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1(수)
 

 

지리산은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한다. 방장은 가로와 세로가 각각 1장(丈, 3.3 m) 크기의 정사각형 방이다. 방장은 덕이 높은 승력의 처소를 의미하기도 하며, 큰 수행 도량의 최고 어른을 이르기도 한다. 유마거사(維摩居士, 석가모니의 재가 제자)는 내 마음이 청정해지는 곳이면 그곳이 곧 도량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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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정산 영원사 오전, [사진]이완우

 

유마경(維摩經)에 함축성이 풍부한 이야기가 있다. 유마거사가 병이 들었는데, 그가 거주하는 사방 1장의 방장(작은 방)에 그를 문병 온 3만2천 명이 모두 그 방에 앉았다고 한다. 이때 방장은 유한한 넓이를 가진 공간이 아니고, 무한히 포용할 수 있는 수행 도량의 내면적 포용성을 상징한다 하겠다. 


함양군 마천면과 남원시 산내면 사이에 지리산 삼도봉에서 뻗어내린 산줄기로서 바위가 험한 삼정산(三丁山, 1,156m)이 있다. 이 산 아래에 하정, 음정과 양정 마을이 있어서 삼정(三丁山)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산 정상에 당당한 세 봉우리가 천왕봉, 제석봉과 중봉의 지리산 주능선의 중심인 세 봉우리 형상을 닮아 있으며 가까이 마주보고 있어서 예사롭지 않다. 


함양군 마천면의 마천(馬川) 물길로 향하는 이 삼정산 줄기의 왼쪽은 뱀사골 계곡이고, 오른쪽은 벽소령으로 오르는 계곡과 백무동 계곡이 가까이 있다. 이 삼정산에서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남동 사면은 바위가 돌출되며 세로로 서고 가로로 뻗은 지형이어서 수행 도량들이 험준한 공간에 둥지를 틀고 있다. 


이 산의 함양 땅 기슭에 도솔암, 영원사(靈源寺), 상무주암(上無住庵), 문수암(文殊庵)과 삼불주암(三佛住庵) 등 수행처인 도량이 있다. 남원 땅 기슭에 약수암과 산지 평원에 실상사가 있다. 이들 도솔암에서 실상사에 이르는 7 도량을 연결하는 산길을 '지리산 칠암자 순례길'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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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정산 영원사, [사진]이완우

 

이 숲길의 산행거리는 약 14.5㎞이며, 7시간 안팎이면 걸을 수 있다. 도솔암은 그 길의 출발점에 있지만, 도솔암은 비법정 탐방로이므로 부처님 오신 날 하루만 이 길의 탐방이 허용된다. 


삼정산 능선 따라 도량 찾아가는 산행


11월 초순 늦가을에 영원사에서 상무주암, 문수암과 삼불주암을 왕복하는 산행 탐사를 하였다. 마천면 양정마을에서 영원사에 이르는 포장 임도를 승용차로 오르다가, 가을 숲이 좋아서 영원사 1km 앞둔 임도의 길섶에 주차하고 걸어서 올라갔다. 


영원사에서 상무주암까지는 1.8km의 너덜 바위길과 낙엽 쌓인 숲길을 한 걸음씩 힘들여 오르고 내려가기를 몇 번 반복해야 한다. 영원령(빗기재)에서 왼쪽 길로 가면 지리산 주능선인 삼각고지와 형제봉을 거쳐 벽소령으로 가는 길이다. 


상무주암에 가까운 곳에 이르면, 삼정산으로 오르는 0.4km의 등산로가 있는데 출입금지의 안내판이 있다. 산정으로 향한 비탈길은 경사가 급해서 탐방이 위험하다. 상무주암은 출입하는 어귀에 정낭이 걸려 있어 도량으로 진입하는 발길을 멈추어야 했다. 가로 걸린 정낭은 수행 정진하는 산사 도량의 고요함은 존중해야 마땅하고 완곡히 제안하는 듯하다. 


상무주암 옆 바위 서슬을 전망대 삼아 바라보는 지리산 주능선은 감동적이었다.  문수암까지 0.8km의 숲길은 걷기에 평탄하다. 문수암은 바위 절벽 중간에 자리를 찾아 올라앉은 듯하다. 문수암의 천인굴(千人窟)은 바위의 절리가 풍화되어 틈새가 벌어져 형성된 제법 큰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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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정산 상무주암 전망대, [사진]이완우

 

삼불주암 가는 길은 문수암에서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하는 0.8km의 산길은 제법 힘든 과정이다. 삼불주암은 한때는 비구니 암자였다. 삼불주암에는 삼층탑이 하나 있는데, 탑신의 사면에 사천왕, 보살, 부처 등 부조가 있어 둘러보는 의미가 있다. 


삼불주암 아래의 삼정산 자락에는 ‘견성(見性)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까마귀나 까치도 경(經)을 외우며 간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견성은  ‘견성성불(見性成佛)’의 축약일 것이다. 삼정산 기슭에 깨달음을 향한 수행자들이 인고의 세월과 정성이 많이 펼쳐져 있음을 이 견성골 이야기가 암시해 준다.


삼불주암에서 약수암과 실상사로 가는 길을 가늠해보며, 이애 발걸음은 영원사 방향으로 돌렸다. 삼정산 산행에서 영원사, 상무주암, 문수암과 삼불주암의 암자 건물 등 외형적 가람보다, 수행자들의 구도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는다. 

 

삼정산 도량에 전해오는 수행자들의 이야기


영원조사(靈源祖師)는 신라 경문왕대(861~874)의 고승이다.  그는 이곳 삼정산의 토굴에서 8년 째 수행에서 얻은 바가 없이 산을 내려가는 중이었다. 한 노인이 물도 없는 산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기 낚고 있었다. 


노인은 산에서 허공에 낚싯대를 던져 8년 동안 물고기를 기다렸는데 10년은 채워보겠다고 했다. 이말에 영원조사는 다시 토굴로 돌아가 정성을 다한 노력으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설화가 전해 온다. 이 영원조사는 영원사를 창건하였으며, 상무주암은 861년에 영원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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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정산 문수암, [사진]이완우

 

조선 시대 임진왜란 때 승군을 이끌고 나라를 구하고 불교 중흥에 노력했던 인오(印悟, 1548~1623) 조사가 영원사에서 수행하였다. 그는 이곳 삼정산에 오래 머물렀다. 그는 삼봉산과 법화산을 잇는 능선 허리를 넘어 함양장터까지 150여리 길을 하루에 왕래하다가 어느날 한 고개 마루에서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그 고개가 현재의 함양의 ‘오도재(悟道峙)’이다. 


영원사에 가까운 도솔암도 인오 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인오 조사의 문집에 ‘머무름 없는 암자(無住臺)’라는 제목의 글이 있는데, 상무주암에서 머물며 지은 시로 보인다. 상무주암은 고려 시대에 보조 지눌(普照 知訥, 1158~1210)이 머무르며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마적대사는 신라 시대 무열왕 때에 활동했던 고승이다. 함양군 휴천면의 엄천강 상류에 있는 용유담에는 마적대사의 설화가 많이 전승한다. 마적대사가 659년(무열왕 6년)에 문수암을 창건했다고 한다. 


문수암 도량에 있는 천인굴은 암벽의 절리를 따라 자연히 생긴 바위 틈이다. 천인굴은 수십 명이 들어갈 바위 틈의 공간인데, 천 명이 들어간다는 천인굴이라 과장한 까닭은 천인굴을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구도의 정신적 영역으로 보아서 일 것이다. 


문수암의 천인굴은 삼정산의 사찰이나 암자의 도량과 비교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토굴인데, 그 투박한 시원적인 모습에 오래도록 머무르게 된다. 이 천인굴이 유마거사의 방장처럼 여겨졌다. 병이 난 유마거사의 방장에 문수보살이 방문하여 법담을 나눈다. 이 천인굴 옆에 신라 시대에 마적대사가 창건한 도량이 문수암이라니 마음에 서늘한 바람이 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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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정산 삼불사, [사진]이완우

 

삼정산 자락에서 지리산을 방장산이라 까닭을 찾아서


삼정리의 하정 마을은 운치 있는 소나무 숲에 선유정(仙遊亭)이 자리하며 사냥꾼과 선녀의 옛 이야기를 전승한다. 옛날에 삼정산 계곡에 무지개가 하늘로 섰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였다. 선녀들이 무지개를 타고 내려와 삼정산 계곡에서 밥을 지어 옥황상제의 밥상을 마련하여 하늘로 올라가곤 했던 것이다. 


이 다음 줄거리는 여느 선녀와 나뭇꾼 유형의 이야기처럼 하늘로 돌아가지 못한 선녀가 사냥꾼과 지상에서 살다가 날개옷을 찾아 하늘로 올라갔다는 내용이다. 이 설화의 핵심은 이 삼정산 계곡에서 선녀들이 옥황상제의 밥을 지어 하늘로 올라간다는 상징적인 내용이다.


밥짓는 과정은 구도의 과정을 유사하다고 본다. 정성껏 쌀을 씻어서 불을 때고 물을 끓이며 뜸을 들이는 밥짓기는 심신을 정화하고 정성을 다하여 인고의 시간을 거쳐서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의 과정을 비유하는 것이 아닐까?


삼정산을 내려와서 실상사 앞 도로를 지나 산내면 고갯길에 멈추었다. 힘들게 기슭에 올랐던 삼정산 정상을 바라본다. 저 삼봉산의 세 봉우리가 지리산 주능선의 천왕봉, 중봉과 제석봉을 대응하며 삼불주암, 문수암과 상무주암 세 도량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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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정산 영원사 오후, [사진]이완우

 

지혜를 상징하는 지리산은 지혜로운 보살인 문수보살이 으뜸으로 연상되는 산이다. 지리산의 천왕봉에 해당하는 삼봉산의 가운뎃 봉우리에는 문수암이 자리하고 있다. 


예로부터 삼정산 기슭에서 산나물을 채취하고 약초를 캐며 산에 들던 주민들은 '우- 우-.'하는 소리를 내며 서로 연락을 하며 소통하였다고 한다. 이 소리는 산과 호응하여 일체가 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야호-, 야호-'하는 산과 따로 겉도는 듯한 인위적인 소리와 달리 '우- 우-.'하는 소리는 숲속을 흐르는 바람 소리이며, 바위가 계곡의 물소리에 호응하는 소리로 들린다. 삼정산 기슭과 계곡에서 봄부터 가을까지 울렸던 주민들의 이 안으로 깊이 울리는 소리를 언젠가 들어보고 싶다.


문수사의 천인굴의 바위 틈새의 고요한 공간은 잊을 수 없다. 지리산에 수행의 도량이 생기기 이전에 산짐승들이 이 바위 틈에서 머무르고 아침에 지리산 주능선에서 돋는 해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바위 틈에서 어둠을 지새고 아침에 밝은 해를 바라보는 짐승들은 얼마나 맑고 순수한 마음이었을까? 


지리산의 오래되고 자연스런 방장의 하나인 삼정산 정상 아래 문수사의 천인굴을 다시 찾아가련다. 앞으로도 지리산을 오르면서 지리산을 방장산이라 부르는 까닭을 찾아보아야겠다. 삼정산의 여러 도량을 답사하며, 문수암의 천인굴에 마음을 오롯이 남겨두고 내려왔음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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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삼정산 정상 원경, [사진]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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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나요? 지리산을 방장산이라고 부르는 까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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