보았다.
고마워하는 마음은 겸허한 마음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마워하는 마음은 내 안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자아의 영역에 타자의 영역을 내어준 것이고, 겸허한 마음은 내 안에 타자의 영역이 자아의 영역보다 더 넓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처럼 삶 자체가 경쟁이고 살기 위해 경쟁력을 갖추려다 보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기적으로 살게 되고, 내 스스로 경쟁력을 갖춰 이만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스스로의 자만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상대방을 고마워하기 보다는 내가 그만큼 노력해서 경쟁력을 갖춰 얻은 것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타자는 경쟁의 상대요 대립적 존재이지 내 안에서 품어야 할 상대가 아닌 것이다. 우리가 고마워하는 마음과 겸허한 마음을 꾸준히 잃어온 것은 이러한 변화된 일상의 탓이 크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부를 창출하는 것만이 미덕이 되어버린 자본 중심으로 인간의 질서가 재편되면서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마음은 바닥을 치는 상태에 이르렀다. 사실 이 시대에 스스로 겸손해져서 상대를 진정으로 고마워할 줄 알고 낮은 자세를 취하며 사는 이가 얼마나 될까. 나를 내어주고 타자를 섬기는 겸허함은 현대의 일상에서 얼마나 유효한 덕목으로 남아 있을까.
나는 자아의 감옥을 벗어나 타자를 섬기는 선생의 그 텅 빈 마음의 ‘겸허함’을 보며 그것은 분명 36년의 옥살이 명상이 가져다준 깨달음일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렇게 사는 것이 진리의 삶이요, 나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라는 절박함을 우리는 언제나 스스로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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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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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편지] 단 한 명을 위한 간이역 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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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명을 위한 간이역 콘서트
‘율촌역’이라는 곳이 있었다. 지금은 폐쇄된 율촌역은 전국의 12개 역사(驛舍)와 함께 문화재청에 의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한다. 1930년 전라선이 개통되면서 만들어졌고 폐쇄되기 직전에는 열차가 하루에 2번 쉬었던 곳, 하루 열차 이용자가 다섯 손가락을 넘지 못했다는 초라한 간이역, 폐쇄일이 통보된 그날 그곳 역 마당에서 시노래 콘서트가 있었다. 그것은 지역의 이름 없는 가수와 시인 그리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 하는 하나의 기도 같은 거였다. 작고 초라하고 소멸되어가는 것들을 위한 기도를 시와 노래로 하는 콘서트였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사가 아니었기에 우리는 노을이 지는 주위의 편안한 시골 풍경과 잘 어우러질 수 있었다.
이 콘서트는 근대가 형성되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소멸되어 온 것들에 대한 레퀴엠에 다름 아니었다. 과학의 축적과 함께 근대가 진행되면서, 사과가 떨어지거나 강물이 흐르는 모든 자연현상을 수학적으로 계산해내고, 그 계산을 통해 자연을 착취하는 가운데 꾸준히 도태되어온 것들, 작고 힘없고 화폐가치로 환산이 안 되는 것들, 첨성산의 도롱뇽 같은 것들, 이 간이역처럼 끝내는 사라져야 할 것들, 그리고 또 그것들과 똑같은 처지의 사람들까지, 이 소외되고 소멸되는 것들을 위한 콘서트는 간이역 너머의 노을빛만큼이나 아름답고 슬펐다. 나는 이 콘서트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가 삶 속에서 꾸준히 잃어온 ‘가여워하는 마음’을 생각했다. 누군가, 무엇인가 그 대상과의 관계라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상대방의 ‘가여움’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 몸의 어느 구석에 힘겹게 숨 쉬며 남아있을 사랑의 마음, 자비의 마음이 바로 그 ‘가여워하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나는 내게서 버려진 안쓰러운 나를 가까스로 돌아볼 수 있었다.
콘서트의 막바지에 붉은 노을이 지고 막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율촌역에 드디어 하루에 두 번 쉰다는 그 두 번째 기차가 잠깐 멈추고 떠났다. 그리고 그 열차에서 단 한 명의 손님인 작고 꼬부라진 할머니가 내리더니 작은 보따리 하나를 들고 느릿느릿 역사(驛舍)를 빠져 나왔다. 우리는 그 단 한 명의 소중한 관객을 위해 시를 읽고 노래를 불렀다. 할머니 한 명을 위해서 존재할 수 있는 열차, 할머니 한 명을 위해서 열차가 멈추는 간이역, 그리고 할머니 한 명을 위해서 노래할 수 있는 콘서트를 위해서, 근대 이후 줄곧 잃어온 그 ‘가여워하는 마음’을 위하여, 우리는 혼신을 다해 노래했다.
......세상의 작고 가여운 것들의 어머니/ 서로 욕하고 싸우며 스스로 절망하는 것들의 어머니/ 어머니, 따뜻한 저녁밥을 지어놓고 애타게 우리를 찾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노을 속으로 흩어집니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의 그 따뜻한 목소리에 화답할 수 없습니다./ 아직은 어머니의 품으로 달려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나는 강남의 아파트가 부러워 보이고/ 누군가가 앞서 나가면 질투를 하고/ 내 자식만큼은 서울대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그러한 마음 때문입니다./ 세상의 불의와 폭력에는 분노하면서도/ 나의 불의와 나의 폭력에는 한없이 너그럽기 때문입니다......(졸시「어머니, 때죽나무꽃이 피었습니다」부분)...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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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