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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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칩코

 

<경칩편지, 돌에게>


 돌, 어제까지만 해도 노란 방울같았던 산수유 꽃이 오늘은 활짝 핀 걸 봤어요. 새 계절이 오네요. 차분히 잘 나고 있나요?


 우리가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나무를 찾기 위해 가지끝만 보이면 발걸음을 멈추고 들여다 보았던 서울 회동이 벌써 일주일 전이네요. 여러모로 서툴었던 진행에도 서울 펜팔 친구들의 너무 따뜻하게도 함께 도와주어서 긴장되었던 마음도 사르르 녹아 믿고, 의지할 수 있었어요. 참 고마워요. 돌의 편지를 보아하니 저를 아직 못찾은 것 같아서 그것도 마음이 놓이고요. 하하. 지리산에서 만나게 되는 날에는 모두가 서로의 정체를 알고, 더 속 시원하게 얘기나누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어요.


 돌의 우수의 편지를 받고, 참 고마웠어요. 마치 돌이 제가 편지에 모아둔 문장들을 하나하나 집어 들어서 찬찬히 들여다보고, 소중하게 어루만지는 느낌이에요. 내 말이 당신에게 닿은 덕분에 나 혼자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의미와 가치들을 더 찾아볼 수 있었어요. 제 문장들을 바라봐주어서 고마워요. 편지에서 그 바라봄의 온기가 느껴져서, 이미 돌이 자신이 말한 우아한 사람을 닮았다고 느꼈어요. 사랑과 환대, 위안을 주는 건 이런 느낌이겠구나 했지요. 돌의 글을 보면서 저도 우아함을 연습해볼게요.


 그렇지만 사실, 요새 저는 조금은 조급하고, 조금은 무력함을 느껴요. 우아해지기가 쉽지 않아요. 환경부가 설악산 케이블카 사업을 허가했다는 소식, 지리산에도 정령치 산악열차 공사 시작일이 정해지고, 구례의 케이블카 사업도 손쓸 도리없이 그들만의 정치로 정해지는 듯한 모양새이고, 흑산도 공항, 제주 비자림로 등등 어디서부터 어떻게 막아야 할지 모르겠을 정도로 너무 많은 일들이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지고 있네요. 


 저는 여전히 지리산이 내어준 품 덕분에 산수유 꽃과 매화 꽃이 피어나는 걸 보고, 떼지어 날아가는 참새들이 더이상 동그랗지 않다는 걸 발견하고, 나도 따라 둘레길을 쏘다니다가 소나무 향기를 가득히 들이마시고,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섬주섬 주워와 방을 덥히는 안온한 일상을 살며 몸과 마음을 지켜가고 있어요.

 

 다들 산과 바다에게 한 번쯤 위로받고, 고마웠던 순간이 있을텐데요. 또 고마운만큼 잘 해주고 싶은게 사람의 마음일텐데요. 도시에서도 꽃이 피면 기뻐서 구경가고, 우연히 길냥이를 마주치면 귀여움에 관심이 가잖아요. 아니면 사람들은 이제 돈에게 더 고마움을 많이 느껴서 그런걸까요? 저도 배부르고, 등 따신 거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돈 참 좋아하는데요. 하하. 지금 이 지경은 정말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나부터가 미워보이곤 해요. “언제까지 받기만 하고 살래?”하는 마음이죠. 활동가로 살아가는 돌은 좀 어떤가요? 활동가라는 자리와 역할은 돌을 더 가볍게 하나요 혹은 더 무겁게 하나요?


 ‘내가 잃어버린 초심’은 어쩌면 ‘지키고 싶었던 마음’일거에요. 무언가를 시작할 때 가지는 마음은 단순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후로 펼쳐지는 일들은 주로 예상밖의 것들이라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어요. 저한테는 채식이 그랬어요. 처음 공장식 축산업의 과정을 영상으로 보았을 때는 너무 적나라한 폭력장면과 공포에 떠는 소,돼지,닭들의 눈빛과 몸짓이 잊혀지지 않았어요. 우리 앞에 놓인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누구의 피와 눈물로 만들어졌는지 알게 된 이상 ‘절대 먹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지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어떻게든 알려주고 싶었어요. 다른 사람들이 내가  느끼고, 생각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분하고, 조급해지고, 무력했어요. 무엇과도 타협하기 싫었고, 일상이 투쟁이었어요. 돌이 언젠가 편지에 적었던 딱 그 문장이요.


 지금도 저는 비건이에요. 그런데 처음과는 분명 다른 마음이에요. 무엇이, 어떻게, 왜 달라졌는지는 아직 정리가 안되었지만 처음과 달라진 지금의 나를 ‘초심을 잃었다’보다 ‘초심을 건넌다’고 표현하고 싶어요. 아니 건너는 중이라고요. 이 쯤에서 초심의 내가 ‘비건’을 다짐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주위 스승들에게 한 번 더 지혜를 구하고, 의지하고 싶네요. “어떻게 초심을 건너가고 있고, 그 길에서 당신은 무엇을 만났나요?” 그럼 나는 또 그들 덕분에 어제와 다른 마음으로 살아가겠죠!


 돌에게는 어떤 초심이 있었을지, 초심으로부터 멀어진 발걸음은 어딜 향하고 있는지 궁금해요. 돌의 이야기 기다리고 있을게요. 짹짹!


2023.3.5 참새로부터

 

<참새에게, 경칩의 편지>

 

안녕하세요 참새, 돌이에요. 며칠 전까지 한껏 봄이 왔구나 하며 외투를 바꿔 입었는데요. 어제 오늘은 꽃샘추위의 시간이에요. 그렇지만 바람이 아무리 차가워도 햇빛의 따스함이 봄을 알려주어요. 얼굴이 그새 좀 탄 것도 같고, 대충 걸쳐도 양달에 몸을 내밀면 따뜻해요.

 

참새의 초심을 들으며 저 역시 ‘고기를 먹지 않겠어’라고 다짐한 순간이 생각나요. 다큐에서 고통을 느끼는 동물들을 봤고 죄책감에 채식을 선언했어요. 학교에서는 급식이 따로 없었고 몇 달쯤 하다 그만 두었고요. 내 선택이 곧 내 정체성이라 느끼던 나이에 다시 채식을 시작했어요. 지금으로부터 일년쯤 전 비질을 다녀왔는데, 그 돼지들의 얼굴을 보고 기억한 순간부터 비건이 되었고요. 다시 돌아갈 수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눈을 마주한 순간이었고, 트럭에서 나는 냄새를 맡았고, 트럭이 공장 안으로 출발한 후에는 도로 너머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어요. 저는 금방 다시 상품으로만 돼지를 만날 수 있는 도시 한 중간으로 돌아왔어요. 그 잔상을 지우지 않고 곱씹었어요. 내가 직접 볼 수 없는 만큼 더 들으려고 했고, 그중에는 생추어리나 닭과 사는 이의 이야기도 있었고, 또 다른 이의 비질 소식들도 있었어요. 사진, 글, 말을 열심히 듣고자 했고 저에게 주어진 장소를 최대한 활용해 글을 썼어요.

 

동물을 먹지 않고, 입지 않고, 사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게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선택이었어요. 그와중에 저는 제 가장 주변의 관계부터 경계하고 날카로워졌고요. 그런 감각이 반복되며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요. 그 즈음 *“근데 채식에 몰두할수록 동물을 먹지 않으려는 노력과 시도가 성공적일수록 내 일상에서 어떤 존재의 삶을 생각하는 시간과 횟수는 줄어든다. ‘고기'를 동물로 인식하는 일이 어려워진다. 소비재의 변경이 곧 살아있는 존재로 동물을 마주하는 기회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얘기도 했었네요.

 

그런가봐요. 생명을 곁에 두고 같이 살아가야, 그 생명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고 유지될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것 같아요.도시에 사는 건, 지키고 싶은 것들을 멀리서 보고 말하는 일 같거든요. 제가 잃은 초심은 이 지점에 있어요.

 

저는 어렸을 적부터 우리 사회를 인정하기보다 부정하고 저항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배웠어요. 사람이 죽고, 나무가 잘리고, 돈을 이유로 대화조차 할 수 없이 팽개쳐진 현장에 찾아갔고, 그 옆을 지켰고, 목소리 높여 외치며 자랐어요. 연결과 공생, 따뜻함을 충분히 느끼게 해주는 관계 속에 있었고 그게 당연했고, 그래서 이것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이것이 파괴되는 현장들, 부정의한 것을 보고 목소리 내는 경험이 더 많았어요. 그래서 많은 이들이 말하는 ‘활동가가 되기로 결심한 순간’이랄 게 딱히 없어요. 거대한 충격보다는 작은 무너짐을 여러 번 쌓아왔어요.

 

가장 따뜻하게 자라왔음에도 ‘세상은 원래 그래’라는, 자본의 원리에서 가장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이 할 법한 말이 어느새 제 안에도 들어와 있었나봐요. 그래서 폭력의 자리에서 살고 있는, 그것 없이 일상의 어느 것도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나 대면할 때, 스스로가 부끄러워질만큼 다시 깨달아요. 그럴 때 제가 잃은 어떤 감각을 상기해요.

 

그래서 저한테 초심은, 어떤 한 시점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에요. 여러 번 마음을 세우고, 얼굴을 마주하고, 부끄러움을 깨달으면 그 순간으로부터 얼마 간 그 초심으로 살아가요. 생명으로 살 수 있어요.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지요. 저는 저의 의지박약을 탓하기보다,, 3일마다 작심해야겠다고 다짐하려고요. 생명으로 살아가기 위해, 더 자주 다른 타자를 기꺼이 경험하고 연결하고 만나고 대화하고 아프고 같이 건너가고 싶어요.

 

그래서 참새가 건네준 말들이 더 소중하고 감사해요. 무력함이 무력함을 끝나지 않게, 같이 힘내고 싶어요. 우아해지기까지는 어렵더라도, 타협하지 않는 마음을 지키는 일을 같이 할게요. 멀리서 할 수 있는 일은, 우선 잘 듣는 일이라고 혼자 짐작해보아요. 이번 편지에서 나눠준 소식들 덕분에 저도 얼마 간 놓치고 있던 지리산 주변의, 설악산에서의, 제주와 흑산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시 한 번 찾아보았어요. 어려움을 나눠주어 고마워요 참새. 더 잘 들을게요. 돌처럼 듬직하고 단단하게 여기에 있을게요, 데구르르.

 

경칩의 끝자락에서, 돌 씀. 2023.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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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칩 편지 : 참새와 돌] 어떻게 초심을 건넜고, 무엇을 만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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