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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람들의 흔적이 곳곳에 서린 하동군 옥종면 문화유산 답사기
- 이상윤 (사단법인 숲길 상임이사) [ 사단법인 숲길이 2019년 지리산권 5개 시⋅군 ‘백의종군로’ 걷기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 가운데 하동군 옥종편은 지역주민들과 3차례에 걸쳐 지역의 문화유적지를 둘러보고 지역의 인문학 소양을 높이는 기회를 가졌다. 앞으로 지역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자리매김할 방안을 찾기로 했다. 그 일환으로 ‘지리산人’에 답사기를 싣는다. / 편집자 주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그 곳은 하동과 약간 다르다. 원래 진주목이었던 곳. 그래서일까, 지금도 옥종은 생활권으로 보면 진주가 가깝다. 행정구역으로 하동군이지만 하동읍으로 장을 보러 온다면 재를 넘어 굽이굽이 와야 한다. 황토가 유명하고 선사유적지가 있다. 아마 맨 처음 사람이 농경생활을 할 때부터 이 곳에서도 인간 문명이 태동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긴 세월을 간직한 고장답게 시대마다 걸출한 인물들이 나타났다. 지난 8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우리는 ‘옥종 문화유적지’를 탐방했다. 이순신 백의종군로 답사가 목적이지만 옥종 곳곳에 있는 선인들의 발자취를 그 곳 분들과 함께 했다. 시골살이를 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하우스 농사가 많은 옥종의 특성상 제일 무더울 때야말로 잠시 쉴 때여서 지역 분들과 나눔을 하려면 이 때가 적기이다. 악양 사람, 하동읍 사람, 그리고 걷기를 위해 참여한 분들과, 옥종 향토사학자, 옥종면장, 그리고 농민회 활동을 하는 분들이 모였다. 청수역(하동군 옥종면 정수리)에서 모이다. 이 곳은 이순신장군이 백의종군을 할 때 들렀고 말에게 먹이를 주고 쉬었다는 기록이 있는 곳. 백의종군로 사업으로 정자를 짓고 역사를 소환했지만 정확한 장소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단한 여정을 이어갔을 장군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고 길을 나서 간단치 않은 여정을 소화하고 있다. 합천에 있는 권율장군을 만나 소임을 받아야 한다. 그가 이 길을 갈 때는 없었지만 청수역 인근에는 포은 정몽주 선생을 기리는 옥산서원이 있다. 우리 일행은 옥산서원 강당에 올라 오늘의 여정을 공유하고 서로 인사를 나눈다. 이 날 우리를 안내해 주신 향토사학자 한충녕 선생은 옥종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나눠주신다. 고려 강민첨 장군, 강감찬 장군에 얽힌 이야기, 연산군의 스승이었다가 그가 왕위에 오르자 역적으로 처형된 지족당 조지서의 애환, 동학농민항쟁 최후의 결전을 위해 집결한 옥종 고성산성, 남명의 후학으로 일생을 꼿꼿한 선비로 산 겸재 하홍도. 뿐만 아니라 정몽주 선생의 손녀로 역적으로 몰려 처참하게 죽은 남편 지족당 조지서의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 옥종에 모신 정씨 부인의 애절한 사연. 노인 향토사학자의 열정을 제지하지 않으면 오늘 하루 일정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아 부랴부랴 갈무리하고 답사를 시작하였다. 옥산서원의 백미는 포은집 장판각 옥산서원 옆에는 정몽주의 문집판각(文集板刻) 500여 판이 보관된 장판각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단심가를 비롯, 포은 선생의 저작들이 목판으로 보관되어 있는 곳인데... 허술하기 짝이 없다. 문화재를 대하는 태도 역시 강자의 논리를 따른다. 고려의 충신이었으나 조선으로 승계되지 않은 사람 포은. 선죽교에서 이성계의 아들이 보낸 자객의 철퇴를 맞아 숨을 거둔 비운이 장판각으로 이어지는 듯하다. 이 날 우리는 포은집 장판각 자체를 훌륭한 문화유산으로 만드는 일, 지역 문화 자산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는 저변을 만들자는 다짐을 했다. 지족당 조지서의 무덤, 태실 그리고 정씨부인 정려 겸재 하홍도와 모한재 남명 조식 선생이 지리산을 찾은 이유 가운데 한 사람이 지족당 조지서다. 그는 연산의 스승이었으나 그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다. 그 주검을 거둔 그의 아내 정씨는 낭군의 시신을 수습하여 선산에 묻었다. 지족당이 복권된 뒤에 그 부인에게 조정은 정려를 내렸다. 지족당은 옥종 위연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가 장원 급제를 세 번 하여 삼장원마을로 불리게 되었다. 마을 인근 산에 그의 무덤이 있고 남명 조식이 쓴 묘비가 있다. 남명은 고려 한유한, 조선의 조지서, 일두 정여창을 보기 위해 지리산을 찾았고 지리산 유람을 옥종 정려에서 마무리 한다. 산수를 보니 세상과 인간이 보인다는 갈음과 함께 그는 지리산 사람이 된다. 그만큼 그에게 이 곳 삼장 조지서와 그 부인의 지조는 깊은 울림이었다. 옥종은 남명이 기거하며 후학을 양성했던 덕산과 강을 사이에 둔 까닭에 그의 문하에 들거나 교류하기가 자연스러웠다. 남명의 제자 가운데 선생과 같이 살고자 한 사람이 겸재 하홍도. 옥종 안계에는 그를 그리는 사당 모한재가 있다. 이 곳은 겸재 하홍도가 학문을 갈고 닦으며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며, 미수 허목을 비롯한 당대의 유학자들과 교류하던 곳이기도 하다. 겸재 하홍도는 벼슬을 단념하고 재야에서 공부하며 실천하였던 당대의 대표적인 유학자 중 한 사람이며, 특히 예학에 밝았던 인물이다. 모한재에는 하홍도의 위패가 있는데, 위패는 원래 종천서원(宗川書院)에 있었으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서원이 훼철되면서 모한재로 옮겨 오게 되었다. 모한재 강당 마루에는 옛 종천서원의 현판 등도 보관되어 있다. 덕천강에 자리 잡은 강정, 흥룡리 이홍훈가 백의종군, 이순신의 마음 다잡기 백의종군에 나선 이순신은 하동지역을 오고 간다. 한 번은 합천에 있는 도원수 권율을 만나러 가는 길, 또 한 번은 수군통제사 재임 이후 구례⋅여수로 가는 길에. 합천 가는 길, 옥종 청수역에 들러 말먹이를 주고 쉬었다고 한다. 합천에서 권율을 만나 조선군의 패배 소식을 접하고 전황을 살피기 위해 남해를 두루 다닌다. 조경래가에 머물다 재수임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조경래가와 강정은 덕천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 조경래가 앞 들판에서 병졸을 모으고 훈련시키고, 전선을 가다듬는 전략회의를 했다는 강정. 지금은 하우스 단지로 바뀌고 기념탑만이 그날을 추억하고 있다. 재수임 이후 장군은 행장을 꾸려 남해안 곳곳을 다니며 전황을 분석한다. 그리고 하동을 지나 구례, 순천, 여수 지역을 돌며 삼군 수군을 재건한다. 백의종군 때 머물렀던 흥룡리 이홍훈가는 복원을 해 놓았다. 백의종군을 거친 이순신은 재수임 이후 조선수군을 재건하여 명랑해전으로 대승을 거둔다. 고성산성과 동학기념탑 결사항전과 최후 집결지 1894년 전라도에서 농민군의 봉기가 시작되자, 같은 해 7월 하동을 비롯한 서부 경남 농민들도 봉기에 나서 한때 진주성을 함락시키기도 했다. 일본군의 반격으로 물러나 이 곳 고성산성을 중심으로 항거했다. 10월 14일에 5천여 명으로 구성된 농민군은 이 곳으로 출병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결국 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 186명이 전사했다. 1895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서부경남의 동학농민군과 일본군의 전투현장인 ‘고성산성’(하동군 옥종면)과 ‘동학혁명군 추모탑’은 최후의 민중항거를 기리기 위해 옥종 사람들이 건립하여 해마다 그들의 영혼을 기린다. 고성산성은 언제 축조되었는지 모르지만 산성이 자연스럽다. 요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질서는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다. 남북관계, 한일관계, 북미관계는 물론 남남갈등이 예사롭지 않다. 하동군 옥종면 여기저기 남겨진 문화유적지는 우리나라의 고단한 역정이 물씬 묻어있다.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자유로운 삶이 있을까? 옥종 문화유적지를 둘러보는 동안 우리는 이순신이 지키고자 했던 것, 정몽주와 조지서 등 이 땅의 선비들이 완성하고자 한 인간정신, 그리고 항쟁의 깃발아래 모인 동학 민중이 꿈꾼 세상은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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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람들의 흔적이 곳곳에 서린 하동군 옥종면 문화유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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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작은변화포럼
- 남원 작은변화포럼 김양오 (작은변화포럼 대표) 이름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무슨 회의 이름이나 행사이름 같으니. 그래도 우린 우리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왜냐하면 하나의 독립된 단체가 아니고 확고한 결사체도 아니며, 그야말로 ‘느슨한 연대’로 한 달에 한번 주제 토론 비슷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기 때문이다. 남원에 작은 변화를 천천히 은근히 오랫동안 만들어 내자는 뜻에 합의한 여러 단체가 달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벌써 4년째다. 그럼 4년동안 뭘 했을까? 처음에 2년 동안은 회원 단체를 만들어 나가는 데 집중했다. 15개에서 20개 사이의 단체가 들어왔고 혹은 나갔다. 1년 이상 남원에서 활동한 건강한 시민단체라면 어떤 단체든 다 들어올 수 있으니 정말 다양한 성격의 단체가 모였다. 마을모임, 교사 모임, 교육공동체, 농민회. 청년 단체를 비롯해 공무원 노조와 의료원 노조까지 들어와 있다. 정말 이렇게 다양한 단체가 한 자리에 모여서 한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의아스럽기도 했다. 특히 공무원은 우리의 공격 대상이 될 확률이 높은데 한 자리에서 회의를 하고 있으니 신기하기도 하다. 1년동안 저녁밥을 함께 먹으면서 친해지는 시기가 지나자 드디어 이제 우리도 뭔가를 해 보자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나왔다. 뭘 하지? 다들 답답해 하는 게 의정이었다. 의원들이 뭘 하는 지 어떻게 하는 지 직접 보자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래서 꾸렸다. 의정모니터링단. 회원 한 분이 단장을 맡고 모니터링단을 꾸려 1년동안 의회 회기 기간에 방청을 꾸준히 진행했다. 회의가 다 평일 낮 시간에 이루어져 직장인들이 참여하기가 힘들고 시간을 맞출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 단장님과 몇 분이 거의 희생에 가까운 노력으로 모니터링을 꾸준히 해 나갔다. 그 덕분에 의원들은 작은변화포럼의 존재를 확실히 알았고 회의에 참여하는 태도도 많이 개선되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하지만 전문 지식도 부족하고 사안에 대한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회의만 참관하는 것은 많은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더 많은 공부 특히 예산에 대한 공부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거기까지 품을 낼만한 회원들이 없었다. 우린 모두 바쁜 사람들이니. 또 하나 작은변화포럼이 세간의 집중을 받은 활동이 있었다. 작년 국회의원 선거 기간에 후보들을 초청해 토론회를 진행했고 그것을 유튜브로 방송했다. 코로나19가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선거운동을 하기가 무척 힘들어진 후보들에게 시민단체에서 주최하는 토론회는 꽤 반가운 일이었다. 회원들은 후보들에게 어떤 질문을 할 것인지 깊이 토론하고 질문을 만들어 보냈다. 방송 며칠 전에 후보 캠프의 담당자들과 현장에서 방송 진행에 대한 실무 회의도 했다. 촬영팀은 남원 청년들이 만든 회사로 정했고 사전에 장소, 동선, 소품, 배경, 의상까지 신경쓰며 진짜 전문 방송국처럼 준비했다. 그리고 이틀에 걸쳐 촬영, 며칠 동안 편집, 또 며칠 동안 자막 써넣기, 유튜브 송출, 홍보, 조회수 올리기까지 정말 간단하게 시작한 일이었는데 말도 못하게 일이 많았고 시간도 매우 많이 걸렸다. 당시 대표였던 유지선회원은 토론 내용을 모두 자막 처리하느라 며칠동안 날을 샜다. 이렇게 힘든 일인 줄 알았으면 아무도 하자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르면 용감하다는 말이 증명되는 사건이었다. 2020년은 정말 다사다난했던 해다. 특히 남원은 더 그랬다. 코로나19 확진자가 하나도 없었는데 대구 확진자들이 대거 남원의료원에 입원하면서 회원 단체들이 큰 활약을 했고 여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큰 수해가 나서 시민단체들이 역량을 총동원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뒤였다. 비는 그쳤으나 몇 달이 지나도록 피해 보상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뿐이 아니다. 남원으로 귀농한 청년들은 큰 사기를 당해 억울하다며 유튜브를 통해 남원시청을 공격했고 급기야 남원 불매운동까지 벌였다. 남원시는 여기저기 개발한다며 산을 깎고 아름드리 나무를 무참히 베어냈다. 또 남원시와 의회는 반대 의견은 한번도 듣지 않은 채 지리산에 산악열차를 놔야 남원이 잘 살고 지리산이 산다고 신념에 차서 일을 추진했고, 춘향 영정문제, 태양광 문제를 비롯해 너무나 많은 문제로 남원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2021년 지금도 그렇다. 사람들이 작은변화포럼에게 뭔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너네 뭐 좀 해야 하는 거 아냐? 남원이 요 모양 요 꼴인데 뭐라고 목소리 좀 내야 하는 거 아냐? 나도 그러고 싶다. 그러나 작은변화포럼은 너무나 다양한 단체가 모여 있다. 대략 스무 개의 단체장들이 같은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현안에 대한 인식 차이도 크고 문제의식의 깊이도 너무나 다르다. 이런 상황에서 현안마다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건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회의 때마다 이런 것을 다 논의하다가는 밤을 새도 모자란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1년동안 함께 하기로 한 것에 대해서 조금씩이라도 우직하게 함께 가기로 하고 나머지 현안에 대해서는 그 문제에 심각성을 느낀 단체들이 모여서 성명서를 내든 뭘 하든 하기로 했다. 한 단체든 두 단체든 그렇게 하는 게 서로 부담이 없다는 판단이다. 그동안 남원에 이런 시민단체 연합 조직이 여러 번 결성됐다 없어졌다고 한다. 1년을 넘긴 적이 없다는 얘기도 있다. 그렇다면 작은변화포럼은 남원에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이다. 당장 행동하지 않아서 답답해 하는 회원들도 있지만 한번도 1년을 넘기지 못했다는, 그 어렵다는 연대 활동을 이렇게 오래 하고 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멀리 볼 일이다. 연합조직은 각 단체 회원들을 긴밀히 연결하고 새로운 활동의 플랫폼을 만들어 시민 활동의 진보를 위해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래서 ‘지역이 필요로 하는 조직’이 되어야 한다. 조직을 위한 조직이 아니라, 눈 앞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목표 지향성 조직이 아니라 그야말로 ‘지역이 필요로 하는 조직’으로 커나가야 한다. 올 해 작은변화포럼은 ‘내가 살고 싶은 남원, 내가 바라는 남원’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마당을 꾸려나가기로 했다. 5-6명 정도의 구성원들이 5회 이상 만나서 같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그냥 바라는 것을 툭 던져놓고 마는 것이 아니라 회를 거듭할수록 세밀하게 토론을 진행해서 나중에는 정책으로 만들어질 수 있도록 끌어나가 보자는 구상이다. 필요하면 해당 전문가를 초빙해서 조언을 들어볼 수도 있다. 이렇게 이야기 나누는 팀 20개를 조직해 ‘살고 싶은 남원’에 대해 꿈을 꾸고 구체화시켜 정책으로 만들어서 내년 선거 때 후보들에게 제시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좋은 정책이 많이 나오면 연말 작은변화포럼의 날 때 정책 박람회를 열어도 좋겠다. 좋은 꿈은 꿀수록 행복하다. 마구마구 꿈을 꿔보자. 작은변화포럼, 신박하지만 쌈박하지는 않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지금은 이 모습이 최선인 것을. 지역이 필요로 하는 조직으로 잘 성장해 나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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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개골에서의 긴박했던 한 달
- 배 혜 원(하동 양수발전소 반대대책위 사무국장) 오지 않을 것 같던 봄은 다시 돌아왔다. 벚꽃은 다시 피고 졌고, 무채색에 가까웠던 황장산은 꽃나무와 돋아나는 새순들로 울긋불긋 하다. 잔인한 계절이라는 4월도 마무리되어 간다. 나는 화개에서 자랐다. 네 살 때 부모님과 함께 이곳으로 이사왔고,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줄곧 화개에 있었다. 화개는 아름다운 곳이다. 십리벚꽃길과 조영남의 <화개장터>라는 노래로 유명하고, 김동리의 소설 <역마>의 주 무대로도 알려져 있다. 여름이면 아름답고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러 오는 관광객들로 붐비는 곳이고, 지리산 단풍을 보러 오는 등산객들도 많은 곳이다. 어느 날, 마을 회의에 다녀온 어머니는 우리 마을에 양수발전소 댐이 생긴다고 했다. 댐이 생기면 우리 집은 수몰 될지도 모르며, 이사를 가야한다고 했다. 애증의 공간이지만 내가 발붙이고 편히 쉴 수 있는 곳은 집이었다. 나에게 어떤 권능이 있다면, 우리 집이 수몰되는 것은 막고 싶었다. 마을사람들은 급하게 주민대책위를 만들고 반대운동에 나섰다. 마을사람들, 화개사람들 뿐 아니라 지리산 전 지역에서 반대운동에 동참하였다. 이에 하동군은 2월 21일에 예정되었던 사업설명회를 취소하고, 유치신청계획을 포기한다는 공문을 전달했다. 하동 화개 양수발전소 반대운동은 2월 21일 하동군이 백기를 들면서 마무리 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의 해명을 듣기위한 3월5일 군의회 의장 간담회와 3월 14일 하동군수 간담회까지 포함하면 한 달 정도의 시간이 걸린 셈이다. 아래는 이 문제에 대한 대응과정을 일지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2월 11일, 양수발전소는 무엇일까? 나는 학창시절에 산청에 있는 양수발전소를 견학한 경험을 떠올리고 검색을 시작한다. 검색을 통해 찾아낸 한국 수력 원자력(이하 한수원)의 자료에 의하면 계획된 댐의 크기는 생각보다 크다. 도심마을에 생기는 댐은 하부댐으로, 둑의 높이는 87미터, 길이는 430미터에 이르렀고, 저수량은 200만톤이었다. 부춘마을에 생기는 상부댐 또한 이와 비슷한 크기다. 아름다운 지리산, 고향산천에 거대한 댐이 두 개나 들어선다는 이야기다. 일부 주민들은 마을에 조그만한 식수댐이 생긴다는 이야기로 오해했다고 한다. 양수발전소가 만들어지면 반경 5km 내에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보상을 해준다는 이야기가 돌고, 전기를 할인해준다거나, 지역민에게 각종혜택이 주어진다는 식으로 찬성여론이 조성되는 조짐이 보인다. 받아본 사업설명회 자료는 양수발전소의 좋은 점을 이야기하는 홍보자료였다. 화개면민은 3000여명이고 도심마을 주민은 30여명이다. 홍보자료를 두고 찬반을 나누면 불리할 수도 있다. 2월 13일, 불안해진 도심마을 주민들은 반장 홍용표씨를 중심으로 주민대책위를 구성하고 행동에 나선다. 목표는 2월 21일 ‘화개면 양수발전소 유치 사업설명회’를 저지하는 것이다. 첫 번째로 군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군의원은 주민설명회가 개최되기 전까지 찬성도 반대도 할 수 없다는 얘기를 하며, 찬성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한다는 얘기 또한 덧붙인다. 주민들은 당황한다, 양수발전소 문제가 과연 찬성과 반대로 나뉠 수 있을까? 첫 번째로 면사무소 방문부터 시작한다. 면에서는 친절하게도(?) 주민설명회 자료를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주민들은 댐 건설 예정지의 도면을 보고 탄식한다. 면장은 일단 21일 사업설명회를 들어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다는 식으로 주민들을 회유한다. 하지만 주민대책위 사람들은 21일 사업설명회는 절대불가하며, 주민대책위 차원에서 저지할 것이라고 통보한다. 이어서 군청을 방문하고, 군청에서도 면사무소에서와 마찬가지로 진행된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주민사업설명회에서 의견을 피력하라는 답변을 듣는다. 주민들은 그 길로 달려가 현수막과 유인물을 인쇄소에 맡기고, 경찰에 집회신고서를 낸다. 21일 사업설명회를 막기 위한 모든 합법적인 방법을 동원한다. 이외에도 다른 지역들과 연대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한다. 2월 15일, 주민대책위는 같은 편을 만나기 시작한다. 하동참여자치연대는 무상급식 지키기 운동과 홍준표 전 경남도지사와 윤상기 하동군수의 주민소환운동을 앞장섰던 단체이고, 금오산환경지키미는 양보면에 대규모 돈사유치 반대에 앞장서고 금오산 일대의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성된 단체다. 그리고 이외에도 경남 환경운동연합, 녹색당, 정의당 등에서도 연대의 뜻을 밝혀오고, 주민 대책위는 <양수발전소 반대 하동군 대책위>로 확대 개편된다. 양수발전소 반대 하동군 대책위에서는 단체 카톡방을 만들고, 화개면민, 하동군민을 포함한 지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초대해 양수발전소 반대 관련 정보를 공유하고 의사표현을 개진한다. 2월 18일, 도심마을 사람들의 반대운동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크게 세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는 현수막을 걸고 유인물 등을 배포하는 홍보운동이다. 여러 가지 현수막 문구를 생각하지만,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한 가지 문구로만 정한다. 그리고 각종 단체들도 이름을 걸고 현수막을 게시한다. 두 번째는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설득하는 방법이다. 주민대책위 대표 홍용표씨를 필두로 화개 사람들을 잘 아는 사람들이 동네 구석구석에 있는 친지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한다. 세 번째는 온라인 운동이었다. 나는 사람들을 만나고 다닌 결과 여론이 찬성쪽으로 기울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조급해지고, 청와대 국민청원 글을 올려 홍보에 적극 활용한다. 그리고 단체 톡방은 생각보다 많은 힘을 발휘한다. 심각성을 느낀 주민들이 향우회 등을 통해 사람들을 모은 톡방은 한때 450여명이 참여해서 의사를 개진하고, 서로 정보를 공유할 정도로 커진다. 이 모든 운동은 2월 21일 사업설명회를 무산시키기 위한 운동의 과정이다. 면사무소 앞마당에 천막을 치고, 화개장터 입구에 탁자를 놓고 서명운동과 확성기를 사용한 방송으로 양수발전소 문제를 홍보하기 시작한다. 이 와중에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 그래도 일단 주민설명회를 들어봐야 한다는 사람과, 한철장사가 방해되니 확성기를 꺼달라는 화개장터 상인들도 있다. 나는 다시 한번 답답해진다. 7년 가까운 공사기간동안 화개천 물이 마르고, 공사차량들이 왔다갔다 하는 동안 화개를 찾는 사람들이 있을까. 그렇다면 화개장터의 상인들도 자유롭지 않다는 것은 상인들도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같은 날, 화개면사무소 2층에서는 주민자치위원회가 열리고 긴급안건으로 화개면 양수발전소 반대 안건이 올라오고, 재적위원 22명중 19명의 반대로 안건이 통과된다. 이제야 정영섭 군의원은 공식적인 반대의사를 표명한다. 양수발전소 사업설명회를 추진하는 하동군 직원은 군의원을 비롯한 주민들이 직접적인 반대의사를 표명했기 때문에 사업설명회를 재검토하겠다는 이야기를 한다. 2월 21일, 아침부터 주민들은 분주하게 움직인다. 천막을 펴고, 음향장비를 점검한다. 준비한 유인물과, 몸자보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추운 날씨에도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이 모인다. 150여명 정도로 모일 것을 예상한 것과는 달리 200여명 가까이 모인 것으로 추산한다. 이날 면사무소 앞 주차장에서는 군 직원들이 왔다갔다 하며 공문을 주고 받는다. 집행부 사람들은 사회를 보는 나에게 귓속말로 하동군으로부터 양수발전소 사업을 포기한다는 공문이 나왔고, 공문이 수정중이라는 이야기를 전해준다. 오전 11시, 집회가 시작된 지 2시간 만에 나는 공문을 받아들고 읽기 시작한다. ‘주민설명회를 앞두고 대다수의 주민이 양수발전소 건립을 반대한다는 의견을 표명함에 따라 우리 군에서는 양수발전소 건립사업을 한수원에 공모하지 않을 계획이며 또한, 본 사업을 더 이상 추진하지 않을 것임’이 주 내용이다. ⟪이하 중략⟫ 주민들의 힘으로 아름다운 화개동천을 지켜냈다는 자부심보다도 여덟 군데 후보지 중에 우리 동네만 빠졌을 뿐, 3군데는 반드시 지어질 것이라는 정부의 8차 전력 수급 계획은 오히려 마음을 무겁게 한다. 또한, 하동화력발전소 주변 지역 주민들의 건강문제, 양보면 폐기물 처리장 문제, 태양광 발전설비를 위한 무분별한 환경파괴 등도 함께 수면위로 떠올랐다. 하동군의 양수발전소 문제는 주민들의 승리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동의 에너지와 환경문제는 여전히 주민들을 괴롭힌다. 부군수 기자회견에 이은 주민대책위 입장문에서도 밝힌 것처럼 금성면 광역 쓰레기 소각장 건립 문제, 양보면 폐기물처리장 문제, 무분별한 벌목과 함께 진행되는 태양광 발전설비 문제, 그리고 하동화력발전소 인근 명덕마을 주민들의 문제 등이 남아있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이 고장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양수발전소 반대 투쟁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남은 7개의 후보지 중 한 곳에는 양수발전소가 지어진다는 것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남은 숙제일 것이다. 나는 하동의 환경현황들과 신규양수발전소가 들어서는 7개의 후보지를 돌아보는 환경여행을 기획한다. 코스는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하동지역 인근을 환경이라는 주제로 돌아보는 여정이다. 지리산 둘레길 코스에는 하동군과 산청군에 걸쳐있는 산청양수발전소가 있고, 하동군 금성면에는 광역 쓰레기 소각장과 하동 화력발전소가 있다. 그리고 하동군 양보면 폐기물처리장에도 방문해 인근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두 번째 코스는 신규 양수발전소 후보지로 선정된 나머지 7곳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가까운 곡성군에서는 하동처럼 양수발전소가 조기에 무산되었다는 소식이 들리고, 경북 봉화군에서는 지자체에서 적극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나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봉화군부터 방문해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계획을 세운다. 양수발전소 문제는 나에게 에너지가 어떤 과정을 거쳐 생산되는지, 그리고 우리 삶이 편리해지는 만큼 피해와 불편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해주는 계기가 되고, 우리의 삶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촉발 원인이 되었다. 나는 계속 지리산에 살면서 영화를 만들고 사람들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 나누면서 살아가기로 하고, 그 첫 작업으로써 ‘하동 양수발전소 반대운동’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기로 하고 제작에 나섰다. 어느덧 계절은 여름으로 성큼 접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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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개골에서의 긴박했던 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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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를 지지하는 레즈비언과 게이들
- 마고를 지지하는 레즈비언과 게이들 칩코 (지리산에 사는 퀴어) 사진.하진용 “오늘 여기엔 어떤 변태들이 모였죠?” “농촌 변태!” “얼쑤!” 째쟁째쟁- 꽹과리 소리가 울렸다. 이내 북과 장구, 징 소리가 어우러지고 사람들은 커다란 원을 그리며 어깨춤을 추었다. 날씨는 적당히 심술궂었다. 먹구름이 온종일 무거운 엉덩이를 틀고 앉은 하늘이었지만, 비는 오지 않았으니 되었다. 산내에서 성다양성 축제가 열리는 날이다. 우리는 알록달록 한복들로 저마다 꾸며 입었다. 두루마기에는 타이트한 치마를 함께 입고, 남성용 마고자와는 핑크색 아얌을 썼다. 한복 치마를 무지개색으로 리폼하거나, 외투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거나! 농촌에서 퀴어 축제를 한다는 건 말도 되지 않게 들리지만, 산내라면 달랐다. 처음 애인을 만났을 때, 우린 산내 이야기를 하며 친해졌다. 지리산 속 산내라는 마을에는 페미니스트들이 잔뜩 산다더라, 하는 이야기였다. 산내에서 활동하던 여성주의 단체 ‘문화기획달’이 발행하는 잡지를 둘 다 즐겨보고 있었다. 언젠가 지리산에서 살겠노라고 생각하면서. 처음 애인과 여행을 갔을 때에도 지리산으로 향했다. 우린 한시도 빼놓지 않고 손을 잡고 다녔다. 여자 둘이 3박 4일 내내 손을 잡고 다니는 걸, 민박집 아주머니가 이상하게 생각하시지 않을까 내심 두렵기도 했다. 아주머니는 우리가 떠나는 날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10년 전에 소중한 친구가 생겼다고 했다. 남편이 없어도 그러질 않는데, 이 친구만 곁에 없으면 한국이 통째로 텅 비어버린 것 같다고 했다. 이 친구를 조금만 더 빨리 만났더라면 당신의 인생이 더 반짝였을 거라면서. 그리고 우리 둘에게 그 손 꼭 잡고 행복하게 살라고 하셨다. 이듬해 봄, 우린 정말로 산내에 왔다. 산내는 듣던 대로 페미니스트들이 잔뜩 사는 마을이었다. ‘성폭력 근절을 위한 지리산 여성회의’가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성인지 감수성 교육을 했고, 마을 삼거리에선 N번방 성착취 사건을 주제로 1인시위 릴레이가 이어졌다. 또래 친구들은 대부분 ‘아주 작은 페미니즘 학교: 탱자’의 열정적인 수강생들이고, 마을 카페와 도서관엔 페미니즘 서적이 책장 가득했다. 길 가다가 페미니즘 구호가 적힌 티셔츠를 입은 중년 남성을 본 건 도시에서도 드문 일이었다. 그렇다고 산내가 마냥 천국이라는 건 아니다. 산내 성다양성 축제를 기획한 건 전 생명평화대학 신입생이다. 신입생들은 총 8명이었는데, 그중엔 이성커플도 있고 동성커플도 있었다. 실상사에서는 쉬는 시간에도 여자와 남자가 함께 방에 있으면 안 되고, 혼숙도 금지였다. 이성커플은 성적인 관계로 간주하여 이런 규칙을 따라야 했지만, 동성커플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동성 간의 관계를 아예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대에도 없던 ‘퀴어패스권(?)’을 얻었지만, 그닥 기쁜 일은 아니었다. 생명평화대학이 끝나고 나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여전히 젊은 여자만 보면 어르신들은 옆동네 노총각과 맺어주려 하고, 노총각이 없으면 ‘처녀가 시골에서 남자도 없이 괜찮냐’는 염려도 해주신다. 귀촌해서 집을 구할 때는 무조건 결혼과 임신 계획이 있다고 하라던데, 그 두 계획 모두 불가능한 커플을 위한 조언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여자들끼리만 사는 집엔 밤에 대문을 꼭 잠가야 한다는 조언 정도일까. ‘남자나 부부 세입자만 받는다’며 집을 못 구한 적도 있었다. 농촌엔 공개적인 퀴어 커뮤니티도, 선배 퀴어 부부도 없다. 중매를 자처하시는 어르신들에게 퀴어의 존재를 설명하는 것도 곤란한 일이다. 이런 농촌 문화 안에서 “있는 그대로 우리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즐거운 자리를 마련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으로 성다양성 축제를 기획하기 시작했다. 한 친구가 기획을 총괄하고 나는 포스터를 주로 맡았다. 지리산에는 창세여신 마고할미가 산다는 신화가 있다. 산내는 마고할미 품에 쏙 안긴 마을이었다. 성다양성 축제 포스터에는 주홍색 삭발머리에 입술엔 피어싱을 하고 어깨엔 타투를 새긴 마고여신이 그려졌다. 털복숭이 팔뚝으로 사랑스러운 손키스를 날리면서. 축제는 ‘성폭력 근절을 위한 지리산 여성회의’에서 사무실을 무료로 대관해주셨다. 전야제에는 카페 ‘히말라야’에서 공간을 베풀어주셨다. ‘비온 뒤 무지개 재단’에서 지원금을 보내주셨고,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도 무지개 깃발을 대여해주셨다. 전국 각지에서 노래, 춤, 낭독회, 드랙쇼, 토크쇼, 전시를 기꺼이 해주겠다는 연락들이 왔다. 이 모든 덕으로, 축제날 여성회의 사무실 앞 좁은 골목은 온통 무지개빛으로 북적거렸다. 퍼레이드 때는 쩌렁쩌렁 울리는 ‘born this way’ 노래와 함께 무지개 깃발을 휘날리면서 온 동네를 뛰어다니기도 했다. 퀴어 축제를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마을을 만들어 온 멋진 이웃들에게도 빚을 진 행사였다. 사진. 임송학 전야제에서 <런던 프라이드>를 상영했다. ‘광부들을 지지하는 레즈비언과 게이들(Lesbians and Gays Support the Miners ; LGSM)’에 대한 내용이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광부와 성소수자 두 집단이, 사회적 약자로서 서로의 연결고리를 발견해간다. 산내 성다양성 축제도 부스 판매 수익금 일부를 ‘지리산 산악열차반대 대책위’에 기부했다. “그럼 우리도 ‘LGSM’이네! 마고를 지지하는 레즈비언과 게이들(Lesbians and Gays Support Mago).”하는 우스갯소리도 했다. 성소수자들과 지리산도 광부들만큼이나 엉뚱한 조합일까? 성소수자들이 ‘있는 그대로’ 존재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지리산도 개발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재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무엇보다, 무지개는 서울광장뿐 아니라 지리산 자락 마고할미의 이마에도 떠오르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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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를 지지하는 레즈비언과 게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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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원주민
- 다정한 원주민 칩코 (전 생명평화대학 학생) 삼색 고양이가 또 왔네. 사람을 피하지 않는다. 달이 뜨면 슬렁슬렁 와서는 마당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는다. 먹을 것을 찾지도 않고, 딱히 관심을 바라지도 않는다. 우리가 보거나 말거나 그냥 누워서 쉬다 간다. 그날은 별도 달도 밝았다. 마지막 입주한 친구의 이삿짐을 나른 뒤, 친구들과 나는 마당에서 재잘대고 있었다. 삼색 고양이는 우리를 심드렁하니 보고는 마당에 기대 누웠다. 꼭 제집 같다. 하긴 저 고양이가 우리보다 여기 훨씬 오래 살았을걸. 그 날은 이 집을 ‘들레네’라고 이름 붙인 날이기도 했다. 매동 마을의 빛바랜 파란 대문 집에 온 지 한 달이 되었다. 내가 들어오고 이주 뒤에 한 명이 더 오고, 다음 주에 한 명이 더 오고, 그 다다음 주 두 명이 또 오는 식이었다. 왜 이런 식이었냐 하면, 다들 오기 싫어했으니까. 이 낡은 집은 쉽게 말하자면 유배지였다. 우린 산내 인드라망 공동체에서 운영하는 생명평화대학에 다니던 신입생들이었다. 학생들과 공동체와의 갈등이 깊어져, 공동체는 결국 학생들에게 거리를 두자고 했다. 생명평화대학은 중단되었고, 학생들은 대학숙소에서 쫓겨났다. 올해 봄, 떠돌이 백구 ‘들레’를 실상사에서 처음 만났다. 민들레가 필 무렵이라 이름이 들레가 되었다. 들개라는 이유로 실상사와 대학숙소에서 모두 쫓겨났던 개였다. 학생들과 퍽 친했는데, 지금은 행방을 모른다. 그때 학생들은 ‘공동체에서 사람을 쫓지 않는 것처럼, 개도 쫓아서는 안 된다’라고 했었는데, 지금은 사람도 쫓겨난 웃지 못할 상황이었다. 공동체는 이주 안에 대학숙소에서 짐을 비워달라고 했고, 그 대신으로 이 집을 내주었다. 대학숙소에서 한 달을 가까이 버티던 학생들까지 압박에 못 이겨 모두 들레네로 온 날이다. 우리가 꼭 들레 같았다. 도대체 죄명이 뭐길래 유배를 당한 거니? 이 사태를 궁금해하는 마을 분들이 많은데 다들 윤곽을 모른다고, 마을에 오래 산 청년들이 이를 전해주었다. 마을에 학생들 사정을 알리고, 도움을 구하는 자리를 마련해보자는 제안을 해주었다. 마을에 오래 살면서, 해마다 공동체를 떠나는 청년들을 내내 안타깝게 지켜보던 친구들이었다. 인드라망 공동체는 산내에 청년들이 유입되는 거의 유일한 창구였다.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대학 졸업생들도 신입생들을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했다. 결국 간담회를 열기로 했다. 앞으로 살 집도 필요하고, 가을 농사를 지을 땅도 필요했으니까. 간담회의 이름은 “우리 산내에서 살 수 있을까?”였다. 학생들과 공동체와의 대립은 청년-기성세대의 차이기도, 이주민-원주민 간의 갈등이기도 했다. 늘 인력난에 시달리는 ‘대안 판’의 진부한 문제이기도 했다. 신입생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기존의 위계적 질서들이 있었다. 이를 문제 제기했을 때 ‘일단 순응하라’는 답변이 따랐다. 신입생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공동체는 해결하고자 여러 시도를 해주었다. 그러나 공동체 활동가들은 이미 자신들의 일만으로도 충분히 바빴다. 학비도 받지 않는 대안 대학에 애써 투자할 시간은 없었던 것 같다. 대학을 중단하고 학생들을 내보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간담회를 열고 싶지 않았다. 대학을 중단하는 것과, 숙소에서 나가는 것을 원한 신입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우리의 의견을 일절 반영하지 않고 또 수직적인 결정을 내린 공동체가 미웠다. 한편으로는 공동체의 질서를 존중하지 못했던 점에 대해선 깊이 뉘우치고도 있었다. 간담회에서 할 말들이 정리도 안 된 상태였다. 이제 막 마을 살이를 시작하는데, 서러운 이야기로 마을 분들을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다(대학숙소는 마을과 동떨어진 위치에 있었으나, 들레네는 마을에 있다). 무엇보다, 정말 우리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의문이 컸다. 아무도 안 올까 봐, 그냥 우리끼리 졸업식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나았다. 괴상한 장마가 길어지고 있었다. 마을에 오래 산 친구들이 홍보를 맡았다. 졸업생들은 여는 공연과 사회를 해주기로 했다. 신입생들이 다과, 발표자료, 포스터 등등을 나누어 준비했다. 간담회 당일에도 비는 내렸다. 내 예상과는 달리, 간담회는 북적였다. 남원의 한 청년협동조합에서도 촬영을 하러 왔고, 산청과 해남 등 멀리서도 찾아왔다. 대부분은 마을 사람들이 자리를 채웠다. 공동체 구성원 중에서도 몇 분이 와 주셨다. 신입생들은 아쉬움 없이 실컷 말하기로 했다. 몇몇은 눈물도 찔끔 흘렸다. 신입생들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기에 졸업생들도 발언을 했다. 간담회는 예정보다 훨씬 지체되었다. 대부분 사람들이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말을 들어주셨다. 뒤풀이 후원금까지 거하게 쥐어주고 가셨다. 앞으로 마을에선 무엇을 하고 싶은지 말하는 자리도 마련해달라는 요청도 있었다. 간담회는 페이스북에 라이브로 방송을 하고 속기록도 올렸다. 간담회에 참석하지 못한 마을 분들도 그 긴 라이브 방송을 다 보시고 격려를 해주시곤 했다. 나는 좀 얼떨떨했다. 우리가 뭐라고 이렇게 다정하실까. 보답을 바라시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산내에서 함께 살자는 게 다였다. “우리 산내에서 살 수 있을까?” 우리는 질문밖에 없었는데. 장마가 끝나고도 태풍이 여러 차례 왔다 갔다. 하늘은 맑은가 싶다가도 자주 흐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삼색 고양이는 맑은 날에만 왔다. 비가 오면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서늘하게 마른 마당에 눕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다. 공동체에선 올해까지만 이 집을 빌려주었다. 겨울이 지나면 또 다른 들레네를 찾아 떠나야겠지. 삼색 고양이는 오래오래 여기 살았으면 좋겠다. 오늘도 마당 한가운데 은은한 달빛조명이 내린다. 우릴 내쫓지 않는 무심하지만 다정한 원주민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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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 하동소식
- 오지 않을 것 같던 봄은 다시 돌아왔다. 벚꽃은 다시 피고 졌고, 무채색에 가까웠던 황장산은 꽃나무와 돋아나는 새순들로 울긋불긋 하다. 잔인한 계절이라는 4월도 마무리되어 간다. 나는 화개에서 자랐다. 네 살 때 부모님과 함께 이곳으로 이사왔고,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줄곧 화개에 있었다. 화개는 아름다운 곳이다. 십리벚꽃길과 조영남의 <화개장터>라는 노래로 유명하고, 김동리의 소설 <역마>의 주 무대로도 알려져 있다. 여름이면 아름답고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러 오는 관광객들로 붐비는 곳이고, 지리산 단풍을 보러 오는 등산객들도 많은 곳이다. 어느날, 마을 회의에 다녀온 어머니는 우리 마을에 양수발전소 댐이 생긴다고 했다. 댐이 생기면 우리 집은 수몰 될지도 모르며, 이사를 가야한다고 했다. 애증의 공간이지만 내가 발붙이고 편히 쉴 수 있는 곳은 집이었다. 나에게 어떤 권능이 있다면, 우리 집이 수몰되는 것은 막고 싶었다. 마을사람들은 급하게 주민대책위를 만들고 반대운동에 나섰다. 마을사람들, 화개사람들 뿐 아니라 지리산 전 지역에서 반대운동에 동참하였다. 이에 하동군은 2월 21일에 예정되었던 사업설명회를 취소하고, 유치신청계획을 포기한다는 공문을 전달했다. 하동 화개 양수발전소 반대운동은 2월 21일 하동군이 백기를 들면서 마무리 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의 해명을 듣기위한 3월5일 군의회 의장 간담회와 3월 14일 하동군수 간담회까지 포함하면 한 달 정도의 시간이 걸린 셈이다. 주민들의 힘으로 아름다운 화개동천을 지켜냈다는 자부심보다도 여덟 군데 후보지 중에 우리동네만 빠졌을 뿐, 3군데는 반드시 지어질 것이라는 정부의 8차 전력 수급 계획은 오히려 마음을 무겁게 한다. 또한, 하동화력발전소 주변 지역 주민들의 건강문제, 양보면 폐기물 처리장 문제, 태양광 발전설비를 위한 무분별한 환경파괴 등도 함께 수면위로 떠올랐다. 이 글은 ‘하동 양수발전소 반대운동 일지’를 정리한 일부이다. 2월 11일, 양수발전소는 무엇일까? 나는 학창시절에 산청에 있는 양수발전소를 견학한 경험을 떠올리고 검색을 시작한다. 양수발전소는 상부와 하부, 두 개의 댐으로 구성된다. 원자력 발전을 포함한 발전소에서 잉여전력이 생기면, 하부 댐에 있는 물을 상부 댐으로 끌어올려 놨다가, 전력수요가 높아 전력공급이 불안정할 때 상부 댐에 있던 물을 하부 댐으로 흘려보내 긴급한 전력공급을 하는 비상용 발전소이다. 상시 전력공급 시스템도 아니고, 비상 전력공급 시스템을 지리산 계곡에 짓는다고? 이것은 백번 양보해도 상식적인 일이 아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학창시절 보았던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정부의 개발논리에 맞서 싸우다 패배한 사람들의 비극적인 장면들이 떠오른다. ‘화개면 양수발전소 유치 사업 설명회’는 2월 21일 오전 10시에 예정되어 있다. 수소문 한 결과 사업설명회는 사업을 진행하기 위한 과정으로, 주민대책위를 구성하여 사업설명회를 막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검색을 통해 찾아낸 한국 수력 원자력(이하 한수원)의 자료에 의하면 계획된 댐의 크기는 생각보다 크다. 도심마을에 생기는 댐은 하부댐으로, 둑의 높이는 87미터, 길이는 430미터에 이르렀고, 저수량은 200만톤이었다. 부춘마을에 생기는 상부댐 또한 이와 비슷한 크기다. 아름다운 지리산, 고향산천에 거대한 댐이 두 개나 들어선다는 이야기다. 일부 주민들은 마을에 조그만한 식수댐이 생긴다는 이야기로 오해했다고 한다. 양수발전소가 만들어지면 반경 5km 내에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보상을 해준다는 이야기가 돌고, 전기를 할인해준다거나, 지역민에게 각종혜택이 주어진다는 식으로 찬성여론이 조성되는 조짐이 보인다. 받아본 사업설명회 자료는 양수발전소의 좋은 점을 이야기하는 홍보자료였다. 화개면민은 3000여명이고 도심마을 주민은 30여명이다. 홍보자료를 두고 찬반을 나누면 불리할 수도 있다. 2월 13일, 불안해진 도심마을 주민들은 반장 홍용표씨를 중심으로 주민대책위를 구성하고 행동에 나선다. 목표는 2월 21일 ‘화개면 양수발전소 유치 사업설명회’를 저지하는 것이다. 첫 번째로 군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군의원은 주민설명회가 개최되기 전까지 찬성도 반대도 할 수 없다는 얘기를 하며, 찬성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한다는 얘기 또한 덧붙인다. 주민들은 당황한다, 양수발전소 문제가 과연 찬성과 반대로 나뉠 수 있을까? 첫 번째로 면사무소 방문부터 시작한다. 면에서는 친절하게도(?) 주민설명회 자료를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주민들은 댐 건설 예정지의 도면을 보고 탄식한다. 면장은 일단 21일 사업설명회를 들어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다는 식으로 주민들을 회유한다. 하지만 주민대책위 사람들은 21일 사업설명회는 절대불가하며, 주민대책위 차원에서 저지할 것이라고 통보한다. 이어서 군청을 방문하고, 군청에서도 면사무소에서와 마찬가지로 진행된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주민사업설명회에서 의견을 피력하라는 답변을 듣는다. 주민들은 그 길로 달려가 현수막과 유인물을 인쇄소에 맡기고, 경찰에 집회신고서를 낸다. 21일 사업설명회를 막기 위한 모든 합법적인 방법을 동원한다. 이외에도 다른 지역들과 연대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한다. 2월 15일, 주민대책위는 같은 편을 만나기 시작한다. 하동참여자치연대는 무상급식 지키기 운동과 홍준표 전 경남도지사와 윤상기 하동군수의 주민소환운동을 앞장섰던 단체이고, 금오산환경지키미는 양보면에 대규모 돈사유치 반대에 앞장서고 금오산 일대의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성된 단체다. 그리고 이외에도 경남 환경운동연합, 녹색당, 정의당 등에서도 연대의 뜻을 밝혀오고, 주민 대책위는 <양수발전소 반대 하동군 대책위>로 확대 개편된다. 양수발전소 반대 하동군 대책위에서는 단체 카톡방을 만들고, 화개면민, 하동군민을 포함한 지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초대해 양수발전소 반대 관련 정보를 공유하고 의사표현을 개진한다. 도심마을 주민 문봉두씨와 나는 금오산환경지키미 정기모임에 참석하고, 양보면 폐기물 처리장과 고전면 돈사 유치 반대 투쟁의 과정을 이야기하는 회원들을 보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하동군에서 추진하는 사업들에서 사업설명회는 요식행위임을 다시한번 확인한다. 나는 대책위 사무국장으로서 조계종 총림이자 댐이 생기는 바로 옆 골짜기에 있는 쌍계사에도 동참할 것을 요청한다. 세 번 만에 주지스님을 만나 주민들과 뜻을 함께할 것을 약속받는다. 도심마을 주민대책위가 활동을 시작한지 5일이 지나서야 나는 홍용표씨와 문봉두씨와 함께 부춘마을 회의에 참석한다. 부춘마을 사람들도 양수발전소 문제의 심각성에 동의하고, 동참할 것을 결의한다. 2월 18일, 도심마을 사람들의 반대운동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크게 세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는 현수막을 걸고 유인물 등을 배포하는 홍보운동이다. 여러 가지 현수막 문구를 생각하지만,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한 가지 문구로만 정한다. 그리고 각종 단체들도 이름을 걸고 현수막을 게시한다. 현수막을 게시하는 곳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대로변과 교차로를 중심으로 한다. 현수막이 설치되는 곳에는 공교롭게도 양수발전소 사업설명회 현수막과 나란히 하는 곳도 있고, 댐에서 가장 가까운 정금 삼거리에도 현수막을 건다. 이곳은 한국지질연구원에서 설치한 지진관측소 맞은편이다. 1936년 쌍계사를 진앙지로 한 규모 5.1의 지진이 발생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댐이 건설되는 과정에서 혹은 댐이 건설된 이후 지진이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두 번째는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설득하는 방법이다. 주민대책위 대표 홍용표씨를 필두로 화개 사람들을 잘 아는 사람들이 동네 구석구석에 있는 친지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한다. 세 번째는 온라인 운동이었다. 나는 사람들을 만나고 다닌 결과 여론이 찬성쪽으로 기울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조급해지고, 청와대 국민청원 글을 올려 홍보에 적극 활용한다. 그리고 단체 톡방은 생각보다 많은 힘을 발휘한다. 심각성을 느낀 주민들이 향우회 등을 통해 사람들을 모은 톡방은 한때 450여명이 참여해서 의사를 개진하고, 서로 정보를 공유할 정도로 커진다. 이 모든 운동은 2월 21일 사업설명회를 무산하기 위한 운동의 과정이다. 면사무소 앞마당에 천막을 치고, 화개장터 입구에 탁자를 놓고 서명운동과 확성기를 사용한 방송으로 양수발전소 문제를 홍보하기 시작한다. 이 와중에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 그래도 일단 주민설명회를 들어봐야 한다는 사람과, 한철장사가 방해되니 확성기를 꺼달라는 화개장터 상인들도 있다. 나는 다시 한번 답답해진다. 7년 가까운 공사기간동안 화개천 물이 마르고, 공사차량들이 왔다갔다 하는 동안 화개를 찾는 사람들이 있을까. 그렇다면 화개장터의 상인들도 자유롭지 않다는 것은 상인들도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같은 날, 화개면사무소 2층에서는 주민자치위원회가 열리고 긴급안건으로 화개면 양수발전소 반대 안건이 올라오고, 재적위원 22명중 19명의 반대로 안건이 통과된다. 이제야 정영섭 군의원은 공식적인 반대의사를 표명한다. 양수발전소 사업설명회를 추진하는 하동군 직원은 군의원을 비롯한 주민들이 직접적인 반대의사를 표명했기 때문에 사업설명회를 재검토하겠다는 이야기를 한다. 2월 19일, 도심마을 주민들을 필두로 한 양수발전소 반대 하동군 대책위 사람들 20여명이 모여 군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공식입장을 발표한다. 주민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이다. 양수발전소는 사업비 7600억원 규모의 거대한 토목공사이기 때문에 지리산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생태계를 훼손한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두 번째 이유는 임산물과 관광자원으로 먹고사는 주민들의 생활터전이 없어진다는 것, 세 번째는 당국의 졸속행정으로 인해 주민들은 아무런 정보도 없이 사업설명회로부터 사업추진과정이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기자회견문은 대책위 공동대표를 맡게 된 부춘 이장 김동영씨가 낭독한다. 기자들로부터 질문을 받는 시간에는 찬성하는 주민들도 있을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이 사안의 본질을 흐리는 질문을 하는 기자도 있다. 나를 비롯한 주민들은 해당 기자에게 호통을 치고, 그 기자는 얼굴을 붉히며 회견장을 떠나는 상황도 벌어진다. 기자회견이 끝난 후 주민들은 하동군청 앞에서, 화개면 사무소 앞에서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친다. 서부경남의 소식을 전하는 서경방송과 진주KBS, 경남 MBC에서는 후속취재를 요청하여 마을로 돌아온 주민들을 인터뷰 하고, 도심마을에서 다원을 오랫동안 운영하고 녹차의 명인으로 인정받은 오시영씨는 천년 차밭을 배경으로, 귀농해 펜션을 운영하고 있는 문봉두씨와 중촌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도시로 갔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김길만씨는 계곡을 배경으로 이 사업의 문제점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사업이 예정된 지역을 가리키며 댐의 길이와 높이를 가늠해보도록 한다. 2월 20일, 반대운동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사업설명회를 하루 앞둔 화개면 사무소 앞 천막에는 전운마저 감돈다. 서명을 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보탠다. 화개에 양수발전소가 들어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사업을 추진하는 주체는 누구냐 등. 화개면장은 반대서명을 하고 있는 천막으로 와 오후 2시 하동군의원 두 명과 주민자치 위원, 화개면 이장단 협의회장 등과 반대주민들의 간담회에 참석할 것을 요청한다. 간담회는 면장실에서 열리고, 조금은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하동군 악양면 지역에서 당선된 손종인 의원이 입을 떼는 것으로 시작한다. ‘양수발전소는 하동군에 들어오지 않는다. 시작도 하기 전에 주민들이 너무 빨리 움직여서 의원들이 당혹스럽다’는 내용으로 이야기를 한다. 이에 주민들은 서운한 마음을 감출수가 없다. 주민 대책위가 구성될 때에는 군의원으로서 어떤 입장도 공식 표명할 수 없다며 주민들과의 만남을 거절한 사람들이, 이제 와서 주민들이 성급하게 움직였다는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손종인 의원에게 따져 묻는다. 이 문제를 언제 처음 인지했는지, 사업 개요가 포함된 자료를 보고서도 사업설명회가 필요한 사안이라고 생각했는지, 주민들이 군의원에 대하여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전달한다. 군의원들은 주민들의 의견을 적극 수렴하여 군수로부터 사업 포기 공문을 받아낼 것을 약속한다. 공문이 일찍 도착하면, 주민들이 반대운동을 계속할 필요가 없음을 이야기한다. 협상은 일단락되고, 주민들은 천막을 걷는다. 이날 저녁 도심 주민들은 경로당에 모여 어떻게 반대집회를 진행할 것인지 이야기한다. 행정에서 사업설명회를 취소하고 공문을 보내더라도 일단 모여서 집회를 시작하는 방향으로 설정하고, 프로그램의 진행순서와 그에 따르는 준비물까지 세세하게 논의한다. 그리고 사업설명회를 강행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설명회를 강행할 경우, 어떻게 설명회장의 입구를 봉쇄할 것인가, 입구를 봉쇄하지 못했을 경우 행동지침까지 이야기한다. 나는 서울에서 참여해본 집회들을 떠올려본다. 세월호 진상규명 촉구, 박근혜 탄핵 등 중대한 시국사안에 대한 집회들에 부담 없이 참여한 기억은 있건만 ‘양수발전소’라는 사안으로 반대 대책위 집행부로서 직접 진행하려니 걱정과 두려움이 앞선다. 급하게 추진한 집회에 사람들이 올까? 주민들은 오전 8시 30분까지 면사무소 앞 주차장에 모여 집회를 준비하기로 한다. 이날 저녁, 하동군이 사업포기 결재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지만 공문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집회는 일단 진행하기로 한다. 2월 21일, 아침부터 주민들은 분주하게 움직인다. 천막을 펴고, 음향장비를 점검한다. 준비한 유인물과, 몸자보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추운 날씨에도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이 모인다. 150여명 정도로 모일 것을 예상한 것과는 달리 200여명 가까이 모인 것으로 추산한다. 도심마을에서 펜션을 운영하는 최한익씨의 ‘아름다운 강산’ 색소폰 연주와, 급하게 모인 풍물패의 사전 공연으로 집회는 시작하고, 나는 더듬더듬 진행을 한다. 진행 순서는 양수발전소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와 사건의 전개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대책위 공동대표 김동영씨와 홍용표씨가 한마디씩 하고, 섬진강을 지키는 사람들, 경남환경운동연합, 녹색당, 금오산 환경지키미, 명덕마을 하동화력발전소 주민대책위 등에서 연대발언을 한다. 그리고 산청양수발전소에 다녀온 신기 이장도 나와서 말을 보탠다. 가수 옥수수의 연대 공연은 흥을 돋우기도 하고,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을 떠올리는 노래를 부르기도 하여 연대의 깊이를 더한다. 양수발전소 반대 싸움을 위한 모금도 함께 진행한다. 모금의 목적은 현수막을 걸고 유인물을 작성하고, 몸자보를 주문하는데 사용된 비용을 충당하고, 싸움 이후 결과를 알리는데 사용할 비용이다. 모금은 일인당 만원을 한도로 하고, 100만원이 모이면 마감하는 것으로 원칙을 삼는다. 이날 면사무소 앞 주차장에서는 군 직원들이 왔다갔다 하며 공문을 주고 받는다. 집행부 사람들은 사회를 보는 나에게 귓속말로 하동군으로부터 양수발전소 사업을 포기한다는 공문이 나왔고, 공문이 수정중이라는 이야기를 전해준다. 나는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확실한 공문을 눈으로 확인할 때까지 해산하지 말고 자리를 지켜줄 것을 사람들에게 부탁한다. 공문 내용을 수정할 때까지 막간을 이용한 자유발언 시간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한마디씩 보탠다. 화개에서 더 이상 자연을 파괴하는 일을 ‘쎄(혀)도 안되게 하라, 츔(침) 삼키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으로 집회에 모인 사람들을 북돋는다. 오전 11시, 집회가 시작된 지 2시간 만에 나는 공문을 받아들고 읽기 시작한다. ‘주민설명회를 앞두고 대다수의 주민이 양수발전소 건립을 반대한다는 의견을 표명함에 따라 우리 군에서는 양수발전소 건립사업을 한수원에 공모하지 않을 계획이며 또한, 본 사업을 더 이상 추진하지 않을 것임’이 주 내용이다. 나는 최한익씨를 불러 사랑의 박수를 제안한다. 사랑의 박수는 도심마을 저녁 회의때마다 박수를 세 번 치고 ‘사랑합니다!’ 하는 구호를 외치는 박수로, 때로는 잠 못 이루면서 걱정하고 바쁜 일정에 쫓겨 고생하는 주민들끼리 격려하는 일종의 의식이다. 이날 사랑의 박수는 집회에 모인 사람들끼리 격려와 함께 지리산과 사람간의 연대감마저 북돋는다. 초대가수 옥수수님의 축하공연이 이어지고, 급하게 구성된 풍물패의 마무리 길놀이로 집회는 마무리된다. 집회를 정리한 후 양수발전소 반대 하동군 대책위 집행부는 화개면사무소 2층 회의실에서 회의를 한다. 하동참여자치연대, 섬진강을 지키는 사람들, 녹색당 경남도당, 정의당, 금오산 환경지키미, 하동화력 발전소 명덕마을 주민대책위 등에서 모인 사람들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서로 소개를 하고 인사를 하는 수준의 회의에서 나는 명덕마을 주민들이 하동화력전소가 생기면서 싸움을 시작했고, 마을 주민의 40%가 암 투병한 사실과, 화개초등학교와 진정초등학교 아이들의 모발샘플을 분석한 결과 중금속이 검출되었다는 사실을 듣는다. 내가 누리는 모든 에너지와 문명의 이기들은 아마도 명덕마을 주민들의 고통을 담보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금오산 환경지키미 정용길씨의 양보면 폐기물처리장 관련 발언은 하동 내의 각종 환경문제들은 양수발전소가 우리 집 앞에 들어서려고 했던 것처럼 아무도 모르게 살금살금 생겨난다는 것을 증언한다. 그리고 뒤늦게 문제 삼는다면 법적으로 행정적으로 제지할 방법이 없고, 일단 만들어 진 다음에는 불법적인 일들이 벌어지는지 아닌지 주민들이 철저히 감시하는 방법 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나는 그동안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곳에서 자고, 아무렇지 않게 각종 쓰레기를 눈앞에서 치워버리곤 했다. 그런 것들을 누림으로써 고통 받는 사람들과 환경, 생태계에 대한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을 하고 양보면 폐기물처리장 인근 주민들과 명덕마을 주민을 포함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과 생태환경에 대한 부채감을 느낀다. 2월 22일 비 오는 날 아침, 하동군은 약속대로 부군수 기자회견을 하동군청 2층 브리핑룸에서 진행한다. 하동군은 주민의 반대에 따라 화개면 양수발전소 사업추진을 포기하고, 한수원에 공모의사가 없다는 뜻을 전한다고 발표한다. 한 기자는 주민들이 사업을 이미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있다는 식으로 질문을 하자, 나는 그런 질문 하지 말라며 호통을 친다. 이에 옆에 있던 기자가 기자들만 질문하는데 방해하지 말라고 하며 주민들을 자극한다. 부군수는 기자회견을 마치자 나가려고 하고, 주민들은 주민 입장문을 발표할 테니 들어달라며 부군수를 막는 실랑이도 벌어진다. 군청직원은 ‘부군수님이 바쁘다’라며 호통을 치고 주민들도 ‘우리는 안바쁘냐’며 대응한다. 부군수는 머쓱한 표정으로 기자회견장에 남아서 홍용표씨가 낭독하는 입장문을 듣는다. 이것으로 하동 양수발전소 문제는 마무리되었지만, 기자회견이 끝난 후 주민들은 한수원측에 하동을 양수발전소 후보지에서 빼달라는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예정되었던 제윤경 국회의원과의 간담회에 참석한다. 간담회는 자연스럽게 그동안 주민들이 반대운동을 벌이며 겪었던 현황들을 포함한 주민들이 느끼는 하동군 행정의 문제점들을 이야기하는 자리가 된다. 제윤경 의원 및 더불어민주당 소속 군의원들은 그런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답변한다. 주민들은 만족스러운 답변을 듣지는 못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는 절차적인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이날 저녁, 도심마을 주민들은 마을회관에 모여 잔치를 한다. 고생한 서로를 격려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이날 어김없이 사랑의 박수를 친다. 앞으로의 진행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형식적이나마 군의회와 간담회를 하는 일정과, 군수 간담회로 이 사건을 마무리하기로 한다. 이렇게 싸움은 승리로 끝난 것으로 보인다. 3월 5일, 양수발전소 반대 하동군 대책위는 반대 투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군의회 간담회를 하기로 한다. 약속을 잡는 과정에서 군의회 의장은 주민들이 양수발전소 반대투쟁하는 것을 언론보도를 통해 알았다고 주장하며, 군의회는 책임이 없다는 답변을 한다. sns단체 대화방에서는 그쯤하면 됐다는 주민들의 의견도 올라온다. 나는 주민들의 피해와 불편을 책임질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단체 대화방에 메시지로 전한다.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다면 이와 비슷한 사건은 개선되기가 어렵다는 생각도 한다. 대책위 공동대표를 맡은 홍용표씨는 화개면 지역구 군의원인 정영섭 의원을 통해 3월 5일 로 일정을 약속한다. 군의회 측에서는 장소가 협소하다는 이유로 최소인원만 참여할 것을 요구하지만, 주민 대책위에서는 최대한의 주민들이 참석해줄 것을 요청한다. 3월 5일 오전 10시 군청앞에는 30명에 가까운 주민들이 모이고, 군수 비서실을 찾아가 3월 13일로 군수 간담회도 확정한다. 오전 11시 군의회 의장 신재범 군의원, 정영섭 군의원, 손종인 군의원과 주민 30여명은 간담회를 가진다. 주민들의 요구는 간명하다. 군의회는 이 문제를 언제 최초 인지 했는지,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를 묻는 내용이다. 신재범 의장은 끝까지 자신들은 몰랐으니 잘못이 없고 이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답변한다. 주민들은 언성이 높아지기도 하고, 나는 군의회 의장과 실랑이도 벌인다. 신재범 의장은 ‘주민들 수준이 낮다’는 모욕적인 발언도 서슴없다. 자기의 불찰을 변명하고 군의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발언을 계속하던 손종인 군의원은 한참 지나서야 자신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는 것으로 간담회는 마무리된다. 3월 13일로 예정되어있던 군수간담회는 군수의 일정을 고려해 3월 14일 오후 2시로 미뤄졌다. 군청에서는 집행부 인원 5~6명만 참여할 것을 요구하고, 주민대책위 공동대표 홍용표씨는 주민들이 가겠다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뜻을 전한다. 주민들은 3월 13일 저녁 마을회관에 모여 군수의 사과를 받아내자고 결의한다. 3월 14일 오후 2시 군청 대회의실에서 주민 20여명과 군청 담당 직원들, 군수가 간담회를 진행한다. 군수 비서실장은 집행부만 와줄 것을 요청했는데, 왜 이렇게 주민들이 많이 왔냐고 묻는다. 주민들은 황당하다. 주민들이 군수를 만나러 온 것이 잘못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군청 직원이 야속하다. 나는 군수간담회를 기록하기 위해 마이크를 설치하지만, 군청 직원이 마음대로 마이크를 철수하는 등 불편한 상황들이 벌어진다. 군수는 누군가 자신을 제소하기 위해 녹음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윤상기 하동군수는 일전에 군수 후보 토론회에서 대송산단 위그선 계약에관한 사안을 허위로 이야기해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하동참여자치연대로부터 검찰에 고발당했으나 검찰에서 불기소 처분을 받은 적이 있다. 하동군수 윤상기는 ‘이미 끝난 이야기를, 이제와서 무슨 이야기를 듣겠다고 간담회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왔느냐’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는 준비해간 내용을 질문한다. 군수에게 가장 궁금한 내용은 정금리 차밭을 세계 주요 농업유산으로 등재하는 것을 추진했던 사람이, 그 인접지역에 양수발전소를 짓겠다는 한수원의 계획을 아무런 사전 검토 없이 협조하겠다고 한 이유다. 군수는 이 질문에 대해 ‘습(물)이 많은 것이 녹차농사에 유리하다’는 말을 하고, 내가 ‘그것이 7600억원 규모의 댐 공사를 긍정적으로 검토한 이유냐’고 묻자, 군수는 ‘그것이 이유가 아니라 일반적인 사실을 말한 것’이라는 식으로 말을 돌린다. 군수는 나에게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말하고 나는 군수에게 호통을 친다. 진작에 막을 수 있었던 사건을 주민들이 반대운동을 하도록 내버려둔 사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데 주민들에게 고압적인 태도로 답변을 회피하는 모습에 나는 말문이 막힌다. 나의 아버지 배윤천도 함께 호통을 친다. 옆에 있던 군청 직원들은 배윤천에게 다가가 제지한다. 배윤천은 직원들에게 내버려두라며 실랑이를 벌인다. 주민들은 군청직원들이 군수를 비호하는 모습에 위축된 분위기다. 군수는 주민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댐 건설사업을 주민들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밀실행정이라며 강변한다. 나는 주민들이 왜 이것을 알아야 하느냐며 반문한다. 애초에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사업에 대해 군수로서 판단하여 한수원에 협조하지 않았다면 주민들이 생계를 내팽개치고 고생하면서 반대할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하동군수 윤상기는 주민들의 노고에 대한 사과나 유감표명을 하지 않고 ‘앞으로 잘하겠다’고만 답변한다. 주민들은 각자 군수에게 서운한 점을 한 마디씩 한다. 이 와중에 군청 직원들은 ‘3시에 군수님 일정이 있으니 간단히 말하라’고 한다. 군수의 사과와 해명을 듣고 싶었던 주민들은 잘못한 것이 없다는 군수의 뻔뻔한 태도에 아쉬움을 남긴 채 간담회를 마무리한다, 주민들은 군청앞에 모여 기념사진을 찍는다. 짝, 짝, 짝. 사랑합니다! 하동군의 양수발전소 문제는 주민들의 승리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동의 에너지와 환경문제는 여전히 주민들을 괴롭힌다. 부군수 기자회견에 이은 주민대책위 입장문에서도 밝힌 것처럼 금성면 광역 쓰레기 소각장 건립 문제, 양보면 폐기물처리장 문제, 무분별한 벌목과 함께 진행되는 태양광 발전설비 문제, 그리고 하동화력발전소 인근 명덕마을 주민들의 문제 등이 남아있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이 고장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양수발전소 반대 투쟁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남은 7개의 후보지 중 한 곳에는 양수발전소가 지어진다는 것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남은 숙제일 것이다. 나는 하동의 환경현황들과 신규양수발전소가 들어서는 7개의 후보지를 돌아보는 환경여행을 기획한다. 코스는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하동지역 인근을 환경이라는 주제로 돌아보는 여정이다. 지리산 둘레길 코스에는 하동군과 산청군에 걸쳐있는 산청양수발전소가 있고, 하동군 금성면에는 광역 쓰레기 소각장과 하동 화력발전소가 있다. 그리고 하동군 양보면 폐기물처리장에도 방문해 인근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두 번째 코스는 신규 양수발전소 후보지로 선정된 나머지 7곳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가까운 곡성군에서는 하동처럼 양수발전소가 조기에 무산되었다는 소식이 들리고, 경북 봉화군에서는 지자체에서 적극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나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봉화군부터 방문해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계획을 세운다. 양수발전소 문제는 나에게 에너지가 어떤 과정을 거쳐 생산되는지, 그리고 우리 삶이 편리해지는 만큼 피해와 불편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해주는 계기가 되고, 우리의 삶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촉발 원인이 되었다. 나는 계속 지리산에 살면서 영화를 만들고 사람들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 나누면서 살아가기로 하고, 그 첫 작업으로써 ‘하동 양수발전소 반대운동’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기로 하고 제작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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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 하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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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진 후에
- 민들레 진 후에 칩코 (생명평화대학 신입생) 민들레 피는 계절, 나는 산내에 왔다. 들레가 산내에 온 것도 같은 시기였다. 그래서 이름이 들레가 되었다. 들레를 처음 만난 곳은 실상사였다. 사람을 졸졸 쫓아다녔지만, 다가가면 줄행랑을 쳐버리는 겁쟁이 백구였다. 털은 하얗지만 때가 꼬질꼬질했고, 사납지는 않았지만 다리가 튼실한 것이 떠돌이 생활을 오래한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사람만 보면 꼬리를 치며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맞출까. 들레가 어디서 왔는지 궁금했다. 나는 인드라망 공동체의 생명평화대학에 다닌다. 나와 같은 신입생들과도 들레는 금세 친구가 됐다. 우리가 밥을 준 것도 아닌데, 들레는 우리를 잘 따랐다. 언덕배기에 있는 대학 숙소까지 따라오곤 했는데, 숨도 안 고르고 폴짝폴짝 노루처럼 뛰어오르며 우리를 앞질러 갔다. 들레 뒷모습을 보면서 헉헉거리며 언덕을 오르자면, 꼭 내가 들레 집에 초대받는 기분이었다. 그 드넓은 언덕을 주인처럼 자유롭게 쏘다녔으니까. 들레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실상사에서는 들레를 내쫓기로 했다. 지금껏 모든 들개에게도 그래왔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점점 들개 친구들을 데리고 올 거라고 했다. 또 들레가 사람을 공격할 수 있다고 했다. 실상사는 아이들도 많이 오기 때문에 특히 위험했다. 들레는 사람 신발을 물어가는 고약한 버릇까지 있었다. 들레는 그게 놀자는 의미였는데, 사람들은 반기지 않는 방식이었다. 들레가 해우소가 아닌 곳에서 볼일을 본다는 점도 이유가 됐다. 실상사 사람들은 들레를 만나면 손뼉을 치거나 훠이훠이 위협을 하며 내쫓기 시작했다. 갈 곳 없는 들레는 대학 숙소에 더 자주 놀러 오게 됐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대학 숙소 사람들도 들레를 내쫓기로 했다. 절과 대학만이 아니었다. 어느 농장이나 과수원 주인도 들개가 밭을 헤집고 다니는 걸 원치 않았다. 닭을 소유한 농부들은 더 강경했다. 들레는 위험한 시멘트 찻길 외에는 어느 곳에서도 왕래할 것을 ‘허락’받지 못했다. 동네의 개들이 왜 다리를 절뚝이곤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들레를 내쫓는 것이 이상했다. 들레는 사람을 좋아했다. 사람들을 보면 반갑게 인사했고, 절에 매일 눈도장을 찍었다. 나는 들레가 우리 공동체에 문을 두드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들레는 이웃으로 받아달라고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한 셈이었다. 공동체에서 사람을 내쫓지 않는 것처럼, 우리에게 내쫓을 권리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다. 개도 당연히 산내의 어느 땅이든 오갈 수 있는 생명이었다. 개가 친구들을 데려오지 말라는 말, 해우소에서 볼일을 보라는 말, 신발을 물지 말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내쫓는 것은 차별이었다. 공동체 규칙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내쫓는다면, 규칙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유아나 지적장애인들도 내쫓을 셈인가? 개가 사람을 공격할 수 있어서 내쫓는다면, 사람도 사람을 공격할 수 있는데 왜 내쫓지 않는가? 개에 물려 죽는 사람보다, 사람에게 죽임당하는 사람이 훨씬 많을 텐데. 들레는 개라서 차별받았다. 우리와 다른 종이기 때문에 차별받았다. 들레와 친구였던 신입생들은 인드라망 공동체에 대화를 시도했다. 먼저 대학 숙소 식구들이 이야기를 나눴다. 논의 주제는 ‘들레는 어디에 있어야 하나?’였다. 들레의 주인을 찾아주자거나 유기견 보호소에 보내자는 의견이 있었다. 산으로 들로 즐겁게 쏘다니는 들레를 갇힌 장소로 보내는 건 납치나 다름없다는 반박이 따랐다. 대부분의 시골 개들은 무료한 시멘트 바닥에서 60센티 남짓한 목줄에 묶여 지낸다. 유기견 보호소도 열악한 곳에서 갇혀 살다가 안락사 되기 일쑤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떠돌이로 살게 놔두는 건 위험했다. 들레는 음식물 퇴비간이나 똥간에서 배를 채우곤 했다. 들레가 오가는 찻길은 로드킬이 잦았다. 다달이 개장수가 마을을 돌 때 잡혀갈 시나리오도 있었다. 그럼 우리가 키워야 하나? 들레를 책임질 수 없으니 키울 수 없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그럼 키우지 않으면 우린 책임에 면죄부를 받을 수 있나? 애초에 이 작은 개 한 마리가 이토록 안전하게 살 곳이 없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개의 먹이를 독점하고, 차로 개를 죽이고, 개를 물건처럼 사고파는 자들이 결국 인간이지 않은가? 해결책을 내지 못한 채 회의시간이 끝이 났다. 논의는 게을러져서 이후 대학 내에서도, 실상사에서도 진전되지 않았다. 그 사이 한 주민이 떠돌이 백구를 잡아가라고 신고를 했다. 개장수 트럭이 오가는 것을 보고 신입생 친구들은 급히 들레에게 스카프를 매어 주었다. 보호자가 있는 개로 보이기 위함이었다. 그날 저녁, 말괄량이 들레는 하루도 못가 스카프를 잃어버린 채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래도 개장수 트럭은 피한 모양이었다. 그즈음 산내에 폭풍 같은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어찌나 거센지 양철지붕쯤은 그냥 날려버릴 기세였다. 강풍은 닷새가 지나도록 계속됐다. 들레는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강풍이 끝날 때까지 어디에 몸을 숨기고 있는지, 산내가 질려 다른 곳으로 떠나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신입생들은 들레를 위한 현수막을 만들고 있었다. 개 로드킬을 방지하기 위해 속도를 줄여달라는 현수막이었다. 회의의 결론 중 확실한 것은 인간이 비인간동물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위해 노력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으니까. 세월호 참사 때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때도 나는 운 좋게 살아남았다. 나는 언제든 그들이 될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들레를 생각하면, 나는 정말이지 운 좋게 인간으로 태어났다. 우리 사는 곳은 인간이 아닌 생명에게 얼마나 가차 없는 환경인가? 내가 비인간동물로서 한 마을에 문을 두드렸을 때, 누구도 나를 환대하지 않고 나를 죽일 트럭에 몰아넣는 곳. 바람이 그치고 우린 현수막을 걸었다. 들레에게 새로 매어 줄 스카프도 마련했다. 그러나 들레는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들레가 사라진 후에도 개장수 트럭은 여러 차례 마을을 오갔다. 들레는 트럭에 잡혀갔을까? 다른 마을에서 살고 있을까? 들개를 환영하는 마을이 있을까? 들레는 우리를 원망할까? 우린 또 다른 들레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수많은 질문을 남긴 채, 민들레 피는 계절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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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시 산내면 청년의 이야기
- 남원시 산내면 청년의 이야기 지음 (생명평화대학 학생)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인생 스무 해 째를 살고 있는 지음입니다. 인드라망 공동체 안에 있는 청년 인생학교 ‘생명평화대학’의 학생으로, 올 봄부터 남원시 산내면에서 생활하고 있어요. 저는 이웃도 잘 모르는 도심의 아파트에서 살다가 올해 산내에 와서 ‘마을’, ‘공동체’라고 하는 것들을 경험하며 새롭고 가득한 순간들을 많이 만나고 있어요. 제가 뭐 남다른 통찰력이나 글솜씨가 있는 건 아니지만, 감탄하던 마음 되살려서 그 순간들 중 최근의 일 두 가지를 같이 나눠보려고 해요. 지난 11월 9일 산내에서는 올해의 마지막 ‘살래장’이 열렸어요. 4월부터 매달 둘째 주 토요일마다 뱃속은 물론 눈과 귀, 마음까지 두둑하게 채워주던 장터에요. 저는 살래장을 ‘다른 장에 없는 건 있고, 있는 건 없는 특별한 장터’라고 설명하고 싶어요. 주점, 벼룩시장, 전시, 공연, 창작물 판매 등 진짜 별의 별게 다 있고요, 포장 비닐, 일회용 젓가락 이런 건 찾아보기가 어려워요. 일단 살래장에 제일 많은 건 사람인데, 적게는 150명에서 많게는 250명까지 다녀간다고 해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공간인데도 쓰레기가 50L 종량제 봉투도 다 안 찰 만큼 적게 나온다니 대단하죠. 여기에는 ‘비니루 없는 점빵’이라고 하는, 몇몇 이모들이 만든 어떤 캠페인 같기도 하고-교육 기관 같기도 하고-김밥 집 같기도 한 부스의 영향이 커요. 이 점빵의 이모들은 미리 사람들에게 속닥속닥 하시는 거예요. “(작은 목소리로)비닐이나 플라스틱 포장재 없이 물건을 사고 팔아보자, 빈 그릇과 텀블러, 수저 등을 들고 살래장 나들이를 오시라.”고 말이에요. 그럼 정말로 마을사람들은 포장재 없이 생산물들을 선보여요. 구경 오시는 분들도 장바구니는 물론 반찬통, 텀블러까지 들고 와서 소풍 도시락 까먹듯 즐기다 가시고요. 그게 진짜 가능한 일이더라고요! 제가 살래장에서 가장 사랑했던 음식은 샌드위치인데요, 이것 말고도 여름엔 팥빙수, 겨울엔 군고구마, 계절에 상관없이 커피, 쿠키, 스프, 반찬, 파전 등 정성어린 손길이 가득 담긴 다양한 음식들을 맛보거나 냄새 맡을 수 있어요. 또 제 예민한 피부를 감싸주던 수제 쌀겨 비누, 실상사 작은학교 친구들이 만든 스킨, 샴푸 등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아이템들이었죠. 저는 아쉽게도 살래장에서 한 번도 뭘 팔아본 적은 없지만, 제가 되게 열심히 했던 게 한 가지 있어요. 바로 친구들과 함께 한 공연이에요. 살래장의 무대는 실력을 따지지 않고 마을 청중들 앞에서 노래할 수 있는 기회를 아낌없이 주세요. 생각해 보니 제 데뷔무대였네요. 이것 말고도 마을분이 수집하신 램프 전시, 플라스틱을 먹은 새 다큐멘터리 상영, 아이들의 손 떼 묻은 딱지 판매 등 기억에 남는 게 많아요. 매달 마을 사람들과 만나서 목소리든 음식이든 물건이든 주고받을 수 있는 마당이 있다는 것, 누구든 무엇이든 내놓으면 서로 봐주고 들어주고 받아주는 품이 있다는 것이 좋고 재미있어서 항상 살래장이 기다려졌던 것 같아요. 또 내가 뭔가를 작당해서 만들었을 때 선보일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것은 참 든든하고 신이 나죠. 살래장이 있기 일주일 전, 대학 친구들과 남원 시내로 진출했어요. 바로 ‘남원시 청년창업 한마당’에 참여하기 위해서였죠. 이 자리는, 남원에 있는 청년 단체 22곳, 마을 공동체 18곳이 모여 서로 어떤 일들을 꾸미고 있는지 알리고 구경하는 자리였어요. 청년들과 마을 공동체가 잘 정착하고 나아갈 수 있도록, 남원시에서 주최하고 남원시 공동체 지원센터에서 주관하는 커다란 행사였어요. 이 행사에서 저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청년’이라는 이름, ‘마을’이라는 이름을 달고 뭉쳐서 다양한 것들을 시도하고 노력하고 있는지 똑똑히 보고 느낄 수 있었어요. 저희도 생명평화대학 홍보도 할 겸, 털실로 따뜻한 귀마개를 만들어 실 값만 받고 나누겠다고 나섰지요. 행사를 준비하기 전에 저희는 머리를 맞대고 궁리했어요. ‘우리가 어떤 것을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다가 갈까?’에서 시작하여 ‘우리는 사회에 나가서 뭘 해서, 먹고 사는 동시에 더 따뜻한 사회로 나아가는데 걸음을 보탤 수 있을까?’하는 물음까지 이어졌어요. ‘우리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 밥도 먹여주고 이 사회에 도움도 되는 일이면 좋겠다.’, ‘마치 캠페인처럼, 우리가 행동하고 존재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돈 외에는 따뜻함이 널리널리 퍼져나가는 데에 쓰이면 좋겠다.’고 생각을 모았어요. 그래서 함께 열심히 뜨개질해서 만든 귀마개를 드리고 털실 한 뭉치 값의 후원금을 받기로 했어요. 그렇게 모인 돈은 이 활동을 위한 식비와 차비로만 쓰고, 그 외에는 다음 귀마개를 만드는 데에 쓰자고 했지요. 털 실 하나에 두 개의 귀마개가 나오니까, 우리는 이 캠페인을 두 배, 네 배로 늘려갈 수 있겠다 싶어 들뜨기도 했어요. 막상 실전에서는 사람들에게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어려움이 컸어요. 상품과 자본의 교환으로만 흘러가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만들고 나누는 것은 분명 즐겁고 뿌듯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이 시도에 필요한 재료비는 남원시에서 지원을 받았어요. 이렇게 우리가 무슨 일을 꾸미고 실현해볼 수 있도록 지원해주고 자리를 만들어준 시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같이 배우고 생활하는 친구들과 함께 사회에 나가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하고, 해보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지점은 무엇인지 경험해볼 수 있는 값진 기회가 되었어요. 나의 인생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방황이 뒤섞인 이 시기에, ‘함께’ 살아가고자 궁리하고 노력하는 사람들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큰 행운 같아요. 방법과 목적에 대한 힌트를 얻고, 따뜻한 경험과 배움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어요. 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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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시 산내면 청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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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오리온공장 청년노동자 구례의 딸 고서지현을 추모하며
- 익산 오리온공장 청년노동자 구례의 딸 고서지현을 추모하며 왕해전 (청년노동자 서지현 사망 진상규명을 위한 구례시민 모임 공동대표) “지현아! 너무 힘들면 그냥 와버려.” “아니야 엄마, 그래도 왔으니까 힘들어도 3개월만 참아볼래” 오리온 제과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현이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습니다. “힘들다고 할 때 가서 그냥 데려오지 못하고,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집에 오지 말고 공장에 그냥 있으라고 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되었습니다.“라고 울부짖는 지현이 어머님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먹먹하고 숨을 쉴 수 없는 답답함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같이 입사한 사십여 명의 친구들이 일주일 만에 회사를 떠났어도 마음이 여리디 여린 지현이는 쉽게 회사를 그만 두지 못했고 나이도 어리고 예쁜데 뭐한다고 공장에서 일하고 있냐고 비아냥거리는 선배 노동자들의 언어폭력과 따돌림에 지현이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습니다. 또한 본인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는 시말서를 강요하였고 심지어는 사내연애를 한다고 수군거리고 신체접촉을 하고 입에 담지 못할 성적 농담으로 수치심을 불러일으킨 관리자들의 행위를 참고 참아야만 했습니다. 구례 청천초, 구례여중, 순천전자고를 졸업한 서지현 청년이 익산 오리온제과에 취업하고 1년 6개월 만에 ‘진짜, 어지간히 괴롭혀라. 오리온은 다닐 곳이 아니다.’ 등의 직장 괴롭힘과 따돌림, 성추행 당한 의혹의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지 3개월이 다 되어 갑니다. 이런 지현이의 억울한 소식을 접한 지리산 구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구례출신 청년 후배들 중에서 누구라도 억울하고 잘못된 일로 어려움을 겪는다면 구례의 선배 후배들이 나서서 지켜주어야 한다는 취지로 구례의 20여개 단체 및 개인이 참여한 구례시민사회모임을 만들었습니다. 노동현장에서의 억울한 사고와 죽음이 있었다면 그 회사가 구례에 있건 타 지역에 있건 간에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억울함을 풀어주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 노동이 존중되고 노동인권이 지켜지는 나라다운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구례시민사회모임은 오리온제과에게는 진상규명과 사과를 요구하고 고용노동부에게는 특별근로감독으로 책임자를 처벌하고 재발방지를 요구하는 현수막을(구례군체육회,읍체육회,재경마산면향우회등 25개 단체 이름으로) 부착하였으며, 6월 3일에는 오일장에서 구례군민들의 요구를 담은 기자회견을 진행하였고 지금은 매일 1인 시위를 읍내에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습니다. 사진. 구례오일장에서 진행된 “청년노동자 서지현 사망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대책을 요구하는 구례시민사회 기자회견” (황영필) 연일 언론(언론보도: sbs Y 궁금한이야기 4월3일방송, JTBC 및 KBS 뉴스, 전주KBS 심층, 각언론사 5월19-20일 뉴스, 다수언론사 6월3-4일 뉴스)에 보도가 되고 여성누리꾼들은 오리온을 여성혐오기업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럼에도 회사는 자체조사결과 지현이의 죽음은 개인적인 이유가 원인이었다고 하면서 다소 경직된 조직문화가 있었지만 회사의 잘못은 아니라는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시민사회모임에서는 회사에게 요구했습니다. 자체조사를 했다면 어떻게 했는지, 어떤 내용이 있었는지 등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유가족에게 공개하고 관계자 처벌과 재발방지 대책 마련 등 적절한 조치를 요구했습니다. 또한 고용노동부 익산지청에는 직장 괴롭힘과 따돌림을 호소하며 생을 마친 고인에게 한 점 부끄럼 없이 특별근로감독을 포함한 철저한 수사로 관련자를 처벌해야 된다고 촉구하였습니다. 고졸, 여성, 취업, 노동자라는 4중주의 사회적 약자였던 지현이를 지켜주는 울타리가 없었습니다. `직장내 괴롭힘 방지법`이라는 법이 있긴 합니다.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할 경우 조사 및 심사요청을 할 수가 있지만 단순 인사조치만 내려지는 등의 단순 권고조항이기에 괴롭힘 예방을 위해서 시작된 금지법이 있으나마나 한 법이 되어 `직장괴롭힘방치법`이라는 오물을 뒤집어쓰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 사회는 우리의 아들, 딸들이 노동현장에서 괴롭힘과 따돌림 그리고 여전히 못된 습관으로 이루어지는 성희롱, 성추행 같은 이유로 고통 받을 때도 업무상재해 즉 중대재해가 아닌 일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단순히 개인의 적응력이나 인내력부족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노동현장에서 김용균 청년이 업무상재해로 사망한 것이나 괴롭힘과 따돌림, 성추행의 스트레스를 죽음으로 밖에 멈출 수 없었던 지현이의 경우가 본질적으로는 다른 점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따라서 서구유럽처럼 사측에 강력한 의무를 부과하고 가해자인 동료에게는 형벌이 가해져야하는 입법이 필요한 강력한 이유이기도 합니다.(보도에 의하면 1년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 중 업무상관련 관련 사망자가 무려 487명입니다.) 노동의 현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유서 다섯 장에 다 못 할 청춘의 사연을 숨기고 ,직장의 이름을 적으며 선배노동자들과 회사의 부정과 불법으로 만신창이 된 인권 앞에 죽음으로 항거했던 지현이가 우리 어른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지금 묻고 있습니다. 다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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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오리온공장 청년노동자 구례의 딸 고서지현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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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에서 산다는 것, 살아낸다는 것
- 구례에서 산다는 것, 살아낸다는 것. - 도서관 신축부지에서 노동자들이 측량하는 걸 바라보며 정태연 하아... 그래, 세월 참 빠르다. 구례 땅을 드나들며 집을 보러 다닐 때가 엊그젠데. 2007년 겨울이었나 보군. 그렇게 원하던 곳으로 이사하리라는 기대로 부푼 옆지기는 신나하며 쫑알거렸었다. 파도리는 이름이 참 예쁘고 어쩌고, 동해마을은 또 왜 바다이름일까? 저쩌고. 같이 돌아다니던 친구들은 하사, 상사는 있는데 중사는 없냐는 둥, 야동마을에 꼭 들어가 보고 싶다는 둥 실없는 소릴 날리고... 흠흠. 나의 고향은 전남 나주시. 함평이 고향이신 아버님은 조그만 사업체를 운영하고 계셨는데, 아 글쎄, 친구분 보증 서셨다 집이며 회사며 쏘 쿨~하게 내려놓으시고... 쫓기다시피 이사 와 초3 이후론 줄곧 광주에서 학교를 다녔다. 아시지 않나.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면, 전남의 이곳저곳에서 올라온 친구들이 많다는 걸. 고흥, 완도, 해남, 신안, 승주... 서울로 올라가 대학을 다니면서 알게 된 광주의 진실 이후, 나는 내가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한 광주 사람의 후예였음을 자랑스러워하며 이 세상의 모든 차별을 없애고 말리라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곤 했었다. 나는 평생 남도 사람이었고, 호남의 아들이었다. 벌써 떠나신 지 스물여섯해째인 아버님께는 네 분의 동생이 있으셨는데, 그 중 두 분이 구례에서 사셨다. 둘째 숙부님은 구례구역에서 압록 사이에서 식당을 운영하시며 섬진강 우렁이를 잡아다 대구에 내다 파셨고(내수면 어업허가 있으셨음!), 하나뿐이었던 고모님은 옛날 구례 차부(터미널) 밑쪽에서 식당을 하셨었다. 금천식당이라고, 정순자씨라고 하면 어른신들 중에 몇 분은 기억하실 지도. 근 30년 넘게 장사를 하셨고 손끝이 매시라워서 음식솜씨도 장난 아니었으니까.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방학 때 고모댁에 내려올 때면, 졸다말다 거북이 금호고속 차창의 때묻은 커텐 너머로 굽이굽이 빛나고 있던 섬진강의 그 고운 은모래들... 구례살이 올 해로 12년째인 나는 작년 이맘때쯤 우연히 읍내의 도서관 두 곳을 한꺼번에 한 부지로 신축이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어떻게 하는 게 바람직한 것일지 궁금했다. 주위의 몇 분과 전문가들을 모셔다 강연회를 하고 주민들과 모여 자료를 찾고 공부하고 고민했다. 말이 공부지, 이건 뭐 도서관에 파묻혀 살아본 적도 없는 처지인 나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어서 다른 전문가 분들의 의견을 주로 듣을 수밖에. 2018년 여름에 치러진 ‘매천 도서관 디자인 공모전’의 심사위원장이었던 전남대 유oo 교수님은 ‘아니, 아니예요. 그렇게 지금 정해진 그 부지에 두 도서관을 짓는 건 정답이 아니라’며 손사래치던 것이었고. ‘어린이와 작은도서관협회’의 박oo 이사장님은 지자체와 교육청이 운영하는 도서관 두 개가 한 부지로 신축이전하는 건 우리나라에선 처음 있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우연히 만나 말씀을 건넸던, 퇴직 전 구례읍장을 하셨던 김oo 선생님조차 그렇게 되면 도서관의 위치가 균형을 잃게 되어 구례읍의 동북쪽 주민들은 불편하게 될 거라고 대번에 꼬집어내는 것이었고. 3월 18일이었던가. 군에서 주민의견을 수렴하지 않으니 우리라도 할 밖에. 주민공청회를 하겠다 하니, 구례군에서 느닷없이 같은 날 주민설명회를 하던 날, 공공도서관의 운영위원장이라는 어떤 분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여기 지금 도서관 문제에 딴지 거는 사람들 중에 구롓사람 있어요?’ 불행히도 아는 동생이 손을 슬쩍 들어버렸는데, 그 분 말씀, ‘허허이, 최소 4대는 살아야 구롓사람이지!’ 그랬다. 나는 구례사람이 아니었다. 호남의 아들이면 뭐하나, 구례사람이 아닌 걸. 구례장학생을 선발하는 심사위에서 역점사업이 일부 귀농귀촌인들 때문에 지지부진하여 힘들다는 군수님 앞에서 어떤 군의원은 이렇게도 말했다. ‘그깟 귀농귀촌인들 몇 명 되지도 않으니깐 군수님 힘내서 파이팅하세요, 자신있게 밀고 나가세욧!’ 군청의 문화관광과 공무원들은 우리가 도서관이전에 대한 제안서를 들고 갔을 때도, 통합설계를 촉구하는 주민 1,300여명의 서명을 받아 제출하러 갔을 때에도 소 닭 보듯 했다. 그 차가운 시선, 짐승인들 못 느끼겠나. 모르는 게 아니다. 어느 동네를 가도 ‘텃새’라는 게 있고, 사람 각자마다에도 ‘습’이라는 게 있는 법이거늘, 지금껏 몇 십년동안 알아서 잘(?) 해 오던 행정권력이 괜시리 양보하기 어렵다는 걸. 관급공사와 관련된 이러저러한 이해관계도 지금 거기에 누구누구가 관여되어 있고 어떻게 인맥이 형성되어 있는지도, 괜히 뜨내기들(?) 때문에 나름 정갈하게 운용되던 판이 어지러워질 걸 걱정하는 것, 전혀 모르는 바 아니다. 존중한다. 존중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의견이 있으니, 주권자인 주민이 당신들 월급 주는 우리가 달리 생각하는 면이 있으니 좀 받아달라는 거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이 쓸 공간이니 제발 설계할 때 반영시켜 달라는 거다. 그게 그렇게도 힘든 일인가. 올 3월 기준으로 구례 인구 27,000 선이 무너졌다고 들었다. 청천초교에 입학생 수가 다섯도 아니 된다고 들었다. 지방소멸을 누구나 당연하듯 얘기한다. 과연 지금까지 보여온 고집스러운 태도로 이런 위기가 극복될 수 있을까. 군수님의 제1공약인 인구 3만 회복이 가능한 것일까. 이런 식이라면, 수십억씩 하는 건물을 와당탕 지어놓고 무책임하게 떠나버린 전 군수님과 무엇이 다르겠나. 아무런 운영프로그램이나 컨텐츠 없이 덩그러니 세금 잡아먹고 서있는 건물들을 보면, 아이고 국민들이 피땀 흘려 낸 세금인데, 좀 반성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가끔이라도 하고 싶지는 않은 것인가. 두 세 사람만 건너면, 서로 다 형이고 동생인 작은 고장에서 언제까지 이토록 편을 가르고 살아야겠나. 우리 이제, 무언가 조금씩 바뀌어야 하지 않겠나. 잘 살아보자는 거다. 함께 잘 살아보자는 거다. 선주민이건 이주민이건 서로의 지혜를 모아 따뜻하고 살기 좋은 고장 만들어보자는 거다. 노장청이 한데 서로 어울릴 수 있도록, 갓난아이들 울음소리가 골목마다 울려대게, 서로를 조금씩 존중하며 다가서자는 거다. 내가 지금껏 구례의 작은 마을들에서 만났던 어르신들의 모습이라면, 한없이 겸손하고 끝도 없이 너그러운 지리산과 섬진강같은 그런 모습이라면, 그게 무에 그리 힘든 일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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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에서 산다는 것, 살아낸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