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보기
-
-
[안철환의 절기 이야기] 맥류 계절의 시작, 한로
- 좌:앉은뱅이밀, 우:겉보리, 중:밀타작:밀은 앉아서 살살 몽둥이로 두드려도 잘 털립니다. 쉬운 농사에 더해져 애칭인지 멸칭인지 애매한 '건달농사'라는 표현의 근거가 되었을 겁니다. 9월령12지지 중 9월은 끝계季 자를 써서 가을의 끝 계추季秋이지만 끝은 마지막이 아니라 깊어짐을 뜻합니다. 단풍이 점점 깊어지듯 말이죠. 인생도 늙어지면 끝으로 가는 게 아니라 더욱 깊어져 다음 인생(후손)의 터전이 되겠지요.한로는 보통 음력 9월에 드는데 올해는 음력 8월28일에 들었네요. 한로가 빨리 온다는 겁니다. 일교차도 점점 커져 추위도 빨리 오는지 벼가 하루하루 다르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올 여름 무궁화 꽃이 늦게 피어 서리도 늦게 올 것 같았는데 요즘 날씨로 봐선 요번엔 무궁화가 틀릴 것만 같은데 봐야 알겠어요. 9월은 12지지로 술戌월입니다. 술은 진辰(3월), 미未(6월), 축丑(12월)과 함께 그 계절의 끝이면서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과도기입니다. 그 중 술은 오행으로 토土이면서 음양 중 양으로 말하자면 양토陽土입니다. 여기서 양은 따뜻하다기보다 건조한 가을 기운으로 보는 게 맞습니다. 그러니까 가을의 땅은 마른땅이란 거죠. 마르지 않고 습하면 땅의 저장 기능이 망가집니다. 반면 너무 가물면 겨울의 가문 한파로 흙이 유실될 수 있으니 적당히 가문 게 좋습니다. 도둑질 하듯 바쁜 한로서리 내리는 상강을 앞두고 날씨가 하루하루 서늘해지는 한로를 맞으니 마음이 부산럽습니다. 게다가 들깨 수확도 다 마치지 못했는데 갑자기 감기가 찾아와 3일을 밭엘 못 갔습니다.가을 수확은 거두는 일보다 탈곡과 도정 그리고 마무리 일이 훨씬 많지요. 낫으로 거두고 잘 말려 보관해두면 천천히 해도 되지만 자칫 피해를 볼 수 있어 되도록 미루지 말고 바로바로 탈곡하고 키질하고 잘 마무리 해 도정도 하고 기름도 짜고 해야 합니다. 가을 갈무리는 도둑질하듯 해야 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래도 한로에 제일 중요한 농사일정은 맥류 파종입니다. 음력으로는 중구절인 9월9일이 맥류 파종 때에요. 올해 한로는 음력으로 8월 28일이라 9월 9일과 11일 차이가 나니 언제가 적당할까요? 서리 내린다는 상강과 최대한 멀데 음력 8월은 넘기는 게 좋다고 봅니다. 그렇게 보면 음력 9월 1일, 양력으론 10월 11일이 좋습니다.반면 한로가 음력 9월 15일에 들어 한로와 중구절 9월 9일과 6일 차이 날 경우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2014년의 일인데요, 앞의 원리를 적용하면 9월 10일이 적당합니다. 양력으로는 10월 3일로 앞의 경우와 8일 차이가 납니다.암튼 올해 계획한 밀 보리 파종일 11일은 서리 내리는 상강의 12일 전으로 싹 트면 서리 맞는 꼴이니 불안하긴 합니다. 늦게 핀 무궁화 꽃의 예고대로 늦게 서리 오길 바랄 뿐인데요, 아마도 일찍 내리는 서리라도 약하게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요즘 날씨로 봐선 추위는 일찍 올 것 같지만 건조해서 서리가 제대로 내릴지는 의문이에요. 춥다고 다 내리는 게 아니고 대기 중 적당히 수분이 있어 살짝 얼어 내리는 게 서리거든요. 보리를 더 좋아하는 제가 밀을 심는 건 도정 때문입니다. 소량의 보리를 도정해주는 방아간이 근처에는 없었거든요. 반면 밀은 툭 치기만 해도 왕겨가 벗겨져 통밀이 나옵니다. 벼로 치면 현미입니다. 이 통밀을 한번 더 깎으면 하얀 밀이 나오는데 벼로는 백미와 같지요. 겉껍질 왕겨가 옷이라면 속껍질 쌀겨는 피부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 피부에 생명의 핵심 양분들이 다 있으니 이를 깎아 버린다는 건 쭉정이만 먹겠다는 심보인 셈입니다. 제가 통밀과 현미를 즐겨 먹는 명분이에요. 백미와 하얀 밀을 먹는 건 맛있기 때문인데요, 이는 그야말로 껍데기 맛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돼지껍데기 맛을 모르고 어찌 돼지고기맛을 논하겠습니까?통밀은 요즘말로 겉빠속촉의 씹는 맛이 그럴듯합니다. 마치 작은 옥수수 알갱이 씹는 것 같거든요. 구수한 맛은 더 좋은데요 특히 통밀가루 내어 반죽해 수제비 해 먹으면 그 구수한 맛은 압권입니다. 하얀밀의 쫄깃한 맛은 굳이 폄하하자면 껌씹는 꼴이라 할까요. 반면 통밀수제비의 단점이라면 푸석푸석하다는 건데요, 구수한 맛을 즐기다보면 전혀 문제될 새가 없어요. 밀을 30년 가까이 짓고 있으면서도 밀을 주식으로 하는 서양 문명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건 밀의 연작장해 특성 때문입니다. 맥류 곡식들의 특징으로는 같은 땅에서 연속해 재배하면 같은 종류의 병원균이 축적되고 토양의 양분 불균형으로 생기는 생리장해가 있지만, 무엇보다 맥류의 제일 큰 특징은 이른바 알레로파시Allelopathy라는 타감물질입니다. 일종의 생육 발아 억제물질로 저는 이를 천연제초제라고 부르지요. 맥류 중 호밀이 제일 강력하고 그만큼은 아니어도 밀도 못지 않습니다.이런 특징 때문에 맥류는 연속해 심지 않고 윤작을 하거나 휴경을 해야합니다. 윤작으론 콩과 식물이 제일 좋구요, 우리처럼 벼와 이모작도 좋습니다. 콩과만큼은 아니어도 담수 때문에 벼도 손색이 없습니다.그런데 문제는 서양의 여름은 고온건조해 모든 게 말라죽으니 윤작할 식물이 없어 정기적으로 휴경을 해주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더불어 똥을 누는 가축 방목으로 지력도 보충해주지만 근본적인 방법은 아니죠.어쨌든 이런 농사방식은 빵과 고기문화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빵은 저장 음식으로 최곱니다. 머리에 배고 자다 아침에 뜯어먹어도 됩니다. 천연제초제도 뿜고 풀도 적은 겨울을 나다보니 일도 적지요. 탈곡도 쉽고요. 건달농사의 전형이었습니다. 이런 농경문화는 자본주의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농사가 널럴하니 남는 시간에 장사 나가고 전쟁 나간 겁니다.그런데 동양의 농사는 달랐습니다. 겨울만 빼곤 매일 농번기이고 농한기 겨울에도 월동작물 심어놓은 게 있어 함부로 나돌아 다니기 힘들었어요. 밥은 잘 상하는 음식이라 돌아다니며 먹기에도 적당하지 않았지요. 가마솥과 장, 김치 항아리 들고 어딜 돌아다니겠어요. 그렇지만 우리에게 맥류 농사가 위대한 건 춥고 건조한 겨울의 우리 토양을 지켜주는 것 때문입니다. 그 땜에 우리 겨울은 사막이 아니었습니다. 땅을 쉬게 하지 않고 연속해 심어도 혼작과 윤작으로 토양을 보호했던 것이죠. 잠시 이팝에 고깃국 신화가 퍼져 우리 겨울에 밀, 보리가 사라지는 듯 하지만 기후위기를 극복하는 데 밀, 보리가 소중하다는 걸 알면 머지않아 다시 복원되리라 믿어의심치 않는 이유입니다. 맥류의 계절, 한로에 밀, 보리를 위한 변명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글을 쓴 안철환 선생은 온순환협동조합, 전통농업연구소 대표이고 경기도 안산에서 ‘산림생태텃밭 먹거리숲 농장’을 운영한다. 남은 음식물과 똥오줌, 커피 찌꺼기를 받아 직접 거름 만들기를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 토종 종자와 전통 농업 살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25년 전, 처음으로 심은 배추 씨가 3일 만에 싹 트는 걸 보고 ‘씨 안에 누가 있었구나!’ 깨닫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우리가 먹는 배추는 단순히 물질적인 먹을거리가 아니라 나와 별 차이 없는 생명이며, 그래서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먹고, 생명과 소통하고, 생명과 하나 되는 일이라고 믿는다. 쓴 책으로 《시골똥 서울똥》(2009), 《24절기와 농부의 달력》(2011), 《호미 한자루 농법》(2016), 《토종농법의 시작》(2020)이 있고, 옮긴 책으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2004)이 있다.
-
- 기획
- 절기이야기
-
[안철환의 절기 이야기] 맥류 계절의 시작, 한로
-
-
지금은 위장전입시즌
- 위장전입은 국회 청문회에서 심심찮게 나오는 말이다. 보통 ‘이 정도는 봐주자’라는 말이 많지만 엄연히 불법이다. 하지만 여전히 관행처럼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다.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시골의 작은 중학교인데, 올해 입학생이 없을까 봐 전전긍긍이다. 왜 아이들이 없을까? 주변에 초등학교 두 곳이 있고, 여기에서 졸업하는 6학년 아이들이 10명이 넘는다. 그런데 입학생은 0명이 될까 걱정하고 있는 형편이다. 모두 읍에 있는 중학교로 입학하기 때문이다. 관행처럼 위장전입해서 읍으로 중학교를 가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그럼 이것을 모르고 하는 것일까? 모두 불법인지 알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 교사도, 중학교 입학 담당자도 알고 있다. 그냥 묵인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시골 중학교는 폐교를 해야 할지도 모르는 위기에 몰리고 있다. 그렇다면 위장전입은 사문법인가? 아니다. 위장전입을 통해 진학하는 것은 엄연한 불법이다. 실제 거주하지 않으면서 주민등록만 허위로 이전하는 행위는 목적(학교 배정 등)과 관계없이 법적 처벌 및 행정적 조치 대상이 된다. 관련 법률 및 처벌 규정은 이렇다. 주민등록법 위반 (형사 처벌): 주민등록법 제37조에 따라 주민등록에 관한 허위의 사실을 신고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이다. 초·중등교육법 및 배정 취소 (행정 조치): 각 지역 교육지원청의 중학교 입학 배정 지침에 따라 위장전입 사실이 확인될 경우 해당 중학교 배정이 취소되고, 원래 거주지(실제 거주하는 면 지역)의 학군으로 강제 재배정된다. 각 교육지원청과 학교는 입학 전후로 실거주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현장 실사(통장·반장 확인, 가정방문)나 증빙 서류(수도·전기 요금 납부 내역 등) 제출을 요구할 수 있다. 위장전입 적발 시 학생 본인은 입학 취소 및 전학 조치를 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는다. 주무 부처인 교육청 담당자들도 다 알고 있다. 알면서 그냥저냥 넘어가고 있는 사이 시골의 작은 학교들은 폐교의 위험에 처한 것이다. 사실 나는 이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대학 입학 시 위장전입이 확인되면 입학을 취소할 수 있다." 이 문장 하나면 아무도 위장전입을 하지 않을 것이다. 모두 시골중학교에 가면 성적이 떨어지지 않을까? 아니면 좀 더 큰 곳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더 큰 학교에 보내기 때문이다. 이제 곧 중학교 선정해야 한다. 아이들의 요구나 부모의 욕망으로 중학교 시작부터 불법을 저지르는 행위를 하는 것이 교육에 정말 좋은 것인지 무엇을 위해 교육을 하는지 생각해봐야한다. 모두가 묵인하고 있는 불법 아무도 지키지 않는 사문법? 아니 여전히 불법 이제라도 바꿔야 한다.
-
- 고을이야기
- 구례
-
지금은 위장전입시즌
-
-
예술의 영혼성
- 예술의 영혼성 모든 예술은 상상의 발현이며 인류의 삶 속에 상상의 축적이 있었기에 지금껏 인간의 의식이 확장되고 계속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을 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제각기 그 태생적 환경이나 주어진, 혹은 스스로 획득한 삶의 환경과 조건 속에서 상상의 발현을 확장하는 개체적 삶을 살다 간다. 그 상상력은 사피언스 종이 가진 특별한 것이며 지구의 뭇 생명 중에 가장 진화된 존재라는 걸 증명하는 속성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가진 영성靈性의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나’라는 존재는 몸과 마음(정신)과 영혼(순수의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몸과 마음’만을 스스로가 생각하는 ‘나’로 인식하며 산다. 그것이 ‘에고’라고 말하는 일상 현실의 자신이다. 그런 ‘나’는 시공간적 한계와 개체적 한계가 분명한 에고이며, 삶은 상상의 한계와 범주 또한 함께 가지게 되어 우리는 에고의 현실 세계 안에 스스로 묶여 살게 된다. 다시 말하면 ‘나’라는 감옥을 살다 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깨주는 예술가나 과학자들을 드물게 보아왔다. 그들은 잠시 그 에고를 벗어나 초의식의 영감과 직관 속에서 인간이 가진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어 존재의 본질로, 우주의 마음으로, 그 지고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영성’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찰나의 시간 속에 무한이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사피언스 종의 상상력을 가진 존재로의 진화는 이제 영적 존재로의 진화라는 의식 확장의 단계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영혼은 예로부터 삶과 죽음 속에서 거론되었으며 그 단어는 지금에 와서는 여러 많은 의미로 혼용되고 있어 일상의 생활 속에서 그 의미망은 매우 넓어졌고 혼란스럽다. 그리고 영혼의 문제는 과학에서도 무어라 확신할 수 없는 영역이다. 하지만 그것은 인류의 역사가 기록되면서부터 꾸준히 말해졌던 것이며 여러 종교의 창시자와 함께 그 중심에 있는 것이며 어느 시대에나 그것을 깨친 현자들과 구도자들이 있었고 예술 속에서도 어떤 의미나 수준에서든 꾸준히 거론되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말하는 그 영혼은 현실 삶의 에고에 가려져 있어서 일상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스스로의 안에 있는 신성이며, 구도자들이 이르려는 ‘그것’(true self)이기도 하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있고 몸과 마음과 영혼의 합일을 통해 이를 수 있다는 우주적 의식이고 지고의 의식이기도 하다. 그들은 에고를 벗어난 어느 찰라의 틈에서 이 영원을 잡아내는 것이다. 21세기에 들어 과학기술은 인류의 모든 기억을 하나로 집적해 낼 수 있게 되었고 AI와 같은 삶의 현실에서 활용할 수 있게 된 그 기술적 능력은 이제 개체적 인간이 스스로 넘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래서 어쩌면, 예술은 기도나 명상처럼 인간의 ‘영성’을 확장하고 일구는 그런 영역으로 더욱 나아가고 다져져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
- 문화예술
- 지리산 편지
-
예술의 영혼성
-
-
공부
- 공부 김사인 ‘다 공부지요’ 라고 말하고 나면 참 좋습니다. 어머님 떠나시는 일 남아 배웅하는 일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 하고 계십니다’ 말하고 나면 나는 앉은뱅이책상 앞에 무릎 꿇은 착한 소년입니다. 어디선가 크고 두터운 손이 와서 애쓴다고 머리 쓰다듬어주실 것 같습니다. 눈만 내리깐 채 숫기 없는 나는 아무 말 못하겠지요만 속으로는 고맙고도 서러워 눈물 핑 돌겠지요만. 날이 저무는 일 비 오시는 일 바람 부는 일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때로 그 곁에 골똘히 지켜섰기도 하는 일 ‘다 공부지요’ 말하고 나면 좀 견딜 만해집니다. ========================== 이제는 앉은뱅이책상을 쓰는 학생은 없을 것이다. 그 시절 착한 소년, 착한 학생은 앉은뱅이책상 앞에 단정하게 앉아 공부하는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럽다. 시인은 그 시절의 사람인 것인데 어머님을 보내는 일도 ‘공부’라고 말한다. 비단 죽음만이 아니라 날이 저물고 비가 오고 바람 부는 일상 또한 ‘공부’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는 일 자체가 공부인 것이다. 이런 자세로 한 生을 살아낸다면, 살아낼 수 있다면 어쩌면 가장 훌륭한 삶을 살고 가는 것이리라.
-
- 문화예술
- 시를 찾아서
-
공부
-
-
효자대추
- 「섬진강 편지」 -효자 대추 텃밭밖에 없는 시골살이라 이웃들로부터 이것저것을 얻어먹는데 내가 유일하게 나눠줄 수 있는 품목이 대추다. 약을 치지 않으니 다른 과일들은 풋것으로 다 떨어져 버리는데 이 대추만은 해마다 풍성해 우리 집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다. 맛이 들기 전부터 오가며 따먹고 스무 봉지 정도 이웃들과 나눴으니 못해도 30킬로쯤은 땄나 보다. 마지막 대추 한 봉지를 섬진강가 박시인 집에 건네고 돌아오는 아침 강마을 나락빛도 넉넉한 황금빛으로 출렁인다
-
- 문화예술
- 섬진강 편지
-
효자대추
-
-
[비아의 지리산 둘레길 완주3] 함양 편
- 지리산둘레길 함양 구간은 금계에서 동강까지, 동강에서 수철까지 이렇게 두 구간에 해당한다. 남원인 인월 구간에 함양 구간인 금계로 넘어오고, 동강에서 다시 산청 구간인 수철마을로 넘어가게 된다. 다른 구간은 끝점을 기준으로 나눈 반면 함양 구간은 시작점을 기준으로 나눈 까닭은, 동강에서 수철로 넘어가는 구간이 거의 산청 구간이긴 하지만, 이래저래 행정편의로 나누고 보니 온전한 함양 구간은 한 구간만 해당하여 함양에서 시작하는 동강 구간도 함양에 포함해 본다. 꼭 지역을 나누어 둘레길을 걷는 것은 아니지만, 지역별로 미미한 차이점과 특징들을 볼 수 있다. 함양 산청 구간은 지리산 자락을 타고 넘는 마을과 길들이어서 경사가 다소 있는 숲구간과 임로길이 많다. 또한 남원의 2,3구간을 버스로 이동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함양의 금계-동강 구간도 버스로 다시 원점회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함양군은 군청과 대부분의 마을이 오도재 너머에 있고, 지리산 천왕봉 자락에 위치한 마천읍 마을만 지리산자락에 따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함양군이 있는 곳과는 별개의 다른 군의 마을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이유로 마천 사람들은 남원 인월방향으로 더 잦은 교류를 한다. 마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전라도 사투리와 경상도 사투리가 다소 뒤섞인 말투를 사용한다고 하니 굳이 지역을 구분하는 것은 행정상의 편이에 해당할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4구간. 금계-동강 (12.7km/ 난이도 상. 5시간) 지리산둘레길 함양센터에서 시작되는 둘레길이다. 인월에서 금계로 천왕봉자락이 있는 지리산을 바라보며 계곡 건너편 길을 걸어서 금계로 왔기 때문에, 다리를 건너 지리산 자락 안으로 들어는 코스이다. 의중마을 아름드리 당산나무에서 인증 스탬프를 찍고, 벅스의 화살표를 바라보면 두 갈래 길로 나뉜다. 지리산둘레길 ‘숲순환코스’다. 평탄한 아랫길을 따라 걷든지, 산길로 들어서든지, 방향을 선택하는 것은 자신의 걷는 역량에 맞게 선택하면 된다. 산이 좋아 왔으니 당연히 숲길을 권한다. 당산나무가 있는 의중마을에서 서암정사에 이르는 숲길은 정말 아름답다. 서암정사는 벽송사로 오르는 길 아래에 있다. 벽송사로 오르기 전에 아름다운 서암정사를 둘러볼 수 있는 것은 이 코스의 또 하나의 묘미다. 입구부터 탄성을 자아내는 바위와 조각들이 색다른 느낌과 풍광으로 반긴다. 또한 서암정사 석굴법당은 자연 암반에 굴을 파 극랑정토를 표현한 예술품에 가까운 조각상들로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다. 지리산 둘레길을 돌다 잠깐 옆으로 비켜갔다. 다시 벽송사 가는 갈림길로 돌아와 벽송사를 향해 오른다. 찻길로 나 있어 길은 넓고 시멘트길이나 경사가 다소 있는 편이다. 벽송사를 지나 산길로 들어서면 정말 가파른 등산로를 올라야 한다. 그러나 그리 길지 않으니 쉬엄쉬엄 오르면 된다. 어느 정도 오르면 오솔길이 이어지고, 다음에는 급경사 내리막길이다. 숲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계곡도 건너고. 산길을 내려오면 당산마을에서 갈라졌던 ‘숲순환길’과 만난다. 급경사 산길이 힘든 사람들은 아랫길을 이용해 오면 된다. 여기서부터는 아주 길고 긴, 임로와 마을 포장도로가 이어진다. 숲길까지는 탄성을 지르던 사람들이 포장길을 내려오며 툴툴거린다. 포장도로를 걸어 마을과 마을을 지나는 길은 그늘이 없어 덥고 지루하다. 계곡을 따라 쭉 뻗은 길, 구불구불 마을길, 구시락재를 넘어가는 길. 그래도 주변 풍경을 바라보고, 건너편 마을의 풍경도 즐기고, 도토리를 주워 걸어가시는 할아버지, 물에 담아 많은 도토리를 불리고 계시는 할머니를 만날 수 있는 정겨운 길이다. 숲이 있고, 아름다운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그래도 좋은 코스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완주가 목표가 아니라면 긴 숲길만 걸어도 좋은 길이다. 당산나무에서 서암정사, 벽송사로 갔다가 다시 순환지점을 타고 원점회귀하는 방법으로 선택하면 된다. 일행 중 한 사람은 이런 포장도로를 산길보다 더 좋아하기도 했으니 사람마다 길을 걷는 취향이 다름에 틀림없다. 5구간 동강-수철 (12.1km/난이도 중/5시간) 지리산둘레길 구간 중 유일하게 폭포를 만날 수 있는 구간이다. 거의 숲길로 이루어져 있어 난 이 길을 아주 좋아한다. 추모공원에서 산을 넘어가는 구간은 네다섯 번 걸었던 것 같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이 길 걷는 것은 마다하지 않는다. 동강마을에서 조금 걸어 점촌마을로 향하면 바로 ‘함양방면 표지판 시작점이 나타난다. 마을길은 함양에서 산청으로 이어지고, 산길은 함양과 산청을 넘나든다. 그러니 굳이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사실 동강-수철 구간은 ‘산청함양추모공원’에서 시작한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다. 산청함양 추모공원은 산청함양사건 희생자 합동 묘역이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가 지리산 토벌작전을 수행하던 중 무고한 민간인 705명을 학살하였는데, 이 때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모신 묘역이다. 지리산은 많은 역사의 아픔을 품은 산이다. 거대하고 아름다운 만큼 한국 현대사의 슬픔들이 곳곳에 새겨져 있기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찾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추모공원을 둘러보고, 숙연한 마음으로 저수지길을 돌아 산길로 접어든다. 좁은 오솔길로 난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자그마한 폭포를 만나게 된다. 상사폭포다. 늦봄까지 얼음이 남아 있는 서늘함에 잠시 피로를 식히고, 다시 길을 나선다. 폭포를 지나 등산로를 따라 오르다 보면 쌍재에 이른다. 쌍재는 함양사람들이 곶감을 지고 산청으로 넘나들던 고개이다. 쌍재와 고동재에서는 왕산이 바라보인다. 왕산은 가야 10대 왕인 비운의 왕 '구형왕'의 타원형 (구)돌무덤이 있다고 한다. 구형왕은 자신이 죄인이라하여 돌무덤을 만들도록 하였는데, 그래서 무덤에 풀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지리산둘레길 5구간에는 구형왕의 슬픈 이야기가 얽혀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쌍재에서 임로를 따라 오르면 또 하나의 고개가 나오는 데, 그래서 쌍재인가 보다. 아무튼 또 다른 쌍재에서 산길을 따라 올라 고동재에 이른다. 고동재는 고동형 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고동재라 불린다. 신라군을 피해 피난 생활을 하던 '구형왕'의 군사가 멀리 산청의 황매산에서 신라군사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보고를 하자, 왕은 다시 피난길에 올라 왕등재에서 내려와 고동재를 넘으며 고동을 불며 쌍재를 지나 왕산을 넘어갔다고 한다. 비록 전설이지만 고동을 불던 왕의 심정은 어떠했을지 헤아려본다. 고동재부터는 내리막길이다. 경사도 급하지 않은 예쁜 숲길이다. 숲길을 따라 내려오다보면 나무가 울창한 임로를 만나고, 임로에서 수철마을까지는 금방 내려온다. 5구간은 추모공원에서 수철마을까지 거의 모든 길이 숲길로 이루어진, 그리고 슬픈 역사를 되새겨 보게 하는 아름다운 구간이다. 이제 산청으로 넘어왔다. 또 다른 아픔을 간직한, 그리고 또 다른 아름다움을 지닌 산청 구간을 만나 보자. 함양구간은 두 구간 밖에 해당하지 않아 좀 더 자세히 설명할 수 있었으나, 산청, 하동 구간은 구간이 많아서 간단히 설명을 해야 할 것 같다. 하긴 더 자세한 설명은 둘레길 홈페이지에 다 있으니 긴 말이 필요 없기는 하다.
-
- 고을이야기
-
[비아의 지리산 둘레길 완주3] 함양 편
-
-
쥐 잡기와 산통 깨기
- 내 안에 있는 악마가 가끔 입 밖으로 욕을 내뱉을 때가 있습니다. 저런 쓰레기 같은, 망할 세상, 이라고요. 악마는 복수의 칼을 갑니다. 누군가에게 슬픈 일이 벌어졌는데도 쌤통이라고 말합니다. 잘못했으니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요. 또 이 악마는 아주 비겁합니다. 큰 소리로 말하지 못하고 작은 소리로 말합니다. 광장에 나와 말하지 못하고 집안에서만 말합니다. 그래도 난 이 악마를 버릴 수 없습니다. 가끔 이렇게라도 욕하고 분노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으니까요. 할 수 있는 일이 겨우 이것밖에 없는 것 같다고 느끼는 날엔 더욱 그가 필요하지요. 누가 소리 지를 텐가 박연준 시인의 첫 소설 『여름과 루비』를 읽다가, 내 안에 숨은 악마에게 물었습니다. 소리 지른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요. 여덟 살 여름은 동네가 떠내려갈 정도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한 아줌마가 도망가려는 쥐의 꼬리를 한쪽 발로 잡고는 “집사님 빨리 연탄집게!” 하고 외치고 있을 때였습니다. 여름이 찢어질 듯 비명을 내지른 채 멈추지 않자, 아줌마는 여름에게로 와 화를 냅니다. 다 잡은 쥐를 여름이 소리 지르는 바람에 놓쳤다고요. 사람들은 쥐가 무서워서 소리를 지른 줄로 생각했을 테지만, 여름은 ‘쥐가 아니라 연탄집게의 도착’을 두려워했습니다.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일어날 일’을 무서워했던 여름은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름이 무서워한 일은 쥐의 죽음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날 그 교회 마당엔 쥐를 잡으려는 아줌마뿐 아니라 친구 루비를 잡으려는 남자애들도 있었거든요. 집에 방이 세 개고, 목욕탕이 두 개 있다는 루비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눈으로 확인해 보고야 말겠다는 남자애들이 루비를 앞장세워 기어코 그의 집에 따라가던 날이었습니다. 루비가 앞서고, 그 뒤를 남자애들이, 또 그 뒤를 여름이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여름은 굳이 루비의 말을 심판대에 세워 쥐 잡듯 잡도리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남자애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집에 가다 말고 루비가 교회 앞 벤치에 앉아 책을 보려 하자 그네들은 얼른 네 집으로 가자며 루비를 닦달합니다. “빨리 가라고! 순 뻥쟁이 아냐!” 여름은 아이들이 루비를 때린다면 달려가 말릴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바로 그때 아줌마가 쥐 꼬리를 밟고 집사님을 불렀던 것입니다. 여름이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면, 쥐가 잡혀 죽었을 것이고, 루비가 애들에게 맞거나 강제로 일으켜져 집으로 가야 했겠지요. 루비의 얼굴이 벌게졌고 쥐의 몸부림이 극에 달했을 때 여름은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렇게 소리를 지름으로써 루비는 남자애들로부터 달아났고, 쥐는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허탕 친 사람들이 여름을 쏘아봅니다. 여름은 너무 세게 오래 소리를 지른 탓에 목이 아팠습니다. 나는 이 장면에서 여름이 부러웠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안의 악마가 여름을 부러워했습니다. 소리를 질러서 산통을 깼으니까요. (아, 좋겠다…….) 와장창, 쨍그랑, 또는 쩍 나의 악마는 늘 산통을 깨고 싶어 합니다. 산통은 점을 칠 때 쓰는, 산가지를 넣은 통인데, 산통을 흔들다가 뚜껑에 난 작은 구멍으로 산가지가 튀어나오면 그 괘로 점을 쳤다고 합니다. 무슨 까닭인지 모르지만, 오늘날 ‘산통을 깬다’는 건 ‘다 잘되어 가던 일을 이루지 못하게 뒤틀다.’라는 뜻으로 쓰고 있어요.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안이 가결된 이튿날 산통을 깬 사람이 생각납니다. ‘제로웨이스트샵 알맹상점’의 고금숙 대표인데요, 그는 “탄핵안 가결 풍선 날리기, 나만 불편해?”라는 글을 자기 SNS에 올렸어요. 뭔가를 축하하기 위해 굳이 미세플라스틱을 지구에 흩뿌릴 필요가 있냐는 거죠. 그러면서 “누군가는 환경을 생각하자는 제안을 ‘기쁜 순간에 산통을 깬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산통을 깨고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해서, 나의 악마가 기뻐했답니다. 지난 8월, 산통 깨기에 진심인 사람들이 모여 ‘919 기후정의행진 지리산행동’을 준비했습니다. 기후위기를 부추기는 ‘자본 추앙 사회’의 흐름을 깨는 일을 산통 깨기라고 생각한다면 말이죠. 지리산에 케이블카를 놓는다고 해도, 벽소령을 뚫어 도로를 놓겠다고 해도, 한 기업이 하루 600톤이 넘는 지리산 지하수를 퍼내도, 여기저기 송전탑이 세워지고 농지가 사라진다고 해도, 3대 메가프로젝트로 막대한 이윤은 사기업이 가져가고 물 부족과 각종 오염은 시민이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 와도, 누군가는 화석연료의 풍요를 누리고 누군가는 기후재난으로 죽는 기후부정의가 벌어져도, 소리 지르지 않는다면 나는 연탄집게가 될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올해 지리산권 기후정의행진은 구례와 남원 산내에서 열립니다. 구례는 19일 오후 3시 구례읍사무소에서 출발해 봉성산 정상까지 행진합니다. 13일부터 19일에 걸친 기후정의 주간에는 크고 작은 시민 작당 모임도 열립니다(포스터 참고). 거대한 흐름이 아무리 내게 “믿으셔야 합니다” 할지라도 나는 의심하겠다, 그 흐름을 깨 보겠다, 하고 함께 말할 수 있는 기후정의행진에서 만납시다. 그때 우리도 여름처럼 소리를 질러 봅시다. 아무리 흔들어도 착취와 수탈만 나오는 이 산통을 같이 깨 봅시다. 이 글은 <봉성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
- 기후위기
-
쥐 잡기와 산통 깨기
-
-
[곰주옥 X 인간주옥] ⑦ 풍요로운 삶을 위해 당신은 무엇을 하는가?
- ‘풍요로운 삶을 위해 당신은 무엇을 하는가?’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걷고, 지리산에 가고, 관심 가는 책을 읽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텃밭에서 갓 딴 채소로 먹을거리를 만들며 살아간다고 말할 것이다. 크고 특별한 일이 아니어도, 내가 좋아하고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그것은 나에게 풍요로운 삶의 한 모습이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풍요로운 삶을 위해 여러 일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원하다 보면 욕심이 생기고, 그 욕심은 갈등으로 번지기도 한다. 풍요롭다는 것은 많이 가지는 것과는 다른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존재에게는 풍요로운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 권리를 빼앗긴 존재들이 많다. 인간의 먹이가 되거나 인간의 필요를 위해 이용되는 존재들이 그렇다. 구례곰마루쉼터(이하 곰쉼터)의 곰들도 당연한 권리를 빼앗긴 존재들이다.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한국에 와서 사육농장의 뜬장에서 평생을 살았다. 다행히 그들은 구조되어 곰쉼터에서 살고 있다. 곰쉼터는 곰들에게 안전한 공간이다.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곰들에게는 넓은 땅이 제공되지 않았고, 사육농장에서 살아오는 동안 잃어버린 몸의 기능도 있다. 그래서 곰들이 풍요로운 삶으로 나아가기에는 여전히 부족함이 많다. 그 부족함을 조금씩 채워가는 활동 가운데 하나가 ‘풍부화’다. 풍부화는 잃어버린 감각과 근육을 되살리고, 동물이 본래 가지고 있던 행동을 다시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활동이다. 곰쉼터에서 풍부화를 담당하는 신유리 님은 곰들을 위해 어떤 활동을 하고 있을까? “초반에는 이것저것 많이 해봤어요. 커피박을 사료 봉지에 넣어서 줘보기도 하고, 생수통에 넣어줘 보기도 했어요. 그때는 계획표를 만들어서 오늘은 마대, 내일은 생수통, 그다음에는 또 다른 것을 하는 식으로 로테이션 했지요. 그런데 곰들은 생각보다 흥미를 보이는 빈도가 높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여러 가지를 하기보다는 한 가지를 우물 파듯이 깊이 있게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어요. 예를 들면 일주일이나 한 달 동안 한 가지 풍부화 물품을 집중적으로 사용해 보는 식으로요. 지금은 곰들의 반응을 살펴보면서 조금씩 체계를 잡아가는 중이에요.” (2026년 10월 1일 신유리 님 인터뷰) 곰쉼터의 풍부화 활동에 곰들은 제각각 반응한다. 사람이 좋다고 생각한 것이 곰에게도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지난여름 곰쉼터에서는 얼린 과일을 매일 오후 1시에 하나씩 주기도 했다. 목욕통에 입욕제를 넣어 거품을 만들어주었더니 곰들이 좋아했지만, 가끔 그것을 마시는 곰이 생겨 중단했다. 곰들은 큰 타이어에서 눕는 것을 좋아한다. 호스로 만든 해먹을 사용하는 곰들도 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곰들도 성격이 다르다. 좋아하는 활동과 도구가 다르고, 예상하지 못했던 부작용이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곰들을 위한 풍부화는 정해진 답을 실행하는 일이 아니라, 곰들의 반응을 살피고 시도하고 다시 바꾸는 과정에 가깝다. 풍부화 활동은 나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지난봄 구례의 카페들은 커피박을 모아 곰쉼터에 전달했다. 커피박 냄새를 맡으며 좋아하는 곰들을 보면서 행복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가 쓰레기로 버리는 것이 다른 존재에게는 새로운 경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고, 그 과정에 나도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919 기후정의행진 지리산행동’의 날에는 곰들의 풍부화를 돕기 위해 칡덩굴을 수거했다. 칡덩굴은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칡을 걷어내고 있는 모습을 본 동네 어르신 한 분이 물었다. “뭐 하는 사람들이요?”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고속도로 다리 아래에서 도로공사 직원도 아닌데, 초등학생부터 지긋한 나이의 어른까지 여러 사람이 칡덩굴을 열심히 걷어내고 있으니 말이다. 이날 사람들은 성심껏 활동했고, 어느새 트럭 한가득 칡덩굴이 쌓였다. 40분 만에 수거를 마치고 곰쉼터로 이동했다. ↑고속도로 다리 아래에서 칡덩굴을 수거하는 활동 참여자들 ↑40분 만에 한 트럭 가득 칡덩굴을 모았다 곰쉼터에서는 수거한 칡덩굴을 곰들의 먹이이자 놀이도구로 활용할 수 있도록 칡공을 만들었다. 사람이 보기에는 그저 흔하게 자라는 덩굴이지만, 곰에게는 잎을 뜯어 먹고, 남은 덩굴을 가지고 놀 수 있는 새로운 풍부화 물품이 된다. 칡공을 만드는 것까지가 이날 활동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운 좋게도 문수사를 나온 무니, 수리, 부기에게 칡공을 전달할 수 있었고, 그들이 칡잎을 맛있게 먹는 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활동 참가자들은 칡잎을 먹는 곰을 보는 순간 모든 피곤이 날아가 버렸다고 했다. 뿌듯하고, 기쁘고, 고맙고, 앞으로 뭔가 더 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구례곰마루쉼터에서 칡공을 만드는 활동 참여자들 우리에게 흔한 식물이 곰에게는 새로운 경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숲에서 살아보지 못한 곰들에게 칡잎을 맛보는 일은 어떤 경험일까. 윤주옥 : 모든 곰들이 칡잎을 좋아하는 건 아니겠죠? 신유리 : 대부분 좋아할 것 같아요. 모든 곰들에게 주지는 않았지만요. 이곳에 처음 들어온 곰들에게 칡잎을 줬을 때는 다 좋아했어요. 새로 들어온 문수사 곰들도 좋아하고요. 윤주옥 : 진짜 너무 맛있게 먹더라고요. 칡잎을 좋아하나봐요. 신유리 : 칡잎만이 아니라 먹고 남은 덩굴을 가지고 노는 것도 좋아한답니다. (2026년 10월 1일 신유리 님과의 대화) ↑칡잎을 뜯어 먹는 곰 (사진 제공: 구례곰마루쉼터) 곰들이 칡잎을 먹고 남은 덩굴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면서 풍부화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풍부화는 곰에게 무언가를 ‘주는’ 일만을 뜻하지 않는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살펴보고, 좋아하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고, 예상하지 못한 행동이 나타나면 다시 방법을 바꾸는 일이다. 곰쉼터는 돈을 내면 누구나 찾아갈 수 있는 관광지가 아니다. 동물원도 아니다. 곰을 구경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라, 인간에게 이용당하며 살아온 곰들이 남은 삶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이다. 곰쉼터가 구례에 들어온다고 했을 때, 우리 역시 생추어리와 동물원, 동물구조센터가 어떻게 다른지 잘 알지 못했다. 곰쉼터가 왜 필요한지, 그곳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선뜻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칡덩굴을 모으고, 그것으로 칡공을 만들며, 곰쉼터에서 그 의미를 직접 확인하면서 조금씩 알게 된다. 곰쉼터는 곰들에게 안전한 삶터를 마련해주는 곳인 동시에, 우리가 다른 존재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곳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풍요로운 삶은 혼자 더 많이 가지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가진 시간과 힘을 조금 나누고, 그 작은 마음이 다른 존재에게 닿고, 그 존재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기뻐하는 것. 그렇게 서로의 삶이 조금씩 이어지는 것도 풍요로운 삶의 모습일 것이다. 그날 우리가 모은 것은 칡덩굴 한 트럭이었다. 누군가에게는 흔하고 귀찮은 덩굴이었을지 모르지만, 곰들에게는 먹고, 뜯고, 가지고 놀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던 사람들에게는 곰의 삶을 조금 더 가까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다. ↑곰마루쉼터 중간 방사장에 칡공을 넣어주는 활동 참가자 ↑중간 방사장에서 타이어 안쪽에 넣어둔 칡잎을 꺼내 먹는 곰 (사진 제공: 구례곰마루쉼터) 그날의 일을 떠올리며 나 자신에게 다시 묻는다. ‘풍요로운 삶을 위해 당신은 무엇을 하는가?’ 나는 앞으로도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찾아볼 것이다. 다른 존재의 삶이 조금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면, 나의 삶도 그만큼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믿으면서. 사진 _ 정이어린. 윤주옥
-
- 기획
- 곰주옥X인간주옥
-
[곰주옥 X 인간주옥] ⑦ 풍요로운 삶을 위해 당신은 무엇을 하는가?
-
-
핵발전소 32기의 나라에서 탈핵의 길을 걷는 순례자 - 청명 인터뷰
- "핵에서 벗어난다, 자유로워진다"— 탈핵순례자 청명이 말하는 탈핵의 의미 밀양송전탑에서 시작된 질문 하나가 한 사람의 삶을 바꿨습니다. 탈핵활동가 청명이 지리산사람들TV와 함께 우리나라 핵발전소 32기의 현실과, 16일간의 탈핵순례에서 마주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핵발전소, 석탄화력, 송전탑은 왜 늘 같은 마을에 함께 있을까요? 탈핵활동가 청명이 걸으며 확인한 에너지 생산과 소비의 온도차, 그리고 지리산에 정착해 농사지으며 살아가는 이유를 들려줍니다. "아쉬움도 부러움도 없는 삶"을 살아가는 한 활동가의 이야기, 지리산사람들TV 청명 인터뷰 2부입니다.
-
- 사람이야기
-
핵발전소 32기의 나라에서 탈핵의 길을 걷는 순례자 - 청명 인터뷰
-
-
내 얼굴도 저런갑서
- “늙어서 이쁜 사람 없어. 내 얼굴도 저런갑서" 옆자리에 앉는 할미가 귀에 대고 속삭인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나는 할미의 웃는 얼굴을 휴대폰으로 찍어 보여준다. 할미 얼굴이 달처럼 환해진다. '이쁜 사람 많아요. 봐요, 할매 얼굴' 두 눈이 감기며 활짝 웃는다. 입꼬리 주름도 활짝 웃는다. 주름은 주름진 세월을 알 리 없다. 숱한 시간이 어느 날 불쑥 얼굴을 들이댈 뿐이다. 얼굴에 파인 주름 앞에서 당혹스러운 적이 있다. 팔자 주름을 펴려고 입안에서 혀를 굴러도 보고 문질러 보고 입술을 내밀고 진동해봐도 꿈쩍않는 주름 앞에서 헛헛하지만은 않다. 주변에 널린 나뭇잎 하나 붙들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세한 결이 아름다운지 알아가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굴곡진 세월의 고랑, 잘 살았다는 어쩌면 우리에게 주는 훈장일지 모른다. 할미의 약봉지가 토요일과 일요일을 지나 월요일이면 노인복지센터로 돌아온다. “깜빡했어” 하는 할미는 약을 챙겨 먹지 못한다. 당부해도 자꾸 잊어먹는다. 늦게 퇴근하고 늦게 일어나는 가족과 시간대가 맞지 않아서 약 복용이 잘 안된다. 약이 너무 많다. 의사는 한 움큼의 약이 다 필요한 약이라고 하는데, 뭐래도 약이 많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센터에서는 순식간에 입안에 한 웅큼 약을 털어놓는다. 그 손이 왜 그리 쓸쓸한지 모르겠다. 할미 얼굴이 노인복지센터에 오면 편해지는데, 오늘은 맨 뒷좌석에 앉는 게 싫다고 한다. 다른 할미보다 인지능력이 좋아 좌석 배치에 양해를 구하다 보니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왜 나만 손해 봐야 하느냐고 하소연한다. 꾹 참다가 오늘 몰아서 화를 낸다. 내 곁에 앉아 평소 담아둔 말을 하고 또 하고 나는 듣고 또 듣는다. 아침밥을 못 먹어도 자는 아들을 위해 밥상을 차려놓고 방문 앞에서 “ㅇㅇ야! 아침밥 차려놨다.” 대답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뒷모습, 구부정한 등이 애잔하다. 방문 앞에 흐르는 정적을 두고 한마디 한다. “엊저녁 늦게 와서 그래.” 마당에 키만큼 자란 들깻잎을 제치고 집을 나온다. 깻잎 향이 고소하게 길을 나선다. 덕분에 우리도 소녀처럼 킥킥대며 앞으로! 앞으로! 행진한다.
-
- 고을이야기
- 구례
-
내 얼굴도 저런갑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