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8(일)

지리산 오늘
Home >  지리산 오늘  >  지리산 방랑단

실시간뉴스
  • 비폭력대화 연습모임을 시작한 꼬리의 방구일기
    ‘함께 살아간다’이 말의 첫 느낌은 여전히 참 다정하다. 이 말을 들으면 왠지 의지할 구석이 생긴 것 같고, 더는 외로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끝까지 불러본 적도 없는 ‘손에 손잡고~’로 시작되는 노랫말이 떠오르기도 한다.그러나 곱씹다 보면 전혀 상반된 기억들이 밀려온다. 한 지붕 아래 사는 가족에게 도저히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그래서 내가 새롭게 찾아낸 공동체에서 지긋지긋하게 싸우면서, 어쩔 수 없이 마주치고마는 무례한 사람들 틈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말은 무섭게 돌변한다. 그러면 상처입을까 두려워 크게 분노하거나 떠나버리곤 했다.방랑단 친구들은 한 지붕 아래 살았던 식구였다가 지붕없이 한 길을 걸었던 동료였다가 지금은 한 마을에 살고 있는 이웃이다. 그리고 방랑단 각자 저마다의 사랑과 우정을 나누며 더 많은 친구들과 연결되어가고 있다. 아무래도 우린 ‘함께 사는’ 쪽을 자꾸 선택하는 것 같다. 그래서 싸우거나 피하지 않고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너무 필요해졌다.평생을 일궈온 습관을 단숨에 고치는 건 불가능해도 잠시 멈춰서 내 말 속에 담긴 감정과 욕구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그 마음을 용기있게 마주하는 시간만이라도 꾸준히 가져가고 싶었다. 내가 누군가를 가르칠 형편은 못 되어서, 다만 배웠던 걸 조금 공유하는 수준이지만 고맙게도 글쓰기 모임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 마음을 내주어 연습모임을 시작했다. 서로 안전하다고 느끼는 관계 안에서 조금 더 내공이 쌓이면 더 많은 이웃들과 열린 모임으로 진행하고 싶다.
    • 지리산 오늘
    • 지리산 방랑단
    2024-03-27
  • [우리는 지구를 떠나지 않는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의 오-붓한 책담!
    여성환경연대 부설 에코페미니즘연구센터 ‘달과나무’에서 방랑단에게 연락이 오셨어요. 지리산의 에코페미니스트들을 만나고 싶어 구례에 놀러오신다고요. 지리산의 많은 얼굴들이 떠오르며 만남이 얼마나 기대됐는지 몰라요. 꽃철에 겹쳐 못오실까봐 부랴부랴 숙소부터 추천드렸답니다. 방랑단도 귀촌하기 전 여성환경연대에서 펴낸 <덜 소비하고 더 존재하라> 책에 큰 영감과 용기를 얻었는데요. 이번엔 따끈따끈한 신간 <우리는 지구를 떠나지 않는다>의 공동저자 중 네분(김혜련, 유서연,이현재, 황선애 작가님)을 모셔서 책담도 나눠주실 수 있다니! 이리 좋은 기회를 함께 준비하게 되어 영광이었어요! “지구가 불탄다고 화성으로 떠날 건 아니잖아요? 이 땅에 발붙이고 살고 싶은 여성들이 기후위기시대에 지구를 돌보는 법” 여성주의x환경에 관심있는 지리산의 에코페미니스트들 함께 모여 이야기 나눠요! - 24년 3월 30일 (토) 15-16시반 캄다운파티 - 신청: 에코페미니스트들의 오-붓한 책담 신청 (google.com) <신청하러가기! - 참가비: 1만원 (대관료입니다. 음료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음료를 원하시는 분은 영업마감 3시 이전에 오셔서 주문하시면 됩니다) - 참가비 입금 계좌번호 - 카카오뱅크 3333131937387 ㅂㅅㅇ
    • 지리산 오늘
    • 지리산 방랑단
    2024-03-27
  • ♪ 숲(에 나무가 있어야지 골프장이 있냐) 음악회♬
    작년에 구례군 산동면 사포마을 뒷산에서 21만㎡ 너비의 면적의 숲이 사라졌습니다.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부터 지리산 국립공원 경계 인근까지 최소 2만 5천 그루의 나무가 베어졌습니다. 구례군과 시행사는 이 자리에 1000억원을 들여 45만 평 너비의 대형 골프장을 지을 거라고 합니다.골프장 사업을 막아내고 무단 벌목지에 봄을 돌려주기 위해 음악회를 엽니다. 음악회에 앞서 지리산골프장 개발 예정인 벌목지 답사도 준비했습니다.다시 숲으로 돌아갈 날을 위해 음악과 이야기와 마음을 모으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2024년 4월 6일(토)▶ 오후 1시, 벌목지 답사 사포마을회관 (구례군 산동면 사포길 72)에서 시작- 지리산 난개발에 대한 소책자를 읽고나서, 주민분의 안내로 벌목지를 함께 걷습니다.▶ 오후 4시, 숲 음악회사포저수지 옆 공터 (구례군 산동면 관산리 401)♬ 공연자- 오프닝 : 캄캄밴드- 살래 재즈 트리오와 옥수수- 김목인☞ 참가비 20,000 원 이상 (카카오뱅크 3333-11-3005007 이신지원)☞ 주최 : 지리산골프장백지화연대, 지리산방랑단, 동아시아에코토피아포스터배경 사진: @phoma_photo
    • 지리산 오늘
    • 지리산 방랑단
    2024-03-18
  • 층층집에 나눔해주세요!
    층층집에 모실 입주자를 선정했어요. 구례에 오고 싶은 이유도, 각자의 관심사도 다양한 분들이 신청해주셨어요. 층층집을 온기로 채워주실 분들이 참 반갑고 기대되어요.층층집 프로젝트는 정부나 재단에서 지원금을 받지 않아요. 지리산사람들 시민단체에서 입주자분들의 월세를 일부 지원할 뿐입니다. 보증금 2천만원도 개인 후원자의 도움으로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그러나 층층집엔 아직 필요한 물품이 남아있어요. 자세한 품목은 웹자보에 기재해두었습니다. 지리산 곁으로 온 새 이웃들을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마음을 듬뿍 담아 물품을 나눔해주시길 요청드려요.기재해둔 물품목은 총총이가 생각한 최소필요물품이에요.(감사하게도 여기저기 나눔해주셔서 현재난로와 식탁 의자만 구하면 됩니다!) 이외에 물품도(예: 에어프라이어, 전기포트, 집안을 꾸밀 장식 등) 얼마든지 선물해주실 수 있어요. 다만 불필요한 물건이 너무 많아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미리 연락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품후원 시 연락망: 칩코 010-2구5육-팔115(카톡이나 디엠 선호해요:)후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틀림없이 좋은 일이 생길거예요!! 마음으로 응원해주신 분들도 모두 감사합니다.
    • 지리산 오늘
    • 지리산 방랑단
    2024-03-18
  • 캄다운파티의 두 번째 작은 콘서트
    캄다운파티의 두 번째 작은 콘서트 <흙과 바람과 별과 농부_서와콩> # 기획자, 상글로부터의 편지 달콤한 매화 향기에 마냥 설레다가도 매년 빨라지는 봄꽃의 개화 소식과 이상한 흐름이 마냥 반가울 수는 없어요. 올해도 어김없이 호미를 들고 밭에 앉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기후변화에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을까 걱정이 밀려와요. 서와콩은 합천에서 농사지으며 자연이 들려주는 아름다움을 시와 노래로 짓는 남매(서와&수연) 듀오예요. 서와가 쓴 시집 <생강밭에서 놀다가 해가 진다>를 같이 낭송하고 노래하는 자리를 마련했어요. 흙을 만질 때 살아있음을 느끼는 사람들과 이웃들에게,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서와콩의 노랫말이 아직은 우리에게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다는 메시지를 던질 수 있기를 바래요. - 일시 : 3월 17일 일요일 오후 4시 - 장소: 캄다운파티(구례읍 중앙로 25, 2층) - 신청: 인원수와 함께 문자(010-2075-140공) 혹은 DM(@cdp.gurye) 주세요. - 참가비: 어른/ 1만 5천원, 어린이/ 5천원 (음료 포함) ——————————————————————————— *서와콩* 서와콩은 서와&수연 남매듀오로 합천 황매산 기슭에 서식하며 퍼머컬처 방식으로 숲밭을 꾸리고 있는 농부이자 음악가다.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작은 존재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노래를 부른다. 서와는 시집 『생강밭에서 놀다가 해가 진다』를 썼다. ——————————————————————————— # 서와의 시들 “수수밭은 내 마음 같아 키우고 싶은 것만 키울 수 없는 마음 같아” - 「수수밭」 중에서 “나는 쓸모 있는 사람보다 오늘 본 밤하늘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 「오늘부터」 중에서 “그래도 괜찮아 사실 고래는 내 안에 살고 있거든 바다로 이 고래를 풀어 줄 수 있는 바다로 가기만 하면 돼” - 「바다 고래」 중에서
    • 지리산 오늘
    • 지리산 방랑단
    2024-03-05
  • 도림사로 동안거 다녀온 상글이의 방구+단식일기
    #단식 1일차몸이 퉁퉁 부었다. 손가락도 발가락도 퉁퉁, 스마트폰은 어찌나 봤는지 눈도 시렵고, 종아리도 아팠다. 그동안에 쌓인 피로가 올라오는 듯 했다. 이사에, 축제에, 텃밭수업에, 공유회 준비로 하반기에는 쉼없이 달려왔던 까닭이다. 꼬리, 아림, 아라, 주옥쌤, 차라, 칩코 편안한 동지들과 함께 도림사에서의 5일을 보낼 수 있음이 감사하다.우리가 온다고 청소부터 보일러까지 신경을 많이 써주셨다. 방이 지글지글 따뜻해서 들어가자마자 꿀잠을 잤다. 핸드폰도 시계도 없으니 몇시간을 잤는지도 모르겠다. 쓰러져서 잠에 들었다.수행을 삶으로 사는 친구들이 옆에 있으니 이런 호강을 누린다. 덕분에 나를 지극히 살피는 시간이 있음에 감사하다. 이런 시간을 마련해준 친구들에게 나는 무엇을 나눌 수 있을까?#단식 2일차시계가 없으니 눈을 뜨면 지금이 몇시일까 생각하다 잠을 뒤척였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눈을 끔뻑이다 옆에서 울리는 첫 알람 소리를 들었다. 4시였다.아침에는 속이 메스꺼렸다.울렁거리는 와중에도 열심히 요가와 명상 일정을 해냈다. 아침일정을 마치고 잠깐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면 몸이 개운하다.아림, 주옥샘, 아라와 도림사 뒤에 있는 동악산에 올랐다. 동근, 봄이랑 종종 올랐던 길이라 익숙하고 반가웠다. 단식 중인 내 발걸음에 속도를 맞춰주는 동료들 덕분에 산행이 편안했다.마지막 2km는 매우 가파랐다. 배고픔이 많이 느껴졌지만 쉬엄쉬엄 함께 숨을 고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정상에 도착했다. 동악산을 둘러싸고 있는 능선들이 끝없이 펼쳐졌다. 저 멀리 우리들의 지리산도 보였다. 먹을 것이 없으니 그저 아름다운 경치로 점심을 대신했다.산에 다녀와서는 밤 무서운 줄 모르고 내리 잠을 잤다. 저녁을 먹지 않으니 시간이 많다. 고요한 밤이 참 길었다.#단식 3일차4시 알람을 듣고 일어나 공양간으로 오면 주옥쌤이 책을 읽고 계신다. 하루를 시작하며 처음 인사를 나누는 사람. 따뜻한 눈인사로 맑은 기운이 전해진다.속이 울렁거린다. 아침 명상을 하고 한 숨 자고나면 제 컨디션으로 돌아오니 다행이다.여여의 ‘0원으로 사는 삶’을 읽고 있는데 글에서 그녀의 여정이 눈에 선하다. 깨지고 부딪히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이야기에 푹 빠져 읽다보면 여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글이 살아있다.아림이와 108배를 올리기로 했다. 참회문 한구절을 소리내어 읽고 절을 올렸다. 문득 이 순간 평화로운 상태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이 감사했다. 종종 비구니스님인 친구를 찾아가 절에서 쉬었다가셨다는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도 잠시 멈추어가는 시간이 필요하셨을까, 눈물이 핑 돌았다. 시야가 흐려져서 글자를 엉터리로 읽는 바람에 잠깐 웃음이 났다. 108배를 마치고 아림이가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아림과 진하게 함께 맞춰보는 첫 호흡이었다.사람들이 저녁예불을 드리는 동안 공양간 설거지를 했다. 몸을 비워내는 시간도 좋지만 함께 맛있게 먹는 시간도 의미가 있다. 그 시간에 함께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잘 먹어주는 이들이 있어 단식에 활기가 넘치니 감사할 일이다.#단식 4일차입이 바짝타고 메슥거림이 심해 힘겹게 요가를 마쳤다. 잠깐 잠든 사이 온갖 꿈을 꾸었다. 살아오면서 만난 인연들이 전부 찾아오는 느낌이다.빨래를 했더니 개운했다. 독소가 나오는 것인지 몸에서 쾌쾌한 냄새가 자꾸 신경쓰였다. 단식할때는 세제가 손에 안닿게하라하여 손빨래는 적게했다.도림사에 있는 동안 내게 가장 많이 찾아 온 메세지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라’였다. 살집이 붙은 내 몸이 맘에 들지 않아서, 다른 동물의 살덩이를 먹고 싶은 내 욕구가 불편해서, 몸이 정화되었으면 해서, 나를 불결하게 바라보는 시선에서 시작된 단식의 동기가 컸다.단식을 진행하는 동안 이만큼 건강할 수 있는 나의 몸에 감사하고,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완전한 상태로 바라봄에서 나를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더 멋있어져야할, 더 깨끗해져야할 ‘나’가 아닌, 이로써 충분한 ‘나’라는 거. #보식 1일차집에 돌아왔다. 벌써 절에서 지낸 시간이 꿈같다. 배농장에서 동근이와 반가움 입맞춤을 나누고 봄이와 실컷 뛰어노니 집에 온 것이 실감이 난다. 집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어 기분이 참 좋았다. 돌아올 수 있는 따뜻한 보금자리가 있음에 감사합니다 _()_어느새 처리해야할 것, 당장 해야할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음이 조급해지니 천천히 주변을 살피는 것을 잊는다. 너그러운 마음상태로 주변을 챙기는 것을 잊지 말아야지, 그리고 나의 몸을 연인처럼 애정해주어야지.
    • 지리산 오늘
    • 지리산 방랑단
    2024-02-02

실시간 지리산 방랑단 기사

  • [곡우 편지 : 덕복희와 산달] 그저 그것대로 품어서
    디자인.칩코 <음악을 말할 때 반짝반짝 빛나는 산달에게> 산달! 매번 이런 식으로 편지를 시작하는 것 같지만… 지난 편지는 정말 최고였어요! 산달은 아주 어릴 적부터 음악을 좋아했군요. 음악을 이야기하는 산달은 다른 편지에서보다 유난히 더 발랄하면서도 포근하게 느껴져요. 여명이 드는 예배당에서 혼자 드뷔시를 연주하는 산달의 모습은 정말 근사할 거예요. 어린왕자의 구절에서도 무릎을 탁 쳤답니다. 안간힘보다는 오히려 시간에 몸을 맡기면서 해결되는 것들이 있잖아요. 장구를 처음 칠 때는 제가 마치 돌돌 쥐어짠 빨랫감이 된 기분이었어요. ‘장구가 내 몸을 파고든다’고 느껴질 만큼 몸에 붙들어 메라고 하거든요. 일 년이 지나고는 장구가 엄청나게 불편하진 않아요. 피아노가 산달을 변화시켰듯이 장구도 제 몸을 길들였나 봐요. 산달의 피아노와 비교하기엔, 전 장구를 너무 게을리 쳤지만… 악기를 배우는 게 어떠냐는 들뜬 질문이 참 반가워요. 악기와의 순간을 이토록 소중히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내가 굉장히 특별한 경험을 하는 듯이 설레요. 우쿨렐레는 이제 막 배우는 단계라서 즐겁고 가벼워요. 소리가 형편 없어도 노래 부르는 재미로 치고말죠. 그런데 장구는 워낙 잘하는 분들과 하니 기가 죽기도 해요. 우쿨렐레는 동네의 조그만 동호회처럼 모이는 반면, 장구는 ‘호남여성농악보존회’라는 전문기관에서 배워요. 아마 디스코팡팡을 타면서도 장구를 끄떡없이 치실 듯한 무형문화재 원로 선생님이 계시고요. 장구수업은 중년 여성 수강생이 압도적인데, 선생님께서는 수강생을 통틀어서 ‘엄마들’이라고 칭해요. “자, 이때 엄마들이 삼채 시작해요.” 이렇게 지시하거든요. 그 ‘엄마들’이 어찌나 장구를 다 잘 치시는지… 대충 흉내만 내다가 집에 돌아오면 진이 쏙 빠져요. 재밌는 게, 우쿨렐레 수업은 나이 많은 이웃들이 저를 ‘애기’라고도 부르시는데요. 두 악기수업 동안 전 애기가 됐다가 엄마가 됐다가 하는 셈이에요. 둘 다 도무지 어리둥절한 호칭이지만, 역시 애기였던 적은 있어도 엄마였던 적은 없어서 그런지 장구수업이 훨씬 어렵게 느껴져요. 지난 편지가 왜 최고였는지는 바로 이제야 말할 참인데요! 산달이 건넨 마지막 질문이 저를 오랫동안 몰두하게 한 까닭이어요. 새들의 목소리가 여러 주파수의 화음일 거라는 말은 참으로 당연하면서도 놀라웠어요. 해가 저물 무렵 마당을 어슬렁대다보면, 새소리 같기도, 고양이 소리 같기도, 곤충 소리 같기도 한 묘한 소리가 들릴 때가 있어요. 누군지 정체를 통 몰랐는데, 어쩌면 그건 그들 모두의 소리였을 지도 모르겠더군요! 저의 진지함도 우리의 유연함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주파수일 지도 모른다는 말 역시, 참으로 당연하다 여기면서도 ‘헉’하고 숨을 절로 들이켰어요. 산달이 꼭 예리한 심리상담사처럼도 느껴졌답니다. 분명 제 진지함도 어떤 순간엔 화음을 만들어낼 텐데, 실은 잘 모르겠더라고요. 진지함을 미워하기 바빠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나 봐요. 다만 어느 순간에는 진지함도 유연함을 만드는 재료가 될 거라는 그 다정한 말이 참 고마웠어요. 산달 역시 잡담이 어색하다는 맞장구를 쳐주어서 위로도 많이 되었고요. 이번 주제는 ‘나를 싫어하는 사람’인데요. 저를 싫어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대체로 저를 재수 없어 했던 것 같아요. 이게 참 표현이 모자란데... ‘재수 없다’는 말 밖에 생각이 안 나네요. 어디서 진단해준 건 아니지만, 전 완벽주의 강박이 있는 모양이에요. 제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보여줄 용기가 안 나요. 어릴 적에 전 그림 그리기를 아주 좋아했는데요. 사람을 그리면 꼭 얼굴에 눈, 코, 입을 안 그렸대요. 머리칼이나 옷차림은 섬세하게 그리는데 얼굴만 텅 비어있는 거죠. 부모님은 좀 섬뜩하기도 하셨겠어요. 제 딴에는, 얼굴은 너무나도 중요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거길 실수했다간 그림 전체를 망칠까 봐 손도 못 대는 거였어요. 요즘도 전 비뚤어진 커텐과 색조합이 영 맞지 않는 침대시트를 잘 견디지 못해요. 컴퓨터의 가득 찬 휴지통과 정렬되지 않은 폴더도 마찬가지고요. 늘 다른 사람들에게도 정돈되고 절제된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해요. 완벽주의는 아마 겁이 많은 사람들의 질병일 거예요. 저는 이런 강박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이 저를 재수 없어 한다고 느껴요. 사람들에게 잘보이고 싶어 생긴 강박일 텐데 참 역설이죠. 다른 건 사소한 걸로 꼬투리를 잡으면서도, 제 허점은 보여주기 싫어하니 진짜 재수 없긴 한 것 같아요. 그런데도 제 교우관계가 썩 나쁘지 않은 것은, 아마 아무리 허점을 가려도 남들 눈엔 훤히 보이기 때문일 지도 몰라요. 정말로 완벽해 보이면 진짜 재수 없을 텐데, 전 허점투성이라 별로 재수 없을 것도 없는 거죠. 벽에 비뚤어진 커텐은 못 견디면서, 제 얼굴은 씻지도 않아서 하루 종일 눈꼽을 달고 다니는 식이에요. 말이 샜는데, 제가 세수를 안 하는 걸 고백하려 한 말은 아니고... 제 진지함도 아마 이 완벽주의 강박에서 기인한 게 틀림없다는 말이었어요. 이쯤 되면 ‘진지함’도 억울할 것 같아 화음을 만드는 순간을 요리조리 골똘했는데요. ‘진지함의 순기능 찾기’ 숙제를 풀지 못한 변명만 들고 왔습니다. 최근 열흘 간 아주 골치 아픈 일이 있었답니다. 제가 매번 진지한 꿈만 꾼다고 했던 말을 취소해야겠어요. 어느 날 똥꿈을 꾸었어요. 김밥김에 단무지까지 넣어서 똥을 돌돌 말아먹는 꿈이었는데요. 똥꿈이면 복권을 사야한다고들 하길래 좋은 일을 기대했어요. 그날 새벽 어스름한 부엌을 지나다가 발바닥에 촉촉하고도 바삭한 무언가가 닿았어요. 소스라치는 느낌에 펄쩍 뛰어올랐는데… 바나나만한 지네님이었답니다. 밟았다기보다 스친 정도라서 제가 해를 끼친 것 같진 않은데 이미 어디가 아픈지 몸을 또아리를 틀고 힘이 없었어요. 만약 이 정도 통통한 지네님이 팔팔한 상태로 절 물었다면 아마 그 새벽에 응급차를 불러야 했을 지도 몰라요. 제 복권꿈은 그렇게 지네님이 절 살려준 목숨값으로 퉁쳐버린 것이죠. 그날은 하루종일 발바닥에 지네 화석이 박힌 양 그 감촉이 가시질 않고 오소소 소름이 돋았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물리진 않았으니 촌인식은 아직이구나, 생각했죠. 그런데 414기후정의파업 전날 일이 터졌어요. 어디선가 들려오는 수상한 날갯짓 소리에 새벽 2시에 잠에서 깼는데요. 집안이 날개달린 흰개미떼로 뒤덮인 거죠. 새벽에 흰개미떼와 전쟁을 벌이다 일단 세종시로 후퇴했는데요. 일주일 뒤, 3배가 되는 흰개미떼가 정말이지 모래알처럼 나무기둥에서 쏟아져 나왔어요. 이 흰개미님들은 나무를 먹고사는데요. 주로 동남아에서 서식하는데, 우리나라 남부가 아열대기후로 변하면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고 해요. 죽은 나무가 주요 먹이라니, 생태순환을 위해 없어선 안될 분들이지만… 저희 집을 순환시키려고 나서실 줄은 몰랐어요. 실로 동남아나 호주에선 이 흰개미 때문에 집이 무너지는 경우가 많대요. 기사를 검색해보니 우리나라 남부지역 목조문화재들도 여럿 흰개미님들의 공격에 맥을 못 추나봐요. 열흘 가까이 집에 못가고 인근 빈집에 피난을 와있어요. 방역업체에 문의해보니 왜 이렇게 늦게 연락을 했느냐고… 이 정도 크기의 성충과 유충의 양이면 이건 최근 일이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 꽤 오래 전부터 집을 갉아먹고 있었을 거라더군요. 개미떼가 나온 나무 기둥을 통통 쳐보면 텅 빈 드럼통 같은 소리가 나요. 흰개미떼가 나온 이후론 아무리 씻어도 몸이 간지러운 기분이고, 검은깨가 박힌 쿠키를 보면 개미가 박힌 줄 알고 흠칫 놀라고, 꿈에서도 내내 개미 꿈만 꿔요. 산달이 지난 편지에 ‘내가 생각할 때, 나는 내가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 된다’는 멋진 문장을 전해주었는데, 전 개미 생각을 하도 많이 해서 개미가 된 게 분명해요. 근래 식욕이 없고 무기력한데, 제 짝꿍도 상태가 비슷해요. 일이 도무지 손에 잡히질 않는 와중, 이웃 개를 산책시키고 모종들 물 주는 일은 멈출 수가 없으니 무거운 몸을 힘겹게 일으켜 겨우 움직이고 있어요. 지리산엔 골프장을 짓겠다고 해서 또 그 관련 자료를 며칠간 정리하다보니 영 어깨와 목이 아파서 편지를 쓰러 노트북 앞에 앉기가 어려웠어요. 그래도 저희 사정을 아는 친구들이 안부를 물어오고, 탱자쌤은 ‘이건 기후재난이다! 기사로 써야한다!’며 노발대발 해주셨다니 마음이 조금 위로가 되기도 해요. 어쨌거나 촌인식을 거하게 치룬 것 같죠? 바나나만한 지네님보다 새끼손톱만한 흰개미님이 더 무섭더군요. 기가 막히고 우울한 이야기로 마무리가 돼서 난감하네요. 편지가 늦어 미안한 마음을 전해요. 제가 존경하는 영성가 에크하르트 톨레가 이런 말을 했어요. ‘삶은 생각보다 진지하지 않다!’고요. 전 기차를 놓치기 직전이나, 지갑을 잃어버렸을 때 이 문장을 주문처럼 외우곤 해요. 생각보다 별일 아닌 것들에 우린 너무 크게 상심하고 침울하잖아요. 흰개미님에게 집을 뺏긴 순간에도 이 주문을 외웠어요. 이건 별일이 아니다! 낙관적으로 생각하자! 하고요. 그런데 역시 기운이 쪽쪽 빠지는 걸 보면, 아무래도 삶이 진지하지 않다는 걸 배우기 전에, 진지함과 화해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산달! 숲도 마을도 새소리로 가득해요. 제비가 돌아왔고요. 아주 가까이서 할미새와 오목눈이와 팔색조를 본 행운을 자랑하고 싶어요. 썩어서 한바탕 죽었던 감자는 또 다른 새순이 올라와서 다들 번듯하게 자라나요. 요즘은 산 전체가 소나무 꽃봉오리가 된 양 노란 꽃가루를 안개처럼 뿜어내요. 고단했던 열흘 남짓 안에, 산달의 따스한 청명 편지를 포함해서 좋은 소식도 꽤 많았군요! 전 흰개미님을 너무 많이 죽여서 위령제를 지내야겠어요. 산달도 멀리서 물 한그릇 떠다놓고 기도해주세요. 흰개미가 된 덕복희 올림 <조금은 안쓰런 나의 웃음보따리 복희에게> 복희, 오랜만이에요! 제가 곡우 편지를 받은지 3주가 넘도록 답신을 못해 어느새 입하를 지나 소만이 가까워졌네요. 오기로 한 날에 편지를 받지 못해 서운했죠.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걱정과 염려를 했을 복희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해요. 사실 번아웃이 왔었어요. 왜 뒷감당도 하지 못할 많은 일들을 모조리 손에 쥐었는지, 욕심이 많아 탈이 났던 거죠. 하나를 겨우 끝내면 다른 하나가 떡하니 앞에 서 있고, 그렇게 몇 개의 산을 넘는 과정에서 숨을 편히 내쉬기도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기도 어렵게 느껴졌어요. 그러다가 결국 몸에 무리가 오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깊이 있는 대화를 집중해서 나누는게 가장 어려웠던 것 같아요. 자꾸 이런 모습을 반복하는 저의 이유는 무엇일까 고민하는데, 늘 뾰족한 해법은 잘 생각나지 않아요. 어제 하루는 일부러 여유로운 척을 해보려 노력했어요. 친구와 전화도 하고, 볕을 쬐면서 산책도 하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저녁 식사도 함께 했어요.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렇게라도 숨을 내쉴 틈이 필요했던 건가 싶어요. 그렇게 더 잠시 시선을 돌려 주변을 돌아보니까 주변에 과로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더라고요. 스스로에게 쉴 공간을 마련해주지 않으면서 자신을 혹사시키는 모습을 많이 보는데, 그게 바로 다른 사람들이 보는 제 모습이겠거니 싶었어요. 그러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복희에게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답장을 바로 하지 않았더니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더 막막하더군요. 갓 받은 편지를 읽고 난 후의 기쁨을 소중한 줄 모르고 흘려보낸 제가 원망스러웠어요. 이대로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복희와 제가 한 계절을 몽땅 주고받은 이야기들을 다시 읽었어요! 그건 마치 맛좋은 음식을 먹는 것만 같았어요. 식은지가 한참 되었는데도 변함없이 감질나는 그런 음식이요. 물론 밥이나 빵을 막 했을 때의 그런 따끈따끈함은 찾아보기가 어려웠지만, 몇 날 며칠을 묵혀 두면서 먹는 발효 음식처럼 예전에 못 보았던 것들을 찾을 수 있었어요. 돌이켜보면 저는 늘 바쁘다는 핑계로 지각도 밥 먹듯이 하고, 그러다보니 복희에게 준 말들도 충분히 정성을 들이지 못했던 것 같아요. 늘 다른 일을 하다가 식사 시간이 다 되어서 급하게 하는 요리들은 망하기가 십상이잖아요. 마치 제 글이 그렇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가끔은 투정도 부리고, 이해해달라고 떼를 쓰기도 하고요. 반면에 복희의 글은 정말, 뭐랄까요. 마치 지리산 같았어요! 제가 어떤 말을 편지에 담아서 보내든 그저 그것대로 품어서 새로운 모습으로 되돌려주는 그런 지리산이요. 복희가 편지에서 묘사해주었던 사랑 가득한 지리산 말이에요. 복희는 모든 편지에서 저를 있는 그대로 ‘기다려주고’ ‘감싸 안아주고’ 있었어요. 제가 어떻게 이 편지를 써왔는지에 대해서 후회하고 자책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건 큰 의미가 없다고 느끼거든요. 다만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펜팔을 충분한 감사와 온전한 솔직함을 담고 싶었어요. 저는 늘 그 두 가지가 참 어려워요. 내 삶에 온 모든 것들을 하염없이 감사해보려고 노력하는데, 늘 거짓감사를 드리는 것만 같아요. 누군가에게 솔직하려고 노력하는 제 모습은 늘 억지스럽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져요. 어느 바이올리니스트의 소리가 몹시도 아름다워 흉내내려 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저의 몸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고, 그런 상태로 겉으로만 소리를 흉내내려니 당연히 될 리가 없었어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만들어내기까지의 여유로움과 꾸준함을 따라해고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그래야 한 음을 낼 때도 곧고 맑은 소리가 나고, 다른 악기들의 소리와도 듣기 좋게 어우러지더라구요. 언제나 가장 어려운 적은 조급함이에요. 지금의 나의 행동이 앞으로의 나를 어떻게 쌓아가고 있는지 상상할 줄 아는 것이 현명함이더라고요. 저의 말들은 어쩌면 그런 조급함으로 자아내어진 문장들일지도 몰라요. 그리고 저의 하루도요. 그러니 그렇게 모든 일을 혼자 다 해내려고 하고, 하루도 쉬지 않고, 나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도 허락하지 않고서 헛된 것들을 좇아 흉내내었던 거에요. 그런데 그런 제 말들을 싯다르타의 법문으로 만들어준 건 바로 복희가 섬세하게 들어주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복희를 보면 저는 제 스스로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희같은 사람이 되주었나 돌아보게 돼요. 흉내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걸 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어져요. 더욱 옹골진 진심을 담아 다른 존재를 대하고 싶다는 말이에요. 나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가고 있어요. 복희가 전해준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저도 그 말을 같이 새겨보려고요. “삶은 생각보다 진지하지 않다.” 식욕이 없고 무기력할 때도 번아웃이 왔을 때도 그 말을 되새기면서 산책하고 음악을 들어볼게요. 그나저나 이제는 식욕도 기력도 다시 돌아왔나요?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지금쯤이면 돌아왔어야 할텐데 말이죠. 흰개미님과 집을 공유한 경험도 지금 돌아보니 조금 웃기기도 하나요? 물론 복희의 고생은 유감입니다… 그래도 복희가 전해주는 이야기는 늘 재밌어요. 어떻게 그렇게 이야기거리가 많은지! 누가 복희더러 진지하다고 했나요? 참, 그리고 위안이 될 만한 사실 하나 알려줄까요? 제가 초등학교 때 친구들이 저를 싫어했던 적이 있었어요. 잘난 척 한다고, 재수없다고요. 성적도 좋고 발표도 잘했던 제가 샘이 났던 모양이에요. (제가 생각해도 조금 재수없긴 했어요.) 제게는 그게 큰 상처였던지 그 이후로 겁이 많이 생겼는데요. 사실 지금까지도 그래요. 누군가가 저를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감각이 제게 트라우마처럼 남아 불쑥불쑥 튀어나오거든요. 그때와 지금이 다른 점은 사람들이 그때처럼 대놓고 제 욕을 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대놓고 욕을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물론 애정을 담아서요..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이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해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흠흠, 같은 욕을 들었다는 것에서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는데, 위안이 되었을지 모르겠네요. 복희, 아마 이게 제가 드리는 마지막 편지일 수도 있겠어요. 그동안 저는 괜찮은 펜팔 짝꿍이었나요? 그랬든 안 그랬든, 복희는 제게 최고의 펜팔 짝꿍이었어요. 복희가 제게 보여준 기다림과 진지함에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해요. 저는 지금 보슬보슬 봄비가 내리는 제주도에 와 있어요! 이곳은 바람도 많이 불어 마치 하늘에서 누군가가 계속 분무기를 뿌리는 것만 같아요. 내일이면 바다를 만나겠어요. 먹먹하고 향긋하지만은 않은 바다를요. 사랑하는 공간이 될 것만 같아요. 이 곳을 가득 담아 지리산으로 갈게요. 복희에게 보여드릴 햇살 담긴 웃음을 들고 갈게요. 안녕, 곧 만나요. 양팔 들고 벌서고 있는 산달이, 사랑과 솔직함을 담아
    • 지리산 오늘
    • 지리산 방랑단
    2023-05-18
  • [곡우 편지 : 토토와 가로] 세상과 조화롭게 산다는 것이
    디자인.칩코 <가로에게>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편지를 띄워요. 이번 편지는 기약한 날짜를 한참 지나버렸네요. 혹시 나의 편지를 기다렸다면 미안한 마음을 전합니다. 한동안 편지로 소식을 주고 받는 일이 드물어지니 가로의 근황을 꽤나 오랜 시간 못 들었던 것 같아요.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지난 잊을 수 없는 향기에 대한 편지를 받았을땐,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여행을 다녀온 느낌이 들었어요. 많이 사랑했던 사람과의 기억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이렇게 향기로 종종 떠오르기도 하는구나. 같은 향기를 다른 누군가에게 맡는다는 것도 흔하지 않은 일일텐데, 심장을 쿵 하고 멈춰버릴 것만 같았던 그 강렬했던 향기는 어떤 향이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그때의 시간과 추억을 향기를 통해 소중히 간직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로의 향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주어서 고마워요. 가로의 말처럼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은 닮아있어서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 했다면 편지가 비슷했을 수 있겠어요. 이번 편지의 주제는 두 가지 중에서 한가지를 고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떤 주제로 하냐에 따라서 우리가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달라진다고 생각하니 고민하게 되더라구요. 지리산방랑단이 정한 지난 청명의 주제는 ‘나를 바꾼 꿈’이고 곡우의 주제는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네요. 가로와 저의 편지를 주고 받는 기간이 절기를 빗겨가게 되면서 가로의 이야기도 궁금하지만 모든 주제를 함께 나누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어요. 어느덧 촉촉한 봄비가 내리는 곡우의 절기를 맞이했으니, 조금은 어렵겠지만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해요. 흔히들 착한사람 콤플렉스 라고 하나요? 예전에는 좋은 사람으로만 타인에게 비춰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모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 노력하기도 하고, 나를 싫어할 것 같은 사람이 있다면 관계가 잘 이어갈 수 있게 때에 따라서 착한 척(?)을 하기도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사회생활도 하게되고 조금씩 더 살아가다보니, 나와는 세상에 대한 관념이 다른 채로 훨씬 더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도 있고, 의도가 없었더라도 나에게는 상처가 되는 말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나를 싫어해서 하는 말은 아니겠지만.. ‘오늘은 왜 화장 안했니?’ ‘너무 편하게 입고 다니는 거 아니야?’ 등 나라는 사람을 지워내는 말을 들을 때면 볼이 빨개지도록 화가나고 억울하기도 했어요. 그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이라도 해야하나? 머리를 꽁꽁 싸매다가 아, 나는 세상 모두를 담기엔 내 그릇이 부족하구나 라는 것을 느꼈지요. 날카로운 말로 상대에게 불편한 내 마음을 표출하는데만 온 에너지를 쏟았거든요. 지리산에 내려오면서 인간 관계가 이전과 많이 달라지기도 했어요. 가까이 있던 사람들과 연락이 소원해지기도 하고,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생기기도 하고, 나를 너무나도 사랑해주는 사람들도 새롭게 생겼을거에요. 가로보다 나의 주변에 물리적으로 가까이 살고 있는 이웃들 중에는 지리산의 나무를 모두 베어버리고 골프장을 짓는데 열심히 하루를 보낸 노동자가 살기도 하고, 아름다운 섬진강이 주변으로 흙을 퍼다나르며 물 속의 누군가의 집을 파헤치는 노동자도 건너집에 살고 있을 거에요. 나와는 생각도 삶도 많이 다르지만 한 마을을,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온 마음을 다해 그 삶을 사랑하는 것은 어려울지도 모르겠어요. 세상과 조화롭게 산다는 것이 꼭 모두를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었구나 라는 것을 배웠어요. 굳이 사랑하려고 노력하지 않는것, 굳이 받아들이려고 애쓰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미 조화를 이루는 것일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해요. 음, 생각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변하기도 하는 것이니 내일은 또 다른 시선으로 관계를 바라볼 수도 있겠어요. 이것이 영원한 저의 생각이 아닐지도 모른다라는 것을 알아주세요. 비가 촉촉히 내리는 봄이에요. 땅에 심어놓은 씨앗들이 새싹을 움트고 있어요. 씨앗마다 다른 모양의 얼굴을 들이밀고 나오는 것이 사랑스러워요. 그걸 알아보려고 매일 들여다보는 것도 재미있고요. 갈색의 고수 씨앗은 동글동글하게 생겨놓고 새싹은 길쭉하고 뾰족하고요, 아욱 씨앗은 까맣고 조그마한 것이 하트 모양으로 뿅뿅뿅 얼굴을 빼꼼 내밀더라구요. 지리산에 내려오는 날 소개해줄게요. 아참, 우리가 편지를 주고 받을 날이 몇 번 남지 않은 것 같아요. 펜팔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손편지를 적는 것에 대한 설렘을 느꼈던 적이 있거든요. 한번쯤은 가로에게 손편지를 보내보고 싶단 생각을 했는데, 혹시 메일을 보낼 때 편지를 받을 수 있는 주소를 알려줄 수 있나요? 그렇게 해주면 고맙겠어요. 다시 한번 늦은 편지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전해요. 서운한 마음이 들었을 수도 있을텐데 너그러이 이해해준다면 지리산에 왔을 때 꼭 특별한 보답을 할게요! 다음 편지 기다릴게요. 가로의 근황이 궁금한 토토가 <토토에게> 토토 잘 지내고 있어요?!! 안부를 묻기엔 너무 늦은감이 있어 살짝 민망하네요... 벌써 계절이 또 한 번 바뀌었어요. 우리가 정말로 만나네요! 마침내! 내일 만나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또 한번 우리의 만남이 혹시라도 무산될까 혼자서 마음을 졸였답니다... 편지는 늦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 토토와 지리산 방랑산을 생각하며 설레임으로 가득했어요. 지리산 방랑단과의 여정이 너무 기대되요. 그동안의 궁금증과 여러 마음들이 함께 모두 해소될 수 있기를 바라요. 먼저 보내준 우리가 묵을 숙소와 자연들을 보며 정말 오랜만에 기분좋은 여행이 될 것 같다고 생각헀어요! 구례의 아름다운 풍경과 그 자연 속에서의 경험들은 저에게 분명 많은 영감과 평온을 안겨줄 것이에요. 늘 토토가 걸었던 곳을 함께 걷고, 대화하고, 토토가 기르고 있는 자연의 신비로움을 함께 탐험할 수 있는 기회가 정말로 소중하게 느껴져요. 이 특별한 여행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를 바라요. 토토와 친구들에게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고 함께 살아온,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더 자세히 들을 수 있기를 바라요. 우리가 함께 하는 시간들이 또 도시의 저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 해줄 수도 있을까요? 우리가 만날때까지 참 오래도 걸렸네요. 이편지를 통해 저의 설렘과 기대를 전해요. 우리의 여정이 토토와 가로의 궁금증을 해소해주는 멋진 시간이 되길 바라며 마칠게요. 안녕 토토 내일 봐요!!! 여름도시의 가로가. 토토 이번 주제는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네요. 저는 오랫동안 엄마가 나를 미워했다고 생각해요. 왜 나를 미워할거라고 생각했을까요? 나는 똑같이 엄마를 미워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대로 엄마와 딸이네요. 이제는 엄마가 안 미워요. 엄마도 내가 안 미운 것 같아요. 가끔씩 가족 사이에서 생기는 갈등과 미움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아요. 그때는 어떤 이유로 인해 서로가 서로를 미워했을지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하기가 정말 어려웠던 것 같아요. 가끔 우리는 나 자신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서로의 감정을 이해하고 인정 하는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면서도 참 쉽지 않았네요. 지금도 서로가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사건이나 상황속에서 엄마와 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어떤 감정을 느꼈고 상상이상으로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었을지, 정말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복잡하고 개인적인 이유일 수도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서로를 미워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정말 중요한 사실은 여전히 엄마와 딸 관계로 남아있다는 거에요. 가족이라서 그 힘든 시간과 갈등을 수십년을 걸쳐 극복하고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정말 오래된 이야기였네요. 엄마와 솔직하게 대화하고 서로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상처가 있는 과거에서 영영 빠져나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계절이 몇 번 바뀌면서 제가 조금 달라진 것 같아요. 이제는 상처가 있는 과거는 뒤로 하고, 지금과 미래에 초점을 맞추고 싶어요. 함께하면서 서로에게 이해와 사랑을 보여주는 주저하지 않고 싶어요. 내 마음이 변하니까 엄마도 나를 사랑하고 이해로 바라봐 주는 것 같아요. 엄마도 내가 엄마를 사랑한다는 걸 느끼고 있는 걸까요? 토토 잠시라도 제가 싫었을 수도 있지만,, 부족한 저를 그동안 이해와 사랑으로 다독여줘서 고마웠어요. 정말 이만 마치고 내일 봐요!!! 보고싶어요! 토토,
    • 지리산 오늘
    • 지리산 방랑단
    2023-05-18
  • [입하 편지 : 유우야와 갈토] 살고 싶었던 거에요 간절히
    디자인.칩코 <갈토에게> 갈토 안녕하세요~ 아슬아슬하게 편지를 보내네요. 요새 마음도 뒤숭숭하고 공부도 손에 안 잡히는데 그 와중에 일도 이동도 많은 주간이었어요. 내일은 꼭 편지를 보내야지 하고 잤는데, 오늘은 아침에 비도 많이 오고 잠도 푹 자서 상쾌한 아침이네요. 제가 비를 좋아하다 보니 아침에 비가 오면 산타 선물을 받은 것처럼 신나거든요. 그간의 복잡함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서 가벼운 마음으로 편지를 쓰고 있어요. 갈토 말마따나 지리산의 축복스러운 기운을 받고 모꼬지에 올 수 있게 된 여파가 제게도 왔나봐요. 저는 갈토가 올 수 있으리라 굳게 믿고 있었답니다 호호 참 기뻐요. 갈토의 편지를 읽으며 느껴온 부분도 있지만 역시나 갈토는 강강약약이 맞았군요. 그런데 적잖이 놀랐어요. 저도 비슷한 면이 있거든요. 상사와의 대면 구도도 그렇고, 와다다 쏟아내고 퇴사의 길을 걷는 것 도요. 우스갯소리로 말하자면 살아온 동안 출근일자보다 퇴사일 수가 더 많지 않나 싶습니다. 상사의 명령을 조건 없이 수용해야 살아 남는 조직문화가 제겐 어려워서 그런 수직적 구조의 단체를 잘 못(안) 버텨요. 이번 주제가 ‘지금까지 내어본 가장 큰 목소리’죠. 편지를 쓰려고 어제 개와 산책하며 생각했어요. 가장 큰 목소리가 언제였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초등학생때 동네 친구들과 놀다가 싸움 나면서 내어본 데시벨을 이긴 적은 없었어요. 평소 그렇게 큰 목소리를 내는 타입도 아니고. 그러던 중이었어요. 개와 신호 대기로 멈춰 있는데 어떤 자전거가 무모하게 개 옆에 바싹 앞바퀴를 들이 밀더라고요. 몇 초 후에 개가 소스라쳤어요. 안 그래도 예민한 쫄보인데 바로 앞에 차가 지나다니기도 했고 자전거 바퀴에 꼬리나 발이 깔릴 뻔했어요. 강아지에게 매너 좀 해 달라며 순간 버럭 해버렸답니다. 개와 산책하다 보면 자전거들이 그렇게 개에 대해 매너가 없더라구요. 개가 안 비켰으면 다쳤을 것 같은 아찔함도 많았고 바로 옆을 지나가면서 속도를 늦추지 않아서 개 물론 저도 놀라는 경우가 자주 있어요. 강아지가 안 보인다는 듯이 앞을 지나갈 때도 많고. 그러면 안 다쳐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사람이었다면 적어도 벨로 알림을 줬을텐데 하구요. 이런 일이 쌓이니 못 참고는 결국 어제의 사달이 났네요. 페미니즘을 배우고 ‘탈코르셋 운동’으로 온몸을 무장했을 때도 언제나 경계태세였어요. 어디서 염산이 날라올지 몰라서요. 당시도 많이 소리지르고(?) 다녔는데 그때는 용기보단 두려움의 소리였다고 생각해요. 아무래도 가장 큰 목소리는 용기에서 비롯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렇게 내 인생의 가장 큰 목소리는 바로 어제였다... 라는 이야기였지만, 사실 정말 큰 목소리는 행동으로 표현했던 적이 많은 것 같아요. 동물 해방을 외치고자 비건을 결심한 순간, ‘아름다움’은 머리카락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하며 밀어버린 순간, 우리의 몸은 음란물이 아니야 라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 계곡에서 홀딱 벗어버린 순간들이 어쩌면 살아오면서 진정한 목소리였다는 생각이 드네요. 갈토는 어떤가요? 아니 근데 윗집에서 세탁기를 새벽에 돌린다니요... 저도 그 고통을 압니다. 새 집에서 잘 자고 잘 먹고 잘 싸야 적응이 빨리 되는데...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이 잘 잠들 수 있기를 바라요. 그리고 지난 주 힘들었던 이슈 중 하나가 관계에서 오는 허탈함이었거든요. 갈토의 지난 편지 마지막 문단은 ‘내가 들어야 하는 말이구나’ 싶었어요. 전전긍긍하던 마음이, 한순간에 그러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으로 바꼈어요. 갈토처럼요. 싫어하는 사람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갈토의 모습이 부러웠는데 그래도 한발짝 갈토와 닮아진 느낌이에요. 좋은 말 나눠주어서 고맙습니다. 갈토를 닮아가서 기분좋은 유우야드림 <유우야에게> 갈토드림.
    • 지리산 오늘
    • 지리산 방랑단
    2023-05-13
  • [곡우 편지 : 참새와 돌] 힘껏 나아가려고 애쓰는 존재들
    디자인.칩코 <돌에게> 돌, 끈덕진 마음을 조금은 떠나보내었다고 하니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우리는 어떻게든 내게 찾아온 고통의 의미와 또 그 만큼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 하고, 작은 발견과 작은 의지만으로도 힘껏 나아가려고 애쓰는 존재같아요. 올라간 기온 때문에 꽃이 빨리 피어 사람들은 일찍이 꽃구경을 한다고 마냥 좋아했지만 정작 꽃들과 벌들에게는 생존이 달린 큰 시련이었겠어요. 그럼 결국 사람들도 그렇게나 좋아하는 꽃구경이 더 어려워지겠네요. 지구가 자꾸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아요. 작년에는 조경수로 잔뜩 심어놓은 철쭉 꽃들이 떨어지지 못하고, 매달린채 마르는 모습을 보았어요. 그것도 벌이 사라져 수분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들었는데 그러고 보니 더더욱 처참했던 것 같아요. 사실 지금 이 순간도 저는 기후위기의 신호를 찐-하게 겪고 있어요. 저에겐 공포영화, 악몽 급이었던 상황을 편지에 한번 풀어보아도 될까요..? 혹시 벌레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싫으시다면 이 문단은 건너뛰셔요..ㅎㅎ 때는 바야흐로.. 414기후정의파업을 가기 전날 밤이었어요. 아침 일찍 파업 버스를 타고 세종으로 이동한 다음, 행진에 맞춰 걷고, 무언가를 외치게 될 긴 하루를 준비하며 매우 잘 자야겠다고 다짐했던 밤이었는데요. 새벽에 아주 가까이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는 거에요. 처음엔 비가 내리나 싶었어요. 근데 집 밖이 아닌 집 안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길래, 소리가 나는 쪽으로 귀를 기울이다 안되겠다 싶어 불을 키고 방안을 확인해보니 모기장도 구멍은 우습다는 듯이 통과하는 가볍게 날벌레가, 날벌레 천 마리(마음의 눈으로는 거의 오 억마리였어요)가 방을 뒤덮어가고 있지 않겠어요? 그날 밤 푹 자기는 커녕 한 시간동안 그 날벌레들을 쓸어내다가 끝이 없이 쏟아져 나오는 모습을 보고는 어쩔 수 없이 모기향 두개를 피워 화생방을 만들어놓고, 옆 집으로 건너가 잤어요. ‘왜 하필 우리집에, 왜 하필 오늘’ 이런 생각을 하며 걱정, 불안에 날벌레가 없는 방 안에서도 잠을 설쳤어요. 저와 같이 사는 짝꿍은 다음날 기후정의파업에서 많이 외쳤던 ‘생태학살’을 우리가 저지르고 왔다고 말하는데 참 싱숭생숭하더라고요. 알고보니 그 벌레는 흰개미 날벌레들이었는데 나무를 갉아먹고 산대요. 나무를 먹고 산다니… 사실 인간보다 깨끗할지도 몰라요. 이슬만 먹고 사는 요정이랑 비슷하잖아요? 물론 제가 목격한 비주얼은 좀비떼 같았어요.. 목조주택의 목구조 안쪽에서 자리를 잡고 살아도 사람들은 잘 모르고 살다가 부화기인 4-5월달에 갑자기 엄청난 양의 유충들이 깨어나면서 놀래키기로 유명하다 그러더라고요. 죽은 날벌레들을 쓸어내며 이제 끝인가 싶었는데 오늘은 점심을 먹다가 집 바깥으로 엄청난 양의 날벌레들이 또 단체로 날아가는 걸 목격했어요. 그걸 보니.. 왠지 쎄한 느낌에 급히 이불들을 옆집으로 옮기는데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처음보다 더 많은 날벌레들이 방안으로 쏟아져 나오더라고요. 이 편지를 받고 돌 기분이 너무 상하면 어떡하나 다 쓰고나니 걱정되어요. 내가 받은 충격을 돌도 받으라고 쓴 글은 절대 아닌데요. 이상적인줄 알았던 귀촌의 현실을 보여주기 위함도 아니고요..ㅋㅋㅋ 지구의 신호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다보니 이렇게 되었어요. 왜 하필 414기후행동 전 날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그리고 오늘은 구례의 초등학생들이 함께하는 지구의날 행사 전 날이거든요. 해야할 일도 많은데 벌레와의 전쟁을 하고 있으려니 짜증과 원망이 훅 올라오는데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이 상황이 내게 주는 메시지가 분명 있다고 생각했어요. 흰개미는 더운 지역에서 산대요. 우리나라의 기후가 갑자기 흰개미들에게 유리하게 바뀌니까 생태계가 균형을 잃고, 흰개미 번식량이 늘면서 이런 상황이 생긴 것 같아요. 아무것도 모르고 낡은 목조주택을 꿈에 그리던 집이라고 신나서 선택했던 과거의 나를 탓하다가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기후재난이 나의 작은 집에서 조용히 일어난 건 아닐까? 급하게 이불과 옷가지를 챙기면서 난민의 기분을 잠시 상상했어요. 겨우 옆집으로 피신하면서도 내 ‘집’에서 누리던 일상이 전부 뒤틀리니 몸도 마음도 폭삭 내려앉은 것 같더라고요. 산불피해주민들이나 해안침식피해주민들은 얼마나 막막하고, 억울했을까요. 많은 일본사람들이 후쿠시마 폭발사고를 계기로 삶의 방식이 전환되었다는 얘기도 떠올랐고요. 아직은 흰개미 정도라 정신 바짝 붙들고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지만 정말 이 작은 신호들을 앞으로도 무시했다간 더 큰 재난과 그에 따르는 혼돈의 크기가 어마어마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요. 지구가 제게 그 시대를 연습하라고, 집에 흰개미들을 등장시켰을지도 몰라요. 오늘도 치열하게 개미들과 생존경쟁을 벌였어요. 내 생존을 위해 진짜 싸워야할 대상은 사실 인간들일텐데 말이에요. 기후를, 산을, 바다를 그대로 두는 게 왜 중요한지 더 뼈저리게 느꼈어요. 오래된 자연림인 지리산이 산불을 이겨내는 지혜가 있듯이 우리에게도 여전히 선조들의 지혜가 쓸모있기를 바라요. 기후가 바뀌면 우리가 기존에 적응해서 살아가던 삶의 방식이 전부 다 뒤집힐테니까요. 돌에게 제 벌레썰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지금 제 머릿속이 온통 흰개미로 가득차서 다른 말을 쓸 수가 없었어요. 부디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줘요. 그래도 돌에게 쓰는 편지라서, 정말 돌 덕분에 편지를 쓰며 비운의 사건 정도로 생각했던 경험이 지구의 변화이자 지혜로 이해되어요. 끔찍한 일에도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데, 돌의 가치는 의심할 필요도 없어요. 저도 다시 삶의 의지를 다져볼게요. 부디 안녕히 지내길 바라요. 그럼이만. 짹짹 2023.4.19 돌에게 <참새에게> 갑자기 싸늘해진 날씨에 돌아온 지각자 돌입니다. 참새, 오래 기다리게 해 미안해요. 활동하는 단체의 중요한 행사가 끝이 났고, 중간고사도 무사히 마쳤어요. 이제는 두 발 뻗고 잠들 수 있어요. 참새는 그간 어떤 날들을 지나왔을지 궁금해요! 참새, 정말 큰 충격을 받았겠어요. 편지에서 당황스러움, 걱정, 혼란이 느껴졌어요. 정말 실존적으로 ‘내 일상의 터전을 어떻게 지키지?’라는, 또는 ‘어떻게 공존하는 방향으로 다시 꾸려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갖게 된 것 같아 보여요. 집이 전혀 다른 장소가 되었겠어요. 내 집이고 내 방인줄 알았는데, 손 쓸 수 없이 통제할 수 없는 장소가 되어버렸으니까요. 정말 머릿속이 온통 흰개미로 가득찰 만 해요. 방을 화생방으로 만들어 놓으며 싱숭생숭한 마음도 너무 알겠어요. 저는 집에 바퀴벌레가 나올 때 그래요. 너무 놀라고, 가까이 다가갈 때도 궁금증보다 겁이 더 많이 나요. 그러면서도 ‘왜 나는 이 곤충을 이렇게까지 싫어하지’라는 질문이, 무서워하는 마음 옆에 딱 눌러붙어 있어요. 그래서 불편했거든요. 혐오의 상징이 되어버린 바퀴벌레가 아니더라도, 어떤 곤충이 내 몸 위로 걸어가는 상상을 하면 피부가 부르르 떨리는 것 같아요. 몸의 경계를 침해받는 기분 같기도 하고요. 음, 저는 친밀한 사람과의 스킨십은 항상 환영하는 편이에요. 길고양이는 알레르기 때문에 조심히 쓰다듬고요, 길거리의 지렁이는 기꺼이 나뭇가지로 들어 옮기는 편이고요. 저의 이런 상이한 감각들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왜 누구는 편하고 좋고 가까운데, 누구는 보기만 해도 놀라고 가까이 가기도 싫고 어려워졌을까요? 참새는 일주일 남짓한 시간이 지났는데, 여전히 벌레와의 전쟁을 하고 있어요? 사건의 시간이 길어지며 참새의 마음은 어떻게 변했어요? 이상적인 줄 알았던 귀촌의 현실…ㅋㅋㅋ 사실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에요. 저 지리산에서의 삶에 대해 기쁘고 밝은 면만 기대하며 편지를 썼던 것 같아요. 삶은 그런 모습이 아닌데요..ㅎㅎ 물론 참새가 얘기해주었듯 단지 ‘불쾌하고 짜증나는’ 경험이라고 평하는 건 아니어요. 환영받는 감각이 아니라는 의미에서요. 지구, 숲, 땅의 주기에 더 가깝게 지내는 삶은 더 크고 깊게 숨 쉴 수 있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위기의 신호를 가장 가까이에서 듣는 일이기도 하겠구나 싶어요.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주제가 되게 어려워요. 누군가 날 싫어할 수 있다는 사실은, 항상 떠올리면서 또 걱정하면서 지냈기 때문에 익숙한 감각인데요. 막상 구체적으로 누구였는지를 생각하면 잘 생각나지 않아요. 음, 아주 오래 전으로 돌아가면 선명한 기억이 있어요. 중학생 때, 초등학교 때부터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이 갑자기 저를 따돌린 적이 있어요. 정확한 이유는 몰랐어요. 사실 없었을 수도 있고요.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그때의 저는,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만 생각했어요. 어떻게 해야 있어보이고, 흥미로워 보이고, 괜찮아보이고, 말 걸고 싶을까? 가치의 위계를 포착해내는 것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고, 문제인 것도 바뀌어야 할 것도 이 모든 상황의 원인도 저에게 돌렸어요. 저의 모든 행동과 태도를 같은 반 친구들에 맞추던 그 습관이 오래 몸에 남아서, 관계에서 자주 불안을 느끼게 되었어요. 그 친구들과는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사람이 되어, 다른 관계를 맺고 있어요. 지금도 그 시절에 제가 어땠는지 속시원히 말하지는 못하지만, 언젠가 미안했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해요. 이렇게 돌아보고 인식하게 되기 전에도, 저는 계속 관계에 신경을 쓰며 살아왔어요. 가까운 이들을 챙기고, 듣고, 지지하면서요. 저는 그런 저의 태도가 더 많은 이들과 상호적인 관계를 만들어 오는데에 큰 역할을 했다고 느껴요. 한편 최근에는 그런 타인에게 열린 태도가, 제가 제 존재를 스스로를 주장하고 선명히 만드는 걸 방해하고 있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성과를 향해 달리는 메이트가 아니라, 삶을 나누는 동지가 되기 위해서는 제가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말하고 응답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사실도요. 제가 활동하고 있는 단체에서는, 우리 시대의 운동을 다른 방식으로 풀어가고자 시도하고 있어요. 특정 의제에 한정해 집중하며, 특정한 계급 또는 정체성 집단을 당사자로 기초하여, 요구하고 주장하는 방식의 운동은 더 이상 맞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에요. 더 많은 이들이 기후생태위기의 시대에서 거대한 전환의 필요성을 느끼며, 다른 무엇보다 스스로가 다르게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어요. 불평등과 소외, 착취의 구조에 기반한 우리 사회의 다양한 규범은 숱한 폭력을 만들었어요. 아직 ‘의제’로 충분히 이야기되지 않는 문제들도 너무 많지요. 그 폭력을 경험한 이들이 증언하는 일, 그 삶들을 엮어 우리 사회의 현재를 정의하는 일, 그렇게 자신과 지구의 위기를 동시에 느끼고 경험하는 이들이, 곧 바라는 세상을 직접 살아내는 이들이 되는 일을 해보고 싶어요. 세상을 바꾸는 운동의 주체에 누구든 자신의 이름으로 올 수 있다는 선언이지요. 이런 고민과 시도 속에서 저도, 제가 살아온 시간을 자연스레 다시 돌아봤던 것 같아요. 이유 모를 무시가 어떻게 제 안에 들어와, 스스로 대상화하고 폭력의 위계 구조에 익숙해지게 만들었는지를요. 덕분에 제가 왜 이 어색하고 불분명한 이름인 ‘활동가’로서 살아가고 있는지 조금씩 알아가고 있어요. 나를 살게 하는 존재들을 살리고 지키기 위해, 이제는 정말 아닌 것 같다는 신호에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그렇게 자연스럽게 정치적이고 생태적인 삶으로 흘러들어온 이들이 많을 것 같아요. 참새의 시작은 어땠는지, 어떤 일들과 감각과 관계가 연결되어 있는지 궁금해요. 편지의 답장이 아니더라도, 다음에 만나면 들려주셔요. 5월과 함께 다시 따뜻한 봄날이 되기를, 봄이라는 계절도, 참새의 방도, 생태계의 곳곳이, 각자의 구역을 안전히 보장받으며 공존할 수 있기를 바라며 편지를 닫습니다. 오늘도 굴러갑니다 데구르르- 돌이 2023.5.1
    • 지리산 오늘
    • 지리산 방랑단
    2023-05-02
  • [곡우 편지 : 유우야와 갈토] 갈등은 변화를 위한 시작점
    디자인.칩코 <갈토에게> 갈토의 축하를 받으니정말 기쁩니다. 이번에 며칠 내려가서 새 집과 짧은 인사도 나눴어요. 갈토도 이 편지를 받을 때 즈음은 보물찾기 횟수가 줄었을 것 같아요. 조금 익숙해졌나요? 편지를 늦게 보내는 것은 정말 괜찮아요!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저도 갈토처럼 지각을 원치 않는 타입이라 갈토가 얼마나 스트레스였을지 이해가 되어요. 저는 단 1분이라도 지각하면 끝도 없이 미안해집니다. 옛날 사람들은 달이뜨면 만나자, 초하루날 만나자는 등 낭만적인 약속을 했다는데, 시계 같은 저는 그게 잘 안돼서 아쉽기도 해요. 우리 서로가 그런 점에서 비슷한 마음으로 살았으니 더더욱 이 편지로 마음껏 지각해보면 어때요? 지각하는 사람도 되어 보고 늦어도 된다는 다른 마음으로도 살아보는 거지요. 하하 갈토의 인내심과 체력이더 소중하니, 일상을 찾고 나서 편안한 마음으로 편지를 쓰고 싶다면 꼭 말해주세요. 이미 그렇게 편지 기간을 기존보다 늘린 펜팔팀도 있고요! 제가 찜한 집은 펜션으로 쓰이던 원룸인데 스트로베일 하우스라고 하더라구요. 볏짚을 바싹 말리고 압축해서 만든 집이래요. 이 방식이 생태적이기도 하지만 보기에도 예쁘더라고요! 처음 알게 되었어요. 또 읍내가 가깝고 친구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점이 살고 싶은 이유였어요. 5월 회동 때 제 집과 이웃 마을인 곳에 숙소를 마련해 두었으니 갈토에게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갈토가 회동에 꼭 올 수 있어야 할텐데요. 일정이 바뀌길 간절히 바라봅니다… 이번 주제는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에요. 어찌보면 앞서 말한 시계 같은 모습과 비슷한데요. 저는 뭐든지 칼같이 나누는 버릇이 있어요. 시간도 딱 맞춰서 장소에 나와 있어야 하고, 다같이 먹어도 칼같이 나눠서 돈을 지불하기를 좋아해요. 누가 사준다고 하면 기어코 갚아야 성이 풀리고, 먹지 않은 것까지 동의 없이 내는 상황에선 몇 천원도 억울해져요. 각자 먹은 것을 돈으로 십원단위까지 나눴을 때 딱 맞게 떨어진다면 희열을 느껴요. 최근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친구랑 여러 개의 빵을 나눠 먹는데, 스콘을 양보한 친구에게 치아바타를 다 먹으라고 했어요. 제 나름은 스콘이 크기가 작지만 이 맛있는 걸 줬기 때문에 남은 치아바타를 친구에게 줘야 공평하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친구가 장난스럽게 ‘어쩜 그렇게 칼 같냐’고 하더라고요. 물론 그 친구가 저를 싫어한다는 뜻으로 얘기한 건 아니지만 자주 들은 말이었어요. 아마 세 자매인 저희 집이 싸우지 않고 오순도순 살기 위해 택한 방법이겠지요. 제 이런 점이 누군가는 부담스럽고 계산적이라고 느끼나 봐요. 그 친구는 칼보단 담는 그릇에 따라 양도 모양도 변할 수 있는 물 같아요. 제 성향처럼, 주고받는 것에 섬세한 친구와 만나면 설명할 필요가 없어요. 그 자리에서 계산도 착착 되고, 무언가의 보답으로 준비해 간 선물에 부담보단 고마움을 느껴줘요. 그럼 선물이 더 뿌듯해지고 설명이 없어도 되니 편하고 공통점으로 공감도 나눌 수 있어서 좋아요. 하지만 물 같은 친구들을 만나면 또 배우게 되네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성향이 다른 사람과 있을 때 더 뚜렷이 발견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도 얻고요. 이런 면이 어쩌면 제 작은 환경 운동의 발판이 되었을 것도 같아요. 지구가 자꾸 주는 것 같아서 보답하려고 열심히 물도 아껴 쓰고 쓰레기도 덜 소비하려고 해도 지구만큼 못 따라가요. 지구에게 부채감만 남아 있는 느낌이에요. 갈토는 어느 쪽이에요? 갈토를 싫어하는 사람은 또 어떤가요? 갈토가 말해준 ‘까다로운 마음의 문’이 떠올라요. 그 속에 까다롭게 느낄까 걱정하는 갈토의 마음이 따뜻하게 느껴져요. 그리고 그 까다로운 문이 열리는 순간은 언제였는지도 궁금하네요! 이만 마칠게요. 내일부터 봄의 마지막 절기 곡우에요! 곡우도 무사히 잘 지내보아요. <유우야에게> 유우야 덕분에 스트로베일 하우스라는 것도 알게 되네요.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예쁜 집이 많네요. 가서 보고 싶은데.. 5월 20일에 갈 수 있어야 할텐데, 지금 상황으로는 낙관적이기 어렵네요. --;;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으로! 저는 아직도 새집에 적응중이에요. 잠을 푹자지 못해서 피곤함이 점점 축적되어가는 기분이에요. 새벽에 빨래를 돌리는 분이 계셔서 그 소리에 깨기도 하고. 아직 새집의 소리와 빛에 적응이 안되네요. 예전에 비해 수면 시간이 줄었는데 몸이 그걸 또 적응하는게 신기하기도 해요. 제가 이번에 이사하면서 되도록이면 새 물건을 사지 않고 새 집을 꾸며보자는 포부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매일 당근마켓을 보면서 필요한 물건을 나눔 받기도 하고. 사고 싶은 제품이 가격이 떨어지길 기다리게 됩니다. 갑자기 이사를 가시는 분이 테이블을 나눔해주시기도 하고, 선반도 나눔 받았어요. 저도 이사갈 때 이웃에게 나눔을 해야지라는 마음으로 나눔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근마켓이 참 피곤한 곳이기도 해요. 때론 물건을 그냥 사는게 더 시간대비 저렴한 것도 같아요. 제가 사려는게 어차피 비싼 물건들도 아니고. 하지만 새 물건보다는 중고로 대체할 수 있다면 중고를 사자는 마음으로 견디는 중입니다. 물건 하나하나에 사연을 알면 더 좋겠지만, 그렇게까지는 이야기 나눌 수는 없고. 다만 나눔을 받을 때, 그 사람에게서 나에게 올 때 반가움과 나와도 잘 지내길 바라는 마음이 들어요. 나눔을 하는 이유는 다양할 거에요. 이사가는데 짐줄여야 해서, 더 이상 사용을 안 해서. 쓰레기 버리기 귀찮고 누군가 가져가주면 좋겠어서. 그냥 버려도 되지만, 필요한 이웃에게 나눔해주려면 여튼 애를 써야 하잖아요. 사진을 찍고 글을 올리고, 저는 그 마음이 항상 고맙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나눔 받을 때, 제가 뜬 삼베 수세미를 나눔해드려요. 좋아하는 분도 있고, 안 받는 분도 있어요. 삼베 수세미 하나 뜨는데 30분 정도 걸리거든요. 실도 좋은 거고. 안 받는 분은 조금 서운한데 더 필요한 분께 드리자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당근마켓에서 좋은 이웃도 만나고 황당한 이웃도 만나서 이 이야기가 길었네요. 이번 주제가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군요. 저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인 줄 알고 내가 싫어했던 사람들을 마구 떠올렸는데. 완전 다른 주제네요. ^^ 저는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과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좀 명확한 것 같아요. 저도 그렇고요.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저의 에너지를 쓰지 않아요.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에게 쓸 에너지가 늘 부족하거든요. 그래서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곧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기도 해요. 나의 세상은 나 중심으로 돌아요. ㅋㅋㅋㅋㅋ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면 어떡하지라고 전전긍긍하는 스타일도 딱히 아니고. 좀 속상하지만, 너랑 내가 스타일이 달라서 그런가보다 해요. 직장에서 나를 싫어하는 상사를 만나면 진짜 고달픈데요. 그러면 퇴사를 하죠. ㅋㅋㅋㅋ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생각났어요. 주로 저보다 직급이 높은 사람들이에요. 하하하하 제가 엄청난 ‘강강약약’이거든요. 저와의 권력관계에서 약자라고 여겨지면, 너그러운 편인데, 강자에게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상사들이 저를 주로 안 좋아해요.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하지만 가모장인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래서 자신의 권력을 마구 휘두르면서 우리는 평등조직이고 자신의 역할일 뿐, 권력에 의한 상하는 없다고 믿는 아주 꼰대 가모장들이 저를 주로 싫어합니다. 하지만 이제 저도 사회 생활의 얼룩으로 많이 순해졌어요. (저는 스스로 순둥이가 되었다고 하지만 측근들은 글쎄라고 합니다 ㅋㅋㅋㅋ) 예전에 다른 단체와 계약서를 쓰는데 저희가 갑이었거든요. 그래서 계약 조건이 우리에게 유리했어요. 저는 아무리 우리가 갑이라고 해도 단체간 계약인데 을에게 부당한 것 같아서 공정하지 못한 계약이라고 단체장에게 말했다가 진짜 제대로 폭언을 들었어요. 과거를 잘 생각해보면, 다 그런 일들이에요. 부당하게 퇴사한 다른 지부 활동가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거나, 임금 후원, 점수 평가제에 대해 논의 주제로 가져가 조직의 다른 사람들이 그 동안 관습처럼 해오던 일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고 ‘변화’를 만들지만 조직이 순탄하길 바라는 윗 분들에게는 그게 공격처럼 느껴지나봐요. 잘못된 것이었지만 계속 이어져오고 있었는데 누군가 “왜”라고 질문해주는 용기와 무대포 정신이 있던 저는 요새 점점 작아지고 있어요. 함께 일하는 동료들 중에 그래서 저에게 고마워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변화를 위한 조직내 갈등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저를 까다로운 동료라고 생각하기도 해요. 결국 혜택은 모두에게 돌아가는데 말이죠. 여러 번 이렇게 조직 내 갈등을 경험하다보니 나에게 남는 건 퇴사인가 싶고, 이제는 조용히 살자, 편하게 살자, 되도록이면 문제제기 하지 말자라고 결심하게 되요. 내가 좀 더 나은 공간으로 만들고 나는 그 곳을 나와야 되는게 억울하기도 하고. 그래서 좀더 유연해지려고 해요. 상사들과도 잘지내고 싶고. 상사가 나를 안 싫어하면 좋겠어요. 상사에게 이쁨을 받으면 조직생활이 좀 편하니까. 근데 저는 송곳 같은 사람이라, 얼마나 이 송곳을 감추고 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ㅋㅋㅋㅋ 사람들은 변화를 원하면서도 변화를 두려워해요. 갈등은 변화를 위한 시작점이잖아요. 갈등을 잘 해결하면 변화를 만들 수 있는데, 갈등을 견디는 힘이 다 다르다보니, 때론 누군가에게 저의 문제제기가 고통을 안기기도 하는 거죠. 대부분은 상사들이었지만, 상사도 사람이고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요.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책임자가 안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특히 인사권을 가진 사람은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데, 이런 사람이 특정인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면 그게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거든요. 공평하고 합리적인 상사가 될 자신 없으면 안하면 좋겠어요. 그래서 저는 안하거든요. ㅋㅋ 근데 누구나 책임자가 되기 위한 과정이 있잖아요. 그 사람이 좋은 책임자가 되도록 옆에서 기다려주고 조언을 해주는 것도 동료들 역할인 것 같아요. 같이 일하기 제일 힘든 책임자가 자질도 부족한데, 동료들의 조언에 귀를 막고 회피하는 사람. 제가 딱 싫어하고, 저를 젤 싫어하는 사람들의 유형이에요. 저는 송곳이잖아요. 문제를 발견하고 변화를 만드는 송곳. 회피하는 사람들은 송곳을 너무 싫어해요. 우리는 상극인거죠. 가끔 자리가 저 사람을 저렇게 만든 걸까, 원래 저런 사람이었을까 궁금해져요. 활동가로 살면서,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는 송곳 같은 사람들이 왜 조직 문제는 회피하는 걸까. 내가 일하는 터전이 안전하고 즐거워야 되지 않나. 여튼 저는 사회생활, 조직생활이 참 힘든 사람인데, 큰 재주가 없어서 직장생활을 해야합니다. 그래도 지금 있는 곳은 적게 일하고 적게 벌자의 저의 가치관과 맞아서 내가 원하는 삶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오래 다녀보고 싶네요. 누군가 나를 싫어한다는 걸 느끼면 자존감도 떨어지고 스스로 위축되요. 특히 그게 생계와 연결되어 있다면 끔찍하죠. 만약, 이 글을 읽는 분이 딱, 그런 상황이라면 이 세상에 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꼭 기억하면 좋겠어요. 나를 싫어하는 사람 때문에 너무 많은 감정을 소모하지 않았으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너무 아까워요. 나의 시간과 마음이 나를 싫어하는 사람 때문에 쓰이는 거. 그리고 내가 나를 좋아하면 좋겠어요. 부디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내’가 아니면 좋겠습니다. 조금씩 일상을 찾아가고 있는 갈토 드림.
    • 지리산 오늘
    • 지리산 방랑단
    2023-04-28
  • [청명 편지 : 덕복희와 산달] 유연함을 만들어내는 주파수일지도 몰라요
    디자인.칩코 <천재만재 이야기꾼 산달에게> 산달, 지난 편지를 읽고 얼마나 들떴는지 몰라요! 똥개시절 이야기의 보답이 이렇게 근사하다니, 이번 편지엔 똥오줌 못가리던 시절 이야기까지 줄줄 불어댈 뻔 했습니다. 저는 아홉시만 되면 퓨즈가 나가듯 잠이 든다고 했는데, 누군가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해준다면 잠을 순식간에 쫓아낼 수도 있어요. 산달의 이야기는 꼭 목련만큼이나 향기롭고 우아했어요. 정말 고마워요. 저도 까만 밤의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전등에 반짝 빛나는 목련에게 홀딱 반하던 순간을 기억한답니다. 여섯 꽃잎을 한 장 한 장 떼며 문법을 알려주셨다니, 꽃잎이 곱절은 많은 국화여도 즐겁게 배웠을 거예요. 봄의 새소리가 참으로 다채로워요. 산달이 사는 곳도 그렇겠지요? 새도감을 뒤적거리다가 후투티라는 이름의 새를 봤어요. 머리도 꼭 락커처럼 모히칸 스타일을 했길래, ‘와 이 새는 한국에서 보기 힘들겠지?’싶을만큼 이색적이었거든요. 그런데 새벽요가를 마치고 동이 틀 시간이 되면 꼭 바깥에서 누가 ‘구구구’하고 노래하는 거예요. 작은 드럼을 두드리는 듯이 편안하고도 차분한 목소리였어요. 누군지 알아내려고 새소리를 모아놓은 유튜브를 마구잡이로 보았는데,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후투티였던 거죠! 이렇게나 가까이 모히칸 드러머가 살고있었다니. 아직 얼굴은 만나보지 못했지만 집 근처에서 이웃들을 잘 살펴야겠어요. 전 학창시절에도 음악에 두말할 것없이 가장 재능이 없었는데, 요즘 새공부를 하자니 음악공부처럼 고역이에요. 영상으로 새소리를 달달 외우고도, 실제로 들으면 다 똑같은 소리처럼 들려요. 그런 제가 올해는 우쿨렐레를 배우기 시작했답니다. 제 옆지기가 우쿨렐레를 잘 친다는 소문을 듣고 마을 이웃 두 분이 떡과 반찬을 잔뜩 갖다주시며 스승으로 모시니 결국 얼렁뚱땅 강좌를 열게 됐어요. 그렇게 네 명이 모여 일주일에 한번 우쿨렐레를 쳐요. 햇살이 차르르 쏟아지는 이웃집댁에서 우쿨렐레를 연주하다보면 바깥에 딱새들이 꼬리를 팔랑 떨면서 창가에 앉는 게 보여요. 전 요즘 그 시간이 참 좋아요. 물론 딱새나 후투티는 제 형편없는 연주를 듣기 거북해할지 모르겠어요. 작년부턴 장구를 열심히 치고 있는데, 장구는 사실 인간이 아닌 동물들은 다들 듣기 무서워하는 것 같아요. (집회할 때는 더없이 흥이 나는 악기지만요.) 그래서 숲에서도 연주하기 미안하지 않은 우쿨렐레를 배우기 시작한 건데 여전히 조금 미안할 수밖에 없는 실력이랍니다. 산달은 어떤가요? 제가 예상한 대로라면 음악을 좋아할 것 같아요! 산달은 새공부를 해도 저보다 일취월장이겠어요. 사실 음악 얘기를 꺼낸 이유가 있어요! 저는 제가 너무 진지한 게 싫어요. 친구를 새로 사귀거나 사람이 많은 곳에 어울리기도 별로 안좋아하고요. 누군가를 만나면 시시콜콜한 이야기 나누기가 제일 숙제에요. 반드시 모든 것에 심오한 의미가 있어야하는 양 굴어요. 전 잡담이랍시고 자꾸 일 얘기를 꺼내서 친구들을 질려버리게 만드는 재주가 있답니다. 글을 쓸 때도 지나치게 거창해지곤 하는데요. 그렇게 종이 위에 우주의 진리나 세계평화를 쏟아내고 나면, 새벽에 쓴 글도 아닌데 느끼하고 부끄러워서 두번은 못읽겠어요. 전 밤 아홉시에 머리만 땅에 닿으면 즉시 잠에 드는 사람으로서 ’이불킥’을 해본 적은 없지만, 만약 한다면 이불보다 제 무릎관절을 더 걱정해야 할 거예요. 이번 주제가 ‘나를 바꾼 꿈’인데요. 평소엔 꿈을 꾸더라도 물에 그은 선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거든요. 제가 기억하는 몇 안되는 꿈들은 다들 음침하고 징그럽고 어두워요. 그런 꿈들만이 돌에 새긴 선처럼 생생하게 뇌리에 남아요. 이번 편지에도 제 꿈 이야기를 쓰자니 호러 영화를 한 편 쓰게 생겼더라고요. 심지어 그런 호러씬들 안엔 제 깊은 죄책감이 숨어있어요. ‘이렇게 사는 게 옳은 거야!‘하던 제 경직된 윤리관이 만든 꿈이죠. 로드킬 당한 고양이를 구조해 살려놨는데 목만 겨우 남아서 물을 마셔도 목 아래로 줄줄 새던 이야기, 소의 위장을 뒤집은 것으로 만든 샤워볼로 제 몸에 피칠을 하며 목욕하는 이야기 등이에요. 참고로 전 말싸움조차 없이 평화롭고 싱겁게 끝나는 영화나 드라마만 즐겨본답니다. 음악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야겠어요. 악보에서 도레미를 찾기도 헤매는 제가 노래를 만들기 시작한 때가 있어요. 제 옆지기가 우쿨렐레로 코드를 몇개 연주하면서 저에게 아무 말이나 뱉으면서 아무 멜로디나 붙이라고 한 거죠. 모든 말에 의미 부여를 하는 저에게 ‘아무 말이나 뱉으라’고 하는 건, 한 시간짜리 연설을 하라는 말보다 어렵게 들렸어요. 도대체 아무 말이 뭔지도 모르겠고, 그 아무 말에 멜로디를 붙이라니 영 쑥쓰러워서 한 마디도 못 뱉겠더라고요. 헛소리를 하거나 우스꽝스러운 멜로디를 만들어도 누구도 평가하거나 비웃지 않다는 건 천천히 깨달았어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나마 아무 말이나 흥얼거릴 수 있게 됐죠. 그래서 성다양성 축제에서 들레네교향악단이 해마다 엉망진창 합창을 선보일 수 있었는지도 몰라요. 직접 만든 어설픈 노랫말과 멜로디로요. 음악이 내내 어려우면서도, 올해 열심히 악기를 배우거나 새소리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건 이런 까닭일 거예요. 음악은 저에게 힘을 빼는 방법을 알려주거든요. 덜 진지하게 사는 방법을요. 산달이 지난편지에서 한빛이 애증의 공간이었다고 했잖아요. 사실 좋기만한 것들은 별로 없어요. 가족이든 연인이든 어떤 공간이나 기억이든, 사랑과 미움과 애틋함과 서운함이 마구 섞이는 듯해요. 그래서 저라도 산달같은 결론을 내렸을 거예요. 세상을 바꾸겠다면서 나를 미워하기보다, 그 미운 세상과 내가 서로를 만들었다고 믿어버리자고요. 모든 숨들이 섞여서 결국 다 하나라고도 믿고요. 그런데도 전 저의 진지한 모습들이 여전히 예뻐보이지 않아요. 내 꿈은 왜 다 저런 모양일까, 왜 그렇게 고리타분한 글을 쓰고야 말았을까, 제 자신이 시시해보일 때가 많아요. 이런 모습들도 제 공동창조자일텐데 말이에요. 덜 진지해지려고 하지만, 사실 정말 필요한 건 ‘진지한 그대로도 충분한’ 마음일 것 같아요. 산달, ‘명금류’라는 말 들어봤어요? 명금류는 ‘소리가 고운 새’라는 뜻인데, 참새같이 조그마한 새들을 가리킨대요. 큰 새들은 성대가 굵어서 섬휘파람새나 방울새 같이 고운 소리가 나지 않고, 거칠고 위협적인 소리를 낼 수 있죠. 이 말을 들은 제 친구가 ‘와 그것 참 좋다!’하며 감탄하는 거예요. 자신은 키가 크다고 늘 부러움을 받는데, 실은 키가 작든 크든 각자 매력이 있을 뿐 큰 게 더 멋진 건 아니라고요. 그런데 명금류는 작기 때문에 오히려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다니까 좋았다는 거죠. 아마 키가 작은 제게 해주고 싶었던 말 같더라고요. 참 다정한 친구죠? 저도 제 진지한 모습들을, 도리어 진지하다는 이유로 좋아하게 될 수 있을까요? 산달의 지난 편지를 곱씹으며 노력해봐야겠어요. 산달! 전 친구가 냉이를 잔뜩 나눠준 덕에 냉이를 안캤어요. 그런데 산달의 편지를 보니 냉이 캐는 즐거움을 제가 놓칠 뻔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냉이 꽃대가 모조리 올라오기 전에 납작 엎드려 냉이를 찾았답니다. 냉이를 보면서도, 목련과 연꽃, 산과 달, 메리올리버의 시를 보면서도 떠올릴 이가 있다는 건 참 풍요로워요. 제가 산달을 떠올리는 순간마다 산달에게 봄볕이 닿기를 바랄게요. 구례는 벌써 목련이 옷을 갈아입는 청명입니다! P.s. 감자님은 제가 자나깨나 물을 너무 열심히 갖다바치는 바람에 운명을 달리하셨습니다. 물이 많으면 씨감자가 썩으니 제발 그만 주라고 이웃분이 와서 저를 말리셨을 땐 이미 너무 늦은 뒤였어요. 감자님께 심심한 위로를… 냉이주먹밥 해먹은 덕복희가 <진지함이 사랑스러운 복희에게> 복희야말로 천재만재 이야기꾼인 것 같아요!! 새 공부 이야기도, 꿈 이야기도, 음악 이야기도 너무너무 재밌어요. 어쩜 그렇게 감질나게 풀어놓을 수가 있죠? 늘 복희의 편지를 보면서 감탄해요. 그 솜씨를 닮고 싶어요. 이제 복희의 편지를 받을 때면 다른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할머니의 손맛 듬뿍 담긴 코스 요리를 대접받는 것 같아요. 약간은 쓴가 싶더니 끝에 가서는 결국 단 맛이 입천장을 달래주는 것만 같아요. 어떤 기분인지 짐작이 가시려나요! 그런데 음악 이야기라니. 복희, 조심하셔야 해요. 저는 음악 이야기라면 10통의 편지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이나 떠들어 볼 수 있답니다. 소싯적엔 그랬어요. 지금은 그만큼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요. 그것도 한때 이야기랍니다.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쳤거든요. 엄마는 저를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부터 남들 다 가는 피아노 학원과 태권도 도장에 보냈어요. 다른 아이들은 피아노 학원 가기를 싫어하기도 하고 그러던데 저는 싫고 좋고를 떠나서 당연히 가야하는 곳이라 생각했나봐요. 한 7년차 되는 해부터 재미가 들려서 열심히 연습하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혼자 클래식 곡들도 파고, 밴드도 시작했어요.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에는 예배당이 있었어요. 그곳에는 위엄있는 그랜드 피아노 한 대가 놓여져 있었는데, 사람들이 거의 집에 돌아간 주말에는 그 피아노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답니다. 특히 해가 기지개를 펴는 새벽이나 어스름이 찾아오는 저녁, 옅은 빛에 취해 드뷔시를 연주할 때면 마치 온 세상에 저 혼자만 있는 것만 같았어요. 그런데 서울에서는 더 이상 이런 순간들을 누리기가 어려워요. 그곳을 떠난지 시간이 꽤 흐르고 나니 저는 이따금 고요한 숲 속에서 혼자 피아노를 연주하는 제 모습을 상상하고는 해요. 아! 복희의 우쿨렐레 수업 시간을 상상하니 저도 모르게 입이 귀에 걸려요. 제 안에 그런 순간에 대한 갈망이 있음을 느껴요. 우쿨렐레를 배우는 건 즐겁나요? 우쿨렐레를 연주할 때면 호흡이 줄의 진동 소리와 어우러지는 걸 느끼나요? 어려운 것은 없는지, 짜증나는 순간들은 없는지도 궁금해요. 제가 좀 들떠 보이죠? 그만큼 악기를 배우는 건 설레는 일이니까요! 사실 설레는 순간보다 답답하고 속이 터지는 순간들이 많이 있기도 하다는 걸 알아요.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종종 드는게 다반사이니까요. 음악을 한다는 건 조급함과 싸우는 일일지도 모르겠어요. 씨앗이 싹을 틔우기를 재촉할 수 없듯이, 고양이가 내 품을 편하게 여기지 못하는 걸 저어하는 일이 쓸모없듯이요. 여우가 어린왕자에게 했던 말이 옳아요."참을성이 있어야 해." 여우가 대답했다. "우선 내게서 좀 멀어져서 이렇게 풀숲에 앉아 있어. 난 너를 곁눈질해 볼 꺼야. 넌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말은 오해의 근원이지. 날마다 넌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앉을 수 있게 될 거야......”날마다 조금씩 편해지는 것, 꾸준함을 연습하는 것, 피아노가 저를 변화시키려는 힘을 환대하는 것, 저는 그러면서 세상을 배웠던 것 같아요. 사실 복희의 ‘진지한’ 이야기에 손으로 입을 막을 정도로 공감하며 읽었답니다. ‘스몰 토크’라고 하죠. 최근에 새로 만난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 내가 스몰 토크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구나 생각했어요. 막 ‘활동가’들의 네트워크 속에 들어온 신입으로서 받아들여야 할게 너무나도 많았던 저는 어쩌면 스몰토크를 사치처럼 여겼던 것 같기도 해요. 제게도 힘을 빼는게 정말 큰 숙제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최근에는 바쁜 동료와 잠시 차를 마실 기회가 있었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저는 단체 이야기, 운동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그 친구와 그런 방식으로만 소통하는 저를 미워하며 다음부터는 다른 이야기들을 좀 해보겠다고 다짐했어요. 간혹 그런 꿈을 꾸기도 해요. 꿈 속에서 저는 친구들이나 동료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막 떠드는데 제 친구들은 제 이야기를 듣는 것에 피로해하는 낌새에요. 그럴 때면 나는 왜 그들과 마음이 공명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에 날마다 실패할까 고민하게 돼요. “나의 언어가 저들에게 닿고 있지 않구나.” 복희의 표현대로 제 대화의 방해꾼 또한 ‘경직된 윤리관’인 것 같아요. 머리로는 내 윤리관을 내세우는 것보다 저들과 대화를 통해 깊은 관계를 맺는게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이렇게 깊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야”라고 자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해요. 저도 음악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볼까 해요. 복희는 좋아하는 음악가가 있나요? 전 여러 뮤지션들을 좋아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이들의 일관적인 공통점을 생각해보면 삶이 곧 음악이 되고 음악이 곧 삶이 된 사람들이더라구요. 최근에 사카모토 류이치라는 음악가를 다룬 다큐멘터리인 ‘코다’를 봤어요. 아직 다 보진 않았지만, 인상깊었던 장면이 있었어요. 사카모토는 원전 참사가 있었던 후쿠시마에 가서 쓰나미에 잠겼던 피아노를 하나 발견해요. 그 피아노를 연주하고 나서는 송장을 어루만지는 느낌이었다고 말씀하시더라구요. 그러면서 하셨던 말씀이 마음에 남아 오래 생각해 볼 문장이 되었어요. "일반적인 피아노 소리는 인간이 억지로 조율한 부자연스러운 상태인거지. 그런 억지스러움에 대한 혐오감이 내 안에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나는 자연이 조율해 준 그 쓰나미 피아노 소리가 굉장히 좋게 느껴져요.” 피아노는 보통 주파수를 나타내는 단위인 440헤르츠로 조율되고는 해요. 간혹 432헤르츠로 조율되는 경우도 있고 피아노 연주자들마다 마음대로 할 수 있기는 하지만, 각 음계의 간격이 일정하다는 것은 모든 피아노와 서양 악기의 공통점이에요. 그런데 아시아와 중남미 등의 전통 악기들은 셀 수도 없이 다양한 음계를 채택하고 있어요. 가장 낮은 음에서부터 가장 높은 음까지의 스펙트럼은 무한하니까요. 우리의 귀는 440헤르츠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어서 다른 주파수의 소리를 잘 포착하지 못할 때가 많은 것 같아요. 복희가 새들의 소리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요! 아마 저도 인간의 주파수의 귀가 너무나도 적응되어 있어 그들의 노래나 비명을 듣기 위해서 많은 훈련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사카모토의 말은 사카모토가 평생 사회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큰 힘을 얻는 것 같아요. 그의 세계는 늘 소리로 가득 차 있다고 해요. 파도소리, 빗소리, 숲의 소리들을 길어내 음악으로 만들어내는 그가 저는 참 놀라웠어요. 원전을 반대하고 삼림 보호를 위한 그의 행동과 숲 속에 들어가 그들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모습이 많이 겹쳐보여요. 어쩌면, 우리가 ‘듣지 않음으로써 듣지 못하게 된’ 소리들을 들으려는 하나의 태도에서 비롯된 일관된 삶일지도 몰라요. 그를 잘 알지 못하지만, 그의 삶은 참 아름다워요. 새들을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해요. 나무도, 풀들도, 곤충들도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인데, 우린 종종 놓치는 풍경이죠. 그래서 우리가 듣는 소리들은 하나의 주파수가 아니라 여러 주파수들의 화음일거에요. 숲마다 어떤 공명이 발생하는지 지켜보는 것도 재밌어 보이네요! 어쩌면 복희의 진지함도 우리의 유연함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주파수일지도 몰라요. 그리고 전혀 어울리지 않은 복수의 소리들이 어우러져 간혹 협화음을 만들어내는 순간들이 있잖아요. 그런 순간은 아주 가끔이어서 우리에게 희열을 주곤 해요. 궁금해요. 복희의 진지함은 어떤 순간들에 화음을 만들어내나요? 오늘 아침, 짬내서 책을 읽다가 발견한 문장이 맘에 들어서 그걸로 편지를 마무리해요. 복희가 제게 선물해준 문장에 대한 보답이에요. 제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든 저의 아름다움을 알려줘서 고마워요. 아름다운 하루 보내세요! "내가 생각할 때,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 바로 그것이 된다” -미셸 셰르- p.s. 씨앗 잘 받았어요! 해바라기, 목화, 분꽃, 메리골드 모두 잘 모시겠습니다. 그들이 피어날 때 생각나게 해줄 사람이 되어주어 고마워요. 함께 삶을 연주하고픈 산달이
    • 지리산 오늘
    • 지리산 방랑단
    2023-04-21
  • [청명 편지 : 참새와 돌] 스스로 재생할 수 있도록
    디자인.칩코 <청명편지, 돌에게> 아아 돌,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편지에 쓰인 말들로 돌의 하루를 자세히 다 알 순 없지만 그게 뭐가 중요한가요, 그저 모두 다 괜찮다고 안아주고 싶어요. 포옹과 온기를 편지에 마음 담아 보내니 잠시라도 눈을 감고 받아주세요. 끈덕지게 늘어지고, 축축 처지는 몸과 마음을 겨우 부여잡고, 밖으로 나와 자신을 세워두는 돌이 안쓰러웠다고 제가 감히 말해도 될까요? 동시에 우리의 펜팔이 멋진 문장을 만들어내기 보다 솔직한 삶의 일부를 들려주기 위한 것임을 상기시켜준 돌에게 위로를 받기도 했고요. 이번 돌의 편지를 보면서 ‘앗 내가 쓰고 싶었던 말들인데, 우리 참 닮았다!’하는 부분들이 많았어요. 나도 비염인인데 그래서 향에 무감했겠구나 하는 뒤늦은 깨우침도 있었고, 바닥과 혼연일체가 되어야만 하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것도요. 돌의 몸은 좀 더 누워있자고 하는 것 같은데 돌의 마음은 누우면 더 우울해지니 그러지 말자고 하는 것 같네요. 사람들 사이에서 눈을 반짝거리는 돌의 바깥세상과 바닥에 누운 채 별 수 없이 무기력함을 느끼는 돌의 심연이 꼭 낮과 밤처럼 여름과 겨울처럼 꽃과 낙엽처럼 느껴져요. 제가 사는 구례는 지금 벚꽃축제가 한창이에요. 사람들은 정말 꽃을 좋아해요. 여러 꽃들 중에서도 특히 눈이 부실정도로 희고, 화려한 벚나무를, 그것도 한 그루만으로는 모자라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쭉 이어지는 꽃길에 다들 홀려 있어요. 저도 마찬가지로 꽃을 보느라 가던 발걸음을 종종 멈춰서요. 매년 벚꽃축제를 여는 구례에 살게 된 덕분에 꽃을 구경하러 찾아온 손님이라는 뜻의 ‘상춘객’이란 단어를 올해 처음 알았어요.(제 모자란 어휘력에 돌이 너무 놀랐지 않기를 바라요.ㅎ) 단어가 있을 정도로 인간들의 꽃구경은 유구한 역사를 지녔구나 싶었어요. 겨우내 가장 길었던 밤을 지나 해의 시간이 다시 길어지며 찾아오는 봄, 그리고 그 봄에 피어나는 꽃이 반가울 수밖에 없겠죠. 그토록 보고 싶을 만큼 생긴 것도 예쁘고, 꽃비가 되어 떨어지는 모습조차 예뻐요. 그런데 저는 올해 벚꽃을 보며 예전만큼 감탄스럽지가 않더라고요. 사방천지가 벚나무라 벌써 질려버린 걸까? 그건 아닌데, 왜 그럴까? 잠시 고민해보니 올해는 벚꽃 피기 전부터 봄을 알리는 신호들을 이미 많이 만났더라고요. 더욱 세차진 개울물 소리, 꽃씨를 심어둔 모종에 싹이 올라오는 모습, 하루가 다르게 맨바닥을 덮어가는 초록 풀들, 그리고 거기에 핀 좁쌀 크기의 꽃들, 앙상했던 나뭇가지에 연둣빛 잎이 총총히 뿌려진 모습, 더욱 풍성해진 아침 새소리, 날씬해진 참새 얘기는 제가 벌써 했지요! 이러니 벚꽃만 쭉 줄지어있는 도로가 보기에 예쁘긴 해도 어색해졌어요. 아마 이 어색함은 ‘여기 작은 풀들도 조용히 봄을 알려오고 있었는데..’하는 아쉬운 마음 같아요. 그리고 꽃이 다 지고나면 발걸음을 뚝 끊을 상춘객들에게도 미리 서운한 마음이 들었어요. 누가 봐도 빛나고, 아름다운 것에만 관심 주는 세상에 대한 괜한 심술일까요? 돌, 돌이 바깥에서 느꼈을 의지, 열정, 희망은 돌이 어두운 밤의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도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해가 물러간 뒤라 눈에 잘 띄지 않아도 분명 돌의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피어나고 있을 거예요. 잠든 새 키가 크는 아이처럼, 꽃이 진 후에 맺힐 수 있는 열매처럼, 빛바랜 이파리를 모두 떨어트리고, 볼품없어 보여도 어느새 꽃눈을 품고 있는 나뭇가지처럼.. 하루 종일 데구르르 굴러다녔을 돌이 비로소 멈춰 선 밤이 그래 보여요. 어쩌면 저는 제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돌에게 해주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신기하게도 우리는 타인을 위한 기도를 할 수 있게 되는 순간 자기의 문제에서 해방되는 것 같아요. 다시 한 번 솔직한 일상을 공유해주어서 고마워요. 돌의 편지를 읽을 때면 돌이 가진 단단함에 기대어 제가 참 든든했어요. 그러니 좀 쉬면 어때요?! 지리산을 마음 한 켠에 품음으로서 소망하는 세상에 한 발 가까워졌다 말하는 돌의 열정과 희망을, 반짝 반짝 빛나던 순간들을 천천히 더 듣고 싶어요. 그러려면 굴러가는 돌을 곁에 붙잡아둘 수밖에 없겠어요!ㅎㅎ 이번 청명편지는 정해진 주제로 쓰지 않고, 그냥 하고 싶은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했어요. 하루 빨리 응답을 보내고 싶었나 봐요. 돌도 저도 어제보다 조금 더 평안한 저녁시간을 보내고 있기를 간절히 기도할게요. 편지 쓰기가 힘들만큼 바쁘고 지칠 때면 망설이지 말고, 얘기해줘요 기간을 조정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 이만. 짹짹! 2023.4.2. 참새로부터 <참새에게> 참새, 괜찮다는 토닥임으로 시작하는 편지라니.. 제 속에 울음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읽다보니 울컥했어요. 지난 춘분 때 나름 안정을 다잡으며 책상 앞에 앉았고, 그렇게 편지를 쓰며 작은 평화를 찾았었어요. 그럼에도 제 끈덕진 기분들이 여실히 참새에게 다 전달됐나봐요. 편지를 통해 떠나보냈던 걸까요. 2주가 지나 저는 바닥에 딱 붙어있지 않을 수 있게 되었어요. 참새의 편지를 받은 날부터 몇번을 다시 들여보면서, 그때마다 제 상태가 조금씩 달라져 있는 것도 신기해요. 참새, 저의 눈빛과 바깥세상을 또 무기력과 심연을 연결해 일러주고, 낮과 밤, 여름과 겨울, 꽃과 낙엽으로 불러주어 한 번 더 고마워요. 스스로도 믿지 못한 의지, 열정, 희망에 이름 붙여주어 고마워요. ‘볼품없어 보여도 어느새 꽃눈을 품고 있는 나뭇가지’처럼 봄을 맞이하고 있다고 생각할게요. 제 몸의 소리를 그렇게 들어야겠어요. 저로서는 스스로에게 할 줄 몰랐던 벅찬 말들을 참새는 매번 해주어요. 봄이에요. 불이 나고 비가 왔다가 갑자기 추워지기도 하는 이상한 봄이지만요. 저도 상춘객은 이번에 처음 알았네요! 봄을 알리는 신호라며 참새가 전해준 신호들을 세 번 곱씹어 읽었어요. 개울물, 싹, 풀, 꽃, 연둣빛 잎, 새소리, 날씬해진 참새까지. 지리산 자락 구례에서의 봄은 이렇구나. 참새가 만나는 봄은 이런 장면들이구나. 열심히 이것저것 떠올리며 읽었어요. 그저, 들려주어 고마운 마음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꽃이 빨리 피고 또 지는 일이 왜 문제인지 알려주는 뉴스를 봤어요. 저만 벚꽃이 빨리 폈다고 느끼나 했는데 실제로 그랬나봐요. 오며가며 사진도 찍고 꽃구경을 했었고, “너무 빨리 폈어, 이상해!”라는 친구의 얘기에 “그러게”라고만 답했었어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맞았어요. 이른 개화가 꿀벌과 멸종 위기 식물들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 있대요. 기온은 빠르게 상승해 나무의 꽃은 일찍 폈지만, 땅속 온도는 천천히 오르기 때문에 땅속에서 월동을 하는 많은 야생벌들이 아직 나올 시간이 아니라는 거죠. 벌은 먹이활동을 할 수 없고, 꽃과 식물들은 그만큼 수분을 못하겠지요. 적어도 내년까지는 영향을 미치는 일인 거예요. 기온이 오르는 것처럼, 위기의 징후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늘어만 나는 것 같아요. 얼마 전에는 전국적으로 크게 화재가 났지요. 지리산은 괜찮았는지 걱정하고 있었는데, 마침 방랑단이 칩코의 일기와 기자회견 소식을 올려준 것을 봤어요. 나무들이 타는 냄새부터 부고 소식까지 20년 사이 최대규모라는 게 느껴져 마음이 무거웠어요. 무엇보다 화재가 자꾸 커지는 죽음의 연쇄를 끊기 위해서는, 숲이 스스로 재생할 수 있도록 놔두는 일이라는 말이 감사했어요. 우리는 매년 산불이 날 때마다 같은 얘기를 하는데 왜 재난은 자꾸 반복될까, 하고 암담하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더 선명하게 말해주는 이들 덕분에 다짐할 수 있어요. 무엇보다 제가 지리산보다는 정부와 (거리 상으로도, 관계에서도) 가까이 있음을 느끼는 지점이기도 했어요. 숲이 어떻게 회복하는지를 자주 들르며 옆에서 본다면, 저도 마음 깊숙이 재생을 믿고 숲의 지혜를 말할 수 있을까요. 특히 근래에 저는 더 많은 이들이 다른 무엇이 아닌 자신의 삶으로부터, 사회-세상을 만나고 반응해온 경험으로부터, 바라는 상으로부터 언어를 만들어가길 바라며 애쓰고 있어요. 다른 이들의 삶에서 우리 사회의 모순, 아픔, 폭력을 보면서 동시에 제 삶에는 그러한 가치를 부여하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제 이야기가 정말 다른 생의 목소리와 공명하고 있나하고 물음표를 띄우기도 해요. 그럴 수록 제 가치를 의심하기보다는, 공명하는지 직접 찾아가고 호흡과 소리를 맞춰보고 듣고 대답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어요. 방랑단이 방구일기를 통해 전해주는 지혜들이 저에게는 응답하고 싶은 이야기들이에요. 저도 이번 편지는 주제와 무관하게 썼어요. 참새와 방랑단의 이야기에, 지구 곳곳에서 나는 소리를 차분히 마주하는 일에 집중했어요. 일찍 도착한 편지를 받자마자 읽고선 쓰고 싶은 이야기를 한 가닥 적고, 다음 날 다시 곱씹고서 또 한 가닥 적고, 그렇게 마지막 날 오늘 완성했어요. 한 주를 꼬박 같이 한 편지를 보내보아요. 서울은 오늘 강풍이 불어 조심하라던데, 일상의 것들은 튼튼한 뿌리로 버티고, 둥둥 떠다니는 잡념과 어려움은 같이 날아가길 바라봅니다. 참새의 평화를 전하며, 굴러가요 데구르르- 4월 11일, 청명, 참새에게 일곱번째, 돌
    • 지리산 오늘
    • 지리산 방랑단
    2023-04-18
  • [청명 편지 : 유우야와 갈토] 나를 위해 내가 만들어 낸 꿈일까요?
    디자인.칩코 <갈토에게> 갈토~ 안녕하세요! 아마 새로운터전에서 읽고 있겠지요? 발굴 조사도 해보고 선생님도 해보고, 갈토는 경험도 많고 냄새에 대한 추억도정말 많네요!‘ 전쟁같은,욕망이 분출하는 냄새’라는 표현력이 참신해서한참 웃었습니다. 여고였던 저도 체육시간이 지난 다음 수업에서는 냄새에 민감해진 서로를 건드리지 않는 암묵적 룰도 있던 것 같아요. 그만큼 청소년 때 뛰놀던 냄새는 잊을 수 없지요. 발굴조사를 할 때 토지신에게 기도를 드리기도 한다는 것을 갈토를 통해 처음 알게 됐어요. 갈토처럼 저도 비슷한 입장이어요. 개발되어야만 했는가 하는 마음이요. 콘크리트 바닥을 걷거나 높은 건물들을 보면 종종 상상해요. 옛날에 이곳은 어떤모습이었을까 하고요. 그러다보면 한번도 보지 못한 그 땅들이 그립기까지해요. 역사적 자료를 소중하게 대하는 것처럼, 흙도 나무도 유기체도 그렇게 존중받으면 좋겠어요. 이번 주제는 ‘나를 바꾼 꿈’이네요.전 꿈을 생생하게 꾸는 편인데요. 이 주제를 듣고 바로 떠오른 따끈한 소식이 있어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구례에 집을 얻게 되었어요. 구례는 늘 빈집이 생기면 의정부장인한과(지금 먹고 싶네요.)티켓팅의 속도만큼 순식간에 팔렸는데요. 이번엔 정말 기쁘게도 제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3년을 기다린 보람이 들어요.저도 봄까지는 이곳 생활을 마무리 짓고, 여름부터는 지리산에서 살 것 같아요.드디어 저도 정착하나봐요. 계약을 다 마쳤음에도 사실 못 믿겠는 심정이에요. 갑작스레 다른 세입자가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것만 같고요. 그래도 어떻게 집을 꾸릴지 생각하며 설레는 요즘입니다. 신기한게 있어요. 제가 집을 얻은 당일, 지리산의 한 친구네서 자다가 똥꿈을 꿨다는 거에요. 정말 작은 똥이긴 했지만 만지기까지 했어요. 일어나서 잠이 덜 깬 상태로꿈을 더듬으며 친구들에게 나불나불했는데 그날 밤 그렇게 빈집 소식을 들었어요. 검색해보니 똥꿈은 재물과 관련되었다고 하더라고요. 진짜 예지몽이었던걸까요? 저는 턱이 다물어지지 않는 꿈, 머리카락 여기저기에 불이 붙는 꿈,귀신이 일주일내내 쫓아오는 꿈, 살아있는 돼지를 만지는 꿈등 기억에 남는 꿈이 많은데도꿈해몽과 맞는 일이 일어난 적은 없었거든요. 제가 의식하지 못했던 걸지도 모르겠어요. 이번 똥꿈을 꾸고는 저에게도 예지몽이 있구나, 기적이 오는구나! 생각했답니다. 참 꿈이라는 게 사는데 소소한 재미를 주는 것 같아요. 그냥 잠자고 일어나는 것보다 꿈꾸고 일어나면 하나의 이야기를 밤새 겪고 온 기분이 들어요. 꿈이 감정상태 파악에도 도움이 되고 예지도 해주고요. 언제는 명상센터에서 열흘간 진지하게 명상을 했었는데, 저뿐만 아니라 수련생들 대부분이 꿈이 생생해지는 경험을했었어요. 명상을 하면 정신이 또렷해져서 꿈도 선명해진다고 지도법사님께서 말씀해주시더라구요. 재밌거나 원하는 꿈을 꾸면 내용을 잇고 싶어서 다시 자기도하고, 정말 일상에 재미도 주지만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영역이에요. 갈토는 이사 무사히 마쳤나요? 동네 구경도가보셨나요? 이사하기전과 또 다른 마음일지 어떨지 궁금해요. 터전을 옮기고 적응도 해야하니 마음이 뒤숭숭하기도 하겠지만 다양한 냄새로 추억을 간직하는 갈토에게 또 새로운 냄새들이 찾아오길 바랄게요! 그리고 <지구 끝에 온실>책을 추천해주어 고마워요. 주변에서 정말 많이 읽어 보라고 한 책인데, 제가 책과 워낙 못 친해서 아직도 미루고 있었거든요… 갈토마저 추천해주니 이번에야말로 꼭 읽어야겠어요. 그럼 갈토, 화창한 4월 보내세요. 이만 유우야드림. <유우야에게> 유우야~ 드디어 지리산에 살게 되시는 군요. 축하축하 축하드립니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터전 마련이니, 얼마나 좋으실까 싶습니다. 많이 설레고 긴장도 되시죠? 저도 이번에 전세계약 할 때, 좀 큰 돈이라 얼마나 긴장했나 몰라요. 이 돈이 다 집으로 들어가다니 하면서. ㅋㅋㅋㅋ 어떤 집을 터전으로 찜하셨는지 궁금하네요. 저는 새로운 터전에서 첫 편지를 씁니다. 하지만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아서 어수선해요. 약 2주간 짐싸고 정리하고 일도 하고 친구와의 약속도 지키느라 너무 피곤하네요. 제가 갖고 있는 물건이 참 많더라고요. 매일 보물찾기를 하고 있어요. 이걸 어디다 뒀더라, 새로운 공간에서는 어디에 둬야하지 등, 그동안 익숙해졌던 리듬에서 벗어나서 일상의 아주 작은 것들의 위치가 모두 변하니 기억을 해야할 것들도 많고 몸도 많이 움직여야 하네요. 아직은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매일 매일 변화를 조금씩 흡수하고 있습니다. 감사 일기도 밀려서 일주일치 쓰고 어떤 날은 포기도 하고. 빨리 일상을 찾고 싶네요. 그래서 답장도 늦어졌어요. 좀더 일상을 찾은 후 편안한 마음으로 편지를 쓰고 싶은데 아직도 정리가 안 끝났고 저의 인내심과 체력이 바닥을 보이고 있습니다. ‘나를 바꾼 꿈’이라, 가장 기억나는건, 죽은 사람을 만나는 꿈인 것 같아요. 십년도 전의 일이라 이제 꿈은 생생하지 않은데, 갑작스런 죽음에 가족들이 많이 힘들어했어요. 세상은 어떻든 돌아가고 사람들은 웃고 즐기는데 그때는 어떤 것도 즐겁지가 않았어요. 이별로 인한 슬픔과 고통이 얼마나 오래갈지 그 깊이를 알 수 없어 어둠에 갇히지는 건 아닐지 두렵기도 했고. 몇 달이 지나고 꿈에서 만났을 때, “나는 괜찮아”라고 말해주며 편안해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났어요. 내가 참 그리웠구나, 나에게 괜찮다고 다시 만날때까지 잘 지내라고 이렇게 인사를 해주러 왔구나 싶더라고요. 그리고 그의 몫까지 더 재미있게 열심히 살아내는게 내가 그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이나 에세이에 보면 죽음으로 인한 이별로 슬픈 사람들이 종종 꿈에서 그 사람을 만나고 위로를 받기도 하고 인사를 나누기도 하는데, 제가 그걸 경험한 것 같아요. 신비롭고 귀한 경험이었어요. 나를 위해 내가 만들어 낸 꿈일까요? 아니면 꿈이 그를 만날 수 있는 다리 연결을 해주었던 걸까요?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한 큰 상실감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꿈에서라도 인사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저는 정말 큰 위로가 되었거든요. 꿈에서라도 만나서 너무 반갑고 너무 슬펐던 꿈, 나를 살게 한 꿈이었는데, 오랫동안 잊고 지냈네요. ^^ 저는 꿈을 많이 꾸고 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에요. 무언가 초긴장, 스트레스가 많을 때는 꼭 지각하는 꿈을 꿔서 일찍 일어나요. 제가 무언가에 지각을 싫어하는 타입이라서 꿈에서 지각하면 그 상황자체로 엄청 스트레스를 받게 되거든요(이번 답장을 제때에 쓸 수가 없어서 스트레스가 꽤 되었습니다 --;;). 꿈에서 이미 1차 스트레스를 받고 피곤한 몸을 일으켜 세운 덕분에 지각을 하지는 않게 되는 것 같아요. 꿈이 일상과 연결되고 데자뷔 같을 때도 종종 있어요. 그래서 저는 꿈을 다 기억하고 싶은데, 잊어버려서 속상할 때도 있어요. 꿈을 해석하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내 꿈이 괴이하기도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꿈을 덜 꾸고 좀 더 숙면을 취하고 싶다는 욕망도 있지만 이 꿈들이 사라지면 자는 동안 심심할 것도 같아요. 자는 동안 여러가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나의 이 작은 머릿속이 참 용하기도 하거든요. ‘너는 쉬지도 않니? 안 피곤하니?’ 라는 생각이 들정도. ㅋㅋㅋ 그리고 꿈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기도 해요. 예전에 헤어진 연인이 1년 내내 꿈에 나와서 정말 잠드는 게 싫어질 정도 였거든요. 제 생애에 그렇게 꿈에 자주 등장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제가 그 헤어짐이 감당이 안되어서 였는지. 1년을 괴롭히더니, 제가 다른 사람을 만나려고만 하면 꿈에 나타나서 저의 새로운 만남을 방해했습니다. 이전 관계에서의 감정을 정리 못한 것이 꿈을 통해 들통나서 새로운 인연을 맺는게 잘 안되더라고요. 내 안의 욕망이었던 것도 같아요. 새로운 만남을 시작할 용기도, 욕구도 없었는데 주변에서 소개해준다 만나봐라하면, 만나는 보는데 마음 깊숙이에는 ‘아직’ 누군가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줄 때가 아니었던 거죠. 마음이 좁은 건지, 문이 까다로운건지, 여튼 마음의 문 참 못 열어줘요.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전연인이 꿈에 나타났는데, 막판에는 호러로 끝맺음을 맺었습니다. 꿈의 내용이 부적절하여 공개할 수는 없는데, ^^ 여튼 저의 꿈의 세계는 놀랍답니다. 편지 마감일에 도저히 생산적인 글쓰기가 어려워 아침에 일찍 일어나, 겨우 답장을 마칩니다. 쓰다보니 생각나는 꿈이 여러있는데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편지가 조금 늦어진 점 양해바랍니다. 요새 산불이 너무너무 많이 나서 걱정이 많습니다. 너무 건조하고 바람도 많이 불어서 인 것 같은데, 더 이상은 산불이 나지 않으면 좋겠네요. 무사하고 즐거운 4월을 보내세요.
    • 지리산 오늘
    • 지리산 방랑단
    2023-04-13
  • [춘분 편지 : 토토와 가로] 불쑥 또 찾아와 주길
    디자인.칩코 <가로에게> 오늘은 사람들과 화엄사 계곡에 나무를 보러 다녀왔어요. 혹시 그거 알아요? 나무 줄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표정들을 찾을 수 있어요. 아까시나무 잎자리는 양쪽에 달려 있는 가시와 어울려 꼭 도깨비 얼굴 같기도 하고, 물오리나무는 잎자리는 꼭 웃고 있는 아이 얼굴 같기도하고요. 가래나무에는 음매~하는 염소 얼굴이, 합다리 겨울눈은 꼭 강아지 발처럼 생기기도 했어요. 누가 또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하고 찾아보는 재미도 있어요. 잎도 다 떨어지고 벌거벗은 초라한 것이 겨울나무라고 생각했는데, 겨울 나무에는 재미있고 신비로운 것들 투성이에요. 겨울이 아니면 보기 힘든 것들이기도 하지요. 화려한 잎을 다 떨구고 지나온 역사를 온전히 꺼내 보여주는 것이 겨울나무인 것 같아요. 2년전 끝눈의 흔적, 잎이 달려 있던 자국, 불안해서 내밀어보는 맹아, 동물친구들이 시원하게 등을 긁었던 흔적도. 나무 한그루에 온갖 이야기가 들어있어요. 겨울 나무 친구를 사귀게 된 것은 제 일생에 가장 운이 좋았던 일이에요. 덕분에 숲에서 눈인사를 건네는 친구들이 많아졌어요. 산달리기를 좋아하는 가로에게도 겨울 나무 친구들을 만나는 것을 문득 추천해주고 싶었어요. 산달리기를 하며 응원을 건네주는 나무 친구들이 많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일 것 같네요. 겨울눈을 들여다보던 사이 봄이 성큼 다가와있네요. 옷을 가볍게 입고 외출할 수 있다는 것에 참 감사한 매일이에요. 따뜻한 햇살이 함께 걸어주는 산책길이 외롭지 않아요. 바람을 타고 오는 매화 향기가 최면을 걸어오는 것처럼 눈을 감게하기도 하고요. 눈을 감으면 타임머신을 타고 어릴 적 외할머니댁을 향해 혼자 걷던 뚝방길로 데려가주어요. 외할머니댁에 가는 일은 늘 설레는 일이었어요. 초등학교에도 들어가기 전에 차로 1시간이 넘게 걸리는 곳을 홀로 버스를 타고 정류장에서 내리면 40분이 넘도록 어두운 시골 길을 걸었던 날이 기억이 나요. 용감하게도 7살 아이가 혼자서 외할머니댁을 찾아가던 길을 매실나무 꽃 향기가 그 길을 외롭지 않게 함께 걸어가주던 기억이에요. 무사히 외할머니댁에 도착했던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겼던 날이었어요. 여전히 혼자 걷는 길 위에 늘 누군가 나와 함께 해주고 있다고 믿어요. 매화꽃 향기일수도 있고, 은은한 달빛일 수도 있고, 개굴개굴 개구리 소리로. 가로에겐 어떤 잊을 수 없는 향기가 있나요? 봄날의 기운을 담뿍 담아 토토 <토토에게> 토토 전 매일 토토가 보내준 편지를 밤마다 읽지만, 오늘이 가장 편안한 밤인 것 같아 편지를 써요. 오늘밤 토토는 어떤 밤을 보내고 있을까요. 아, 잊을 수 없는 향기라 잊을 수 없는 향기,, 다 잊은 것 같으면서도 어느 날 내 심장을 쿵하고 멈추게 하는 그런 때가 간혹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정말 많이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람의 향기를 가진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정말 미안하지만 당신은 그 향기가 참 안어울리네요,, 나를 욕해도 좋아요. 그 향기는 내가 정말 많이 사랑했던 사람의 향기라서요... 조금은 못되고 이기적인 생각을 해요. 나는 내 사랑이 너무도 특별한가봐요. 내 소중한 내 사랑을, 내 추억을, 내 향기를 그대로 잃어버리지 않고 기억하고 싶어서, 오래오래 내 심장을 쿵하고 멈추게 하고 싶어서. 참 신기하게도 향기라는 것은 단순히 냄새만을 뜻하는건 아닌거 같아요. 냄새 속에 담겨진 나만의 이야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오래오래 잊지 않고 그리게 될 기억, 추억. 결국 나는 당신을, 그 시간을 다시 사랑하게 될 것을 왜 알지 못했나, 결국은 나를 잊지 않게 되는 것. 그런데 글을 쓰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또 있네요. 잊을 수 없는 향기는, 내가 오래전 잃어버린 향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잃어버렸다가 찾지 못한 그런 향기. 그래서 내가 먼저 찾지는 않지만, 너무나 그리워하는 거 같아요. 토토 우리의 질문이 좋아하는 향기가 무엇인지를 물었다면 우리의 대답이 조금은 달랐을거에요. 우리가 좋아하는건 왠지 닮았잖아요. 우리는 나무들도 좋아하고 숲도 좋아하고 산도 좋아하고 봄, 여름, 가을, 겨울 가리지 않고 계절을 다 좋아하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나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토토는 겨울나무의 표정도 찾아주고 이름도 찾아주고, 지금은 그들의 향기가 제일 좋은데, 지금의 향기를 잃어버릴까봐 걱정도 되고. 한편으론 또 우리가 진짜 그리워하는 추억하는, 잊지 못하는 향기는 왠지 사람의 따듯한 온기 같기도 하고 그런 생각이 드네요.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잊을 수 없는 향기, 불쑥 또 찾아와주길. 너무 외로워지기전에. 토토의 천천한 봄밤을 기도하며, 가로가
    • 지리산 오늘
    • 지리산 방랑단
    2023-04-10
  • [춘분 편지 : 덕복희와 산달] 서로가 서로를 만들어내는 이야기
    디자인.칩코 <웃음을 선물하고 싶은 산달에게> 산달, 제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 목련이에요! 목련님을 닮았다니 입에 바른 말이라도 기쁘네요. 백목련의 겨울눈은 털이 보송보송하고 엄지손가락만큼 커다란데요. 전 그 겨울눈만 봐도 첫사랑을 만난 것처럼 심장이 두근두근거린답니다. 구례는 꽃이 셀 수 없이 피었어요. 매화, 살구, 산수유, 명자나무, 생강나무, 히어리, 목련… 며칠 전엔 냉이 좀 캐다 먹으려 했더니 벌써 꽃대가 다 올라온 거 있죠. 저처럼 빈틈투성이 농부는 구례 같이 따뜻한 곳에서 지내면 봄에 눈코 뜰 새가 없어요. 이틀 전은 햇살이 좋아 섬진강 쪽으로 산책을 하다 이웃 할아버지를 만났는데요. 할아버지께서 냅다 “감자도 안심고 어딜 돌아댕겨?”하면서 호통을 치셨어요. 감자 심는 철에 농부식 인사인가 봅니다. 감자를 안심고는 어딜 돌아댕길 수 없는 것이죠. 결국 어제 아침 해가 뜨자마자 감자를 심었어요. 제 씨감자들은 작년에 제가 키운 분들인데, 너무 작아서 제 콧구멍에도 들어갈 지경이에요. 올해는 방울토마토보다는 컸으면 좋겠다고 소원을 빌었어요. 산달! 제 어릴 적 별명은 똥개였어요. 사실 가족들은 아직도 저를 가끔 똥개라고 부른답니다. 동네 어린 개가 똥을 초코파이인양 야무지게 먹는 것을 보면 절로 탄식이 나오는 제게, 이 별명은 어디가서 말하기 썩 명예롭진 않은데요. 실은 제가 어릴 적부터 잔병치레가 하도 많아, 이웃집 할머니께서 ‘똥개들은 아무거나 먹어도 건강하니 똥개라고 부르면 낫는다’는 특별처방을 내려주신 유래가 있답니다. 그후 마법처럼 잔병이 덜했대요. 어릴 적 전 제가 정말 똥개인 줄 알았던 것도 같아요. 코딱지도 잘 먹고 종이나 흙도 먹으면서 컸어요. 엄마랑 아빠 몰래요. 그러다 어느 봄즈음에 뒷산 너머 마을로 언니랑 놀러갔다가 길을 잃었어요. 그때 제가 글쎄, 냄새로 집을 되찾아왔어요. 아까 이 근처에서 꽃냄새가 났고, 그 다음에 공사장 냄새, 그 다음에 개울가 물비린 냄새… 냄새를 지도 삼아 그걸 거꾸로 셈하면서 되돌아 온거죠. 그날 저녁 언니가 가족들에게 ‘내 동생이 정말로 똥개가 됐다’며 무용담을 늘어놓았어요. 그날만큼 기분이 우쭐했던 적도 없을 거예요. 이번 주제가 ‘잊을 수 없는 향기’에요. 전 이날이 꼭 색이 바랜 필름사진처럼 기억이 나요. 어떤 냄새였는지 선명하진 않은데 괜히 알 것 같은 기분이에요. 요즘도 구례의 봄꽃이 핀 낡은 마을길을 돌면, 꼭 서울 신림동의 그 판자촌으로 돌아가 있어요. 아마 그 판자촌은 사라졌을지도 몰라요. 재개발이 됐을 법한 동네였으니까요. 2020년도 섬진강 수해 이후, 구례군은 제방을 높인다고 모든 지천마다 벌겋게 파헤쳤어요. 강변을 걸으면 꽃냄새나 개울가 물비린 냄새는 없고 공사장 흙먼지 냄새만 나요. 포크레인을 피해 떠난 물살이들은 저처럼 냄새로 이곳을 기억하다가는 길을 영영 잃을 지도 모르겠어요.그들의 집도 ‘재개발’된 셈이니까요. 제 이야기가 길었어요. 실은 산달이 바쁘고 지친 나날을 보내는 것 같아 즐거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어요. 제가 아는 웃긴 얘기라곤 똥이나 코딱지 얘기 뿐인가 봅니다. 다음 번엔 좀 더 세련된 유머를 고민해볼게요. 그렇지만 설사 다음 번에도 또 방구 얘기 따위를 해도 웃어주기로 해요. 저는 하루종일 침대에서 뒹굴거리다 제 편지를 읽고, 한껏 게으름을 피우며 느긋한 편지를 썼다는 산달의 답신이 오기를 응원할게요. 지난 경칩편지의 이야기를 아주 소중하게 읽었어요. 누구에게나 착한 아이가 되려고 노력하고, 외투를 벗기는 건 햇살이라고 믿다가도, 책을 읽고 문득 세상에 실망하고, ‘네가 너라서 좋아’라고 말하기를 연습하는 이야기요. 치열하면서도 애타게, 또 스스로 엄격하면서도 타인을 사랑하기를 실패하지 않은 이야기 말예요. 전 산달이 스스로를 잘 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에게 자신을 알아차리기란 결코 쉽지 않거든요. 산달은 자신을 선명하게 마주하고도 흔들리지 않아보여요. 지난주에 구례 옆동네 하동에서 큰 산불이 났어요. 주민이 집에서 태우고 남은 잿가루를 산에 퇴비삼아 주시던 게 원인이 되었죠. 숲의 존재들이 무사한지 어제 모니터링을 갔는데요. 산불 현장을 가본 것도, 산불 전문가의 설명을 듣는 것도 처음이었어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숲엔 그새 새순이 돋아나고 있었어요. 지리산은 소나무만 남기고 키 작은 활엽수를 모조리 잘라내는 인공수림이 아니라서 피해가 적었다고 해요. 활엽수는 불에 타지 않는 물기둥과 같아서, 불기둥과 같은 소나무를 작은 물기둥들이 용사처럼 지켜준 거죠. 도리어 낙엽 카펫을 한 차례 걷어낸 셈이라 그 아래 햇빛을 못보던 씨앗들이 새롭게 자라날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거라고요. 전 이 다행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산달의 이야기가 겹쳐 보였어요. 어떤 순간에 우리는 ‘내가 알던 세상이 완전히 엉터리였군’하고 느끼곤 하잖아요. 모든 걸 과감히 불태워야하는 순간이 오죠. 산달이 하나하나의 죽음을 가슴에 새겼듯이요. 그런데 건강한 숲에서 그런 대소멸이 찾아오면, 도리어 새로운 생태계가 열리는 문이 돼요. 산달이 하나하나의 삶도 가슴에 새긴 것처럼요. 숲 바닥이 온통 잿가루인데도, 재를 살짝 걷어내면 바로 아래 낙엽은 타지도 않은 채였어요. 전문가 분은 숲에 오히려 잿가루 거름을 뿌린 효과일 거라고 웃으며 말씀하셨어요. 전 산달의 지난 이야기가 끝내 성벽을 무너뜨리는 나팔소리가 될 거라고 믿어요. 우린 대소멸 속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내기로 해요. 고단한 새벽까지 산달의 이야기를 써내려가주어서 고마워요. 꽃샘추위가 반짝 찾아오는 춘분이에요. 산불이 난 다음날, 춘분다운 강한 비바람과 천둥번개가 쳐서 산불을 크게 막아냈죠. 대소멸 속에서도 지구는 절기에 따라 여전히 자신의 일을 하고 있어요. 산달도 자신의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세요. 햇살을 쐬면서 꽃 같은 하루를 보내는 일이요! 감자 심고 돌아댕기는 덕복희가 <굳건한 믿음으로, 복희에게> 복희, 봄볕 듬뿍 가득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나요? 저는 오늘 새로 사귄 친구와 함께 연희동의 궁동산을 올랐어요. 이 좋은 날에 앉아만 있자니 몸이 찌뿌둥해서 안 나고는 못 배기겠더라구요. 그래서 무턱대고 길을 헤매다보니 샛노란 개나리님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나리님이 안내해주는 길을 따라 오르고 또 오르다 보니 서울의 도시 한복판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봄나무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일부러 꽃을 찾아가지 않았는데도 제게 선뜻 찾아와주었어요. 참 감사했어요. 봄기운에 떠오른 이야기가 있어요. 옛날 옛적에 봄이 와도 꽃을 피우지 못한 나무가 있었대요. 그 나무는 자신에게 꽃을 주지 않은 땅님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어요. 꽃을 가지지 못한 나무의 슬픔이 온 산에 퍼져 땅에서는 더 이상 어떤 식물도 꽃을 피울 수가 없었대요. 그러니 봄도 오지 않았구요. 오직,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았던 작은 옹달샘 속 연꽃만이 피어났어요. 아무도 없는 산에서 홀로 피어난 연꽃은 나무에게 말했어요. “내가 당신의 꽃이 될 테니, 더 이상 땅을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산에 봄을 돌려주세요.” 말을 마치고 연꽃은 자신의 꽃봉오리를 나무에게 모두 주었어요. 자신을 희생해 꽃을 내어준 연꽃에게 부끄러움을 느낀 나무는 슬픔을 거두고 연꽃에게 받은 꽃봉오리를 잔뜩 피워내 산에 봄을 돌려주었답니다. 눈치 채셨나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나무 위에 피어난 연꽃, 목련이에요. 목련은 그래서 봄이 오기도 전에 자신이 꽃을 피움으로써 봄을 불러내요. 꽃을 재우고 나서는 다시 연꽃에게 꽃봉오리를 돌려주었는데, 그래서 연꽃은 봄이 다 가고 난 여름에 그제서야 자신의 꽃을 피운답니다. 방금 막 지어내 봤는데 좀 허접하죠? 목련을 가장 좋아한다는 복희에게 이야기를 선물하고 싶었어요. 지난 편지에서 복희의 웃음 선물을 정말 기쁘게 받았거든요. 보답하고 싶었어요. 아직 얼어붙은 산에서 가장 먼저 피어나 봄을 알려준 목련처럼 복희의 이야기들이 저를 그렇게 깨워내요. 목련을 닮았다는 말은 빈 말이 아니랍니다. 복희는 목련 향을 맡아본 적 있나요?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에는 목련이 한 그루 있었어요. ‘한빛’이라는 이름의 학교였는데요. 2층에 있는 교실에서 내려다보면 만개한 목련의 정수리가 보이기도 하구요. 밤에는 환한 전등이 까만 밤의 학교 가운데에서 목련을 비추는데 그 모습이 정말 아름다워요. 우리는 풀벌레 소리 들리는 봄밤에 하아얀 목련 꽃 아래 벤치에 앉아 새 학기 새 친구를 알아가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어요. 영어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목련 꽃을 따오라고 해서, 꽃잎 하나하나를 뜯어가면서 문법을 가르쳐주기도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께서 새로이 한빛에 온 우리들을 반갑게 맞아주기 위해 그런 방법을 생각해내셨겠구나 싶어요. 참 특이하죠? 그래서 그런지 제게 한빛의 봄은 목련 향으로 남아있어요. 목련 향이 나기 시작하면, “아, 이제 또 새로이 시작이구나” 생각했으니까요. 사실 그때의 모든 장면들이 구체적으로 기억나지는 않아요. 다만, 그곳에서 처음으로 학교라는 공간이 이렇게 설렘 가득한 공간이라는 걸 어렴풋이 느껴보았을 뿐이에요. 아, 제 표현력을 탓해야겠어요. 말로 잘 설명하지 못하겠네요. 그럼에도 꽃이 피고 걸친 옷에서 사락사락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저는 가끔 그 향기를 맡아요. 그리고는 그때 그 마음으로 오늘이 살아져요. 사실 한빛을 나와서는 그 감각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어요. 더 넓은 세상을 만나게 되고, 세상을 다른 렌즈를 통해 바라보다보니 한빛이라는 공간이 그렇게 낭만적으로 보이지는 않더군요. 많은 친구들이 한빛을 ‘애증의 공간’이라고 부르고는 했어요. 저도 어쩌면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곳에서 나와버린 저로써는 그곳이 더 이상 유토피아가 아니라 답답한 공간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선생님들이 우리에게 세상의 아주 일부만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그게 참 아쉽고, 원망스러웠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렇게 그 곳을 미워하는 것이 저 스스로를 미워하는 것이기도 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는 누가 뭐라 하든 그곳에서 다투고 서러워하고 웃고 설레면서 자랐거든요. 우리는 그곳에서 많은 것들을 경험했고, 그 모든 것들이 이미 제 삶 속에 많이 녹아들어 있어요. 그 안에서 우린 충분히 멋지고 또 아름답게 최선을 다했어요. 이따금씩 저의 공동창조자들을 생각해봐요. 가족들, 학교 친구들, 선생님들, 그리고 동물들과 식물들, 흙, 물, 공기까지 셀 수 없이 많은 나의 동지들. 그것들이 때때로 저를 아프게 했을지라도 저는 그들 틈에서 부대끼며 숨을 들이쉬었던 거죠. 제가 내쉰 숨은 또 누군가에게 들이마실 숨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서로가 서로를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너무나도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나요? 저는 이 모든 들숨과 날숨들이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서로가 서로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정성을 담아보는 것이요.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스스로를 누구보다 다정하게 사랑해버리는 것을요. 복희, 세상을 바꾸겠다고 하면서 나를 미워하는 일은 얼마나 슬픈 일일까요! 그렇다고 세상 밖으로 우리가 나갈 수 있을까요? 나를 사랑하는 일은 결국 나를 만들어온 세상을 이해하고 감싸안는 일이에요. 그럼으로써 우리가 변화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해요. 어떤 숨은 서로를 망가뜨리기도 하지만, 어떤 숨은 서로를 붙잡아주기도 해요. 서로가 서로를 구해내기도 해요. 얼마 전에 지리산에 들렀어요. 이 산 어딘가에 복희가 살고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그곳에서 우리는 함께 밤새 내린 봄비 뒤 찾아온 냉이님과 쑥님을 찾아냈어요. 비릿한 흙 냄새와 냉이 향이 얼마나 향기로웠는지! 봄은 참으로 향기의 계절이에요. 허겁지겁 손에 흙이 잔뜩 묻는 것을 개의치 않고 잔뜩 소쿠리에 담았답니다. 그걸로 냉이밥과 쑥전을 만들어 먹었어요. 그곳에서 저는 땅을 밟고 나무가 자라나고 꽃이 터지는 소리를 듣었어요. 복희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곳이겠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산에 산다는 것은 쉴 새 없이 흙을 뚫고 올라오는 풀들을 매일매일 반갑게 맞이하는 일이더군요. 저는 그래서 실컷 웃을 수 있었어요.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저를 미워할 겨를이 없더라구요. 복희, 춘분은 낮과 밤의 길이가 길어지는 절기래요. 춘분이 지나고나서부터는 낮이 밤보다 길어져요. 해님이 점점 더 친절해지니 우리는 더욱 부지런해져야겠어요. 해님이 보여주는 그들을 빈틈없이 담아보려면요! 늘 자신의 일을 부지런히 해내는 이들을 만나야겠어요. 그러면서 저 자신도 사랑해볼래요. 복희는 잘 웃고 있나요? 씨감자가 앞으로 복희를 얼마나 웃게 할 지 기대돼요. 유머와 애정어린 이야기 듬뿍 전해줘서 고마워요. 제 서툰 이야기가 복희를 웃게 할 수 있기를 늘 바라요. 어떤 슬픈 일이 있어도,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그게 곧 우리 웃음의 거름이 될 거라고 믿어요. 그런 믿음이 있다면 삶을 힘차게 뛰어다녀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복희는 제게 그 믿음에 설득력을 부여해줘요. 함께 지금 이 순간의 봄볕을 잘 기억해보자구요. 또 다른 봄을 불러올 꽃을 피워내기 위해서요. 봄볕에 취한 산달이
    • 지리산 오늘
    • 지리산 방랑단
    2023-04-06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