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15(토)
 

지리산 봄(/), 루이네

 

강회진(시인, 독립연구자)

 

 

 

마음이 아픈 줄도 모르고 어른이 되어

 

앞으로 운이 좋아 80살 까지 산다고 쳤을 때 내게 남은 생은 살아온 날 보다 적다. 마음이 아픈 줄도 모르고 어른이 되었다. 무엇을 견디는지도 모른 채 인생이 지나고 있다. 나의 욕심으로 때론 너무 왔거나 지나갔거나 눈치 채지 못한 관계에 지치고 하지 않아도 될 일들까지 하느라 몸과 마음이 늘 고단했다.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 수는 없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으나 진짜 나만을 위한 시간, 나를 위한 시간을 갖고 싶었다. 더 늦기 전에. 더 늦기 전에.

드디어 나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하나. 오랫동안 지리산과 섬진강을 그리워했기에 구례, 하동을 꿈꾸었다. 언젠가 초여름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보았던 산내의 다랭이논 일렁이는 초록 물결과 손에 잡힐 것 같던 흰 구름, 고즈넉한 실상사의 저녁 예불 모시는 풍경들이 자꾸만 나를 불렀다. 마음을 정하고 나니 모든 것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집을 구하기 어렵다는 산내에 빈 집이 나왔고 내놓은 아파트는 금방 입주자가 나타났다. 마치 오래 전부터 계획되어 있었던 일처럼.

 

2. 세 가지면 충분하다

 

사람들은 내게 왜 그 먼 곳으로 가느냐 물었다. 대체 어디에서부터 먼 곳이라는 말일까? 나에게는 가장 가까운 곳이 바로 이곳이라 말하지 못했다.

마당에서 듣는 하루 두 번 실상사 범종 소리와 수달이 살고 있다는 람천의 우렁찬 물소리,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천왕봉. 이곳으로 이사를 위한 이유로 이 세 가지면 충분했다. 게다가 이곳은 내게 완벽하게 낯선 곳.

이사를 하는 날 고속도로에 눈발이 날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운전기사는 이사하는 날 눈이 오면 부자된다 안하요.”라며 애써 웃음을 보였다.

지리산 IC에 들어서는 순간 가슴이 쿵쿵 뛰었다. 저 멀리 펼쳐진 지리산 자락이, 마을이 온통 눈으로 환하게 빛났다. 지리산에 곁들어 사는 일은 지리산이 허락해야 한다던데 드디어 나도 지리산의 선택을 받았구나. 다정한 지인들은 문패를 만들어 보내주었고 마당에 심을 꽃나무와 다양한 꽃씨를 보내주거나 어여쁜 커튼을 보내 새로운 출발을 기꺼이 응원해 주었다.

이사 후 두 번의 큰 눈이 내렸다. 저 멀리 눈에 덮인 천왕봉은 감탄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실상사 저녁 범종 소리를 들으며 구들방 아궁이에 불을 넣었다. 가끔 불씨가 아까워 고구마를 구워 강아지와 나눠먹었다. 그렇게 산내의 첫 겨울이 고요히 흘러갔다.

 

 

3. 산내는 산내말로 살래

 

맘씨 좋은 이웃이 밭 귀퉁이를 무상으로 빌려주셨다. 또 다른 이웃은 슬며시 거름을 부려놓고 가셨다. 감자를 심고 두둑 가에는 옥수수도 심어야지. 밭을 일궈 고랑 네 개를 만들고 거름을 뿌렸다. 다음날 맞춤비가 내렸다.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꽃씨를 담구고 씨감자 눈을 쪼개다보니 어느새 담장에 노란 개나리가 막 피어나는 춘분이 되었다. 밤마다 멀리 무논에서 개구리들이 정겹게 울어댔다. 어느 밤, 마당에 나가 올려다본 하늘, 선명하게 반짝이던 북두칠성이 말했다. 그래, 잘 찾아왔어. 너의 길.

 

이른 아침 단풍나무에 새가 날아와 한참을 앉았다 날아가는 흔하디흔한 그 풍경이 좋았다. 새들을 위한 모이를 뿌리고 수돗가 물을 갈아준다. 햇살이 길게 들어오는 이른 아침, 멀리 천왕봉을 게으르게 앉아 바라보는 그 시간을 놓칠까봐 아침 일찍 일어난다. 지리산에 와 매일 매일이 행복한 검은 개 루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면 이웃 어르신들이 묻는다.

 

어디사요? 놀러왔는가베?

아니요, 저 살래 살아요.

 

저 멀리 앞 산 노란 산수유 지면 대문 옆 감나무에도 반짝이는 새 잎 무성할 것이다. 마당에 정성껏 심은 모란이 피고 지는 깊은 봄이 흘러 옥수수를 따고 감자를 캐면 좋은 사람들 모아 잔치를 해야지. 지리산의 첫 봄, 살래의 첫 봄, 나의 첫 봄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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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궁수달래 /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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