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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에는 있고 놀이에는 없는 것은?
"달빛 놀이터를 하는 금요일이 너무 기대되요" “게임은 시작하기 전부터 긴장이 되는데 놀이는 승부가 없어 맘이 편해요” 우리는 나이가 들기 때문에 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놀지 않기 때문에 나이가 드는 것이다. -조지 버나드 쇼- 지리산산골 토지면 토지초등학교에는 달빛 놀이터라는 전래 놀이를 하며 아이들과 함께 노는 마을학교가 있다. "놀이도 배워야 하는 시대" ▲ 전래놀이를 하는 아이들 어른 아이들이 함께 놀이를 즐기고 있다. ⓒ 마을학교 지난주 일요일 전래놀이를 보급하는 아자 학교 대표 고갑준선생님과 함께 놀이를 하고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날 아이들과 학부모는 이랑타기, 진놀이, 두부놀이, 안경놀이, 술래잡기, 짝꿍 술래잡기를 배우고 함께 놀았다. 학부모들도 땀을 듬뿍 흘렸고 아이들은 녹초가 되었다. 반나절 동안 놀이에 빠지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신이 나서 놀이에 몰입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린 시절 놀이는 마을형과 누나들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배웠다. 배웠 다기 보다는 그냥 알게 되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되었다. 하루 종일 이 놀이 저 놀이가 끝이지 않았다. 요즘처럼 찬바람이 부는 때에는 고산댁 담벼락 양지에 모여 소꿉놀이를 했다. 반짝이는 사금파리를 모으고 분유통을 가져다 솥단지를 만들어 밥도 하고 국도 끓여 맛있게 먹는 시늉을 하며 놀다가 지겨워지면 밤톨 같은 돌을 주어 다가 공기놀이를 했다. 공기놀이처럼 기술이 필요한 놀이는 동네 선수들이 다 파악이 되어 있기 마련이어서 승부의 재미를 위해 적당히 편을 만들어 놀았다. 그것도 지치면 다른 놀이를 하면 된다. 시간이 없지 놀이가 부족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놀다 보면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고 굴뚝에 연기가 난다. " 종구야! 너네 집 연기 난다" 밥먹으로 가야겠다. "왜 우리 엄마는 밥을 빨리하지" 불평이 따라오기 일수였지만 어쩔 수 없다. 해가 지고 여기저기 동무들 집에 연기가 모락모락 퍼지면 누가 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아쉬워할 것도 없다. 내일도 놀며 되니까? 우리는 모두 시간 부자였다. 우리의 놀이는 끝이 없었지만 어제 함께 놀던 형과 누나들이 고학년이 되면 우리와 함께 놀아주지 않는 것이 그저 섭섭할 따름이었다. 그러다가 나도 어른이 되었고 놀이는 점점 잊혀 갔다. 그러다가 마을하교를 하게 하면서 옛 놀이를 하나 둘 다시 하게 되었다. 좀 덜 잘 놀기 위해서 잊힌 놀이를 기억하고 있는 선생님을 초대해서 놀이를 배우고 전래 놀이를 하며 아이들과 함께 놀이를 전하는 일이 토지 마을학교가 달빛 놀이터가 1년 동한 한 사업의 전부다. 놀이와 게임의 가장 큰 차이는 승부에 있다고 한다. 게임에는 반드시 승부가 있다. 승자가 있고 패자가 있다. 놀이에도 승부가 있는 놀이도 있고 없는 놀이도 있지만 승부가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이겨도 그만인 것이 놀이다. 술래도 승자가 아니고 숨는 아이도 승자가 아니다. 승자는 없고 재미만 있다. 더구나 놀이는 함께 해야 하고 맨날 나만 이기면 그 친구가 더 이상 놀아주지 않기 때문에 적당히 져주기도 해야 한다. 그래야 맨날 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도 아니면 다음판에는 이긴 사람 진사람을 섞어 버리면 어느새 승부는 사라지고 만다. ▲ 잘 놀려면 놀이도 배워야 한다. 놀이를 배우는 아이들과 학부모들 ⓒ 토지달빛놀이터 전래 놀이는 어른도 아이도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물론 축구를 아이와 함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야구도 아이와 함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드물다. 왜냐면 체격과 능력차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이는 아니다. 달빛 놀이터에서 매번 하는 그물 술래잡기나 대문 술래잡기는 학부모와 유치원생이 함께 뛰어 놀면서 할 수 있다. 특별한 능력도 필요 없다. 아이들이 더 유리한 놀이도 있고 어른들이 배려해야 하는 놀이도 있지만 나이와 성별로 능력으로 인해 차별당하지 않고 함께 어울려 놀 수 있다는 점이 게임과는 다르다. 승부도 없고 오직 재미만 있는 놀이를 통해 아이들은 어떤 것을 배우게 될까요? "PC게임은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놀이는 혼자 할 수 없습니다. 놀이를 하려면 혼자서 할 수 없지만 배려하지 않으면 놀이가 진행되지 않습니다. 내가 힘이 쌔고 강하다고 해서 매번 이기면 친구가 더이상 놀아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적당히 힘 빼고 배려하면서 함께 해야 하는 것이 놀이입니다. 다음번에 놀아주지 않기 때문에 매번 승리하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놀이를 통해 배우게 됩니다" - 놀이선생님- 우리의 고전 놀이는 두 가지로 보면 된다. 민속놀이는 특정한 날에 하는 대규모 놀이 예 줄다리리 강강수월래 차전놀이 같은 놀이다. 전래놀이는 매일매일 할 수 있는 일성적인 놀이다. 예를 소꿉놀이, 재기차기,비석치기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토지 아이들이 게임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내 아이들도 매번 달빛놀이터에 나가서 신나게 놀지만 집에 오면 다시 게임을 한다. 하지만 특이한 것은 게임을 그렇게 좋아하는 아이들도 게임 시간을 포기하고 달빛놀이터에 나가서 노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전래놀이는 맘이 편해요. 놀기만 하면 되니까요” “게임은 시작하기 전부터 마음이 조마조마해요 이기면 좋지만 지면 기분 나쁘고 매번 이기는 아이만 이겨서 기분이 별로 에요” 내 아이에게 물어보면 항상 이렇게 말한다. 게임은 혼자 또는 팀이 상대방과 경쟁을 통해서 승부를 결루는 것이 대부분이다. 항상 승부가 있고 패자가 있다. 승자는 즐겁고 패자는 유쾌하지 않다. 전래 놀이는 하다 보면 승부도 없고 패자도 없다. 즐겁게 땀 흘리고 놀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렇다고 PC 게임을 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지금 아이들은 친구들과 놀만한 시간도 없고 공간도 부족하다. ▲ 놀이에 관한 토론을 하는 놀이 선생님과 학부모들 놀이와 게임의 차이 그리고 놀이를 통해 배우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 토지달빛놀이터 우리가 하는 것은 한 달에 한 두번이라도 아이들에게 놀시간과 공간을 열어주자는 것이다. 아이들과 더불어 전래 놀이를 통해 아이들에게 지리산 산골 마을 공동체의 일원이었다는 생각을 심어주는 것이 놀이의 핵심이라는 생각이다. 오래전엔 놀이가 일의 연장선에 있었다. 놀이를 통해 힘을 키우고 놀이를 통해 협동과 협력을 배웠다. 이를 통해 서로 돕는 품앗이와 두레를 했던 민족이 바로 우리의 민족문화였다. "전래놀이는 인공적인 것이 필요하지 않다” 자본이 필요 없다. 고가의 PC가 없어도 되고 특별한 장비가 없어도 가능하다" 놀이는 평등하다. 청소년 자살율 1위인 우울한 한국 사회에서 사라져가는 우리의 전래 놀이를 통해 우리 아이들과 학부모 그리고 마을 공동체가 더불어 살아가는 행복과 관계의 미학이 필요한 시기다. 놀이의 반대는 일이 아니라 우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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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하는 청춘의 원더풀 라이프 “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
섬진강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오고 가던 시절이 있었다. 아마도 2005년이나 2006년쯤이었을 것이다. 나는 구례에서 악양까지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왕복 60km였다. 봄이 끝날 무렵 시작한 자전거 출퇴근은 겨울이 오면서 끝났다. 그 후로 자전거 출퇴근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하던 일을 그만두었고 악양은 나에게서 멀어졌다. 지리산에 내려와서 살게 된 이유는 간단했지만 살아가기는 녹록하지 않았다. 구례에서 섬진강을 따라 악양으로 향하면서 그때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는 올해 지리산사람들 공동집행위장이 되었는데 올해 관운이 있는 사주라고 했다. 사진 김인호> 오늘 악양에 사는 최지한씨를 만나기로 했다. 그를 지난겨울 남원의 산악열차 반대 시위장에서 본 기억이 있다. 아마도 남원시청 옆이었을 것이다. 한겨울이었는데 그는 맨발에 슬리퍼 차림이었다. 딱 봐도 보통은 아닌 사내다. 머리는 삭발이었다. 그를 악양면 소재지에 있는 카페에서 만났다. 길 건너에 악양초등학교가 보였다. <그의 첫인상은 “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진 김인호> 오래 전에 악양에 일할 때 그 초등학교 운동회에 참가했던 기억이 난다. 아이들의 신난 함성이 가득한 운동장에 오후에 햇살이 눈 부셨다. 커다란 히말라에시더(개잎갈나무 50미터까지 자란다)가 동쪽에 있었다. 누군가는 이 나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무라고 했었다, 나도 가끔 동의하지만, 집안에 심기에는 나무가 너무 크다. 이 나무를 키우다 보면 예상보다 너무나 커버리기 때문에 위를 잘라버린다. 주변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들은 싹을 잘라 버리는 것이 사회의 일반적이 법칙이다. <그가 환경운동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공해문제연구소에서 만든 한국의 공해지도라는 책을 초등학교 3학년 때 만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진 김인호 > 그의 첫인상은 “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 사람들이 히말라야 시더의 위를 자르는 것같은 사회의 일반적인 잣대를 그는 봐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가 하동에 살게 된 것은 2006년쯤이라고 한다. 내가 하동을 떠난 것이 그쯤이었다. 그는 멀리 강원도 고성 출신이라고 했다. 화진포가 가까운 강원도 산골 마을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북한을 지척으로 둔 강원도 최북단에서 태어났다. 나는 몇 해 전 화진포에 가봤다. 화진포 바다는 서해나 남해와는 다른 고독하고 외로워 보이는 진한블루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초등학교 시절 어느 해 서울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그 후 대학에서 양식업을 공부했다. 그리고 남해의 여러 섬마을을 전전하며 양식장에서 일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결국 여기 하동 악양에 정착했다. 그의 직업은 대바구니를 만들거나 수리하는 일과 정원관리라고 한다. 그리고 지역의 사람들과 환경을 지키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환경운동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공해문제연구소에서 만든 한국의 공해지도라는 책을 초등학교 3학년 때 만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도 고등학교 시절 그 비슷한 책을 본 적이 있다. 한국에서 가장 오염도가 높은 곳은 하동 넘어 광양이었다. 광양에는 광양제철소가 있다. 세계최대 규모의 제철소가 있고 거기서 품어져 나오는 대기 오염 물질은 한국 대기 오염 물질의 5.43%라고 한다. 나 역시 검은 역기가 품어져 나오는 그 사진을 책에서 본 기억이 난다. 그 책을 보고 열 받아서 환경운동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동기가 순수하다. 아마도 그는 순수한 남자인 것 같다. 몇 해 전부터 하동은 산악열차로 인해 갈등이 깊었다. 악양 형제봉에 산악열차를 설치하겠다는 하동군의 야심 찬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산악열차 반대 운동을 했다. 그것도 열 받아서 했다고 한다. 나는 그에게 양말을 신지 않는 이유를 물었는데 대답은 간단했다. “발에 열이 많아서 답답해요.” 그는 역시 열이 많은 사람이었다. 재밌는 이야기를 해 달라고 했더니 그는 마루에서 3년을 살았던 적이 있다고 했다. 왜 그러셨나요? [어느 해 봄 비가 오는 날 구들이 고장이 나서 일산화탄소 중독이 된 적이 있어요. 마을로 기어와 동치미 국물을 얻어먹었어요. 그 후로 방에 들어가 자지 않았어요.] 방에 들어가지 않으니 마루밖에 잘 곳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마루에서 3년을 살았다고 한다. 보통 사람은 아니다. 카페에서 인터뷰하고 그가 일하는 대나무 공방에 가봤다. 녹색평론 읽기 모임이라는 작은 안내문이 문 앞에 붙어 있었다. 나 역시 오래전에 녹색평론 읽기 모임을 한 적이 있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오래전 일이지만 말이다. <간디의 물레라는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그가 수리하는 대바구니가 물레처럼 보였다.> 공방에는 헤진 바구니와 새로 만든 바구니 그리고 수리를 원하는 대바구니가 보였다. 그가 말한 바에 의하면 이것으로 먹고살고 약간의 잉여자본도 생긴다고 했다. 간단한 도구로 생계가 가능한 일이라서 좋다고 했다. 나는 이런 식의 밥벌이를 본 적이 없다. 그가 작업하는 모습을 한참 동안 보고 있었다. <공방에는 헤진 바구니와 새로 만든 바구니 그리고 수리를 원하는 대바구니가 보였다.> 익숙하게 대바구니를 수리했다. 능숙한 솜씨가 보기 좋았다. 간디의 물레라는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그가 수리하는 대바구니가 물레처럼 보였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도 간단한 도구로 새로운 물건을 만들거나 물건을 고치는 일은 매력적이다. <간디의 상징이 된 물레> 그가 좋아하는 영화는 고레이다 히로카즈 감독의 환영의 빛이라고 했다. 섬진강을 따라 돌아오면서 오후에 햇살이 섬진강을 비추는 것을 봤다. 아마도 환영의 빛은 이런 빛일 것이다. 누군가 한 번은 자신을 끌어들이고 유혹하는 환영의 빛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는 어느 곳에서 멍하니 서 있는 자신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는 반항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아마 그는 자본주의 주류 사회를 거스르고 싶은 환영의 빛에 어느 순간 이끌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는 빛이 이끄는 경로를 따라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항하는 청춘 최지한, 그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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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을 너무나 사랑했던 사람의 지리산 사랑법
첫 수선화가 피던 봄날 함양 휴천면으로 향했다. 지리산 높은 곳에는 잔설이 남아 있었지만, 우리가 만난 그날은 여름이라도 되는 듯 따뜻했다. 만나기로 한 식당 한쪽에 노인 한 분이 앉아 있었다. [함양 휴천면 지리산 리조트 식당] 봄나물이 가득한 밥상에서 음식 이야기와 날씨 이야기 같은 상투적인 말들이 오갔다. 식사가 끝나고 카페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를 시작하자 흰머리가 가득하던 그녀의 눈은 반짝이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이루지 못한 첫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10대 소녀 같았다. [김종직의 유두류록 탐구의 저자 류정자 작가. 사진 김인호] 류정자 선생님은 밀양 태생으로 1948년생이다. 1965년에 산악회 활동을 하던 사촌 오빠와 처음 지리산에서 왔다고 한다. "오빠가 지리산에 한번 가보자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때만 해도 지리산에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어요." “그때는 심원마을에서 출발해서 노고단으로 갔어요." “심원마을에는 사람들이 꽤 살고 있었죠" "심원마을에서 하루 쉬고 노고단에 올랐어요." "노고단에 오르니 노고단 천지가 모두 원추리 꽃밭이었어요. “ "산을 가득 메운 원추리꽃을 보고 있으니 너무 좋았죠“ "어찌나 예쁘고 곱던지 지리산이 내 가슴에 박혀 버렸죠“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순간 번쩍이는 것이다. 그날 그 일행은 노고단에 이틀을 머물다 내려왔다고 한다. "꿈같은 시간이었어요." [지리산 모임 [우리들의 산악회]에 회원으로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지리산 골골을 누비고 다녔다. 사진 김인호] 그때만 해도 그녀도 그날 이후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지리산에 빠져서 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처음에는 지리산은 노고단뿐이라고 생각했다. 지리산에 가고 싶을 때는 매번 심원마을을 거쳐 노고단에 올랐다. "제 산행 방식은 좋으면 매번 그 장소에 다시 가는 겁니다." 아마도 그런 스타일이었기 때문인지 노고단에만 가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단다. "다른 곳을 찾을 필요도 없었죠" 하지만 곧이어 지리산 골골 여기저기를 다니게 되었다. "결혼을 일찍 했어요" "부산에서 살았는데 부산에서도 틈만 나면 산에 왔지요." 지리산 모임 [우리들의 산악회]에 회원으로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지리산 골골을 누비고 다녔다. “저는 지리산 골짜기 골짜기 안 가본 곳이 없어요." "저는 좋으면 같은 장소를 자주 가는 스타일이거든요." "결혼하고 아이 셋을 키우면서도 매번 지리산에 왔지요". "아이들은 엄마를 지리산에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자랐어요."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를 빼고는 틈만 나면 지리산을 찾았습니다." 한 권의 책이 류정자씨를 탐구자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지리산 산행은 지리산이 좋아서 가는 것에서 지리산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그 결정적인 책이 바로 조선 시대 함양의 군수 김종직의 유두류록이다. [김종직(1431∼1492)은 조선 시대 성리학자·문신인 선생이 함양군수로 부임한 이듬해 지리산 천왕봉을 다녀와서 '유두류록(遊頭流錄)' 이란 기행문을 남겼다. 두류산(頭流山)은 '지리산'의 다른 이름이다. 1472년 8월14일부터 18일까지 4박 5일 일정으로 13.3㎞ 가운데 국립공원에 속한 노장대(함양독바위)∼상내봉(향로봉)∼미타봉∼어름터 4.5㎞ 구간이다. 옛 문헌에 김종직 선생이 올랐던 탐방로가 지리산 전체 등산길의 제1호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유람동기, 동행인, 날짜별 기록, 사적들, 풍경, 서정적인 감정, 당시 시대상 등을 모두 담고 있어 역사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 사실 필자도 김종직의 유루류록을 읽은 적이 있다. 물론 읽기만 했지 거기에 나오는 지명이라든지 절터라든지 이런 것에는 일말의 궁금증도 없었다. 오래된 지리산 이야기를 읽고 싶었고 마침 도서관에서 그 책을 발견하고 재밌게 읽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지리산 산중에 산재 되어 있는 민가와 암자 터 등을 보면서 지리산이 품고 있는 인간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들의 산지를 통해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국역본을 접하면서 지리산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천착하게 되었다. 2003년 지리산학의 정립을 꿈꾸며 결성한 [지리99] 운영진에 참여해 본격적인 [유두류록 탐구팀]을 꾸려 20여 년간 탐구산행을 이끌어 왔다. 이 책은 그 오랜 탐구의 작은 결실이다. 또한 ≪유두류록≫ 탐구와 병행하여 문헌기록에 등장하는 폐사지 탐구에도 심혈을 기울여 찾아낸 암자터가 100여 군데 이른다. 이 외에도, ‘세석의 청학연못’, ‘지리산의 시대를 연 달궁’, ‘지리산 고성탐구-추성’, ‘촛대봉 각자 高麗樂雲居士李靑蓮書를 찾아서’, ‘대궐터 탐구’, ‘문창대는 어디인가?’, ‘천왕봉 성모석상 수난의 역사’, ‘천왕봉 각자 일월대에 대하여’ 등 다수의 소고를 발표하면서 지리산학의 정립에 몰두해 왔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전을 잡고 지리산과 함께 살고 있다.] - 노컷뉴스 소개 글- [지리99라는 사이트에 류정자 작가의 다양한 글을 만날 수 있다. 사진 김인호] 그녀의 나이는 이제 75세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지리산을 오른다. 3년 전에 김종직 선생이 산을 오르기 시작했던 마을로 이사를왔다. 류정자 선생은 두 번이나 암에 걸려 두 번의 큰 수술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정말 슬픈 일은 막내아들을 먼저 보낸 것이다. "그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엄마가 지리산에 다닌다고 아들을 잘 살피지 못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 후 몇 년간 지리산에 오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녀는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왔다. 지금 이루고 싶은 것이 있으세요? "뭐 다른 게 있을까요?" "이제까지 발견한 폐사지(사라진 절터)가 100여 곳이 됩니다." "이제 이걸 정리하고 싶어요." "책을 묶어 두면 누구에겐가 도움이 되겠지요." "김종직 선생님이 류두류록을 남기지 않았다면 그 후세에 지리산에 오르려고 했던 분들에게 참고 자료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제게 폐사지에 관심을 두지도 못했을 겁니다“ [김종직의 유두류록 탐구 600년 전 지리산 산행기 저자류정자] "제가 얼마 전에 김종직의 유두류록 탐구을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만, 제가 여러 서적과 문헌들을 참고하고 직접 수십 번을 찾아가서 발견한 지리산 폐사지 터에 대한 기록도 저 처럼 관심있는 누군가에게는 작은 도움이라도 되리라 생각 합니다." "이런 작업을 하는 사람은 없거든요." "그리고 김종직 선생님이 지리산에 올랐던 길을 복원하고 싶은 작은 소망이 있습니다." 지리산을 좋아하게 된 이유가 뭘까요? 류정자 작가는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그렇지! 사랑하는 것에는 이유가 없는 법이다. 그녀의 지리산 사랑이 60년이 되어 가고 있다. 무엇인가 사랑하게 되면 자주 보고 싶고, 더 알고 싶고,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것이 사랑의 방식일 것이다. 그녀는 지리산을 사랑하다 보니 자주 갔고, 관심이 커지다 보니 책을 냈고, 폐사지를 탐구했다. "내가 죽으면 지리산 골짜기 여기 저기에 뿌려 달라고 아이들에게 이야기 해두었어요." 그녀는 죽어서도 지리산과 함께하고 싶은 것이다. 찐 사랑은 이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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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출 4억에 도전하는 구례 오이 농부 이야기
구례 서동민 농부는 구례가 고향입니다. 건설업체에서 일하다가 몇 해전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가 두 번째 직업으로 선택 한 것은 농부 아버지가 하던 오이 농사입니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 도전이지만 규모를 늘려 작년 매출 3억 올해는 매출 4억에 도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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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닮아가는 구례 한전
요즘 기사에 가장 많이 나오는 그것이 압수수색이다. 그런데 구례에서는 검찰 대신 한전이 농민들을 압수수색을 하고 나섰다. 그들이 압수수색을 감행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농민들의 저온 창고다. 그들은 검찰이라도 되는 양 예리한 관찰력으로 농민들의 창고를 들쑤시고 다니면서 그들의 판단으로 불법 물품이 들어가 있다면 어김없이 벌금에 처하고 있다. 농업인구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빨리 사라지고 있는 직업 중에 하나다. 더구나 구례 농민들은 농사지은 이래로 가장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2020년 8월 수해 때문이다. 당시 피해 보상은 50%의 해당하는 금액만 보상받았다. 고작 2년 전에 농민들은 때아닌 수해로 인하여 재산의 50%를 상실한 것이다. 그것도 2년 이상 구례 농민들이 투쟁한 결과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전에서 농민들의 저온 창고를 수색해서 벌금을 물리고 있다. 벌금을 물린 이유는 농가에 설치된 저온 저장고에 1차 농산물 외에 김치나 가공식품, 물 등을 저장하여 '농업용 전기 공급 운영 규정'에 위반하였다는 것이다. 한전은 농사용 전력을 사용하는 농가들이 저온 창고에 농산물 대신 김치, 젓갈 등 가공식품을 보관했다는 이유로 2017년부터 구례에서만 농가 88곳에 위약금 8천200만 원을 부과했다. 그런데 올해는 60여 호에 5천 5백만 원의 과태료에 이른다 한전이 농민들에게 많은 벌금을 지금 물린 이유가 무엇일까? 한국전력공사는 현재 30조의 누적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한전은 세는 주머니를 찾고 나선 모양이다. 한전의 농사용 전기 판매량은 1902만8829㎿h(메가와트시)로 전체(5억926만9715㎿h)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3.7%에 불과했다. (2021년 기준) 그것도 대규모 기업형 시설 농장에서 쓰는 비용이 대부분이고 저온 창고로 사용된 전기료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더구나 현재 진행하고 있는 벌금은 명확한 기준도 없다. 저온 창고는 농민들의 농산물을 저장하는 창고다. 농민들의 농업 행위나 농사를 위하여 사용하면 큰 문제가 없다. 고추 농사를 지은 농민에게 고추나 고추장 고춧가루가 있으면 되고 쌀농사를 지은 농민들은 쌀이 있으면 된다고.…. 누구나 상식적으로 생각할 것이다. 정부는 농민들에게 지속해서 6차 산업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쌀만 생산하지 말고 쌀로 쌀과자도 만들어서 이것으로 체험도 하고 판매도 하라는 것이다. 그런 것을 요구했으면 저온 창고에 체험에 필요한 것들을 넣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것이 아닌가? 2차 생산물이 있으면 안 된다는 규정은 어디에 나오는 것인가? 농업용 저온 창고를 설치하거나 허가를 내주는 곳은 농림축산식품부와 지자체다 한전은 전기설치를 하고 요금을 받는 행위를 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한전은 농민들에게 벌금을 부과하려면 먼저 저온 창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농림부와 지자체와 상의를 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그 기준에 맞게 농민들에게 미리 통지하고 그때 벌금을 물리든 과태료를 물리든 해야 하는 것이다. 구례 한전 지사장은 검찰 출신이라도 되는 것일까? 한편 구례군의회는 "한전은 농사일하며 반찬 일부를 보관한 영세 농민들에게 가구당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의 과도한 위약금을 부과했다. 비현실적인 기준에 근거한 단속"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한전은 지난해 수협을 상대로도 가공품 보관과 관련해 수십억 원대 위약금 소송을 했다가 패소했다. 무리한 위약금 부과는 사회적 손가락질을 받을 수밖에 없다"라고 강조했다. 구례 한전은 근거에도 없는 단속으로 부과한 벌금을 즉각 철회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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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치 없는 갈치 마을에는 갈치 신문이 있다.
2023년 1월 9일 겨울 치고는 유난히 따뜻한 날 나는 갈치 마을 이장과 만나기로 했다. 남원 산중 마을 이름이 갈치라고 하니 그 이름이 독특해서 더 끌렸는지 모른다. 함께 가는 일행들과 함께 갈치 마을로 이동하기 전에 우리는 남원 시내에 있는 갈치 집에서 갈치 조림을 먹었다. 푹 끓여진 갈치와 무가 꽤 맛이 좋았다. 갈치 마을 가는 길은 남원에서 장수로 나가는 길목에서 보절면으로 꺽어 몇 분 들어가면 나오는 초입에 있었다. 갈치 마을을 둘러보니 전형적인 산골 마을이었다. 갈치 마을은 상갈치, 중갈치, 하갈치 마을로 생선으로 비유하면 머리, 배, 꼬리라고 볼 수 있을 것같다. 물론 갈치 마을과 바다에 사는 갈치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갈치의 꼬리와 머리가 비중이 작듯 중갈치 마을이 가장 크고 상갈치 하갈치 마을에는 각각 10가구 정도가 산다고 한다. 갈치 마을의 갈은 칡을 뜻하는 한자에서 왔다. 칡차를 갈(葛)근차 라고 쓰는 그 한자다. 즉 칡이 많은 동네라는 뜻이라 한다. <갈치신문 28호 사진속의 장면은 치치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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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농 양파 재배와 양파 크게 키우는 비법
- 남원에서 유기농 양파를 재배하는 농가를 만났습니다. 지난번 수해로 인해 집을 잃고 지금은 하우스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몇 개월 전에는 하우스에 불까지 나서 힘든 농가입니다. 그래도 양파는 쑥쑥 자라서 수확할 때가 되었네요. 유기농 양파를 재배할 때 어려운 점과 양파를 크게 키우기 위한 비법을 들어 봤습니다. 올해는 작년 저장 양파 때문에 양파 가격이 낮다고 합니다. 양파는 위에도 좋고 모든 요리에 꼭 필요한 채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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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농 양파 재배와 양파 크게 키우는 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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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그리고 하동 녹차찐빵
- 추억 그리고 하동 녹차찐빵 추억 그리고 하동 녹차찐빵 길거리에 걷다 보면 흔하게 보이는 가게 중 하나가 찐빵가게다. 구례 같은 시골에도 스타벅스나 롯데리아는 없어도 찐빵가게는 1-2개가 있다.그만큼 흔하고 흔한 것이 찐빵이다. <찐빵은 흔하다. 하지만 제대로 만든 찐빵은 결코 흔하지 않다.> 찐빵이 흔한 이유는 뭘까? 그것은 그만큼 먹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찐빵을 먹는 이유는 뭔가? 그것은 추억 때문이 아닐까? 누구나 어렸을 때 어머니가 막걸리에 발효시켜 만들어진 찐빵의 맛을 기억할 것이다. 지금은 찐빵이 겨울에 먹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순전히 찐빵 만드는 기업의 광고 때문이고기억 속에 찐빵은 대부분은 여름에 만들어 먹었다. 딱 이때 장마철 말이다. 콩과 벼도 심고 아직 고추는 익지 않아서 따지 않아도 되는 딱 이맘때 어머니는 모처럼 농사일을 쉴 수 있었다. 그 동안 바쁜 농사일에 챙겨주지 못한 자식들을 위해 찐빵을 만드셨던 것이다. 처마에 떨어지는 낙숫물을 받던 커다란 고무 다라이에 물이 차고 넘치는 날 막걸리를 넣어 발효된 밀가루에 팥을 넣어 만들어 주던 그 찐빵 맛의 추억은 삭막한 도로를 지나다가도 찐빵만 보면 나도 모르게 어머니의 얼굴과 함께 겹쳐지곤 했다. 2005년 가을 유독 하늘이 파란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하동에서 찐빵을 만든다는 두 분을 만났다. 박중욱씨와 양대화씨였다. 딸이 하나 있다. 박중옥씨는 천식을 앓고 있다. 그의 천식은 모든 것을 까다롭게 만들었다. < 울산에서 만나 결혼했다. 중매였다.> 울산에서 만나 결혼했고 거기서 살다가 천식 때문에 더 이상 일이 하기 힘들어 고향인 하동에 내려왔다.누나가 찐빵을 만들고 있어 거기서 빵을 배웠다. 하지만 그는 천식이 있었고 수입밀가루로 만든 빵은 그의 몸이 먼저 거부했다. 그래서 그의 우리밀로 찐빵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가 먹어도 문제가 없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찐빵에 관심이 갔다. 우리밀로 만들과 팥도 국산 팥을 쓴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동 터미널에 주차를 하고 찾아가보니 시장통 골목에 작은 가게가 있었다. 그들의 작업장이장 판매장이었다. 맛짱이라는 가게였다. 여느 시골읍내 장터골목의 찐빵집이었다. 밖에는 찐빵을 찌는 찜 솥이 있고 만두도 있었다. 부부가 빵을 찌고 만두를 만들어 파는 평범하기 그지 없는 찐빵집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다른 것이 외부가 아니라 재료에 있었다. "우린 마가린을 쓰지 않아요. 마가린을 쓰면 모든 참가제를 쓴 것과 같아요.이미 마가린 속에 참가제가 다 들어 있거든요. 통밀 만을 이용합니다.통밀이 거칠기는 하지만 밀 본연의 맛의 충실합니다. " 우리팥을 이용해요. 비싸지만 그것만 사용합니다. 우유 계란을 사용하지 않아요. 손으로만 만들어요. 만들기 어렵지만 손으로 만든 것이 훨씬 부드럽고 맛이 좋아요" 부부가 하루 종일 만들 수 있는 빵의 양의 약 600개라고 한다. 하지만 매일 이렇게 만들 수는 없다. 보통 하루에 300개 정도의 빵을 만든다. 1년에 만들 수 있는 양이 이미 정해져 있다. 109,500개다. 5개씩 포장되어 있으니 21,900봉이다. 하루에 60봉이다. 이것이 이들이 매일 팔 수 있는 찐빵의 전부다. 더는 없다. < 양대화님> 그렇다고 이들이 처음부터 완벽한 찐빵을 만든 것은 아니다.박중옥대표는 " 우리 빵의 레시피는 올해 만들어 졌어요" 매일매일 연구하고실험해서 겨우 완성했죠. 결국 8년이 걸려 완성된 레시피다. < 박중옥님> 그의 말대로 그의 빵은 처음보다 부드럽고 맛있다. “아무리 몸에 좋아도 맛이 없으면 찾지 않으니까요. 설탕을 조금 사용하고 단맛을 올렸고 통밀의 거친 맛을 빼고 부드러워졌어요.우유를 사용하지 않고 부드럽게 만들기는 쉽지 않거든요.” < 찐빵이 무겁다. 꼼수 없이 그냥 팥이 많아서다. > 하동녹차찐빵을 손에 잡으면 무게부터가 다르다.다른 찐빵들이 비싼 팥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구사지만 이들은류현진의 돌직구처럼 그냥 팥을 많이 넣어 만든다. 다른 꼼수는 없다. 우리밀빵이라고 해서 구입했더니 알고 보니 팥은 수입 팥이고국산 팥을 사용했다고 구입했더니 마가린이 들어 있는 등의 이런 저런 꼼수가 없다. 안심하시고 드셔도 됩니다. 그렇다 그냥 믿고 드시면 된다. 그저 정직하기 때문이다. 혹시나 들어있는 꼼수가 있을까 봐 항상 신경 쓴다. 재료를 확인하고 꼼꼼히 살펴서 혹시라도 나쁜 것이 있을 까봐 먼전 살핀다.이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 아이들이 좋아한다. 맛있으니까> 현재 그들은 하동 악약으로 작업장을 옮겼다. 꽤 큰 공장이다. 하지만 여전히 두 사람이 전부다. “공장이 넓어져서 작업하기 편해서 좋아요. 깨끗하고요.” 공장개소식에 참가했을 때 어느 개업 장에 방문했을 때보다 기분이 좋았다. < 요즘은 체험행사도 한다. 찐방도 만들어 놓고 지리산 여행을 하고 오면 발효된 빵을 쪄서 가져간다.> 보통은 크게 시작하지만 작은 골목에서 시작해서 여기까지 온 두 분의 노력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손으로 만든 것은 정직하고 더 많은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세상이다. 손으로 직접 만들어 부드럽고 좋은 재료를 썼는데 맛도 좋다. 하나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다른 것과 비교 할 수 없다. 좀 작게 만들어도 되지 않냐고 하지만 양심이 또 그렇지 않다. <뜨거워도 먹고 싶어한다. 왜 맛있으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 길로 걷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은 이와 같은 사람들 때문에 변한다. 그들이 그들의 길을 가기 때문이고 그것은 곧 새로운 길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들의 손은 바쁘고 그 손에서 새로운 빵들이 만들어진다. 어느때 먹어도 좋다. 그들이 만든 것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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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수발전소 댐 생기고 아름다운 골짜기 잃었다
- 지리산 이야기 (2) 편리함 위해 파헤쳐진 계곡(산청양수발전소) 양수발전소 댐 생기고 아름다운 골짜기 잃었다 배혜원 시민기자(지리산필름 대표) (webmaster@idomin.com) 2021년 04월 13일 화요일 정부 친환경에너지 홍보와 달리 삼림·생태계 파괴에 수질악화 편리함·발전 명목 개발만 몰두…회복·치유 등 새로운 대안을 "산청에 양수발전소가 생길 때는 왜 반대운동을 안 했습니까?" 2019년 2월 하동군 화개면 양수발전소 반대 대책위가 활동할 당시 연대를 요청하러 다니는 중에 들었던 이야기다. 산청군에 양수발전소가 들어선 것은 2001년이었다. 그 당시 나는 양수발전소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산청에 양수발전소가 생긴다는 것은 더더욱 알 수 없는 초등학생이었다. 청소년들도 환경운동에 뛰어들게 된 현재는 기후변화로 인간 문명의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인데,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그때부터 반대운동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양수발전소에 대한 정보가 없었던 화개 사람들은 반대집회 당시 산청양수발전소에 다녀와서 화개면 양수발전소 반대집회 때 후기를 공유하기도 했다. 산청양수발전소는 고운동 계곡에 상부댐, 거림계곡에 하부댐이 위치한다. 상부댐 일부 지역은 하동군 청암면을 접하고 있다. 원자력발전소의 전력은 가동하는 동안 잉여전력이 발생하는데, 이것을 이용해 양수펌프로 하부댐에 있는 물을 상부댐으로 퍼올려 담아뒀다가 하부댐으로 흘려보내 낙차를 이용해 전기를 만드는 발전소다. 말하자면 원자력발전소의 잉여전력을 위한 배터리 역할을 하는 셈이다. 상부댐에 있는 물을 하부댐으로 내려 한번 발전을 하는 데 6~8시간, 반대로 상부댐으로 물을 퍼올릴 때 8~10시간이 소요돼 발전소를 최대한 가동한다고 해도 최대 가동률은 25% 내외라고 한다. 1조 원이라는 건설비용을 생각했을 때 전기를 생산하는 양수발전소의 발전단가는 매우 높은 편이다. ▲ 산청군 고운동 계곡에 건설한 양수발전소 상부댐. /배혜원 시민기자 산청에 사는 친구의 소개로 지역주민을 만났다. 하부댐 인근 곡점마을에 터를 잡은 지 19년째라고 소개한 ㄱ 씨는 산청양수발전소에서 산청군과 시천면에 발전기금을 제공하고 있고, 수몰된 예치마을은 인근지역으로 이주해 펜션단지를 조성했으며 상부댐이 있는 고운동까지 도로를 건설해 교통이 편리해졌다고 말했다. 다만 수질은 확실히 나빠졌다는 말을 덧붙였다. 한국수력원자력은 양수발전소를 신재생에너지, 친환경에너지로 홍보하고 있다. 그러나 건설과정에서 삼림 훼손, 수계통제로 하천 생태계 파괴와 수질 오염 등을 간과한 이야기다. 시천면에서 나고 자란 ㄴ 씨는 대규모 토목공사로 인해 지역 경제가 활성화됐다고 이야기했지만 계곡에 이끼가 많아져 눈으로 봐도 물이 오염된 것을 볼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산청양수발전소 입구에는 수질 현황판을 붙여놓고 관리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상부댐이 위치한 고운동에 40년째 사는 ㄷ 씨는 반천동과 고운동에서 각각 길을 막는 등 반대운동을 했으나 끝내 막지 못했다고 했다. 반천동에서 고운동으로 이어지는 길도 막혀버렸다고 이야기했다. 최치원 선생의 호 '고운'에서 유래한 고운동은 깊은 산속에 물이 풍부하고 비옥한 분지 지형으로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자리다. 여름철 부채도 필요 없을 정도로 시원했던 이곳은 양수발전소 건설 이후 2~3도가량 평균기온이 올라갔고, 전기 없이도 소박하고 고요한 삶을 살 수 있었던 아름다운 고운동 계곡이 사라졌다고 한다. 집이 수몰될 위기에 처했던 내가 환경운동가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자, "자기 집이 수몰된다는데 반대하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ㄴ 씨는 양수발전소 문제를 다루기보다는 시천면 일대에 4군데가 넘는 생수공장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머지않아 지하수 자원이 고갈될 것이고, 오가는 대형 화물트럭들로 소음과 사고위험이 있고 지역에 딱히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나다니는 트럭들을 보며 양수발전소 송전탑들을 보며 지리산의 산수를 파헤치고 생산한 전기와 물이 다른 지역으로 팔려나가는 현실을 체감했다. 지역주민들이 혜택을 보는 점도 있고, 생활도 이전보다는 많이 편리해졌겠지만 우리는 고운동과 거림계곡의 이전 모습을 다시는 볼 수가 없다. 나는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풍천리 주민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하동에서는 응모를 포기했지만 홍천은 당시 신규 양수발전소 후보지 중 한 곳이다. 농성장을 강제 철거당한 뒤로 그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알지도 못하고 쪽수가 없어서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며 산청양수발전소가 건설될 당시 반대운동의 기억을 떠올렸던 ㄷ 씨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우리는 언제까지 편리와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소중한 것들을 놓쳐야 할까. 코로나19라는 전염병과 기후위기에 대처하면서도 이런 문제들을 불러왔던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 해결할 수는 없을까. 개발과 보존이라는 이분법적인 논리가 아니라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 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 떠오른다. 개발과 편리함 속에 고통받고 폭력을 당해야 했던 사람과 동물들, 뭇 생명들은 잊히고 우리는 그들과 단절된 채로 살아간다. 작고 약한 것들에 대한 연결감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작업의 첫 번째 단계는 아닐지 생각해본다. ※ 이 기사는 경남도민일보에 연재 되었던 기사의 재수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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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수발전소 댐 생기고 아름다운 골짜기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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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길은 무너지고 있다(중산리∼천왕봉)
- 지리산 이야기 (1) 빠른 길은 무너지고 있다(중산리∼천왕봉) 잘리고 파헤쳐진 지리산에 희망의 씨앗을 배혜원 시민기자(지리산 필름 대표) (webmaster@idomin.com) 행정, 지역발전 미명하 자연파괴 도로 넓히고 산악열차 사업 추진 토건 개발이 지역 미래 보장할까 지속가능한 삶 이룰 방법 찾아야 '억울하면 성공하라'는 선배들의 안내에 따라 서울에 갔던 나는 그곳에 내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고향에 돌아와 살면 굶어 죽지는 않겠다는 생각으로 지리산에 와서 산 지 3년 차에 접어들었다. 나의 터전이 수몰된다는 소식에 억울한 마음에 환경운동을 하게 된 것도, 지금처럼 살면 지구의 평균온도가 1.5도 상승하는 데 10년 남짓 남았고 그 후에는 돌이킬 방법이 없어진다는 소식을 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3년 동안 고향인 하동에서 지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첫째로 도시처럼 많이 벌고 많이 소비하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점, 우리가 조금 빠르고 편리한 생활을 누리게 되는 일들은 어떤 곳에 사는 사람들과 동식물들에는 생존을 위협하는 일이라는 것, 우리가 우리 사회와 자연환경 안에서 연결감을 가지고 함께 이야기한다면 세상은 조금씩 변해 갈 것이라는 것. 하지만 그 와중에도 현실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 현실은 말하자면 앞으로 우리가 기후위기를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은 7.5년 남짓 남은 것이다. 3월 17일, 오랜만에 천왕봉 등반을 위해 중산리로 향했다. 관광객들과 물동량을 늘리려고 4차로 확장공사가 한창인 19번 국도 화개∼악양 구간에서는 많은 벚나무가 잘려나갔다. 남은 벚나무들에서 예년보다 2주나 빠르게 벚꽃이 터지고 있었다. '환경운동을 하는 사람이 샴푸는 왜 쓰고 디젤차는 왜 타냐'는 질문은 이제 환경운동하는 사람에게만 할 수 있는 비판이 아닌 상황이 되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하동에서 서울까지 4시간이면 갈 수 있고, 2시간이면 지리산을 둘러볼 수 있는 지리산 산악열차를 놓겠다는 계획마저 등장했다. 교통이 빨라진 탓에 코로나19도 빠르게 번졌다. 농산물가격은 폭등하고 돈이 있어도 마트에 식료품이 없어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고, 사람의 생명을 구하지 못하는 장면이 세계 곳곳에 펼쳐지고 있다. 갑작스런 한파에 미국의 텍사스 지역에서는 전기공급이 끊기기에 이르렀다. 민영화된 전기공급회사가 수익을 극대화하고자 난방설비를 폐기한 까닭이었다. 석탄화력발전소 주변지역 주민들이 암에 걸려 죽어나가고 원자력발전소의 방사능이 유출되어도 전기 공급은 멈출 수가 없다. 수십 년 된 벚나무가 잘려나가고 이름 모를 생명이 죽어나가도 도로 확장은 계속 되어야 하고, 산악열차와 케이블카를 비롯한 산악 개발은 계속 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먹고살기 위해서다. 우리의 '먹고사는 문제'는 숭고하기 때문이다. ▲ 천왕봉에서 바라 본 산청군 중산리 쪽 지리산줄기. /배혜원 "산악열차는 이념이다, 인민군과 국방군의 차이와 같다." 지리산권 전북 남원 모 시의원의 이야기다. 그의 이야기는 매우 불편하지만 성찰의 지점이 있다. 국내에서 추진한 모노레일 사업은 수익성이 알려진 바 없고, 케이블카 사업 역시 지역경제에 이바지하는 바는 미미하다. 알프스하동프로젝트의 시공업체로 선정된 대림건설이 '사업성 저하로 사업추진이 불가하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이념논쟁이라면 국내 산악관광 개발사업 추진은 환경문제와 경제성, 주민 수용성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성적 판단과 합리성이 배제된 가치관과 믿음에 대한 문제라는 이야기다. 이념에 따라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고 여성들을 겁탈할 수 있다는 논리가 지배했던 해방공간의 지리산이 떠오른다. 기후위기와 코로나19 세계 대유행(팬데믹)이 덮친 지구에 인민군과 국방군, 인간과 동물, 환경론자와 개발론자로 나뉜 것들은 서로 화해하지 못한 채 함께하고 있다. 어쩌면 기후위기와 팬데믹조차도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로 나뉘어 있는지도 모른다. 어디까지가 이념논쟁일까. 알프스하동프로젝트 추진위원회와 하동군수는 산악열차를 비롯한 지역의 관광산업 활성화만이 지역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고, 지금이 대규모 개발사업을 통해 지방소멸을 막을 수 있는 골든타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리산권뿐 아니라 전국의 인구가 줄어들고 그에 따라 지역이 소멸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는 대부분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 하동군청 앞에서 '산악열차 반대' 현수막을 들고 서 있는 시민. /배혜원 지역의 청년들이 사라지고 인구가 소멸하는 이유는 지역에 산업단지와 대규모 관광 랜드마크가 없어서가 아니다.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 자연, 그들이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무시하고 석탄화력발전소를 짓고, 무리하게 산업단지를 조성하고, 벚나무들을 베고 도로를 확장하고, 강을 파헤쳐 돈으로 바꾸려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가진 고유한 가치를 무시하고 돈으로만 계산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돈으로 계산해도 수지가 맞지 않는 것이 자명한 상황에서 대규모 토목건축사업만이 우리의 꿈과 희망이라고 우기고 있다. 지난 23일 지리산산악열차의 시공사로 선정됐던 대림건설은 지역갈등과 환경민원이 해소되지 않고, 사업성 저하로 산악열차 사업을 추진할 수 없다고 알려왔다. 기업이 사업성 저하와 지역갈등을 문제로 철수할 정도라면, 공공개발로 산악열차를 추진하는 것은 더더욱 위험한 일이 아닐까. 지역에 공항과 고속철도 같은 교통시설을 건설하는 일이 지역 균형발전을 위한 것이 아닌 것처럼 지역에 관광개발을 한다고 해서 지역이 발전할 수 없다. 관광객이 빠르게 지리산에 오갈 수 있다면 그 지역 안에서의 숙식과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줄어든다. 청년들이 일용직,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시골에 살 이유가 없다. 빈집이 넘쳐나지만 도시 사람들의 세컨드하우스 개발사업으로 부동산 가격은 폭등한다. 시골에서마저 살 만한 집을 구하기 어렵다. 제대로 된 공공병원과 보육시설도 부족하다. 겉으로 청년들이 희망이라고 하지만 첫째는 얼마, 둘째는 얼마, 셋째는 얼마라는 식으로 신생아마저 가격표를 붙여 돈을 지급하고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을 무책임하고 쓸모없다고 몰아붙이고 있다. ▲ 하동군 한 게시대에 걸려 있는 지리산 산악열차 사업 찬성과 반대를 주장하는 현수막. /배혜원 10여 년 만에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서니 감회가 새로웠다. 천왕봉에는 덱도 많이 생기고, 지난 수해로 강돌도 많이 들여 놨다. 무엇보다 법계사 입구까지 버스도 다닌다. 지리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더 빨라졌다. 설악산 정상에 케이블카가 놓인다면, 지리산 정상에 케이블카가 놓여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이 지구에 발붙이고 살 수 없는 시기도 더 빨라질지 모른다.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할까. 지역은 이미 자립할 수 없는 상황이고, 유지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지구의 기후 위기도 마찬가지다. 성장이나 개발이라는 상상이 가능할까? '발전적 해체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땅을 일군다. 자립을 꿈꾼다. 한 줌의 씨앗이라도 남기기 위해서다. 역부족이나마 희망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콘크리트 바닥 갈라진 틈 사이로 싹이라도 틔우기 위해서다.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7개월간 지리산 이야기로 글을 쓰게 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11편을 연재하는 제목인 '지리산 이야기'는 나를 비롯한 지리산 사람들이 지리산의 자연환경을 바라보고, 우리 공동체가 이곳에서 지속가능한 삶을 이어나가는 방안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지면을 할애해 주신 경남도민일보에 감사드린다. 배혜원 시민기자(지리산 필름 대표) *이 기사는 '지리산사람들' 회원들이 경남도민일보에 연재 하였던 "지리산 이야기 기획시리즈"를 재수록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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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길은 무너지고 있다(중산리∼천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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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농 양파 재배와 양파 크게 키우는 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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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그리고 하동 녹차찐빵
- 추억 그리고 하동 녹차찐빵 추억 그리고 하동 녹차찐빵 길거리에 걷다 보면 흔하게 보이는 가게 중 하나가 찐빵가게다. 구례 같은 시골에도 스타벅스나 롯데리아는 없어도 찐빵가게는 1-2개가 있다.그만큼 흔하고 흔한 것이 찐빵이다. <찐빵은 흔하다. 하지만 제대로 만든 찐빵은 결코 흔하지 않다.> 찐빵이 흔한 이유는 뭘까? 그것은 그만큼 먹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찐빵을 먹는 이유는 뭔가? 그것은 추억 때문이 아닐까? 누구나 어렸을 때 어머니가 막걸리에 발효시켜 만들어진 찐빵의 맛을 기억할 것이다. 지금은 찐빵이 겨울에 먹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순전히 찐빵 만드는 기업의 광고 때문이고기억 속에 찐빵은 대부분은 여름에 만들어 먹었다. 딱 이때 장마철 말이다. 콩과 벼도 심고 아직 고추는 익지 않아서 따지 않아도 되는 딱 이맘때 어머니는 모처럼 농사일을 쉴 수 있었다. 그 동안 바쁜 농사일에 챙겨주지 못한 자식들을 위해 찐빵을 만드셨던 것이다. 처마에 떨어지는 낙숫물을 받던 커다란 고무 다라이에 물이 차고 넘치는 날 막걸리를 넣어 발효된 밀가루에 팥을 넣어 만들어 주던 그 찐빵 맛의 추억은 삭막한 도로를 지나다가도 찐빵만 보면 나도 모르게 어머니의 얼굴과 함께 겹쳐지곤 했다. 2005년 가을 유독 하늘이 파란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하동에서 찐빵을 만든다는 두 분을 만났다. 박중욱씨와 양대화씨였다. 딸이 하나 있다. 박중옥씨는 천식을 앓고 있다. 그의 천식은 모든 것을 까다롭게 만들었다. < 울산에서 만나 결혼했다. 중매였다.> 울산에서 만나 결혼했고 거기서 살다가 천식 때문에 더 이상 일이 하기 힘들어 고향인 하동에 내려왔다.누나가 찐빵을 만들고 있어 거기서 빵을 배웠다. 하지만 그는 천식이 있었고 수입밀가루로 만든 빵은 그의 몸이 먼저 거부했다. 그래서 그의 우리밀로 찐빵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가 먹어도 문제가 없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찐빵에 관심이 갔다. 우리밀로 만들과 팥도 국산 팥을 쓴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동 터미널에 주차를 하고 찾아가보니 시장통 골목에 작은 가게가 있었다. 그들의 작업장이장 판매장이었다. 맛짱이라는 가게였다. 여느 시골읍내 장터골목의 찐빵집이었다. 밖에는 찐빵을 찌는 찜 솥이 있고 만두도 있었다. 부부가 빵을 찌고 만두를 만들어 파는 평범하기 그지 없는 찐빵집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다른 것이 외부가 아니라 재료에 있었다. "우린 마가린을 쓰지 않아요. 마가린을 쓰면 모든 참가제를 쓴 것과 같아요.이미 마가린 속에 참가제가 다 들어 있거든요. 통밀 만을 이용합니다.통밀이 거칠기는 하지만 밀 본연의 맛의 충실합니다. " 우리팥을 이용해요. 비싸지만 그것만 사용합니다. 우유 계란을 사용하지 않아요. 손으로만 만들어요. 만들기 어렵지만 손으로 만든 것이 훨씬 부드럽고 맛이 좋아요" 부부가 하루 종일 만들 수 있는 빵의 양의 약 600개라고 한다. 하지만 매일 이렇게 만들 수는 없다. 보통 하루에 300개 정도의 빵을 만든다. 1년에 만들 수 있는 양이 이미 정해져 있다. 109,500개다. 5개씩 포장되어 있으니 21,900봉이다. 하루에 60봉이다. 이것이 이들이 매일 팔 수 있는 찐빵의 전부다. 더는 없다. < 양대화님> 그렇다고 이들이 처음부터 완벽한 찐빵을 만든 것은 아니다.박중옥대표는 " 우리 빵의 레시피는 올해 만들어 졌어요" 매일매일 연구하고실험해서 겨우 완성했죠. 결국 8년이 걸려 완성된 레시피다. < 박중옥님> 그의 말대로 그의 빵은 처음보다 부드럽고 맛있다. “아무리 몸에 좋아도 맛이 없으면 찾지 않으니까요. 설탕을 조금 사용하고 단맛을 올렸고 통밀의 거친 맛을 빼고 부드러워졌어요.우유를 사용하지 않고 부드럽게 만들기는 쉽지 않거든요.” < 찐빵이 무겁다. 꼼수 없이 그냥 팥이 많아서다. > 하동녹차찐빵을 손에 잡으면 무게부터가 다르다.다른 찐빵들이 비싼 팥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구사지만 이들은류현진의 돌직구처럼 그냥 팥을 많이 넣어 만든다. 다른 꼼수는 없다. 우리밀빵이라고 해서 구입했더니 알고 보니 팥은 수입 팥이고국산 팥을 사용했다고 구입했더니 마가린이 들어 있는 등의 이런 저런 꼼수가 없다. 안심하시고 드셔도 됩니다. 그렇다 그냥 믿고 드시면 된다. 그저 정직하기 때문이다. 혹시나 들어있는 꼼수가 있을까 봐 항상 신경 쓴다. 재료를 확인하고 꼼꼼히 살펴서 혹시라도 나쁜 것이 있을 까봐 먼전 살핀다.이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 아이들이 좋아한다. 맛있으니까> 현재 그들은 하동 악약으로 작업장을 옮겼다. 꽤 큰 공장이다. 하지만 여전히 두 사람이 전부다. “공장이 넓어져서 작업하기 편해서 좋아요. 깨끗하고요.” 공장개소식에 참가했을 때 어느 개업 장에 방문했을 때보다 기분이 좋았다. < 요즘은 체험행사도 한다. 찐방도 만들어 놓고 지리산 여행을 하고 오면 발효된 빵을 쪄서 가져간다.> 보통은 크게 시작하지만 작은 골목에서 시작해서 여기까지 온 두 분의 노력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손으로 만든 것은 정직하고 더 많은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세상이다. 손으로 직접 만들어 부드럽고 좋은 재료를 썼는데 맛도 좋다. 하나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다른 것과 비교 할 수 없다. 좀 작게 만들어도 되지 않냐고 하지만 양심이 또 그렇지 않다. <뜨거워도 먹고 싶어한다. 왜 맛있으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 길로 걷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은 이와 같은 사람들 때문에 변한다. 그들이 그들의 길을 가기 때문이고 그것은 곧 새로운 길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들의 손은 바쁘고 그 손에서 새로운 빵들이 만들어진다. 어느때 먹어도 좋다. 그들이 만든 것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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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 지리산자락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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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그리고 하동 녹차찐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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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가격이 비싼 이유
- 올해 딸기 가격이 평년 보다 70% 급등했습니다. 그 이유를 남원의 딸기 농가를 만나 확인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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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가격이 비싼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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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농부에게 추천하는 아피오스
- 초보 농부에게 추천하는 작물 "아피오스" 귀농해서 어떤 농사를 지을까 고민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피오스는 농약이나 특별하게 관리가 필요가 없는작물입니다. 단 판매가 힘들 수도 있으니 지인이 많은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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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농부에게 추천하는 아피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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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 대책으로 심은 블랙 사파이어 포도
- 구례 현근종 농부는 노후 대책으로 블랙 사파이어 포도를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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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자락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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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 대책으로 심은 블랙 사파이어 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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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찾는농부들 침수된 땅에 서다.
- <수해로 인해 망친 옥수수 > 8월8일 아침 멀리 섬진강이 넘실넘실 둑을 넘는 것이 보였다. 마을 앞 정자 넘어 까막정이뜰이 잠기기 시작했다. 이 곳은 비가 많이 오면 자주 잠기는 곳이었기에 별일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시간이 좀 더 지나고 19번 국도가 잠기기 시작했다. 논 옆에 있던 저온저장고가 잠기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배처럼 떠 오르기 시작했다. 마을 앞을 나가 보기 그 사이 마을 앞 모든 논이 물에 잠겼다. 불과 두 세 달 전에 새로 만들었던 하우스 하나가 물속으로 사라졌다. 섬진강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한 마을 사는 현근종씨 하우스가 물속으로 사라졌다. 그 안에 고추와 옥수수 그리고 아피오스가 심어져 있었다. 지금은 모두 사라졌다. 섬진강에서 넘친 물들이 점령군처럼 마을과 논 그리고 축사를 물속으로 집어넣고 있었고 갈 곳 없는 소들은 섬진강 둑에서 잠긴 축사를 그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뉴스 속보로 남원 금지면의 제방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렸다. 남원에서 농사를 짓는 김동일 농부에게 전화를 했다. 집과 하우스가 모두 물에 잠겼다고 했다. 섬진강 하류지역인 남원 금지면 하도마을의 하우스 지붕까지 물이 찼다고 했다. 하도는 감자농사를 많이 짓고 맛도 좋은 곳이다. 김동일 농부도 하도에 비닐 하우스가 6동이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일이 힘들어 그만 두려고 했다면서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물에 찬 하우스는 고물상에 이야기해서 전부 철거를 해가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가보기도 싫고 치우기도 힘들고 해서 안 가보려고요." 그게 15일 전인데 며칠 전 전화를 했더니 잠긴 하우스를 정리해서 토마토를 심었다고 했다. 겨울에 나올 딸기 모종도 다시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물에 잠겼던 하우스에는 10월이 되면 다시 붉은 토마토가 열릴 것이다. 땅은 사라지지 않았고 농부도 그대로 남았다. 구례 심문희 농부 하우스도 물에 잠겼다. 대부분 살아 남지 못했지만 다행이 몇몇 농산물은 그래도 멀쩡했다. 줄을 타고 오르는 여주나 수세미가 살았다. 죽은 것도 있지만 살아남은 것들도 있었다. 죽은 것이 더 많지만 하우스가 멀쩡하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홍수는 갑자기 농부들을 터전을 덥 쳤다.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하우스가 물에 잠기고 물은 침수당 했다. 소들은 죽어 나갔다. 죽은 소들 옆에서 농부들은 절망했다. 아직 희망을 이야기하기에는 그 피해가 너무 크다. 하지만 땅은 그대로 남았고 농부도 여전하다. 다시 시작해야 지… 별 방법이 없잖아. 전화기 넘어 한숨과 함께 말하던 그 목소리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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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 지리산자락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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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찾는농부들 침수된 땅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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툇마루 수다
- 한승명 (지리산생명연대 사무처장) 저는 지리산(산내면)에 깃들어 어머니를 모시고 두 아이를 키워내고 이제는 <지리산생명연대>에서 함께 지리산이 되자고 총총 걸음을 걷고 있는 아낙입니다. 봄볕 따사로운 툇마루에서 봄나물 다듬듯 잘 아시는 이야기 하나 풀어놓을게요. 한 농부에게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어느 날 더 많은 황금알을 갖으려고 거위배를 갈라보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거위는 죽고 뱃속에는 창자와 똥뿐이였습니다. 농부는 울상이 되었습니다. '지리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의 우리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황금(돈)인줄 알던 때도 있었고 성공인줄 알던 때도 있었고 사랑인줄 알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리산에 깃들면서 진정 내게 소중한 것은 '생명'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리산을 우러러 어머니의 산, 여신(마고)의 산이라고 칭송하는 것은 모든 것을 내어주고 살려주고 품어준 '생명의 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지리산을 나의 이기와 편리로 파헤치고 자르고 베어 거위 죽이듯 지리산을 죽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곳에 태어나 지리산 덕분에 잘 살아왔고,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어려움과 직면하거나 어지러운 세상, 환란을 맞아 살아보고자 깃들은 지리산이건만 그 고마움을 망각한 채 그 지리산이 죽어가고 있는 것은 나와 상관없는 듯 침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지금 살아있다는 것은 이 땅을 지키고자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았으며, 모든 생명이 함께 살아야한다고 거리에서 외치고, 어린 자식들을 잃고 슬피 우는 어미들을 안아 주었고, 병든 세상에 맞서 서로를 살리기를 기꺼이 해낸 지리산 같은 이들 덕분입니다. 나는 그들을 주저 없이 '지리산'이라고 부릅니다. 지리산은 제일 높이 솟은 천왕봉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높으니 낮으니 어깨를 걸고 있는 모든 봉우리가 모두 '지리산'입니다. 자신을 내어놓고 서로 돌보고 살리면 내 자신의 생명도 건강하고 풍성하게 살수 있다는 지혜를 지리산은 가르쳐주었습니다. 오늘도 멍청이 잠을 자는 나를 흔들어 깨우는 것들이 있습니다. 기지개켜는 흙, 개구리 울음에 흔들리는 바람, 소녀의 숨소리처럼 달뜬 냇물, 온갖 생명들이 저마다 부르는 노래... 지리산이 이 봄에 내 귀를, 내 눈을, 내 온 몸을 흔들어 깨웁니다. 쑥개떡이나 빚어 이웃과 나눠 먹어야겠네요.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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툇마루 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