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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가 너무 슬프네
- ■ 2026 지리산에서 보내는 편지 5 오늘은 병원에 가는 날 오늘은 병원에 가는 날, 아내가 아픈지 벌써 3년째다. 다행히 열흘에 한 번 통원 치료하며 병을 어느 정도 관리, 유지하고 있는 편이다. 날씨가 좀 풀리니 아내는 걷기운동도 하고 봄나물도 캐면서 봄기운을 받아낸다. 나도 밭에 퇴비를 넣고 뒤집어 고르며 텃밭일을 시작했다. 감자와 생강을 심고 상추, 케일, 청경채, 아옥, 쑥갓.. 등 모종들을 시장에서 사와 심었다. 고장 난 외등도 고치고 마사토를 1톤 트럭 분 들여와 패인 잔디밭에 고루 뿌렸다. 집안일은 하다 보면 끝이 없다더니 과연 그랬다. 아내는 아내대로 나는 나대로 많이 달라진 일상 현실에 잘 맞춰 살고는 있으나 언뜻언뜻 어떤 결핍감에 시달리곤 한다. 누구나 그렇듯 갇힌 듯 사는 시간과 공간 아니냐고 달래보지만 크게 위안이 되지는 않는다. 오늘, 의사는 마냥 수혈에만 의지할 수는 없게 되니 골수 이식에 대비해서 대상자를 찾는 등 준비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준다. 그래, 지금까지만 해도 고마운 일이다 싶다. 20대 청춘에 만나 함께 살아온 날이 얼만데 이제야 부부의 깊은 정이라는 게 무언지 느끼게 해주는 날들이다. 같이 외출할 읍내의 오일장을 기다리는 하찮은 일상마저 사소한 기쁨으로 오는 하루하루가 소중한 날이니 그렇다. 전에는 아내를 시에 올리는 일을 꺼렸었는데 요즘은 아내를 대상으로 쓴 시가 많아졌다. 예전 같은 마음에 걸림이 없어진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내 삶의 중심으로 깊게 들어와 버렸기 때문이다. 아내와 관련된 시 2편을 첨부한다. ======================================= 가사가 너무 슬프네 아내를 태우고 화순 암센터 다녀오는 길 가로수 화려한 나무들은 바람에 꽃잎을 날리고 옆자리에서 아내의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끊어질 듯 가녀린 노래가 가까스로 이어지는데 .. 알뜰한 그 맹서에 봄날은 간다 겨우 한 소절 중얼거리더니 가사가 너무 슬프네, 하며 몸을 차창 쪽으로 뒤척이더니 말이 없다. 아마 아내는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을 것이다. 모처럼 밖으로 드러낸 아내의 마음에 나는 피할 수 없는 과녁이 되어 깊고 선명하게 박히는 화살 하나를 받아냈다. 누군가의 안으로부터 농축된 오랜 슬픔이 새어나 올 때 사람이 지극히 사랑스러워진다는 것을 알았다. 목까지 차오른 심정心情으로 차를 세우고 안아주고 싶었는데 차창을 스치는 가로수처럼 일상은 늘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간다. 사는 일의 무상無常함이야 일러 무엇하랴 어느새 두텁나루숲이 가까웠나 차창에 지리산 자락들이 가득 차 있고 저무는 빛들이 능선에 걸려 있다. --------------------------------- 아슬아슬한 세월 그렇게 사랑을 얻고 또 여읜다. 화려한 세상에 눈멀어 한세상 꿈속을 살며 사랑도 하며 꿈의 실상實相을 짐작해 보건만 서투른 사랑은 늘 구름처럼, 구름의 그림자처럼 시시각각 변하며 흩어지고 그렇게 형해形骸도 없이 사라지는 사랑이다. 사람들은 그래도 그 사랑에 대한 기억 하나로 아슬아슬한 세월을 건너고 그렇게 사랑을 얻고 또 여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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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예술
- 지리산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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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가 너무 슬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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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 일
- 미안한 일 이상국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시인으로 살며 언제부턴가 세상은 자꾸 넓어지고 나는 작아져서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던 시절이 있었지 어느 해 겨울 밤 아들의 주머니 속 손을 뜨겁게 잡고 마을 길을 걸으며 아버지는 가진 게 시밖에 없으니 너는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했지 지금 생각하면 아들에게도 미안하고 시에게도 미안한 일이었다 ======================================================== 시인으로 사는 일이 그렇다. 스스로 간절히 원해서 하는 일이지만 일용할 양식을 제대로 물어오지 못해 가족에게 미안하다. 그리고 가난은 나의 문제지 시의 문제가 아니어서 시에게도 미안하다. 시인이라는 존재로 사는 일만이겠는가. 세상에 태어나 무엇으로 산들 그게 가난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무엇으로 산다는 것, 무엇이 된다는 것을 늘 돈의 문제로 경제의 문제로만 규정짓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사느냐’라는 삶의 문제일 뿐이다. 돈의 문제는 알다시피 삶의 문제 중 한 부분일 뿐이다. 삶의 근원을 생각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내가 선택한 삶은 내 인생을 창조하고 발명하는 일이지만 돈에 끌려다니는 삶은 나를 잃는 삶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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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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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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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웅박 씻나락] "침묵이 깨지고 다른 말이 자라는 동네책방 살롱드마고" _달리
- 침묵이 깨지고 다른 말이 자라는 동네책방 살롱드마고 우리 책방 ‘살롱드마고’에는 세 가지가 없다. 입시용 참고서나 문제집,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는 자기계발서, 평생 권위를 누린 남성 문학가들의 작품집. 대신 다른 세 가지가 있다.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며 생각을 전환해 주는 인문서, 다양성과 페미니즘을 주제로 하여 소수자의 목소리가 담긴 장르별 도서들, 그리고 자기만의 언어로 세상을 한발 더 나아가게 하는 용감한 여자들의 이야기. 살롱드마고 곳곳에는 성소수자를 비롯해 누구나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환대하고 성폭력에 반대한다는 메시지가 책과 이미지로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 방문하는 사람들이 “들어오는 순간 왠지 안전하게 느껴진다”고 말하는 이유는 아마 살롱드마고만의 북큐레이션과 지향이 공간에 그러한 색을 입히고, 힘을 더하기 때문일 것이다. 살롱드마고는 2015년 남원시 산내면에서 여성주의 문화단체 ‘문화기획달’의 활동공간이자, 마을 여성들을 위한 창작·교육 공간으로 출발했다. 이후 조직을 재구성하며 ‘협동조합마고’를 창립하고 2020년 활동지를 남원시청 옆으로 옮기면서, 살롱드마고를 지역서점이자 페미니즘 문화공간으로 다시 열게 되었다. 현재는 카페를 같이 운영하면서 책방지기들이 추천한 초대작가들의 작품과 뉴스레터를 볼 수 있는 ‘아티스트 테이블’, 기록을 테마로 하여 필사와 다꾸(다이어리 꾸미기)를 할 수 있는 ‘플레이 라운지’, CD로 청음을 하며 음악가들의 도서 큐레이션을 볼 수 있는 ‘뮤직 바’ 등 다채로운 구성으로 책방의 경험과 가능성을 확장했다. 독서와 기록, 퀴어에 관한 귀엽고 개성 있는 굿즈들도 판매해 보는 재미를 더한다. ‘살롱’은 과거 유럽에서 문학가와 예술가, 철학자들이 모여 토론하고 사교활동을 하는 장이었는데, 주로 귀족 여성이 공간의 주인이거나 모임을 주도했다고 한다. ‘마고’는 지리산 여신의 이름으로, 신성한 창조주로서의 힘을 상징한다. 우리는 살롱드마고가 그 이름들의 유래처럼 지역 여성들이 만나고, 공부하고, 각자의 재능과 창조성을 발휘하면서 함께 힘을 나누고 성장하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책방이 단순히 책 파는 곳을 넘어, 책을 매개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는 곳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남원 같은 농촌 마을 위주의 소도시 지역에서는 문화적 갈증과 욕구를 충분히 해소하기 어려운데, 살롱드마고에서 여는 글쓰기모임이나 독서모임, 타로 워크숍, 문화예술 프로그램은 시민들에게 일종의 해방구이자 실험무대가 된다. 특히 가부장적인 지역사회에서 성역할을 강요받는 여성들은 책방에서 같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대화하면서 잃었던 자신의 꿈과 목소리를 되찾는다. 몇 년 전 글쓰기모임 참여소감 중 “이제 주변을 배려하느라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겠다”는 말은 우리에게 큰 감동과 울림을 주었다. 공동체의 좁은 관계망 속에 ‘나’를 드러내기 힘들었던 사람들이 책방에 와 위로와 지지를 경험하고, 자신의 삶에서 다가오는 도전과 두려움에 맞설 힘을 키워가는 것이다. 미국의 장애인권여성운동가 해릴린 루소는 책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 마라』에서 “우리를 속박하는 것은 우리의 다름이 아니라 침묵”이라 했다. ‘다른’ 존재와 말을 품어주는 울타리가 넓어질수록 우리는 더 자유롭고 충만해지며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살롱드마고의 고요한 서가에서, 경청을 약속하는 모임 테이블에서, 매일 침묵이 깨진다. 그곳에 ‘다른’ 말이 자란다. *한겨레신문에 기고했던 글 “지리산 여신 마고의 책방, ‘살롱드마고’에 없는 것”(2023.03.03.)을 <지리산人> 뒤웅박씻나락 칼럼에 맞게 수정한 글입니다. 글쓴이_달리 살롱드마고 책방지기 [뒤웅박 씻나락 칼럼] 지리산 자락 삶이 우리 사회의 대안적 삶의 모습이 되길 꿈꾸는 <지리산人>의 바람을 담아, 지리산 곳곳에 계신 씨앗 같은 이들의 삶과 생각을 싣고자 합니다. 칼럼 글쓴이의 일부 주장이 <지리산人>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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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
- 뒤웅박 씻나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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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웅박 씻나락] "침묵이 깨지고 다른 말이 자라는 동네책방 살롱드마고" _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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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자편지]함께읽기9 김정희: 바라는 삶을 살고 싶은 해바라기 벗들에게
- 지리산인>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벗자편지>>를 펴낸 니은기역 출판사입니다. 자급을 어렵게 하는 허울을 벗어던지고 나와 둘레를 돌보며 고귀한 하루를 살려는 농부들의 편지, <<벗자편지>>를 여기 <지리산인>에 한 달에 한 번, 한 꼭지씩 들려드려, 어느덧 마지막 편에 왔습니다. 마지막까지 함께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나의 시간을, 나의 생산수단을, 나의 재주를 좀 더 아름답게 쓰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이 용기를 주면 좋겠습니다. 바라는 삶을 살고 싶은 해바라기 벗들에게, “담대한 결론에 도달하는 일은 이미 우리 안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김정희 식물을 키우면서 세상에 대해서 새삼 다시 생각해 본다. 채소와 과일은 맛이 다 다르고 특성도 다르다. 사람도 그럴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가 타고난 특성이 다 다르고, 잘할 수 있는 재능이 다 다를 텐데. 그러나 세상이 정한 잣대는 하나뿐. 능력으로만 줄을 세웠다. 사람에게 등급을 매기고 어릴 적부터 성적으로 평가하고, 어른이 되어서도 치열한 경쟁 속에 내몰려 하루하루 버텨 갔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의 공통적인 삶이자 고민이다. 조금은 여유 있게, 사람다운 삶을 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지만 좀처럼 벗어나기란 어려웠다. 모두가 경쟁 사회에 내몰려 남보다, 아니 내 옆에 가장 가까운 친구보다 한 발짝이라도 뒤떨어지면 패배자로 취급받는 게 오늘날 현대인의 삶이 아닌가. 아파트 평수에서부터 성적 순위, 직급 순위, 모든 게 경쟁으로 내몬다. 어떻게 하면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사람은 저마다 타고난 능력과 재능이 있고, 자신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분야가 제각각인데. 이걸 인정해 주는 사회가 아니었다. 누가 인정해 주지 않아도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가 제 능력을 기를 마음의 여유도 없다. ‘언젠가는 이걸 하고 싶어. 언젠가는 내가 예전에 좋아했던 일, 내가 잘했던 것을 하고 싶어. 그런데 지금은 아냐. 지금은 여유가 없어. 나중에, 나중에…….’ 나도 하고 싶은 게 있었다. 그러면서 현실이라는, 나 스스로 만든 울타리에 갇혀 정작 내가 가고 싶은 길을 막았다. 물론 어릴 적부터 작가가 되고 싶은 게 꿈이어서 그 길로 쭉 걸어왔지만, 꿈이 일상이 되니까 또 다른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사회가 들이미는 잣대에서 벗어나 좀 더 여유 있는 삶, 좀 더 다양한 세상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 그렇게 50대 중반에 정해진 경로를 벗어났다. ‘실험 삼아 딱 1년만 어때?’ 도시에 살면서 언젠가는 시골로 내려가서 살고 싶다는 희망을 막연히 꿈꿨다. 꿈과 희망이지만 당장 눈앞에 놓인 현실은 만만찮았다. 나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도 늘 비슷한 넋두리를 했다. “시골에 내려가서 살고 싶지만, 당장 뭐 해서 먹고살아.” 문제는 먹고사는 문제였다. 누구나 평생 고민하는 문제. 그 문제에 매달려 꿈도 희망도 스스로 접어 가면서 현실에 매달려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는 게 대부분 사람의 삶이 아닌가. 나 역시 막연히 꿈만 꾸었다. 시골로 내려간다고 내가 여태껏 해 온 책 쓰는 일을 접어야 하는 게 아닌데도, 오랫동안 도시 생활에 익숙해서 몸이 멀리 떠나는 게 왠지 망설여졌다. 용기가 없었다. 그렇지만 도시라는 욕망과 경쟁과 치열함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언젠가는 시골에 내려가서 텃밭을 일구며 자연과 더불어 살고 말겠다며, 아주 낭만적인 세상을 꿈꾸면서 가끔 인터넷 검색을 했다. 산과 들판과 바다가 어우러진 터전. 밤이면 하늘에 별이 반짝반짝 빛나고 푸른 들판이 펼쳐진 곳. 그저 온라인 검색으로 마음을 달랬다. 그러다 때마침 서울과 그리 멀지 않은 화성에 내 상상과 비슷한 터전, 그리고 전원주택이 셋집으로 나왔다. 화성은 반으로 갈라서 반은 동탄이라는 아파트 숲이 있고, 나머지 반인 서해 바닷가 쪽으로는 강원도권이라고 일컬을 만큼 시골 분위기가 나는 지역이라고 했다. 농촌 풍경과 바닷가가 어우러진 마을이라니, 얼른 구경이라도 해 보고 싶은 마음이 부풀었다. 옆지기에게 말하려니 좀 조심스러웠다. 그도 언젠가는 시골에 들어가서 살고 싶다며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미루고 미루어 왔다. 돈을 더 벌어서 가자는 뜻이었다. 대체 그 ‘때’가 언제인지, 자꾸 미루다 보면 결국은 포기하고 말 것 같았다. 신경전이 벌어졌다. 나라고 당장 모든 걸 접고 가자는 건 아닌데. 주위 사람들 조언에 따라, 어디든 정착하기 전에 일단 셋집을 구해서 살아 보고 그다음에 정착을 하든지 말든지 결정하자는 거였다. 그래야 나중에 후회가 덜하다고 하니. 당연히 처음부터 도시나 아파트 생활을 다 접고 산골짜기나 궁벽한 촌으로 가자고 하면 덜컥 겁나는 게 현실이다. 갑자기 환경이 완전히 바뀌고, 그것도 살 곳이 어떤 곳인지도 잘 모르는데 당장 내려가자 하면 거부감이 드는 게 당연하다. 왜 시골로 내려가 살고 싶다면서 안 가느냐고 따지거나 대거리를 하면 서로 싸움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그냥 부담 없이 가볍게 나들이 가는 마음으로 가 보자고 나름 꾀를 낸 것이다. 그럼 마음에 부담이 덜할 것 같아서. 내 제안에 옆지기는 마지못해 길을 나섰다. 찾아간 집은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 적어 두었던 모양보다 훨씬 큰 전원주택이었다. 집을 직접 지은 옆지기가 세상을 먼저 떠난 후에 비워 둔 집이라고 했다. 나무도 많고, 전면이 유리로 된 거실과 이층 창이 갑갑한 마음을 탁 트이게 했다. 널찍하고 비교적 깨끗한 전원주택을 보면서 마음이 흡족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지만 옆지기 반응이 어떨지 몰라서 내 의견을 먼저 꺼내지 않았다.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그도 극구 반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망설였다. 여전히 우리에겐 시골에 들어와 살 용기가 부족했다. “실험 삼아 딱 1년만 살아 보자.” 시골 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지 없을지 일단 한번 살아 보자고 고민 끝에 뜻을 모았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마음을 정한 김에 계약하고 바로 이사를 준비했다. 마음만 품고 도전하지 않으면 늘 제자리에서 끙끙 앓기만 할 테니까. 때는 11월 말이어서 김장이며 이것저것 겨울 준비도 해야 하고, 너무 추워지기 전에 이사하는 게 마음이나 생활에 안정이 될 것 같아 망설임 없이 저질렀다. 그렇게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시골살이를 시작했다. 50대 중반에 말이다. 시골 생활은 하루가 길었다 길어도 너무 길었다. 하루 24시간이 아니라 36시간, 어쩌면 멈춰 버린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밤과 낮은 어김없이 바뀌었다. 그런데도 시간이 길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마음부터 먼저 느슨해진 탓일 거라고 여겼다. 화성시는 시골이 아니라고 하지만 내가 들어간 면 소재지 마을은 바다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이고, 누가 봐도 농촌 마을 풍경이었다. 하루에 노란색 마을버스가 몇 번 오갈 정도니 승용차가 없으면 마음대로 나다닐 수도 없는 그런 마을이었다. 도시와 아파트, 빡빡하게 돌아가는 일상생활, 늘 시간에 쫓기듯 계획을 하고 일정을 마쳐야 하고, 시간이 아니라 분까지 쪼개 홀로 계획했던 생활에서 한결 벗어난 기분이 들었다. 시간뿐 아니라 공간도 넉넉했다. 드넓은 하늘과 탁 트인 시야, 넓고 끝없는 들판, 하늘을 그리며 날아다니는 새들이 비록 겨울이지만 정겹기 그지없었다. 마치 꿈꾸던 세상에 성큼 들어온 것 같아 흐뭇한 마음마저 들어 일부러 겨울 들판과 뒷산을 오르내렸다. 하루가 얼마나 긴지, 왜 이런 세상을 그동안 몰랐을까. 내가 살아온 세상에서 훨씬 벗어나 어느 곳엔가 존재하고 있었을 텐데. 시간이란 게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것이라 여겼는데, 얼마나 주관적인지 깨달았다. 시간 개념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고즈넉하고 한가한 분위기에 젖어 있다가도 때로는 심심했다. 빡빡하게 돌아가는 생활에서, 싫든 좋든 서로 부딪히며 살아야 하는 공동생활에서 벗어나니까 마치 두꺼운 껍데기를 벗어 버린 것 같아 가벼웠는데, 아직은 이런 생활을 어떻게 메워야 할지 몰라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이런 심심함마저 즐겨야 한다는 걸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일명 ‘자본주의 병’이라는 병에 걸려서 살았던 걸까. 한가하게 보내는 시간을 즐기면서도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남들은 다 열심히 바쁘게 사는데 나만 한가하게 보내니까 세상에 뒤떨어지지 않을지, 지인들과 멀어지지 않을지, 책을 내는 출판사와 너무 멀리 떨어져서 뒤처지지 않을지, 온갖 잡념이 밀려들었다. 한때는 도시에 살면서 성냥갑 같은 아파트에서 평생을 보내며 살기는 싫다고 생각했는데. 자연에 가까운 삶, 조금은 여유를 부리면서 밤하늘을 쳐다보며 별을 감상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책을 읽는 ‘주경야독’의 삶을 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막상 그렇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심심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사람 마음이 이래서 변덕스럽다고 했던가. 마음에서 일어나는 이 불안을 처음에는 그대로 방치하다가 다른 일을 찾아냈다. 심심할 때는 심심한 대로 그대로 멍하니 산과 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거나 아니면 그동안 읽지 않았던 책을 집어 읽었다. 원고 쓰는 데 매여서 책 읽기를 조금은 미루어 두곤 했는데, 심심한 시간을 메우려고 책을 읽기 시작하자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원래 책 읽는 걸 좋아했다. 내가 사는 세상을 벗어나 또 다른 세상에 들어가 볼 수 있고, 내가 알지 못했던 세계도 책을 통해서 느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원고를 쓰기 시작하면서 해마다 책을 내야 한다는 생각에 원고 쓰기에도 하루하루가 바빴다. 나도 모르게 책 읽는 일에 소홀했다는 걸 책을 손에 잡으면서 깨달았다. 불안한 마음이 들 때는 ‘이건 자본주의 병이야. 이제 느리게 느긋하게 사는 삶을 살아야 해.’ 하면서 마음을 다독거렸다. 이론으로만 생각하던 걸 현실에서 살려니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태껏 습관처럼 하루에 원고 몇 매라도 써야지 마음이 놓였는데,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하루 이틀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해결이 되었다. 농사일이 점점 커져 일이 많아지고 머리가 아닌 몸을 쓰는 삶을 사니까 피곤해서라도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짧은 시간 안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따뜻한 팥죽 한 냄비 겨울이어서 그런지 밖에 나다니는 사람도 좀처럼 보이지 않고, 마을에 모여 사는 집이 여덟 집뿐이었다. 다닥다닥 붙어 살아도 별로 교류도 없고 데면데면한 도시와 달리, 시골은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사람들끼리 정이 끈끈했고 그만큼 외지인을 낯설고 부담스러워하는 듯했다. 그런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이 내 마을에 들어와 사는지, 어떤 사람들이 마을에 무슨 해를 끼치지나 않을지 걱정되는 건 당연했다. 그래서 선뜻 낯선 집에 문을 두드리기가 망설여졌다. 아마도 도시에서 살아오면서 타인과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게 습관이 되어 이런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70대가 한 분, 대부분 80대였다. 몇십 미터 뚝뚝 떨어진 아랫집이나 윗집 둘레를 산책하다가 어쩌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만나면 어색하게 인사를 하는 정도였다. 왠지 무뚝뚝하고 마뜩잖은 듯 겨우 인사만 받아 주고는 집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침, 일어나니까 문 앞에 낯선 양은냄비가 놓여 있었다. 이게 뭐지, 하고 뚜껑을 열어 보다가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팥죽이었다. 오늘이 동짓날이었다. 순간, 가슴이 울컥했다. 아직 인사 정도만 하는 사이인데 누가 팥죽을 갖다 놓은 것이다. 그것도 말도 없이 조용히 갖다 놓고 갔다. 불현듯 팥죽에 얽힌 추억이 떠올랐다.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신 엄마는 동짓날이 되면 그 전날 밤에 팥죽을 쑤었다. 경상도 풍습이었다. 그때는 오랜 관습으로 팥죽을 쑤면 사람이 먹기 전에 대문 밖으로 나가 담벼락을 돌며 팥죽을 던졌다. ‘고수레 고수레’ 하고 팥죽을 던지면서 나쁜 기운과 악귀가 물러나서 새해에는 집안을 평안하게 해 달라고 빌었다. 엄마가 살아 계실 때는 동지가 되면 어김없이 팥죽을 쑤었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뒤에는 한 번도 팥죽을 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우리 집으로 들어온 팥죽이 까마득히 잊힌 추억을 되살린 것이다. 내가 영천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한겨울이라도 눈이 많이 오지 않는 지역인데 갑자기 눈이 펑펑 쏟아졌다. 일부러 눈을 맞으며 얼마나 좋아했던지. 엄마가 팥죽을 끓이는 동안, 우리 골목 이웃 골목 아이들까지 죄다 나와서 강가에서 눈싸움을 벌였다. 그 장면이 마치 아련한 추억처럼 떠올라 마음마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참 아련한 시절. 오래전에 돌아가신 엄마가 떠올라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져 왔다. 냄비에 손을 갖다 대자 따듯한 기운이 전해져 왔다. 알지 못하는 사람의 따듯한 마음이 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일단 맛있게 먹고 나서 낡은 양은냄비의 주인을 찾기로 했다. 그분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맛있게 먹는 게 팥죽을 쑤면서 고생하신 데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옆지기를 깨워 낡은 양은냄비를 내밀면서 팥죽이 문 앞에 놓여 있었다고 하니까, 부스스한 몰골로 감탄을 쏟아 냈다. “이게 시골 인심이야. 아직 시골은 이런 인심이 남아 있었네.” 웃음을 지으면서 흐뭇해했다. 팥죽을 맛나게 나눠 먹었다. 양은냄비 주인은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윗집 할머니였다. “아무래도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라 팥죽을 좋아할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오늘 동지니까 나눠 먹고 싶어서 살짝 갖다 놨어. 맛있게 먹었다고 하니까 고마워.” 할머니가 오히려 고맙다고 했다. 이 일을 계기로 80대 부부를 모시고 외식도 하고, 서로 날마다 들여다보는 관계로 발전했다. 서로 음식도 만들어 갖다주고, 세상 사는 얘기도 나누곤 했다. 할머니가 좋게 소개해 주신 덕택이었을까. 마을에서는 한결 나한테 호의적으로 대해 주었다. 길을 가다 마주치면 먼저 웃으면서 인사를 하고, 서로 덕담을 나눌 정도였다. 마을 사람들에게 한층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한번은 가뭄이 이어지는 어느 날 허리가 반쯤 고꾸라진 할머니가 휠체어에 20ℓ나 되는 물통을 얹어서 힘겹게 오시다가 길에서 쉬고 있었다. 내가 인사를 하자 활짝 웃는 얼굴로 반겨 주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얘기 많이 들었어. 마을에 좋은 사람이 들어와야 하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내가 할머니한테 왜 집에서 힘들게 물을 가지고 오냐고, 우리 집에 지하수가 펑펑 나오니 그걸 쓰면 되잖냐고 했다. 그랬더니 우리가 이사 오기 전까지 이 집에는 마을 사람들이 발을 들이지 않아서 아예 생각도 안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지하수를 호수로 빼서 꼬부랑 할머니네 밭에 내다 주었다. 고추와 들깨 밭이 시원한 물로 흠뻑 젖어서 금세 생기를 되찾았다. 할머니는 무척 고마워했다. 그러면서 아주 조심스럽게, 넓은 밭에 듣는 사람도 없는데 작은 목소리로 일러 주었다. “그 집에는 마을 사람들이 안 가! 얼마나 인색한지 밭에 물 한 번 쓰게 해 달라고 부탁하면 자기들 한 달 사용하는 전기세를 몽땅 물으라고 했어. 그게 몇만 원이야. 사람이 그렇게 살면 안 돼! 그래서 앞집에 지하수가 잘 나오는 걸 알면서도 부탁하지 않았어. 밖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어떻게 말할지도 모르고. 그런데 먼저 물을 주겠다고 해서 얼마나 고마운지. 우리 밭에 열무 나면 뽑아 가서 열무김치 담가 먹어. 들깨도 한 가지에 한 개나 두 개씩 따서 먹어. 한 가지에서 너무 많이 따면 열매가 잘 안 열리거든.” 할머니도 내가 물을 내준 데 대해서 기꺼이 마음을 내주었다. 그제야 안 일이지만 마을 사람들이 내가 세 들어 사는 집에 발을 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나는 원래 그런 줄 알고 지냈는데 다 까닭이 있었다. 시골 생활은 내가 막연히 상상하던 낭만이나 꿈같은 생활만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웃과 소통하면서 아름다워진다는 걸 갈수록 깨달았다. 윗집 할머니가 콩과 여러 가지 씨앗을 갖다주었다. 그러면서 씨앗을 심을 시기와 어떻게 심어야 하는지, 언제쯤에 비료를 넣어 줘야 하는지 꼼꼼하게 설명해 주었다. 원주민들의 넉넉함이 농사를 짓는 데뿐 아니라 생활에도 도움이 많이 되었다. 마음을 먼저 내어 준 그 보답으로 가끔 모시고 나들이를 하면 노부부는 무척 좋아하고, 먹고살려고 일만 하느라 놀러 한번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고 넋두리도 하셨다. 그렇게 다녀오고 나면 할머니는 또 밭에서 수확한 팥이며 콩이며 지인이 주었다는 액즙까지 골고루 갖다주었다. 부침개라도 부치거나 빵이라도 사 오면 약소하나마 나눠 먹으면서 서로 안부를 묻고, 제대로 잘 자라지 않는 작물에 관해 물어 조언을 받기도 했다. 모르는 걸 물으면 귀찮아할 줄 알고 조심스러웠는데, 오히려 즐거워하면서 대견해했다. 자신이 여태껏 살아온 삶을 누군가에게 가르쳐 주는 것만으로도 즐거우셨나 보다. 세대를 넘어 마음을 나눌 마을 동료가 생겼다는 데서 나 역시 평화를 느꼈다. 마트에서 고르던 채소를 내 손으로 키우면서 만난 세계 텃밭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마트에서 사 먹던 작물을 내 손으로 키워 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장을 보고 치르는 돈이 훨씬 적어지고 생활비 부담도 줄었다. 내 노등으로 키워서 먹는다는 사실도 신기하고 흐뭇하지만, 무엇보다도 밭에서 시간을 보내며 작물이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게 무척 보람을 느끼게 했다. 작은 씨앗에서 수많은 열매가 매달리고, 푸성귀가 무럭무럭 자라나는 걸 보면 작은 씨앗 하나가 온 우주를 품고 있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 작은 씨앗에서 어떻게 식물이 무럭무럭 자라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작물의 성장 세계는 내가 알지 못한 무한한 세계였다. 씨앗에서 싹이 트고, 작물이 자라면 내가 반찬으로 뜯어 먹고, 밭에 남은 작물은 저 혼자 자라서 꽃을 피웠다. 그 사이에도 온갖 벌레들이 작물에 들러붙기도 하고, 나비나 벌들이 꿀을 빠느라 부지런히 날아다녔다. 식물에게는 괴로움이면서 즐거움일까. 이 시간을 보낸 덕에 열매를 맺고, 또 작은 씨앗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내 먹거리를 길러 먹는 삶을 통해 자연 순환 원리가 얼마나 위대한지,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세계를 경험하게 되었고 그 덕에 창작 의욕이 새롭게 일어났다. 내 마음에 창작 씨앗이 들어오고, 그 씨앗은 내 마음속에서 무럭무럭 자라 꽃을 피웠다. 물론 포기하고 싶은 순간순간이 오기도 했지만 잘 참으며 열심히 작업했다. 그러고 나니까 결국은 열매를 맺었다. 식물이 자라는 과정과 작은 생각 씨앗이 책으로 나오는 과정이 비슷하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어서일까. 글 쓰는 일이 보람되고 견딜 만했다. 흙을 맨손으로 만지면서 나도 모르게 무아의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흙이 손에 묻으면서 지저분해지는 게 아니라 계속 만지다 보니까 오히려 내 마음을 정화해 주었다. 살아오면서 겪은 수많은 일들, 그 가운데서도 행복했던 기억보다 속상하고 슬픈 일이 느닷없이 불쑥불쑥 떠올랐다. 나를 슬프게 속상하게 했던 사람들, 왜 그때 바로바로 문제를 제기하고 부당함을 말하지 못했는지 뒤늦게 후회가 되었다. 후회가 내 마음에 상처로 자리 잡고 있었나 보다. 그럴 때 흙을 만지면 상처도 나쁜 기억도 속상했던 일도 시나브로 치유되어 갔다. 일부러 흙을 만지고 싶어 장갑을 끼지 않곤 했는데 엉뚱한 부작용도 생겼다. 면사무소에서 무인발급기로 서류를 떼려고 했는데 기계가 내 엄지손가락 지문을 인식하지 못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손이 거칠어서 지문이 찍히지 않는다는 말을 공무원에게서 듣고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비용을 두 배나 치르고 서류를 떼곤 했다. 장갑을 껴야지 했지만 흙만 보면 맨손으로 만졌다. 내 오랜 도시의 때를 벗기고 싶은 마음이 더 컸나 보다. 맨손으로 흙을 만지면 마음이 깨끗해지는 듯했다. 나중에는 손가락이 닳아서 어쩔 수 없이 장갑을 끼기 시작했다.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마을 쓰레기 버리는 요일을 정해서 같이 버리자고 제안했다. 그러면 분리배출도 할 수 있고, 쓰레기도 불에 태우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고 구구절절 설명했다. 그래도 시큰둥하기에 날씨와 미세먼지 이야기를 꺼냈다. “해마다 장마 아니면 가뭄이어서 농사짓기 힘들잖아요. 날씨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서 늘 걱정하면서요. 미세먼지가 너무 많아서 겨울에는 밖에 나가기도 힘들고요.” “아이그, 그것 좀 태우고 버린다고 날씨가 이럴까 봐.” 어른들은 날씨와 공기와 쓰레기 분리배출 사이 관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괜히 어른들한테 잘난 척한 건 아닐까 염려가 되기도 했다. 주거지를 완전히 농사짓는 시골로 옮기고 나서는 기후 문제와 공기 오염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했다. 언젠가는 환경문제에 대해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고는 차일피일 미루었는데, 막상 시골로 오니까 피부로 눈으로 바로 느낄 수 있었다. 그 심각성도 더 절실하게 깨닫게 되고. 도시에서는 하늘이 좀 흐린 것쯤으로, 비가 좀 많이 내린다는 것쯤으로, 뉴스에서나 책으로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알았다. 그런데 농사를 지어 보고 자연 속으로 들어와 보니까 환경이 얼마나 절실하게 나빠져 가는지 보여 불안하기까지 했다. 마을 할머니들은 밭에 뿌릴 종자 씨는 적어도 3년 정도는 잘 보관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해마다 장마와 가뭄이 번갈아 바뀌면서 자칫 종자도 건지지 못하는 세상이 올지도 몰랐다. 살다 보니까 여러 가지 문제와 부딪혔다. 그 가운데 하나가 쓰레기 문제다. 음식물은 텃밭에 흙을 파고 묻어서 거름으로 만들 수 있지만 다른 쓰레기는 언제 처리해야 하는지 몰랐다. 사람들에게 물어도 쓰레기 수거 차가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면사무소에 전화를 거니까 청소과가 따로 있다면서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두 번이나 전화를 바꿔 가면서 언제 쓰레기를 거둬 가느냐고 물었는데,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내가 사는 마을에는 쓰레기 수거차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도 쓰레기를 따로 버리지 않아서 차가 들어오지 않는다고. 쓰레기를 분리해서 버리는 게 여태껏 당연한 거라고 여겼는데 여기서는 번거롭게 전화를 걸어야 하고, 요일과 대충 시간을 잡아야 버릴 수 있었다. 어찌나 불편하던지 마을 할머니들한테 쓰레기는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빈 병은 모아 놓으면 고물상에서 가져가고, 음식물은 밭에서 썩혀 거름으로 이용하고, 다른 비닐이나 생활 쓰레기는 통에 넣고 한꺼번에 불 질러 태운다는 것이다.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사는 사람들은 과학이 아니라 몸으로 깨달으면서 자연의 변화를 더 빨리 깨닫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날씨와 쓰레기 분리배출 문제는 따로라고 여기는 데는 변함이 없었다. 환경문제를 처음 접한 게 90년대 초반이었다. 최열 선생님이 ‘공해추방위원회’를 만들어 환경문제 시민 교실을 열었다. 지금 ‘환경연합’이 생기기 전에 생긴 시민단체였다. 아직 문학 수업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그런 시민 교실 강의가 있으니 함께 공부하러 가 보자고 여럿이 의견을 모았지만 결국은 나와 후배 둘이서만 등록을 했다. 원자력, 핵폭발, 공해 문제를 다룬 강연은 내게 큰 충격을 주었지만,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환경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치 남의 나라에서만 일어나는 문제로 여겼다. 물론 그즈음에 대구 낙동강 페놀 사건이 한바탕 언론을 달구었지만 한 지역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으로만 보아 넘겼다. 환경문제 공부를 하러 다닌다니까 오히려 주위에서는 쓸데없는 공부를 다닌다면서 차라리 그 돈으로 술이나 먹자고 했다. 그때는 그런 분위기였다. 그래도 환경 공부를 했다고 실천에 옮기겠다면서 샴푸와 린스를 사용하지 않고 세숫비누로 머리를 감았다. 될 수 있으면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고 물건도 전기도 물도 아껴야 한다는 걸 실천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세숫비누로 감은 머리는 기름기가 많아서 찝찝해 다시 샴푸를 사용하고, 일회용품도 문명의 혜택이라며 편리한 대로 썼다. 물과 전기를 아껴야 한다는 건 어릴 적부터 몸에 익은 습관이었지만, 다른 것은 대충 넘겼다. 환경문제를 강연이나 책을 통해 머리로만 느꼈지, 피부에 와 닿게 내 문제로 여기지 못한 까닭이 아니었을까. 시골로 들어오니 내가 만든 쓰레기를 온전히 다 볼 수 있었다. 더군다나 서해와 가까운 곳이라 겨울철만 되면 미세먼지가 점점 더 하늘을 잿빛으로 뒤덮는 게 눈에 띄었다. 눈에 보이니 그제야 심각성을 좀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도 한꺼번에 모든 걸 바꾸는 건 정말 어려웠다. 아무리 텃밭에서 먹거리를 생산한다지만 여전히 마트에서도 장을 봐야 하는데, 대파 한 단, 호박 하나를 사도 비닐봉지에 포장되어 있지 않나. 고기를 사도 생선을 사도 두부를 사도 비닐이나 스티로폼 상자에 담겨 있는데 마트에서 장을 보면 어찌 쓰레기를 안 만드나. 예전에는 포장되어 나온 식품을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막상 신경을 쓰니까 포장지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래서 줄일 수 있는 만큼 줄이려고 애썼다. 비닐봉지도 처음에는 10분의 1로 줄여 보자고 했는데, 비닐 홍수 시대에 살다 보니 금세 첫 목표는 이루었다. 그다음은 20분의 1로 줄였지만, 그래도 몽땅 줄일 수는 없었다. 대신 비닐봉지는 재활용할 수 있게 양념이나 다른 이물질이 묻었으면 깨끗이 씻어서 분리해 버렸다. 그런데 포장재를 깨끗이 씻느라 흘러간 물 역시 또 다른 쓰레기가 된다고, 하수 처리에도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쓰인다고, 게다가 분리배출한 생활폐기물이 실제 재활용되는 비율이 60%도 채 안 된다32고 하니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분리배출을 잘하는 일보다 덜 사고 쓰레기를 덜 만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게 된다. 자연스레 배달 음식을 일체 사 먹지 않게 되었다. 물론 손쉽게 사 먹을 수도 없는 조건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치킨은 두 마리 시켜야 읍내에서 배달해 준다는 것이다. 굳이 그렇게까지 아득바득 먹어야 하는지 나 자신에게 의문이 들었다. 피자, 족발, 치킨 등등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전화 한 통으로 배달해서 손쉽게 먹던 습관에서 이 기회에 완전히 끊어 버리자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껏 맛있게 먹던 음식을 한꺼번에 끊자니 자꾸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배달을 시켜 먹던 음식에서 가끔 먹고 싶은 욕구가 솟으면 직접 찾아가서 사 왔다. 먹기가 불편해지니까 사 먹는 음식을 많이 줄일 수 있었고, 내 손으로 직접 마련해 먹기 시작했다. 밖에서 사 먹는 음식보다는 솔직히 맛이 덜했다. 온갖 양념과 사람들 입맛에 착 달라붙게 연구해서 만든 음식을 어떻게 따라가겠나 생각하고, 건강과 환경을 챙긴 대신 중독성 있는 양념을 좀 포기하자고 마음먹었다. 배달 음식을 끊고 나자 이번에는 미용실에 꼭 가서 머리카락을 잘라야 하는지 또 의문이 들었다. 머리는 미용실에 가서 해야 한다는 공식이 깨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집에서 스스로 가위로 자르고 들쭉날쭉한 뒤쪽 머리카락은 옆지기에게 부탁해서 잘랐다. 내가 미용실에 드나들지 않자 옆지기도 내게 머리카락을 정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인터넷에서 머리 자르는 기계를 사서 앞머리 쪽은 남편이 자르고, 뒤에 보이지 않는 쪽은 내가 정리해 주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솜씨도 늘었다. 시골에서 이렇게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나니 생활비를 줄일 수 있었다. 서로 머리카락을 잘라 주면서 장난도 치고, 얼마나 예쁜지 거울을 들여다보며 킥킥거렸다. 내 존재는 내가 결정한다 2년쯤 지나자 조금씩 시골 생활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다시는 도시로 나가서 아파트에서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도시 집을 정리하고, 세 얻은 집에서 나와 완전히 시골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때쯤에 농사를 더 늘리면서 식량을 자급자족 형태로 바꾸었다. 세상살이는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예전에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게 지금은 꼭 맞춰 살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들을 만날 때는 될 수 있으면 화장을 해야 하고, 옷과 신발을 갖춰 입어야 하고, 남에게 흠 잡히지 않겠다면서 외출을 할 때 거울이라도 한 번 더 들여다보는 도시 생활.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다. 그러나 내 몸에 피부처럼 배인 습관을 하나둘씩 벗어 내면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쓸데없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내 모습 그대로 편하게 대할 수 있어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물론 도시에 살면서 누가 억지로 그렇게 꾸미고 남에게 잘 보여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회 분위기와 스스로 만든 굴레에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생긴 대로 나를 드러내기, 외모와 옷으로 평가하는 문화에서 스스로 벗어나기, 겉을 꾸미는 일보다 내 색깔을 찾는 일에 집중하기, 그리고 화학물질로 내 몸을 망가뜨리지 않기. 내 시골살이에서 찾은 지혜들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그동안 미루어 오던 환경문제에 관한 책을 쓰기 시작했다. 나만이 알고 나만이 실천할 게 아니라, 널리 알리면서 함께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하나씩 실천해 나가면 지구 평균기온이 오르는 걸 조금이라도 더 늦출 수 있지 않을까. 도시 삶을 끊으려고 맘먹기까지 많은 핑곗거리와 제약 조건이 퐁퐁 튀어나올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럴 때 나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자. 내 커리어가 내 옆에서 나와 함께 늙어 가는 사람들보다 중요한가? 내 식욕이 나를 지탱하는 이 지구보다 중요한가? 내 외모가 내 건강보다 중요한가? 좀 더 편리한 삶이 내 생존보다 중요한가? 우리 생존을 위협하는 기후위기 상황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답하기를 두려워하는 것뿐. 담대한 결론에 도달하는 일은 이미 우리 안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젠 마음으로 품고 있던 생각에서 실천을 향해 발걸음을 떼면 된다. 그러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먼저 내 마음과 몸의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고, 다른 생명을 덜 해칠 수 있고, 또 지구 환경 위기를 해결해 나가는 데 기꺼이 동참할 수 있다. 지금 힘들고 어렵고 세상이 막막하더라도 내 존재의 권리와 행복을 위해서 기꺼이 희망을 품어야 한다. 누가 이렇게 말한 게 내게는 큰 힘이 되었다.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보다도 더 젊어서 무슨 일인가에 원하는 게 있으면 충분히 도전해 볼 수 있다’고. 도전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지금 내 현실이 막막하고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이라고 여겨지면, 그 감옥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것도 용기이다. 결국은 환경도 나이도 경제적 형편도 내 모든 도전을 지배할 수는 없다. 환경이 힘들고 어렵고 막막하면 그 환경을 바꾸어 사는 삶에 도전해야 한다. 가만히 그대로 환경이 바뀌기를 바라기만 하면, 그런 행운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먼저 찬찬히 살펴보아야 한다. 내가 원하는 삶이 한꺼번에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만 말고, 그 방향을 향해 한 발자국 먼저 내딛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고, 내 존재는 내가 결정한다는 걸 늘 명심해야 한다. 오늘날을 사는 모든 사람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 김정희 ◌ 귀촌해 농사를 지으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도시라는 욕망과 경쟁에서 벗어나고파 시골을 택했는데, 그동안 머리와 마음으로만 살던 삶에서 몸으로 사는 노동을 병행하는 삶을 이루었습니다. 실천하지 않고 머리로만 사는 삶은 건강할 수 없다고 늘 생각해 왔거든요. 그동안 역사에 관심이 많아 <<국화>>, <<야시골 미륵이>>, <<노근리 그 해 여름>>, <<대추리 아이들>>, <<곡계굴의 전설>> 등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다룬 작품들을 꾸준히 써 왔습니다. 농사를 짓고 살면서 환경 문제에 절실함을 느껴 <<후쿠시마의 눈물>>, <<시화호의 기적>>, <<비닐봉지가 코끼리를 잡아먹었어요>>, <<별이네 옥수수밭 손님들>>, <<아마존의 수호자 라오니 추장>> 등 여러 책을 썼습니다. ** 여러 각주가 있으나 <지리산인> 지면엔 표기하지 않았습니다. 책에서 확인해 주세요. <<벗자편지>> _자급하는 삶을 어렵게 하는 허울을 벗어던지자 • 지은이 : 김혜련, 칩코, 똥폼, 문홍현경, 풀, 상이, 아랑, 김정희 • 펴낸 곳 : 니은기역 • 펴낸 날 : 2022년 11월 22일 • 판형 120*188 / 쪽수 256쪽 • ISBN 979-11-968328-4-1 (03330) 글이 마음에 드신 분은, 동네 도서관에 신청해서 여러 사람이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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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자편지]함께읽기9 김정희: 바라는 삶을 살고 싶은 해바라기 벗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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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곰1%가게유람기] 일상을 아름답게 하는 작은 미술관, 도엔효
- [반달곰1%가게유람기] 일상을 아름답게 하는 작은 미술관, 도엔효 벚꽃이 피기 시작한 3월의 어느 봄 날, 하동 화개에 자리한 작은미술관 ‘도엔효’를 찾았다. 화개초등학교와 화개중학교 사이에 자리한 이 곳은 예전 구멍가게 자리였다. 아이들의 참새 방앗간이었을 그 곳에 이제는 하동을 찾은 여행객, 지역의 예술가, 주인장과의 찻자리가 그리운 이웃들이 한가로이 드나든다. 마을 이웃과 함께 둘러앉은 도엔효의 주인장 효원님은 향긋하게 우려낸 차의 첫 잔을 만물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한 켠에 올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 고향은 함양이에요. 30년 전 서울에 살 때 학교 선배가 차를 우려서 내주었는데 맛이 아주 부드럽고 향기가 순했어요. 선배에게 ‘이 차 어디서 났느냐.’ 물었더니 하동이라고 해서 그 길로 바로 하동으로 내려와 ‘도재명차’에 갔죠. 거기서 다음날 해가 뜰 때 까지 밤새 차를 마셨는데 그 이후로 어디에 살든 5월이 되면 바람결에 차 향기가 나는 것만 같았어요. 지리산과 섬진강, 그리고 차에 매료당했던 것 같아요. 봄에 이 곳에 오지 않으면 마치 상사병에 걸린 것처럼 몸이 아프곤 했기 때문에 아무리 바빠도 봄이 가기 전에 여기 와서 차 향기를 맡고 갔어요. 그러다 29살 때 짐을 싸서 하동으로 내려왔죠.” 자연스러운 재료로 만들어진 일상을 아름답게 하는 물건들 문을 연지 12년이 된 작은 미술관 도엔효는 리넨으로 만든 옷과 소품, 흙으로 빚은 도자기와 지리산 자락에 사는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전시, 판매하고 있다. ‘수돗가나 강가에 버려도 탈이 없는 재료로 만든다.’고 소개하는 정성어린 물건들이 참 따스하고 곱다. 도엔효에 있는 리넨 옷과 소품은 주인장인 효원님이 자연스러운 소재의 원단으로 만든 것들이다. “어릴 때부터 ‘산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산에서 뭘 해서 먹고 살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을 때 잉여적인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전쟁이 나도 옷을 짓는 일은 필요하겠더라고요. 한 글자로 되어있는 단어들이 인간의 삶에 근원적으로 닿아있다고 생각해요. 밥, 옷, 집, 몸 같은 것들이요. 이 중에서 저는 손쓰는 것을 좋아하니 옷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처음에는 천연염색 원단으로 이불을 만들다가 소품을 하게 되었고 옷도 만들게 되었어요. 옷은 인간의 ‘예’를 갖추는 수단이기도 해서 제가 살아가고자 하는 방향과 더 맞다 생각했어요. 옷을 만들 때 되도록 합성섬유가 들어가지 않는 천연 섬유를 사용해서 만들고 있어요. 이것이 버려졌을 때 어떨지 생각해요. 옷으로 인한 환경 악영향이 아주 크니까요. 겨울옷에 들어가는 털은 가끔 폴리에스테르를 쓰기도 해요. 그렇다고 동물 털을 사용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효원님이 직접 만든 옷과 소품들은 도엔효 공간 안에서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과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때로는 편안한 ‘배경’이 되고, 때로는 일상을 아름답게 하는 ‘주인공’이 되기도 하면서. “아무리 좋은 물건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제 자리에 있을 때 충만하다고 느껴요. 패브릭은 ‘배경’이예요. 배경만 가지고 공간을 꾸미고 싶지 않았어요. 작품이나 조명이 주인공이 되기도 하지요. 좋아하는 것들로 조화롭게 가꾸어나가고 있어요. 컵받침은 컵 아래에 놓였을 때 조화로운 거니까요.” ‘삶’을 닦는 일터 ‘삶’과 ‘일’의 방향성이 같기를 바란다는 효원님은 일상에서 끝없이 스스로를 살피고 매 순간 올곧게 존재하는 사람처럼 평화로워 보였다. 물건을 파는 직업을 가졌지만 사용하지 않을 물건은 판매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이곳에 살아가며 자연에 온전히 녹아든다고 느껴요. 덕분에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유지되고 있다 생각하지만 작은 어려움들은 늘 있어요. 이런 일을 하면 집에 짐이 참 많은데 그럴 때 고민이 되기도 해요. ‘이렇게 많은 짐을 짊어지고 사는 게 맞을까?’ 물건을 파는 일을 하는 것에 대해서도 늘 생각해보게 되죠. ‘손님들이 이 옷을 사가서 잘 입으실까?’ 안 입으실 거면 사지 말라고 하기도 해요. 기분 나빠하는 손님도 계시지만 저는 물건을 사서 안 입고 안 쓴다고 하면 마음이 무거워져요. 물건을 만들 때 일상에서 잘 쓰일지 늘 고민해요. 물건도 잘 써야 생기가 생기니 만물이 잘 쓰여 지면 좋겠어요. 물건에 전혀 관심이 없는 손님이 오시거나 그냥 차 한 잔만 하고 가셔도 괜찮아요. 나답게 번 적은 돈으로 나답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렇게 잘 되지 않을 때도 있겠지만 스스로 알아차리려고 매 순간 노력하고 있어요.” 반달곰을 사랑하는 1% 가게 도엔효에 들어서는 입구에는 ‘반달곰을 사랑하는 1%가게’임을 알리는 포스터가 이 공간을 찾는 사람들을 반긴다. 지리산과 섬진강을 사랑하고 누구에게든 평안을 바라며 차를 내어주는 도엔효가 ‘반달곰을 사랑하는 1%가게’가 된 것은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지 않을까? 버려도 탈이 없는 재료로 만든 아름다운 것들로 채워진 공간에 지리산과 반달곰을 사랑하는, 그러니까 ‘자연스러운 삶’을 사랑하는 여행객들이 종종 찾아온다. “조용하게 사는 편이지만 목소리 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는 참여하기도 해요. 반달곰 가게는 구례에 사시는 윤주옥님과의 인연으로 시작하게 되었는데 고민할 것도 없이 함께 하겠다고 했죠. 이런 연대는 언제든 환영입니다. ‘깨어있다’라는 것이 어느 한 부분에만 국한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해요. 만물에 깨어있다면 삶의 방향이 ‘생명’으로 확장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아요. 불교의 ‘연기’라는 건 세상 만물이 연결되어 있는 거잖아요. 나 혼자만 방 안에서 깨어있을 수 없죠. 내가 마시는 물, 공기, 물건이 모두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동물권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이르게 되는 것 같아요.” 반달곰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단순히 ‘반달곰’을 좋아한다거나 ‘동물’의 개체를 지키고 서식 환경을 개선해야한다는 뜻만은 아닐 테다. 반달곰을 사랑한다는 것은 “필요하지 않은 물건은 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라고 말하며 향긋한 차 한 잔 내어주는 평화로운 마음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혹은 세상의 소중한 것들을 위해 크고 작은 마음을 담아 연대하고 기꺼이 자신의 공간과 이익을 나누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반달곰1%는 지리산권 가게들이 자발적으로 진행하는 공존프로그램이다. 반달곰1% 가게에 가면 반달가슴곰을 자연스럽게 만나고, 특별히 계획하지 않아도 반달가슴곰 보호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2021년 5개 가게로 시작한 반달곰1%는 2026년 현재 구례 11곳, 하동 11곳으로 늘어났다. 반달곰1%는 ‘유랑인증서’를 발행하고 있는데, 손님들이 반달곰1% 가게에 들러 물품을 먹거나 마시거나 구입하면, 반달곰1% 가게들은 수익금의 1%를 사단법인 반달곰친구들에 기부하고, 그 기부금이 모아지면 사단법인 반달곰친구들과 논의하여 올무수거 활동, 무인센서카메라 구입 등 반달곰 보전활동을 위해 쓰기로 약속하였다.] 글쓴이_ 정수진 하동으로 이주한 지 4년이 되었습니다. 겨울이 오면 남편과 함께 인도와 네팔에서 NGO 활동가로 살아가고, 꽃피는 봄이 오면 하동으로 돌아와 민박집을 엽니다. 텃밭을 가꾸고 이웃 농부들의 농산물이 잘 쓰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요리하고 나누어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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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곰1%가게유람기] 일상을 아름답게 하는 작은 미술관, 도엔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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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젖줄, 530리 섬진강길 걷기(2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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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젖줄, 530리 섬진강길 걷기(2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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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에 흐르는 지리산
- 내 몸에 흐르는 지리산 『지리산人』 편집위원들과 함께 피아골로 들어요, 어릴 적 밟던 산 흙을 밟는 걸음이 무거운 것은 두렵기 때문이죠. 앞서는 걸음이 불확실해 품기만 하던 피아골 품에 들어갑니다. 숨은 항시 따라붙는 것이라 숨결처럼 달라붙는 산에서 나는 작아집니다. 쓰러져 있는 신갈나무가 병들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중이에요. 우리는 매장에 관해 말합니다. 수목장이 좋을 것 같아요. 조장이 괜찮겠어요. 얼른 떠오르지 않은 단어를 품고 기다립니다. 화장, 화장은 한 생애를 태우는 고통이지요. 지리산이 듣고 있어요. 앞서가는 선재님이 진달래 꽃잎을 따 먹습니다. 꽃 맛은… 진달래가 떨고 있어요. 뒤따르던 지리산도 진달래 몇 잎 따서 먹었답니다. 상추처럼 시원하고 신선한 첫맛? 바람은 듣지 못하여서 흔들거려요. 쓰러진 나무 아래 겹겹이 쌓인 낙엽 위로 이끼긴 바위 아래 돌계단이 휘청합니다. 산에서 산을 꼭 잡고 서요. 입 마른 산수국 꽃잎이 툭툭 말을 겁니다. 시는 산수국 꽃잎처럼 오가며 말을 겁니다. 지리산에 묻어둔 기억은 표고막터 거쳐 그리던 삼홍소에 빠진 산 그림자 한번 보려는데 봄이라고 부슬, 봄이라고 부슬, 비가 내려 쌉니다. 삵의 똥은 까맣게 삵의 흔적을 말합니다. 가던 길 멈추고 힘들다는데, 말하지 않아도 오르막은 힘든 법이랍니다. 진달래 숨결은 보드라운데, 산바람 할퀴고 피는 진달래라고 씁니다. 지리산이 듣고 있어요. 사방이 지리산이라 나는 피아골 대피소로 피해 숨을 돌립니다. 피아골을 들이마십니다. 비로소 산에 있어요. 멀리서 그리던 산에 왔어요. 하여 넘어져도 가고 넘어져도 산인 지리산에서 오던 길 다시 돌아 산을 또 내려갑니다. 그렇게 『지리산人』 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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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에 흐르는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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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환의 절기 이야기] 제비가 돌아오는 3월3짓날과 청명
- 청명 즈음해 드는 명절이 한식입니다. 명절은 대부분 음력으로 따지는데 한식만 예외로 양력으로 따집니다. 동지 105일 후를 한식으로 하거든요. 근데 하필 왜 105일일까요? 맞습니다. 이게 15일 정도 간격으로 오는 절기에 맞추다보니 그리 된 거지요. 동지 이후 청명까지 7개 절기가 드니 15일 곱하기 7개하면 105일이 되거든요. 중국 춘추시대 진晉나라 때 산에 숨어살며 나오지 않는 개자추라는 충신을 끌어내기 위해 불질렀다가 그 불에 타죽어 왕이 그날만은 불을 지르지 않고 찬밥寒食을 먹었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게 한식날입니다. 근데 그 고사는 중국 얘기이니 잘 모르겠고요, 제가 볼 때는 봄에 농사 준비로 불 테우는 일을 한식과 청명 전에는 끝내고 조상 산소에 찾아가 잘 올라온 잔디를 밟아주거나 뗏장을 가져다 입혀주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산소까지 테워서도 안되지만 또 그 때되면 봄비도 오기 시작해 불 태울 일도 없을테니요. 청명과 관계된 음력 명절로는 3월3짓날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이날을 명절로 삼아 동네 잔치를 벌였답니다. 우리는 1월1일 설날, 3월3일 삼짓날, 5월5일 단오날, 7월7일 칠석날, 9월9일 중구절 등을 길한 날이라 해서 명절로 삼았어요. 이 날들이 전부 양(+)을 뜻하는 홀 수가 겹치는 날이라 길하게 본 겁니다. 양이 겹쳤다는 의미의 중양절이라고도 하죠. 그래 3월3짓날은 1월에 시작한 봄기운이 완연해지는 날로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 했습니다. 삼짓날이 그만큼 날씨가 봄답게 온화하다는 뜻도 있지만 그래서 씨앗 파종하기 딱 좋은 때라는 게 중요하죠. 말하자면 씨앗 심고 싶은 철인데요, 사람들에겐 사랑을 나누기 딱 좋은 철이기도 합니다. 아마 바람둥이 제비족이란 말도 이와 관련있을 법한데요, 그렇지만 마구 씨를 뿌려대면 쭉정이만 나올 수 있으니 제비족 같은 바람둥이는 경계하란 뜻이 담겨 있을 거라 상상해봅니다. 마찬가지로 봄과 관계된 것으로 바람이 있지요. 생각할수록 바람이란 말은 참 재밌습니다. 옛날엔 바람을 하늘님의 숨이라 했어요. 그래 하늘님이 노하시면 태풍 같은 무서운 바람이 불고 하늘님이 기분 좋으면 살랑살랑 사랑의 봄바람이 불지만 인간이 오버해 미혹한 바람을 일으키면 사단이 났던 거지요. 성경에서 하느님이 흙으로 인간을 빚은 다음 코에다 사랑의 숨을 불어넣었다 하는 것도 비슷한 얘깁니다. 청명이 되니 모든 봄꽃이 만개를 하네요. 옛날엔 순서대로 꽃이 폈는데 요즘은 경쟁하듯 한꺼번에 핍니다. 거의 제일 먼저 피는 개나리가 보통보다 일주일 늦게 피더니 곡우 즈음해서 피는 조팝꽃이 벌써 폈어요. 벗꽃은 자기 순서 기다린 듯 개나리 피기 무섭게 피네요. 올해는 음력이 늦어 개나리가 늦게 핀 듯 한데, 벗꽃 조팝꽃은 일찍 피니 늦은 음력 탓하기가 힘듭니다. 음력이 늦어 감자나 봄 채소들은 늦게 심으려는데 벗꽃 조팝꽃 일찍 핀 걸 보면 벼와 곡식들은 늦게 심는 게 능사는 아니겠어요. 문제는 서리에 약한 고추 같은 과채류들입니다. 음력이 늦은 올해 같은 경우 늦서리가 올 가능성이 농후하기에 되도록 늦게 심는 게 좋을 것 같거든요. 여전히 저희 밥상엔 나물이 끊이지 않습니다. 마늘 대용인 달래는 기본이구요, 돌나물, 씀바귀, 부지갱이도 늘 올라오는 밑반찬이지요, 잠깐잠깐 요 때만 먹을 수 있는 눈개승마 나물도 입맛을 돋구는 데 모자람이 없더만요. 제가 울릉도 미나리라 이름 붙인 전호나물도 생채로 초고추장에만 찍어 먹는데 그 맛이 그만입니다. 요즘엔 원추리 나물과, 머위나물이 핫 이슈입니다. 머위나물은 살짝 비린내 같은 게 있지만 들깨가루에 무치니 그 맛은 사라지고 머위 고유의 향과 맛이 살아나대요. 원추리 나물은 독이 있어 망설이다 작년부터 먹기 시작했는데 진짜 감동이더이다. 독을 제거하기 위해 조금 더 세게 대쳐야죠. 식감과 우러나는 단맛이 끝내주고 입맛을 돋구는 데 다른 반찬이 필요없어요. 청명이 다가오니 이젠 나무 순들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합니다. 제일 먼저 올라온 두릅에서부터 다음 주부터는 나무 순들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또 군침이 도네요. 구 기자 순, 엄나무 순, 화살나무 순, 다래 순, 오가피 순, 가죽나무 순이 순서를 기다릴 겁니다. 나무 순 중에서 최고라는 옻나무 순만 먹어보질 못했어요. 나물을 이렇게 많이 먹는 나라도 드물지만 옻순처럼 독이 있는 나물을 즐기는 사람들은 더 없을 겁니다. 한 번은 옻닭 백숙 먹으러 갔더니 식당에서 옻독 오르지 않게 약을 주대요. 약이라면 손사래치는 체질이라 걸리면 걸리라지 하며 약 먹지 않고 먹었는데 멀쩡했어요. 아마 이것저것 나물 많이 먹으며 내성이 생긴 것 아닌가 싶었죠. 청명엔 아무거나 심어도 싹이 잘 나지만 그래도 파종하는 날은 음력 삼짓날과 양력 절기인 청명과의 관계를 잘 살펴 잡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청명과 음력 삼짓날 사이에 파종날을 잡는 게 좋다고 보시면 됩니다. 청명은 절節이고 곡우는 중中이어서 청명은 2월에 들 때도 있고 3월에 들 때도 있어요. 곡우는 중이어서 꼭 3월에 들지만요. 그래 청명이 어느 달에 드느냐에 따라 파종 시기가 달라집니다. 방금 청명과 삼짓날 사이에 심는다 했죠. 그러니까 청명이 2월에 들면 삼짓날 전에 심어야 하니 음력으론 일찍 심고, 청명이 3월에 들면 삼짓날 지나 심어야 하니 음력으론 늦게 심습니다. 그렇지만 양력으로 보면 반대에요. 음력으로 빠르면 양력으론 늦게 심고 음력으로 늦으면 양력으론 빨리 심는다는 거죠. 말로 하니 헷갈리지만 손으로 달력 메모장에 써가면서 하면 금방 파악이 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청명 농사일정 글을 쓴 안철환 선생은 온순환협동조합, 전통농업연구소 대표이고 경기도 안산에서 ‘산림생태텃밭 먹거리숲 농장’을 운영한다. 남은 음식물과 똥오줌, 커피 찌꺼기를 받아 직접 거름 만들기를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 토종 종자와 전통 농업 살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25년 전, 처음으로 심은 배추 씨가 3일 만에 싹 트는 걸 보고 ‘씨 안에 누가 있었구나!’ 깨닫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우리가 먹는 배추는 단순히 물질적인 먹을거리가 아니라 나와 별 차이 없는 생명이며, 그래서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먹고, 생명과 소통하고, 생명과 하나 되는 일이라고 믿는다. 쓴 책으로 《시골똥 서울똥》(2009), 《24절기와 농부의 달력》(2011), 《호미 한자루 농법》(2016), 《토종농법의 시작》(2020)이 있고, 옮긴 책으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2004)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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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수는 지역에 이용의 우선권이 있는 공공재다. 물 이용의 생태적 원칙 (지리산 지하수 이야기 3)
- 물 이용의 권리와 생태적 원칙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한 물. 물은 누구의 것일까요? 빗물과 강물, 바닷물, 지하수의 형태로 우리 몸 밖에 존재하는 물은 대표적인 공공재로, 소유권을 주장할 수는 없지만 물사용의 우선권은 예로부터 존재해 왔습니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깨끗한 샘 주변으로 마을이 형성되었고, 샘은 공동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계곡수나 저수지의 물은 수원과 가장 가깝고 위치가 높은 경작지에서 먼저 사용할 권리를 가지지만, 초과된 물을 바로 아래로 흘려보내어 밑에 사는 사람이 차례대로 이용하고, 오염시키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이때 우선이란, 시간적 우선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양적인 뜻이 아닙니다. 그 물은 어차피 아래로 흘러갈 것이었므로, 양적인 우선을 주장해보았자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마실 물을 떠가는 경우에는 사람이나 동물이 지고 갈 수 있는 양, 토기 항아리에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는 양을 떠갔기 때문에 이것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일단 사람의 수 자체가 적었지요. 인공수로가 발명되고, 금속관이 발명되고, 플라스틱관이 발명되면서, 사람들은 멀리서 물을 끌어오고, 더욱 밀집된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식수와 생활용수를 공급하는 수도관 뿐 아니라, 마침내는 여기저기 지하수 관정을 뚫고, 플라스틱 호스로 옆 골짜기의 물을 대량 끌어다가 농업용수, 산업용수로 쓰고, 급기야는 병에 물을 담아 팔기 시작하면서, 지표수와 용천수 이용의 생태적 원칙은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관정과 수로를 내가 만들었으니, 이 물은 내것이야 내가 오래 살던 산동네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논에는 작은 샘이 있어서 도랑에 물이 흐르지 않는 가뭄에도 그 물을 모아 농사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위쪽에 있는 논에서 관정을 뚫어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가뭄에 모내기를 하기 위해 조금씩 받아놓은 우리 논물이 몇 시간만에 쫄딱 사라져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관정을 통해 지하의 물이 빨려 들어가 지표면의 물도 사라진 것이죠. 위에서 관정을 돌리니, 우리 논의 자연샘은 싱크대의 배수구처럼 작용했습니다. 윗논 주인은 그 물을 사용해 논을 갈고 모내기를 한 다음, 여분의 물을 바로 아래인 우리 논에 내려 보내주지 않고, 플라스틱 호스를 이용해 한참 저 아래에 있는 자기 논으로 내려보냈습니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다시 물을 모으기 위해 관정을 꺼버리자, 윗논 주인이 와서 쌍욕을 했습니다. “씨발새끼야, 나도 먹고 살아야지! 내가 우선이야!” 하면서요. 바로 옆의 골짜기에도 우리 논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우리가 가장 꼭대기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 옆 골짜기의 논에서는 우리 논이 있는 골짜기의 위쪽에 호스를 박고 봇도랑을 만들어 물을 끌고 갔습니다. 계곡물이 다 옆 골짜기로 흘러가서 우리 논에는 흘러들어오는 물이 없었습니다. 봇도랑을 막고 우리 논에 물을 대면, 새벽같이 와서 물을 끊어 놓아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봇도랑이 우리 논보다 위에 있으니, 자신이 우선이라는 논리를 펼쳤습니다. 쌍욕을 주고 받고, 홧병에 걸릴 것 같은 나날이 며칠 지속되었습니다. 문제는 우연한 죽음으로 해결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괴롭히던 그 사람이 이른 아침에 트랙터를 몰고 마을에서 논으로 향하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오다가 커브에서 절벽으로 떨어져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무섭고 끔찍한 운명의 타격이었죠. 다들 속으로 그가 천벌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부서져서 못쓰게 된 트랙터는 한참 동안 그의 논 옆 길가에 방치된 채 놓여 있었고, 그렇게 우리를 괴롭혀서 물을 모아놓은 그의 논은 농사지을 사람을 잃은 채 한동안 방치되었습니다. 결국 마을에 사는 다른 사람이 그가 관리하던 논에 늦은 모내기를 했습니다. 그는 왜 이렇게 악착같이 물을 빼앗으려 했을까요? 잘 알려지지 않은 물부족의 이유 한 가지 시골마을에 물싸움은 예사라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한반도의 벼농사는 기원전 10세기에 시작되었으며, 높은 산골짜기라 할지라도 논이 만들어진지는 수백년이 됩니다. 논과 둠벙은 지역에서 나는 물의 양에 걸맞게 만들어진 거라서, 이례적인 가뭄이 들지 않는 한 조금씩 배려하고 아끼면 충분히 골고루 쓸 수 있었습니다. 인력으로 나무를 캐고 돌을 쌓아서 논을 만드는 것은 엄청난 중노동이므로, 애초에 물이 부족한 곳은 시도할 가치가 없습니다. 즉, 논이 있는 곳에는 원래 충분한 물이 있었던 것입니다. 산골마을에서 물 부족 현상은 이상기후 이전에 다랑논을 경지정리해 큰 논을 만들고, 트랙터로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부터 나타났습니다. 큰 논에서 트랙터로 논을 갈 때는 작은 다랑논에서 소로 논을 갈 때에 비해 한 번에 훨씬 많은 양의 물이 필요합니다. 경지정리를 해서 논이 들판처럼 너르게 된 후, 골짜기의 소농들은 다른 골짜기의 물을 끌어오고, 여기저기 관정을 뚫지 않으면 농사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 관정들이 다 신고되거나 허가받은 것도 아닙니다. 농업 생산의 기계화, 규모화는 다랑논을 무가치하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경지정리를 안 할 수도 없었죠. 물부족은 강우량과 기후만이 원인이 아니라, 삶의 양식과 문화, 문명의 방향성, 인간사회의 규칙과 큰 관계가 있습니다. 현대적 생태공학과 기업이 공생할 때 그런데 이런 소농들 간의 물싸움은 생수공장과 주민의 싸움에 비하면 별일이 아닙니다. 고작 논 몇 마지기에 물을 대기 위해서 옆 골짜기 계곡물을 끌어와 쓰거나, 100m 이내의 농업용이나 가정용 관정을 무단으로 파서 쓰는 것 때문에 가까운 이웃이 피해를 볼 수는 있어도, 이 때문에 지역의 지하수가 전체적으로 고갈되지는 않습니다. 충전되는데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는 표층수이고, 뽑아 써도 어차피 그 지역의 땅을 적시는 용도이니까요. 주민들의 미신고·무허가 관정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생수공장에 있습니다. 생수공장은 수천년간 충전된 암반수를 사유화하고, 어마어마하게 뽑아올려 전국으로, 외국으로, 다른 대륙까지 보내 버립니다. 삼장면에 있는 또 다른 생수공장 LK샘물 대표 로라 킴 희자 제이는 재미교포 사업가로, 지리산 물을 미국의 월마트에 납품하고 있습니다. 로라 킴은 부경대에서 생태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만학도로, 사단법인 한국생태공학회의 편집이사이기도 합니다. 로라 킴과 관련된 다음 기사는 생수산업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기업의 썩은 현실을 보여줍니다. 로라킴의 미국 탈세에 관한 기사1: https://sundayjournalusa.com/2021/08/26/%ec%83%9d%ed%83%9c%ea%b3%b5%ed%95%99-%eb%b0%95%ec%82%ac%ec%b6%9c%ec%8b%a0-77%ec%84%b8-la%ec%97%ac%ec%84%b1%ec%82%ac%ec%97%85%ea%b0%80-%eb%a1%9c%eb%9d%bc-%ea%b9%80/#google_vignette 로라킴의 생태공학 박사 학위 취득 기사 2: https://www.pknu.ac.kr/main/51?action=view&no=331800 기업과 한몸인 생태공학이 과연 생태일지 의심스럽습니다. 학문은 때로 공유재를 사유화하는 합리화의 도구가 되고, 학위는 그 라이센스로 작용합니다. 무엇이든 돈으로 바꾸어내고, 투자한만큼 버는 자본주의 세상이니 당연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방심하는 사이, 기업은 공유재를 사유화하기 위한 법과 전문가들을 만들어 두었고, 스스로 생태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최후의 전환 일본에서 한국산 생수가 많이 소비된다고 합니다. 후쿠시마 방사능 유출 사건으로 일본의 지하수가 의심스러우니, 건강을 지키기 위해 한국에서 온 물을 마시는 사람도 있을 거 같습니다. 프랑스 에비앙을 한국에서 사마셔도 내돈내산이니, 지리산물이 명품으로 인정받고 해외에서 소비되는 것도 K-문화의 진출로 홍보됩니다. 수원지의 주민들은 전혀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을 평범한 소비자는 알리가 없습니다. 샘과 우물, 계곡물을 사이좋게 이용하기 위해 예로부터 전해지는 지혜와 규칙이 있지만, 현행법에는 명문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미 발명된 수로와 관, 펌프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고, 도시에 밀집한 인구를 고르게 분포시킬 방법도 묘연합니다. 도시에 사람이 모일수록, 도시의 목소리만 커지고, 그나마 자연이 남아 있는 시골은 오염산업의 귀착지가 되어 황폐해지는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잃어버린 공유재를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요? 슬로베니아에는 물을 판매하는 행위 자체가 헌법에 불법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 나라에는 생수산업이 발을 붙일 수가 없지요. 공유재를 기반으로 사적 이윤을 얻는 행위를 금지하거나, 영향권 안에 있는 모든 주민의 직접적 동의를 얻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조건을 붙이지 않으면, 자연과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생태계는 보호받지 못할 것입니다. 수원과 가까이 사는 주민에게 물이용의 우선권이 있다는 단순한 고대의 지혜로 돌아가서, 이 규칙을 법으로 체계화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리산 지하수 이야기 4. 보이지 않는 땅속에서 일어나는 일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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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수는 지역에 이용의 우선권이 있는 공공재다. 물 이용의 생태적 원칙 (지리산 지하수 이야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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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젖줄, 530리 섬진강길 걷기(1일차)
- 섬진강길 걷기 1일차 ■ 걷기 개요 일시 : 2026년 3월 16일 (월) 총 거리 : 13km 소요 시간 : 약 3시간 ■ 걷기 인원 : 총 16명 ■ 출발지 도착까지 일정 (총 3시간) - 08:00 구례 냉천삼거리 출발 - 데미샘자연휴양림 주차장 도착 (1시간) * 데미샘 휴양림 ↔ 백운면사무소 차량 이동 (1시간) - 10 : 00 휴양림 → 데미샘 이동 (30분) * 데미샘에서 고천제 행사 (30분) ■ 걷기 세부 일정 11:00 데미샘 출발 - 데미샘 -> 백장로 -> 반송마을 (8km / 2시간) 13:20 반송마을 도착 - 반송마을 회관에서 점심 14:20 반송마을 출발 - 무등마을, 덕현교, 백운면사무소 (5km/1시간 20분) 15:40 백운면사무소 도착 - 15:40~16:20 차량 회수 (왕복) 출발 17:20 구례 도착 □ 출발지 주차장 주소 (데미샘자연휴양림 안내소)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 백운면 데미샘1길 172 □ 도착지 주차장 주소 (백운면사무소)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 백운면 임진로 1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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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젖줄, 530리 섬진강길 걷기(1일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