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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에는 있고 놀이에는 없는 것은?
"달빛 놀이터를 하는 금요일이 너무 기대되요" “게임은 시작하기 전부터 긴장이 되는데 놀이는 승부가 없어 맘이 편해요” 우리는 나이가 들기 때문에 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놀지 않기 때문에 나이가 드는 것이다. -조지 버나드 쇼- 지리산산골 토지면 토지초등학교에는 달빛 놀이터라는 전래 놀이를 하며 아이들과 함께 노는 마을학교가 있다. "놀이도 배워야 하는 시대" ▲ 전래놀이를 하는 아이들 어른 아이들이 함께 놀이를 즐기고 있다. ⓒ 마을학교 지난주 일요일 전래놀이를 보급하는 아자 학교 대표 고갑준선생님과 함께 놀이를 하고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날 아이들과 학부모는 이랑타기, 진놀이, 두부놀이, 안경놀이, 술래잡기, 짝꿍 술래잡기를 배우고 함께 놀았다. 학부모들도 땀을 듬뿍 흘렸고 아이들은 녹초가 되었다. 반나절 동안 놀이에 빠지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신이 나서 놀이에 몰입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린 시절 놀이는 마을형과 누나들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배웠다. 배웠 다기 보다는 그냥 알게 되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되었다. 하루 종일 이 놀이 저 놀이가 끝이지 않았다. 요즘처럼 찬바람이 부는 때에는 고산댁 담벼락 양지에 모여 소꿉놀이를 했다. 반짝이는 사금파리를 모으고 분유통을 가져다 솥단지를 만들어 밥도 하고 국도 끓여 맛있게 먹는 시늉을 하며 놀다가 지겨워지면 밤톨 같은 돌을 주어 다가 공기놀이를 했다. 공기놀이처럼 기술이 필요한 놀이는 동네 선수들이 다 파악이 되어 있기 마련이어서 승부의 재미를 위해 적당히 편을 만들어 놀았다. 그것도 지치면 다른 놀이를 하면 된다. 시간이 없지 놀이가 부족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놀다 보면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고 굴뚝에 연기가 난다. " 종구야! 너네 집 연기 난다" 밥먹으로 가야겠다. "왜 우리 엄마는 밥을 빨리하지" 불평이 따라오기 일수였지만 어쩔 수 없다. 해가 지고 여기저기 동무들 집에 연기가 모락모락 퍼지면 누가 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아쉬워할 것도 없다. 내일도 놀며 되니까? 우리는 모두 시간 부자였다. 우리의 놀이는 끝이 없었지만 어제 함께 놀던 형과 누나들이 고학년이 되면 우리와 함께 놀아주지 않는 것이 그저 섭섭할 따름이었다. 그러다가 나도 어른이 되었고 놀이는 점점 잊혀 갔다. 그러다가 마을하교를 하게 하면서 옛 놀이를 하나 둘 다시 하게 되었다. 좀 덜 잘 놀기 위해서 잊힌 놀이를 기억하고 있는 선생님을 초대해서 놀이를 배우고 전래 놀이를 하며 아이들과 함께 놀이를 전하는 일이 토지 마을학교가 달빛 놀이터가 1년 동한 한 사업의 전부다. 놀이와 게임의 가장 큰 차이는 승부에 있다고 한다. 게임에는 반드시 승부가 있다. 승자가 있고 패자가 있다. 놀이에도 승부가 있는 놀이도 있고 없는 놀이도 있지만 승부가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이겨도 그만인 것이 놀이다. 술래도 승자가 아니고 숨는 아이도 승자가 아니다. 승자는 없고 재미만 있다. 더구나 놀이는 함께 해야 하고 맨날 나만 이기면 그 친구가 더 이상 놀아주지 않기 때문에 적당히 져주기도 해야 한다. 그래야 맨날 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도 아니면 다음판에는 이긴 사람 진사람을 섞어 버리면 어느새 승부는 사라지고 만다. ▲ 잘 놀려면 놀이도 배워야 한다. 놀이를 배우는 아이들과 학부모들 ⓒ 토지달빛놀이터 전래 놀이는 어른도 아이도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물론 축구를 아이와 함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야구도 아이와 함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드물다. 왜냐면 체격과 능력차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이는 아니다. 달빛 놀이터에서 매번 하는 그물 술래잡기나 대문 술래잡기는 학부모와 유치원생이 함께 뛰어 놀면서 할 수 있다. 특별한 능력도 필요 없다. 아이들이 더 유리한 놀이도 있고 어른들이 배려해야 하는 놀이도 있지만 나이와 성별로 능력으로 인해 차별당하지 않고 함께 어울려 놀 수 있다는 점이 게임과는 다르다. 승부도 없고 오직 재미만 있는 놀이를 통해 아이들은 어떤 것을 배우게 될까요? "PC게임은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놀이는 혼자 할 수 없습니다. 놀이를 하려면 혼자서 할 수 없지만 배려하지 않으면 놀이가 진행되지 않습니다. 내가 힘이 쌔고 강하다고 해서 매번 이기면 친구가 더이상 놀아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적당히 힘 빼고 배려하면서 함께 해야 하는 것이 놀이입니다. 다음번에 놀아주지 않기 때문에 매번 승리하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놀이를 통해 배우게 됩니다" - 놀이선생님- 우리의 고전 놀이는 두 가지로 보면 된다. 민속놀이는 특정한 날에 하는 대규모 놀이 예 줄다리리 강강수월래 차전놀이 같은 놀이다. 전래놀이는 매일매일 할 수 있는 일성적인 놀이다. 예를 소꿉놀이, 재기차기,비석치기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토지 아이들이 게임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내 아이들도 매번 달빛놀이터에 나가서 신나게 놀지만 집에 오면 다시 게임을 한다. 하지만 특이한 것은 게임을 그렇게 좋아하는 아이들도 게임 시간을 포기하고 달빛놀이터에 나가서 노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전래놀이는 맘이 편해요. 놀기만 하면 되니까요” “게임은 시작하기 전부터 마음이 조마조마해요 이기면 좋지만 지면 기분 나쁘고 매번 이기는 아이만 이겨서 기분이 별로 에요” 내 아이에게 물어보면 항상 이렇게 말한다. 게임은 혼자 또는 팀이 상대방과 경쟁을 통해서 승부를 결루는 것이 대부분이다. 항상 승부가 있고 패자가 있다. 승자는 즐겁고 패자는 유쾌하지 않다. 전래 놀이는 하다 보면 승부도 없고 패자도 없다. 즐겁게 땀 흘리고 놀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렇다고 PC 게임을 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지금 아이들은 친구들과 놀만한 시간도 없고 공간도 부족하다. ▲ 놀이에 관한 토론을 하는 놀이 선생님과 학부모들 놀이와 게임의 차이 그리고 놀이를 통해 배우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 토지달빛놀이터 우리가 하는 것은 한 달에 한 두번이라도 아이들에게 놀시간과 공간을 열어주자는 것이다. 아이들과 더불어 전래 놀이를 통해 아이들에게 지리산 산골 마을 공동체의 일원이었다는 생각을 심어주는 것이 놀이의 핵심이라는 생각이다. 오래전엔 놀이가 일의 연장선에 있었다. 놀이를 통해 힘을 키우고 놀이를 통해 협동과 협력을 배웠다. 이를 통해 서로 돕는 품앗이와 두레를 했던 민족이 바로 우리의 민족문화였다. "전래놀이는 인공적인 것이 필요하지 않다” 자본이 필요 없다. 고가의 PC가 없어도 되고 특별한 장비가 없어도 가능하다" 놀이는 평등하다. 청소년 자살율 1위인 우울한 한국 사회에서 사라져가는 우리의 전래 놀이를 통해 우리 아이들과 학부모 그리고 마을 공동체가 더불어 살아가는 행복과 관계의 미학이 필요한 시기다. 놀이의 반대는 일이 아니라 우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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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하는 청춘의 원더풀 라이프 “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
섬진강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오고 가던 시절이 있었다. 아마도 2005년이나 2006년쯤이었을 것이다. 나는 구례에서 악양까지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왕복 60km였다. 봄이 끝날 무렵 시작한 자전거 출퇴근은 겨울이 오면서 끝났다. 그 후로 자전거 출퇴근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하던 일을 그만두었고 악양은 나에게서 멀어졌다. 지리산에 내려와서 살게 된 이유는 간단했지만 살아가기는 녹록하지 않았다. 구례에서 섬진강을 따라 악양으로 향하면서 그때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는 올해 지리산사람들 공동집행위장이 되었는데 올해 관운이 있는 사주라고 했다. 사진 김인호> 오늘 악양에 사는 최지한씨를 만나기로 했다. 그를 지난겨울 남원의 산악열차 반대 시위장에서 본 기억이 있다. 아마도 남원시청 옆이었을 것이다. 한겨울이었는데 그는 맨발에 슬리퍼 차림이었다. 딱 봐도 보통은 아닌 사내다. 머리는 삭발이었다. 그를 악양면 소재지에 있는 카페에서 만났다. 길 건너에 악양초등학교가 보였다. <그의 첫인상은 “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진 김인호> 오래 전에 악양에 일할 때 그 초등학교 운동회에 참가했던 기억이 난다. 아이들의 신난 함성이 가득한 운동장에 오후에 햇살이 눈 부셨다. 커다란 히말라에시더(개잎갈나무 50미터까지 자란다)가 동쪽에 있었다. 누군가는 이 나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무라고 했었다, 나도 가끔 동의하지만, 집안에 심기에는 나무가 너무 크다. 이 나무를 키우다 보면 예상보다 너무나 커버리기 때문에 위를 잘라버린다. 주변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들은 싹을 잘라 버리는 것이 사회의 일반적이 법칙이다. <그가 환경운동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공해문제연구소에서 만든 한국의 공해지도라는 책을 초등학교 3학년 때 만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진 김인호 > 그의 첫인상은 “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 사람들이 히말라야 시더의 위를 자르는 것같은 사회의 일반적인 잣대를 그는 봐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가 하동에 살게 된 것은 2006년쯤이라고 한다. 내가 하동을 떠난 것이 그쯤이었다. 그는 멀리 강원도 고성 출신이라고 했다. 화진포가 가까운 강원도 산골 마을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북한을 지척으로 둔 강원도 최북단에서 태어났다. 나는 몇 해 전 화진포에 가봤다. 화진포 바다는 서해나 남해와는 다른 고독하고 외로워 보이는 진한블루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초등학교 시절 어느 해 서울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그 후 대학에서 양식업을 공부했다. 그리고 남해의 여러 섬마을을 전전하며 양식장에서 일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결국 여기 하동 악양에 정착했다. 그의 직업은 대바구니를 만들거나 수리하는 일과 정원관리라고 한다. 그리고 지역의 사람들과 환경을 지키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환경운동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공해문제연구소에서 만든 한국의 공해지도라는 책을 초등학교 3학년 때 만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도 고등학교 시절 그 비슷한 책을 본 적이 있다. 한국에서 가장 오염도가 높은 곳은 하동 넘어 광양이었다. 광양에는 광양제철소가 있다. 세계최대 규모의 제철소가 있고 거기서 품어져 나오는 대기 오염 물질은 한국 대기 오염 물질의 5.43%라고 한다. 나 역시 검은 역기가 품어져 나오는 그 사진을 책에서 본 기억이 난다. 그 책을 보고 열 받아서 환경운동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동기가 순수하다. 아마도 그는 순수한 남자인 것 같다. 몇 해 전부터 하동은 산악열차로 인해 갈등이 깊었다. 악양 형제봉에 산악열차를 설치하겠다는 하동군의 야심 찬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산악열차 반대 운동을 했다. 그것도 열 받아서 했다고 한다. 나는 그에게 양말을 신지 않는 이유를 물었는데 대답은 간단했다. “발에 열이 많아서 답답해요.” 그는 역시 열이 많은 사람이었다. 재밌는 이야기를 해 달라고 했더니 그는 마루에서 3년을 살았던 적이 있다고 했다. 왜 그러셨나요? [어느 해 봄 비가 오는 날 구들이 고장이 나서 일산화탄소 중독이 된 적이 있어요. 마을로 기어와 동치미 국물을 얻어먹었어요. 그 후로 방에 들어가 자지 않았어요.] 방에 들어가지 않으니 마루밖에 잘 곳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마루에서 3년을 살았다고 한다. 보통 사람은 아니다. 카페에서 인터뷰하고 그가 일하는 대나무 공방에 가봤다. 녹색평론 읽기 모임이라는 작은 안내문이 문 앞에 붙어 있었다. 나 역시 오래전에 녹색평론 읽기 모임을 한 적이 있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오래전 일이지만 말이다. <간디의 물레라는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그가 수리하는 대바구니가 물레처럼 보였다.> 공방에는 헤진 바구니와 새로 만든 바구니 그리고 수리를 원하는 대바구니가 보였다. 그가 말한 바에 의하면 이것으로 먹고살고 약간의 잉여자본도 생긴다고 했다. 간단한 도구로 생계가 가능한 일이라서 좋다고 했다. 나는 이런 식의 밥벌이를 본 적이 없다. 그가 작업하는 모습을 한참 동안 보고 있었다. <공방에는 헤진 바구니와 새로 만든 바구니 그리고 수리를 원하는 대바구니가 보였다.> 익숙하게 대바구니를 수리했다. 능숙한 솜씨가 보기 좋았다. 간디의 물레라는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그가 수리하는 대바구니가 물레처럼 보였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도 간단한 도구로 새로운 물건을 만들거나 물건을 고치는 일은 매력적이다. <간디의 상징이 된 물레> 그가 좋아하는 영화는 고레이다 히로카즈 감독의 환영의 빛이라고 했다. 섬진강을 따라 돌아오면서 오후에 햇살이 섬진강을 비추는 것을 봤다. 아마도 환영의 빛은 이런 빛일 것이다. 누군가 한 번은 자신을 끌어들이고 유혹하는 환영의 빛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는 어느 곳에서 멍하니 서 있는 자신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는 반항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아마 그는 자본주의 주류 사회를 거스르고 싶은 환영의 빛에 어느 순간 이끌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는 빛이 이끄는 경로를 따라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항하는 청춘 최지한, 그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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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을 너무나 사랑했던 사람의 지리산 사랑법
첫 수선화가 피던 봄날 함양 휴천면으로 향했다. 지리산 높은 곳에는 잔설이 남아 있었지만, 우리가 만난 그날은 여름이라도 되는 듯 따뜻했다. 만나기로 한 식당 한쪽에 노인 한 분이 앉아 있었다. [함양 휴천면 지리산 리조트 식당] 봄나물이 가득한 밥상에서 음식 이야기와 날씨 이야기 같은 상투적인 말들이 오갔다. 식사가 끝나고 카페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를 시작하자 흰머리가 가득하던 그녀의 눈은 반짝이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이루지 못한 첫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10대 소녀 같았다. [김종직의 유두류록 탐구의 저자 류정자 작가. 사진 김인호] 류정자 선생님은 밀양 태생으로 1948년생이다. 1965년에 산악회 활동을 하던 사촌 오빠와 처음 지리산에서 왔다고 한다. "오빠가 지리산에 한번 가보자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때만 해도 지리산에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어요." “그때는 심원마을에서 출발해서 노고단으로 갔어요." “심원마을에는 사람들이 꽤 살고 있었죠" "심원마을에서 하루 쉬고 노고단에 올랐어요." "노고단에 오르니 노고단 천지가 모두 원추리 꽃밭이었어요. “ "산을 가득 메운 원추리꽃을 보고 있으니 너무 좋았죠“ "어찌나 예쁘고 곱던지 지리산이 내 가슴에 박혀 버렸죠“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순간 번쩍이는 것이다. 그날 그 일행은 노고단에 이틀을 머물다 내려왔다고 한다. "꿈같은 시간이었어요." [지리산 모임 [우리들의 산악회]에 회원으로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지리산 골골을 누비고 다녔다. 사진 김인호] 그때만 해도 그녀도 그날 이후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지리산에 빠져서 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처음에는 지리산은 노고단뿐이라고 생각했다. 지리산에 가고 싶을 때는 매번 심원마을을 거쳐 노고단에 올랐다. "제 산행 방식은 좋으면 매번 그 장소에 다시 가는 겁니다." 아마도 그런 스타일이었기 때문인지 노고단에만 가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단다. "다른 곳을 찾을 필요도 없었죠" 하지만 곧이어 지리산 골골 여기저기를 다니게 되었다. "결혼을 일찍 했어요" "부산에서 살았는데 부산에서도 틈만 나면 산에 왔지요." 지리산 모임 [우리들의 산악회]에 회원으로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지리산 골골을 누비고 다녔다. “저는 지리산 골짜기 골짜기 안 가본 곳이 없어요." "저는 좋으면 같은 장소를 자주 가는 스타일이거든요." "결혼하고 아이 셋을 키우면서도 매번 지리산에 왔지요". "아이들은 엄마를 지리산에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자랐어요."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를 빼고는 틈만 나면 지리산을 찾았습니다." 한 권의 책이 류정자씨를 탐구자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지리산 산행은 지리산이 좋아서 가는 것에서 지리산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그 결정적인 책이 바로 조선 시대 함양의 군수 김종직의 유두류록이다. [김종직(1431∼1492)은 조선 시대 성리학자·문신인 선생이 함양군수로 부임한 이듬해 지리산 천왕봉을 다녀와서 '유두류록(遊頭流錄)' 이란 기행문을 남겼다. 두류산(頭流山)은 '지리산'의 다른 이름이다. 1472년 8월14일부터 18일까지 4박 5일 일정으로 13.3㎞ 가운데 국립공원에 속한 노장대(함양독바위)∼상내봉(향로봉)∼미타봉∼어름터 4.5㎞ 구간이다. 옛 문헌에 김종직 선생이 올랐던 탐방로가 지리산 전체 등산길의 제1호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유람동기, 동행인, 날짜별 기록, 사적들, 풍경, 서정적인 감정, 당시 시대상 등을 모두 담고 있어 역사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 사실 필자도 김종직의 유루류록을 읽은 적이 있다. 물론 읽기만 했지 거기에 나오는 지명이라든지 절터라든지 이런 것에는 일말의 궁금증도 없었다. 오래된 지리산 이야기를 읽고 싶었고 마침 도서관에서 그 책을 발견하고 재밌게 읽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지리산 산중에 산재 되어 있는 민가와 암자 터 등을 보면서 지리산이 품고 있는 인간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들의 산지를 통해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 국역본을 접하면서 지리산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천착하게 되었다. 2003년 지리산학의 정립을 꿈꾸며 결성한 [지리99] 운영진에 참여해 본격적인 [유두류록 탐구팀]을 꾸려 20여 년간 탐구산행을 이끌어 왔다. 이 책은 그 오랜 탐구의 작은 결실이다. 또한 ≪유두류록≫ 탐구와 병행하여 문헌기록에 등장하는 폐사지 탐구에도 심혈을 기울여 찾아낸 암자터가 100여 군데 이른다. 이 외에도, ‘세석의 청학연못’, ‘지리산의 시대를 연 달궁’, ‘지리산 고성탐구-추성’, ‘촛대봉 각자 高麗樂雲居士李靑蓮書를 찾아서’, ‘대궐터 탐구’, ‘문창대는 어디인가?’, ‘천왕봉 성모석상 수난의 역사’, ‘천왕봉 각자 일월대에 대하여’ 등 다수의 소고를 발표하면서 지리산학의 정립에 몰두해 왔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전을 잡고 지리산과 함께 살고 있다.] - 노컷뉴스 소개 글- [지리99라는 사이트에 류정자 작가의 다양한 글을 만날 수 있다. 사진 김인호] 그녀의 나이는 이제 75세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지리산을 오른다. 3년 전에 김종직 선생이 산을 오르기 시작했던 마을로 이사를왔다. 류정자 선생은 두 번이나 암에 걸려 두 번의 큰 수술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정말 슬픈 일은 막내아들을 먼저 보낸 것이다. "그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엄마가 지리산에 다닌다고 아들을 잘 살피지 못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 후 몇 년간 지리산에 오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녀는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왔다. 지금 이루고 싶은 것이 있으세요? "뭐 다른 게 있을까요?" "이제까지 발견한 폐사지(사라진 절터)가 100여 곳이 됩니다." "이제 이걸 정리하고 싶어요." "책을 묶어 두면 누구에겐가 도움이 되겠지요." "김종직 선생님이 류두류록을 남기지 않았다면 그 후세에 지리산에 오르려고 했던 분들에게 참고 자료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제게 폐사지에 관심을 두지도 못했을 겁니다“ [김종직의 유두류록 탐구 600년 전 지리산 산행기 저자류정자] "제가 얼마 전에 김종직의 유두류록 탐구을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만, 제가 여러 서적과 문헌들을 참고하고 직접 수십 번을 찾아가서 발견한 지리산 폐사지 터에 대한 기록도 저 처럼 관심있는 누군가에게는 작은 도움이라도 되리라 생각 합니다." "이런 작업을 하는 사람은 없거든요." "그리고 김종직 선생님이 지리산에 올랐던 길을 복원하고 싶은 작은 소망이 있습니다." 지리산을 좋아하게 된 이유가 뭘까요? 류정자 작가는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그렇지! 사랑하는 것에는 이유가 없는 법이다. 그녀의 지리산 사랑이 60년이 되어 가고 있다. 무엇인가 사랑하게 되면 자주 보고 싶고, 더 알고 싶고,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것이 사랑의 방식일 것이다. 그녀는 지리산을 사랑하다 보니 자주 갔고, 관심이 커지다 보니 책을 냈고, 폐사지를 탐구했다. "내가 죽으면 지리산 골짜기 여기 저기에 뿌려 달라고 아이들에게 이야기 해두었어요." 그녀는 죽어서도 지리산과 함께하고 싶은 것이다. 찐 사랑은 이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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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출 4억에 도전하는 구례 오이 농부 이야기
구례 서동민 농부는 구례가 고향입니다. 건설업체에서 일하다가 몇 해전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가 두 번째 직업으로 선택 한 것은 농부 아버지가 하던 오이 농사입니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 도전이지만 규모를 늘려 작년 매출 3억 올해는 매출 4억에 도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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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닮아가는 구례 한전
요즘 기사에 가장 많이 나오는 그것이 압수수색이다. 그런데 구례에서는 검찰 대신 한전이 농민들을 압수수색을 하고 나섰다. 그들이 압수수색을 감행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농민들의 저온 창고다. 그들은 검찰이라도 되는 양 예리한 관찰력으로 농민들의 창고를 들쑤시고 다니면서 그들의 판단으로 불법 물품이 들어가 있다면 어김없이 벌금에 처하고 있다. 농업인구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빨리 사라지고 있는 직업 중에 하나다. 더구나 구례 농민들은 농사지은 이래로 가장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2020년 8월 수해 때문이다. 당시 피해 보상은 50%의 해당하는 금액만 보상받았다. 고작 2년 전에 농민들은 때아닌 수해로 인하여 재산의 50%를 상실한 것이다. 그것도 2년 이상 구례 농민들이 투쟁한 결과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전에서 농민들의 저온 창고를 수색해서 벌금을 물리고 있다. 벌금을 물린 이유는 농가에 설치된 저온 저장고에 1차 농산물 외에 김치나 가공식품, 물 등을 저장하여 '농업용 전기 공급 운영 규정'에 위반하였다는 것이다. 한전은 농사용 전력을 사용하는 농가들이 저온 창고에 농산물 대신 김치, 젓갈 등 가공식품을 보관했다는 이유로 2017년부터 구례에서만 농가 88곳에 위약금 8천200만 원을 부과했다. 그런데 올해는 60여 호에 5천 5백만 원의 과태료에 이른다 한전이 농민들에게 많은 벌금을 지금 물린 이유가 무엇일까? 한국전력공사는 현재 30조의 누적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한전은 세는 주머니를 찾고 나선 모양이다. 한전의 농사용 전기 판매량은 1902만8829㎿h(메가와트시)로 전체(5억926만9715㎿h)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3.7%에 불과했다. (2021년 기준) 그것도 대규모 기업형 시설 농장에서 쓰는 비용이 대부분이고 저온 창고로 사용된 전기료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더구나 현재 진행하고 있는 벌금은 명확한 기준도 없다. 저온 창고는 농민들의 농산물을 저장하는 창고다. 농민들의 농업 행위나 농사를 위하여 사용하면 큰 문제가 없다. 고추 농사를 지은 농민에게 고추나 고추장 고춧가루가 있으면 되고 쌀농사를 지은 농민들은 쌀이 있으면 된다고.…. 누구나 상식적으로 생각할 것이다. 정부는 농민들에게 지속해서 6차 산업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쌀만 생산하지 말고 쌀로 쌀과자도 만들어서 이것으로 체험도 하고 판매도 하라는 것이다. 그런 것을 요구했으면 저온 창고에 체험에 필요한 것들을 넣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것이 아닌가? 2차 생산물이 있으면 안 된다는 규정은 어디에 나오는 것인가? 농업용 저온 창고를 설치하거나 허가를 내주는 곳은 농림축산식품부와 지자체다 한전은 전기설치를 하고 요금을 받는 행위를 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한전은 농민들에게 벌금을 부과하려면 먼저 저온 창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농림부와 지자체와 상의를 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그 기준에 맞게 농민들에게 미리 통지하고 그때 벌금을 물리든 과태료를 물리든 해야 하는 것이다. 구례 한전 지사장은 검찰 출신이라도 되는 것일까? 한편 구례군의회는 "한전은 농사일하며 반찬 일부를 보관한 영세 농민들에게 가구당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의 과도한 위약금을 부과했다. 비현실적인 기준에 근거한 단속"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한전은 지난해 수협을 상대로도 가공품 보관과 관련해 수십억 원대 위약금 소송을 했다가 패소했다. 무리한 위약금 부과는 사회적 손가락질을 받을 수밖에 없다"라고 강조했다. 구례 한전은 근거에도 없는 단속으로 부과한 벌금을 즉각 철회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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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치 없는 갈치 마을에는 갈치 신문이 있다.
2023년 1월 9일 겨울 치고는 유난히 따뜻한 날 나는 갈치 마을 이장과 만나기로 했다. 남원 산중 마을 이름이 갈치라고 하니 그 이름이 독특해서 더 끌렸는지 모른다. 함께 가는 일행들과 함께 갈치 마을로 이동하기 전에 우리는 남원 시내에 있는 갈치 집에서 갈치 조림을 먹었다. 푹 끓여진 갈치와 무가 꽤 맛이 좋았다. 갈치 마을 가는 길은 남원에서 장수로 나가는 길목에서 보절면으로 꺽어 몇 분 들어가면 나오는 초입에 있었다. 갈치 마을을 둘러보니 전형적인 산골 마을이었다. 갈치 마을은 상갈치, 중갈치, 하갈치 마을로 생선으로 비유하면 머리, 배, 꼬리라고 볼 수 있을 것같다. 물론 갈치 마을과 바다에 사는 갈치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갈치의 꼬리와 머리가 비중이 작듯 중갈치 마을이 가장 크고 상갈치 하갈치 마을에는 각각 10가구 정도가 산다고 한다. 갈치 마을의 갈은 칡을 뜻하는 한자에서 왔다. 칡차를 갈(葛)근차 라고 쓰는 그 한자다. 즉 칡이 많은 동네라는 뜻이라 한다. <갈치신문 28호 사진속의 장면은 치치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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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농 양파 재배와 양파 크게 키우는 비법
- 남원에서 유기농 양파를 재배하는 농가를 만났습니다. 지난번 수해로 인해 집을 잃고 지금은 하우스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몇 개월 전에는 하우스에 불까지 나서 힘든 농가입니다. 그래도 양파는 쑥쑥 자라서 수확할 때가 되었네요. 유기농 양파를 재배할 때 어려운 점과 양파를 크게 키우기 위한 비법을 들어 봤습니다. 올해는 작년 저장 양파 때문에 양파 가격이 낮다고 합니다. 양파는 위에도 좋고 모든 요리에 꼭 필요한 채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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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농 양파 재배와 양파 크게 키우는 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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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그리고 하동 녹차찐빵
- 추억 그리고 하동 녹차찐빵 추억 그리고 하동 녹차찐빵 길거리에 걷다 보면 흔하게 보이는 가게 중 하나가 찐빵가게다. 구례 같은 시골에도 스타벅스나 롯데리아는 없어도 찐빵가게는 1-2개가 있다.그만큼 흔하고 흔한 것이 찐빵이다. <찐빵은 흔하다. 하지만 제대로 만든 찐빵은 결코 흔하지 않다.> 찐빵이 흔한 이유는 뭘까? 그것은 그만큼 먹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찐빵을 먹는 이유는 뭔가? 그것은 추억 때문이 아닐까? 누구나 어렸을 때 어머니가 막걸리에 발효시켜 만들어진 찐빵의 맛을 기억할 것이다. 지금은 찐빵이 겨울에 먹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순전히 찐빵 만드는 기업의 광고 때문이고기억 속에 찐빵은 대부분은 여름에 만들어 먹었다. 딱 이때 장마철 말이다. 콩과 벼도 심고 아직 고추는 익지 않아서 따지 않아도 되는 딱 이맘때 어머니는 모처럼 농사일을 쉴 수 있었다. 그 동안 바쁜 농사일에 챙겨주지 못한 자식들을 위해 찐빵을 만드셨던 것이다. 처마에 떨어지는 낙숫물을 받던 커다란 고무 다라이에 물이 차고 넘치는 날 막걸리를 넣어 발효된 밀가루에 팥을 넣어 만들어 주던 그 찐빵 맛의 추억은 삭막한 도로를 지나다가도 찐빵만 보면 나도 모르게 어머니의 얼굴과 함께 겹쳐지곤 했다. 2005년 가을 유독 하늘이 파란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하동에서 찐빵을 만든다는 두 분을 만났다. 박중욱씨와 양대화씨였다. 딸이 하나 있다. 박중옥씨는 천식을 앓고 있다. 그의 천식은 모든 것을 까다롭게 만들었다. < 울산에서 만나 결혼했다. 중매였다.> 울산에서 만나 결혼했고 거기서 살다가 천식 때문에 더 이상 일이 하기 힘들어 고향인 하동에 내려왔다.누나가 찐빵을 만들고 있어 거기서 빵을 배웠다. 하지만 그는 천식이 있었고 수입밀가루로 만든 빵은 그의 몸이 먼저 거부했다. 그래서 그의 우리밀로 찐빵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가 먹어도 문제가 없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찐빵에 관심이 갔다. 우리밀로 만들과 팥도 국산 팥을 쓴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동 터미널에 주차를 하고 찾아가보니 시장통 골목에 작은 가게가 있었다. 그들의 작업장이장 판매장이었다. 맛짱이라는 가게였다. 여느 시골읍내 장터골목의 찐빵집이었다. 밖에는 찐빵을 찌는 찜 솥이 있고 만두도 있었다. 부부가 빵을 찌고 만두를 만들어 파는 평범하기 그지 없는 찐빵집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다른 것이 외부가 아니라 재료에 있었다. "우린 마가린을 쓰지 않아요. 마가린을 쓰면 모든 참가제를 쓴 것과 같아요.이미 마가린 속에 참가제가 다 들어 있거든요. 통밀 만을 이용합니다.통밀이 거칠기는 하지만 밀 본연의 맛의 충실합니다. " 우리팥을 이용해요. 비싸지만 그것만 사용합니다. 우유 계란을 사용하지 않아요. 손으로만 만들어요. 만들기 어렵지만 손으로 만든 것이 훨씬 부드럽고 맛이 좋아요" 부부가 하루 종일 만들 수 있는 빵의 양의 약 600개라고 한다. 하지만 매일 이렇게 만들 수는 없다. 보통 하루에 300개 정도의 빵을 만든다. 1년에 만들 수 있는 양이 이미 정해져 있다. 109,500개다. 5개씩 포장되어 있으니 21,900봉이다. 하루에 60봉이다. 이것이 이들이 매일 팔 수 있는 찐빵의 전부다. 더는 없다. < 양대화님> 그렇다고 이들이 처음부터 완벽한 찐빵을 만든 것은 아니다.박중옥대표는 " 우리 빵의 레시피는 올해 만들어 졌어요" 매일매일 연구하고실험해서 겨우 완성했죠. 결국 8년이 걸려 완성된 레시피다. < 박중옥님> 그의 말대로 그의 빵은 처음보다 부드럽고 맛있다. “아무리 몸에 좋아도 맛이 없으면 찾지 않으니까요. 설탕을 조금 사용하고 단맛을 올렸고 통밀의 거친 맛을 빼고 부드러워졌어요.우유를 사용하지 않고 부드럽게 만들기는 쉽지 않거든요.” < 찐빵이 무겁다. 꼼수 없이 그냥 팥이 많아서다. > 하동녹차찐빵을 손에 잡으면 무게부터가 다르다.다른 찐빵들이 비싼 팥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구사지만 이들은류현진의 돌직구처럼 그냥 팥을 많이 넣어 만든다. 다른 꼼수는 없다. 우리밀빵이라고 해서 구입했더니 알고 보니 팥은 수입 팥이고국산 팥을 사용했다고 구입했더니 마가린이 들어 있는 등의 이런 저런 꼼수가 없다. 안심하시고 드셔도 됩니다. 그렇다 그냥 믿고 드시면 된다. 그저 정직하기 때문이다. 혹시나 들어있는 꼼수가 있을까 봐 항상 신경 쓴다. 재료를 확인하고 꼼꼼히 살펴서 혹시라도 나쁜 것이 있을 까봐 먼전 살핀다.이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 아이들이 좋아한다. 맛있으니까> 현재 그들은 하동 악약으로 작업장을 옮겼다. 꽤 큰 공장이다. 하지만 여전히 두 사람이 전부다. “공장이 넓어져서 작업하기 편해서 좋아요. 깨끗하고요.” 공장개소식에 참가했을 때 어느 개업 장에 방문했을 때보다 기분이 좋았다. < 요즘은 체험행사도 한다. 찐방도 만들어 놓고 지리산 여행을 하고 오면 발효된 빵을 쪄서 가져간다.> 보통은 크게 시작하지만 작은 골목에서 시작해서 여기까지 온 두 분의 노력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손으로 만든 것은 정직하고 더 많은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세상이다. 손으로 직접 만들어 부드럽고 좋은 재료를 썼는데 맛도 좋다. 하나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다른 것과 비교 할 수 없다. 좀 작게 만들어도 되지 않냐고 하지만 양심이 또 그렇지 않다. <뜨거워도 먹고 싶어한다. 왜 맛있으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 길로 걷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은 이와 같은 사람들 때문에 변한다. 그들이 그들의 길을 가기 때문이고 그것은 곧 새로운 길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들의 손은 바쁘고 그 손에서 새로운 빵들이 만들어진다. 어느때 먹어도 좋다. 그들이 만든 것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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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그리고 하동 녹차찐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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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아래(下)
- 김창승 (섬진강 수해극복 구례군민 대책본부 상임대표) 지리산과 함께 사는 기쁨을 아십니까. 큰산과 더불어 살고 싶다는 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는 없습니다. 갈망하면서도 가까이 갈 수 없는 산, 누구나 어느 때나 다가갈 수 있는 산이지만 특별히 허락된 자에게만 자신의 몸 한자리를 내어주는 산이기에 쉬우면서도 어려운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참배하듯 산을 보며 어떤 인연과 행운으로 지리산 아래(下)로 왔을까? 자문해봅니다. 그건 내 의지와 희망으로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래 전 부터 한 인간의 외로움과 허기 같은 갈증을 지켜보며 그의 자락, 어머니 같은 그의 품으로 불러준 지리산의 호명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지리산이 '김창승' 이름 석 자를 불러주었던 2014년 1월 14일, 그날은 지리산 하(下)에서 새로운 인생의 여정을 시작한 생일 같은 날입니다. 트럭에 짐을 싣고 오는 욕망의 덩어리를 지리산은 두 팔 벌려 그의 품에 안아주며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 시린 등을 토닥토닥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그날로 부터 지리산은 내 영혼의 안식처가 되었고 그의 곁으로 한 발 한 발 다가설수록 쉼표와 느낌표를 주었습니다. 산의 깊은 숨소리에 위안과 기쁨을 느꼈고 둘이서만 나누는 은밀한 대화는 달콤했습니다. 그를 떠나 멀리가면 왠지 어린아이처럼 불안했고 산이 도망가 버릴 것 같은 마음에 서둘러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무지개 터널을 지나 지리산과 구례가 한 눈에 보이는 언덕에 서면 나도 몰래 안도의 한숨이 나오곤 했습니다. 지리산중(中)을 돌면서 사람을 만났습니다. 마을 이름도 산을 닮은 그곳에는 야생화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상죽, 내죽, 상용, 중용, 하용, 상유, 중유, 하유, 상무, 하무… 산에 기대어 살며 산 하나씩을 내면에 끼고 있는 사람들은 겉으로는 무심해 보였지만 인사를 건내면 물 한 잔이라도 하고가야 한다며 옷 소매를 붙드는 속정 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햇볕 드는 마루에 앉아 몇 시간이고 살아온 얘기, 먼저 가신 서방님 얘기, 아이들 모두 잘 됐다는 얘기를 오래된 지인처럼 하시다가 다시 꼭 오라며 손을 흔드는 고향 같은 사람들을 이었습니다. 이런 인연들을 하나씩 쌓으며 지리산 들꽃 같은 사람들 이야기를 마음속 앨범에 저장하면서 7년이란 세월을 꿈처럼 보냈습니다. 지리산 꼭대기(上)에는 흰 눈이 내렸습니다. 산에 기댄 사람들은 눈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추억을 더듬고 산짐승은 깊은 잠에 들었습니다. 백옥의 산을 올려다 봅니다. 아, 깨끗하고 때 묻지 않으며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세상을 봅니다. 지리산으로 오기 전에는 높이 높이 올라가려는 꿈을 꾸었습니다. 아래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고 낮은 곳으로 내려가려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 헛된 꿈과 욕심을 내려놓고 이제는 소박한 꿈을 꿉니다. 봄이 되면 들꽃, 산꽃 가득한 마을로 가는 꿈을 꿉니다. 마당에 들어서며 '이모님, 어르신' 그간 잘 계셨는지 안부를 묻고 손을 덥석 잡는 꿈을 꿉니다. 낮은 곳에서 산을 보는 기쁨, 지극히 겸손하나 산을 닮은 옹골진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 목숨걸고 지켜온 그들의 깨알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 특별함, 작은 꽃 하나와도 눈맞춤을 하며 대화하는 여유… 이 모두가 지리산의 선물입니다. 가장 평화롭고 생명력 넘치는 것들은 낮은 곳에 있었습니다. 하늘처럼 높고 존귀한 것들은 장엄한 산을 바라보며 기도하듯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있었습니다. 잔잔한 평화로움이 무엇인지, 더불어 함께 가는 삶이 무엇인지, 작은 것 하나라도 함께 나누면 내가 먼저 행복해진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준 어머니의 산, 높지만 낮은 곳을 사랑하는 우리들의 영원한 고향 지리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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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으로 살아가기
- 박형규 (기후위기남원시민모임 대표) 2016년 봄, 15년 간 살던 경북을 떠났다. 애초부터 딱히 정해진 곳이 있어서 움직인 건 아니었다. 산정호수 시절부터 20년이 넘게 산골생활을 한 아내는 아이들도 다 나갔으니 이젠 좀 따뜻한 남쪽나라에 가서 살자고 했다. 따뜻한 남쪽나라? 그래 그러면 아예 이참에 쿠바로 가서 살까? 했더니 그건 또 아니라 한다. 그러더니 친정인 무주 안성면에서 1시간 거리 정도면 된다면서 한계를 정해 준다. 임실, 곡성, 장수, 진안, 완주 등 몇 군데 찾아봤지만 별로 내키지 않았다. 그러던 10월 어느 날 지리산 산내 사는 후배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 강변에서 점심을 먹고 잠시 쉬고 있는 데, 흐르는 강물이 편안하면서도 묘한 매력이 느껴진다. 바로 전화를 해서 “여보, 남원은 어때요?” “시내인가요?” “응, 그래” “그럼 거기서 한번 찾아 봐요.”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순식간에 남원으로 결정되었다. 박근혜 탄핵운동이 한창인, 11월 중순 경에 세를 얻어 요천가, 죽항동에 살기 시작했다. 이사한 그 주일 박근혜 탄핵운동 남원집행부를 찾아 갔다. 내 소개를 하고 집행부에 함께 동참하면서 남원살이가 시작되었다. 2017년 박근혜 탄핵 직후부터 <직접민주주의 시민남원회의>, <시민참여제도연구회>, <기후위기남원시민모임>의 이름으로 광치동화력발전소 반대투쟁 승리, 남원시민참여기본조례 제정운동을 해왔고, 현재는 기후위기운동과 지리산산악철도 반대운동을 진행 중에 있다. 대부분의 지역 소도시들이 그런 것처럼 남원에도 역시 ‘구체적인 민주주의’가 없다. 남원행정은 지역 주민들의 행복?을 위한 일을 한다면서 전혀 주민, 시민들에게 제대로 묻지 않는다. 남원시엔 16명의 시의원들이 있다. 그런데 이 16명 전부가 다 민주당이다. 게다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은 임실, 순창, 남원 지역위원장이 현 이환주 남원시장이다. 어찌 이런 파행적인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시행정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맡은 자들의 공천권, 그러니까 생사여탈권을 현직 시장이 쥐고 있는 거다. 이건 시장도, 시의원들도 남원시민을 기만하고 무시하는 처사다. 올바르게 돌아가는 지역이라면 행정과 의회, 그리고 시민들이 함께 어우러져 어떤 일이든지 정당한 ‘공론화 과정’을 통해서 진행되어야 하고, 그것은 마땅히 민주적인 사회의 바탕이 되는 기본이다. 남원의 실정이 이런데 시의회가, 시의원들이 제 직무를 잘 감당할 수 있을까? 시장도, 시의원들도 시민을 존중하기는커녕 시민의 뜻과 의사를 전혀 개의치 않는 곳이 남원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가 없다. 2주 전에 남원시 의회가 ‘기후위기조례 입법예고를 했다. 이는 매우 환영받을 고무적인 일이다. 그런 와중에도 남원시청 기획실에서는 9월 2일에 <지리산 친환경 전기열차 시험노선 유치를 위한 전략분석 및 정책성 수립용역> 심의회 결과보고 공문을 냈다. 처리기간은 1일이다. 매사가 이런 식이다. 지리산산악전기열차는 현재 여러 가지 논란이 일고 있다. 지리산은 남원사람 만의 재산이 아니다. 지리산은 전 국민뿐만 아니라 우리의 후손들까지 함께 누리고 보전해야할 소중한 공유자산이다. 이미 이웃지역 하동에서는 이른 바 ’하동알프스 프로젝트(산악열차, 케이블카, 모노레일)를 반대하는 대대적인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이 엄혹한 기후위기 시대에 개발과 토건을 중지하고 근본적인 정책전환을 도모 하지는 못할망정 이명박의 4대강과 다름이 없는 국립공원을 개발을 하겠다고 하는 망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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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으로 살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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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지리산 살이’
- 문미랑 (경상남도환경교육원) 대학을 졸업하고 빛나는 20대 시절에 나는 지리산에 살고 있었다. 구례 화엄사 황전마을 부근에서 5만 원 짜리 월세를 살면서 적은 월급이었지만 우체국의 이자율 9% 짜리 적금을 넣으면서 현재보다 더 빛나는 미래를 꿈꾸며 살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드라마 속 밝고 긍정적인 주인공처럼 살아갔던 것 같다. 새소리를 들으며 ‘오늘도 파이팅!’을 외치며 일어나, 어제 보았던 야생화의 꽃봉오리가 폈겠지 하는 설렘으로 카메라를 챙겨 출근을 하여, 동료들과 탐방로를 올라 식물 공부를 하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환상적인 직장 생활이었고 주변에는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지리산국립공원관리공단(현 국립공원공단)에서 근무하는 것이 행복했다. 해설을 하거나 외부 강의에 나가면 자랑처럼 나는 이야기했다. 하고 싶은 일,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잘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사는 삶이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실로 그 시절에는 그랬다. 현재 나는 43살이다. 중년이라고 불리는 나이이고 조심하지 않으면 꼰대라고 뒷담화를 들을 수 있는 나이이다. 현재 나는 지리산국립공원 중산리에서 근무하고 있다. 나의 소속은 국립공원공단에서 경상남도 소속으로 바뀌었고 그 사이 하동군 소속으로 7년간 하동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나는 평생 지리산 부근에서 돈을 벌고 생활을 하고 사람을 사귀며 살아가고 있다. 지리산을 무대로 직장생활을 하면서 많은 일들을 했다. 그리고 나의 이름을 아는 사람들도 지리산권 마을마다 몇 명씩은 생겨났다. 지리산 어느 동네를 지나더라도 밥 먹을 사람, 차 한 잔 같이 할 사람이 생겼다. 하지만 3번의 직장을 옮기며 구례, 하동, 산청으로 다니면서 한곳에 정착을 하지 못했다. 지리산권 어디를 가더라도 아는 사람이 있고 만날 사람이 있는 나지만 나는 17년이라는 시간동안 어느 지역에도 정착하지 못했다. 이곳이 내가 사는 곳이다 고 아직 말할 곳이 없다. 지금 근무하는 산청으로 온지는 이제 일 년 하고 6개월이 지났다. 아직도 적응기이고 아직도 누군가를 사귀기에 낯을 가리고 있다. 아주 오래전 천은사에서 가졌던 모임에서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하는 자리가 있었다. 진행자가 유도 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리산에서 살게 된 이유를 자신의 소개와 함께 이야기 하고 있었다. 나도 그때 그 모임에서 내가 지리산에서 살게 된 이야기를 소설처럼 이야기 했던 것 같다. 그런 와중 뒤에서 누군가의 삐죽거림이 들렸다. “다들 지리산 병에 걸렸구나. 와서 망치지나 말았으면” 그분은 내가 아는 누구보다 지리산을 사랑하시는 분이셨다. 그 모임 이후로 나는 그분을 볼 때 마다 주눅이 들어 은근 피하게 되었다. 그때 내 나이 30대 초반이었다. 무엇이 그렇게 내 양심을 찔리게 한 건지 나는 오랫동안 그 이유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작년부터 번아웃(burnout)도 왔고, 20대의 마음처럼 내가 하는 일이 마냥 즐겁지도 않고 지리산 살이가 완전히 행복하지도 않다. 그리고 나는 가끔 직장을 탓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주변 사람들을 혼자 미워하기도 한다. 제발 좀 쉬고 싶다는 생각과 26살의 나로 돌아 갈순 없지만 43살의 지금의 나로 계속 살아가는 것은 참 슬플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이다. 나는 천은사 회의 때 이야기했던 지리산 살이 찬양을 지금까지 지켜내지 못하고 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나를 비롯해 그저 왔다갈 사람들이 영원히 살 것처럼 이야기하며 지리산을 망쳐놓고 떠나버리는 모습이 야속해서 그분은 독설을 하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양심에 그분의 독설에 눈치를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지리산인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원고 펑크도 냈었고 매번 원고마감이 다되어서야 편집자의 속을 썩이며 원고를 냈었다. 모자란 글 솜씨로 열심히 쓰려고 노력은 했지만 바쁜 직장생활 핑계를 대며 정성들여 쓰지를 못했다. 일이 바쁘고 원거리 인터뷰의 험난함을 이유로 나는 5월 편집회의에서 편집위원 자리를 내어 놓았다. 그리고 17년 동안 지리산 살이에 정착하지도 못한 내가 ‘지리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나간다는 것도 나에겐 모순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뭐 하나라도 들어내고 쉬고 싶다. 이제는 좀 쉬면서 내가 정착할 곳에 정을 들여야겠다. 정착할 마음의 끈을 다잡아야겠다. 글하나 안 쓴다고 내 생활이 엄청나게 편해지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일을 하나씩 줄이고 17년 지리산 살이의 결론을 좀 내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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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지리산 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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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주인은 나
- 문미랑 (경상남도환경교육원) 언제부턴가 차 안에서 음악을 듣는 대신 명사의 강의나, 읽어 주는 라디오 책을 듣게 되었다. 나는 음악을 참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나는 음악을 들으며 멜로디를 통해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 고독을 즐기기도 하고 고민의 답을 찾아내기도 했었는데 언제부턴가 이것들이 스트레스로 느껴져서 명사가 ‘이렇게 해라’, ‘저것은 틀렸다’ 하는 가르침을 받는 편이 편해져 버렸다. 예전처럼 음악을 삶에 담고 있지 않는 것이 나이듦의 시작인가 하는 씁쓸한 생각도 들지만 이제부터는 마음도 몸도 편안하게 살고 싶은 것이 나의 솔직한 마음이다. 구례에 사는 김동관씨를 만났다. 그와는 조금의 친분이 있는 사이이다. 그는 집짓는 목수, 철학을 논하는 명상가이다. 나는 명상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내가 아는 명상은 가부좌를 틀고 손을 무릎 위에 올려 눈을 감고 마음을 평온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김동관씨는 무척 말라 있었다. 내 기억 속에 그는 덩치가 꽤 크고 노래를 잘불렀던 사람이었는데 왜소한 그를 만나니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1991년에 지리산살이를 시작한 그는 구례에서 꽤 유명한 사람이다. 그를 유명하게 한 것 중 하나는 목수 일이다. 나도 그가 지은 집과 집주인을 몇 분 아는데 그가 지은 집은 대부분 그 집에 사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그가 지은 집을 보고 느껴지는 것들의 공통점은 집이 사람과 닮아있다는 것이었다. 시인의 집은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이고 외로운 홀아비의 집은 사랑을 찾는 이의 쓸쓸함이 느껴졌던 것 같다. 그리고 자연속의 일부인 듯한 자연스러운 어울림이 그가 공정에 참여한 집들이 갖는 공통점이었다. 그와 ‘명상과 삶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솔직히 나는 간간히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기도 했고, 어느 부분에서는 그가 몽상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그 혼란 속에서 한 시간이 금방 가버렸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음악듣는 것을 즐기지 않게 된 후에는 생각의 늪에 사로잡히는 것이 귀찮은 나였는데 그와 대화를 이어 갈수록 나는 내 속의 질문과 고민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우연히 나온 로드킬 이야기를 하면서는 로드킬의 공포로 밤길 운전이 두려워 밤에 활동하지 않는 나의 문제도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가 했던 말 중에 기억에 남는 구절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똑바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살자. 나는 어디에서든지 명상을 한다. 일상 속에서도 명상을 하고 지금처럼 대화를 하면서도 명상을 한다. 나는 스트레스가 전혀 없어요. 생명의 본질을 깨닫고 매 순간 내 삶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로 살아가면 그게 진정한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을 이루면 스트레스는 자연히 없어집니다. 자신의 껍데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많아요. 육체는 노예처럼, 감정은 하인처럼, 생각은 지나가는 바람처럼 살아 가다 보면 내 자신의 주인은 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 아이들에게 늘 강조했던 말은 다섯 가지입니다. 무해(無害), 남에게 절대로 해를 끼치는 일을 하지마라. 진실(眞實), 진실로 상대방을 대하라. 성실(誠實),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라. 매순간 내 인생에 충실해야 후회가 없다. 절제(節制), 지나치지 말고 절제하라. 성찰(省察), 자신을 돌아 보고 반성하며 살아라.” 명상을 하든 일을 하거나 음악을 듣든, 로드킬이 염려되는 길을 운전해가든지 우리는 껍데기를 위해 살지 말고 내 자신의 주인으로 나를 사랑하고 살면 필요없는 염려를 버리고 진정한 사랑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을 그는 나에게 끊임없이 힘주어 강조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어두웠다. 강 옆에 있는 시골길을 운전해 가면서 나는 음악을 틀었다. 12월 U2공연이 서울에서 있다는 소식을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본 것이 기억나서 U2의 음악을 들으며 운전을 했다. 나는 음악을 들으면서 너무 고민하지 않았고 운전을 하며 사고가 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갖고 천천히 조심스레 운전했다. 더 이상 음악은 스트레스가 아니었고 시골길 로드킬에 대한 공포도 시나브로 사라져갔다. 나는 그와 인터뷰를 하는 내내 명상으로 깨달음을 얻었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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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 지리산자락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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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주인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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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마루금처럼 고운 자연주의자
- 문미랑 (경남환경교육원) 내가 일하는 경상남도 환경교육원은 지리산 중산리 산 속에 위치해 있다. 퇴근을 하고 인터뷰를 하기 위해 산을 내려가는 길가에 노란 꽃들이 풍성하게 피어 있다. 무슨 야생화일까 궁금하여 잠시 차를 세울까 고민하다가 피나물이겠지 하고 지나쳤다. 산청 중산리 버스주차장에서 계곡의 다리를 건너 최문옥님네 집으로 갔다. 숲길을 가다가 우연히 쉬어가고 싶은 아늑한 집을 만난 듯한 느낌의 집에서 그녀가 나왔다. 그녀의 집은 모든 소품이 이쁘고 특색 있고 아름다운 조명과 자연을 담은 창이 집과 조화를 이루어 숲속 카페에 놀러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최문옥님은 2001년 지리산 산청 고향마을에 32세의 나이에 남편과 함께 귀촌해서 지리산에 정착했다. 그녀와 남편의 집은 중산리 계곡 옆에 위치해 있는데 귀촌했을 당시 부부의 집만 있고 주변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고 한다. 지리산을 찾은 사람들이 차도 마시고 정답게 쉬어 갈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 보자는 생각을 한 부부는 ‘나무와 집’이라는 유명한 건축 회사에 가진 돈 전부를 들고 가서 본인들이 생각하는 집을 지어달라고 했다 한다. ‘나무와 집’에서는 그 돈으로는 집을 지을 수가 없으니 돈을 더 벌어오라고 했지만, 부부는 모두가 찾고 여행오고 싶어 하는 지리산에 작품같은 집을 지으면 도시 뿐만 아니라 지리산권에도 홍보가 되어 회사의 이미지에도 큰 도움이 될 거라며 회사를 설득해 집을 지었다고 한다. 30대 초반의 부부가 눈을 반짝이며 열정을 뿜어내 이야기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녀는 지리산국립공원의 자원활동가다. 19년째 자원활동가로 일하고 있으며 식물, 곤충, 기후모니터링, 해설활동까지 하는 다재다능한 시민과학자이기도 하다. 2014년에 지리산국립공원의 시민대학은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로부터 지속가능발전교육(ESD) 공식 프로젝트를 인정받았다. 이는 지리산권의 마을과 주민을 대상으로 생태, 환경, 인문학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여 국립공원관리공단과 마을주민들 간의 소통의 장을 마련하게 되었다. 아울러 환경인식 변화, 자연훼손 방지 및 복원사업 등의 성과를 낳게 된 것도 시민대학의 힘이었다. 12년동안 이어져 오고 있는 자원봉사활동과 시민대학의 중심에 그녀가 자리하고 있다. 예전에 국립공원 직원과 탐방로를 가는데 분뇨 냄새가 나니까 직원 왈, 사람들이 산에 와서 화장실이 급하니 아무데서나 볼일을 본다고 말하길래, “아니에요. 이 냄새는 금마타리라는 식물에서 나는 냄새예요. 그래서 패장이라고도 해요.”라고 알려줘서 지역의 신문에 특색 있는 식물 소개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한다. “‘꿩의 바람’이라는 꽃을 아세요? 중태마을에만 있는 식물인데요. 봄에 꿩이 울 때 핀다고 이름을 ‘꿩의 바람’이라고 부른데요.” 둘레길에 도로공사를 한다고 중태마을에만 있는 ‘꿩의 바람꽃’이 없어질 위기에 놓여서 그녀가 ‘숲길’에 소식을 전해 다른 곳에 옮겨 복원중이라고 전한다. 식물을 전공한 나지만 그녀 앞에서 식물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다. 그리고 좀 전에 산을 내려 올 때도 노란 군락의 꽃을 보며 짐작만 하고 지나쳐 온 내가 아니었던가. 자연생태사업과 환경교육이 본업인 내가 그녀의 열정 앞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귀촌해서 지금까지 자연이 소통의 장이었고 취미생활이었으며 가장 소중하게 지켜내야 할 곳이라고 생각한다는 그녀의 지리산 사랑은 끝이 없다. 부드러운 목소리 속에 그녀가 생각하는 자연 사랑이 너무도 대단하여 만난 후 질문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체 대화가 이어져 나갔다. “식물 공부를 하고 자원활동을 하면서 지역의 숨은 인재들을 만나고 국립공원과 마을 주민들을 만나서 인연을 쌓아가고 소통해 가며 살아갈 수 있어서 너무나 좋아요. 제가 자원봉사활동을 하면서 고맙고 도움받은 일들이 외려 많아요.” 라고 말하는 그녀. 내면이 꽃보다 아름다운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몇 달 동안 일에 치여 개인생활도 없이 살았던 나의 현실에 위로와 힐링이 되었다. 인터뷰도 끝나지 않았는데 나는 “저 다음에 또 놀러 와도 될까요?” 하고 사적인 질문을 했다. 그녀는 본인이 없으면 뒷마당에서 책이라도 읽고 가라고 고운 미소로 웃어 준다. “해설을 처음 시작할 때는 식물 공부에 너무 심취해서 식물 위주로 했는데 요즘은 자연과 삶의 소통을 가져올 수 있는 쪽으로 하고 있어요. 지리산은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치유해주고 모든 것을 받아주잖아요. 산 중의 어른산이 지리산이잖아요. 이런 지리산이 삶의 공간이라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따뜻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는 그녀를 보니 마치 지리산의 능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바쁜 일상으로 모나고 각졌던 내가 그녀로 하여금 오늘은 잠시나마 부드러워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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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마루금처럼 고운 자연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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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찾는 농부들
- 꿈을 찾는 농부들 “남원 하도 유기농 농부원 최희범씨” “ 80까지는 농사를 해 볼 생각입니다.” 홍수 이후에 심은 하우스에 근대를 키우는 남원 최 희범씨를 만났다. 지난 8월8일 구례에도 수해로 인해 2천여 가구에 엄청남 피해를 줬다. 같은 날 섬진강을 지척에 두고 사는 남원 금지면 하도 마을도 침수가 되었다. 남원에서는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지역이다. 최씨는 그 것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그리고 5개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기 저기 하우스가 아직 복구가 되지 않은 상태였고 구부러진 하우스와 새롭게 비닐을 씌운 하우스가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이 지역은 수박과 채소를 주로 재배하는 지역이다. 봄 감자로 유명한 지역이기도 하다. 그는 95년부터 친환경 농업을 시작했고 2000년부터 유기농을 한 남원의 원조 유기농 농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도에서 25년 넘게 농사를 짓고 있지만 이번 같은 물난리는 처음이라고 했다. 집이 침수되어서 얼마 전에 수리가 끝나서 겨울이 오기 전에 겨우 다시 들어갔다고 했다. 함께 차를 타고 지나 면서 여기 저기 하우스를 보여주는데 다 쓰러져 있다. “쓰러진 하우스 모두 제 하우스입니다. 몇 개는 다시 하고 몇 개는 아직 정리도 못했어요.” 더구나 요즘엔 코로나로 인해 친환경 급식납품 업체 주문이 끊겨 판매가지 어렵다고 한다 .친환경농사를 하는 농가들은 대부분 학교급식으로 가는 물량이 많다. 그런데 코로나로 인해 급식이 정상적으로 이루어 지지 않고 있다 보니 재배를 해도 판매가 힘든 상황이라고 한다. 급식이 끊어지고 곧 방학이 와버려서 여기저기 적체된 농산물이 많다고 한다. 채소의 경우 한 번 심으면 6개월까지 잎을 수확하기 때문에 막상 급식이 시작되면 물량이 없게 되니 이도 저도 하지 못하는 진퇴양난이라고 한다. 상추나 근대같은 엽채류의 경우 꾸준하게 잎을 따줘야 품질 유지가 가능하다. 너무 크게 키우면 규격이 맞지 않고 맛도 떨어진다. 그래서 크기를 조절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한다. “특별한 기술이 있나요? 간단해요 춥게 키우면 됩니다. 간단하죠. 하면서 웃었다. “대부분 채소들이 기온을 올려주면 빨리 크고 추우면 느리게 크죠. 그것만 조절해주면 잎의 크기를 조절할 수 가 있어요. 생각보다는 간단하네요. 네. 간단하지만 중요합니다. 보통 채소들은 영상 18도에서 23도에서 가장 잘 큽니다. 그 온도를 맞춰주면 가장 좋은 채소를 가꿀 수 있죠.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용을 써도 힘들어요.” 그래서 가을부터 봄까지 재배하면 딱 좋은 채소를 키울 수 있습니다. 물론 비닐하우스에서요. 겨울에는 딸기처럼 비닐을 이중으로 해서 수막(하우스에 물을 뿌려주는 것)을 만들어 보온해주면 별도의 난방없이 채소 재배가 가능합니다. “20여년 넘게 채소만 집중 하다 보니 재배하는 것에서 어려움은 전혀 없어요.” 하지만 기술이 있어도 판매처가 없으면 힘들죠. 저는 채소 재배는 자신이 있기 때문에 대부분 계약 재배를 합니다. 업체에서도 믿고 계약을 하구요. 계약하지 않으면 농사를 짓지 않아요. 근데 근대만 계약이 안되어 있어서 걱정이 되네요. 그래도 인터넷 업체에서 판매를 도와준다고 하니 잘 될 것 같습니다. 농사만 가능하고 납품만 되면 잘 될 겁니다. 70살 80살이 되어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농부는 정년이 없고 저는 농사가 좋거든요.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오더니 이내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폭우가 내리던 날 밤처럼 눈이 흩날리는데 농부는 서둘러 하우스 문을 닫아야 한다고 서둘러 자리를 하우스로 떠났다. 여기저기 수해 농가들이 많고 모두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아는 농부 그 누구도 농사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여기서 포기하면 끝이다”라고 말하던 구례 농부의 말이 떠오른다. 누구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포기하면 희망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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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찾는 농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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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찾는 농부들 시를 찾는 농부” 화개 공상균
- 화개 부춘에 사는 공상균 농부를 만나기 위해서 가는 길이다. 2005년 만나 적이 있다. 내가 2004년에 지리산에 내려왔으니 1년쯤 지난 때였다. 나중에 듣고 나니 그가 화개에 정착한 것도 이맘때라고 했다. 물론 그는 그 전에도 농부였다. 사는 지역이 달랐을 뿐이다. 그는 내 기억속에 펜션을 하는 농부였다. 처음 봤을 때 그는 이런 저런 질문들을 하면서 새로운 것을 하고자 했지만 잘 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15년이 훌쩍 가버렸다. 그동안 간간히 소식을 들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했다. 문예창작학과라고 했다. 그리고 최근에 그이 딸이 대학을 졸업했고 딸과 함께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또 “바람에 수를 놓은 마당에 시를 걸었다”는 책을 냈다. 대학을 졸업한 딸이 시골에 내려와서 일을 한다는 것과 책을 출판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와 인터뷰를 해보고 싶었다. 며칠 전 인터뷰를 하기로 연락을 넣어 두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만나기로 한 시간에 비가 내렸다. 그는 매실 농장에 예초기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해가 질 무렵 그의 집을 찾았다. 하동과 화개 도로 확장 공사를 하는 구간이라 부춘으로 올라가는 길은 여기저기 공사중이었다. 입구를 찾기도 어려웠다. 다행이 길을 찾아 올라 갔다. 오래전 기억만 믿고 올라가다 보니 이 길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만큼 시간이 흘렀다. 내 생각보다 높이 올라왔다. 갈까 말까 고민고민 하는데 토담농가라는 간판을 보였다. 비가 와서 그런지 마당 가득히 피어 있는 꽃들이 더욱 예뻐 보였다. 마침 일을 하고 있던 딸 다영씨에게 부모와 함께 일하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아빠의 구애에 집에 취직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관광 관련 과를 졸업해서 사실 집에 취직을 하지 않았다면 요즘 같은 시기에 취직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라면서 집에 취직하기를 잘했다고 웃는다. “민박은 어떤 가요? 공상균 농부에게 물었다. 민박은 모두 단골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어요. 결혼하고 처음 산골에서 우리 식구가 살았어요. 그래서 그런지 사람 만나는 것이 좋더라구요. 민박을 하게 되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대화를 하다 보면 배우는 것도 많고 기억이 남는 분들도 많아요. 그가 이번에 쓴 책을 읽어 보니 민박 손님에 대한 이야기도 꽤 있었다. 골수염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엄마와 아들이 며칠을 묵어 간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주 수입은 농사라고 한다. 그는 매실 농사를 하고 있다. “요즘 매실 판로가 좋지 않는 편인데 어떤 가요” " 화개 정량에 3000평의 남고 매실 농사를 짓고 있어요" 1년에 7-8톤 정도 수확을 하고 모두 직거래로 판매를 합니다. 다행히 모든 매실을 시장 출하를 하지 않을 정도가 되어서 특별하게 판매에 어려움이 없어요" 요즘 매실 농사는 하락 중이다. 10년전만 해도 매실은 가장 인기있는 품목 중에 하나였지만 최근 몇 년간은 매실 나무를 베어낼 정도로 인기가 없다. " 매실이 2013 부터 인기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토종 매실에서 남고 매실로 품종 갱신을 했습니다 남고는 색이 예쁘고 맛과 향이 좋아서 뭘 해도 좋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매실을 받으신 분들의 만족도가 좋았어요. 더구나 오래된 고객들이 많다 보니 판매에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함께 일하고 있는 다영씨는 신제품을 개발하고 있다고 한다. 다영씨에서 일에 만족하냐고 하니 " 집에서 일하는 게 좋다고 한지만 도시가 그립 단다” 아직 은요. 도시에 친구들이 보고 싶어요. 하지만 친구들 중에는 여기 사는 저를 부러워하기도 하고 더라는 놀러 오기도 해요. 하지만 저는 도시가 그리워요. 주말에는 도시에 가서 친구들과 열심히 놀다 와요. 아직은 시골에서 보다 도시에서 친구들과 만나는 것이 좋아요. “바람에 수를 놓은 마당에 시를 걸었다” 라는 에세이집을 냈다 책은 살던 이야기를 시와 글로 쓰고 사진으로 남긴 것이다. 사진은 대부분 그의 동갑내기 아내의 작품이다. 시는 자신의 시와 기성 시들 중 그가 좋아하는 시들이다. 플라톤은 사랑하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일 까? 그는 농사를 사랑해서 농부 시인이 된 것 같다. 자연과 더불어 함께 하는 농부의 삶은 자연스럽게 호미와 괭이 처럼 시와 가까워 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책을 읽다 보면 지리산과 섬진강을 벗 삼아 농사를 짓는 농부를 만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그는 또 페이스북에 “이야기를 파는 점빵.” 이라는 주제로 글을 올리고 있다. 그를 만나고 싶다면 책을 구입하거나 페이스북에서 검색을 하면 될 것 같다. 어둠이 가득하게 내려온 그의 지리산 부춘의 차실에서 늦은 밤까지 지나간 세월과 앞으로 찾아올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환갑이 넘은 나이지만 그는 지금도 새로운 것들을 꿈꾸고 있었다. “저는 농업이 아니 농촌이 분명 희망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딸에게 농촌에서 함께 일하자가 할 수 있었구요. 그리고 새롭게 도전하려는 젊은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요. 희망이란 원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다. 원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젊어서 내가 좋아하던 루쉰의 단편 고향에서 읽었던 문구가 생각났다. 희망은 꿈꾸는 사람들의 것이다. 지금 만약 삶의 지치고 힘들다면 그의 책을 읽어 보기를 권한다. 17살에 고향을 떠나 도시로 떠나 다시 지리산에 정착한 산골 소년의 삶을 통해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가던 길에 내리던 비가 멈췄다. 인적 없는 19번 국도 섬진강엔 달빛만이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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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찾는 농부들 시를 찾는 농부” 화개 공상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