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오색케이블카가 허가된 후 우후죽순처럼 전국의 지자체에서 추진하고 있는 케이블카. 이미 너무 많은 곳에 있기도 하고, 적자로 운영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굳이 국립공원 1호 지리산을 파헤치면서까지 만들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자체에서 내세우는 명분 중 하나는 관광 수입 증대를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인데, 케이블카는 초고속 관광을 부추기기 때문에 산에 올라갔다 내려와서 다른 지역에 숙식을 해결하러 가는 결과를 빚을 가능성이 큽니다. 유령도시가 된 속초 설악동처럼 말이죠요.
최근에 와서 산청군수가 적자의 위험성을 인정하면서도 케이블카 추진을 그만두지 않는 이유는 많은 주민들의 숙원사업이라는 것입니다. 2010년 10월에 자연공원법 시행령이 개정되고 한 달 뒤, 산청군 범군민 지리산 케이블카 설치 추진위원회 주관으로 재외 향우와 군내 사회기관단체, 주민 등 1만여 명이 참여한 궐기대회가 원지 둔치에서 열렸던 적이 있습니다. 으쌰으쌰 힘 모아서 제출한 2012년도 케이블카 신청서는 경제성 부족으로 환경부에서 반려되었습니다. 다행이지요. 그땐 환경부가 제정신이 있었나 봅니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올해에도 예정지인 중산리가 위치한 시천면과 이웃한 삼장면에는 여전히 케이블카가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기는 나이든 주민이 많습니다. 시간은 흘러 케이블카는 더더욱 실효성이 떨어지는 아이템이 되었지만, 자기세계가 깨지는 것을 못 견디는 노인들은 케이블카가 한물간 아이디어란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좀 있으면 드론 택시가 공중에 날아다닐 텐데, 이제 와서 무슨 케이블카일까요? 너도나도 드론 택시로 국립공원에 착륙하는 게 바람직한지는 따져봐야겠지만, 이 시대에 목숨 걸고 케이블카를 추진하는 것은 상상력이 결여된 행동이 아닐까 합니다. 앞으로 더욱 귀하고 소중해질 것은 살아있는 흙과 접촉할 기회입니다. 포장된 도로, 데크 탐방로, 출렁다리, 케이블카가 아니라.
‘궁금해 산청 산들강 8’ 후기를 쓰려고 했는데, 서두가 너무 길었네요. 산청군의 불합리한 케이블카 추진에 작년부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지리산 사람들과 연대하게 되었고, 올해는 산청의 산과 들, 강을 알리자는 취지로 진행된 ‘궁금해, 산청 산들강’을 숲샘과 함께하며 후기를 썼습니다. 외공리, 생초 두물머리, 고운동, 중산리 두류생태탐방로, 상사 폭포, 무제치기 폭포, 황매산에 갔습니다. 굳이 국립공원 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아도, 산청 곳곳에는 방문할 만한 곳이 많더군요.
11월 30일에 진행된 여덟 번째 ‘궁금해, 산청 산들강’에서는 문수암 바보숲길을 걸었어요. 문수암(산청군 시천면 마근담길 173-17)은 지리산 자락에 있는 암자로, 지어진 지 20여 년 되었고 바보여행 템플스테이로 꽤 알려져 있습니다. 문수암은 지리산 둘레길 운리- 덕산 구간이 끝나는 즈음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걸음의 시작은 문수암 주차장. 현판 아래서 기념사진을. 현판의 글씨는 남사예담촌에 계시는 이호신 화백이 썼다고 한다. 지리산 깃발 글씨도 이호신 화백 작품.
문수암 경내를 한바퀴 돌고 출발. 참가자 중 다리가 불편하신 분이 계셔서 문수암에 그냥 계시기로 했습니다.
겨울의 초입이라 나무들은 대부분 낙엽을 떨구었지만, 단풍나무들 중 어떤 것인 빨간 잎을 그대로 달고 있기도 했습니다. 바보숲길을 따라 남명묘소로 향합니다. 바보숲길, 바보여행의 바보는 어리석은 이를 뜻하는 게 아니라, ‘바라보기’의 줄임말이라고 합니다. 내면을 바라보라는 뜻이겠지만, 그냥 바깥 풍경을 바라보기에도 좋습니다. 자, 바보행을 해볼까요?
숲길은 문수암에서 만든 모양입니다. 야자매트 위에 솔잎이 깔려있어서 내리막은 조금 미끄러웠습니다. 그래도 나무 데크가 아닌 지면이라서 좋았어요. 산에는 송이가 난다고 합니다. 불법 임산물 채취를 금지한다는 표시가 붙어 있고 줄이 쳐져 있습니다. 철제 울타리가 아니라서 다행.
경운기가 겨우 통과할 수 있을만한 폭의 바보숲길을 걸으며 어린 시절 왕복 2시간이 걸렸던 통학로를 떠올렸습니다. 그때 그 오솔길은 중간에 옹달샘 2곳이 있어 물을 떠 마실 수 있었고, 세수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사시사철 나무 그늘이 드리워져서 여름에도 그다지 덥지가 않았고, 밤새 눈이 내린 겨울 아침이면 산토끼나 다람쥐, 새 발자국을 추적하며 학교를 가기도 했지요. 그러나 1995년도에 산림 관리용 임도를 내면서 요정이 나올 법한 예쁜 오솔길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흙먼지 날리고 해가 쨍쨍 내리쬐는 너른 임도를 걸어 집으로 돌아가고 있자면, 간혹 ‘푸르게 울창하게’ 문구가 적힌 트럭을 타고 지나가는 아저씨들이 차를 태워주며 ‘이제 자동차로 갈 수 있으니까 좋지?’라고 말했습니다. 솔직하게 ‘싫은데요’라고 답하지 않고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정답을 말했지요. 산림청에서는 임도를 내면서 산을 깎아낸 비탈에 침식방지를 위해 아프리카에서 온 사료작물 ‘뷰티풀러브그래스’ 씨를 살포했습니다.
빗물에 씨가 길로 씻겨 내려와 다음해 키가 1m나 되는 열대 잡초가 길 전체를 덮었고, 이슬을 피하기 위해 우비와 고무장화를 신고 걸어 다녀야 했죠. 이후에 산청군에서 몇 년에 걸쳐 조금씩 임도를 포장했고, 길옆의 식생이 회복되어 풍경이 다시 좋아졌지만, 호두나무 농장을 조성하기 위해 나무를 몽땅 베어내어 지금 추억의 숲길은 민둥산이 되었습니다. 또 시간이 흐르면 울창한 호두나무 숲이 되겠지만, 얼마나 오래 황량한 풍경을 보아야 할까요?
아름다운 바보숲길은 송이가 나는 소나무 숲에 있고, 문수암에서 지켜줄 테니 오래도록 유지될 수도 있겠습니다. 부디 그러하길. 요정의 오솔길이 사라져서 슬퍼하던 내가 같은 길을 운전해서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집에서 휴대폰 쳐다보며 뒹굴지 않고 엄마랑 같이 바보숲길을 걸어줘서 고맙다고 말합니다. 세월이란.
천왕봉 전망대 도착. 천왕봉에는 구름이 걸려있어서 꼭대기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래로 덕천강과 덕산이 훤히 내려다보입니다. 전망대의 정자에서 숲샘이 엄선한 시와 노래를 듣는 시간. 숲샘은 윤동재의 <단풍여자고등학교>를 낭송했고, 성심원의 유의배 신부님이 노래한 박남준의 시 <지리산둘레길>을 들려주셨어요.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다는 것은
몸 안에 한 그루 푸른 나무를 숨 쉬게 하는 일이네
때로 그대 안으로 들어가며
그대 뒤돌아 보았는가
낮은 산길과 들녘 맑은 강물 따라
사람의 마을을 걷는 길이란
그대 지금껏 살아온 발자국을
깊이 들여다보는 일
숲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고
생명의 지리산을 만나는 길
그리하여 둘레길을 걷는다는 건
그대 안에 지리산을 모신다는 일이네
유의배 신부님은 피카소의 그림으로 유명한 스페인 게르니카에서 태어나 한국에 오셔서 40년이 넘도록 산청 성심원에서 봉사하고 계십니다. 멀리 스페인에서 태어나 지리산 자락에 살게 된 신부님은 둘레길 노래를 부르며 살아온 여정과 머나먼 고향 게르니카의 풍경을 마음에 그렸을까요? 내가 바보숲길을 걸으며 어렸을 적 걸었던 추억의 오솔길을 떠올렸던 것처럼.
전망대에서 산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니 나타난 남명 선생의 묘. 선생의 묘 아래에는 숙부인인 은진 송씨의 묘가 있습니다. 숙부인은 조선 시대 정3품 당상 문무관의 아내에게 주어지는 등급으로, 정부인의 아래입니다. 첫 번째 부인인 정경부인 남평 조씨의 산소는 부인의 고향인 김해 산해정 앞산에 있다고 하네요. 남명 선생은 처가인 김해에 산해정을 짓고 30년 동안 강학을 하다, 50세 무렵 고향인 합천 삼가로 가게 되었는데, 남평 조씨는 남편을 따라가지 않고 본가인 김해에 남아 죽을 때가지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조선시대 졸혼?
조식은 삼가에서 두 번째 부인 송씨를 얻고 60세에 산청에 와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식 선생은 정경부인과의 사이에 1남1녀를, 숙부인과의 사이에서 3남 1녀를 두었는데, 현재 조식의 후손은 숙부인 은진 송씨에게서 난 자손들입니다. 조식과 스무 살 가까운 나이 차가 있었던 송씨는 조식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자식들을 키우며 한참을 더 살아 80세가 넘도록 장수했습니다. 아들 일찍 보내고 남편마저 살아서 떠나보낸 정경부인 입장에선 쓸쓸한 엔딩일 수 있지만, 어쩌면 더 이상 조식 뒤치다꺼리 안 하고 송씨에게 떠넘길 수 있어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지도? 아무튼 처가에 얹혀살다 다 때려치우고 세컨드 라이프에 도전해서 나름 성공했던 조식. 본인은 벼슬을 거부하였지만, 송씨가 낳은 자식들은 서자임에도 적자와 다름없이 관직으로 나아갔습니다.
조식 선생의 묘에서 곧장 산길을 따라 내려오면 남명기념관과 산천재가 있습니다. 남명기념관 마당의 비석. <무진봉사>와 <단성현감사직소>가 새겨져 있습니다. 숲샘은 “현재 우리나라 정치에도 적용되는 일갈입니다”라고 하셨어요. 빽빽해서 그 자리에서 다 읽지 못하고 123 계엄사태 이후 인터넷에서 찾아 읽었네요. 감상: 사직은 벼슬 안 해본 선비가 아니라 대통령이 해야. 그래서 1555년에 누가 단성현감이 됐는지? 탐관오리였으면 조식 탓.
시천면소재지인 덕산에 있는 산천재에서 문수암으로 돌아가는 포장도로는 지리산 둘레길입니다. 바보숲길이 더 걷기에 좋았지만, 이곳도 둘레길인지라 주변 마을을 구경하며 걸어갈 수 있습니다. 산들강 1에서 외공리에서 덕천서원까지 자동차가 씽씽 달리는 국도를 걸었던 기억이 납니다. 덕산 근방에서 호젓하게 걷기 좋은 길을 찾는다면 바보숲길을 추천합니다. 산들강 1 후기에 나온 국도는 걷지 마세요.
어스름 무렵 돌아온 문수암. 문수암에는 ‘지리산옹달샘’이라는 무인 찻집이 있어 누구나 들어가서 마음에 드는 차를 골라 마실 수 있습니다. 다리가 불편했던 분이 옹달샘에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템플스테이 하러 오신 분들도 만나고 절도 천천히 구경하시면서 시간을 잘 보내셨다고 합니다. 옹달샘에서 멀리 아프리카에서 온 커피와 하동 홍차를 마시며 산들강8을 마무리 했습니다.
문수암은 우리나라에 허가된 템플스테이 암사 중에 가장 규모가 작은데, 2022년 우수/2023년 최우수 템플스테이 운영 사찰로 선정되었어요. 1박 2일 7만원. 산청에 있는 다른 유명한 절인 대원사는 8만원, 수선사는 15만원 합니다. 저렴하고 실속 있어 보입니다. 문수암은 수선사 같은 럭셔리한 명상테마파크가 아니라 깔끔하고 고요한 산속의 수행처에 온 느낌이에요.
가파른 산 중턱에 있으면서도 터가 좋아 볕이 잘 들며, 사찰 음식도 건강하고 맛있게 차려지는 걸로 은근히 입소문이 나 있습니다. 암자 앞에 스님들이 손수 가꾸는 차밭도 있고요. 템플스테이에 관심이 없는 저도 문수암에서는 며칠 머무르면 좋을 것 같았어요. 수선사 카페 아메리카노가 6,000원, 옛날 팥빙수가 18,000원인데, 지리산옹달샘에서는 커피 홍차 야생화차 등이 모두 0원. 비교하면 안 되지만 비교하고 싶네요.
아쉬운 소식을 전합니다. 궁금해 산청산 12월 마지막 행사가 탄핵에 집중하기 위해 취소되었습니다. 문수암 바보산행이 사실상 마지막 산들강이 되었네요. 숲샘의 가이드와 함께 걸음해주신 분들 덕택에 저도 산청에 30년 넘게 살면서 몰랐던 산청의 곳곳을 가 보았습니다. 감사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