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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연대 순례하는 청명6] 탈핵의 과제들
- 빛나는 연대 순례하는 청명 6 탈핵의 과제들 ‘광화문탈핵목요행동’은 전국 45개 단체의 연대기구인 ‘탈핵시민행동’의 실천 프로그램입니다. 2025년 7월부터 매주 목요일마다 1시간 광화문 일대에서 피케팅 등 다양한 선전활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초록교육연대’는 소속 단체는 아니지만 매월 2회 참여하고 있으며, 12월 18일 이날은 저도 회원분들과 함께 피케팅을 하였습니다. ‘초록교육연대’는 대부분 교육노동자로 일하시다가 퇴직한 분들로 구성된 단체입니다. 이날 회원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함께한 뒤, ‘탈핵신문읽기’ 20분 브리핑을 진행하였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탈핵 의제에 대해 시민들과 공감하며 소통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점과, 보다 쉽게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배움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공유되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탈핵신문읽기’는 매우 유용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12월에 발행된 탈핵신문에는 생활에서의 의료방사선, 후쿠시마 현장, 방사성 오염수 해양투기 등이 실렸는데, 무엇보다도 이슈로 떠오르는 건 ‘노후핵발전소 수명연장’과 ‘2기의 신규 건설 공론화’ 논란입니다. 우리나라는 지난달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가 수명연장 10년을 승인한 고리2호기를 비롯하여, 총 10기가 수명연장이 신청되어 있습니다. 살펴보면, 부산 기장군 고리3,4호기, 경주 월성2,3,4호기, 영광군 한빛1,2호기, 울진군 한울1,2호기입니다. 그리고 울산 울주군 새울3,4호기, 울진군 신한울 3,4호기 이렇게 4기는 건설하고 있습니다. 고리1호기, 월성1호기는 영구정지 되었구요. 전체 32기 핵발전소 중 현재는 19기가 가동 중입니다. 또 하나 큰 문제는 여기에 더해 지난 윤석열 정부가 작성한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들어있는 신규핵발전소 2기 건설에 대한 논란입니다. 현 정부는 새로 작성할 ‘12차 계획’에 이 내용을 그대로 둘 것인지 뺄 것인지를 공론화를 통해 결정하겠다고 합니다. 2017년 지난 문재인 정부 시기 신고리 5,6호기(새울 3,4호기로 명칭변경) 공론화를 통한 경험이 있고, 비록 다소간의 차이로 건설 재개로 정해졌지만(공론화 시기 공정률 30%), 당시 참여 시민단의 53.2%는 핵발전 축소를, 핵발전 확대는 9.7%에 불과했습니다. 노후핵발전소 수명연장 반대와 신규핵발전소 건설 중단과 함께 에너지 전환에 대한 의지가 뚜렷하게 드러난 공론화 과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시민과 국민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제 멋대로 막 나간 윤석열 정부의 찬핵 정책을 묵인하기에 급급합니다. 국민정부라고 하지만 뚜렷하게 탈핵정책을 표명하지 않고 발뺌용으로나마 내세운 것이 다시 ‘공론화’입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기후에너지환경부장관이 내년 1~2월 사이 고작 몇 차례 여론조사와 전문가 토론회로 결정짓는다고 합니다. 숙의가 빠진 껍데기 ‘공론화’입니다. 사실 ‘공론화’가 아니지요. 이미 신규 건설을 염두에 두었다고 볼 수 밖에요. 하~~~ 그래도 참여자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며 “오늘 넘 재미있었어요.” 딱딱한 주제를 다루게 되는 모임에서 이 말이 오고 가니 다행입니다. 탈핵신문읽기 브리핑을 매월 한 차례 가지기로 약속도 하였습니다. 다음날인 12월19일, 전남 영광군에서 열리는 ‘탈핵활동가대회’와 ‘한빛 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 참여하기 위해 광주행 기차에 올랐습니다. 이동 중 오하라 츠나키(탈핵신문 운영위원)의 페이스북 공지글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20일 선포식을 앞두고 4개의 찬핵 단체가 맞불집회를 신청했으며, 행사 장소가 좁아 참여자들이 물리적으로 포위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들어, 일정 조정이 가능한 활동가들에게 공식 집회 시간보다 미리 1시간 전에 집결해 줄 것을 요청하는 긴급 호소였습니다. 순간 “잘 싸우자”는 말이 튀어나왔는데, 기차가 레일을 타고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겹쳐, 다가올 현장의 긴장과 결의를 더욱 짙게 하였습니다. 멈춤과 연결, ‘2025 탈핵활동가대회’. 영광국제마음훈련원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다음 날 아침에 걸을 산책로, 교육시설 뒤편 길이 있었습니다. 걷기운동은 당뇨인의 필수적인 건강관리 방법 중 하나거든요.^^;; 전국 각지에서 온 30여 명의 탈핵활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그 장면은 웅장하게 느껴졌는데, 오랜 시간 모든 생명체에 위험과 죽음을 안겨 온 핵에서 벗어나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싸워온 동지들이었습니다. 첫 순서로 활동소속과 노래 한 소절씩. 낯선 진행에 쑥스러워하거나 무슨 노래를 할지 고민하는 모습들... 그러나 그런 머뭇거림은 오히려 무거울 수 있는 탈핵공간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였습니다. 저는 탈핵을 내용으로 요즘 재미들인 랩을 하였습니다. 활동가들 사이에서 환호가 나왔고, 다음엔 경직되지 않고 편안하게 부르면 더 좋겠다는 피드백도 받았습니다. 기조발제1. AI 데이터 센터, 정말 전기가 많이 필요할까? (김병권) 기조발제2. 2026년 탈핵운동 정세 전망. (이헌석) 조별토론1. 2026년 탈핵운동, 어떻게 할 것인가? 조별토론2. 2026년 탈핵이슈, 우리의 입장은 무엇인가? 발제 이후에는 조별토론과 휴식시간이 이어졌는데, 단순한 정보교환을 넘어 서로의 고민과 감정을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1박2일 이 시간을 거치며 저는 하나의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탈핵을 추구하는 팬클럽을 만들고 싶다.” 탈핵은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지 않은 주제입니다. 어렵고, 정치적이며, 때로는 정쟁처럼 느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탈핵은 관계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 누구도 방사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기에 탈핵의 이야기는 특정한 소수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삶과 맞닿아 있다.” 이러한 사실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가까운 방식으로 전하고 싶습니다. 그동안은 탈핵순례나 탈핵기록지인 ‘탈핵신문’을 직접 배달하고 함께 읽는 활동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또 하나의 방식으로 ‘팬클럽’을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보다 다양한 세대를 만나고, 즐거운 방식으로, 활동가들을 응원하고 지지하며 연대하는, 공부와 행동이 함께 이루어지는, 탈핵을 어렵지 않게, 그러나 가볍지 않게 만나는 공동체 ‘팬클럽’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남았습니다. 12월20일 오후2시 ‘한빛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이 있는 한빛핵발전소 정문으로 이동 중에 김현우 탈핵신문 이사장이 함께 가서 보자고 한 법성포 포구의 모습을 마주했습니다. 그 순간 시선과 마음이 동시에 머물렀습니다. 곧 마주하게 될 선포식을 앞둔 긴장 속에서 포구가 지닌 고요함은 선명한 대비로 다가왔습니다. 우리가 왜 이 자리에 서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되새기게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한빛 1호기는 설비용량이 950MW로 1986년 상업운전을 시작하여 2025년 12월로 40년 설계수명이 만료됩니다. 40년 세월 동안 수많은 고장과 사고를 겪고 온 흑역사를 안고 있습니다. 특히나 2019년 5월10일 발생한 제어봉 조작 실패에 따른 열출력 급상승 사고로 원자로가 폭발할 수 있었던 아찔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2026년 9월 설계수명이 만료되는 한빛2호기와 함께 2024년 12월 13일에 수명연장 신청을 하여 이를 원안위가 심사를 하고 있는 상태이며, 내년 상반기에 결정될 것으로 보입니다. 전북 ‘팽수’ 풍물패의 길놀이를 시작으로 선포식은 시작되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지역 시민단체와 주민들, 탈핵을 염원하며 전국에서 오신 분, 이렇게 350여 명이 함께 하였습니다. ‘무등산 탈핵호랑이’, 저승사자 복장의 ‘한빛원전 닫자 보이스’가 랩과 춤, 퍼포먼스를 선보였는데, 저도 호랑이와 함께 춤을 추었습니다. 그리고 진행자가 참가자 인터뷰를 하자고 해서 마이크를 잡고 몇 마디 하였습니다. “탈핵 순례 다니는 청명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이 나를 미쳤다고 한다. 탈핵은 너무 어렵다. 그래서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 미쳤다고 봐주니 너무 기분이 좋다. 앗싸 탈핵!” 대표 발언에서는 지역사회와 미래 세대에 부담을 주는 핵발전소 퇴출, 부실한 건설, 고장과 사고로 인한 주민들의 고충, 잃어버린 지역발전과 풍요, 송전망 신규 건설과 고준위 핵폐기물 처리 문제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영구 봉인식’도 가졌는데 “한빛 1,2호기 문 닫고, 발 뻗고 자자!”라는 구호와 함성으로 한빛 1호기 모형을 대형 현수막으로 봉인하며 축하와 축포를 터트렸습니다. 지역주민과 시민사회의 바람대로 한빛1호기가 반드시 폐쇄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수원과 원안위는 수명연장 시도를 즉각 멈추어야 합니다. 40년이라는 난고의 시간을 견뎌온 영광의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반대 운동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왔습니다. 생태파괴와 지역경제, 시민의 안전을 무시한 채 양양군과 국립공원공단은 끈질기게 사업을 밀어붙여 왔습니다. 그러나 12월 31일을 기점으로 공원사업 허가 기간이 만료됨에 따라 양양군은 국립공원공단에 기한연장을 신청하였고, 이를 막기 위해 원주의 국립공원공단 본사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12월23일 2시에 열리는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허가 연장 규탄 시민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청주에서 원주행 버스에 올랐습니다. 들은 바로는 오전에 이사장 면담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문전박대를 당하며 몸싸움도 벌어졌다고 합니다. 50여 명의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대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농성과 대회를 주관하고 있는 ‘설악산국립공원지키기국민행동’은 “우리는 미래 세대에게 자연을 빌려온 것임으로 반드시 지켜야한다. 부끄러운 조상이 되지 않도록 공단은 연장 신청을 불허하고 반려하라.”고 하였습니다. 저에게도 사전 발언요청이 있었는데, 여기서도 랩으로 대신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앞만 보고 달려왔어~ 그게 살아남는 법이라 배웠어~ 성장하면 편리할 거라 믿었어~ 더 빨리 가면 살아남을 거라 배웠어~ 산은 망가지고 강은 병들어~ 여러분 이래도 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되요~ 저는 웃길 테니 여러분은 이제 그만을 외쳐주세요~ 모든 생명체를 죽음과 위험으로 몰아가는 개발~ 이제 그만~ 이제 그만~......” 그런데 이 글을 쓰고 있는 사이, 분노할 만한 소식을 접했습니다. 양양군이 국립공원공단에 신청한 변경허가, 공사기간 연장이 2027년까지 승인되었다는...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노후 핵발전소 수명연장 저지도.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설치 저지도. 그리고 신규 핵발전소 저지도. 탈핵활동가 대회에서도 논의된 사항이지만 12월 18일에 언급된 정부의 신규핵발전소 2기 건설을 내년 1~2월 내에 바로 결정하겠다는 말을 들으며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았습니다. 긴급하게 초기 순례단이 조직되어 ‘공론화’의 허구를 알리며 신규건설을 막기 위한 전국순례가 기획되었습니다. ‘탈핵시민행동’ 주관으로 2026년 1월5일, 고리핵발전소, 영광핵발전소, 세종 기후에너지환경부에서 동시에 출발하는 노정입니다. 마지막 16일차인 1월20일(노량진역-청와대)은 모든 참가자가 집결하여 마무리합니다. 웹자보를 비롯한 홍보물, 차량, 숙박 장소 섭외 등 준비할 게 엄청나네요^^ㅎㅎ 지리산 산내에 이웃하고 있는 저를 비롯한 4가구는 1년에 한 번쯤 나들이를 갑니다. 올해에는 12월25일~27일, 전남 진도에 있는 지인의 집에 숙식하며 2박3일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팽목항, 송가인 공원, 운림산방, 포도책방 등을 다녔습니다. 마지막 날 저녁시간을 틈타 옆집 동동과 온달에게 신규핵발전소 건설 진행사항을 들려주었고, 효과적인 실천 자문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좀 더 알리고 뭉칠 수단을 강구해야 했습니다. 동동과 논의하여 기획한 기발한 SNS 홍보 기술! 이름하여 ‘걷뛰(걷거나 뛰거나)’입니다. 아래 사진 웹자보는 산내면 ‘토닥’ 누리께서 정말로 멋지게 만들어 주셨답니다. 보름 동안 즐겁게 ‘걷뛰’하며 탈핵을 외쳐봐야겠어요. 함께해요.^^ 갑자기 1월은 ‘걷고 뛰는 달’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2025년 한 해에 버리지 못한 무거운 짐만 잔뜩 쌓여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매서운 겨울바람 속에도 피워내는 매화처럼, 이 순간에도 전국 각지에서 꿋꿋하게 밝은 연대의 꽃을 피우고 계신 마음들이 있는 한 이 난관을 반드시 극복해 가리라 생각합니다. 탈핵을 향해, 아름다운 강산과 생명의 존엄을 위한 발걸음은 2026년에도 계속입니다. 독자 여러분! 늘 건강한 날 보내시길 바랄게요. 고맙습니다. 앗싸 탈핵!!^^ 1월 5일부터 16일 동안 탈핵희망전국순례를 떠나는 청명으로부터, 순례 전 마음을 담은 글이 와서, 이곳에 함께 덧붙입니다. _<지리산인> '왜 저는 순례하며 탈핵을 말할까요?' 우리는 살아가는데 생활속에서, 또는 공장과 사무실, 상가에서, 막대한 전기나 기름 등의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각자의 부의 정도에 따라 양의 차이만 있을 뿐, 전체적으로 보면 그 소비량은 점점 더 늘어가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저는 생각하기를, 좀 더 편리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생활습관, 좀 더 돈을 벌어보고자 소비를 조장하고 생산하는 사회구조에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렇게 편리와 돈에 대한 집착은 결국 무리수가 되어 흔히 말하는 기후위기니, 핵위기니, 경제위기니, 전쟁위기로 나타났습니다. 지금의 사회는 이렇게도 불안하고 위험한 국면으로 가고 있습니다. 현재와 미래가 암울해졌습니다. 누군가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하지만, 현실에서 나타나는 징후를 부정하진 못할 것입니다. 누구나 사는데 건강이나 행복을 원하는데는 같은 마음입니다. 그런데 쉽지만은 않습니다. 힘들게 경쟁해야 살아남는 사회니까요. 그러다보니, 나와 우리 가족만을 생각하게 되는 모양새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편리와 돈이 그 자리를 메울수 있다고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건강과 행복은 그저 꿈이 되었지요. 제가 생각하건데 진정한 건강과 행복은, 모두가 잘살아야지만 나와 가족이 잘 살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모든게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나를 비롯한 타인, 그리고 뭇생명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잘 삽니다. 그렇지만 현실이 만만하진 않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당장 생계와 부채가 막혀옵니다. 그러니 사회문제는 그저 먼 동네 이야기로 들립니다. 그런 이유로, 저는 순례를 다니며 탈핵을 외칩니다. 먼 동네 이야기를 들고 말이죠. 그 이야기를 나누며 공감하고 연대하고자 합니다. 앞서 말한 과도한 생산과 소비로 지탱하는 우리 사회는 점점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활속에서 적정한 소비를 해보자고 말합니다. 사람과 생태를 생각하는 일터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굳이 위험한 핵발전소를 가동해야 하냐고 말합니다. 핵을 줄여나가며, 대신 재생에너지를 확대하자고 말합니다. 재생에너지를 100% 만들고 쓰더라도, 적당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핵발전소가 만들어진지 수십년이 지나는 동안, 알게 모르게 수많은 고장과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살아왔습니다. 또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편리와 돈에 휩쓸리어 이를 방조한 우리 자신과 정부의 책임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자녀들의 안전이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걱정스럽습니다. 그런데도 이재명 정부는 막나간 윤석렬 정부의 찬핵정책을 이어, 불합리한 실용주의를 내세우며, 노후핵발전소 고리2호기 수명연장을 승인했습니다. 더이상 안된다는 시민사회의 공론에도, 숙의없는 형식적인 공론화를 다시 꺼내어, 신규핵발전소 2기를 더 지으려는 의도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이럴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핵발전소 더 짓지 말자고, 수명연장 더하지 말자고, 자꾸 이야기 해야합니다. 자신의 조건과 방식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나와 가족,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 지켜내야합니다. 다함께 탈핵으로 가야합니다. 사랑합니다~♡ 앗싸 탈핵!!^^ (2026년 1월 신규핵발전소 저지를 위한 전국 순례에 나서며. 청명 드림) 글쓴이 청명 "연대! 나의 순례는 탈핵과 비움의 길, 그리고 연대의 길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연대는 ‘각자 할 수 있는 역량과 방법으로 참여하고, 서로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다. 더하여 경계를 허문다는 것은 단절, 좁은 시야, 울타리, 권력, 불투명한 벽을 허물고 서로 공감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 여정이다.’ 한마디로 연대는 좋은 친구를 만들자는 것이라고 봅니다. 글을 실을 수 있도록 마음의 손길을 내 주신 ‘지리산인’에게 찐한 고마움을 전합니다." 순례자 청명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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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연대 순례하는 청명6] 탈핵의 과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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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이상과 현실 사이
- 오늘의 농업, 농사는 지구의 심각한 위기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가? 많은 이들이 땅을 죽이는 농사를 마다하고 생명을 살리는 농사를 실천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농부들은 시장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는 것도 명징한 사실이다. 어머니 대지가 신음하고 있지만 이를 제어할 힘은 너무나 미약하다. 농사를 지어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자식을 키우는 분들에게 원칙과 이상만을 들이댈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현실의 농부들이 직면하고 있는 상황을 냉정하게 이해하고 보다 섬세하고 장기적인 전망을 세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 청년농부 서동형님과의 대화 속에서 이상(또는 당위)과 그이가 마주한 현실 사이의 간극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청년농부 서동형님은 젊다. 올해(2026년) 우리 나이로 서른여섯이다. 여자친구는 있지만 아직 미혼이다. 귀농에 이르게 된 과정을 물어보았다. - 저는 광주에서 태어났어요. 어머님이 선생님이신 탓에 이리저리 이사를 다녔어요. - 순천에서 대학을 마치고 취업을 했는데 방송사 취재팀이었어요. 하필 그때가 코로나 시기였는데 고생을 엄청 했어요. 이거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오게 됐죠. 그리고 귀농 준비를 1년 동안 했어요. ‘준비’란 어떤 것일까? - 제가 농업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을뿐더러 내려오면 먹고 살기 위한 기반이랄지 능력이랄지 이런 게 있어야 되니까 자격증을 따기 시작했어요. 아울러 농협 교육 프로그램이나 청년농부 사관학교에서 기초지식과 실습을 하면서 다양한 준비를 했지요. 그러다가 22년 4월에 귀촌을 했어요. 그에게는 자신의 땅, 농장이 있다. - 22년과 23년에는 아버지 땅을 증여받아 제 자신의 농장으로 만드는 과정을 진행했습니다. 아버지 일도 도와드리고요. 사실상 그 두 해에는 별로 한 일이 없어요. 수익도 없고 농사도 거의 뭐 망하는 수준으로 했습니다. - 23년에 수박을 수직 재배하는 시범 사업이 하나 나왔어요. 거기에 참여하면서 25년까지 점차 확대를 했습니다. 하우스가 다섯 동인데 네 동은 수직 재배, 한 동은 포복 재배로 기존 방식으로 키우고 있어요. - 여름에는 그렇게 제 농사를 짓고 가을에는 아버지 과수원 일을 도와서 함께 합니다. 그 농장은 3,500평인데 거의 다 생과로 한살림에 납품해요. 대화 과정에서 아버님 얘기가 자주 등장하는데 아버님은 어떤 분인지 궁금해졌다. - 아버지가 귀농한 배경은 이래요. 어머니가 늦게 교사로 임용이 되었는데 처음에 해남으로 발령이 났어요. 아버지도 광주에 계속 있기가 좀 그랬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어머니를 따라다니시다가 정착할 곳을 정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오신 것 같아요. 구례에 할머니가 주신 땅도 있었고, 해서 구례에 자리를 잡으신 거죠. - 처음에 감나무를 심는 일부터 아버지가 다 하셨어요. 원래 그 땅은 대나무 밭이었는데 싹 개간을 해서 감나무를 심고 지금까지 키우셔서 이제는 엄청나게 큰 나무들이 되었어요. 귀농을 하기까지 아버님의 영향이 있었던 것 같다. - 아니요. 전혀 받지 않았어요! 어느 정도 있기는 했겠지만 저는 제가 선택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 대학 다닐 때까지도 제가 아버지를 도와드렸어요. 수확하고 포장하는 일을 다 도와드렸는데, 나는 커서 농사짓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살았어요. 도시에서 살거야, 이런 생각이었답니다. - 그런데 아버지께서 계속 권유를 하시긴 했어요. 직장 다닐 때 와서 같이 하면 나쁘지 않다고요. - 아버지는 굉장히 개방적이셔요. 저랑 편하게 이야기를 다 해요. 아버님과 직접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와 경험에 비추어 굉장히 빠르게 농사에 적응한 것으로 보인다. 조력자는 농업기술센터? 아니면 아버님? - 거의 배운 건 없어요. 기술센터에서는 그냥 지원만 받은 거고 연구는 거의 제가 했다고 봐야죠. 아버지랑 이렇게 키우면 어떨까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 수박을 포복으로 키우는 것도 여러 가지인데 수직 재배를 하면 방법이 더 분산될 수밖에 없죠. 수직으로 바꿨을 때 재배하기 편하고 더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야 되니까 거기에 대한 연구를 했죠. 알기 위해서는 인내를 전제로 한 관찰이 필수다. 청년농부의 진득한 열정이 그려진다. 농사를 짓는 일도 어렵지만 그걸 판매하는 일은 훨씬 더 어렵다. 농부는 장사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팔지 않으면 헛농사가 된다. 내가 보기에 청년농부 서동형은 이 분야에서 특출한 능력이 있어 보였다. 아니 그만큼 열심히 알아보고 다양한 시도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 아버지는 그냥 편하게 공판장에 내자는 생각이셨어요. 저는 그게 아니에요. 공판장에 내면 우리가 제값을 못받아요. - SNS는 제가 해보니까 인스타든 YouTube든 잘 나가진 않아요. 소비자의 지갑이 열리기까지 쉽지가 않아요. 라이브 커머스나 아니면 스마트 스토어로 제가 직접 알리는 방법밖에 없어요. - 라이브 커머스도 플랫폼이 되게 많아요. 라이브 커머스 주 고객층이 다 저희 어머니 또래들이어서 많이 보셔요. 멋진 젊은이가 열정적으로 자신의 생산품을 설명하는 모습을 떠올려 본다. - 작년에 수박이 좀 잘 돼가지고 방송을 탔어요. SBS 생방송 투데이에 나가니까 한 번에 다 품절이 된 거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SBS에서 바이럴 마케팅이 돼서 한 번에 큰 것도 있어요. 그래서 이제 안정적인 판로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지속적인 소득으로 연결이 된 걸까? 길이 만들어진 걸까? - 음 길은 사실 매번 찾고 있긴 해요, 수확 시기와 주된 소비 시기의 불일치 등 관리의 복잡성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요컨대 시장 은 기다리지 않는다. 예기치 못한 변화로 긴 시간 흘린 땀방울이 무위로 돌아갈 수 있는 일이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 대화 내내 입이 근질거렸다. 이 멋진 청년농부는 친환경농업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 관심이 있죠. 아버지 때문에. 아버지가 제초제 치는 거랑 농약 치는 걸 안 좋아하세요. 왜냐하면 아버지 농장에서는 제초제랑 화학비료를 쓸 수가 없어요. - 근데 저는 어느 정도는 써야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어요. 풀이 감당이 안되거든요. 천천히 줄여나갈 생각은 하고 있어요. 저도 그게 안좋은 걸로 알고 있고 또 한살림이랑 계속 일을 해 나가려면은 안 써야 되니까 저도 맞춰가려고 하고 있긴 해요. 근데 그게 또 기술력이 있어야 그렇게 할 수가 있거든요. 기술력이 없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 공판장에 가서 내 친환경 수박이랑 일반 수박이랑 비교할 때 가격이 내것이 훨씬 좋아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거든요. 오히려 제것이 싸요. 친환경 수박이라 벌레도 좀 먹고 흉터도 좀 있고 예쁘지도 않고 크기도 좀 더 작아요. 그래서 공판장에 내는 거 제일 싫어해요. 그래서 개인 판매를 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야 소비자가 그 가치를 알아주니까. 고개가 끄덕여진다. 자연농법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물론 자연농법으로 상업농을 하는 분들은 아마도 극소수가 아닐까? - 관심을 가지고 보기는 해요. 근데 현실적으로 이걸 실현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가장 먼저 해요. 또 제가 그걸 현실적으로 운영해 나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죠. 너무 어려워요. 어렵다고 생각이 드니까 시작을 안 하는 거죠. 솔직하다! 농부라고 하기에는 연약해 보이는 도시청년의 이미지, 청년농부 서동형은 농사에 회의를 느껴본 적이 없을까? - 매번 고민하고 좌절도 했어요. 근데 제 자체가 감정의 기복이 없어요. 혼자 생각을 많이 하고 감정을 억제하는 거죠. 감정을 있는 대로 다 느끼면서 살진 않아요. 제 스타일 자체가 그래서 그런 것 같아요. 올해도 사실 엄청 실패를 한 거죠. 심지어 하우스를 세 동이나 늘리면서 실패를 한 것이어서 더 힘들긴 했죠. 그가 좌절하는 일이 없기를 빈다. 청년농부 서동형이 기술적으로도 크게 진보하고 상업적으로도 성공하여 우리 농업의 변화를 일구는 일꾼이 되기를 빈다. 미래에 그의 자식들이 아름답고 건강한 환경을 누릴 수 있기를, 그 환경을 만들어내는데 그가 한 축을 담당하기를 빈다. 농사를 짓지 않는 미래는 존재할 수 없는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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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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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이상과 현실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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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곰1%유람기]자연, 삶, 어울림, 지리산농가민박
- 바위에 쓰여 있는 이정표는 ‘아이들 농장’이었다. 차가 다니는 마을길을 무심히 지나쳤다면 아마 이 이정표를 놓쳐버렸을지도 모른다. 지리산농가민박은 큰길에서 이정표가 세워진 샛길로 접어들어 얕은 오르막길을 올라야 한다. 첫 번째로 보이는 집은 아버님이 사시는 집, 그 집에서 오른쪽으로 좀더 들어가면 주인장인 흐물 님의 안채가, 그리고 왼쪽 옆에 별채로 자리한 농가민박 생명평화 프리다칼로(15평)가 보인다. 들어가면서 마주하는 순서대로 따지자면 생명평화 프리다칼로는 두 번째로 만나는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지리산농가민박의 메인숙소다. 생명평화 소로우(6평)는 프리다칼로에서 다시 돌아나가 길을 따라 숲으로 좀더 깊이 들어가야 했다. 의도하지 않은 숨바꼭질이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만든 민박집이 아니라는 뜻이다.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러운 시작 지리산농가민박의 주인장 흐물 님은 구례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이고 땅의 주인이니 당연히 그곳에 집을 지어 살고 있었다. 창고자리를 개조해 별채를 만들고 보니, 그곳에 손님들이 드나들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삶을 인정받기도 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도 많이 얻었다. 사람들도 그의 집에서 그의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들에서 쉼을 얻었다. 그의 이름,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러운 시작이었다. 민박의 운영을 시작한 지는 벌써 4년이 되어간다. 인터뷰는 생명평화 프리다칼로(15평)에서 진행되었다. 고재를 가져다가 짠 가구들이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작품들로 채워진 공간이 퍽 아늑하고 따스했다. 프리다칼로 방에는 정말 프리다칼로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마치 이건 나의 정체성입니다, 라고 말하듯이. 구례 지리산사람들 사무실에서 눈에 들어온 그림, 그리고 운명 같은 재회(?)를 통해 흐물 님의 집으로 오게 된 그림이었다. “안사람이 좋아할 것 같아서 가져온 그림이었어요. 창고에 가져다 두었는데 안채에 걸어둘 곳이 마땅치 않아서 별채를 만들었어요.” 그림을 걸기 위해 방을 만들다니, 그렇게 프리다칼로는 방의 주인이 되었다. 프리다칼로 방에는 생명평화무늬의 액자, 주인장 흐물 님이 직접 깍은 나무서각, 돌서각이 곳곳에 놓여 있고 안주인인 은영 님이 만든 자수 가리개, 아이들이 그린 가족그림, 두 내외가 결혼식을 올린 마을 정자 사진, 지인이 만든 공예품 등 추억이 깃든 작품이 가득하다. “우리 가족의 역사와 작품을 강제로 감상하는 셈이죠. 강제적 작품 전시장이랄까.(웃음)” 통창 너머로 구례의 자연경관이 그림처럼 펼쳐지는데, 탁자에 앉아 창밖을 보고만 있어도 평화가 깃들 것 같다. 자연스러움과 멋스러움이 한데 어우러진다. 팽나무 그늘 아래 쉼이 있는 ‘그 자리’ 지리산농가민박의 자랑거리를 하나 소개해달라고 하니, 대뜸 ‘그 자리’를 이야기 한다. 농장으로 들어오는 길 오른편으로 커다란 팽나무가 서있는데, 그 밑에 의자를 두고 그네도 달아두었다. 한자 쉴 휴(休)자를 뜯어보면 사람 인(人)과 나무 목(木)이 합쳐져서 만들어져 있는데, 나무 아래 사람이 들어가면 비로소 쉼이 된다는 게 주인장의 설명이다. 밤에는 반짝반짝 전구에 불도 들어오고 그 앞으로 넓게 펼쳐지는 논밭의 풍경이 고즈넉하니 ‘그 자리’에서 보는 야경이 아주 좋단다. 언젠가 손님 중에 버스킹을 하는 손님이 찾아와 그 자리에서 연주도 했는데, 정말 좋았다고 자랑이 이어진다. 설명하는 데 목소리와 낯빛이 달라지는 게 주인장의 남다른 애정이 엿보인다. 프리다칼로 앞마당에는 화덕이 있어서 감자 고구마도 구워먹고 불을 피운 채 ‘불멍’하는 시간도 가질 수 있다. 항상은 아니지만 때때로 주인장 가족들과 함께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하며 음식도 나눈다. 그저 그들의 소탈한 일상을 함께하는 것에 사람들은 행복과 편안함을 느낀다. 재방문율도 꽤 높은 편인데, 특히 6평짜리 방 소로우는 외떨어진 숲에 안겨있는 듯한 아늑함 덕인지 숲에 숨겨져 있다는 은폐성 덕인지 장기 숙박하시는 분들도 계시다고 한다. 특히 작가들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소로우를 자주 찾는다고 하니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하기 바란다. 소로우의 2층 옥상 공간 역시 화덕이 있어 바비큐와 불멍이 가능하다. 아름다운 전원풍경은 덤이다. 지리산농가민박은 꽤나 넓은 편인데도 들어오는 길이나 마당 등이 잘 정돈된 느낌이다. 시골에서는 풀을 이기기 힘든데, 풀보다 바지런한 주인장이 살고 있는 게 분명하다. 생명 존중과 평화 실현을 지리산에 지리산농가민박의 주인장은 반달곰1%가게들 중 유일하게 주인장이 구례에서 나고 자란 원주민이다. 그렇다면 지리산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지 않을까? 흐물에게 지리산은 어떤 존재일지 궁금해졌다. “지리산이요?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지요. 그냥 여기서 나고 자라다 보니 대부분 사람들이 지리산이 귀한 줄 모르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지리산이 귀한 줄 알죠. 산수화 같은 풍광이 아름답고 웅장하면서도 포근한 느낌을 주는 산이에요. 대사찰도 두 곳이나 있고.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죠. 개발을 무조건 찬성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개발을 원하는 원주민들을 이해해요. 그리고 정말 주민들의 삶에 이익을 주는 개발이라면 반대만 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단지 주민들에게 이익을 주지 못하는 개발사업으로 지리산을 파헤치는 게 문제죠. 사람들이 지리산이 브랜드가치만으로도 이익이 된다는 걸 알았으면 해요. 그러면 좀더 다른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겠죠.” 균형잡힌 시각이라고 해야 할까? 반달곰에 대한 시각도 마찬가지다. 현재 지리산에 서식하고 있는 반달곰의 개체수가 결코 적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민가에 해를 끼치는 곰들도 많다. 이를 해결할 필요가 있다. 또 지리산반달곰의 상징적 의미를 되새기고, 일단은 군민들이 곰을 좋아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생명 존중과 평화 실현을 동시에 지향하는 생명평화운동은 개인적 자각과 성찰을 넘어 사회적 실천, 생명질서 회복, 자연과의 공존, 불평등 해소와 평화를 추구한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리산에서의 생명평화의 가치와 실천은 무엇일까 다시금 곱씹어본다. 반달곰1%는 지리산권 가게들(현재는 구례)이 자발적으로 진행하는 공존프로그램이다. 반달곰1% 가게에 가면 반달가슴곰을 자연스럽게 만나고, 특별히 계획하지 않아도 반달가슴곰 보호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2021년 5개 가게로 시작한 반달곰1%는 2026년 현재 구례 11곳, 하동 12곳으로 늘어났다. 반달곰1%는 ‘유랑인증서’를 발행하고 있는데, 손님들이 반달곰1% 가게에 들러 물품을 먹거나 마시거나 구입하면, 반달곰1% 가게들은 수익금의 1%를 사단법인 반달곰친구들에 기부하고, 그 기부금이 모아지면 사단법인 반달곰친구들과 논의하여 올무수거 활동, 무인센서카메라 구입 등 반달곰 보전활동을 위해 쓰기로 약속하였다. *반달곰1%가게를 돌며 하는 이 인터뷰는 가게로부터 어떠한 대가도 받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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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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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곰1%유람기]자연, 삶, 어울림, 지리산농가민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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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연대 순례하는 청명5] 서울, 청주, 대전, 공주, 홍천 순례길
- [빛나는 연대 순례하는 청명 5] 반가운 사람들 : 11월 가을날에 서울, 청주, 대전, 공주, 홍천. 이렇게 10여 일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 1. 서울에서 새만금 신공항 기자회견에 참여하기 위해 인월터미널에서 동서울행 버스를 탔습니다. 버스 안에서 한 분과 인사를 건넸는데, 산내에서 식당을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중간 휴게소에서 후쿠시마 몸자보와 순례, 최근 이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서울에 볼일이 있다던 그녀는 조용히 저의 손에 후원금을 쥐여 주셨습니다. “나도 요즘 모임에서 기후 관련된 책을 읽고 있어요. 순례에 쓰세요...” 짧은 대화였지만, 그 마음이 진하게 전해져 왔습니다. 경복궁에 도착하여 해당화를 만났습니다. 해당화는 새만금 신공항 저지를 위한 ‘새 사람 행진’에서 만난 동지입니다. 행진 중에 ‘흥진단’이라 하여 흥이 넘치는 사람들이 뭉쳐서 신나게 다녔는데 기획팀장을 맡았습니다. 그녀는 항상 열의가 넘칩니다.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는 사람입니다. 만나는 순간부터 활짝, 점심으로 막걸리를 사주겠답니다. 마주 앉아 한 잔씩 가볍게 들이키며, 당일 일정을 간단히 공유하고, 저로서는 생소한 노순택 작가의 사진전을 보러 갔습니다. 사진들은 오래된 얼굴들, 묵묵히 살아온 모습과 흔적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11월 12일 오후 4시. 국민소송인단과 백지화공동행동의 주최로 ‘새만금 신공항 집행정지신청 인용촉구 기자회견’이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열렸습니다. 2개월 전 9월11일, 서울행정법원의 기본계획 취소 판결이 이뤄지면서, 신공항 사업에 대한 모든 절차를 중지시켜달라는 집행정지를 신청한 적 있습니다. 하지만 전북의 지자체와 정치권으로 인해 아직도 인용되지 못하고 법원에 묶여 있는 중인데, 오늘이 2차 심리기일입니다. 국토교통부는 판결에 대해 불복하여 항소했으며, 전북의 행정기관은 중단된 전북지방환경청의 환경영향평가서 검토에 대한 협의 진행과 실시설계인가 및 착공을 서둘러야 한다고 압박하고 있습니다. 지역구 국회의원들도 국토교통부와 환경부에 사업 중단 없이 법적, 행정적 수단을 총동원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기자회견 후 법정으로 이동하여 한 시간가량 심리를 공청했는데, 판사와 변호사의 말이 저로서는 무척 어렵게 다가옵니다. 평소에 관련 자료들을 읽고는 합니다만.^^;; 새만금 신공항 대책위에서는 환경행정소송에서 기본계획이 취소된 사례도, 이에 따른 집행정지 신청 사례도 처음이라며 좋은 선례를 남기기 위해 치밀하게 투쟁하자고 말합니다. 집행정지의 지연은 회복할 수 없는 수라갯벌의 피해와 국가재정과 행정적 낭비, 사회적 혼란을 초래할 뿐입니다. 신속한 인용 판결로 이를 막아내야 할 텐데, 2차 심리를 마지막으로 재판부는 적절한 시기에 판결한다고 합니다. 11월 13일, 증산역에서 출발하여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 집회장까지 8km를 걸었습니다. 원안위가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이 신청한 고리2호기 계속 운전을 위한 운영변경허가를 심사하는 날이라 기자회견과 종일집회에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기자회견 자리에서는 사전에 발언 요청이 있어, 준비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정부가 42년 된 노후 핵발전소인 고리2호기의 수명연장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시민 의견을 배제하고, 비민주적으로 결정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안전은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의 선택과 희생으로 지켜온 결과이며, 우리는 이미 역사를 통해 핵발전의 위험을 배워왔습니다. 핵발전소 수명연장은 본질적으로 위험하며, 인근 주민의 고통, 장기간 사라지지 않는 방사성 폐기물, 후쿠시마 사고의 지속된 영향 등 현실적인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핵발전소를 더 가동하려는 것은 결국 자본의 이익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정부, 한수원, 원안위의 고리2호기 수명연장 시도를 즉각 중단하고, 관련 심사를 폐기하며, 투명한 탈핵 로드맵을 제시해야 합니다. 탈핵은 과격한 변화가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세대를 위한 안전을 선택하는 길입니다. 우리 사회가 나가야 할 길은 분명하며, 탈핵은 생존의 문제입니다.” 주요하게 ‘민주’라는 메시지를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날 결국 6명의 재석위원 중 5명의 찬성으로 계속운영 허가로 의결되었습니다. 이러한 결정으로 2029년까지 만료되는 9기의 수명연장 중단도 위태로워졌으며, 노후핵발전소의 잦은 사고가 말해주듯, 380만 명의 인근 주민들과 미래세대의 안전에 대한 위험 수위는 더욱 높아졌습니다. 에너지 전환의 시대! 자본과 정권의 편에 서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원안위의 결정은, 핵 시대를 계속 유지하겠다는 역사적 퇴행입니다. 대다수 시민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은 실용주의로 포장된 반민주적인 폭거입니다. 이날 ‘광화문 탈핵목요행동’에도 참여했습니다. 이 집회는 매주 11시 30분부터 12시 30분까지 진행됩니다. ‘핵발전은 기후위기의 대안이 아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이순신 동상 주변을 돌며 시민들에게 알리고 다녔습니다. 광화문 광장은 이동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는데, 더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기 위해 문구 방향에 신경 쓰며, 눈인사와 미소를 잃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저는 부끄러움이라는 게 없나 봅니다.^^;; 집회를 마친 후 초록교육연대와 지역에서 온 동지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어느 활동가분이 저에게 “시민들에게 제대로 알리려면 더 공부가 필요하다.”며 탈핵신문을 함께 읽자고 제안했고,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탈핵신문읽기’가 이렇게도 이어질 수 있다니... 기뻤습니다. 이 집회에 참여한 동지가 한 말이 떠오릅니다. “현장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연대로 현장은 굳건해진다. 연대가 희망이다.” 2. 청주에서 율량동 엄마 집에서 모임이 있는 가경동 ‘가로수 도서관’까지 6km를 걸었습니다. ‘청주탈핵신문읽기’는 여럿이 옹기종기 월1회 신문을 읽고 토론도 합니다. 이 자리에서는 자연스레 걱정과 질문이 흘러나왔습니다. 첫 번째 화제는 345KV 송전탑 문제였습니다. 충북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초고압 송전선로 건설이 퍼지고 있는 현실에서 이를 공유하며, 각 지역의 우려와 대책위 구성여부, 이후의 대응방법을 더 알아보자는 의견이었습니다. 특히 용인 반도체 산단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지방 농촌이 또다시 부담을 떠안는 현실에 모두가 씁쓸함을 느꼈습니다. 송전탑을 세우는 문제를 떠나, 다들 이런 거대 송전탑이 왜 필요한지부터 질문해야한다고 말합니다. 이어 고리2호기 수명연장 승인 이야기로 넘어가 절차가 너무 졸속이었다는 비판, 기사에서 언급된 지역주민들의 생존권과 보상요구를 보며, 탈핵운동이 주민들의 현실문제와 어떻게 만날 수 있어야 하는지 고민이 이어졌습니다. 핵잠수함과 핵재처리 관련기사에서는 더 많은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플루토늄의 핵무기 전용 가능성, 파이로프로세싱(사용후 핵연료를 고온의 녹은 소금 안에서 전기화학적 방법으로 재처리하는 기술)이 정말 국제적으로 허용된 기술인지, 핵잠수함 연료 승인과정, 국내 건조여부, 미국의 입장, 그리고 이것이 남북관계에 어떤 영향을 줄지... 언론만으로는 알기 어려운 부분을 함께 정리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아~ 탈핵은 마라톤입니다. 가즈아^^;; 썬자는 주거 복지와 관련된 새로운 일을 선택했고, 꾸렁은 여성단체 활동을 합니다. 저는 탈핵순례자로 길 위에 있고, 준석은 세상을 돌아다니는 여행탐험가입니다. 여기는 준석의 공간 행복까페. 이렇게 서로 다른 길을 걷는 사람들이 왜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을까?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는데도 잔잔한 온기가 흘렀습니다. 지난 만남에서 ‘사회주택’을 언급한 꾸렁의 한마디가, 우연히도 잠깐 들린 썬자의 새로운 일터 공간에서 펼쳐 든 책에서도 관련 글을 보았는데, 결국 저는 소개된 책을 도서관에서 빌리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뭐라도 통하는 부분이 있긴 있구나... 준석이 준비한 저녁을 함께 먹으며 그런 생각이 더 깊어졌습니다. 맛있는 음식 앞에서 서로에게 말을 걸었고, 각자의 길 위에서 담아온 이야기들이 이미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처럼 선명하게 다가왔습니다. ‘이짓 뉴스레터’ 16호를 읽은 뒤, 산남동에 새롭게 이사한 배움터 ‘이짓’ 공간을 향해 8km를 걸었습니다. 이번 16호가 주목한 것은 방송사들의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노동자성 부정’과 ‘부당해고’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자, 2025년 APEC이 남긴 네 개의 장면, 노조법 개정은 비정규노동자에게 좋은 기회, 한걸음 더 전진을! 새벽배송 논란 등입니다. 새 공간에서 만난 공간지기 선지현 동지에게 ‘이짓’의 뜻을 묻자, 그녀는 따뜻한 커피 한잔을 건네며 ‘삶과 노동을 잇는 활동’이라고 말합니다. 노동, 기후, 탈핵 등 다양한 의제를 자연스럽고도 과감하게 연결해 낼 수 있는, 제가 아는 가장 빠르고 능숙한 매개자이기도 합니다. ‘이짓 뉴스레터’가 매번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3. 대전에서 지역화폐 ‘두루’를 사용하는 지역공동체 ‘원도심레츠’로 가기위해 대전복합터미널에 내려 3km를 걸었습니다. 매월 셋째 주 수요일, ‘탈핵신문읽기’와 ‘수요 밥상’에 스태프로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2층에 자리 잡은 이 공간은 평소에는 각자의 일로 자주 오고 가지 않더라도, 모였을 때의 열기는 대단합니다. 저로서는 이를 통해 공동체의 느낌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이번 달 발행된 탈핵신문의 내용을 나누고, 따뜻한 차를 마신 뒤, 저녁 ‘수요밥상’을 위한 준비로 분주해집니다. 당뇨에 좋은 잎을 손수 챙겨다 주는 나무늘보, 맛있는 커피 내림을 도맡는 우리소리, 대화에 참여할 듯 말 듯 조용히 섞이는 그림, 그리고 저, 마지막 맛을 책임지는 웅장한 셰프 왜가리가 움직입니다. 언제라도 꽃봉오리가 터질 듯 환하게 피어날 것 같은 꽃사슴과 저는 설거지가 척척 맞는 팀입니다. 회원님들 이름은 모두 알지는 못하지만, 차분한 에너지의 부영, 밝고 경쾌한 은득이 떠오릅니다. 맛과 정성이 듬북한 음식, 북적북적한 공간에는 웃음이 넘쳐납니다. 식탁이 차려진 입구에는 언제나 처럼 탈핵신문이 놓여있습니다. 4. 홍천에서 석록과 함께 노동가요를 즐겁게 부르던 추억을 떠올리며, 홍천군 영귀미면을 향해 순례를 나섰습니다. 석록은 월간‘탈핵신문’ 편집 일을 하며, 고향인 이곳 홍천에서 별도로 직장을 다닙니다. 집으로 가기 전 횡성에서 만나, 식당을 하시는 둘째 언니가 요리해주신 ‘여울아구찜’을 맛보니 강원도에 들어섰음이 더욱 실감 났습니다. 내어주는 따뜻한 방과 차 한 잔은 먼 길의 피로를 풀어주었습니다. 다음날 석록이 출근한 후 서로 이야기했던 텃밭 꾸미기 작업. 농기구를 챙기고 장화를 신은 뒤, 흙 위에 밑그림을 그리며 삽질을 시작했습니다. 놀고 있는 야옹이와 까뮈를 보니 지리산 쏭이가 떠올랐습니다. 3분의 2쯤에서 마무리하고, 홍천 양수발전소 금요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홍천군청까지 12km 길을 나섰습니다. 오후 4시 집회. 이곳에도 발언 요청을 미리 받았는데, 대략 이러합니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 주민들과 마주하니 마음이 아리면서도, 뜨거운 눈빛에 연대의 힘을 느꼈습니다. 100년 잣나무 숲과 함께 살아온 풍천리 주민분들의 살던 대로 살고 싶다는 외침은 정당합니다. 그 목소리를 짓밟고 강행하는 양수발전소 건설은 희생의 강요, 투명성 없는 폭력입니다. 건설계획은 즉각적으로 취소해야 합니다...” 이곳에서 파타고니아 겨울 상의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따뜻했습니다. 오늘의 연대는 저에게 다시 한번 확신을 줍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고, 서로의 삶을 지키는 일은 함께 나서야만 가능하다고. 다음 날 석록이 저에게 건네준 김치와 김치재료, 땅콩, 호박... 이 꾸러미도 단순한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땅과 손, 마음과 마음이 이어진 이야기였습니다. 모두가 시간과 공간을 건너 흐르는 하나의 연속선 속에 놓여있습니다. 삶의 순간 하나하나가 소중하며, 우리가 자연과 타인, 자신과 맺는 연결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임을. 이러한 이어짐과 연결의 감각은 오랫동안 잔잔히 울릴 것 같습니다. 5. 순례를 마치며 그 여정을 다시금 돌아봅니다. 서울에서의 딸과 보낸 데이트 같은 시간들, 딸이 요리한 밥을 얻어먹으니 기분 짱이었습니다. 이제는 4급 치매를 앓고 계시는 엄마의 돌봄, 미처 알지 못했던 지난날 엄마의 슬픈 삶이 아려옵니다. 그리고 언제나 다정하게 반겨주는 청주의 친구, 햇살, 락기, 유별이도 만났습니다. 공주에서는 새로 이사한 왜가리 집에 머물며 수납장 조립도 하고, 지난 속초 순례에서 만난 라고마 까페 주인장 꿈씨, 몸자보 글귀를 언급한 왜가리 친구 퀼트대표님과의 식사와 대화도 생생합니다. 공주를 떠날 때 왜가리를 통해 전해준 꿈씨의 작은 쪽지 메모와 후원, 따뜻한 마음이 저의 품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찬바람이 쌩쌩 12월이네요. 연결과 만남, 그리고 밝은 연대를 알리고자 하지만 여전히 울뚱불뚱한 이 글을 감내하시고 읽어주시는 독자님 고맙습니다. 다함께 만들어가는 연대의 불꽃으로 따뜻한 사회가 꼭 이뤄지리라 믿습니다. 겨울 추위 잘 이겨 내시고 모두들 건강하시기를 기원해 봅니다.^^ 앗싸 탈핵!! 글쓴이 청명 "연대! 나의 순례는 탈핵과 비움의 길, 그리고 연대의 길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연대는 ‘각자 할 수 있는 역량과 방법으로 참여하고, 서로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다. 더하여 경계를 허문다는 것은 단절, 좁은 시야, 울타리, 권력, 불투명한 벽을 허물고 서로 공감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 여정이다.’ 한마디로 연대는 좋은 친구를 만들자는 것이라고 봅니다. 글을 실을 수 있도록 마음의 손길을 내 주신 ‘지리산인’에게 찐한 고마움을 전합니다." 순례자 청명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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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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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연대 순례하는 청명5] 서울, 청주, 대전, 공주, 홍천 순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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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낮은 곳으로 향한 사람 – 성심원 원장 엄삼용 알로이시오와의 만남
-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한 사람 – 성심원 원장 엄삼용 알로이시오와의 만남 사람들에게 왜 이곳에 와 사느냐고 물으면 지리산이 거기에 있어 왔노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거기에 있어 와 보니, 여기에 지리산이 있는 사람도 있다. 성심원 원장인 엄삼용 알로이시오가 그런 사람이다. 그는 늘 밖에서 노동복 차림으로 일을 한다. 넓은 성심원 이곳 저것을 고치고, 수리하고, 풀을 뽑고 하는 일과가 종일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심원을 방문했을 때 우연히 마주쳐도 그가 원장 수사라는 것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런데 오늘은 정식 수사복 차림으로 카페(성심원 카페 나루터)에 들어섰다. “신부님 뵙게 돼서 기쁩니다”하는 인사에 자신은 신부가 아니라 수사라고, 그렇게 호칭을 정정하면서 ‘예수님’과 ‘사부님이신 프란체스코 성인’을 따라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고자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온 수도자라고 말한다. 그래서 오늘 인터뷰 때는 정식 수사복을 입었노라고. 성 프란체스코와 작은 형제회 “ 프란체스코 성인은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분이셨어요. 작은 형제로 살고자 하는. 이분의 유언에 보면 ‘우리는 무식하였기에 모든 이에게 복종하였습니다’라는 말이 있거든요. 사실 뭐 많이 배우고 적게 배우고 중요한 게 아니라 작은 형제로. 대중 속에 아울러서 그냥 이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제 뒤에 있는 이 벽화는 수도사이신 작가분이 제작하신 건데, ‘태양의 찬가’라는 주제로 한 거거든요. 프랑스코 성인의 정신은 ‘만인의 형제’, 그러니까 ‘우주적 형제’입니다. 만인, 만물, 만성. 그리고 여기 보이지만. 태양을 형제라고. 형님인 태양, 누님인 달. 어머니이신 땅. 물, 불. 이런 것들을 크게 인격화하셨습니다. 성인은 ‘광활한 자연 속에서 ‘나란 존재가 정말. 이렇게 미약하고 작다’라는 걸 아마 느끼셨던 것 같아요. 저희 수도회 정식 명칭은 ‘작은 형제회’인데, ‘작다’라는 것은 말하자면, 대자연 앞에서 느끼는 것처럼, 하느님 앞에서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한다. 저흰 가난한 자일 수밖에 없죠. 우리는 한계가 많고 유한하고 사실은 부족함이 많잖아요. 인간일 뿐이기 때문에 가장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그래서 이분은 사제는 안 되셨어요. ‘작은 형제로 살겠다’고 그러셨고 형제들에게도 이 점을 강조하셨지요.” 성심원 –우린 ‘800년전 이태리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성인’의 제자 시대를 막론하고 한센인은 가장 혐오스럽고 배척받는 대상이었다. 프란체스코 성인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나환자를 만났는데, ‘정말 몸과 마음이 역겨웠고 도저히 쳐다볼 수 없어’ 피했다. 성인은 한센인들에게서 ‘그 안에 계신, 버림받고 소외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것’으로 해석하고, 모든 걸 다 버리고 집을 나와 나환자들 곁으로 갔다. 이것이 작은 형제회가 출발하게 된 어떤 모태와 같은 원형이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한센인들과 함께하는 작은 형제들의 삶이 되었다. 성심원은 그런 의미를 가진다. 우리나라는 이제 한센 마지막 세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 이 시대에 가장 버림받고 소외받은 사람들과 함께해야 된다는 메시지를 늘 생각하게 하는 곳이 바로 성심원이다. 성심원에 ‘한 번 안 와본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한 번만 온 사람은 없다’고 한다. 특히 프란체스칸(프란체스카 성인을 따르는 가족들, 수도자, 사제, 평신도)에게는 성심원이 아주 중요한. 회개 생활의 상징적인 장소가 된다. “우주 만물을, 자연을 인격적으로 우리가 대하지 않잖아요. 우린 갑과 을의 관계를 이용하고 차지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는데, 이분은 800년 전에 이미 인격적으로 다 하느님이 주신 피조물로, 나와 똑같이 그 동등한 관계로 보셨던 분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정신에 따르면 종교도 남녀노소, 장애, 비장애 할 것 없이 열린 공동체가 돼야 한다는 거죠.” 성심원은 그런 식으로 만인에게 열린 공간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이제 공공재로 쓰여지길 지향한다. “이 곳은 여러분들의 도움과 특히 우리 한샘 어르신들의 애완과 피땀이 들어간 그런 장소이기 때문에, 만인들에게 개방된 공간, 함께 할 수 있는 공간. 같이 갖고 가는 공간이에요.” 성심원 원장이 되기까지 그가 처음 성심원을 접한 것은 직장생활을 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성심원으로 봉사활동을 오고부터였다. 그렇게 접하게 된 성심원에 감동을 받아 여름 휴가 때, 겨울에 이렇게 자주 방문하게 되고, 그러다 수도자 생활을 결심하고, 수도원(프란체스코회)에 들어오게 되었다. “처음 수도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집안에서 반대 많이 했죠. 제가 큰아들인데, 아버지한테 얻어맞기도 해보고. 고모는 제사 지내러 집에 왔다가 그 얘기 듣고 졸도해 버리시고, 그런 일들이 있었는데, 반대하니까 왜 역작용이라는 게 있잖아. 고집 피우는 거. 하도 고집을 피우니까, 반대하시던 어머니께서 먼저 허락해주시고, 누나들과 남동생도 찬성해주고, 그래서 들어오게 되었지요. 누나는 ‘너 친구 좋아하고 그러는데, 수도원 생활 견디겠나? 들어갔다 나오겠지’ 아마 그리 생각한 것 같아요” (웃음) 평생 구도자로 하나님만을 섬기며 한센인, 장애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은 어려운 일이다. 그 또한 7년 정도의 수행 기간 동안 수도원을 나가려고 갈등한 적도 많았다. 가끔은 자신이 없어지기도 했고, 가정을 갖고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내다 보니까 뭐, ‘어쩌다 어른’ 그런 말 있잖아요. 어쩌다가 세월이 이렇게 흐르고, 책임도 이렇게 맡겨져 있는 거예요.” 평범한 듯,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는 그에게서 가장 낮은 데로 내려온 수도자의 쉽지 않은 결정이 느껴진다. 예전에는 자격이 없어도 성심원의 책임을 맡고 일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 책임이 주어지는 까닭에, 사회복지를 전공한 그가 부임해 옴으로써 그에게는 천직으로 제2의 성소 같은 곳이 되었다. 30년 전에 다리를 건너 우연히 봉사를 왔던 성심원에, 7년 부원장으로 일을 하였고, 강릉의 장애인 시설에서 일하다, 이제는 다시 성심원에서 원장으로 3년째 일을 하고 있다. 원장이라는 책임을 짊어진 수도자 책임자로서의 막중한 책임과 무게를 이기는 방법을 그는 ‘즐거움’이라고 한다. 어떤 일을 하든지 ‘자신이 즐거워야 한다’고, 여기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최고 중요하고, ‘즐기면 힘들지 않다’고 말한다. 낮에는 원장으로서 많은 활동을 해야 하기에, 그에게는 새벽 시간이 제일 중요하다. 아침 일찍 그날 미사에 읽게 될 성서를 읽고, 복음 내용을 미리 읽는다. 그리고 기도실(경당)에서 묵상하고 기도를 드린다. “미사하고 나면 이제 기도를 잃어버리죠.(웃음) 저는 신자들이 너무 시도 때도 없이 막 이러는 거 싫어요. 놀 때는 놀고 밥 먹을 때는 밥 맛있게 먹고, 자꾸 심각한 표정을 짓지 말고, 그게 사람을 은근히 얽매이게 하는 것 같아요. 사고도 -너무 이건 개인적인 거예요.- 기도할 때만 딱 하고 나머지는 그냥 자유롭게 알아서 하느님이 해주시겠지. 이런 걸 믿고 하는 게 중요해요” 1년에 한 번, 일주일 넘게 연피정(관상수도)을 하게 되는데, 거기에 그냥 푹 빠져버리고, 모든 것의 동력과 원천이 되는 힘을 얻는다. “마음속에 있는 게 말로 나오고, 시각으로 나오고, 그걸 또 보게 되는 것처럼, 모든 것이 마음속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희는 ‘관상’이라는 말을 이렇게 하는데. 시대 증표도 못 읽으면 기도 헛하는 거죠. 시대가 뭘 원하는지, 앞으로 비전이 뭔지, 이런 것을 보고자 기도하는 거 아니겠어요? 그냥 나 혼자 그러는 게 아니라 이걸 통해서 바라볼 줄 아는 시각을 갖는, 비전을 볼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죠.” 그가 생각하는 비젼-열린 공동체 열린 공동체를 지향하는 그는 스스로도 말하듯이 ‘일을 만들어서’ 한다. 성심원 공간이 ‘만인의 유익한 공간’이 되도록, 골프장, 카페를 6월에 개장했다. “성심원은 약간 고립된 그런 면이 있어요. 또 한센 정착촌이고. 지금도 산청에 계신 분들 중에는 ‘여기 갈 수 있는 곳이냐’고 묻는 분들도 의외로 있더라고요. 그래서 ‘카페가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했죠.” 성심원은 지리산 둘레길 종점이자 시점이다. 지리산 자락에 자리 잡아 경관도 빼어나고, 앞에 강도 흐른다. 그래서 지어진 곳이 성심원 입구의 카페 ’나루터‘이다. 옛사람들이 나루터에서 오가며 사람들을 만났듯이, 이곳이 많은 만남이 이루어지는 나루터 역할을 했으면 하는 원장의 바람이 담긴 이름이다. 그는 또한 ‘탈시설’을 추진한다. 장애인들이 사회와 격리돼서 고립된 이곳에서 일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지역사회로 많이 내보낸다. 장애인들도 처음에는 시설 생활만 하다 나가니 어려워했는데, 이제는 오히려 ‘안 들어오려고 한다’고 한다. 그래서 지역에 많이 내보내고 그들의 일자리와 잠자리도 마련해주어야 하니, 할 일이 더 많아졌다. 살 곳뿐만 아니라 취미생활 여가 생활. 종교 생활 이런 것들도 하나하나 지원해 주어야 한다. 또 중요한 것이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네트워크’여서, 연결해 주고 잘 돌아가도록 코디하는 일들을 하다 보면 일이 아주 많아진다. 나루터와 애환 초기 성심원이 생길 당시에는 다리가 없어서 나룻배를 타고 건넜다. 나룻배가 세상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인 셈이다. 그들이 사람들로부터 쫓겨,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세상과 단절된 지리산 자락으로 숨어들었을 때는 얼마나 많은 애환을 나룻배에 싣고 건넜을지 안타까웠다. (강을 건너던 마지막 나룻배) “옛날에는 한센인들 가면 학살 당하고 그랬거든요. 여기도 마찬가지였어요. 곡갱이 들고, 삽 들고 쫓아왔던 거지요, 위협하려고요. 쫓아내려고 정착 못하게. 파출소 이런 데서도 묵인하고. 여기는 산이 높고 각도가 있고, 앞에 강이 흐르니까 외부에서 해코지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래서 여기 지리산에 자리 잡은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에는 저 산으로 숨었대요. 쳐들어오니까. 그리고 밤에 내려와 밥 해먹고 쉬다가 해 뜨면 또 도망가는 거예요. 초기에는 이런 생활을 반복하다가 다행히 신부님 수녀님들이 같이 사니까 종교적인 힘도 있었어요. 교회에서 관심도 갖고 그러면서 이 자리에 정착을 하게 된 거죠.“ 지리산, 어머니의 산 지리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그는 지리산은 ‘어머니 산’이라고 대답한다. 그래서 종교 연대도 가능한 거라고. “실상사하고, 저희하고, 이제 목사님들하고, 동호인들하고 있는데. 이게 다른 데 같으면 안 됐을 거야. 지리산이니까 되는 거야. 그래서 자연은 위대한 거죠. 품어주고. 어머니 산이 있었기 때문에. 종교인들도 어떻게 보면 절대 신념체계인데, 자연스럽게 서로 모이게 되고 나누게 되고, 또 공동선을 위해서 노력하게 됩니다. 자연이 주는 힘인 것 같아요. 그래서 지리산에 깃들어 사는 다양한 분들이 어우러져 좋은 생명평화 공동체가 연결될 수 있다고 봅니다. 신진 세대가 들어와 지리산 종교위원회도 세대교체가 되야 하는데, 그렇게 되도록 저는 명맥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그냥 무슨 일 있을 때 그래도 모일 줄 아는 거예요. 종교인들이 모이고, 큰 힘이 나오지는 않아도 유연한 조직이기 때문에 좋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죠.” 더불어 살아가는 모두의 공동체를 위해 성심원 현재 한센인은 70명이고 장애를 가지신 분은 50명 정도 된다. 처음부터 장애인을 받으려고 한 건 아니고. 한센 어르신들이 고령화되고 병들면 한센도 중증 장애인이 된다. 따라서 전문 인력이 필요해지고, 24시간 돌봄이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이분들을 돌볼 수 있는 요양원이 없어, 성심원이 장애인시설로 인가 받아, 24시간 케어가 필요한 어르신들을 돌보게 되었다. 그러다 지역에 중증 지체장애인을 위한 시설도 따로 없어서 성심원에서 장애인들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빌라 가정식으로 된 건물에 가정집처럼 개별적으로 살 수 있는 시설을 늘리고, 침상생활과 케어가 필요한 환자들을 위해, 베란다 설치, 통유리 설치, 넓은 식당 등 시설 개선을 해나가는 방향으로 전환되었으면 해서 건축적 안목이 필요하다’고 건축가의 역할을 강조한다. 앞으로 한센이 점점 줄어들어서 없어진다면 성심원은 앞으로 장애인 시설로 변화할 것인지 물어 보았다. “아니오. 저는 장애인 시설은 딱 이걸로 됐다고 보고요. 나머지는 저런 공간들을 노인주택이나, 청년 주택이나, 다양하게 마을 공동체를 만들어가야죠, 요즘 의료인들이 들어와서 살고 싶은데 마땅한 거주 공간이 없어요. 그런 식으로 좀 풀어가고, 다양하게 남녀노소 거기에 맞게 구조도 세팅돼야 됩니다. 따라서 건축가가 정말 중요하다고 봐요. 동선이라든지. 제가 최근에 북해도를 다녀왔는데. ‘소통의 공간을 만드는 건축가’가 있다고 그랬고, 제주도 갔을 때 이타민 준(유동용)미술관을 일부러 가봤거든요. 정말 이래서 건축이 중요하구나. 아무 생각 없이 만드는 것과. 인간학적인 고려, 여러 가지를 생각했죠, 이런 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사람은 환경에 지배당하기 때문에, 거기에 세팅돼 버려요. 자연스럽게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존중되면서도, 절묘한 깊이. 그런 것들이 중요하거든요.” 일반인들에게 시설을 내주면 초기 수도원의 정신과 어긋난다고 생각하거나 반대에 부딪힐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 ‘100 프로 그런 분들로만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이제 한센이나 장애인뿐만 아니라 통합 마인드로 가야 된다’고 대답했다. ‘이주민 중에 집도 절도 없는 분들에게 개방되는 공간처럼 사회에 가장 소외되고 어려운 모든 분들과 함께 해야 한다’고, ‘그것이 초기 프란체스코 정신’이라고. 마을과의 연대 그리고 청년 그는 의료협동조합과의 연대를 가장 큰 성과로 꼽는다. 의료협동조합과의 인연은 30년 가까이 한방 침구 봉사를 했던 김명철 원장이 ‘의료 협동조합’을 결성할 때 장소 구하기가 어렵자, 선뜻 무상으로 공간을 내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성심원은 한때는 한센 가족들 600여 명이 살다가 급감하면서–현재 70명/ 평균연령 80세-남는 시설이 생겼다. 처음 의료협동조합이 들어올 때는 ‘한센인들이 사는 마을이라 누가 올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효가가 컸다. 성심원이 긍정적이건 부정적이든 어쨌거나 인지도가 높고, 환경적으로도 접근성이 좋다는 장점이 살아난 것이다. 의료 사업이 들어와 지금은 제일 역점사업이 되었다. 의료 협동조합 안에 건축가, 도시 재생가 등 많은 인재들이 있는 까닭이다. 성심원은 이분들과 마을회의를 하면서 ’마을 공동체 사람살이‘를 만들어 가고 있다. ’장애, 비장애인들이 같이 살아감‘을 추구하는 원장은, 이미 구축된 의료 인프라를 더욱 확장할 계획이다. 내년에 가정의가 들어오면 성심원 내에는 한방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양방도 함께 있게 된다. 또한 성심원 내 100여 명 넘게 숙식도 가능한 센터를 활용하고, 좋은 자연환경을 이용한 산책 공간도 만들어 이를 확장한 힐링 치유마을을 구상 중이다. 또한 마을 공동체에는 무엇보다 청년마을이 중요하다고 알로이시오 원장은 생각한다. “시골은 어느 마을이나 청년들이 없잖아요, 그런데 산청은 의외로 청년들이나 외지에서 자연이 좋아 오시는 분들이 있는데, 이 귀농 귀촌 청년들이 의외로 자립 구조가 없는가 봐요. 이분들의 조합원이기도 한데,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창고 하나만이라도 좀 비 피할 수 있는 공간이라도 좀 주시면 좋겠다‘고. 같이 회의를 하다가 저는 깜짝 놀랐죠. 아니, 그런 걸 산청군이 아직까지 안 해주고 있어? 못 해주고 있어? 너무 뚜렷한 거죠. 그래서 저희 이제 빈 공간 하나를 일단 쓰라고 해서 목공실은 만들어 놨어요. 지금.” 청년들이 정착을 하려면 자립구조가 우선 되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이 있어도 자신들의 생업들이 없으면 정착이 쉽지 않아진다. 지금은 가끔 모임을 하고, 목공 프로그램을 하는 정도지만, 내년에는 청년들 자립구조를 만들어 주는 일에 박차를 가하려고 한다. “저희가 논과 밭들도 많고 해서 ‘퍼머 컬처’라든지 좀 다양하게 여기 청년들 또 어린이들 거주 환경도 만들어야 된다고 작년에 세미나를 했지요. 마을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해 이동식주택 이런 것들을 시범적으로라도 구비를 해야 되겠다고” 작지만 큰마을 성심원 마을 공동체 성심원 상주 인원은 약 200명 정도 된다. “우리 어르신들하고 장애인분들. 또 저희는 직원 숙소가 안에 있어요. 봉사자들과 장기 봉사자들도 저희가 숙식을 다 해결해드려요. 그리고 저희 수도자들, 저희들하고 또 수녀님들이 있고. 의료 협동조합 외에도 조합원들이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약 200명. 상시적으로 200명 정도면 작은 마을이 아니죠. 그래서 내년 지방선거 앞두고 많이 들 오시죠.(웃음) 의료협동조합 조합원들이 1500명이면 사실은. 어마어마한 규모죠” “목화장터 밴드에 보면 인원이 지금 몇 천 명, 한 5000명? 큰 시장이에요. 물론 빨리빨리 지나가긴 한데 웬만한 정보나 소통 구조가 이렇게 있기 때문에 괜찮죠.” “조합을 할 정도면. 나름대로 의식도 있으시고 각자 자기 영역에서 발언권도 있으시고 영향력이 있으신 분들이기 때문에. 뭐 좋은 의미의 정치 세력화도 저는 필요하다고 봐요. 맨날 밑에서 세상이 왜 이래 뭐 해봐야 나만 죽어, 나만 죽고 정서적으로 피폐해지고. 패배주의에 빠지게 되죠.” 마을 회의는 한 달에 두 번, 혹은 세 번 열기도 한다. 한 달에 한 번은 김명철 이사장(의료협동조합 대표)와 박인자(경영 이사) 그리고 산청청년모임 ‘있다’, 성심원 원장, 과장 이렇게 핵심만 모인다, 거기에 더하여 마을 공동체 전문가, 건축가, 행정 쪽 일을 도와주시는 분 등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 참여하여 편하게 얘기를 나누는 ‘느슨한 조직’이라고 표현했다. 변화와 도전 그리고 난제 성심원은 원장, 부원장 그리고 수사 8분이 계신다. 수사들은 각자 책임과 역할이 있다. 원장은 성심원 전체와 시설, 어떤 형제 신부는 교육회관, 교육센터를 맡고 있다. 풍연마트, 카페 책임자, 본당 신앙생활을 맡고 계신 외국 할아버지 신부님. 이렇게 요소요소에서 각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수사들 외에도 봉사자, 고용직원 들도 함께 역할을 담당하며 살아간다. “성심원 원장이 키를 갖고 있어요. 저죠 말하자면 (웃음) 왜냐하면 리더의 마인드와 비전이 조직을 좌우하기 때문에, 재정과 인력을 관리하는 원장의 마인드가 중요합니다. 전체를 보는 시각이 필요해요. 그리고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 현재의 현실에 가장 이슈되는 것을 보고, 비전을 제시해 주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현재 원장으로서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해보았다. “어려움은, 저는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크게. 비전에 대한 공유? 뭐 이런 것들? 저는 장애인 쪽 일을 많이 해왔는데. 우리 복지 쪽에서 보면 직원분들이 한센 어르신 케어 지원해 주는데 오랜 세월을 하다 보니까 모든 게 다 그쪽으로 길들여져 있어요. 장애인 같은 경우는 아직 젊고 여러 가지 해야 될 일들이 많고. 그런데 이쪽은 상대적으로 좀 신경이 덜 가고 경험도 좀 부족한 그런 상태였죠. 그래서 아직 장애인 지원에 대해서는 시작 단계라 변화와 혁신을 이해시키고, 직원들과 공감대를 잘 형성하는 거. 그게 제일 중요하겠죠.” 원장이 부임하여 많은 부분들에 변화를 가져왔다. 제도 혁신과 시설 개선에도 주력했다. “사는 데도 약간의 도전이 필요하다고 봐요. 도전하지 않으면 현상 유지가 아니라 퇴보라고 생각하죠. 자꾸 나아지려고 조금씩 조금씩. 사람들이 변화를 굉장히 두려워하고 힘들어하고 하는 것 때문에 그걸 설득하기가 굉장히 힘들지요, 제가 지금 협회에서 제일 힘들잖아요.(웃음) 제가 중앙협회. 경남협회장이거든요. 중앙협회 이사하고 정책위원장도 했는데. 협회나 천주교도, 신부님들하고 저하고 막 옥신각신하죠. 그런 것 때문에 나보고 ‘탈시설주의자’라고. 제가 망하자는 게 아니고 더 잘해보자고 그런 건데, 모임 현장에서 뭔가 변화가 안 이루어지면 전국 장애인 차별철폐 연대. 박경석 씨나 이런 분들하고도 개인적으로 소통을 해요. 같이 세미나도 해보고 그랬는데 원론적으로는 맞다. 그걸 부인할 수가 없죠. 시민으로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방법적으로 현실 여건을 보면서 해야 되는 문제가 있는데. 반대를 위한 반대를 많이 해버리니까. 근데 뭐 시설도 죄는 없어요. 법대로 하는 거니까. 이건 국가 책임성에 관한 문제지.” 일상이 어울림 축제가 되는 마을 성심원에서 매년 6월에 열리는 어울림 축제(음악회)는 올해로 11년차를 맞이했다. 한센인과 장애인, 봉사자들과 주민 모두가 마음을 나누고 소통하는 축제로, 올해는 특히 3월 산불진화에 애쓴 진화 대원들과 공무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시간도 마련되었다. 장애인분들도 다 나와서 같이 인사 나누고, 참여하여 축제를 치루고 나면 성심원은 한층 더 조용해진다. 축제가 끝나고 나면, 이런 일시적 축제와 소통의 장이 아닌 모두가 함께 어우러지는 마을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더욱 든다고 한다. “일상이 축제처럼. 마을을 이루며 살아야지요, 제가 독일의 슈투트가르트를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는 식당이 카페테리아처럼 중앙에 있더라고요. 그냥 장애인들도 그냥 자기 원할 때 와서 밥 먹고 식사하고. 또 방문하시는 분들, 직원들, 그런 분들이 자유롭게 거기서 만나는 거예요. 제가 여기 와서 그런 데를 만들까 했는데, 일단은 카페가 조그맣지만 그런 장소가 되고. 미래적으로는 그렇게 만들고 싶어요. 안에 있는. 따로따로 먹지 말고. 자기 편한 때 와서 식사도 하고 커피도 한잔하고. 소통과 교류의 장이죠” 성심원을 늘 개방된 열린 마을로 만들고 싶은 소망이 ‘청년 마을’로, 그리고 구상 중인 ‘문화예술 마을’로 이어진다. 상시적으로 전시회를 열기 위해 미술관을 유치하거나 경남도립미술관 분관을 둘레길에 설치하거나 하는 등으로 사람들이 찾는 곳으로. 강에서 래프팅하던 사람들이 올라와 쉬어가는 카페(나루터)로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 지리산 둘레길 성심원 코스에는 산티아고의 ‘야고보 사도의 순례길’처럼 12기도처와 성상들이 놓여있다. 가톨릭 정체성에 맞게 기도의 장소가 되기도 하고, 카톨릭 그리스도교 문화를 체험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놓인 것이라고 한다. 봉사를 하고 싶다면? ‘여기 와서 자원 활동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고, 지금도 오시는 분들이 있다. 그러나 자원봉사 또한 책임성이나 지속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책임감을 갖고 꾸준히 해주는 봉사가 필요하다. 단시간 봉사도 물론 할 일이 많기는 하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봉사하더라도 관리나 일의 책임성 부분이 어렵기 때문에 웬만한 일은 직원들이 해버리게 된다. 성심원에는 장기 봉사자들도 10명 넘게 있다. 그 분들은 요소 요소에서 안정적으로 자신의 맡은 부분을 꾸준히 해 오고 있다. 숙식을 여기서 하면서 한 달 정도가 아니라 1년 이렇게 봉사하게 되면 직책이 주어지게 되는데, 그분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한다. 성심원의 바람 “이런 작업들은 성심원만의 일은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서로서로 좋아서. 좋고 같이 활용할 수 있고. 같이 만들어가야 힘도 나고 지속 가능하고 발전적으로 될 수가 있으니까 함께 해주셔야 된다고 기대하죠. 우선 종교부터 더 많이 소통 구조를 만들어 소통하고, 공감대를 이루어 같이 만들어 가는 거예요. 일단 의료협동조합이라는 큰 자산이 있고, 지리산 권역의 종교나 실상사도 함께하고 있고. 지리산 권역의 다른 지역들하고도 계속 연계를 해서 같이 해나가길 바랍니다. 이제 큰 힘을 발휘하려면 네트워크가 중요하고, 큰 차원에서 제도화가 필요한 것 같아요. 제도화시키고 교구에서 같이 하게 되면 엄청난 힘이거든요. 지역과 함께하고 지역을 섬기는 종교로 거듭나지 않으면 그냥 자기들만의 종교뿐이 안 되는 거죠” ‘성심원의 식구들과 같이 친구가 되어주시고. 성심원을 잘 이용해주면 좋겠다’는, 그래서 ‘더욱 파급력이 큰 공간이 되도록 함께 해주면 좋겠다’는 원장의 말을 끝으로 긴 시간 동안의 인터뷰를 마쳤다. ‘모든 것을 품어주는 어머니산’ 지리산을 오가며, 가장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신 ‘예수님의 마음(성심)’을 생각하게 될 것 같다. 그리고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한 사람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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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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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낮은 곳으로 향한 사람 – 성심원 원장 엄삼용 알로이시오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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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골프장무산 환영 인터뷰] “우리가, 지리산이, 꼭 이길 거라고 생각했다”
- “우리가, 지리산이, 꼭 이길 거라고 생각했다” 지리산골프장 사업 무산 뒤, 사포마을 경숙을 만나다 2023년, 지리산 자락 숲의 아름드리 수만 그루가 잘려 나갔다. 시뻘건 흙이 다 드러났다. 마구잡이로 베어진 나무들이 물길을 막아 계곡물은 뿌옇게 변했다. 100평 넘게 있던 야생화 앵초 군락지도 쓸려나갔다. 27홀 규모 지리산골프장 개발 욕심으로, 축구장 30여 개 넓이 숲이 나무 무덤이 된 터였다. 바로 그 숲에서 5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사포마을이 있다. 예부터 아름다운 다랑논으로 이름나 전국 사진작가들이 찾는 구례군 산동면 사포마을. 그 마을에 경숙이 살고 있다. (가을 사포마을과 다랑논 Ⓒ김인호) 마을에 뭔가 큰일이 나겠구나 경숙은 평소 마을 뒤 숲을 자주 올라다니지 않았다. 마을 일에도 나서고 싶지 않았다. 나이를 먹은 뒤 귀촌한 이 마을에서는 그저 조용히 평화롭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느닷없이 들이닥친 일들은 그를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경숙은 마을 숲에서 주검처럼 널브러진 수만 그루 나무 시신들을 보자, 뭔가 큰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갑자기 동네 분이 저기 위에 숲에 나무가 다 베어졌다고 그러시길래, 저는 가볍게 생각했어요. 누가 좀 와서 몇 그루 베어 갔는가 보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분 표정이 너무 심각한 거예요. 그래서 제가 올라갔어요. 나무가 너무너무 베어져 있는 거예요. 순간 아, 뭔가를 하는구나, 하고 느꼈죠. 그러면서 흐릿하게 있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아, 골프장을 하려는 거구나.” 8만 6천 평 숲이 벗겨졌다. 그러고 150만 제곱미터, 45만 평 숲에 골프장을 짓겠다니. 구례군은 골프장 예정지 바로 옆이 지리산국립공원이라는 점도 예정지에 생태·자연도 1등급 지역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도, 멸종위기야생생물 수달과 담비와 삵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점도, 골프장의 농약과 제초제가 다랑논과 섬진강으로 흘러들 거라는 점도,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는지 지리산골프장을 밀어붙였다. (사포마을 뒤 지리산 자락 숲에 마구잡이로 베어진 나무와 벗겨진 땅) 혼자 싸울 수 있을까, 버틸 수 있을까 경숙은 그날 이후로 하루도 잠을 편히 이루지 못했다. “아, 이거 어떡하지, 어떡하지, 내가 과연 이거를 싸워낼 수 있을까? 우리는 힘이 없는데 어떻게 저 골프장을 막지, 하고 별생각을 다 했어요. 처음엔 나밖에 싸울 사람이 없을 거로 생각했어요. 동네 분들이 함께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내가 평소에 동네 분들이랑 어울리지도 않았고, 또, 예전에 사회운동을 해 보면서도 느낀 건데, 항상 아픈 사람들만 아프지, 방관자들은 끝까지 모르는 척하고 착취하는 사람은 끝까지 착취하는 세상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치만, 내가 이 싸움을 나만을 위해서, 내 뒷마당엔 안 돼 같은 이기적인 마음으로는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어요.” 사포마을은 오래전 이곳을 일군 주민들의 땀이 빚은 마을이다. 농사지을 땅이 모자라 돌과 흙을 이고 지어, 한 사람 한 사람 몸뚱이로 일군 다랑논 마을이다. 경숙은 이런 피눈물 나는 삶의 터전 위에 골프장을 짓겠다는 상황을 도저히 가만둘 수 없었다. 세수를 들먹거리며 제 욕심이나 차리려는 인간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경숙은 얼마나 걸릴지 모를 싸움을 시작하려고 마음먹었다. 늘그막을 보내려고 마련한 집을 다 팔아 그 돈으로 변호사라도 불러야 하는 게 아닌지, 이 적은 돈으로 싸움을 계속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렇게 경숙이 불타오르자, 그의 신랑 일용이 한마디 했다. “그이가 저보고, 그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일단 마을 사람들과 얘기해 보자고 했어요. 함께 동네 분들을 만나러 갔죠. 그런데 동네 분들이, 그 어르신들이, 제 말에 무척이나 공감해 주시는 거예요. 얼마나 위로를 받았는지 몰라요. 이 마을에 골프장이 웬 말이냐고 그러면서 예전에 골프장 반대하며 싸웠던 이야기도 해 주셨어요. 참 힘을 많이 받았지요.” 곁에, 사람들이 있었다 사포마을이 골프장 싸움에 휘말린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2004년에도 사포마을 어르신들은 앞장서서 지리산골프장에 반대했다. 당시 어르신 여섯 분이 사업주 측으로부터 폭행을 당해 병원에 입원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주민들이 소리 높여 골프장을 막아낸 곳이 바로 이 사포마을이다. 그런데 또 ‘이놈의 지긋지긋한 골프장’이 들이닥친 것이었다. “지금 군수와는 말이 전혀 안 통하니까, 다른 정치인들한테 연락했어요. A는 자기가 힘이 없다고 하고, B는 자기가 돈이 없다고 하고. 그때 참 실망했죠. 우리 구례 정치인 중에서 군수랑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그러다가 제가 <봉성신문>에 연락하게 된 거예요. 그때 발행인이었던 안상술 선생님이 참 제 말을 다 들어 주시고, 힘이 돼 주겠다고 하셔서, 그때 제가 정말 집에 와서 울었어요. 그러고 나서 지리산사람들과 윤주옥 대표도 알게 되고, 대표님이 정말 큰 힘이 되었어요. 돈도 안 되고 아무도 돌보지 않으려는 산을 발 벗고 나서서 지키려는 사람이라 정말 믿음이 갔어요. 아, 이제 뭔가 실마리가 있겠구나, 우리 지역에 이런 분들도 있구나.” 경숙은 뜻이 맞는 마을 분들과 시민사회단체 사람들의 손을 잡을 수 있었다. 2023년 4월 11일 ‘지리산골프장 개발을 반대하는 구례사람들’ 모임이 시작됐다. 뒤이어 마을 주민들이 모여 ‘사포마을 골프장 건설 저지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도 만들었다. 이들은 기자회견을 열었고, 여기저기 언론사 취재가 이어졌다. 또 6월엔 마을에서 하지축제를 열어 지리산 숲과 다랑논을 지키자는 목소리를 더 높였다. 그 뒤로도 여러 사람이 파괴된 숲에 와 슬픔을 나누고 저항 의지를 다잡을 수 있도록 숲과 사람들을 연결했다. 각지 시민들이 지리산골프장을 반대하는 뜻으로 후원금을 보냈다. 감사원에 구례군 감사를 청구하고, 경찰에 불법 행위를 고발하는 일도 있었다. 2023년 10월에는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이곳만은 지키자’에 사포마을 다랑논이 환경부장관상을 받기도 했다. 혼자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여서 가능한 일들이었다. “솔직히 저는 이 싸움이 질 거라고 한 번도 생각 안 했어요. 왜냐하면, 이거는 나의 뒷마당도 아니고, 내가 땅 투기용으로 사놓은 땅도 아니고, 그냥 지리산이잖아요. 지리산을 파헤치는 일은 있을 수가 없죠. 지리산이 우릴 지켜 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온 정성을 다하자, 최선을 다하자, 그렇게 생각하니까 우리 주민들도 있고, 지리산사람들도 있고, 나와 똑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내가 혼자서만 싸우려고 한 게 교만이었구나.” 경숙은 혼자가 아니었다. 산을 그대로, 강을 그대로, 들을 그대로 두자는 이들이 세상에 이렇게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덕분에 인생에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이야기하는 경숙) 지리산골프장 사업 무산 소식, 그리고 2025년 10월 19일, MBC는 구례군이 지리산골프장 사업을 사실상 무산되었다고 본다는 취재 영상을 내보냈다. 지리산골프장 사업이 엎어졌다! 주민과 시민의 승리다. 사업자 사이에 토지 다툼이 있어 2026년 초까지 마쳐야 할 인허가 과정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시민사회는 산주가 이사로 있는 사업 시행자가 사업 실행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사업 초기부터 여러 근거로 제시했지만, 구례군은 시행자와 MOU를 맺으며 지리산골프장 사업을 대대적으로 홍보해 왔다. 그래 놓고 이제 ‘사실상 무산’이라며 산주에게 원상복구 명령을 내리겠다고 한다. 소중한 행정력이 낭비되고, 숲은 파괴되고, 지역 공동체는 찬성과 반대로 갈라져 싸우게 된 일은 누가 책임질 셈인가. “피눈물 나는 삶의 터전 위에 골프장을 짓겠다면서 세수 운운하던 군수! 자기 잇속 챙기려고 지리산권을 엉망으로 만들고 군민들 갈라치기 했으면 사죄해야죠. 돈 되면 산을 파헤쳐도 괜찮다고 여기저기 지리산골프장 환영 현수막 걸던 토호 세력들도 반성해야죠.” 사업 무산 소식이 들렸지만, 경숙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지리산골프장을 밀어붙이려던 세력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마을은 찬성과 반대로 갈라져 있었다. 마음 졸이며 보낸 지난 시간도 되돌릴 수 없었다. 지리산은 그냥 있어 주지 않더라 골프장에 찬성했던 어떤 이는 지리산골프장을 시민들이 막아 낸 게 아니라 그저 ‘상황’이 어쩔 수 없게 되어 무산된 것뿐이라며, 지리산골프장을 막은 시민들의 승리를 애써 깎아내렸다. 그러나 그 어쩔 수 없는 ‘상황’도 우리 시민들이 만들어 낸 결과다. 사포마을 주민들을 포함하여 지리산골프장에 반대한 시민들이 한마음으로 골프장 반대 운동에 나선 덕분에 사업이 무산되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지, 거저 만들어진 게 아니다. 지리산골프장을 만들려던 세력이 편하게 골프장을 만들 수 없도록 그들이 가는 길에 자꾸 돌을 던지고, 돌다리를 하나씩 뺏어서 편히 건너지 못하게 만든 것이 바로 시민들의 힘이다. 사포마을 주민들이 더 갈라지지 않고 포기하지 않게 한 것도 시민들의 힘이며, 지리산 자락에서는 어떤 난개발도 쉽게 벌일 수 없다는 중요한 가르침을 준 것도 시민들의 힘이다. 사포마을을, 그리고 지리산 숲을 모두가 함께 지킨, 우리의 승리다. “지리산은 그냥 있어 주는 게 아니었어요.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그냥 계속 아름답게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언제든 지리산을 돈벌이 수단으로 쓰려는 세력은 또 나타날 수 있어요. 그러니 싸움이 여기서 끝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계속해야죠. 모진 노동으로 손가락이 휘고 허리가 굽은 우리 어르신들이 더는 시위에 참여할 일이 없게, 마을이 힘을 키워야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묻는 말에, 싸움을 계속할 거라는 경숙의 눈빛이 빛났다. 다만, 이제 이 싸움은 지난 싸움과는 다른 방식일 것이다. 경숙은 마을을 소중하게 가꿔서 아무도 훼손할 생각조차 못 하게끔 할 거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과 뭉쳐서 마을의 힘을 키우고 싶다고 했다. 마을에서 공동체 모임을 열어 여러 사람이 숲과 연결되도록 재미난 일들을 꾸려 보고 싶다는 바람도 내비쳤다. “나는, 정말 꼬부랑 할머니가 돼도 여기서 호미질하다 죽을 거예요. 선거철마다 돈봉투 돌리고 또 그걸 받고 하면서 비리를 눈감고, 개발업자들만 배불리는 난개발 사업에도 환영 현수막 걸고, 무슨 빵 부스러기라도 받아먹으려는 사람들 볼 때마다 절망했었거든요. 그래도 여기까지 온 건, 우리 사포마을 주민들이 끝까지 지리산을 지키려고 싸웠기 때문이고, 또 지리산사람들과 지리산을 지키려는 시민들 덕분에 희망을 봐서예요. 이렇게 막아냈잖아요. 우리 다음 세대에도 이런 사람들이 이어지게 우리 마을에서 뭔가를 해 보면 좋겠어요.” (2023년 지리산생명 하지축제 때 숲을 함께 지키자며 모인 사람들 Ⓒ지리산인) 돈의 편이 아니라, 생명의 편에 서자 경숙은 노자산 골프장을 반대하는 시민들이나 산청 차황면 골프장을 막으려는 시민들과도 계속 연대하고 싶다고 했다. 혼자라고 생각했던 경숙에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버틸 수 있었듯, 자신 역시 다른 이들의 손을 잡고 힘을 주고 싶어 했다. 또, 지리산골프장 사업을 두고 갈라졌던 마을 주민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게 다리를 놓고 싶다는 바람도 내비쳤다. “지리산골프장 사업을 찬성한 분들도 속으로는 지리산이 그렇게 망가질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거예요. 상가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그러셨을 거고요. 골프장에 찬성했던 마을 분들과도 이야기하면서 이제 마을이 하나로 다시 뭉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지리산인> 독자들에게 경숙이 하고 싶은 말을 남겼다. 스스로 싸움에 나설 수 없다면, 그 뜻을 펼치는 사람들에게, 싸움에 나선 사람들에게 ‘우리도 숲을 좋아해요, 강을 좋아해요, 우리도 함께할게요.’ 하고 말해 달라고. 회원이 되어 주고, 그저 옆에 있어 주기만이라도 해 달라고. 그것도 정말 큰 힘이 된다고 말이다. 정말로, 더 많은 이가 생명의 편에 서 주기를 바라며, 자빠진 지리산골프장 사업 결과에 마음 깊은 ‘꼬소함’을 보낸다, 다신 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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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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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골프장무산 환영 인터뷰] “우리가, 지리산이, 꼭 이길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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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연대 순례하는 청명4] 생명과 평화가 피어나는 파주
- [빛나는 연대 순례하는 청명 4]생명과 평화가 피어나는 파주 10월의 마지막 주 파주에 다녀왔습니다. 생명평화결사 등불(회원)인 천호균 님(닉네임 호박)이 사는 지역에 들러 농사도 하고,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순례 일정입니다. 거창에 계시는 박용성 바르나바 신부님도 동행하였습니다. 듣기로 천호균 님은 농사를 예술로 생각하시고 지으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작가가 긴 고뇌 끝에 위대한 작품을 만들 듯 농부는 오랜 시간 정성들여 생명 깃든 곡식을 창조해 냅니다. 아직은 도시에 있어야만 문화를 향유할 수 있었다면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문화는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과 평화로운 자연이 가득한 농촌에서 시작합니다. 농촌이 가장 트렌디한 예술마을이 되고 농부가 아주 창조적인 예술가로 인정받고 농사가 가장 위대한 직업이 되는 날이 곧 오리라 믿습니다. 농사는 예술입니다. (천호균 시, 보리의 블로그에서 인용) 비록 며칠의 짧은 방문이지만, 파주지역 곳곳에 펼쳐진 그와 지역 주민분들의 생명과 평화에 대한 노고가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우프’와 ‘평화마을짓자’는 이를 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우프, 호스트, 우퍼라는 말이 생소하게 들리시는 분도 있으실 거예요. 우프는 1971년 영국을 시작으로 유기농가에서 하루 4~6시간의 노동을 제공하고 숙식을 제공받는 것으로, 147개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는 글로벌 네트워크 활동이라고 합니다. 이에 호스트는 일손을 필요로 하는 농가의 농장주를 일컫는 말이며, 우퍼는 농가에 들어가 일정 노동을 제공하고 숙식을 얻으려는 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파주에 도착해서야 우프를 알게 되었거든요. 하여, 결례임에도 신청 없이 호스트인 ‘평화마을짓자’ 이사장인 정진화 님의 집에서 우퍼인 오스트리아 부부와 숙식과 체험 일정을 같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사단법인 평화마을짓자’도 말씀드려야겠네요. 이 단체는 남과 북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현실에서 ‘예술로 농사짓고, 농사로 평화짓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2017년 보리출판사 윤구병 님의 제안에 천호균 님 등 7명의 창립 멤버를 시작으로 현재는 133명의 회원분들이 1만원~20만원의 회비를 자율적으로 납부하여 운영된다고도 합니다. 파주 적성면의 1,000여 평의 공동체 밭이 우퍼와 회원분들의 농사터로 이용되며, 파평면 눌노리 일대에 조성중인 1,300여 평의 평화마을에서는 16가구가 생태와 에너지자립, 순환마을을 지어가는 중이라고 합니다. 생태적 삶의 실천, 평화의 가치를 확산하는 공동체를 지향하며, 화학비료와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유기순환 농법을 비롯한 다양한 활동으로 한걸음씩 즐겁게 이뤄가고 있답니다. 올해 10월 9일에는 ‘기후야 춤추자, 평화야 뒹굴자’라는 주제로 지역민들의 가을 잔치가 풍성하게 열렸다는 군요. 둘째날 오전, 민통선 안 대마밭에 들어 갔습니다. 천호균 님의 밭에는 관에서 허가된 대마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씨를 수확하고 한 컷하였습니다. 아! 그런데 민통선을 지나는 길에 그만 울컥하고 말았습니다. 개성 21km, 평양 208km 표지판이 스쳐 갔습니다. 분단이란 이래저래 아픔입니다. 단절되어 나누고 살아가지 못하는 남과 북의 고초가 현실감 있게 다가옵니다. 오후에는 마리얍과 알프레드 오스트리아 부부가 우퍼로 왔습니다. 함께 정진화 님과 천호균 님, 박용성 바르나바 님과 저, 이렇게 6명은 평화마을 밭에서 고구마와 줄기를 열심히 수확하였습니다. 맛있는 고구마 줄기 요리를 상상하면서... 오스트리아 부부는 10헥타르 규모의 농사를 지으며 네이처 와인, 가공하지 않는 와인 공장을 운영한다고 합니다. 10월~12월은 여유가 있어 여러 곳에서 우퍼로 지낸다고 하구요. 유쾌하고 농담이 넘치는 알프레드는 저의 ‘후쿠시마 오염수’ 몸자보에 관심을 많이 가졌는데, 오랫동안 얘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저로서는 오스트리아의 좌우파의 기준을 알 순 없었지만, 자신은 그간 우파에서 근래에 중도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좌파도 이해한다고도 하구요. 일본의 오염수 해양투기나, 자본주의 제도가 나쁘다는 점도 알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왜 몸자보를 달고 다니는지 주변 통역의 도움과 바디 랭기지로 설명드렸구요.^^ 그리고 마리얍은 제 사진을 찍어 사람들에게 알려 주겠다고 하더군요. 헤어질 땐 금새 정이 들었는지 마리얍도 저도 눈시울이 뭉클 했답니다. 앗, 평화마을에 있는 양조장도 방문했네요. 임상채 님이 운영하시는 ‘평화마을 양조장’ 다들 막걸리 한잔씩. 크~~ 다음날 아침에 저는 여러가지 채소로 요리도 하고, 냉장고도 정리하였습니다. 다른 분들은 숙소 텃밭 작업을 하였구요. 그런데 아침 밥상에 올라온 저의 필살기, ‘고구마 줄기 무침’을 드신 분들의 한결같은 칭찬 세례, “우와 엄청 맛있다!” 이어진 일정은 임진각. 끊어진 다리도 보았습니다. 임진각 공원에서는 어떤 조형물 앞에서 평화를 위한 기도도 잊지 않았습니다. 남북의 접경지인 파주를 다니다 보면, 팔레스타인 전쟁의 참상이 오버랩되어 늘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생명과 평화의 기운, ‘평화마을짓자’의 정신과 실천이 파주를 넘어 온누리에 널리 퍼지기를 간절하게 기원해봅니다. 아참! 임진각 다리 근처에는 파주시민들이 추진하여 설치한 소녀상 2개가 있다고 하는군요. 1개가 아직 북쪽에 가지 못했다는... 천호균 님이 운영하시는 주식회사 ‘쌈지농부’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헤이리 예술마을의 미술관과 헤이리에서 예술정원으로 조성중인 곳에서 ‘에너지 자립을 위한 빗물 저금통 자전거’를 보았습니다. ‘빗물 저금통 자전거’는 바퀴를 회전하면, 모아진 탱크안의 빗물이 호스를 통해 전기사용 없이 분사되는 원리입니다. 다같이 달라붙어 니스 덧칠 작업도 하였습니다. 평화마을에서도 태양광이나 태양열, 지열을 이용한 에너지자립 온실이 2동 지어져 있습니다. 곳곳의 생태적인 삶의 흔적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주곤 합니다. 다음으로는 ‘참회와 속죄의 천주교 성당’에도 들렸습니다. 성당의 내부 모자이크를 북쪽 분이 만들어 보냈다고 하네요. 건축양식도 북쪽 성당과 똑 같구요. 이틀간의 일정이 후딱 지났네요. 정신없이 이리저리 다녔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번 순례를 다니면서 또 하나 느낀 점이 있다면 ‘다름’이라는 부분입니다. 인간이나 비인간, 생명체 사이 관계에서 상대를 정확히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지 않나? 그로 인한 ‘서로를 바라보는 다른 생각’. 그래서 문득, 집 텃밭에서 흙을 만지다 보면, 가장 가까이에서 나를 바라보는 존재, 집에 두고 온 강아지 쏭이가 떠올라 시를 한번 써 보았습니다. 쏭이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생각을요. ‘쏭이 귀 펄럭’ -청명- 내 옆엔 별난 세상이 있다. 풀과 꽃, 작물, 나무, 인간까지 정글처럼 다 같이 엉켜 살고 있다. 벌은 바쁜데 나비는 한량이다. 엄마는 오늘도 삽질 중이다. 엄마가 나를 보고 웃는다. 나는 꼬리를 흔든다. 아빠는 오늘도 요리중이다. 아빠가 부엌에서 계란을 삶는다. 나는 또 꼬리를 흔든다. 소만 언니는 나를 쏭이라고 불렀다. 나는 와락 안겼다. 이 곳은 별난 세상!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우리 집이다. 그런데 이 시가 ‘생각의 다름’에 비추어 과연 얼마나 쏭이의 마음과 생각에 근접했을까? 쏭이가 아닌 나라는 인간의 관점에 지나지 않을까? 타성에 묶여서 만나는 이의 ‘생각의 다양성’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피상적으로 ‘그럴 것이다’가 아닌 ‘서로간 생각의 다름과 다양성’을 좀 더 살펴보는 일이 연대활동에 있어 기본이 아닌가? 새삼 번쩍 들었던 생각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 고정되어 있다는 고집 자체도 권력을 낳으니까요. 하지만 다름과 다양성에 있어서도 늘 경계해야 할 점이 있겠지요. 바로 권력으로 인한 차이, 수직적으로 표현되는 이러한 다름과 다양성은 지양되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생명과 평화가 피어나는 파주. 평화마을과 공동체 텃밭을 기반으로 새로운 세상을 꾸려나가는 파주 사람들. 삭막한 분단의 접경지를 지척에 두고서도 희망을 쏘아 올리는 파주에서의 경험은 감동 그 자체입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친절하게 맞아주시고 안내해 주신 정진화 님, 천호균 님, 멀리 이국 땅 한국으로 오셔서 다정하게 함께 지냈던 마리얍 님, 알프레드 님, 다니는 내내 운전을 도맡아 주셨던 박용성 신부님, 파주를 떠나기 전날 저녁에 잡채를 맛있게 요리해 주신 정금자 님(천호균 님 짝궁, 닉네임 감자). 고맙습니다. 그리고 자연과 사람이 함께 숨쉬는 공간을 마련하여 생명과 평화를 실천하고 널리 알리고 계신 연대의 전도사인 ‘평화마을짓자’ 모든 회원님들. 많이 고맙습니다. 다음 일정지인 담양으로 내려오면서, 만남은 연대이고, 연대가 쌓이면 변화가 이뤄진다는 믿음이 솟구쳤습니다. 다 파주에서의 연대의 힘 덕분입니다. 조그마한 옹기에 담아놓은 감식초가 잘 익어가고 있네요. 이제 본격적으로 단풍도 들겠지요. 찬바람이 셉니다. 독자님들 모두 건강하고 화이팅 넘치는 가을날 되시기를 두손 모아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앗싸 탈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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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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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연대 순례하는 청명4] 생명과 평화가 피어나는 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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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의 사람책] 산청으로 돌아온 민영권 위원장
- 학생운동에서 생태운동까지. 민영권 위원장의 생애 운동_1 산청에서 태어나 다시 산청으로 돌아오기까지 민영권 위원장은 활짝 웃으면 마냥 푸근한 얼굴이다. 껄껄껄 웃는 얼굴은, 하지만 이야기를 조금만 해보면 날카로움이 비어져 나온다. 특히 투쟁과 관련해서 그의 입장은 명확하다. ‘액션을 취하지 않으면 바뀌는 건 없다.’ 그는 정치적 실천가이고, 어떤 운동을 하든 간에 ‘현장에서 함께 한다’는 입장은 평생을 고수해왔다. 오늘 이야기 나눈 사람, 민영권 위원장은 현재 산청에 살고 있으며 산청난개발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1편에는 그가 산청에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이야기, 2편에는 산청에 돌아온 이후의 이야기를 풀어내고자 한다. (사진촬영: 김인호 님) 민영권 위원장은 산청에서 태어나, 진주에서 초‧중학교를 나오고 고등학교, 대학교는 서울로 갔다. 그는 고등학생때부터 운동을 시작했다. 일명 ‘독서 써클’이라 불리는 동아리에 들어갔고, 대학생 선배들을 따라 다니며 ‘5.18의 실상을 알리는 전단지’를 돌렸다. 1980년, 그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시대의 아픔을 모른척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정치의식이나 사회를 바라보는 눈이 그때 생긴 것 같다고 회상한다. 대학에 가서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을 했는데, 중간에 ‘녹화사업’으로 징집을 당했다. 녹화사업은 1980년대 초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국가권력이 주도한 강제 전향‧사상통제 정책이었다. 전국 대학가의 학생운동을 ‘용공(공산주의적)’으로 규정하고 고문, 협박, 강제 병역, 낙인의 폭력을 가했다. 이 사건으로 피해자들은 평생의 트라우마를 얻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민 위원장은 이 시기를 ‘고초를 겪었다’고 짧게 표현했지만, 그 실상은 참혹하다. 민 위원장 역시 매일 상세하게 진술서를 쓰길 강요당했고, 물리적 폭력을 겪었다. 군대 생활을 끝내고 학교를 돌아오니 1986년 건국대 10.28 사건(항쟁)이 일어났다. 민 위원장은 대학에 다닐 당시 이른바 지하서클에서 ‘의식화 교육’을 담당하는 선배였다. 그 서클에는 일명 애학투(애국학생투쟁위원회) 후배들이 있었다. (더 많은 내용은 ‘10‧28 건국대학교 사건’을 찾아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제대하는 날 남산 안기부에 바로 끌려갔다. 누구누구 아느냐, 애들을 더 고자질해라, 밀고하라고 프락치를 강요받았다. 심지어 학교에 가면 감시자들이 따라오고, 그의 일거수 일투족 모두 감시받는 것 같았다. 그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부모님의 걱정이 짙어지니 방법이 없었다. 집을 가출해서 잠적하는 수밖에는. <학생운동에서 노동현장으로> 1988년, 그는 인천의 한 목재공장으로 향했다. 당시 인천은 목재 수입과 가구 제조업이 호황을 누리며 인력이 부족했다. 동아리 선배들이 위장 취업해 일하고 있던 그곳에서, 그는 본격적인 노동현장에 뛰어 들었다. 인천 서구 석남동에 있는 R목재공장. 아침 일찍 눈을 떠 합판을 자르는 것을 시작으로 온종일 몸으로 일을 했고, 철야 작업이 많으면 야간까지 일했다. 그 당시 민 위원장은 ‘가장 밥 많이 먹는 애’로 유명했다고 회상한다. “내가 공장에서 가장 밥 많이 먹는 애로 유명했어요. 너무 배가 고팠어요. 밥을 해 먹을 여유도 없었고요, 그 당시 가구공장은 장사가 호황이라 한 달에 20일은 철야를 했거든요. 철야 라는 게 새벽 4시까지 하는 일을 말해요. 집에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여유가 없으니 우리 같은 경우는 공장 구석에서 스티로폼 깔고 잤어요. 한 달에 스무날 정도 철야를 했고 또 나머지 날은 노조 결성하자고 다른 동료 노동자들하고 술 한잔하면서 이야기도 해야 하니까…. 몸이 다 망가졌어요. 하루는 급성 간염이 왔어요. 아침에 일어났는데 눈이 안 보이더라고요. 너무 과로한 거죠. 급성 간염도 오고 신장병도 왔어요. 몸이 퉁퉁 붓더라고요. 그때 얻은 병으로 학원을 하면서도 건강은 계속 안 좋았죠.” 당시 학생운동을 하다가 위장 취업한 학생들은 노동자들과 접점을 만들었고, 노동현장에서 ‘작업조건‧노조결성’과 같은 현장 투쟁을 조직하고 이어갔다. 당시 많은 노동자는 근로기준법조차 알기 어려웠다. ‘노동법 해설’, ‘근로기준법 읽기’ 등과 같은 자체 교재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구술자료에 따르면 한 인천 위장 취업 운동가는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는 노동자들에게 ‘월급이 왜 이렇게 적을까?’, ‘산재가 나면 누가 책임질까?’ 이런 질문에서부터 시작했죠.” 민 위원장 역시 공장 노동과 노동운동을 2년 반 이어갔다. 당시 민 위원장이 휴학한 학교는 학생운동을 했던 학생들에게 관대했던 학교였기에 복학하려는 운동권 학생에게 100% 장학금을 주었다고 한다. 민 위원장 역시 그 물결 속에 다시 복학한다. 복학 후 졸업하려 보니, 11년 만이었다. 자연과학을 전공했기에 수학 교사로 일을 시작했지만 재단 비리 일을 알게 되어 재단하고 싸우다가 1년 만에 교사직을 내려놓게 되었다. 인생의 절반을 투쟁해온 그에게, 크든 작든 부당함은 드러내야 하는 것이었다. 그 후에는 학원 강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사진촬영: 김인호 님) <노동운동을 뒷받침하다> 학원 일을 배우며 강사로 활동한 뒤 영등포에 그는 직접 학원을 차린다. 당시에 현장에 남아서 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역할분담을 통해 돈을 벌어 활동가 자금 지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민 위원장은 당시 학원을 시작했고, 지속적이고 실질적인 활동을 위해 자금 지원을 하기로 한다. 민 위원장이 1999년 시작한 ‘영등포 전망학원’은 1년 반 만에 600명의 학생이 다닐 정도로 대형 학원으로 성장했다. 학원 선생님도 무려 20명 가까이 됐다. 학원은 더군다나 경기나 입시 흐름을 많이 타기 때문에 간판도 자주 바꾸고 콘셉트도 바뀌는데 그는 한자리에서만 20년을 해온 것이다. 그는 그가 얼마나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일했는지 느껴진다. “학원 생활이라는 게 남들하고 거꾸로 살아요. 밤새워 일하고요. 영업시간 제한이 없으므로 새벽 1~2시까지 가르쳤고, 그 후에는 너무 배고프니까 고기랑 술 잔뜩 먹고 새벽에 집에 가서 자고 그 생활을 20년을 한 거예요. 그래서 또 몸이 망가졌죠. 공장 다니면서 얻었던 병 때문에 꾸준히 병원에 다녔어야 했어요. 피를 걸러내는 일종의 투석입니다. 정기적으로 해야 했고요. 그렇게 병원을 다니다 보니 췌장이 망가진 걸 알게 됐어요. 운이 좋았어요, 췌장암이라는 걸 일찍 발견했어요. 췌장암은 아시다시피 예후가 몹시 나쁜 암인데…. 게다가 전이가 잘 되는 몸통 부위에 발병했는데 운이 좋아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20년 동안 운영해왔던 학원을 2019년에 접고 항암치료 후에 산청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그의 운동관에도 변화가 생겼다. “대기업 주류의 노동운동은 제 생각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계급으로서의 노동자 의식 이런 부분을 기대하기 힘들어졌어요. 계급의 변혁이나 혁명이 무장해제됐다고 해야 하나.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면 이제 어떤 운동이 필요하나 싶었던 거지요.” 2010년대 초반, 그는 녹색평론을 접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갈등이 첨예한 시기 생태 운동은 한가한 운동으로 치부되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녹색평론에서 나오는 생태 이야기는 자본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하는 의제와 연결되어 있었고, 김종철 선생의 이야기에는 울림이 있었다. 그는 녹색당 당원으로 가입하고 당원모임에 나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여전한 목마름이 있었다. 서울에서 이뤄지는 당원모임의 한계였을까, ‘현장과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하는 실천적 액션이 아쉬웠다고 그는 회상한다. 그 런 와중에 암을 발견했고, 모든 걸 다 접었다. 항암치료 이후 요양차 다시 고향 산청을 찾게 되었다. 분명 처음 귀향하는 이유는 ‘요양’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 (후에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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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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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의 사람책] 산청으로 돌아온 민영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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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연대 순례하는 청명3] 9.27 기후정의 행진을 청주에서
- [빛나는 연대 순례하는 청명] 9.27 기후정의 행진을 청주에서 폭염과 폭우가 휩쓸고 간 여름을 뒤로하며, 수 백 명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9.27 충북기후정의행진, 새로운 세상을 향해, 기후정의로 세상을 잇자!’ 대로변을 낀 청주국립미술관 앞에는 연단과 여러 부스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올해는 서울 중심에서 벗어나 지역에 집중하여 행사를 치른다고 합니다. 미리 집회 발언을 요청받았는데 2분을 절대 넘기지 말라고도 합니다. 내용은 6대 요구안 중 ‘생태파괴에 저항하는 투쟁’입니다. 이전에는 힘이 들어가는 목소리로만 해보았기에 이번은 다르게 하고 싶었습니다. 모든 생명체 사이 유대와 연대의 심정으로 나름의 퍼포먼스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랩으로 가자!” 발언은 강직하게, 랩 파트는 시민과 연대하듯이. 강조할 곳은 꼭꼭 집어 표시까지 해두었습니다. 사전행사로는 부스가 설치되어 각 참여단체가 알리고자 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되었습니다. 참여한 단체를 나열하면, 전교조 충북지부, 동물행진, 충북사람연대, 충북장애인차별연대, 다사리자립센터, 공공운수노조 충북지부, 민주노총 청년,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 충북페미니스트 네트워크 걔네, 충북노동자시민회의, 노동당 충북지부, 청주충북환경연, 교육공무직 충북본부, 해바라기, 그리고 단체는 아니지만 제가 참여한 탈춤(탈핵을 향한 천개의 춤)이 있습니다. 많지요.^^ 알고 보면 지역 단체도 꽤 됩니다. 채식 김밥 만들기 같은 재미난 체험을 비롯하여 풍성한 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탈춤 프로그램에는 눈썰미 넘치는 봄봄을 비롯한 모두가 기획한 탈핵 그림 전시회(월간 탈핵신문 삽화를 그려온 청주에 살고 있는 산책의 작품입니다), 호(닉네임)의 미니 태양광, 탈핵 그림을 시민들에게 관심을 이끌어 내는 열정적인 후와 바쁜 와중에도 필요한 물품을 나르는 지아의 수고가 담겨 있습니다. 저는 “탈핵신문 봐주세요!” 라고 했구요.^^ 본 집회에 들어 제 발언 차례가 되었습니다. 기후정의란 기후도, 뭇 생명도 더 이상 나빠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이라고 먼저 얘기했습니다. 이어서 위험과 죽음으로 몰아가는 충북지역 개발과 파괴의 현실을 알렸습니다. “청주 도심을 지나가는 광역급행열차 CTX, 청주공항의 민간전용 활주로 확장, 삼성과 SK가 참여하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막대한 물과 전기가 들어간다고 합니다)로 인한 영동의 송전선로 설치, 충북도의회의 그린벨트 전면해제 결의와 청주시 현도면과 옥천군 주변 대청호 오염 예상, 충북의 산업단지 150여 개 확장...” 발언 1분40초 훌쩍. “기가 막힙니다. 이 몇 가지 벌어지는 일들만 봐도 하나같이 개발과 성장을 목표로 합니다. 사람과 생태가 파괴되어도 오로지 이윤만을 바라봅니다. 또 자본을 배 불리는 일에 정치권은 열심이구요. 그렇다면 탄소중립위원회는 왜 만들었나요? 엉터리입니다. 생태환경의 악화는 모든 생명체를 위험과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개발과 성장 위주의 사회적 발전은 이제 한계에 직면했다고 보는데, 오직 자본의 집착일 뿐이에요. 모두가 제대로 살아가려면 무분별한 이러한 일들은 당장 중단되어야 합니다. 생태적 복원이 이뤄지는 방향으로 나가야 하구요. 이를 위해서 저는 돈과 권력으로부터 모두가 벗어나려 애써야 가능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러한 다짐으로 같이 연대하고 투쟁합시다. 투쟁!!” 아이쿠.. 2분이 지났구나. 어쩔거나. 그래도 랩은 해야지. 이제그만 (열창: 이제그만) 모든 생명체를 위험과 죽음으로 몰아가는 개발 이제그만 (이제그만) 모든 생명체를 위험과 죽음으로 몰아가는 성장 이제그만 (이제그만) 지방 희생을 강요하는 개발과 성장 이제그만 (이제그만) 무분별 해 무분별 해 개발과 성장 이제그만 (이제그만) 다같이 살자 연대 연대 (연대) 다같이 살자 투쟁 투쟁 (투쟁) 집회 참석자들과 함께 열창을 하였습니다. 부디 시민들에게 이 외침이 잘 전해지기를... 6대 요구 발언은 정부의 기후 대응의 문제,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 생태 파괴, 기후위기와 재난에서의 존엄한 삶의 권리에 대한 내용으로 다양한 주체들이 맡아주셨습니다. 청소년 발언은 별도로 공연과 함께 진행되었어요. 결의문 낭독 또한 청년과 여성, 교육 노동자, 장애인, 시민의 의지를 담아 진행되었습니다. 이어 참가자들은 시내를 돌아 충북 도청까지 행진하였습니다. 방송 차를 선두로 손수 만든 각종 피켓과 현수막을 펼쳐 보이며 함성과 함께... 상당공원 사거리에서는 다이 인(die-in) 퍼포먼스라고 해서 다 드러누웠습니다. 기후재앙에 대한 경각심을 알리려고요. 대열은 도청 뒷마당에 집결하여 민주노총 교육공무직노조 충북지부장의 감동적인 연설로 마무리하였습니다. 매년 행사로 진행되는 기후정의행진은 이제 싹이 튼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기후위기라는 하나의 이슈에 지역의 다양한 주체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서로가 단절되어 있던 지난 시기의 아쉬움을 떨쳐내고 있습니다. 또 하나 기후위기가 이제는 시민들이 피할 수 없는 시선이 되었다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부족하지만 기후재앙이라는 난제를 두고 기후정의행진이라는 프로그램의 역할이 새삼 중요하다는 것도 말입니다. 싹이 트면 꽃을 피우기 위해 그만큼 뛰어야 하겠지요. 대다수 사람이 원하는 ‘생존을 넘어선 풍요’. 옛날보다는 물질적으로 풍요롭다고 하지만 생존 살이를 해야 하는, 실제로는 여전히 생존살이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등바등 치열하게 경쟁하며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을 보면요. 그래서 기후위기라는 악재를 못 보거나 애써 피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개발과 성장만이 생존살이를 벗어날 수 있을까요? 두꺼운 벽으로 둘러싸인 현실이지만, 기후정의행진을 비롯한 여러 사회적 관심과 지지, 참여를 통한다면 풍요라는 희망이 좀 더 다가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의 연결과 연대를 통해 이 난관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번 청주에서의 ‘충북기후정의행진’은 행사를 준비하셨던 기획단과 지역의 여러 단체와 구성원분들, 가까이로는 탈춤 부스를 준비하고 함께한 ‘해방클럽’ 친구들, 그리고 집회 참석자분들과 지나가며 응원하시는 시민들의 마음과 수고의 현장이었습니다. 다시금 빛나는 연대를 비추어 주신 여러분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다음은 충북 9.27 기후정의행진 참가자 결의문입니다. -중략- 오늘 우리는 악화일로의 기후위기와 불평등을 넘어, 민주. 평화. 평등. 생태를 기치로, 인간과 비인간 존재의 생명권과 평등하고 존엄한 삶의 권리를 위해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하나, 기후정의에 입각한 온실가스 감축과 전환을 실현하자. 하나, 핵발전과 화석연료 시대를 끝내고 공공재생에너지 확대로 정의로운 전환을 이뤄내자. 하나, 반환경. 반기후. 반노동 정책인 반도체특별법과 AI 산업 육성을 재검토하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개발과 토건사업을 멈추자. 가을이 솔솔 지나가고 있습니다. 누구나 허덕이지 않는 풍요! 추석 명절을 맞아 풍요를 다시 떠올려봅니다. 독자님들 모두가 즐거운 추석 보내시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앗싸 탈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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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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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연대 순례하는 청명3] 9.27 기후정의 행진을 청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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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되지 못한 이장, 김길동
- 오늘 나는 김길동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그는 1916년 경남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문하마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1959년 5월 10일 생을 마쳤다. 내가 그에 대해 처음 들은 건, 지리산종교연대가 사단법인 숲길과 공동 주관해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에서 진행했던 <지리산생명평화기도회>에서였다. 그날 성염 선생님(전 로마 교황청 대사)은 “우리 마을에 조그만 공덕비가 있어요. 학살사건 때 동네 사람들을 전부 살렸어요.”라고 말씀하셨다. 장마가 막 시작된 날이었다. 그날 이후 ‘김길동’이라는 이름이 자주 떠올랐다.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그래서 어떻게 살아갔는지가 궁금해졌다. 그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지리산인』 (편집장 김인호) 편집위원들과 함께 문하마을을 찾아가 성염 선생님과 전순란 선생님을 만났다. 그날 역시 장맛비가 내렸다. ↑성염 선생님 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지리산인』 편집위원들 문하마을은 법화산 자락에 자리해 지리산을 바라보고 있고, 앞으로는 엄천강이 흐른다. 내가 이곳을 처음 찾은 것은 2000년대 초반이다. 초등학교 아이들과 지리산을 종주한 뒤 실상사에 들러 도법스님을 뵙고, 마을청년회가 폐교를 고쳐 운영하던 숙소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 뒤로도 성염 선생님을 뵙기 위해 몇 차례 더 찾아왔기에, 문하마을은 내게 낯설지 않다. 올 때마다 하늘에는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던 기억이 남아 있다. ↑하늘에서 바라본 엄천강과 문하마을 문하마을 뒷산에는 고려 말 충신 이억년의 묘가 있다. 성염 선생님은 마을 이름의 연원을 이렇게 설명했다. “고려 말 나라가 망하자 이백년, 이억년 같은 분들이 지리산으로 들어와 이 부근에 살았지요. 그래서 산골임에도 ‘문하(文下)’라는 이름이 붙은 겁니다.” 그 말처럼, 문하마을은 예로부터 바른 길을 지키며, 함께 살아가는 가치를 소중히 여겨온 곳으로 전해져 왔다. 성염 선생님의 집은 마을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해 지리산이 한눈에 펼쳐졌다. 그곳에서 우리는 김길동 이장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성염 선생님은 마을에 살았던, 이제 아흔을 훌쩍 넘긴 아주머니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했다. ↑논과 숲으로 둘러싸인 문하마을 이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그가 이장을 맡았던 1950년대 전후 지리산 자락에서 벌어진 일을 알아야 한다. 1951년 초, 산청·함양 일대에서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 국군은 빨치산을 도왔다는 이유로 주민들을 모아 총살했는데, 아이와 노인, 여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공식 기록만으로도 천 명이 넘는 희생자가 있었다. 전쟁 속에서 적이 아닌 자기 나라 주민이 군의 총에 쓰러진 사건이었다. 추모공원이 세워졌지만, 가족을 잃은 이들에게 그날의 상처는 여전히 생생하다. “김길동이라는 분은 당시 이장이었어요. 군인들이 ‘집에 사람이 있으면 모두 죽인다’고 해서, 중풍 걸린 시아버지를 업고 나온 며느리도 있었다고 하지요. 그날 군인들이 기관총 앞에 주민들을 세워 놓고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이장이 달려가 ‘왜 사람들을 죽이냐’며 항의하며 막아섰답니다. 목숨 걸고 총구 앞에서 버틴 겁니다. 그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살 수 있었어요. 바로 아래 한남마을부터는 100여 명씩 세워놓고, 이장이 손가락질하면 아기든 노인이든 끌려가 총살을 당했지요. 산청·함양 추모공원에 가보면 약 1,300명의 희생자가 기록돼 있습니다. 그중 7세 이하 아이들까지 ‘공비’라 불리며 죽임을 당했고, 그걸로 훈장을 받은 사람도 있었어요.” 그 시절에 토박이가 아닌 사람이 이장이 되었다는 점은 놀라웠다. 그가 문하마을에서 태어났지만 집안의 뿌리가 순창이라, 어떻게 이장이 될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자, 전순란 선생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아랫집 정 선생도 몇 차례 출마했지만, 토박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뽑히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35년을 살아도 여전히 외지인으로 불릴 만큼, 마을에서는 토박이가 아니면 이장이 되기 어려운 분위기라고 덧붙였다. 이에 박두규 시인은, “아마도 인품과 생활 속 태도로 마을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보탰다. 전순란 선생님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장이 그렇게 큰소리를 치며 막아설 수 있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어요. 군인들이 들어오기 전날, 소를 잡아 장교들에게 대접하면서 ‘우리 마을은 죄 없는 사람들이니 그냥 지나쳐 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 후에도 평생 마을을 위해 힘썼지요.” 전순란 선생님의 말대로, 그는 한평생 마을을 위해 헌신했다. 장사로 번 돈으로 땅을 사서 마을에 기증하며, “내가 평생 여기서 살았으니 마을 사람들에게 남긴다"고 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정작 마을 사람 누구도 김길동 이장의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제는 그를 기억하는 이도 거의 없다. 마을 입구의 비석만이 그가 살았음을 전해준다.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왜 마을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이야기하지 않는 걸까. 이 질문에 대해 성염 선생님은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셨다. “그 무렵 지리산은 빨치산 토벌 작전이 이어지던 지역이었습니다. 주민들은 낮에는 군인들의 검문과 의심을, 밤에는 산에서 내려온 무장대의 요구를 동시에 겪어야 했습니다. 어느 쪽에도 피해를 입을 수 있었기에 말조심과 침묵이 일상이 되었고, 마을은 늘 불안 속에 살았습니다. 지리산은 아름다웠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전쟁과 두려움의 공간이었지요. 그래서 주민들 마음엔 늘 복잡한 두 감정이 공존했습니다. 부모·조부모가 살아남았다는 고마움, 그러나 동시에 ‘빨갱이를 살린 빨갱이’라는 낙인이 남아 있었던 겁니다.” “빨갱이를 살린 빨갱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빨치산들이 와서 쌀 보급해가고, 지리산 골짜기마다 아지트가 있었거든요. 백무동의 ‘하동바위’ 부근에 빨치산 본부가 있었고, 그 근처에서 토벌대와 교전이 벌어졌어요. 그래서 주민들 인식 속에는 ‘빨갱이가 산 곳, 빨갱이가 드나든 곳’이라는 기억이 남아 있는 겁니다. 결국 부모가 살아났음에도, 의식 속에서는 ‘빨갱이 마을’이라는 딱지가 붙은 거죠. 김길동 이장은 문하마을에서 태어났지만, 집안의 뿌리가 전라도여서 외지인 취급을 받았고, 낙인도 더 무겁게 작용했습니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어떤 사람에게 붙은 꼬리표가 그 사람의 다른 면모를 가려버릴 때, 그것을 ‘낙인’이라 불렀다. 김길동 이장은 마을을 살린 이장이었지만, 동시에 ‘빨갱이를 살린 사람’이라는 딱지를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기억에서 멀어졌고, 이야기는 쉽게 입에 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염 선생님은 그를 ‘의인’이라 불렀다. 잊힌 이름 뒤에 가려진 그의 용기와 희생이야말로 마을 사람들을 살린 힘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이 잊힌 이유는 단지 과거의 문제가 아니었다. 전쟁의 상처는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았다. 성염 선생님은 버스에서 만난 한 노인의 술기운 섞인 고백을 통해, 그 기억이 여전히 사람들 마음속에 남아 있음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작은 비석만이 그날의 이야기를 짧게 기록하고 있다. “1951년 2월 8일, 군인들이 주민들을 집결시켜 총을 겨누자, 김길동 이장은 웃옷을 벗어던지며 ‘죄가 있다면 나를 죽이라, 무고한 주민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의 호소 덕분에 주민들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마을 입구의 김길동 이장 비석 김길동 이장은 본디 이곳 사람이 아니라는 한계를 넘어 마을의 신뢰를 얻었고, 목숨을 걸고 주민들을 지켜냈다. 그러나 전쟁의 시대는 그의 공적에 영광 대신 낙인을 남겼다. 그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일은 한 사람의 행적을 기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전쟁의 폭력과 그 속에서 잊힌 용기를 직면하는 일이자, 우리가 어떤 역사를 기억하고 이어가야 하는지를 되묻게 한다. 사진_ 김인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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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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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되지 못한 이장, 김길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