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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 원짜리 약속
- 못먹겠지.. 이번에도.. 지난 5월 햇볕이 따스하고 좋았던 날 점심시간 구례장에 갔다가 무화과 나무를 파는 농부를 만났다. 나무를 판매하는 장사꾼 대부분은 나무를 농부에게 구매해서판다. 근데 이분은 자기가 키운 나무를 팔고있었다. 어떻게아냐고요? 나무 종류가 두 종류뿐이고 파는 자세가 달랐다. 그 농부가 팔던 나무가 무화과 나무였다. 한 그루에 5천 원이었는데 묘목이 튼실하고 좋아보였다. 사실 무화과 나무를 마당에 여러 번 심었다. 모두 얼어 죽거나 열매가 열린 다음 익지 않았다. "이것도 얼어 죽거나 안 익는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익을겁니다. 제가 시험을 해보고 파는 것이니 믿어도됩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두 그루를 5천원에 드릴게요. 그리고 만약 죽으면 내년봄에 5천 원 돌려드리거나 다른 묘목을 드리겠습니다" 커피 한 잔 값 이라 속는샘 치고 나무를 받아왔다. 두 그루의 무화과를 주차장옆 양지에 심었다. 마당에 워낙 나무가 많다보니 심을자리가 궁색해 거기 외엔 심을 자리가 없기도 했다. 무화과는 심자마자 쑥쑥크기 시작했다. 무화과는 햇 가지에서 열매가 열리기 때문에 올해 심어도 열매가열린다. 그렇게 심은 나무에 무화과가 콩알만하게열린것이 7월이었다. 곧 대추, 골프공, 그리고 테니스공만하게 커지고 나면 익기 시작하는데 너무 늦어서인지 골프공 사이즈에서 끝났다. 결국 하나도 익지 않았다. 너무늦게 심었으니 내년에는 더 많이 열리고 익기도하겠지하고 포기하고 있었다. 지난 11월 10일 무서리가내렸다. 무화과 잎은 바싹 발라 버렸다. 추위를 이기지못하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맛 보기는 어렵겠구나.... 어제 아침출근을 하려고보니 나무 아래 떨어진 무화과 하나를 발견했다. 살펴보니 끝에 붉은 기운이 보인다. 익은 것이다. 무화과를 살짝 벌려보니 안에 붉은 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묘목 농부말이 맞았던것이다. 하지만 아직 약속 하나가 더 남았다. 추운 겨울을 이겨 내고 살아남을 것인가? 겨울을 이겨내면 나무가 살고 이겨내지 못하면 뿌리만 살아움이 터서 다시자란다. 아.. 그리고 그농부와 나도 약속하나를 했다. "올해 키워보시고 내년 봄에 만나면 나무상태가 어쩐지이야기 해주세요. 저도 사실 구례에 이 묘목이 잘 크는지 열매는 익는지 궁금 하거든요." 그 묘목 농부를 만나서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은데 무화과 나무는 이 겨울을 무사하게 보낼 수 있을까? 아.. 그리고 무화과는 달콤하니 맛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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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 원짜리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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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교육 2023년 가을호 (환경과생명을지키는전국교사모임)
- 윤주옥 대표님의 인터뷰 글이 있어서 자료 공유합니다. ## 녹색교육 2023년 가을호 (환경과생명을지키는전국교사모임, 환생교) ## https://eduhope.net/eBook/2023_2/2023_2kon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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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교육 2023년 가을호 (환경과생명을지키는전국교사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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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석굴에 천 명이 앉을 수 있다는 깊은 의미는
-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에 있는 삼정산(1,156m)은 백무동과 한신계곡을 넘어서 지리산 천왕봉을 마주 보고 있다. 이 삼정산 정상의 으뜸 봉우리 아래에 문수암이 자리 잡았다. 지리산 칠암자를 잇는 숲길을 찾아 영원사에서 고개를 넘는 제법 힘든 산길을 1.8km 걸으면 상무주암에 도착하고, 대체로 평탄한 숲길을 0.8km 진행하면 바위 절벽 중간에 도량을 마련한 문수암에 이른다. 지리산 삼정산 바위 끝 문수암, [사진]이완우 이곳 문수암에서는 지리산의 중봉이 보이고 천왕봉과 그 오른쪽 지리산 주능선은 앞산 줄기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이 암자에서는 함양 방면이 잘 조망되며 멀리 가야산(1,432m)이 보인다. 산의 이름부터 가야 문화를 암시하고 있는 가야산은 불교문화가 시대적으로 일찍 꽃 피웠을 수 있다.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품에 안은 가야산은 예로부터 뛰어난 지덕을 갖춘 불교 성지로 여겨졌다. 우리나라 불교는 서역과 중국을 통해 북방 경로로 4세기 후반 삼국 시대에 고구려와 백제에 전래하였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인도에서 해양으로 1세기 중반에 가야에 불교가 전래하였을 가능성이 학계에서 제기되었고, 가야 지역의 문화재와 설화에서 그 방증을 확인할 수 있다. 지리산 삼정산 문수암과 천인굴, [사진]이완우 문수암 터전의 바위 굴을 깨달음의 거처로 삼은 수행자들 지리산의 문수암은 신라 시대에 659년(무열왕 6)에 마적 대사가 수행의 도량으로 터 잡았다고 한다. 이곳에 바위의 절리가 풍화되어 틈새가 벌어져 형성된 천연 석굴이 있는데 이 지역 주민들은 전란 때마다 천 명에 이르는 피난민들이 이곳을 찾았다고 하여 천인굴(千人窟)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천연 석굴은 수십 명이 들어앉기도 빠듯하게 보인다. 이 지역 함양의 향토지인 『함양군사』(2012년)에 마적 대사의 행적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휴천면 엄천강 상류 용유담 주변의 마적 대사 전설 탐방로를 따라가면 마적동, 마적사 터, 대사 배나무, 바둑판 바위, 대사 우물과 마적대 등 마적 대사와 관련된 설화와 유적지가 풍부하다. 엄천강과 용유담에는 등에 무늬가 있는 물고기가 살고 있었는데, 그 물고기의 무늬가 마적 대사가 입었던 가사와 같다고 하여 ‘가사어’라 불렸다는 기록이 조선 시대의 문헌에 있다. 이 물고기는 높은 산 깊은 계곡의 차가운 계곡물에 사는 연어과의 열목어로 추정된다. 지리산 삼정산 문수암 천인굴 내부, [사진]이완우 용유담 지역은 지리산의 천왕봉, 노고단과 백무동 등과 함께 지리산 성모 산신 신앙의 터전이었다고 한다. 마적 대사가 용유담 주변을 시끄럽게 하는 용들을 쫓아내며 던진 바둑판이 조각나면서 이 계곡의 바위가 되어 널려 있다는 설화가 전하는데, 용유담 일대에 마적 대사가 불교를 유입하면서 이런 설화가 남겨진 것으로 보인다. 엄천강과 용유담 주변에 활동하던 마적 도사가 자신의 활동 지역과 가까운 지리산 자락의 삼정산으로 올라와 천연 석굴에서 수행하고 이곳에 문수암을 세웠을 것이다. 혜암(慧庵, 1920~2001) 스님은 현대 한국 불교의 대표적 선승이다. 그는 가야산 해인사의 해인총림 방장을 지낸 혜암 스님이 가야산이 보이는 이곳 천인굴 앞의 폐허가 된 문수암 터를 발견하고, 1965년에 암자 건물을 다시 세워 수행의 도량으로 삼았다. 하루 한 끼니 식사만 한다. 눕지 않고 오래도록 앉아서 좌선한다.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수행에만 전념한다. 이렇게 혜암 스님은 일종식(一種食), 장좌불와(長坐不臥)와 두타고행(頭陀苦行)에 철저하였다. 스님의 '공부하다 죽어라.’와 '공부만이 살길이다.'라는 일관된 수행 태도는 수행자들의 많은 귀감이 되고 있다. 지리산 삼정산 문수암 천인굴, [사진]이완우 지리산의 수행 방장이었던 천연 석굴, 그 문수사 천인굴의 의미 문수암의 작은 천연 석굴에 천 명이 앉을 수 있다는 천인굴 이름은 비밀을 간직한 만트라처럼 화두가 되어 탐구심을 자극한다. 이 석굴에 천 명이 들어갔다고 과장한 것은 천인굴이 구도와 깨달음의 정신적 터전이며, 이곳이 영향력이 큰 수행자의 거처인 천연 방장(方丈, 수행자의 사방 3.3m 정사각형 방)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유마경(維摩經)에는 재가(在家) 불자였던 유마 거사가 그를 문병한 3만 2천 명을 그의 작은 방장에 모두 앉게 했다고 한다. 이렇게 작은 방에 수많은 사람이 들어가 앉았다는 설화는 수행자의 교화력이 그만큼 컸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자신의 방장을 방문한 문수보살에게 유마 거사가 말했다. “중생에게 병이 있으니, 나에게도 병이 있다. 그들이 나으면, 나도 낫는다. 보살의 병은 자비에서 일어난다.” 유마 거사의 병은 육신의 질병이 아니라 중생들을 교화하고자 하는 자비심의 표출이며 반야의 지혜였다. 지리산 삼정산 문수암의 견성골 조망, [사진]이완우 문수암 천연 석굴 천장에서 불교 경전에 나오는 인드라의 구슬 그물을 연상한다. 인드라 하늘은 하나의 그물로 덮여 있는데, 그 그물은 줄지어 엮어진 구슬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구슬 하나하나는 다른 모든 구슬 비추고 있다. 어떤 구슬 하나라도 소리를 내면 그물로 연결된 다른 모든 구슬도 공명한다. 이 인드라 구슬의 그물은 한 수행자의 깨달음은 많은 사람을 깨달음으로 이끌어 공명하게 한다는 비유이다. 자연 현상이나 사물에는 작은 구조가 전체 구조와 닮은 형태로 끝없이 되풀이하는 프랙탈 구조가 있다. 이렇게 한 수행자의 깨달음이 수많은 중생을 깨달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대승적 비유와 상징을 이 천연 석굴에서 찾아본다. 문수암 천인굴 앞에서 지리산의 하늘을 올려다본다. 바람은 맑고 가을 단풍이 고운데, 하늘에는 가볍게 구름이 피어나면서 사라지고 있었다. 지리산은 방장산이라 불리며, 불교에서 지혜의 보살인 문수보살의 도량이라고 한다. 지리산 칠암자의 여느 사찰이나 암자의 승방 못지않게 이곳 문수암 천인굴은 수행자가 찾고 싶었던 방장으로 여겨진다. 지리산 문수암의 지리산 주능선 조망, [사진]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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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석굴에 천 명이 앉을 수 있다는 깊은 의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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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을 사찰에서 해우소라고 부르는 깊은 뜻
-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의 지리산 자락에 상무주암(上無住庵)이 있다. 지리산 칠암자 숲길을 거느린 삼정산의 정상을 이루는 세 봉우리에서 지리산 주능선인 벽소령을 바라보는 첫째 봉우리 아래에 상무주암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암자는 9세기 중반에 영원 대사가 지리산 영원사와 함께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리산 삼정산 상무주암, [사진]이완우 영원사를 출발하여 1.8km의 너덜 바윗길을 걸어서 빗기재를 넘으면 상무주암에 도착한다. 11월 초순의 가을 산 낙엽들은 바람결에 흔들리며 서늘한 기운에 잡념이 들 새 없이 가볍게 낙하한다. 봄 여름에 걸쳐 이룬 엽록소의 장막을 걷으며 숲은 환해져 간다. 겨울 산의 추위와 침묵을 예감하며 낙엽들은 쏟아져 내린다. 상무주암 도량을 바라보며 내리막 산길이 평지로 바뀌면서 지리산 주능선 원경이 활짝 열렸다. 지리산 줄기의 봉우리들이 장쾌하기 이를 데 없다. 하늘에는 적운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구름은 한 장소에서 20분 정도 바라보고 있으면 천천히 모양이 변하여 없어지기도 한다. ‘머무름이 없다’는 이름의 암자에서 머무름 없이 변화하는 구름을 바라보니 새롭다. 지리산 상무주암 앞 오솔길, [사진]이완우 암자는 입구에 탐방객의 출입을 사양하는 정낭이 걸쳐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지리산 깊은 산중의 작은 암자에서 제주도의 풍물인 정낭의 표식을 보니 친밀한 느낌이 든다. 암자 마당 앞 돌담 축대 아래로 난 오솔길을 걸으며 약수터에서 목을 축인다. 이 암자는 공양간 안에 바위 틈에서 물이 고이는 샘이 있고, 탐방객을 위해 암자 앞 오솔길에 약수터가 있다. 암자 앞 내리막 비탈의 다랭이 텃밭에 여러 가지 채소가 푸르게 가꾸어졌다. 암자 공양간 샘의 물줄기가 약수터에서 흘러내려 웅덩이에 모이고 다랭이 텃밭의 수원지가 되어 채소를 자급자족할 터전을 구성하였다. 암자와 함께 도량을 이룬 다랭이 텃밭을 보니 농사일을 수행으로 여기는 스님들의 하루 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지리산 상무주암 다랭이 채마밭, [사진]이완우 매년 봄 부처님 오신 날에는 이곳 지리산 칠암자 순례길이 열리고 많은 참배객이 도솔암, 영원사, 상무주암, 문수암, 삼불주암, 약수암과 실상사에 이르는 14.5km의 숲길을 즐겁게 고행 삼아 걷는다. 우리나라의 산티아고 순례길이라고 할 만하다. 그날에 이곳 상무주암은 참배객들의 점심 공양 장소가 된다. 해마다 이곳에서 수백 명의 점심 공양 한마당이 펼쳐진다고 한다. 상무주암과 경봉 스님 해우소 이야기 암자 앞을 지나가는 돌담 축대 아래 오솔길에서 암자 법당의 상무주(上無住) 편액이 보인다. 이 편액은 20세기 우리나라 불교계 고승인 경봉(鏡峰, 1892-1982) 스님의 친필로서 그의 법명인 원광(圓光)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젊은 시절에 경을 보다가 하루는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스스로에게는 반 푼어치의 이로움도 없다[終日數他寶, 自無半錢分]"는 구절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아 더 열심히 본질적인 공부에 노력했다고 한다. 지리산 상무주암 지리산 주능선 조망, [사진]이완우 경봉 스님은 사찰의 화장실을 가리켜 해우소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붙인 스님이다. 그가 통도사 극락암의 조실이었던 1950년대 어느 날 화장실에 해우소(解憂所)와 휴급소(休急所)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대변 공간이 해우소였고, 소변 공간은 휴급소였다. 자기 자신만의 공간인 해우소에서 마음속의 번뇌, 망상, 근심 등을 다 버리라는 경봉 스님의 깊은 뜻이 있었다. 스님은 세상 살면서 가장 급한 것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찾는 일인데, 세상 사람들은 별로 바쁠 것 없는 것을 바쁘게 찾으며 산다고 하였다. 그래서 매일 몇 차례 찾는 휴급소는 필요 없이 급한 마음을 쉬어 가라는 뜻이었다. 결국 필요 없는 급한 마음은 멈추고, 진정으로 급한 자기 자신을 찾으라는 역설적 표현이기도 하다. 사찰에서 말해서는 안 되는 세 곳이 삼묵당(三黙堂)인데 승당(僧堂), 욕실(浴室)과 해우소이다. 침묵하라는 것은 신중하게 내면을 성찰하라는 의미이니 삼묵당은 곧 수도의 장소이다. 깊은 산중 사찰의 해우소는 지형적 특성을 이용한 누각식 구조가 많다. ‘정월 초하루에 힘을 주면 섣달그믐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찰의 해우소는 높낮이가 있는 개성적인 건물이며, 시원한 바람이 불어 마음을 정결하게 해 주는 장소이다. 지리산 상무주암 전망바위 바둑판 문양, [사진]이완우 상무주암에서 고려 시대 스승과 제자인 선승 3명의 이야기 고려시대 보조 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은 불교를 혁신하기 위해 신앙 단체인 수선사를 결성하고 이끌었다. 현재의 조계산 송광사는 처음 이름이 정혜사(定慧社)이며 1205년에 왕명으로 수선사(修禪社)로 바꾸었고, 고려 말기에 송광사(松廣寺)로 개칭되었다. 수선사는 보조 국사가 결성한 단체이며, 송광사의 이전 사찰 이름이었다. 1197년에 이곳 상무주암에 보조 국사가 머무르며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보조 국사의 제자인 혜심(慧諶, 1178년~1234) 선사가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을 지었는데, 혜심의 제자인 각운 선사 역시 이곳 상무주암에서 스승의 저술을 자세히 풀이한 『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를 저술했다고 하는데, 이들 저술은 고려 시대 선문(禪門)의 필독 서적이었다. 이들 저술의 구성은 수많은 선문(선문답)마다 염송(깨달음 경지의 선시)을 달고 다시 상세히 풀이한 설화(주석, 설명)를 덧붙이는 삼단 구성을 되풀이하는 형식이 기본이었다. 각운 선사가 염송 설화를 엮을 때 오랜 저술로 붓끝이 닳아 자주 못 쓰게 되었다. 어느 날 어디선가 족제비 한 마리가 나타나서 꼬리를 내밀었고, 그 꼬리털로 붓을 만들어 『선문염송설화』 30권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자 족제비 꼬리털로 만든 붓끝에서 사리가 나왔다고 한다. 이곳 지리산 상무주암에는 이 사리를 보존하여 쌓았다는 3층의 필단사리탑(筆端舍利塔)이 남아 있다. 오랜 세월 이어진 염송 설화 저술의 어려움으로 기진한 각운 선사가 쓰러져 세상을 떠나자 ’붓끝에서 사리가 나왔다‘고 과장한 극적인 요소의 설화가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 지리산 상무주암 바둑판 문양 바위, [사진]이완우 지리산 상무주암에 전해지는 스승과 제자로 이어진 세 선사의 수행과 저술 활동으로 보아 이 암자가 고려 불교의 선풍 진작에 큰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혼자 선정에 들었는데 허수아비 같았다. 얼굴은 거미줄이 덮었고, 새 발자국이 무릎에 찍혀 있었다. 이곳 상무주암에 거주하며 수행하는 모습을 묘사한 이 표현은 수행자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구도에 전념했는지를 느끼게 해 주어 숙연해진다. 상무주암 옆의 가파르게 서 있는 바위 서슬을 찾았다. 이곳은 지리산 주능선의 천왕봉, 중봉과 제석봉이 뚜렷이 보이는 전망대로 이 암자의 스님이 가끔 찾아와 휴식하고 명상하는 장소로 보인다. 바위에 기대어 자란 듯한 소나무 가지 사이로 지리산 주능선이 보여서 색다른 풍경이었다. 이곳 바위 위에 바둑판 문양이 세 곳에 조각나게 그려져 있다. 바둑판은 형식과 규격에 맞지 않아 바둑을 두기 위한 목적은 아닌 듯하다. 푸른 하늘, 지리산 정상, 소나무 등과 어울리는 운치 있는 바둑판 문양을 살펴보면서 전망대 바위에서 오래 머물렀다. 상무주암을 떠나며 사찰 건물의 규모나 형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무주암에 머물렀던 역사, 인물과 깨달음으로 향하는 구도자의 마음을 만나고 떠났다. 어느 큰스님은 떠나는 수행자나 신도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뒤돌아 머뭇거리지 말고, 똑바로 앞으로 가거라! 지리산 상무주암 산길 삼정산 조망, [사진]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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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을 사찰에서 해우소라고 부르는 깊은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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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없는 산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낚은 것
- 지리산 자락인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에 한때는 내지리(內智異)에서 사세(寺勢)를 크게 펼쳤던 영원사(靈源寺)가 자리하고 있다. 이 사찰은 9세기 후반에 영원 대사가 창건하여, 불교가 탄압받던 조선 시대에 부용(芙蓉) 영관(靈觀), 청허(淸虛) 휴정(休靜), 사명(四溟), 유정(惟政)과 청매(靑梅) 인오(印悟) 등 수많은 고승이 수행에 전념하여 조선 불교의 명맥을 이어갔다. 지리산 영원사 지리산 주능선 조망, [사진] 이완우 11월 초 단풍이 어우러진 늦가을 숲의 산행은 고즈넉한 정적에 눈과 귀가 맑아져서 사색하며 걷는 길이었다. 양정마을에서 영원사까지 2.5km의 임도가 포장되어 자동차로 올라갈 수 있다. 영원사는 지리산을 10km 마주 보고 있는 삼정산(三丁山, 1,156m) 아래 동남향의 양지바른 곳에 자리하며, 도솔암에서 실상사에 이르는 지리산 칠암자 산길의 한 사찰이다. 영원사 도량에서 무량수전, 삼영전과 산령각 등 전각을 둘러보았다. 이 사찰에 전해오는 영원 대사의 사찰 창건 연기담, 인오 조사의 수행담과 백초월 스님의 항일 독립운동 등 수행자들의 이야기는 전설, 설화와 역사를 생생하게 전승하는 소중한 문화적 자산이다. 지리산 영원사 무량수전, [사진] 이완우 영원 대사의 사찰 창건 연기 설화 『우리 고장의 전설』(함양문화원, 1994) 책자에 이 사찰을 창건한 영원 대사와 사제간에 얽힌 인연 이야기가 사찰 창건 연기담(緣起談)으로 채록되어 있다. 부산 금정산 범어사의 동자승이었던 영원 대사는 지리산으로 수도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그의 스승은 제자에게 지리산에 도착할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동자승은 스승과 범어사가 그리워 고개를 넘으며 뒤돌아보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지리산 영원사 무량수전 앞 돌길, [사진] 이완우 동자승은 지리산에 도착하여 현재의 영원사 터 가까운 곳의 토굴에서 정진 수행하였다. 8년의 세월이 지났으나 영원 대사는 깨우침을 얻지 못하여 이 산을 그만 내려가기로 하였다. 그런데 한 노인이 산에서 숲속의 허공에 낚싯대를 세우고 고기를 낚고 있었다. 노인은 이 산에서 8년 동안 물고기를 기다렸는데 2년은 더 채워보겠다고 했다. 영원 대사는 느낀 바가 있어 다시 토굴로 발걸음을 옮겼고, 더욱 수행에 정진하여 큰 깨달음을 얻었다. 산에서 물고기를 낚는 이 노인은 아마 동자승을 지리산으로 보내고 제자의 득도를 기원하며 기다리는 범어사 스승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영원 대사가 도를 깨우치고 금정산 범어사를 찾아가니, 범어사에 있는 스승은 뱀이 되어서 제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야 영원 대사는 자신이 동자승으로 지리산에 올 때 뒤를 돌아보지 말라던 스승의 금기를 어겨서 스승이 뱀이 된 것을 알았다. 범어사의 스승은 도를 깨우친 영원 대사를 보고는 바로 죽어서 남자아이로 환생하였다. 영원 대사는 지리산 이곳 삼정산 자락에 영원사를 창건하였다. 영원 대사는 범어사의 스승이 환생한 아이에게 승방에서 공부하게 하며, 승방의 작은 창 구멍으로 황소가 들어올 때까지 지성으로 수행하라고 하였다. 몇 년 지나서 과연 황소가 창 구멍으로 뛰어 들어오며 우레 같은 소리가 났다. 아이가 황소가 들어온다고 외치는 순간 깨우침을 얻었다고 한다. 이 영원사 사찰 창건 연기담은 제자의 성공을 바라며 사사로운 정을 끊고 수행에 정진할 것을 당부한 스승의 바람과 제자가 성공하여 다시 스승을 깨우침으로 이끈 사제 간의 끈끈한 정리로 이어진 이야기로서 마음에 닿는다. 지리산 영원사 삼영전, [사진] 이완우 임진왜란 때 승군을 이끌고 나라를 구한 인오 조사 조선 시대 중기에 청매 인오[1548-1623] 조사는 영원사에 거처를 두고, 가까운 산 중턱의 토굴에서 참선 수도하였다. 그는 틈틈이 산죽을 잘라 조리를 만들고 소나무의 관솔을 잘라서, 험한 산길을 걷고 고개를 넘어서 함양의 장터에 내다 팔았다. 그는 장터에서 물건값은 주는 대로 받았다. 팔리지 않은 물건은 그대로 장터에 두고 와서 누군가 가져가서 요긴하게 쓰도록 배려하며 산속 승려로서 백성들과 소통하려고 하였다. 그는 이렇게 영원사에서 수도하는 중에 삼봉산과 법화산을 잇는 능선 허리를 넘어 함양 장터까지 150여 리 길을 하루에 왕래하곤 했는데, 어느 날 오도재(悟道峙)에서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함양의 오도재는 '인오 조사의 함양 장에 가는 길의 고개'라는 뜻과 '도를 깨우친 고개'라는 뜻의 중의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인오 조사가 함양 장터로 오가던 삼정산 기슭에 '견성(見性)골'이 있어서 "까마귀나 까치도 경(經)을 외우며 간다"고 한다. 인오 조사가 함양 장을 다니면서 백성들과 소통하고 교화의 힘이 컸음을 이렇게 지명에 얽힌 설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리산 영원사 산령각, [사진] 이완우 인오 조사는 임진왜란 때 승군을 이끌고 나라를 구하는 데 앞장섰으며, 조선 불교의 중흥에 노력했다. 그는 ‘십무익송(十無益頌)’을 지었는데, “마음을 돌이켜 비추어 보지 않는다면, 경전을 읽어도 이익이 없다[心不返照 看經無益]."는 등 수행자들이 참고할 만한 열 가지 경책을 열거한 내용이었다. 인오 조사는 노년에 영원사 조실로 있었다. 그가 열반에 든 날, 절터가 환한 빛으로 둘러싸였다. 영원사 동쪽 능선에 스님의 사리를 모아 사리탑을 지었는데 밝게 빛나서 방광사리탑이라고 불렀다고한다.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한 수행자 백초월 스님 영원사는 대한민국 일제강점기의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인 백초월(白初月, 1878~1944) 스님이 13세에 출가한 수행 도량이었으며 마음의 고향이었다. 초월 스님은 1919년, 3·1운동 이후에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를 발표하였고, 의용승군제를 추진하였다. 그해 7월, 천은사(泉隱寺)와 화엄사(華嚴寺) 등 여러 사찰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여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하였고, 애국청년들을 선발하여 상해임시정부와 독립군을 양성하는 길림(吉林)으로 파견하였다. 그는 지속적인 항일 독립운동과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건강이 악화한 뒤에도 미치광이로 행세하며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구속이 되었으나 그때마다 정신이상자로 석방되었으며, 친일 승려를 강하게 규탄하였다. 1939년 초월 스님과 가까웠던 신도가 만주로 탈출하면서 봉천행(奉天行) 화물 열차에서 ‘대한독립 만세’라고 글씨를 쓴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는 이 사건에 연루되어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순국하였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한평생을 항일 독립운동에 노력하였다. 우리나라 정부의 상훈 인터넷 사이트에서 스님의 이름을 검색하면 스님의 건국훈장 애국장의 상훈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지리산 영원사 도량 가을 풍경, [사진] 이완우 영원사 도량에서 동남쪽으로 지리산 주능선이 조망된다. 영원사 경내는 정성스러운 손길이 곳곳에 닿아 있어 맑고 깨끗한 산사의 풍경이 단아하였다. 영원사의 오후 햇살에 사찰 앞에 드리우는 산그늘이 갈색 풀밭과 초록색 풀밭과 어울리면서, 검은 화강암인 마천석의 큰 바위로 정연하게 쌓은 가람 앞의 축대와도 잘 조화된 풍경이었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백견불여일행(百見不如一行)'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지리산 삼정산의 유서 깊은 사찰인 영원사에서 수행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백견불여일문(百見不如一聞), 백행불여일문(伯行不如一聞)'이라고 되뇌어 보게 된다. 이곳 지리산 칠암자 산길을 걸으며(行) 백 번 산사의 풍경을 보는 것(見)보다 이 영원사 사찰에 전해오는 세 스님의 이야기를 한 번이라도 듣는 것(聞)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리산 칠암자 산길에서 지리산의 소중한 이야기들이 문화적 자산으로 생명력 있게 전승되기를 바란다. 지리산 영원사 도량 앞 가을 풍경, [사진]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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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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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없는 산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낚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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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나요? 지리산을 방장산이라고 부르는 까닭을
- 지리산은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한다. 방장은 가로와 세로가 각각 1장(丈, 3.3 m) 크기의 정사각형 방이다. 방장은 덕이 높은 승력의 처소를 의미하기도 하며, 큰 수행 도량의 최고 어른을 이르기도 한다. 유마거사(維摩居士, 석가모니의 재가 제자)는 내 마음이 청정해지는 곳이면 그곳이 곧 도량이라고 했다. 삼정산 영원사 오전, [사진]이완우 유마경(維摩經)에 함축성이 풍부한 이야기가 있다. 유마거사가 병이 들었는데, 그가 거주하는 사방 1장의 방장(작은 방)에 그를 문병 온 3만2천 명이 모두 그 방에 앉았다고 한다. 이때 방장은 유한한 넓이를 가진 공간이 아니고, 무한히 포용할 수 있는 수행 도량의 내면적 포용성을 상징한다 하겠다. 함양군 마천면과 남원시 산내면 사이에 지리산 삼도봉에서 뻗어내린 산줄기로서 바위가 험한 삼정산(三丁山, 1,156m)이 있다. 이 산 아래에 하정, 음정과 양정 마을이 있어서 삼정(三丁山)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산 정상에 당당한 세 봉우리가 천왕봉, 제석봉과 중봉의 지리산 주능선의 중심인 세 봉우리 형상을 닮아 있으며 가까이 마주보고 있어서 예사롭지 않다. 함양군 마천면의 마천(馬川) 물길로 향하는 이 삼정산 줄기의 왼쪽은 뱀사골 계곡이고, 오른쪽은 벽소령으로 오르는 계곡과 백무동 계곡이 가까이 있다. 이 삼정산에서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남동 사면은 바위가 돌출되며 세로로 서고 가로로 뻗은 지형이어서 수행 도량들이 험준한 공간에 둥지를 틀고 있다. 이 산의 함양 땅 기슭에 도솔암, 영원사(靈源寺), 상무주암(上無住庵), 문수암(文殊庵)과 삼불주암(三佛住庵) 등 수행처인 도량이 있다. 남원 땅 기슭에 약수암과 산지 평원에 실상사가 있다. 이들 도솔암에서 실상사에 이르는 7 도량을 연결하는 산길을 '지리산 칠암자 순례길'이라고 부른다. 삼정산 영원사, [사진]이완우 이 숲길의 산행거리는 약 14.5㎞이며, 7시간 안팎이면 걸을 수 있다. 도솔암은 그 길의 출발점에 있지만, 도솔암은 비법정 탐방로이므로 부처님 오신 날 하루만 이 길의 탐방이 허용된다. 삼정산 능선 따라 도량 찾아가는 산행 11월 초순 늦가을에 영원사에서 상무주암, 문수암과 삼불주암을 왕복하는 산행 탐사를 하였다. 마천면 양정마을에서 영원사에 이르는 포장 임도를 승용차로 오르다가, 가을 숲이 좋아서 영원사 1km 앞둔 임도의 길섶에 주차하고 걸어서 올라갔다. 영원사에서 상무주암까지는 1.8km의 너덜 바위길과 낙엽 쌓인 숲길을 한 걸음씩 힘들여 오르고 내려가기를 몇 번 반복해야 한다. 영원령(빗기재)에서 왼쪽 길로 가면 지리산 주능선인 삼각고지와 형제봉을 거쳐 벽소령으로 가는 길이다. 상무주암에 가까운 곳에 이르면, 삼정산으로 오르는 0.4km의 등산로가 있는데 출입금지의 안내판이 있다. 산정으로 향한 비탈길은 경사가 급해서 탐방이 위험하다. 상무주암은 출입하는 어귀에 정낭이 걸려 있어 도량으로 진입하는 발길을 멈추어야 했다. 가로 걸린 정낭은 수행 정진하는 산사 도량의 고요함은 존중해야 마땅하고 완곡히 제안하는 듯하다. 상무주암 옆 바위 서슬을 전망대 삼아 바라보는 지리산 주능선은 감동적이었다. 문수암까지 0.8km의 숲길은 걷기에 평탄하다. 문수암은 바위 절벽 중간에 자리를 찾아 올라앉은 듯하다. 문수암의 천인굴(千人窟)은 바위의 절리가 풍화되어 틈새가 벌어져 형성된 제법 큰 공간이다. 삼정산 상무주암 전망대, [사진]이완우 삼불주암 가는 길은 문수암에서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하는 0.8km의 산길은 제법 힘든 과정이다. 삼불주암은 한때는 비구니 암자였다. 삼불주암에는 삼층탑이 하나 있는데, 탑신의 사면에 사천왕, 보살, 부처 등 부조가 있어 둘러보는 의미가 있다. 삼불주암 아래의 삼정산 자락에는 ‘견성(見性)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까마귀나 까치도 경(經)을 외우며 간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견성은 ‘견성성불(見性成佛)’의 축약일 것이다. 삼정산 기슭에 깨달음을 향한 수행자들이 인고의 세월과 정성이 많이 펼쳐져 있음을 이 견성골 이야기가 암시해 준다. 삼불주암에서 약수암과 실상사로 가는 길을 가늠해보며, 이애 발걸음은 영원사 방향으로 돌렸다. 삼정산 산행에서 영원사, 상무주암, 문수암과 삼불주암의 암자 건물 등 외형적 가람보다, 수행자들의 구도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는다. 삼정산 도량에 전해오는 수행자들의 이야기 영원조사(靈源祖師)는 신라 경문왕대(861~874)의 고승이다. 그는 이곳 삼정산의 토굴에서 8년 째 수행에서 얻은 바가 없이 산을 내려가는 중이었다. 한 노인이 물도 없는 산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기 낚고 있었다. 노인은 산에서 허공에 낚싯대를 던져 8년 동안 물고기를 기다렸는데 10년은 채워보겠다고 했다. 이말에 영원조사는 다시 토굴로 돌아가 정성을 다한 노력으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설화가 전해 온다. 이 영원조사는 영원사를 창건하였으며, 상무주암은 861년에 영원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정산 문수암, [사진]이완우 조선 시대 임진왜란 때 승군을 이끌고 나라를 구하고 불교 중흥에 노력했던 인오(印悟, 1548~1623) 조사가 영원사에서 수행하였다. 그는 이곳 삼정산에 오래 머물렀다. 그는 삼봉산과 법화산을 잇는 능선 허리를 넘어 함양장터까지 150여리 길을 하루에 왕래하다가 어느날 한 고개 마루에서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그 고개가 현재의 함양의 ‘오도재(悟道峙)’이다. 영원사에 가까운 도솔암도 인오 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인오 조사의 문집에 ‘머무름 없는 암자(無住臺)’라는 제목의 글이 있는데, 상무주암에서 머물며 지은 시로 보인다. 상무주암은 고려 시대에 보조 지눌(普照 知訥, 1158~1210)이 머무르며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마적대사는 신라 시대 무열왕 때에 활동했던 고승이다. 함양군 휴천면의 엄천강 상류에 있는 용유담에는 마적대사의 설화가 많이 전승한다. 마적대사가 659년(무열왕 6년)에 문수암을 창건했다고 한다. 문수암 도량에 있는 천인굴은 암벽의 절리를 따라 자연히 생긴 바위 틈이다. 천인굴은 수십 명이 들어갈 바위 틈의 공간인데, 천 명이 들어간다는 천인굴이라 과장한 까닭은 천인굴을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구도의 정신적 영역으로 보아서 일 것이다. 문수암의 천인굴은 삼정산의 사찰이나 암자의 도량과 비교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토굴인데, 그 투박한 시원적인 모습에 오래도록 머무르게 된다. 이 천인굴이 유마거사의 방장처럼 여겨졌다. 병이 난 유마거사의 방장에 문수보살이 방문하여 법담을 나눈다. 이 천인굴 옆에 신라 시대에 마적대사가 창건한 도량이 문수암이라니 마음에 서늘한 바람이 부는 듯하다. 삼정산 삼불사, [사진]이완우 삼정산 자락에서 지리산을 방장산이라 까닭을 찾아서 삼정리의 하정 마을은 운치 있는 소나무 숲에 선유정(仙遊亭)이 자리하며 사냥꾼과 선녀의 옛 이야기를 전승한다. 옛날에 삼정산 계곡에 무지개가 하늘로 섰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였다. 선녀들이 무지개를 타고 내려와 삼정산 계곡에서 밥을 지어 옥황상제의 밥상을 마련하여 하늘로 올라가곤 했던 것이다. 이 다음 줄거리는 여느 선녀와 나뭇꾼 유형의 이야기처럼 하늘로 돌아가지 못한 선녀가 사냥꾼과 지상에서 살다가 날개옷을 찾아 하늘로 올라갔다는 내용이다. 이 설화의 핵심은 이 삼정산 계곡에서 선녀들이 옥황상제의 밥을 지어 하늘로 올라간다는 상징적인 내용이다. 밥짓는 과정은 구도의 과정을 유사하다고 본다. 정성껏 쌀을 씻어서 불을 때고 물을 끓이며 뜸을 들이는 밥짓기는 심신을 정화하고 정성을 다하여 인고의 시간을 거쳐서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의 과정을 비유하는 것이 아닐까? 삼정산을 내려와서 실상사 앞 도로를 지나 산내면 고갯길에 멈추었다. 힘들게 기슭에 올랐던 삼정산 정상을 바라본다. 저 삼봉산의 세 봉우리가 지리산 주능선의 천왕봉, 중봉과 제석봉을 대응하며 삼불주암, 문수암과 상무주암 세 도량을 품고 있다. 삼정산 영원사 오후, [사진]이완우 지혜를 상징하는 지리산은 지혜로운 보살인 문수보살이 으뜸으로 연상되는 산이다. 지리산의 천왕봉에 해당하는 삼봉산의 가운뎃 봉우리에는 문수암이 자리하고 있다. 예로부터 삼정산 기슭에서 산나물을 채취하고 약초를 캐며 산에 들던 주민들은 '우- 우-.'하는 소리를 내며 서로 연락을 하며 소통하였다고 한다. 이 소리는 산과 호응하여 일체가 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야호-, 야호-'하는 산과 따로 겉도는 듯한 인위적인 소리와 달리 '우- 우-.'하는 소리는 숲속을 흐르는 바람 소리이며, 바위가 계곡의 물소리에 호응하는 소리로 들린다. 삼정산 기슭과 계곡에서 봄부터 가을까지 울렸던 주민들의 이 안으로 깊이 울리는 소리를 언젠가 들어보고 싶다. 문수사의 천인굴의 바위 틈새의 고요한 공간은 잊을 수 없다. 지리산에 수행의 도량이 생기기 이전에 산짐승들이 이 바위 틈에서 머무르고 아침에 지리산 주능선에서 돋는 해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바위 틈에서 어둠을 지새고 아침에 밝은 해를 바라보는 짐승들은 얼마나 맑고 순수한 마음이었을까? 지리산의 오래되고 자연스런 방장의 하나인 삼정산 정상 아래 문수사의 천인굴을 다시 찾아가련다. 앞으로도 지리산을 오르면서 지리산을 방장산이라 부르는 까닭을 찾아보아야겠다. 삼정산의 여러 도량을 답사하며, 문수암의 천인굴에 마음을 오롯이 남겨두고 내려왔음을 잊지 않았다. 지리산 삼정산 정상 원경, [사진]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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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나요? 지리산을 방장산이라고 부르는 까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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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요선 작가의 지리산 사진 이야기 [셋째 마당]
- 사람주나무의 끈끈한 수액은 여름철의 작은 날벌레 곤충을 잡는 약을 만드는 데 쓰인다. 봄에 피는 이 나무의 볼품 없는 꽃이 가을에는 충실하고 유용한 열매로 변신한다. 투명한 듯 밝은색의 가을 단풍이 매혹적이다. 지리산 달궁계곡에서 소나무 등걸 앞에 가벼운 색채의 사람주나무 단풍에 이끌려서 사진에 담았다. 지리산 달궁계곡의 사람주나무 단풍잎. [사진] 류요선 (2003.10.17.) 사람주나무는 이름에 '사람'이 들어간 식물로 거의 유일하다. 이 나무의 가을 잎은 햇빛이 나뭇잎을 투과한 듯 은은한 여운이 고여 있다. 제주도에서는 쇠동백나무라는 의미의 쐬돔박낭이라고 한다. 이 사랑주나무잎은 물가에서 키 큰 나무의 아래에 자라고 있어서 단풍이 연하게 들어 더 밝고 깨끗한 모습으로 새로운 잎처럼 싱그럽다. 지리산 달궁계곡 그늘의 사람주나무 단풍잎. [사진] 류요선 (2001.10.) 덕유산은 향적봉에서 중봉, 백암봉, 동엽령, 무룡산, 삿갓봉을 거쳐 남덕유산에 이르는 든든한 산줄기이다. 겨울의 덕유산 백암봉에서 조망한 지리산 원경이다. 지리산 주능선 원경을 멀리 다른 산에서 고스란히 담아보고 싶었다. 덕유산 능선의 잔설을 밟고 올라가 무룡산에 텐트를 쳤었다. 남덕유 방향 능선에 구름이 피어오르는 풍경 넘어서 노을을 배경으로 한 지리산의 잔잔한 자태를 마음에 담았다. 덕유산에서 담은 지리산 원경. [사진] 류요선 (1995.11.29.) 지리산 서북능선의 주봉인 바래봉의 산덕마을 부근 임도에 핀 진달래꽃이다. 인공 조림한 낙엽송 숲에서, 키를 한껏 키운 진달래 관목 무리에 햇살이 한 줄기 비쳤다. 진달래꽃은 오전의 한 줄기 햇살에도 밝은 미소로 환하게 빛났다. 바래봉 능선의 진달래꽃. [사진] 류요선 (2010.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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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요선 작가의 지리산 사진 이야기 [셋째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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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마루금인 운봉고원 수정봉 산행 이야기
- 남원시 주천면 노치마을(해발 550m)은 예로부터 억새가 많아서 갈재(가재)라 하였다. 백두대간 마루금의 수정봉 남쪽 산기슭에 위치한 이 마을은 백두대간이 마을의 중앙에 뚫린 돌담 고샅을 통과하며 섬진강과 낙동강의 분수계를 형성한다. 수정봉을 향해 볼 때 이 마을에서 왼쪽은 섬진강으로, 오른쪽은 낙동강으로 빗물이 흘러간다. (백두대간 노치마을 노거수와 호랑이 조형물, [사진] 이완우) 10월 하순, 노치마을에서 북쪽으로 백두대간 마루금을 1.8km 오르는 수정봉(804.7m)을 찾아갔다. 이 마을 앞에는 수령 500년 된 할머니 당산 느티나무 한 그루와 마을 뒤편에 수령 250년 된 할아버지 당산 소나무 4그루가 당당하게 서 있다. 당산 느티나무 아래에는 백두대간과 14 정맥의 조형석이 놓였으며, 호랑이 두 마리의 조형물이 백두대간을 지키고 있다. 바위에 뿌리를 내린 아름드리 육송인 당산 소나무는 소나무 가지가 땅에 닿을 듯한 낙락장송으로 운치가 그만이다. (백두대간 노치마을 샘, [사진] 이완우) 노치마을의 공동우물이던 노치샘은 고려시대에는 절터의 청량한 우물이었다고 한다. 이 샘에서 물을 뜨다가 물이 부족해지면 우물 속의 바위틈에 물이 고이게 되는데, 그때는 이 마을의 엄전한 처녀가 정성껏 퍼 올렸다고 한다. 예전에 이 마을은 정월 초하루에 우물을 깨끗이 하고 금줄을 쳤다. 당산제 날 이른 새벽에 정화수를 뜨러 가면 호랑이가 이 샘을 지키다가, 제사의 첫물을 올린 후에 수정봉으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다. (백두대간 노치마을 위 수정봉 산기슭 다랑논 흔적, [사진] 이완우) 수정봉을 향하여 한참을 오르면, 한때 다랑논이었을 계단식 지형을 지난다. 다랑논의 수평을 유지하며 아래 논과 윗논의 경계가 되는 논두렁의 석축 흔적이 보인다. 평평한 땅에 소나무와 활엽수 둥치가 크게 자랐다. 빗물에 의존하여 농사짓던 수십 두락의 천수답 다랑논이 숲으로 돌아가는 풍경이었다. 수정봉으로 향하는 백두대간 마루금은 바위들이 우뚝 솟고 토양이 척박한 환경인데, 울창한 소나무 숲의 행렬이 이어진다. 졸참나무 등 활엽수의 세력에 밀려 소나무들이 바람결 강한 산등성이에 군락으로 버티고 있다. (백두대간 수정봉 등산로 보라금풍뎅이, [사진] 이완우) 등산로를 가로지르는 소나무 뿌리의 거칠게 마른 거죽을 3cm 크기의 보라금풍뎅이가 힘겹게 넘어가고 있다. 보랏빛 금속광택이 빛나는 이 곤충을 거북이 모양으로 보았는지 한자로는 금귀자(金龜子)라고도 한다. 이 곤충은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종 2급 곤충인 소똥구리처럼 소똥을 굴리지 못하지만, 보는 위치와 빛의 강도에 따라 번쩍이는 색깔이 다르게 보여서 귀한 대접을 받는다. 수정봉은 이 산의 암벽에 수정 광산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지역 주민들은 어린 시절에 이 산에 올라가 육각 기둥의 수정을 주워서 놀던 추억이 있다고 한다. 수정은 석영의 큰 결정 광물이며 주성분은 이산화규소로 모래와 같은 성분인데, 동굴, 암석의 균열, 단층 지역에서 결정으로 성장한다. 이산화규소가 적정한 공간과 온도 등 조건이 충족되면 기나긴 지질시대를 거쳐 맑고 아름다운 수정 결정이 응축되어 자란다. 백두대간의 맑은 기상을 간직한 수정봉 봉우리의 보라금풍뎅이는 마치 보라색 자수정 같다. (백두대간 수정봉 등산로 구절초, [사진] 이완우) 수정봉으로 향하는 마루금 등산로에 소나무 마른 잎인 가리나무가 떨어져 쌓인 메마른 길섶에 구절초 한 그루가 싱싱하게 꽃을 피웠다. 국화과 산국속의 여러해살이풀로 산과 들에 널리 자생하는 구절초는 뿌리줄기를 땅속으로 뻗어나가며 세력을 키워 무리 지어 피기 마련이다. 구절초꽃은 연한 분홍색으로 피어나서 흰색으로 변하는데, 구절초 군락이 꽃피우는 향연은 가을의 계절에 때 이른 설국(雪國)이 펼쳐진 듯하다. 백두대간 등산로 길섶에 오롯한 꽃 한 송이의 자태로 자신의 그림자를 친구 삼아 피어 있는 한 포기의 구절초는 고고하며 장엄했다. 고독하지만 산뜻한 생명력으로 충실한 이 구절초를 한참 바라보다가 꽃 사진을 설레는 마음으로 찍었다. 산길을 동행하며 지리산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류요선(남원시 주천면)씨가 구절초의 그림자까지 사진에 담으라고 충고해 준다. (백두대간 수정봉 바위 능선의 소나무와 고인돌 바위, [사진] 이완우) 수정봉으로 향하는 능선길의 서쪽 기슭 소나무 숲은 가을바람이 솔솔 불기 시작하면 송이가 많이 나온다고 한다. 구룡폭포로 가는 갈림길을 지난다. 이 구룡폭포 방향의 산줄기는 지질학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구룡폭포 방향의 산줄기가 몇 만 년 전에는 원래의 백두대간 마루금이었다. 원래의 백두대간의 마루금이었던 운봉고원의 외륜을 섬진강 지류인 주촌천이 수만 년 동안 파고들어 와서 3km를 하천쟁탈로 낙동강의 수계를 침식하였다. 그 결과로 현재의 수정봉 아래 노치마을에서 정령치 아래 고기삼거리까지의 도로가 곡중분수계(谷中分水界)로서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형성한 특이한 지형이다. 수정봉으로 접근하는 능선길에 고인돌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형태가 청동기시대의 고인돌과 흡사하여 이렇게 이름이 붙여졌는데, 이 바위는 자연적인 토르(Tor)인데 희귀한 형태이다. 지표의 바위가 풍화되면서 기반암 위에 단단한 바위가 쌓인 형태로 탑 모양의 흔들바위 등과 같은 유형이다. (백두대간 수정봉의 무등산 조망 원경, [사진] 이완우) 수정봉 정상에 이르렀다. 이 수정봉의 9부 능선에 삼국시대 축조 추정 테뫼식 노치산성(蘆峙山城)의 돌무더기 흔적이 남아 있다.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주능선의 장엄한 원경은 고리봉에서 덕두산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서북능 능선에 가려졌다.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무등산(1,187m)이 희미하게 보였다. 백두대간의 맑은 기상을 품은 수정봉에서 만난 보라금풍뎅이와 한 포기의 구절초는 오래 기억될 가을 산의 생명력이었다. (백두대간 수정봉 정상의 지리산 서북능선 원경, [사진]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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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마루금인 운봉고원 수정봉 산행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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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고원의 백두대간 마루금 고남산 산행
- (운봉고원 권포리 석장승, 사진 이완우) 늦가을로 접어드는 10월 하순, 남원시 운봉읍 권포리 마을은 추수를 마친 들녁이 한가로왔다. 이 마을은 지리산 자락의 운봉고원에서 석장승이 가장 많이 서 있는 마을인데 남녀 형상의 석장승 두 쌍이 있다. 마을 입구에 한 쌍이 서 있고, 옛날 운봉현으로 가는 길목으로 추정되는 들판에 한 쌍이 있다. 이들 석장승은 마모가 심하여 얼굴과 형태의 윤곽이 희미한 부분이 많다. 권포리에서 좌측 임도를 타고 2km 백두대간 능선으로 오르면 송신탑 시설이 나온다. 임도라고 하지만 옛날의 신작로 느낌이 나는 시멘트 포장길이다. 임도의 곡선길 모퉁이에는 안전 시설로 세워둔 큼직한 노란 색 시멘트 블록이 줄지어 섰다. 송신탑 옆을 지나서 300m 더 오르면 백두대간 마루금의 고남산(846.5m) 정상에 이른다. (백두대간 고남산 용담, 사진 이완우) 이 고남산은 지리산으로 향하는 백두대간의 마루금이며, 운공고원을 에워싸는 외륜(外輪)의 서북쪽 산봉우리이다. 이 산은 고려 말(1380년)에 고려의 군대가 준동하던 왜구의 기세를 꺾은 황산대첩의 서막을 연 역사적 장소이다. 이성계 장군은 고남산 서쪽 기슭의 약수터(현재 창덕암)에서 목욕재계하고, 이 산의 정상에서 왜구의 소탕을 기원하는 제사를 하늘에 올렸다고 한다. 단풍이 아직 물들지 않은 산길에는 용담, 산부추와 패랭이꽃 등 여러 가지 가을 꽃이 진하게 피어 있었다. 가을 햇살이 청명한데 맑은 아침의 바람결에 청보라 빛 고운 색의 용담 꽃이 첫눈에 띈다. 용담은 용담과 여러해살풀로 산지의 풀밭에 자라며 7cm 크기의 종 모양 자주색 꽃이 핀다. 용담 꽃은 꽃이 많이 달리면 바람이 불어 쓰러지면 억새나 싸리나무에 기댄 모습이 애수를 자아내기도 한다. 토끼나 노루가 이 식물의 뿌리를 캐내어 핥는 것을 보고 약초임을 알았다는 전설도 있다. 이 식물은 뿌리가 쓸개처럼 쓴 맛이 나는데, 웅담보다 더 효험이 있는 약초라 하여 용담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백두대간 고남산 산부추, 사진 이완우) 산부추는 수선화과 부추속의 여러해살이풀로 비늘줄기이며 부추향이 난다 마늘냄새가 난다. 산과 들에 야생화가 자취를 감추어 가는 시기에 보랏빛 산부추가 두메 산골의 변두리에 친근한 모습이다. 봄 부추는 인삼 녹용보다 낫다. 부추 씻은 첫 물은 사위 준다. 사월 부추는 사촌도 안 준다. 부추와 관련된 속담이 이렇게 많다. 부추는 지역에 따라 솔이나 정구지라는 토속적 이름으로도 불린다. 이곳의 산부추는 이 가을 꽃이 씨앗을 잘 맺고, 내년 봄에 싱싱한 군락을 이룰 것이다. (백두대간 고남산 패랭이꽃, 사진 이완우) 패랭이꽃은 석죽과 여러해살이풀로 밝은 분홍색의 꽃이 화려하다. 꽃송이가 여러 개 달린 모습이 청순한 이 꽃은 대나무처럼 마디가 있다. 패랭이꽃을 거꾸로 뒤집어 보면 패랭이 모자와 비슷하다. 조선시대에 신분 낮은 사람들은 대나무를 가늘게 쪼갠 댓개비로 엮은 패랭이 모자를 쓰고 다녔다. 패랭이 모자는 천민, 보부상, 백정과 역졸들이 많이 쓰고 다녀서 상놈갓이라고도 하였다. 이 패랭이 모자를 역졸은 겉면을 까맣게 칠했고, 보부상은 목화송이 2개를 달아서 썼다. 고남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출전한 이성계 장군이 치열한 전투 중에 왜구의 화살에 왼쪽 다리 부상을 입었다. 이때 면화 상인이었던 한 군졸이 면화를 이용하여 응급처치하였다. 이성게 장군은 조선 개국 후에 보부상의 패랭이 모자 왼쪽에 목화송이를 달게하여 보부상이었던 이 군졸의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병자호란 때 인조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난 중에 약간의 부상을 입었는데, 이 때도 그 출혈을 보부상인 솜장수의 솜으로 지혈했다고 한다. 인조는 보부상 패랭이의 오른쪽에 목화송이 하나 더 달라고 어명을 내렸다고 한다. (백두대간 고남산 정상 등산로 바위 산불 조심, 사진 이완우) 고남산 송신탑을 지나서 고남산 정상에 이르렀다. 고남산 정산 부근의 등산로 바위 위에 '불조심'과 '산불조심' 글귀가 두 곳에 새겨져 있다. 1960년대에 산림청이 생기고, 치산 녹화 사업에 노력하며 산불 통계를 내기 시작했다. 이 산불조심 구호가 새겨진 암각서에서 그 시대의 상황과 산림 녹화에 대한 의지를 읽어본다. 백두대간 마루금의 고남산은 사방으로 조망이 트여서 지리산 천왕봉, 중봉과 제석봉이 삼형제처럼 보인다. 반야봉이 보이며 만복대, 고리봉, 바래봉 과 덕두산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서북능선이 늘어서 있다. 북쪽으로 덕유산, 서쪽으로 내장산과 무등산 방향의 조망도 선명하다. 이러한 지형 조건으로 이곳 고남산에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고남산성 흔적이 남아 있고, 봉수대가 있었다고 하며, 고려 말 이성계 장군의 산신제 제단이 있고, 현재는 송신탑과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백두대간 고남산 남원시 조망 원경, 사진 이완우) 고려말에 이성계 장군은 이곳 산 정상에서 전쟁터가 될 운봉고원과 왜구의 동태를 살폈다. 또한 백두대간과 지리산의 산줄기를 바라보면서, 14세기 중후반의 동북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조망하였을 것이다. 12세기에 몽골 초원에서 웅기한 징기스칸의 몽골 세력은 원나라를 세우고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200여 년이 지나면서 몽골의 원나라가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14세기에는 동북아시아의 국제적 질서가 어지러운 시대였다. 중국의 남쪽 옛날 남송 지역에서 백련교를 중심으로 한족의 무장봉기가 일어나고, 일본의 무장 해상 세력인 왜구들이 1350년대부터 동아시아 멀리 필리핀, 중국 동부 해안과 고려의 해안과 내륙 깊숙이 침투하였다. 이 왜구들은 일본의 남북조 시대에 일부 지역의 영주들과 관련되어 조직화된 대규모 군대 세력으로 고려는 심각하게 인적 물적 자원을 약탈 당하여 피해를 입었다. (백두대간 고남산 지리산 천왕봉 주능선 조망 원경, 사진 이완우) 중국은 1368년에 명이 건국되어 몽골의 원나라를 북으로 밀어냈고, 준동이 극성한 왜구들은 1380년에 500여 척의 함선으로 금강 하구 진포에서 최무선(1325~1395) 화포 전술에 의해 격파당하였다. 이 전투의 패배한 잔당 왜구들은 금강 상류를 거쳐 운봉고원에 진을 치고 있었고, 고려 군대가 왜구를 공격하여 황산 대첩을 이루게 된다. 이성계 장군은 이 고남산에서 운봉고원을 조망하며 전투를 준비하면서, 지리산 주능선과 백두대간의 산맥처럼 흘러가는 당시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 흐름을 읽고 고려의 앞날을 생각했을 것이다. 백두대간 고남산에서 전쟁터의 지형을 읽는 장수의 지혜와 국제적인 역사의 흐름을 읽는 시대적인 안목은 어느 시대나 필요하다. 조선 개국의 설화가 전승되는 운봉고원의 역사적 유적지인 백두대간 고남산을 찾은 산행은 가을날 소풍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백두대간 고남상 정상 표지석, 사진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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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고원의 백두대간 마루금 고남산 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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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여신과의 비대면 회의
- 이 글은 [생명 다양성 재단]의 뉴스레터 [하늘다람쥐]에 실린 글입니다. <마고여신과의 비대면회의> 칩코(지리산방랑단) 지리산 주민 채용 면접 칩코는 긴장한 얼굴로 면접장에 들어섰다. ‘지리산 주민 채용 면접’이라 적힌 현수막이 걸렸다. 칩코는 절복의 매무새를 다시 살피곤 차렷자세로 섰다. “안녕하십니까! 지리산 주민 지원자 칩코입니다!” 칩코의 우렁찬 인사에 멧비둘기가 화들짝 놀라 날개를 푸드덕 댔다. 의자에 걸터앉은 수달은 눈이 퀭한 채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가운데 자리를 꿰찬 개망초만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세 명의 면접관은 모두 검은 양복을 차려입었으나 수달은 흰 리본을 달았다. “자기소개 하세요. 지리산 방랑단이라고요?” 개망초가 서류를 뒤적거리며 물었다. “예! 지리산방랑단은!” 칩코의 목소리에 또 놀란 멧비둘기가 깃털을 날리자 개망초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후 “작게 말해도 다 들립니다.”라고 엄숙하게 지적했다. 칩코는 입이 바짝 말라 침을 꿀꺽 삼켰다. 면접에서 떨어지면 지리산에서 쫓겨날 것이었다. “예. 지리산방랑단은 네 명의 인간으로 구성된 환경운동 단체입니다. 지리산방랑단은 이 년 전, 지리산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우기 위해 선배 야생동물님들을 본받아 사개월의 무전방랑을 하며 시작됐습니다.” “무전방랑이 뭐야?” 수달이 책상에 뺨을 기댄 채 별로 안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예! 선배님들처럼 돈 없이, 차 없이 지리산을 떠돌았다는 뜻입니다. 지리산 5개 시군구를 매일 걸으며 숲과 마을에서 얻어 먹고 얻어 자면서 지냈습니다.” 대답을 들은 수달은 더욱 미궁에 빠졌다. 도대체 그게 뭐가 특별한 건지 이해를 못한 듯했다. 개망초는 한숨을 쉬며 수달에게 귓속말로 덧붙였다. “인간들은 보통 안 그래. 인간들은 돈 없으면 밥도 못 먹고 집도 못 구하거든.” 개망초는 칩코에게 마저 말하라고 눈짓했다. “예, 예. 지리산을 방랑하며 개발사업으로 사라지는 숲 이야기를 채집해서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이후 지리산에 정착하여 생태적인 삶을 고민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생태적인 삶은 또 뭐야?” 수달이 반대쪽 뺨을 책상에 납작 붙인 채 물었다. 칩코는 구변 좋은 방랑단원을 데리고 올 걸 후회 중이었다. “예! 선배님들처럼 돈 없이 지내는 삶입니다! 텃밭농사를 짓거나 산나물을 캐서 식량을 자급하고, 산에서 장작을 구해 난방하고 매일 불을 피워 밥을 짓습니다! 빨래나 설거지한 물은 모아서 텃밭에 돌려주며 물을 아끼고요! 사실 전기는 조금… 쓰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생태적으로…” 멧비둘기가 고개를 앞뒤로 두번 까딱했다. 진땀을 빼던 칩코는 그의 반응에 안도했다. 하지만 수달은 한층 복잡해진 표정으로 개망초를 바라봤다. 개망초는 “인간들은 보통 안 그래. 전기랑 돈 없이는 하루도 못 살아.”라고 귓속말로 알려주었다. 개망초는 책상에 턱을 괸 채 물었다. “그래서… 올봄에 구례 산동면 ‘지리산 골프장 예정지’에서 벌어진 대참사를 알고 계시겠죠? 그때 지리산방랑단은 어떤 활동을 하셨습니까?” 칩코는 잠깐 오줌을 싸고 와도 되느냐고 묻고 싶은 걸 참았다. 이 면접이 생긴 이유가 바로 그놈의 지리산 골프장 때문이었다. 골프장 예정지에서 생긴 일 올봄, 구례 전역에 현수막이 나부꼈다. ‘(축)지리산 골프장 업무협약체결 축하합니다(축)’라고 적힌 현수막 400여개가 온 구례에 동시다발적으로 걸린 것이다. 알고보니 골프장 예정지에서는 겨울부터 이미 21헥타르 규모에 달하는 벌목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때 삶을 잃은 나무가 몇이며, 집을 잃은 멧돼지가 몇이던가! 땅 속 박힌 나무뿌리와 바위까지 다 파헤치자, 흐르던 계곡물도 자취를 감추고 비탈은 운동장처럼 평평해졌다. 칩코는 깎아지른 벌목지에 처음 방문했을 때 나무 시체 더미를 보고 눈 앞이 아득해졌었다. 골프장 예정지 아래 사포마을 인간들도 날벼락을 맞긴 마찬가지였다. 골프장이 들어서면 그 독한 농약이 다랭이논으로 고스란히 흘러갈 게 뻔했다. 사포마을은 옛사람들이 손으로 만들어 아름다운 곡선이 그대로 남아있는 다랭이논이 유명했다. 누구 맘대로 골프장을 뒷산에 들인다고 했단 말인가! 인간들은 군청에 달려가 호소했으나 군수는 골프장을 추진하겠다는 기자회견만 성대하게 치르고 주민 면담을 거부했다. 척박한 곳 어디든 먼저 달려가는 선구식물 개망초가 벌목지에 온 것도 올봄이었다. 개망초는 이보다 좋은 번식지가 없다며 신났지만, 숲을 잠식한 음울한 기운이 찝찝했다. 그러다 집을 잃고 또 다른 둥지를 찾아 헤매는 소쩍새 가족에게 숲의 사정을 들었다. 물론 소쩍새 가족도 영문을 몰라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였지만, 깨진 시멘트 틈마다 끼어 인간들 하는 짓을 가까이 지켜보던 개망초만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수달도 그곳에 살고 있었다. 수달의 고향은 사포저수지였다. 한때는 매일 넘쳐나는 은어에 다망하고도 풍족했으나 다 옛말이 됐다. 인간들이 정겨운 옛저수지의 모습은 사라지고, 높은 홍수방어벽이 솟아났다. 수달은 어린 젖먹이를 바위틈에 숨겨두고 길렀다. 공사차량 소리가 시끄럽던 어느 날, 먹을 게 없어 먼 곳까지 먹이를 구하러 나간 사이 바위틈은 젖먹이들과 함께 시멘트로 메워져버렸다. 그렇게 홍수방어벽에는 덜 마른 시멘트에 찍힌 수달의 애처로운 다섯 발가락이 남게 되었다. 수달이 흰 리본을 매단 이유였다. 난리통은 끝이 아니었다. 매일 밤낮 그 우람하던 나무들의 비명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벌목지에 영역을 빼앗긴 동물들은 서로 영역다툼을 하느라 소란이었다. 수달이 이용하던 계곡길도 간데 없이 사라졌다. 더이상 맛있는 것도 없고 귀여운 자식도 없었다. 살고 싶지 않아진 수달이 벌목지를 보며 자빠져있던 곳이 마침 개망초의 옆자리였던 건 우연이었다. 개망초는 안쓰러운 수달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건 다 지리산에 아무나 들인 탓이다! 이웃 간의 상도라곤 없는 인간 녀석들이 문제다!’ 주민 채용 면접을 해서 지리산과 어울리는 인간을 가려낼 필요가 있었다. 개망초는 지리산 마고여신의 결재를 받아 면접을 대대적으로 열었다. 우울한 수달을 달래 일단 면접관으로 앉혔다. 종다양성을 고려해 조류 면접관도 한 명 두려던 차에, 개망초의 연설 때마다 고개를 앞뒤로 까딱이던 기특한 멧비둘기가 발탁됐다. 지리산에서 쫓겨난 생물 “그게… 저는 ‘지리산사람들’ 시민단체와 ‘사포마을 골프장 건설 저지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와 함께 벌목지 답사 프로그램을 열어 사람들에게 참사소식을 알렸습니다. 향과 쌀을 바치며 애도하는 시간을 갖고요. 지리산방랑단은 방구룸 뉴스를 기획하여 희생된 나무님들과 수달님 등을 인터뷰하였습니다!” 수달이 살짝 고개를 들어 칩코의 얼굴을 봤다. 그제야 자신을 인터뷰하러 왔던 방구룸 뉴스팀이 떠올랐다. “아 그게 지리산방랑단이었군. 지난해 대규모 골프장이 들어선 강원도 화천군에서 수달이 수은중독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왔지.” 면접장은 다시 침울해졌다. “흠, 질문은 이쯤하자. 칩코는 그럼 계속 지리산에 살 것을 허락할까?” 개망초가 조심스럽게 침묵을 깼다. 수달은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책상에 퍼졌고, 멧비둘기는 고개를 앞뒤로 까딱였다. 칩코는 연신 감사인사를 드리며 허리를 90도로 접었다 폈다. 면접장을 나서려던 칩코는 다음 대기자에 구례군수가 앉았던 것을 기억해냈다. 칩코는 홱 뒤돌아 면접관을 향해 물었다. “저어… 골프장 건설을 추진하는 인간들은 당연히 주민권이 박탈되겠지요?” “엥?” 개망초는 멈칫했다. 마고여신께서 누굴 쫓아낸 적이 있던가? 면접을 해도 된다고만 하셨지, 그 면접을 통해 누굴 쫓아내라고는 하지 않으셨다. 개망초는 목을 가다듬고 답했다. “주민권을 박탈하지는 않습니다. 지리산에서 계속 살 수는 있습니다.” 칩코는 방금 들은 게 말인지 방귀인지 헷갈렸다. “네? 그게 무슨… 그럼 애초에 이 면접을 왜 하는 거죠?” 개망초는 눈을 피하며 “그게… 마고여신님은 한번도 누굴 내치신 적이 없습니다. 그저 모든 생명을 품으셨죠. 그…이만 나가주세요.”라고 말했다. 칩코는 입이 떡 벌어지다 못해 길길이 날뛸 기세였다. “무슨 소리냐고요! 생명을 품는 것도 정도가 있지!” 멧비둘기가 고개를 앞뒤로 까딱했다. “저봐요. 멧비둘기님 말씀해보셔요!” 멧비둘기는 한번 더 고개를 앞뒤로 까딱하더니 갸우뚱 기울였다. 칩코는 비둘기가 동의의 표현으로 까딱거리는 건지 점차 혼란스러워졌다. 수달은 책상에 뺨이 인절미처럼 늘어진 채 “왜 저렇게 화난거야?”라고 개망초에게 물었다. 개망초는 여전히 칩코 눈을 피하며 “인간은 보통 저래. 자기랑 생각이 다르면 없애고 싶어해.”라고 중얼거렸다. 칩코는 개망초의 멱살을 잡고 싶었으나 어디가 목인지 알 수 없어 두 주먹만 불끈 쥐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골프장 따위를 짓겠다는 놈들을 가만두겠다고요? 이런 놈들을 가만두다간 숲이 절멸할 거에요! 무려 기후위기 시대라고요! 또, 또 수달님 태평하게 기후위기가 뭐냐고 물어볼 거죠? 지구가 마구 뜨거워져서 생물체가 도저히 살 수 없게 되는 거라고요!” 그때 면접관들 끝에 빈 줄 알았던 의자가 빙그르 돌았다. 알고보니 면접관은 셋이 아니라 넷이었다. 의자엔 바퀴벌레가 여상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개망초는 종다양성을 위해 곤충 면접관을 한 명 모셨고 유구한 지구의 역사를 살아온 바퀴벌레가 안성맞춤이었다. 바퀴벌레는 제 목소리가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것을 알고는 칩코에게 손짓했다. 칩코는 씩씩거리며 바퀴벌레에게 다가가 귀를 댔다. “어리석은 인간이여. 내가 살아봤는데 지구가 뜨거워져도 모조리 죽진 않는다네. 껄껄껄.”하는 소리가 모기 날갯짓만한 소리로 들려왔다. 칩코의 이성의 끈이 드디어 똑 끊어졌다. 마고여신과의 비대면회의 “당장 책임자를 모셔오세요! 아무도 탈락하지 않는 괴상한 면접을 열어 시간만 낭비하게 하다니! 마고여신님께 제가 직접 물어야겠습니다! 그런 나쁜 놈들마저 품는 게 위대한 마고여신님의 할 일인 건지!” 개망초는 난감했다. 개망초는 그런 인간을 가려낼 생각은 있었지만 쫓아낸다는 건 상상해보지 못했다. ‘하여간 인간들은 늘 끝장을 보려하지’라는 말만은 저 폭주기관차에게 닿지 않게 속으로 뱉었다. 그때 바퀴벌레가 마고여신님에게 비대면 회의 링크를 전송했다. “모시도록 하죠 뭐. 어려운 일도 아니고 껄껄껄.”하고 말했으나 누구도 듣지 못했다. 면접장 뒤 흰 벽에 커다란 얼굴이 번쩍 떴다. 멧비둘기가 요란하게 날개를 푸드덕 댔다. 바퀴벌레를 제외한 모두가 놀라 영상화면을 바라봤다. 마고여신인 반달가슴곰이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곰은 한창 도토리를 씹느라 뭉개진 발음으로 “왜 불렀지?”하고 물었다. “제게 생명을 주시는 마고여신님! 늘 맑은 물과 달콤한 산딸기를 주심에 깊은 감사를 올립니다! 그런데 이런 감사함을 모르고 숲을 해치는 자가 있다면 응징이 인지상정이지 않습니까? 명재경각의 벌목지를 굽어살피시어 나쁜 놈들을 모두 물리치옵소서!” 칩코는 스스로 어디서 이런 말투를 배운건지 알 수 없었으나 되는 대로 나불댔다. 모두가 고요히 마고여신의 말을 기다렸다. 마고여신은 도토리를 다 삼키고는 조금 분명해진 발음으로 입을 열었다. “삶과 죽음은 다르지 않아. 둘은 뭐랄까… 딸기케이크와 초코케이크 같은 거지. 뭐가 옳고 그른 건 없어.” 곰의 말이 끝나고도 면접장은 여전히 침묵에 싸였다. “케이크보단 꿀이 더 맛있지만.”라고 덧붙인 후엔 다시금 곰의 ‘찹찹찹’ 씹는 소리만 가득했다. 갑자기 엉엉 우는 소리가 고요를 갈랐다. “알아요. 삶과 죽음이 케이크라는 거 다 안다고요. 그래도 너무 슬픈 걸 어떡해요” 수달이었다. 곰은 화면에 한 발짝 다가와서 다정하게 말했다. “수달아 속상하지? 벌써 가을이야. 가을 열매엔 달콤함과 시간이 들어있어. 둘다 슬픔을 잊는 데 도움이 되지.” 숲에 옳고 그름은 없어도 기쁨과 슬픔은 있다. 숲의 모든 달콤함은 슬픔을 위로하는 마고여신의 선물이었다. 수달은 눈물을 글썽이며 마고여신을 바라봤다. 시간은 늘 우리를 열매처럼 말랑하게 만들어준다. 수달은 ‘저는 열매를 안 먹는데요’라는 말은 삼키고 마고여신님께 경배했다. 기운을 차린 수달이 씩씩하게 면접장을 달려나갔고, 밝아진 수달을 보고 개망초도 뿌듯함에 뒤따라 달려갔다. 마고여신의 먹방도 막을 올리고 바퀴벌레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모두가 해피엔딩인 양 가버렸지만 정작 칩코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면접장에 칩코는 홀로 남았다. 마고여신은 법이요 진리. 초코니 딸기니 이해가 잘 되진 않았지만 그분 말씀에 삶과 죽음이 케이크라면 케이크인거였다. 못된 놈들도 처벌 따위 받지 않고 달콤한 가을열매를 나눠먹을 수 있는 거였다. 다만 칩코는 허탈했다. 그렇다면 칩코가 사명감을 가져온 환경운동은 뭘까? 정의란 건 없는 걸까? 처참한 벌목지고 기후위기고 모든 게 그냥 케이크라면… 칩코는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알 수 없었다. 칩코는 수달처럼 턱을 괸 채 자빠지고 싶은 슬픔에 빠졌다. 그때 처음 듣는 목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왔다. “네가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걸 하고 살아. 누굴 탓할 건 없어. 희망은 가을열매처럼 착한 놈 못된 놈 가리지않고 찾아오거든.” 멧비둘기가 칩코의 머리통에 잘 익은 정금열매 한 알을 떨어뜨리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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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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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여신과의 비대면 회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