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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핵과 핵발전의 모든것' 김혜정 지속가능발전연구센터 공동대표님의 강의
    '핵과 핵발전소의 모든것!' 구례에서 '속 깊은 간담회' 일정으로 김혜정 지속가능발전연구센터 공동대표님의 강의가 있었습니다. 한국과 세계의 에너지 현황,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오염수 방류, 현정부의 친원전 정책, 양수발전소 문제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강의 내용이 깁니다. 전체를 보시기 힘들면 아래의 타임코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00:00 인트로 00:52 한국의 에너지 현황 - 값 싸고 효율은 낮다 03:00 세계의 에너지시장 흐름- 뒤쳐진 한국 06:24 후쿠시마 원전사고 08:24 후쿠시마 원전 사고 오염수 문제 11:09 핵종 제거는 안되는 알프스 18:13 오염수 방류가 한국에 미치는 영향 21:07 핵폐기물의 해양 방류를 반대했었던 일본 21:41 정권에 따라 입장이 바뀌는 해양수산부 23:04 적반하장 대한민국 정부 24:28 월성원전 인근 주민 소변의 방사능 검출 27:29 핵에너지시대 70년, 고준위핵폐기물처분장 운영중인 나라는 없다 30:48 기후변화와 핵발전소 31:18 냉각수 온도 기준을 높인 한국 원전 31:55 이상기후는 원전 안전을 위협한다 34:51 대한민국 친원전 에너지 정책 38:26 폐쇄 예정이었던 노후원전 수명연장 41:13 내용도 볼 수 없도록 먹칠한 방사선환경영향평가서로 의견을 수렴? 43:23 미국은 ‘알기쉬운 문서 작성에 관한 법률’을 제정, 알기쉽게 문서 작성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45:14 투명성이 핵심인 프랑스 원자력안전법 46:40 소형모듈원자로(SMR)은 일반 원전보다 더 비싸고 더 많은 핵폐기물 발생 48:08 양수발전소는 반환경적, 비경제적 시설 52:14 한국의 재생에너지 현황 53:22 원전중심 송변전설비추진계획 57:50 재생에너지 접속 차단과 신규 재생에너지설비 허가 중단 1:00:35 분산에너지 정책/기후변화 대응에 반하는 양수발전 1:01:13 공급 위주 수도권 중심 전력정책을 전환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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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20
  • 지리산 둘레길을 1년 5개월만에 다시 걷다
    지리산 둘레길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면 몸과 마음이 점차 느려집니다. 그것은 걸음 속에 성찰이 깃들고, 넉넉한 지리산의 품격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레길에서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만나고 둘레길에서 지리산 기슭의 풍경과 마을에 가깝게 다가갑니다. 지리산 둘레길 1코스에서 4코스까지 걷고 발걸음을 멈추었다가 1년 5개월만에 지리산 둘레길 5코스 동강 수철 구간을 걸었습니다. 지리산 둘레길 1코스, 2코스 지리산 둘레길 3코스 지리산 둘레길 4코스 지리산 둘레길 5코스 이들 지리산 둘레길을 걷기 탐방하고 쓴 이제까지의 기사를 펼쳐보았습니다. 지리산 둘레길 5코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061976 지리산 둘레길 4코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912108 지리산 둘레길 3코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908821 지리산 둘레길 1코스, 2코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904363 지리산 둘레길 6코스 구간은 산청 수철 마을에서 경호강 강변에 자리 잡은 성심원까지 12km의 둘레길입니다. 이 구간에서 쏘가리와 꺽지가 헤엄치는 경호강을 따라 가며 지리산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힘차게 뻗어 내린 웅석봉의 산줄기가 연출하는 멋질 풍광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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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09
  • 죄 없는 서시교를 죽이는 이유
    어제 엄청난 폭우가 내렸다. 브러시는 연신 유리창을 닦아 냈다. 하지만 비의 양에 비하여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앞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도로 위로 산에서 내려온 물이 계곡처럼 물이 쏟아져 내려 도로는 마치 계곡처럼 보였다. 더구나 왼쪽 라이트 하나도 고장이 나서 잘 보이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물이 자동차 바퀴 중간까지 올라오는 곳도 있었고 그때 경고등이 들어왔다. 경고등이 4번 들어왔고 그때마다 나는 차가 서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식은땀이 났다. 앞에 가던 승용차는 운행을 포기했는지 높은 곳에 주차했다. 다행히 고개 하나를 넘어가니 비가 그쳤고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오늘 오전에 구례 서시교 관련한 구례 군민 토론회가 있었다. 구례에는 이름도 예쁜 서시천이 있다. 2020년 구례 수해 당시 서시천으로 섬진강 물이 역류하여 구례읍이 침수되는 홍수 피해가 있었다. 보통 지류의 하천이 본류인 강에 물이 흘러 강 수위를 높이는데 서시천에 합류지점이 휘어져 있다 보니 섬진강 물이 원심력에 의해 오히려 서시천 방향으로 역류한 것이다. 거기 다가 합류지점 근처에 수중보가 설치되어 있어 수위를 높이는 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인하여 익산지방관리청은 이 서시천에 있는 서시교를 철거하려고 하고 있다. 서시교는 구례군민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다리다. 대부분의 외지 관광객도 이 길을 통해 구례읍으로 진입한다. 구례에서 유일하게 신호등에 들어오면 차가 4-5대라도 있는 곳은 유일한 곳이다. 그 만큼 구례군민들에게는 사용 빈도가 높고 중요한 다리다. 서시교는 침수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다리가 어찌 된 영문인지 철거 결정이 내려졌다. 더구나 이 철거 결정에 구례 군민 80%가 찬성했다고 한다. 찬성한 주민은 186명이다. 그 중대한 결정에 가장 결정적 영향을 미친 그 작은 숫자도 놀랍지만 어떤 질문을 했는지도 중요하다. 정보를 모르는 상태에서 설문조사는 질문자의 의도에 따라 원하는 답을 얻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서시교를 그대로 둘 경우 다시 홍수 피해를 당하는 것이 확실하다. 그래도 서시교를 그대로 두겠습니까? 라고 묻고 1번 서시교 존치 2번 서시교 철거 후 다른 곳에 설치 이렇게 질문 한다면 당연히 2번을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시교를 그대로 둘 경우 서시교로 물이 범람은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만한 일이고 그것도 댐관리를 잘하면 없을 것이다”라고 이야기 한 다음 질문 했다면 2번을 선택할 군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실제 설문이 이렇다.고 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이렇다는 것이다. 사실 구례군이 2020년이 수혜를 입은 것은 자연재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댐 관리를 잘못한 것에 있다. 예비 방류를 해야 했는데 무리한 물욕심에 만든 인재다. 왜냐하면 태풍 루사때는 더 많은 양의 비가 내렸다. 당시 구례 읍에 침수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기 위한 일이 결국 서시교 철거까지 온 것이다. 멀쩡한 다리를 철거하고 1.2km를 우회하는 도로를 만들어 구례군민에게 불편을 주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결정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그들은 멀리 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불편은 그들에게 닿지 않고 그들은 편리한 방식으로 결정을 하고 예산을 사용하고 집행하고 용역을 준다. 그런 일을 아무렇지 않게 결정해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기 때문이다. 물 관리를 잘못해 생긴 인재를 회피하기 위해 3천억 이상 돈을 사용했고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 인재가 아니라 자연재해임을 주장하기 위한 변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제 그 많은 비가 내렸지만, 홍수는 없었다. 며칠 전부터 섬진강 댐은 많은 양의 물을 방류했고 홍수가 날지도 모른다고 연신 문자를 보냈다. 역시나 아무 일도 없었다. 구례군민은 불편이 없는 새로운 대책을 세워 달라고 익산청에 요구하고 있고 익산청은 답은 없는 상태다. 한 번 결정한 것을 번복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자신들이 전문가이고 전문가가 선택한 방향이니 받아드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생기면 다른 곳으로 발령을 받고 가버리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되니까... 그리고 2020년 수해 당시 서시교로 물이 범람 하지도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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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8
  • 수박밭 그 사나이 " 조 승 현"을 기리며
    농부 조승현을 만난 것은 지난 2008년 7월이었다. 그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수박 때문이었다. 수확을 며칠 앞둔 그는 갑자기 판로가 막히게 되었다. 약속했던 업체가 수박을 가져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수소문해서 내 전화번호를 알아내 전화를 했다고 했다. 그는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사무실로 찾아왔다. 수박은 출하시기를 늦추기 힘들고 보관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갈 곳 없던 유기농 수박에 나에게로 왔다. 그와 함께... 그리고 수박을 팔기 시작했다. 그의 사연을 들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수박을 모두를 판매할 수 있었다. 그는 택배를 보내면서 100g이라도 모자라면 그 안에 모자란 돈을 넣어 보냈다. 그는 신뢰를 보여준 소비자에게 다시 신뢰로 보답했다. 그의 수박덕에 유난히 더웠던 2008년 여름은 시원했다. 하얀 러닝에 검정 고무신은 그의 "교복"이었다. 이 모습이 내가 그를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다. 아이는 컸고 그는 그만큼 나이를 먹었다. 그는 하동군 횡천면에서 노모와 아이들 셋 그리고 서울에서 시집온 아내와 함께 살았다. 그의 아내는 서울에서 태어나 도자기를 만드는 일을 했다고 한다. "3년 안에 가마를 만들어 준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말한 세월이 20년 넘게 흘렀다. 가마는 없다. 그녀는 농부가 되었다. 흙 만지는 것으로 좋아했으니 흙에서 사는 것이 좋지 않으냐? 는 조승현 씨의 말에 그녀는 미소를 짓는 것으로 답했다. 좋은 것인가? 아닌 것인가? 묻고 싶었다. "농사를 지어서는 몇 백만 원 하는 가마를 만들어 줄 수 없더군요. 한해 농사짓고 아이들 키우는 것도 힘이 들어요. 그래도 농사를 짓는 것은 좋아요." 그는 젊어서는 유럽 배낭여행을 다니기도 했고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고 했다. 그는 특허도 받았다. 벼를 이용한 액비다. " 비싼 비료를 사용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게 해서 농사를 짓는다. 다른 것은 넣지 않아요. 유기농에서 허용하는 자재도 쓰지 않습니다. 수박은 수박의 힘으로 크고 저는 최소한의 것을 투입합니다. 그의 수박은 정직했다. 다른 수박과 비교하면 당도가 낮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당도를 올리는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안 하는 것입니다. 수박 본연의 맛에 충실하게 위해서입니다." 그는 시인이다. 그가 수박을 향해 쓴 시들을 공개한다. 손 단디 잡아라 빛을 향한 목마름은 니 책임이다. 수박꽃 늘 명심하십시오 푸른 잎 속에 억센 줄기 속에는 꽃과 향기가 자라고 똠 품고 있다는 것을 꽃은 어데서 왔을까요? 애들처럼 살고 싶다. 주구 엄마는 허리가 끊어진 듯 질질 엉덩이를 끌며 속옷으로 땀을 얼마나 훔쳤는지 얼굴이 벌겄타 세상 넓고 넓은데 온 천지 꽃 중에 봄이 피는데 더워 못살겠네 말을 하면서 수박새끼튼 뭐 한다고 주워 모으느냐? 아이야 저 넓은 봄 가운데로 가라 짧고 짧은게 피는 것인걸.... 쌔가 만발이나 빠질 봄아 봄아 이 쌔빠질 봄아 피려면 혼자피지 혼자서 흔들리지 이 마음도 너 맘이더냐? 오늘도안녕 매일매일 인사해요. 녹색의 마음으로 인사를 받아주죠 파란 안녕! 으리기다 허리를 낮추어 고개를 숙이고 잎이 넘어질세라 순이 엉길세라 허리를 나추어 고개를 앞조리어 보인다. 여기도 까꿍 저기도 까꿍 현대 농업에게 난 믿는다. 사람들은 높은 당도의 맛을 원하지만 단시간에 그것이 통하겠지만 세상 가득 식물들은 수억 년 동안 동물들의 입맛을 결정해 왔다. 어디 열매가 같은 맛 나는 열매가 있더냐 적어도 나의 농법은 식물들 스스로 겪어 냈을 때 그 속의 면역된 물질의 맛이 있다고 생각하지 우리의 어릴 때 입맛을 자주 더듬어 보게 하지 어릴 땐 무엇이든 맛있었지. 왜 그럴까? 우리의 입맛도 세놰 당하고 강요당하고 있지 않을까? 묻는다. 현대 농업에게!! 우리수박맛있어요. 수박 본래의 맛입니다. 수확 앞둔 수박밭에서의 단상 잎이 누렇게 변합니다. 뿌리의 잎은 노화로 기능을 잃어 갑니다. 마지막까지 있은 힘껏 영양분을 수박에게 이동해 줍니다. 수박은 터져라 모든 영양분을 축적합니다. 수박넝쿨은 잎이 마를 때까지 씨앗을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합니다. 포기란 없습니다. 농부는 1년에 몇 번을 태어남과 죽음을 지켜봅니다. 농부는 자연의 섭리에 잘 순응합니다. 사람 만이 내리사랑이 있겠습니까? 자연의 이치나 사람의 사랑이나 참으로 고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몇 해 동안 연락이 없었다. 그는 평생 돈이 안 되는 유기농을 고집했다. 그는 한 번도 부자로 살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연락이 없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렇게 세 번째 해가 바뀌던 어느 날 처음 그날처럼 불쑥 전화를 해서 벌을 키우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를 만나러 갔다. 섬진강을 따라 화개, 하동을 지나고 산청 가는 도로 옆에 있는 그의 작은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오래전 그 모습 그대로라고 저는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 불쑥 찾아와서는 암에 걸렸다고 했다. 그렇게 두 해가 지나고 그리고 올봄 첫 꿀이 나왔다고 그가 전화를 했다. 항상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데이... 한 번 놀러 오시라케도.... 막걸리라도 한 잔 합시데이... 그러게요. 곧 가볼 께요... 봄이 가기 전에 오라고 했는데 나는 가지 못했다. 바쁘지도 않았는데.. 그런데 조승연 농부의 아내분이 연락이 왔다. "조승현 씨가 6월 6일 돌아가셨어요....." "네...?" "무슨 이야기죠..."라고 물었지만 벌써 눈물이 났다. "연락을 하시지 그랬어요?" "아.. 갑작스럽고.. 그러지 못했네요. 죄송해요" " 연락처도 바꿔야 하고 꿀도 남아서.. "이렇게 전화를 했어요...... "농사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어떻게 해봐야죠 "아이들이 있는데요..." 봄이 가고 여름이 오자 그는 떠났다. 착하고 순박한 농부들이 점 점 세상을 떠난다. 나도 이제 이 판에서 떠날 때가 되어간다. 내가 좋아했던 농부들이 땅에서 삶에서 떠나고 있다. 그의 가난하지만 우직하고 정직한 농사를 나는 늘 응원했다. 이제 내가 응원하고 싶은 농부들이 줄고 있다. 선하고 착하고 그래서 보면 눈물이 나던 조승현 농부의 명복을 빕니다. 함께해서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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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2
  • 수달아빠를 만나다
    수달 사진과 영상을 찍은지 10년. 수달아빠 최상두님을 만났습니다. 00:00 인트로 00:26 수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 01:36 꿈에 수달이 나오면 강 무슨 일이 생긴다 02:40 수달을 만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03:14 수달이 로드킬을 많이 당하는 시기 04:16 수달은 집단생활? 개인생활? 04:50 생식기를 물어뜯는 살벌한 수달의 싸움 05:46 수달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사람들의 개발행위 06:53 수달 개체수 감소 07:31 수달아빠라 불린 사나이 08:08 오염된 하천들 수달아빠의 사진과 영상을 만나시려면 유튜브 채널 ‘수달아빠’ https://www.youtube.com/@otterpapas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otterpapa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otterpapa_ji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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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1
  • 포포나무 재배하는 구례농부
    • 사람이야기
    2024-06-11
  • [지리산방랑단] 출가는 처음이라
    시원한 바람이 부는 여름날이에요. 지리산방랑단이 여러분에게 전할 소식이 있어 찾아왔어요. 시린 가슴을 부여잡고 인터뷰를 진행해보겠습니다. Q. 칩코, 오랜만이에요. 들려줄 소식이 있다고 들었어요.안녕하세요. 방랑단 칩코입니다. 제가 맨날 파란 옷만 입고 다녔는데 이렇게 주황색 옷을 입었어요. 이게 절에서 스님 견습생이신 행자님들이 입는 옷인데요. 제가 지난 5월 15일 부처님오신날에 출가했어요.지난 5월 한달간 거창의 붓다선원이라는 곳에서 단기출가프로그램에 참여한 후 결정했어요. 속가의 일을 올해까진 마저 마치고 출가할까도 숙고하였지만, 다시 속가에 가서 ‘올해는 커녕 한달은 더 지낼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과 막막함이 들었습니다. 이미 출가자의 마음으로 크게 전환되어, 하루라도 더 빨리 출가하지 않고는 후회심이 무거울 것 같았고, 더는 환경운동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푸셔서 저의 상황과 판단을 양해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방랑단 활동을 함께 하던 친구들, 들레네 친구들, 방랑단을 지켜보고 응원해주시던 분들께 갑작스러운 소식을 전하는 것이 죄송스럽고 조심스럽습니다. Q. 그렇군요. 칩코에게 지리산방랑단 활동은 어떤 의미가 있었나요?방랑단 활동 자체는 언제나 뜻깊고 즐거웠어요. 이 좋은 방랑단 활동을 더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할 수 있었다면, 제가 그 활동 안에서 제 안의 자만심과 탐욕과 무지를 잘 다룰 수만 있었다면, 떠날 이유가 없었을 거예요. 제가 아직 자리이타가 어려워서, 스스로 잘 서기 위해 출가를 선택했지만요. 저는 돈이나 명예가 없어서 그런지 관계로부터의 출리가 가장 어려웠어요. 전생에 선업을 많이 쌓아야 고귀한 사람들을 곁에 둘 수 있다는데, 저의 선업을 좋은 인연을 맺는데 모조리 탕진한 게 아닌가 싶을만큼, 방랑단을 하면서 소중한 존재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Q. 방랑단 친구들은 칩코의 출가 소식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요? [상글] 사실 언젠가는 칩코가 이 길을 가게 될 것이라고 머리로는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마음은 아직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지만요. 청년인생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들레네 살이, 지리산방랑단, 그리고 구례로 이사오며 상사마을에 모여살기까지 4년이 넘는 시간동안 저는 늘 칩코와 함께 였어요. 지리산에 내려와 사는 삶이 이렇게나 풍요로워진 것엔 칩코의 도움이 컸어요. 재밌는 일들을 함께 기획하고, 주변 이웃들을 다정하게 보살피고, 힘든 일들이 있을 땐 따뜻한 말들로 마음을 헤아려주었어요. 지혜로운 칩코에게 배우는 점이 참 많았어요. 칩코가 보고싶을 때 바로 달려가 만날 수 없고, 칩코가 우리를 필요로할 때 가까이에 있어주지 못해 아쉽지만 칩코가 가고자 하는 길에 응원을 보내고 싶어요.출가라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지 칩코 곁에서 보면서 알게 되었어요. 아직은 마음이 먹먹할 때도 있지만, 칩코가 알려준대로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그 순간과 숨에 집중하며 하루 하루를 잘 보내려고 해요![차라] 기쁩니다. 칩코가 얼마나 수행에 절실한가 옆에서 봐와서 그런지 잘 선택했다고 생각해요. 지금의 칩코에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느껴져요. 한달 출가체험을 다녀온 칩코는 가족, 친구가 아닌 선생, 스승의 모습이었어요. 이렇게 온화해지고 단단해져서 올수가! 하고 놀랐어요. 칩코가 속가일을 정리하러 온 열흘동안 옆에서 알려준게 있어요. 지금 당장 오염된 마음을 내려놓고 행복해지기를 선택하라는거였어요. 그 행복이 집착이나 안락함을 착각한 건 아닌지, 평정으로부터의 행복이 맞는지 구분하는 지혜가 있어야한다고도 했어요. 그리고 타인을 위해 하나의 선심을 베풀지 말고 내 모든 것을 다해 선심를 베풀어야한다고 했어요. 어릴적부터 칩코와 같이 놀고 활동했는데, 그동안 함께의 길을 걸었다면 이젠 이 칩코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스스로의 길을 찾아볼까합니다.방랑단에게 새로운 바람이 불어왔다고 생각하고 이 바람이 저희들 마음에 큰 성장을 줄거라 믿어요. 지금까지보다 절에 방문하는 횟수도 늘겠고 언젠가 붓다선원에 공양보살로 귀의하고 싶어요.(웃음) 방랑단과 칩코는 헤어짐이 아닌 다른 방식의 만남을 이어나가볼게요. [꼬리] 처음 소식을 들었을땐 막막함이 밀려왔어요. 칩코와 함께 한 5년이 너무 행복했어서 칩코가 없는 일상에 제가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두려웠거든요. 근데 한 달간 수행을 하고 온 칩코가 저와는 다르게 어떤 서글픔이나 원망, 고통도 없이 오직 사랑만으로 저를 위로해주는 모습을 보며 칩코가 가는 길을 응원해줄 수 밖에 없단 생각을 했어요. 만물에게 극존칭을 쓰고, 부지런히 무해한 삶을 탐구해온 칩코에게 걸맞는 관계와 생활이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칩코의 출가가 우리 방랑단에게 또 많은 귀감이 될 것 같아요. 많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요. 그리고 언제나 그곳에 칩코가 있을테니 보고싶을때마다 가서 보면 되겠죠?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Q. 앞으로 방랑단의 행보는? 저희도 출가는 처음이라 칩코가 떠난 빈 자리를 소화하는 시간이 충분히 필요할 것 같아요. 다른 친구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따로 또 같이 일상을 보내면서, 방랑단으로서의 활동은 당분간 쉼을 가질 예정이에요. 친구들과 함께 놀이처럼 시작했던 활동이라서, 우리가 또 재밌는 꿍꿍이를 하고 싶거나 놀이가 필요할 때 방랑단은 또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요? 방랑단을 곁에서 지켜보고 응원해주셨던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상 방구룸의 혜신행자(구 쩨꾸), 구리구리, 차라투스트라, 꼬기자였습니다.
    • 사람이야기
    2024-06-11
  • 돈 벌고 싶지 않았던 그녀가 미역장시가 된 이유
    구례장터에서 그녀를 본 적이 몇 번 있다. 구례 축협하나로마트 앞에서 진도산 미역과 다시마를 팔고 있었다. 내가 관심을 가진 이유는 진도산만 판다는 것 때문이었다. 미역이나 다시마라면 다른 곳도 많을 것인데 왜 진도산만 파는 것일까? 라는 호기심 때문이었지만 따로 묻지는 않았다. [구례 축협하나로마트 앞에서 진도산 해산물을 판다 / 사진 김인호] 어느 봄날 점심시간에 장터를 갔는데 그녀는 작은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졸렸던 것일까? 3월의 햇살이 유독 따뜻해서였을까? 햇빛이 유독 잘 비치는 곳이라 그런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따로 묻을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장진희이였다. 다시마 장사꾼에서 장진희라는 이름으로 그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또 하나의 직업도 알게 되었다. 시인… 다시마 장시와 시인은 어울리지 않았다. 시인이면서 장시가 된 그녀의 사연이 궁금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구례는 3일과 8일 장이 선다. 지난 5월 8일 어버이날 장이 끝난 시간에 그녀를 만났다. [구례 장꾼들이 즐겨 찾는 가야식당 / 사진 김인호] 구례장터에 있는 막걸리집 “가야식당”이었다. “막걸리부터 한 잔 주세요." 식당에 들어서자 마자 그녀는 막걸리를 시켰다. 그리고는 한사발을 시원하게 마셨다. “종일 장터에 있다가 끝나면 막걸리 생각이 딱 나더라구요." “힘도 들고 목도 축이고.” [그녀는 식당에 들어오자마자 막걸리 한 잔을 마셨다 / 사진 김인호] 막걸리 한 잔을 하고 나서 그녀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장사를 시작한 것은 12년전이에요.” 아들이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인데 아들이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엄마는 돈 벌 능력이 되는데 비겁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아들에게 돈이 들어갈 시기가 온 것이다. 사실 그전에도 글을 쓰거나 기간제 교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래 일하지는 않았고 글을 써서는 밥을 먹고살 수 없었다. 그리고 교사는 맞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다시마 장사였다고 한다. 근데 어쩌다가 다시마를 팔게 되었나요? “ 제 고향이 진도입니다.” “ 진도에서 태어났고 목포에서 자랐어요." “그리고 서울로 대학을 갔죠.” “서울에서 20년을 살았구요.” “그런데 정말 서울에서 살 수가 없었어요." “경제적으로 힘들고 자본주의에 순응하며 살 자신도 없어 37살에 귀촌을 했습니다.” “그렇게 무주에서 7년을 살았어요. 농사 짓고 살았죠. 돈은 거의 벌지 않고, 농사를 지어 한 달에 6만원 7만원만 쓰면 살았어요. 나름 행복했는데 오래 살지 못했어요.” “그리고 진도로 이사를 갔어요”. 진도에서도 돈을 벌지 않았어요.” 물때 따라 물이 들어오면 산에 가고 물이 멀어지면 바다로 갔어요” 산에 가면 나물이, 바다에 가면 해산물이 있으니 끼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어요.” 돈이 필요하면 서울에서 횟집하는 지인에게 나물이나 해산물을 챙겨 보내면 적당히 돈을 보내줘요. 그것으로 살았어요. 어떻게 보며 그녀는 돈을 벌지 않기위해 부단하게 노력했던 것 같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벌지 않고 살수 있을까? 나도 이런 고민을 해본 적이 있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답을 찾았을까? 찾았다면 다시마 장사꾼이 되지 않았겠지…. 그녀는 자본주의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 아니면 자본주의와 타협하지 않고 끝내 살고 싶었던 사람이었던것 같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자본주의보다 무서운 아들이 있었다. 아이는 학교에 진학해야 하니까.... 오래 전에, 뭐 오래전도 아니지만 “오래된 미래”라는 책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라다크라는 마을에서 자급자족 하며 자본주의 물결을 거부하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 나도 매료되던 적이 있었다. 매료된 이유는 당연하게 자본주의적 삶이 싫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그리고 노동할 권리와 함께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유를 보장받은 결코 자유롭지 못한 삶에 지쳤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기에 끝없이 고통 당한다. 주어진 길이 없어 방황하고 선택을 하면 그 책임도 오롯이 자신이 지기 때문이다. 그녀는 돈에서 자유로워 지고 싶었지만 끝내 그렇게 살지는 못해던 것같다. “장사꾼이 되어서 시골마을을 많이 찾았어요. 거기서 할머니들을 많이 만났죠” “그 분들을 만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오래된 미래의 그런 삶을 마지막으로 사는 사람들이 지금 시골 할머니들 아닐까? 하는 생각요. “저는 그녀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자본주의에 가장 적응하지 않은 마지막 세대가 아니가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녀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즐겁고 좋더라구요. 장사꾼이 좋은게 바로 그 점입니다. 그냥 가면 이야기 하기 어려운데 장사꾼으로 가면 할머니들이 경계를 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세요. 저는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더라구요. 3월 3일 장터 설 쇠고 대보름 쇠고 이른 매화 산수유 피고 찬비 내리는 꽃샘추위 봄을 흔들어대는 세찬 바람 매화 얼리어 색죽이는 된서리 다 지나고 봄볕 따사롭고 바람 잔잔하고 한가한 장터 양지바른 한쪽에 미역장시 해바라기로 앉아 자울자울 졸고 있다. -장진희의 시- [돈 안 벌고 안 쓰고 안 움직이고 땅에서 줏어먹고 살고 싶은 사람 세상에 떠밀려 길 위에 나섰다고 한다. / 사진 김인호] 막걸리와 함께 이야기를 하는 중에 전화가왔다, 네; 안녕하세요. 저 미역장시맞아요. 미역이 필요한데..,,, 장은 못가겠고 언제 한 번와. 네.. 날 잡아서 갈께요, 낼 모레 사이에 갈께요” 그녀는 영락없는 장사꾼이었다. “한 여름이나 한 겨울엔 장에 나가면 손님이 없어요" “그때는 동네 마을회관을 찾아요?” “마을회관에서 장사를 하면 더 잘되거든요? “사실 처음부터 마을장사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어느날 파장을 하고 잠시 쉬려고 마을회관 공터에 주차하고 산책을 다녀 돌아 왔더니 동네 할머니들이 되게 궁금해 하시더라구요, 뭐하는 장시냐고요. 그래서 다시마나 미역을 판다고 하니까 그럼 여기서도 팔라고 하시더라구요. 장터가 따로 있냐고 사람있으면 그곳이 장이라고요. 그렇게 해서 마을장사를 시작하게 되었죠?” 다시마 장사는 어떻게 시작 하셨나요? “제가 진도로 이사하고 나서도 무주로 자주 놀러 갔었어요. 돈이 없어 궁리를 하다가 생각난게 있었어요. 무주장에 가보니 좋지도 않은 다시마나 미역을 삐싸게 팔더라구요. 그래서 진도산 다시마나 미역을 가지고 가서 귀촌한 지인들에게 판매를 했었죠. 그게 인연이 되어 다시마 장사를 하게 되었어요.” “12년 전에 처음 시작 할 때 정말 힘들었죠. 장터 장사꾼은 자리가 생명이니까요. 자리잡기가 쉽지 않았어요. 처음 시작 할 때 돈을 빌려 1,400만 원어치 다시마를 구입해 창고에 넣어놓고 시작했었요. 첫날 10만원어치를 팔았는데 이걸 언제 파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하지만 다행히 자리를 조금씩 잡고 장사도 그런대로 되는 편이라 아들의 학비를 마련 할 수 있었어요. 지금은 다른 장은 안가고 구례장만 나와요. 이제 좀 여유가 생겼어요. 아들이 다 컷으니까요.” 앞으로 하고 싶은 것이 있나요? “최근에 “전라도닷컴”이라는 잡지에 장터 이야기를 3년간 연재했어요. 장사를 하다 보니 하나하나 기억되는 순간들이 있거든요. 12년간 장사를 하며 느낀 점들, 그동안 살면서 기억되는 순간들을 3년간 풀어서 글을 썼어요 그러고 나니까 마음이 가벼워졌어요. 쌓여 있던 것들이 해소된 기분이 들어요.” “그리고 논개 이야기를 장편 소설로 쓰고 싶어요. 무주에 살 때 장수에 있는 논개사당에 자주 가봤어요. 동네 할머니들이 논개노래를 부르시더라구요. 논개에 관심이 생겨서 논개에 관한 자료를 조사하고 있어요.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쉽지 않지만 이제는 좀여유가 있으니 해보고 싶어요.” [자본주의 최후의 보루는 장터 아닐까요? 사진 김인호] 장사는 계속 하시나요? “장사는 팔십 먹어서까지 하고 싶어요. 재미가 있거든요, 장터에 가면 팔십 넘은 할머니들이 장사 하고 있잖아요. 저도 그렇게 늙고 싶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막걸리집에 나섰다. 그녀는 남은 막걸리를 살뜰하게 챙겨 식당을 나왔다. 막걸리는 따로 쓸 용처가 있다고 했다. 파장한 장터에는 짐을 정리하는 장꾼들과 마지막 장을 기웃하는 사람들 몇몇이 보였다, 어둠과 함께 5월에 초록이 노고단에서 구례로 내려오고 있었는데 그녀의 다시마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푸른 진도 바다에서 건져져 돈없는 그녀에게 희망이 되어준 다시마와 미역들이 초록물결처럼 너울거린다. “자본주의 최후의 보루는 장터 아닐까요" “가게를 마련할 돈도 없는 가장 가난 한 사람에게도 희망이 되어 줄 수 있는게 바로 오일장이죠. 물건만 있으면 가게세도 세금도 없는 곳, 그래서 누구나 자신의 물건을 자신의 가격으로 팔 수 있는곳, 돈 없는 가난한 사람도 돈을 얻을 수 있는곳 말이죠.” 그녀는 3일과 8일 구례 농협하나로마트 앞에서 진도산 미역과 다시마를 팔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 자리에 앉아 자울자울 졸며 시를 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미역장시 #장진희
    • 사람이야기
    2024-05-09
  • [지리산자락책방] 대지가 이끄는 길 따라 한 걸음씩
    퍼머컬처 또는 숲밭을 가꾸고자 하는 사람은 『가이아의 정원』을 멋지게 번역한 사람으로 이해성을 기억할 것이다. 책이 나온 후 십 년이 넘게 흘렀는데 그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우리의 가이아가 신음 소리를 내며 죽어가고 있기에 이해성이 들려주는 오늘의 말을 듣고 싶었다. 그는 의외로 바로 우리 곁에 있었다. 지금은 지리산 활동가로, 그는 그 사이 한 번도 길을 벗어나지 않은 것 같다. 문 : 살아온 얘기랄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해성 : 저는 3년 전부터 ‘지금부터 판타지’라고 하는 이 공간을 운영해요. 카페이자 서점이지요. 이 공간 운영하면서 맡고 있는 부수적인 일들이 있지요. 이를테면 지리산케이블카반대 산청주민대책위에서 사무국장 일을 하고 있고, 올해부터는 필봉문학회에서도 사무국장 일을 하고 있어요. 창원에 마을공동체협력지원센터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서 프리랜서 일을 했었어요. 기자 비슷한데 마을 공동체 활동을 취재해서 기사를 써서 보내주면 활동비로 고료를 주었거든요. 그래서 가게에 출근하지 않는 날에 그런 활동, 말하자면 취재를 하고 가게에 손님이 없으면 그걸 가지고 글을 쓰는 작업을 했었어요. 지리산케이블카반대 일은 ‘이로운 식탁’이라는 소셜다이닝 모임이 있었는데 그 회원들의 의견이 다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한번 목소리를내어보자, 반대하는 활동을 해보자 해서 시작이 되었어요. 그렇게 흘러흘러 어떻게 직함을 가지게 되었네요. (웃음) 처음에는 그럴 줄 몰랐어요. - 총선을 앞둔 장날이라 녹색당원들의 선거운동이 있었다. 이해성씨는 비당원 지지자라고 한다. 산청지역에서 녹색정의당은 362표를 득표했다. 울어야할까 웃어야할까. 문 : 산청에서 태어났죠? 해성 : 아니요. 태어나기로는 인천 어디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는데 정확히는 모르고요. 산청에는 다섯 살 때 내려왔어요. 부모님이 귀농하시면서. 문 : 자라온 과정이 범상치는 않았던 것 같은데? 해성 : 평범하다고 할 수는 없죠. 문 : 책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네요. 『가이아의 정원』이라는 책과 함께 이해성이라는 이름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 같은데요? 물론 그 전에 번역한 책도 있지만. 이 책의 반향이 컸죠? 해성 : 이 책이 10년 전에 나왔어요. 그때 당시에는 반향이 별로 없었어요. 좀 어려운 책이라고 해야 되나, 9~10년 정도 지나니까 지금 반향이 있어요. 읽었다는 분들도 많이 있고 역자를 만나고 싶다고 찾아오는 분도 있고, 만나고 싶었는데 당신이 이 사람이야? 하면서 반가워 하고 그런 분들도 계시고 정원 프로그램에서 추천받았다거나...... 문 : 제가 책 얘기를 꺼낸 이유는, 일반적인 교육과정을 거치지 않고 부모님의 깊은 영향이나 아니면 자신의 성찰의 과정을 통해서 생태주의를 자신의 가치관, 세계관으로 받아들인 새로운 세대가 나타났구나 하는 ‘그런 사람이 다 있어?’ 하는 느낌이 있었어요. 어쨓든 다섯 살 때부터 산청에서 쭉 살고 있는 거죠? 산청을 떠난 적은 없는 거죠? 해성 : 예. 여행 차원에서 간 적은 있지만 주소는 그대로였어요. 떠난 적 없다고 봐야죠. 주옥 : 세상으로 나오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지리산 활동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해성이라는 사람을 몰랐는데 케이블카 반대 활동 속에서 어느 날 정말 혜성처럼 등장을 한 거에요. 저는 어느 신문사 기자라고 생각을 했어요. 제가 모르는 얼굴인데 젊었고 기자처럼 막 왔다갔다 하고 회의하는 자리에도 와서 앉아있고 그래서 누굴까 실은 굉장히 궁금했어요. 그러다가 조금씩 알게 되는 과정에서 어디에 있다가 나타난 걸까 왜 이제야 나타난 거지 생각을 했어요. 문 : 청소년기나 성장기를 구체적으로 얘기해 주면 좋겠어요. 해성 : 부모님이 귀농을 해서 살게 되신 곳이 오부면 일물마을 입니다.거기가 산청에서도 오지로 소문난 곳이에요. 비탈길을 올라가면 산꼭대기에 평평한 곳이 있어서 밭과 논농사를 지을 수 있어요. 이런 산동네에 들어갔는데, 원래 부모님이 연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후쿠오카 마사노부라는 일본분이 계시잖아요. <생명의 농업>이는 책을 쓰신. 그 책을 보고 감명을 받아가지고 직장을 때려치우고 자연주의적인 삶을 추구하겠다, 자급자족을 하겠다, 이러면서 내려오신 거예요. 진주에 집을 구해 살면서 여기저기 다녀보다가 그 동네를 선택해서 들어간 거지요. 그때 당시에는 동네에 차도 한 대도 없었고 부엌도 싱크대가 없이 부뚜막에서 밥을 해먹는... 전기는 들어왔어요. 문 : 어머니, 아버지가 의견이 완전히 일치하셔서? 해성 : 일치하셨겠죠. 저는 어렸을 때니까 속사정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일치하셨으니까 들어오신 거죠. 그 동네는 당시 여러 가지 작물들을 심어서 주민들이 먹거리는 자급을 하고 동시에 환금작물을 재배하거나, 당시에는 양잠을 해가지고 경제를 영위하는 형태의 동네였어요. 그런 모습을 보고 부모님이 그 동네를 선택하셨나 봐요. 문 : 부모님 연세가? 해성 : 60대 후반, 70 이렇게 되셨어요. 그래서 집집마다 누에를 키우는 별채라고 해야 되나 그런 걸 지어가지고 불을 때고 했는데, 지금은 누에를 안 키우지만 그런 건물들이 남아서 창고로 사용하는 경우를 볼 수가 있죠. 잠사라고 할 수 있지요. 그 바닥을 흙으로 마감을 했는데 누에를 키우려면 거기에 시멘트를 발라가지고 불을 땔 수 있게 한 거에요. 따뜻해야 누에가 클 수가 있으니까. 어렸을 때에는 누에를 쌓아놓고 투명해지면 골라내고 그런 일들을 동네아주머니들 도와서 하고 그랬죠. 그런 기억이 있어요. 부모님은 문명의 이기를 가지고 들어가서 그게 하나씩 고장날 때마다 하나씩 안 쓰게 되었어요. 처음에 티브이 가지고 들어가서 안테나 부러지면 안 보게 되고 세탁기 고장나면 안 쓰고 냉장고 고장나면 역시 안 쓰는 식이었어요. - 지리산 케이블카 반대 논의가 시작된 이로운 식탁 모임. 왼쪽부터 영권, 해성, 한범, 경옥, 현정. 사진은 현하. 문 : 부모님이 우리나라 생태주의 1세대 이전 0세대라고 할 수 있겠네요. 후쿠오카 마사노부가 소개되자마자 여기에 심취한 경우 같아요. 해성 : 맞아요. 그분 책을 번역한 최성현 선생님과 자연학교라는 모임을 만들어서 1년에 네번 정도 모임도 하셨어요. 그 모임을 우리 집에서 하기도 했고요. 제가 어렸을 때였죠. 그 모임 회원 가운데 실제로 귀농을 하신 분들은 얼마 안 돼요. 문 : 쉬운 일은 아니었겠죠. 그 모임을 하시면서 부모님께서는 자신들이 생태주의를 실천하셨을 뿐 아니라 자식에게까지 영향을 미치셨어요. 뭐랄까 생태근본주의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해성 : 모든 것에 자급자족을 추구하셨어요. 먹거리를 자급하고 연료를 자급하고 의료, 문화, 교육까지도 자급을 해보겠다 이런 태도이셨어요.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고 볼 수 있죠. 물론 한계도 있지만... 문 : 부모님한테 어학을 배우신 건가요? 『가이아의 정원』 책 얘기를 해볼까요? 해성 : 이 책을 제가 선정했어요. 친구 집에 가서 이 책을 발견하고 너무 마음에 들어서 소개를 받았어요. 한 챕터를 번역하고 나서 당시 들녘에서 귀농총서를 내고 있었기 때문에 원고를 보냈죠. 검토를 해달라고. 그런데 들녘에서 연락이 왔어요. 자기들이 이 책을 선정해서 옮기고 있다는 거예요. 이은주 선생님이라고, 근데 이분은 농사를 해보지 않으신 전문번역가이시잖아요. 책 내용은 농사와 관련한 전문적인 내용이고요. 농사와 관련한 경험과 지식을 가진 사람이 옮기는 게 낫죠. 그래서 이 두 개의 원고를 비교 검토를 해보고 들녘에서 저로 역자를 바꾼 거지요. 그래도 이현주 선생님이 반절을 옮겼으니까 그 부분은 제가 윤문을 했어요. - '지금부터 판타지'에는 기후위기 시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귀한 책과 자료들이 쌓여있다. 문 : 이 책을 보자마자 매료가 되었다는 거죠? 데이비드 홀그램이 쓴 『퍼머컬처』도 비슷한 시기에 나왔는데 내용이 너무 이론적이어서 읽기가 쉽지만은 않은데 반해서 『가이아의 정원』은 이야기 전개가 흥미진진하다는 느낌입니다. 퍼머컬처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네요. 해성 : 저도 이 책과 같이 해보려고 노력을 했지요. 그대로 못한 부분들도 있고요. 이 책에서는 관찰 과정을 굉장히 중요시하고 있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관찰만 하는 기간이 아주 중요하고, ‘관찰 속에 해답이 있다’라고 하는데 내가 그만큼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관찰의 시간을 보내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뭔가 기획하는 것도 의사결정 과정이 가족 안에서도 완전히 민주적이지는 않지요.(웃음) 즉 어떤 한계가 존재한다는 말이지요. 하고 싶지만 못하는 부분들도 있어요. 이를테면 무경운으로 풀을 둔 채 관리를 하고 있어요. 방치한 게 아닌데, 아버지가 ‘왜 먹는 것도 아닌데 심어놓았냐’고 하시면서 허브를 갈아엎어버린다거나 풀을 다 뽑아버린다거나 이런 일이 발생을 하는 거죠. 그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좀 멀리 간다거나 접근이 어려운 곳에 가서 해야 하는 거에요. 왔다갔다 하는 일이 힘들잖아요. 이렇게 실제로 해보면 예상하지 못했던 장벽에 부딪히게 돼요. 문 : 꽤 독특한 교육과정을 거치셨죠? 해성 : 초등학교만 다니고 중등과정부터는 집에서 공부를 했어요. 주경야독인데 정확히는 아침, 초저녁에 일하고 한낮에는 공부를 하는 거였죠. 문 : 의무교육을 안 해도 괜찮아요? 해성 : 이유가 있으면 안 해도 돼요. 제가 중학교에 들어가는 해에 중학교가 의무교육이 됐어요. 그래서 산청중학교에 적을 두고 계속 입학유예를 했어요. 그걸 3년인가 하면 자동퇴학이 되거든요. 그때는 그렇게 했었죠. 곤란했던 게, 제가 산청중학교에 적을 두지 않으면 학교에두 개 반이 있었는데 하나가 없어져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러니까 학교에서 간청을 하게 된거죠. 반을 유지를 해야 하니까. 그 시절에는 홈스쿨링이라는 단어가 많이 알려지지도 않았고 학교에 다니지 않으면 비행 청소년인 때였어요. 학교 안 가니까 낮에 읍에 돌아다니면 ‘너 왜 학교 안 갔어? 학교 가라’ 이렇게 잔소리가 들어오는 거죠. 그러니까 일종의 대인기피증이 생겨버려요. 설명하기도 귀찮고, 설명하면 ‘너희 부모님은 왜 그러니? 잘못하는 거야!’ 그러면 또 제가 변명을 해야 되는 게 너무 피곤한 거에요. 지금 학교 안 다니는 친구들은 겪지 않는 문제죠. 저는 정말 강력한 태클이랄까 그런 걸 겪었어요. 그래서 몇 년 동안은 거의 두문불출했었어요. 문 : 책을 세 권 번역했고, 그리고 글 쓰는 일을 많이 하시는 것 같네요. 해성 : 그렇죠. 많이 쓴다기보다는, 번역을 하다 보니까 내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문 : 앞에서 요즘 들어 책에 대해서 관심을 표현하는 일이 많아졌다고 했죠? 전반적으로 퍼머컬처를 공부하거나 시도하는 분들이 많아졌기 때문이겠죠? 해성 : 퍼머컬처도 늘었지만 그뿐 아니라 정원, 시민정원사 과정 같은 게 많이 생겼구요. 정원디자인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 많아진 거 같아요. 프로그램 강사들이 이 책을 추천하는 경우가 많아요. 퍼머컬처를 먼저 알아서 찾아본다기보다는. <가이아의 정원>은 농업분야라기보다 기본적으로 조경 디자인 서적이에요. 문 : 산청케이블카반대투쟁에 대한 얘기를 해주시죠. 해성 : 작년 6월 산청군에서 케이블카 신청서류를 환경부에 제출했어요. 이에 우리가 대책위를 조직해서 기자회견을 가졌고 꾸준히 월요일 아침과 수요일 오후 피케팅을 하고 있어요. 공개 질의서를 군에 내고 거기에 대한 답변이 오면 그 내용과 우리의 입장을 기자들에게 알리는 과정에서 제가 보도자료를 작성해서 배포하는 작업을 꾸준하게 했습니다. 저로서는 이렇게 사무국장 일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제가 회의록을 작성한다든지 기록하고 관리하는 일을 전에 좀 해봤어요. 다른 분들보다 제가 컴퓨터로 하는 일, 디자인 작업 등을 할 줄 알다 보니까 실무를 맡게 된거죠. 그 결과 사무국장이라는 직함을 갖게 되었죠. 문 : 지역에 케이블카 이외에 생태, 환경 관련 현안은 어떤 게 있나요? 해성 : 덕산댐 관련 이슈가 있는데 지금 추진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유튜브 찾아보면 황당한 영상이 올라와 있어요. ‘산청의 천년대계 덕산댐’이라고. 덕산댐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이건 거기 사시는 분들도 반대를 해요. 생수공장 문제도 있어요. 기존에 지리산 산청샘물이라고 있는데 취소공을 더 파려고 하는 것이지요. 근데 공청회도 하지 않고 있어요. 그것 때문에 덕천강 물이 마르고 있는데요. 수위가 내려간 게 재작년부터 확연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제가 그쪽에 살고 있지 않으니까 확실하게는 모르지만 듣기에 그렇습니다. 문 : 함께 하는 사람들 얘기를 듣고 싶네요. 해성 : 케이블카 반대운동을 한다니까 후원을 많이 해주시고 그래요. 지역에 계신 분들 가운데 관청과 관련된 일을 하는 분들은 관에서 추진하는 일을 대놓고 반대하지 못하는 입장이더라구요. 그런 분들은 반대 발언은 하지 못하고 그냥 후원을 하시죠. 주옥 : 지리산을 지키는 활동 속에서 어떤 부분은 어쩔 수 없이 내주고 어떤 부분은 기필코지켜야 하는 부분이 있을텐데 그건 어떻게 생각해요? 해성 : 많은 것들이 필수적인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일물 마을에 진입하는 도로가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몰라요. 아마 다섯 번 정도는 될 거에요. 점점 넓혀지고 지금은 아스팔트가 깔려 있으니까 이제는 상황이 종료된 것이겠죠. 근데 이것조차 한번은 우리 집 앞에 언덕을 밀어버리고 직선도로를 내겠다고 해서 반대해서 무산시킨 일이 있어요. 이 일도 지역 주민인 우리 가족이나 이웃들을 따돌리고 공청회를 진행하고 계획을 세웠었어요. 주민이고 내 곁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당연히 막아야죠. 정말 불필요한 일이지만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진행을 해요. 특히 도로공사 같은 경우에. 그리고 바로 아래 동네에 큰 댐을 만들었어요. 저는 몰랐어요. 근데 주민설명회, 공청회를 했대요. 제 경우 윗동네 사람이니까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수몰된 부분이 생기니까 도로를 부수고 다시 내는 건데 사실은 그 저수지도 필요가 없어요. 농업용수라는 핑계가 있지만요. 그게 없어도 다 농사를 지었었거든요. 그래서 어디까지를 양보하고 어디까지 막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정말로 거기 사는 사람들 입장에서 생각을 하고 이게 무엇을 위한 것인가 파악하지 않으면 어려운거 같아요. ‘나는 이제 이 땅을 사용할 일이 없을 거야. 이 땅을 팔 수도 없을 거야. 그러니 보상을 받아야겠어’라고 생각하고 공사를 진행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 경우에는 사실 필요가 없는데 하는 거죠. 목적이 따로 있는데 다른 핑계를 내세우기 때문에 그걸 확실히 알지 못하면 말하기가 어려워요. 그런 사건이 많이 있었어요. 문 : 자본이 굴러가고 우리 사회에 필요하지는 않지만 누군가가 돈을 벌면 하는 거죠. 해성 : 돈 번다는데 왜 반대하냐 이런 논리가 있잖아요.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이다 이런 논리. 저는 지원을 하고 싶다면 1/n로 나눠주는 게 제일 낫다고 생각해요. 이 사회는 인프라가 너무 충만합니다. 주옥 : 이렇게 전면적인 활동에 해성이 뛰어든 내적 동력이 무엇일까 궁금해요. 부모님의 영향이라든지 살아온 과정이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적극적인 활동가로 나서게 된 데에는 또 다른 계기라든지 이유가 있을 법도 한데...... - 인터뷰에 응한 이해성님과 함께 한 주옥, 밤구, 선재 해성 : 활동가 일이 게 제 의견을 표명하는 일이잖아요? 지금으로서는 글 쓰는 활동과 접목해서 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산만하면 피곤해지거든요. 사회적 활동에 대한 관심은 제가 산속에서 가족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10년 동안 아이를 키우면서 해야 할 일이 있고, 그때 할 수 있는 일이 있잖아요. 어떤 일은 못하게 되는 거죠. 아랫동네에 저수지가 만들어지는데 그것도 모르고, 소식을 못 듣고, 그렇게 됩니다. 내 주변 일들을 알고, 넓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싶다는 욕구가 차츰 쌓여온 것이겠죠. 아이들도 충분히 크고 저도 마흔 가까이 되면서 폭발하듯이 전환이 된 것 같아요. 특히 이 가게를 하게 되면서. 그게 여러 층위에서 일어났고 사적인 부분들도 있어서 이 인터뷰 자리에서 다 말하기는 어렵네요. 인생이 2막이라고 한다면, 1막에서 경험하고 쌓아온 것들을 2막에서 좀 더 확장된 영역, 의미 있는 일들에 적용하고 싶어요. ‘하고 싶다’기보다는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있는 것 같아요. 문 : 『가이아의 정원』과 관련된 활동은 있을까요? 해성 : 산청에 ‘042(공간과 사는 이야기)’라는 모임이 있어요. 이 모임 후기를 매번 제가 써서 올리고 있는데, 저저번 모임에서는 이 책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눴어요. 제가 강연자로 초빙된거죠. 거기서 퍼머컬처 공부하는 모임을 하자는 얘기도 나오고 그랬어요. 다만 제가 시간상 가능할지는 모르겠어요. 그리고 지역에서 자기 정원, 텃밭 좀 봐달라, 컨설팅 해달라고 하는 분들이 계셔요. 그래서 가서 살펴보고 이렇게 하면 좋겠다 저렇게 하면 좋겠다 얘기 나누고 그래요. 문 : 홍성에 가보니까 풀무학교가 처음에 만든 정원을 이웃들이 따라하면서 퍼져나가더라구요. 그렇게 생태적 삶의 모델이랄까 그런게 퍼져나가는...... 해성 : 가족 단위의 퍼머컬처를 만드는 방법도 있지만 퍼머컬처가 그런 것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니까 소읍이나 도시의 공동 농장이라든가 군데군데 게릴라 가드닝을 한다든가 또는 퇴비장 사업 같은 일에도 관심이 있어요. 제가 이 가게에서 생활을 하는데 여기에서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를 통에 담아서 배출하지 않아요. 이 뒤쪽에 하나로마트 뒷마당이 있는데 거기가 방치가 되어 있어요. 나무들이 몇 그루 심어져 있고 여름이 되면 풀이 우거지고... 거기에서 퇴비를 만들어요. 그 퇴비를 쓰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는 나무들에게 돌려주면 좋고 해먹을 걸어서 누워있기도 하고요. 고추나 가지를 심어본 적도 있어요. 그런데 사람이 모든 걸 할 수는 없겠지요. 주옥 : 구례에 있는 한겨레생명평화공원도 함께 보고 거기서 활동하는 청년 활동가들도 만나면 좋겠어요. 해성 : 예, 갈게요. 저는 일단 이런 것들을 기사화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이야기를 많이 어떤 정보들이 가닿지 않는 곳에 전해지고, 그때그때 상황이 되는 사람이 적당한 일을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요. 『가이아의 정원』을 소개시켜준 니코라는 친구가 한국에 들어왔거든요. 그 친구는 캐나다에서 공동농장 매니저를 하고 있어요. 여기서 그 친구가 작은 강연회를 했어요. 사람들이 관심도 많고 호기심도 크더라구요. 후기를 제가 써서 올리면 사람들이 그런 곳도 있구나 인식을 하고, 상황이 되면 하겠죠. 그러면 제가 일종의 씨앗이 되는 셈이고... 문 : 조만간 구례에 오시겠군요! 해성 : 실은 지리산사람들 운영위원 함께 하자고 하셔서 거기까지는 못하겠고 그래도 같이 하기를 원하시는 것 같아서 첫 번째 월요일은 비웠어요. 가게를 하면서 1주일에 사흘은 여기 나오고 나흘은 농사를 지었어요. 작년에 5일을 여기 나오게 되면서 농사일에서는 손을 뗐어요. 병행이 불가능해요. 언젠가 이 일을 그만 두고 돌아가서 농사를 짓는 삶으로 돌아갈 수도 있지만, 지금은 경작을 할 수가 없어요. 저는 사람이 농사를 지어야 한다 자급자족적 삶을 살아야 한다고 거의 세뇌가 된 사람이라서 농사를 안 짓는 생활이 죄책감으로 다가왔어요. 머리로는 안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신체적으로 느끼는 반응이 있는 거죠. 지금은 많이 벗어났는데, 농사일을 여전히 좋아하긴 합니다. 문 : 예전에 어떤 강의에서 강사분이 말하길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농사짓는 사람과 안 짓는 사람’ 이렇게 말을 했는데, 저도 그때는 그 말이 아주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식의 언술은 맞지 않는 것 같아요. 해성 : 저 역시 그런 말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것 같아서 싫어요. 그런데 좀 완화해서 농사를 한번이라도 지어본 사람과 한번도 안 지어본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겠지요. 문 : 자본주의 물질문명이 마치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벗어나 살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데 그 결과가 인간을 괴물로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있어요. 문(밤구) : 영성적인 사고나 몸살림같은 거 보면서 산속에서 살면서 그런 것들을 가까이 하게된 계기나 배경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요. 해성 : 몸살림은 아니고 10대 때 요가를 했어요. 원래 제가 몸치였거든요. 일은 해요. 오래 걷기도 해요. 그러니까 지구력은 있어요. 또 보기보다는 힘이 세요. 그런데 춤추라고 하면 못하고 정해진 동작을 따라 하는 것도 잘 못하고 그랬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걸 극복해보자, 몸치를 벗어나자, 해서 처음에는 요가를 했어요. 요가 선생님한테 거의 세 시간 강의 듣고, 그분이 추천한 『요가 디피카』라는 책을 보고, 책 내용 따라 하고 해서 다리도 일자로 찢어졌었어요. 지금은 못 하지만. 그런데 요가는 정적이잖아요. 그래서 그 다음에는 태극권을 했어요. 태극권은 꽤 오래 했죠. 밝은빛 태극권이라는 곳에서 한달의 반은 서울에 있으면서 중국 선생님이 강의한 내용 녹취해가지고 태극권 책 만드는 작업도 돕고 그랬어요. 문 : 앞으로의 계획은? 해성 : 1년 정도의 계획밖에 없어요. 1년 정도는 지금 하던 작업을 계속한다. 그 이후의 계획은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어요. 1년 동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 비전 세우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제가 타로를 해요. 한 삼년 정도 밖에 안 됐어요. 다른 사람들의 삶에 궁금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듣는 도구로 사용했던 거에요.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은 데이터를 모으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세상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그래서 이렇게 데이터를 모으는 작업을 1년은 더 할 겁니다. 문 : 그리고 지리산인에 한 달에 두 번씩 글을 올리는 것도 계획이잖아요? 5년 동안! 해성 : 5년이요? (웃음) 타로에 대한 책도 써야 돼요. 지금 70% 쓰고 있는데 그 다음에 탁 걸려가지고 안돼요. 그것도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올해는 될수록 그 작업을 마무리하고 싶네요. 문 : 타로의 방법론에 대한 책인가요? 아니면 인생에 대한 책? 해성 : 타로에 대한 해설서인데요 인생에 대한 책도 되겠죠. 타로 자체가 인생에 관한 것이니까. 인터뷰를 마치며 타로 또는 그가 풀어놓을 인생에 대한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 사람이야기
    2024-04-17
  • 지리산 화엄사 석축에 담긴 석공의 손길, 잉카의 기술인 듯
    4월 초순 한식 절기에 지리산 화엄사로 향하는 도로와 강변 둑에는 벚꽃이 만개하였다. 구례군 마산면에 있는 이 사찰은 지리산 노고단으로 올라가는 등산 코스의 출발점이다. 국보와 보물 등 많은 문화재를 보존하고 있는 사찰 도량에서 으뜸 건축물인 대웅전과 각황전은 태산처럼 드높은 위용으로 중생에 대한 자비로움을 표상하고 있다. 지리산 화엄사 일주문 (사진: 이완우) 법고루 아래 터에서 당간 지주 두 돌기둥을 살펴보다가, 잉카의 마추피추 석벽과 같은 겹쌓기 석축이 눈에 띄었다. 규모가 제법 큰 바위 표면을 평평하게 다듬고 모서리를 사각, 오각 및 육각으로 정과 망치로 균일하게 쪼아서 이웃 바위와 맞대어 촘촘히 쌓아 올렸다. 아랫돌과 윗돌을 곡면으로 쪼아 맞춘 맞댐은 곡선미가 드러났다. 이곳 석축을 쌓았을 석공의 정성과 기량에 감탄하면서, 기하학적 무늬로 퍼즐 맞추듯 이어지는 이웃 돌과 만나는 조화를 살펴보았다. 석축을 구성하는 바위 조각들의 배열에서 무생물인 바위들도 중생들처럼 얼기설기 인연을 맺고 석축으로 한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지리산 화엄사 법고루 앞 석축 (사진: 이완우) 각황전의 오른편 도량 뜰에 천연기념물 '구례 화엄사 화엄매'가 이슬비를 맞으며 활짝 피었다. 이슬비를 맞으며 꽃잎들을 떨구고 있는데도, 청아한 기상은 여전했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이곳 사찰의 중건과 함께 300여 년의 역사를 같이했던 홍매화 나무는 3월 중순이면 따뜻한 자비의 색채가 어린 꽃망울을 매년 어김없이 터트려 왔다. 무소유의 법정(法頂, 1931~2010) 스님은 "피어있는 것만이 꽃이 아니라, 지는 것도 또한 꽃이다."고 했다. 꽃이 피는 순간도 아름다운 절정이고, 꽃이 질 때도 역시 아름다운 절정임을 화엄사 홍매는 낙화(落花)로써 말없이 이야기했다. 지는 꽃잎을 배웅하면서 청순한 새싹을 돋우는 홍매화가 함초롬히 비에 젖었다. 지리산 화엄사 각황전 옆 홍매화 낙화 중 (사진: 이완우) 화엄사 명부전 옆 오른쪽 도량 뜰에 보리수나무가 연두색 싹을 틔우고 있었다. 연두색의 밝은 색조에 마음이 환해진다. 2천5백여 년 전에 싯다르타 태자는 출가하여 오랜 세월의 고행과 수행을 하였어도 생사에 대한 고뇌와 번민은 여전하였다. 태자는 보리수 아래에 자리 잡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수행을 시작하였다. '깨달음에 이르지 않으면 결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 태자의 희망 어린 초발심은 결국 보리수 열매 같은 굳은 깨달음에 도달하였다. 불교에서 불상이 나타나기 이전에, 보리수나무는 부처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상징물의 하나였다. 화엄사 보리수나무의 새싹에서 수행의 도구인 108 염주로 성장할 꽃눈을 찾아 보았다. 도량에서 보리수나무는 참배객들에 의미 있는 성스러운 나무인데 보리수나무를 알리는 안내판은 보이지 않아서 아쉬웠다. 지리산 화엄사 보리수 새싹 (사진: 이완우) 화엄사 입구의 산기슭 아래 후미진 곳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형식 건물인 남악사(南岳祠)를 찾아가 보았다. 남악(南岳)은 신라 시대 지리산을 일컫는 것으로 남악사는 삼국 시대부터 지리산 산신제를 올렸던 곳이었다. 남악사는 삼국 시대에는 지리산 천왕봉에서, 고려 시대에는 노고단에서, 조선 시대에는 남원부 산동의 갈뫼봉 아래 당동에서 성모 여신(聖母 女神)인 지리산 산신제를 올렸다. 지리산은 두류산(頭流山), 방장산(方丈山), 방호산(方壺山) 및 불복산(不伏山)이라는 여러 이름이 있다. 불복산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려는 이성계의 기도를 지리산 산신이 반대하였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이 전설은 지리산 산신의 정체성을 상징한다고 보겠다. 신라 시대에 화랑들의 수련장이었던 노고단과 천왕봉 등 수많은 영봉을 품은 지리산은 생명력 풍부한 30대 연령의 여신이 품어주는 듯 역동적인 영산(靈山)이다. 지리산의 그 역동적인 여신이 노고단의 노고 할미 이미지로 변형된 때는 언제부터일까? 그늘진 곳에서 이끼가 잔뜩 낀 남악사는 돌길이 이슬비 내린 날씨에 미끄러워서 걷기에도 조심스러웠다. 매년 4월 중순의 '구례 군민의 날'에 남악제(약수제)가 이곳에서 거행된다. 남악사 마당에는 300년 수령으로 추정되는 느릅나뭇과의 팽나무가 밝은 새싹을 틔우고 꽃을 피웠다. 남악사가 밝게 단장되고, 노고할미가 아니라 신라 시대 원화(源花)와 같은 밝고 역동적인 지리산 산신의 이미지를 희망해 본다. 지리산 남악사 팽나무 새싹과 꽃 (사진: 이완우)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 게재(2024.04.08) 되었습니다. 이 기사를 쓴 기자는 문화관광해설사입니다. 향토의 사회, 문화, 역사, 설화와 자연에서 사실을 확인하여 새롭게 인식하고 의미와 가치를 찾아서 스토리텔링으로 간략히 엮어갑니다.
    • 사람이야기
    2024-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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