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KakaoTalk_20230316_185303817.jpg

디자인.칩코

 

 

<나무의 눈동자를 닮은 산달에게>


산달! 제가 만약 요절한다면 사인은 과로일 거예요. 산달의 고질적인 습관이 미루기라면, 저는 절대 미루지 못하는 강박이 있답니다. 제가 눈 뜨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오늘 할 일 리스트’를 적는 거예요. 아니 사실 아침까지도 미루지 못해 전날 밤에 적어두고 자요. 이런 저를 보고 소름끼쳐하는 친구들의 반응이 제법 익숙해요. 새벽부터 한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을 떨다가, 초저녁이 되면 충전할 때를 놓친 핸드폰처럼 푱 하고 전원이 나가듯 잠이 듭니다. 


산달의 편지를 기다리는 일은, 성질 급한 저에게 퍽 좋은 처방처럼 느껴져요. 제가 조금 더 느긋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해주어요. 저는 산달이 하루를 통째로 편지를 쓰며 보내는 사람이라서 좋아요. 글을 날쌔게 쓰는 재능을 가진 사람과 편지를 나누고 싶었다면 쇼미더머니에 가서 즉흥랩을 듣는 편이 나았을 거예요 히히. 그러니 새끼 손가락을 걸고 하는 약속은 ‘늦지 않기’보다는 ‘느리고 빠른 서로를 수용하기’로 해요! 


산달의 편지를 받은 날도 새벽에 눈을 떴어요. 무등산 국립공원으로 집회를 가는 동료들에게 응원을 보내려다 시간이 너무 일러서 잠시 미루었는데요. 그 틈에 메일함을 보니 고작 한 시간쯤 전에 산달의 편지가 도착해있는 거예요! 답신을 해주느라 늦은 잠을 청했을 산달이 고맙고 안쓰러우면서도, 또 겨우 몇 시간 뒤에 무등산으로 간다니 한번 더 고맙고 안쓰러웠어요. 저는 불가피한 일정으로 참여하지 못했는데… 갔더라면 반가운 얼굴을 만났겠다 싶어 아쉬움도 크고요. 잘 다녀왔나요? 그리고 무탈히 돌아갔나요? 집에 가서 미뤄둔 잠을 푹 잤기를 바라요.


저도 2월 회동을 오랫동안 곱씹었어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말 즐거웠거든요. 어설프게 준비한 자리였는데도 다들 따뜻하게 웃어주고, 뒷정리도 손을 보태주셔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동네방네 남산을 뛰다니며 사람들에게 한 입씩 맛보게 해주는 산달을 상상해보니 웃음이 나네요. 전 산달을 첫눈에 딱 알아봤답니다! 꽃무늬 양말은 잘 보이지 않았는데도 말예요. 산달의 우표 그림과 꼭 닮은 사람은 한명 뿐이었거든요. 그래서인지 산달과는 어째 눈을 마주치기가 쑥쓰럽더라고요. 그날 수상하게 자꾸 관자놀이로 산달을 흘겨보던 사람을 목격했다면 그게 저라고 여겨주세요.


산달! 새삼스럽지만, 제가 산달의 편지에 얼마나 감동하는지 말했던가요? 산달의 편지를 읽으면 꼭 산달의 머릿속을 산책한 듯해요. 사랑과 공동체와 민주주의에 대한 산달의 사유들이 들풀처럼 펼쳐져요. 입을 가로막힌 생명들이 충분히 이야기를 꺼낼 수 있도록 기다리고, 세벳돈 봉투에 적힌 마음에 눈물짓고, 왜 저런 옷을 입는지 이해하려고 ‘우리가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던지는, 추하고 날 것의 존재들이 세상을 바꿨다고 말하는… 그 문장에서 저는 ‘그름’을 ‘미움’으로 대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느껴요. 이건 제가 아침 산책마다 숲에서 배우는 마음이거든요. 


특히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준 세심한 흔적들은 꼭 정오의 햇살 같아요. 산달에게 존경이라는 단어를 들으니, 제가 꼭 지난 편지에서 거짓말을 부려놓은 양 부끄럽기도 하고요. 한편 산달의 편지엔 꼭 산달의 아픔이 함께 있어서 뭉클해요. ‘오히려 내가 싸우고자 하는 것들이 내 안에 있을 때 그것과 가장 잘 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라는 문장은 돌에 새긴 것처럼 단단하게 느껴져요. 고민을 거듭할 적마다 단단해졌을 거예요. “그래서? 그 괴로움을 넘어서 넌 어쩜 누군가의 아픔에 존경을 선물할 줄 아는 사람이 됐어?”라는 되물음이 남아요. 저도 그 선물을 돌려주고 싶어서 그래요. 아프고 무가치한 존재들이 세상을 바꾸는 신화가 누군들 궁금하지 않겠어요?


산달이 매일 보는 책은 어떤 책인가요? 어떤 기획을 주로 하나요? 마음을 표현하는 글쓰기는 어떻게 하는 건가요? 산달이 가장 좋아하는 하루의 모습은 어떤가요? 어떤 날씨와 만남과 음식과 함께 할 때 가장 기분이 좋은가요? 전 산달이 왜 기후운동을 하게됐는지도 무척 궁금해요. 산달은 아주 어릴적부터 이런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는지, 아니면 벼락을 맞은 듯이 산달의 세상이 바뀌었던 건지도요. 이번 경칩의 주제는 ‘내가 잃은 초심’이에요. 산달이 기억하는 ‘처음’을 이야기 하다보면, 다른 질문에도 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전 잃은 초심이 많은데 그게 상실로 느껴지는 게 없더라고요. 제가 볼 땐 또 다른 무언가로 초심이 채워진 느낌이에요. ‘잃은 초심’이 아니라 ‘변태한 초심’이랄까요! 제가 기억하는 처음의 저는,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눈을 갖고 싶어했어요. 핵발전소는 반대하고 싶은데 왜인지 잘 설명하고 싶고, 속치마를 안입고 외출했다고 밥상을 뒤엎던 아빠한테 한 마디 쏘아주고 싶고, 시골로 냅다 향한 게 왜 세상으로부터 도망친 게 아닌지 해명하고 싶었거든요. 제 행동이 ‘옳지 않다’면 냉큼 바꾸고 싶었고요.


그런데 지금 저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눈을 버리려고 애써요. 물론 내 안에 ‘저건 아니지!’하는 습이 올라올 때가 있지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스스로 납득해요. ‘저것도 맞을지도 몰라’하고요. 하루는 제가 좋아하던 한 스님과 논둑길을 걸었어요. 스님은 띠풀을 손으로 훔치며 제게 ‘진리가 무엇인지 아시나요?’하고 물었어요. 저는 스님을 따라서 풀을 만지작대다가 흐리멍텅한 눈으로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했는데요. 스님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죠.’라고 하셨어요. 


자연엔 정말이지 맞고 틀린 게 없어요. 우리 모꼬지 때 함께 나무를 만났잖아요. 나무는 마주나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하는데, 둘 중 어느 것이 옳다고 할 수 없더라고요. 딱따구리는 암수가 육아를 함께 해요. 집도 같이 짓고 알도 같이 품어요. 그런데 동고비는 암수가 역할이 정확히 나뉘죠. 여자가 집짓고 알을 품는 동안, 남자는 보초를 서고 먹이를 구해다주어요. 딱따구리나 동고비 중 어느 한 쪽이 옳은 방식이라고 할 수 없어요. 각자의 방식이 있고, 방식에 따른 장단점이 있겠죠.


산달, 저는 분노가 많은 사람이었어요. 대부분 아빠를 향한 것이었는데, 나중엔 아빠와 닮은 행동이나 생각을 하는 남자들은 죄다 미워했어요. 당시는 누가 툭 치면 꽉 깨물 준비를 하고 다녔던 것 같아요. 그러다 머리를 싹둑 잘랐는데 제가 너무 아빠를 닮은 거예요. 긴머리일 때는 몰랐는데 짧은 머리를 하니 아빠를 빼다 박아논 모양새였죠. 그러더니 공중 화장실에 가면 ‘여기 남자 화장실 아니에요!’하는 소릴 듣지 않나, 동네 어르신이나 아이들이 와서 ‘여자에요 남자에요?’하고 묻기 시작했어요.


아빠를 본격적으로 미워하기 시작하자, 제가 아빠와 똑 닮아져버렸다니 얄궂은 아이러니죠. 남자로 산다는 건 어떤 건가요? 남들이 저를 남자로 대하면 남자로 살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그런 면에서 전 남자가 되기도 하더군요. 산달은 ‘한국에서 지정성별 남성으로 태어나 자란 저는 늘 제가 ‘속해 있는’ 집단의 해로움을 물려받았을 거에요. 괴롭지만 인정해야만 하는 사실이죠.’라고 말했잖아요. 저는 여성으로 태어난 제 안에도 그 해로움이 있음을 분명히 느껴요. 원래 여성과 남성이 칼로 자른 듯 나뉘지도 않으니까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그건 해로움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옳고 그른 건 없으니까요. 


나무의 눈을 본 적이 있나요? 전 나무의 형형한 눈동자가 마냥 신기했는데요. 이게 알고보니 나무가 스스로 아픈 자리를 치료한 흔적이었다고 해요. 아픔을 치유하고 나면 그곳에서 새로운 눈이 생기는 거죠. 산달의 편지가 제게 감동인 것은 아마 이런 이유일 거예요. ‘그름’을 ‘미움’으로 대하지 않듯이, 자신 안의 ‘해로움’ 앞에서 산달이 오래 서성인 흔적이 제겐 나무의 눈동자만큼 반짝거려요. 그 눈동자를 바로보고 ‘그건 해로움만은 아니야’라고 말하고 싶어요. 누군가 제게 ‘옳고 그름이 없다니! 그건 분명히 존재해’라고 주장한다면, 그 말에조차 고개를 끄덕이길 바라요. ‘네 말이 맞아’라고 말하고 모두를 사랑해버리길 바라고요. 


산달! 몸이 찌뿌둥할 땐 햇살을 좀 쐬면 어떤가요? 햇살의 영역은 언제나 옳고 그름을 넘어서니까요. 햇살을 오래 쐰 고양이의 몸에선 햇살 냄새가 나더군요. 다음 편지엔 햇살 냄새가 나는 산달의 하루를 담아줘도 근사하겠어요. 아, 앞서 나열한 질문 폭탄도 잊지 마시고요! 사실 어떤 내용이든 신이 날 거예요. 그럼 안녕히. 

 

편지 하루 미뤄본 덕복희가

 

KakaoTalk_20230316_185303817.jpg

 

  

 

<목련을 닮은 복희에게>

 

복희! 오늘은 제 상태가 별로 좋지 않네요. 문장이 보기에 깔끔하거나 매끄럽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해 미리 양해를 구해야겠어요. 복희가 요절한다면 사인은 과로일 거라고 했죠. 그 문장을 보고 안쓰러운 마음과 동지애를 동시에 느꼈어요. 전원이 나가듯 잠에 든다니요.. 저도 분에 맞지 않을 정도로 일복이 넘치거든요. 저는 왜 감당하지도 못할 만큼 많은 일을 떠안고서 괴로워하는지!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지만 지금 당장은 그럴 수가 없어요. 조금씩 일 사이에 틈을 만드려고 노력하면서 다시 정상궤도로 돌아가야 하죠.

 

저번 편지에서도 말했다시피 저는 늘 편지를 쓰는 날엔 다른 일을 하지 않는 규칙이 있어요. 그런데 오늘은 그 규칙을 어겨버렸어요. 하루 종일 신경 써야 하는 업무들과 공부, 모임 참여를 다 끝마치고서야 겨우 복희에게 줄 문장들을 고르고 있어요. 예의가 아니라 생각하면서도 이번만은 어쩔 수 없이 그래야 한다는 점이 저를 슬프게 한답니다. 아, 그래서 이번 편지에는 봄볕을 담지 못할 것 같아요. 이틀 동안 집 안에만 있었거든요. 씻긴 씻었는데 어떤 냄새가 담길지 두렵습니다.

 

돌이켜보면 사실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늘 그래왔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1학년 때는 너무 많은 동아리에 참여하다가 동아리 축제 때 맡은 역할을 소홀히 해서 친구들에게 피해를 주었어요. 2학년 때는 학생회를 하면서 시험을 뒷전으로 하기도 했고요. 엄마 아빠와 선생님들은 늘 제게 “어느 하나에 차분히 집중할 수 있는 산달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고는 했지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참 고집이 센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다니면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했어요. 감당하기 힘들 때가 되면 그제서야 일을 줄여나가기 시작하다가 금세 또 다른 일들을 찾아서 힘들어하는 일을 반복해요. 그런데 제가 체력은 또 좋아서 결국 그 많은 일들을 다 해내긴 해요. 그래서 습관이 바뀌지 않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이 습관을 고쳐야겠다고 마음 먹었답니다. 무리하면서 몸이 상하는 것은 둘째치고, 하고싶었던 일들을 즐기면서 할 수가 없더라구요. 나름의 필요를 느끼면서 시작한 일들인데, 어느덧 임무를 수행하는 인공지능 기계장치처럼 일하고 있는 저를 발견해요. 그리고 가장 절박한 이유가 있는데요. 무리해서 일을 하는 것이 함께하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폭력적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처럼 무리하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는 꼴이 되기도 하니까요. 친구들에게 진심이 담긴 사려깊은 말들이 아닌 효율적이고 차가운 말들을 건네는 저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제가 써내려가고 있는 말들도 복희에게 고백이 아닌 일방적인 한탄이 될까 조심스러워요.

 

저는 제 삶의 중심이 바깥에 있는 사람이었어요. 늘 타인의 관심과 인정을 갈구하고, 그들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해왔거든요. 저는 어디서나 늘 착한 아이였고, 저를 착하다고 해주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했어요. 착한데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아이! 그런 모습이 되기 위해서 저는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싶었어요. 늘 많은 일들을 동시에 해내고 하루라도 더 빨리 지금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오르고 싶어했어요. 그런데 항상 이런 의문이 들었던 것 같아요. 이렇게 많은 일들을 해내는데, 왜 나는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지? 제 안의 공허함은 늘 배고프다고 소리쳤지만요.

 

결국 그런 마음이 해소되지 못한 저는 아직까지도 많은 일들을 하는 습관을 고치지 못했어요. 계속해서 더 많은 일들을 하기를 제 안의 어린아이가 바랬거든요. 이런 제 모습이 지금의 세상과 닮아 있다고도 느껴요. 지칠 줄 모르고 끊임없이 생명을 갈아넣어 성장하기를 그칠줄 모르는 모습 말이에요. 누군가는 먹고 살려면 경제성장이 필요하다고들 하지만 그게 어떤 희생을 대가로 치르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없죠. 우리의 공동체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왜 상상하지 못하냐고 다그쳤는데, 정작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법을 모르는 바보가 바로 여기 있더라고요.

 

하지만 이게 모두 하나의 과정이라고 느끼고 있어요. 예전에는 있는 그대로의 스스로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현실에 안주하고 적응하는 게으른 마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거든요. 오히려 그 마음은 내가 지키고 싶은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더라구요. 세상은 잘난 어느 한 천재가 바꾸는 게 아니라,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여럿’이 바꾸니까요. 외투를 벗기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햇살이고, 성벽을 무너뜨리는 건 군대가 아니라 나팔이니까요. 그 마음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기후운동을 할 수 있겠어요?

 

복희, 제가 이번 편지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아마 모를거에요. 복희가 하는 말들 하나하나가 제게 나무의 눈처럼 느껴졌거든요. 제게 앞으로 생겨날 나무의 눈들이 아주 많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의 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공동체와 민주주의에 대해서 이리저리 떠들고 있으니까요. 마치 속내를 들킨 듯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졌어요. 복희의 문장들은 제 ‘처음’을 되새기게 만들어주었거든요.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사랑’으로 모두를 품어야겠다는 ‘첫 마음’ 말이에요. 행복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에요. 지치고 때묻은 저의 온 마음들이 씻겨져요.

 

맞아요. 저는 누가 어떤 말들을 하든, 그게 최소한 그 사람에게는 진실일 거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어떤 이의 의견도 귀하게 들으려고 했고, 그들의 진심을 믿으려고 노력했어요. 그러다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여름방학에 <아무튼, 비건>이라는 책을 읽었답니다. 그때만큼 세상에 대해 실망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 책에는 고기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끔찍한 삶을 살다가 죽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거든요. 저는 이전에는 여태껏 한 번도 내가 먹는 고기들에 대해서 질문한 적이 없었어요. 그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선한 마음만 가지고는 이 죽음을 멈출 수 없겠구나.”

 

사랑을 말하며 죽음을 외면하던 이들이 참 미웠어요. 그들이 말하는 사랑만 가지고 세상을 살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부터 저는 제가 외치는 ‘사랑’에 누락된 존재들이 없는지 강박적으로 묻기 시작했어요. 동물의 죽음에서 시작된 부정의에 대한 감각을 이내 곧 여성들을 보면서도 느낄 수 있었고, 장애인들을 보면서도 느낄 수 있었어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고 말하는 여성운동과 “모든 해방은 연결되어 있다”는 동물해방운동, 그리고 “말하지 못하는 자는 없다. 단지 듣지 않으려고 해서 들리지 않게 된 존재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장애운동의 구호들이 다르지 않게 느껴졌어요. 그러던 차에 만난 기후운동은 그 모든 존재들이 앞으로 나서서 스스로 정치적인 존재가 되기를 말하는 운동이었어요. 모두를 놓치지 않을 수 있는 운동이 기후운동이라고 생각했었죠.

 

그렇게 어쩌다보니까 저는 기후운동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생각해봐요, 복희. 하나만 해도 힘들어죽겠는데,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아우르려는 시도를 하니 얼마나 가랑이가 찢어졌겠어요. 가장 괴로운 것은 그동안 가려져 있었던 수많은 죽음과 부조리와 슬픔을 내가 모르고 있었다는 거였어요. 모든 곳에 다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감당해야만 했어요. 복희, 그건 하나하나의 죽음들을 마음에 새기는 일이었어요. 하나하나의 삶들을 가슴에 새기는 일이었어요.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계속되고 있는 거대한 학살을 방관하는 일이었어요. 여전히 모른 채하고 부정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서요.

 

하지만 복희, 예전에는 그들이 참 미웠는데요. 이제는 마냥 그렇지만은 않아요. 그들이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맥락과 아픔들을 이제는 상상해보려고 해요. 심지어 학살을 가장 앞서서 자행하는 사람들도요. 그리고 여전히 많은 이들은 무한 번의 선택을 앞두고 있는걸요. 그저 그들의 선택을 함께 할 수 있는 제가 되길 바래요. “그들을 바꾸기 보다는 그들의 세계를 바꾸겠다는” 다짐을 되새겨보아요. 그리고 그 방법은 복희가 말한 것처럼 그들을 사랑해버리는 것일 거에요.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네가 너라서 좋아”라고 말하면서 매일 천천히, 하나씩, 조금씩 말이에요.


긴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마워요. 이제 자러가야겠어요. 저부터 사랑하는 법을 연습해야겠어요. 저를 사랑하는 일이 곧 세상을 사랑하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부터요. 밤늦게까지 일을 하는 저를 안타깝게 쳐다보는 아빠의 눈빛이 마음에 걸려요. 내일은 바깥 공기도 햇살도 좀 쐬어야겠어요. 지리산엔 꽃들이 피었나요? 여기엔 벌써 목련이 활짝 피었어요! 어떤 환경에서도 꽃을 피워내는 식물들이 참 경이롭고 존경스러워요.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느껴요. 복희, 우리도 그렇게 피어난 꽃들이겠죠?

 

늦잠 자러 간 산달이

KakaoTalk_20230316_185303817.jpg

태그

전체댓글 0

  • 87849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경칩 편지 : 덕복희와 산달] 나무의 눈을 본 적이 있나요?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