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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곰1%유람기]시골마을에 자리한 소중한 가치, 느긋한쌀빵
- 뭐 이런 데 빵집이 있나 생각될 정도로 작은 시골마을, 크게 돈 벌 생각이 없구나 싶을 만큼, 주변 풍경은 논밭과 돌담, 마을 리사무소, 노인회관, 골목길, 주택들로 채워져 있다. 빛바랜 레몬 색 벽에 짙은 초록색 문, 건물 앞에 놓여 있는 크고 작은 화분들마저도 왠지 수수하고 정겹다. 번듯하고 깔끔한 도시와는 사뭇 다른 모습들 때문일까? 왠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게다가 가게 이름도 느긋한 쌀빵, 그리고 느긋한 점빵이니. “이건 제 말이 아니라 손님들 말씀이에요. 가게 이름부터 힐링이 된다고. 하하.” 유기농 쌀가루를 이용해 만드는 건강한 쌀빵 느긋한 쌀빵은 구례로 귀촌한 여성들이 모여 만든 일터다. 처음에는 다섯 명이 시작했는데 지금은 그 중 2명만 남았다. 그리고 새로운 식구가 더해져, 지금은 세 명이 가게를 지킨다. 가게 규모도 작은데 세 명이 근무한다고 놀랄 수도 있지만, 새벽 3시부터 빵을 만들면 저녁 마감까지 감당하기는 쉽지 않고, 빵집 안에 작은 점빵도 있어 할 일이 엄청 많다. 처음에는 감자빵, 백미식빵, 백미햇살빵(모닝빵) 등 세 종류의 쌀빵만 만들어 판매했지만, 지금은 이 외에도 현미식빵, 흑미식빵, 현미올리브치아바타, 야채빵, 흑미팥빵, 초코빵, 유자파운드, 쑥콩크럼블파운드, 마카다미아 말차쿠키 등 15종의 쌀빵이 있다. 새벽 3시부터 빵을 만들어도 11시 오픈 시간에 맞추어 빵을 내놓으려면 결코 느긋할 수 없다는 전언이다. 유기농 쌀가루와 오일, 소금, 설탕 등 가장 기본적인 원료들로 만드는 쌀빵은 우유, 버터, 달걀이 들어가지 않는 비건 빵이다. 오일은NON GMO, 소금은 유네스코 지정 갯벌의 천일염, 설탕은 유기농설탕을 사용한다. 이 외에도 제빵의 재료는 비건 초콜릿, 유기농 콩가루, 유기농 말차가루같이 ‘건강’이라는 키워드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렇다 보니 원재료에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 주재료인 유기농 쌀가루 가격만 해도 밀가루 가격의 10배에 달하니 절대로 밀빵 가격과 비교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이 이어진다. “저희 가게를 찾는 고객들은 건강과 환경이라는 가치에 공감하는 분들이에요. 손님 중에 심한 아토피 손님이 계셨는데,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는 눈빛으로 매장을 방문하셨어요. 그런데 그 다음 방문부터는 눈빛이 달라져요. 그리고 단골이 됐죠. 그 분이 하신 말씀이 있어요. 본인은 여기 빵만 먹을 수 있다고. 건강한 빵 만들어주셔서 고맙다고. 그럴 때 뿌듯함이 느껴지죠.” 규모는 작지만 오밀조밀 알찬 가게, 느긋한 점빵 사실 여느 빵집을 상상했다면, 가게에 들어선 순간 멈칫할 수도 있다. ‘느긋한 쌀빵’ 옆 ‘느긋한 점빵’이라는 간판이 설명하듯 가게 안은 빵과 함께 여러 가지 식료품과 제로웨이스트 물품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점빵’은 사업을 처음 준비할 때부터 계획된 부분이었다. 마을 안의 점방처럼 자리하지만 생협의 건강한 먹거리를 중심으로, 지역 소농들의 건강한 농산물을 함께 판매하는 것. 작은 가게 안에 뭐가 좀 많다 싶지만, 이유 있는 선택이다. “귀촌하면 대부분 작은 텃밭이라도 농사를 짓게 돼요. 하지만 완전히 자급자족하기는 힘들죠. 사먹기는 해야 하는데, 지역의 건강한 농산물들을 사고 싶은데, 방법이 없을까 생각한 거죠. 그런데 또 소농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 분들은 판로를 고민해요. 그러면 지역의 건강한 농산물을 생산하는 분들과 그런 농산물을 사길 원하는 소비자들을 연결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겠구나, 그러면 우리가 만들자, 이렇게 시작된 거예요.” 점방 탄생의 배경은 이렇다. 매장 규모가 크지 않아서 지금은 봄나물이나 과일 같은 제철농산물을 선주문 받아서 예약한 수량만큼 판매하는 방식으로 운영한다. 얼마 전에도 곡성의 복숭아와 사과 등을 주문받아 판매했다. 또 첫째, 셋째 토요일에는 가게 앞 공터에서 일종의 플리마켓인 ‘두루다살림장’이 열린다. 작은 규모의 농산물 장인데 텃밭의 잉여농산물을 가지고 나오거나 직접 만든 쨈, 피클, 반찬, 식혜, 막걸리 등을 가지고 나온다. 헌옷이나 소품도 가끔 나오긴 하는데, 판매가도 지나치게 저렴해서 거의 나눔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냥 소소하게 가진 것들을 나누고 오랜만에 만난 이들과 이야기 나누는 장이다. 우리 모두가 공존할 수 있다면 제로웨이스트 물품을 판매한다는 부분에서 이미 눈치를 챈 사람들도 있겠지만, 가게 안에는 환경이라는 키워드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판매되는 상품들의 가격표시는 버려지는 상자나 종이를 이용해 만들고, 빵 포장은 생분해 가능한 포장재를 사용한다. 음료를 포장해가는 컵들도 친환경 제품이며, 텀블러를 이용하는 고객에게는 500원을 할인해준다. 점빵에서 장을 보면 매장 한켠에 비치되어 있는 폐비닐이나 재활용 종이백, 에코백 등을 이용해 포장하도록 권유한다. 손님들은 집에서 나뒹구는 종이백이나 에코백, 장바구니를 모아 온다. 그래서 느긋한 쌀빵 & 점빵을 찾는 손님들은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왠지 모를 자부심과 애정을 느끼는 것이다. 또 ‘반달곰 1% 가게’인 만큼 지리산과 그 안에 스며 살아가는 생명들을 보호하는 활동을 지지하고 연대한다. 커다란 역할은 아니더라도 그저 할 수 있는 작은 무엇이라도 있다면 여력이 되는 한은 하려고 노력한다. 구례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지리산과 섬진강, 반달곰, 수달, 청솔모, 고라니 등의 자연을 가까이 느끼고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성장하기를 바란다. “지금은 다 지난 이야기지만 얼마 전에 가게가 문 닫을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단골손님들과 지인들이 같이 걱정하시고 해결방법을 찾아보자고들 하셨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아, 이 가게는 이제 우리만의 것이 아니구나. 모두의 가게구나 하는.” 지금도 가게를 유지하는 게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이들은 우직하게 걸어갈 것이다. 함께 하고 싶고, 지키고 싶은 것들이 있으니. 반달곰1%는 지리산권 가게들(현재는 구례)이 자발적으로 진행하는 공존프로그램이다. 반달곰1% 가게에 가면 반달가슴곰을 자연스럽게 만나고, 특별히 계획하지 않아도 반달가슴곰 보호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2021년 5개 가게로 시작한 반달곰1%는 2026년 현재 구례 11곳, 하동 12곳으로 늘어났다. 반달곰1%는 ‘유랑인증서’를 발행하고 있는데, 손님들이 반달곰1% 가게에 들러 물품을 먹거나 마시거나 구입하면, 반달곰1% 가게들은 수익금의 1%를 사단법인 반달곰친구들에 기부하고, 그 기부금이 모아지면 사단법인 반달곰친구들과 논의하여 올무수거 활동, 무인센서카메라 구입 등 반달곰 보전활동을 위해 쓰기로 약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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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곰1%유람기]시골마을에 자리한 소중한 가치, 느긋한쌀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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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연대 순례하는 청명2] 새, 사람 함께 살자!
- 빛나는 연대 순례하는 청명 2 새, 사람, 행진 지금은 새만금 신공항 철회를 위한 순례를 다니고 있어요. ‘새, 사람 행진’ 순례는 8월12일 전북지방환경청을 시작으로, 9월11일 서울가정행정법원까지의 일정입니다. 260km. 새만금 신공항 취소 소송이 인용되어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걷고 있습니다. 행진단은 큰뒷부리도요새 모형을 세발자전거에 실어 앞세우고, 깃발과 피켓, 각종 새 모양의 모자를 쓰고 행진을 이어갑니다. 저는 후방 안전을 맡으며 걷고 있습니다. 순례 명칭대로 새와 사람이 함께하는 연대의 길입니다. 간혹 길가에 새가 죽어있는 안타까운 일들이 있어 묻어주매 다니고도 있네요. 일터를 떠나며 9월은 제가 일터를 떠나는 달이기도 합니다. 퇴사라고도 하죠. 그래서 행진 순례 기간에는 주 1일은 센터 일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행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40년 직장 생활 중 25년을 언어치료사로 일해 왔는데, 이제는 접으려 합니다. 8월27일에는 한국옵티컬하이테크 구미공장에서 집회가 있다 하여 당일 행진을 마치고 구미를 다녀왔습니다. 그곳에는 박정혜 노동자 동지가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600여일을 옥상에서 농성을 하고 있었어요(8월29일 내려오셨다고 합니다). 착잡하였습니다. 먹고사는 문제를 놓고 사투가 일상인 자본주의 사회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는지... 30대 초반이였어요. 노동부에서 주관하는 직업적성테스트를 거치면서 언어치료사 직업군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지금은 언어재활사로 부르는데, 자격증을 획득하고 장애인복지관, 사설 기관의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몇 명이 의합하여 청주에서 지금의 센터를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센터명: 노리벗 아동발달센터. 그동안 느낀점: 깔깔깔 즐거웠다. 공동운영자: 심리치료사 유별, 놀이치료사 종숙, 언어치료사 청명(나). 공동운영을 하면서 처리해야 할 안건의 해결은 “한명이라도 원하지 않을 경우에는 추진하지 않는다.”였다. 우리는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지 않았다. 때때로 불편한 감정이 들 수도 있으나 물처럼 흘러가듯 지켜볼 때도 있고, 그렇다고 외면하지도 않았다. 다만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들여다 볼 뿐. 이렇게 17년간을 즐겁게 지내왔던 직장이었답니다. 자급자족 전환을 향해 그런데 제가 2014년 세월호 사태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순례를 시작하고 나서, 단계적으로 노동을 줄이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를테면 25년 전 언어치료 주 6일 근무에서, 2014년 순례와 농사공부를 하기 위해 주 5일 근무로, 2017년 핵발전과 기후위기 심각성이 세계적으로 노출되면서 탈핵과 탈석탄 순례에 집중하기 위해 주 4일 근무로 바꾸었고요. 그러다가 “지금의 경제시스템에서 조금씩 벗어나 보자, 자급자족으로의 전환을 꾀해 보자!”며 주 3일 근무로까지 줄였습니다. 이 때는 저의 경제 환경을 전면으로 바꾸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면 우선 빚이 없어지기도 했고, 지리산에 집과 텃밭이 생겼거든요. 그리고 아이가 학교를 마치면서 소득은 적지만 독립적인 생활을 했기 때문이었어요. 이러한 저의 생각을 접한 가족과 직장동료, 주변 지인들의 반응은, '앞으로 돈을 어떻게 벌 건지?' '청명은 그동안 삶에서 연습을 해왔기 때문에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려 반, 응원 반이었습니다. 이후 주 2일 근무에 돌입하면서 청주에서는 오랜 기간의 월세 집을 정리하였어요. 잠은 퇴사 전까지 센터 치료실에서, 저의 모든 생활도구를 담은 36리터 배낭 하나와 자전거, 침낭 하나를 지리산 집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퇴사 3개월 전부터는 주 1일 근무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자급자족하며 순례를 다니자. 그리고 필요한 만큼만 그때그때 벌기로 하자.” 이러한 결정은 나름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첫째,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이제는 회사를 다니지 않는다는 자체. 둘째, 스스로 적정한 소비라는 목표에 걸맞게 정말 적정한 소비를 할 수 있다는 것. 셋째, 인간만의 삶이 아닌 비인간과 같이 사는 삶에 가까워 졌다는 것. 사실 제가 이렇게 변화하려는 다짐과 실행의 이유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성찰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각박한 지금의 사회에서 제대로 인간답게, 생명체답게 살려면 돌파구를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질문에서 시작된 것이에요. 타인과 타생명체와 서로가 밟고 가야 하는 삶은 정상적이지 않다는 자각입니다. 어느 학자는 이렇게 얘기하셨답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은 어떠한 경로로 갖게 되었는지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라고요. 물질적 풍요와 편리를 쫓는 이러한 생각은 어디에서 만들어졌을까? 이를 만족하기 위한 경쟁과 착취, 빈곤과 타살을 낳는 현시대는 온전하다고 볼 수 있을까? 술과 담배, 주말 산행으로, 바다로, 캠핑으로, 라이더로, 먹방 유튜브로 그 자리를 메운다 할지언정. 포괄적인 대안은 ‘물질과 권력으로부터의 탈출’ 이었답니다. 이에 맞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 과제의 출발은 바로 ‘적정한 소비’였고요, 제가 탈핵과 비움에 집중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입니다. 우리 사회는 네 가지 위기를 맞았다고 합니다. 기후 위기, 핵 위기, 경제 위기, 전쟁 위기 말이죠. 그러기에 ‘에너지 전환’을 대안으로 얘기합니다. 핵과 화석연료에서 재생에너지인 빛과 바람으로요. 저는 이와 같은 질적인 전환과 함께 양적인 전환, 기업과 소비자의 적정한 에너지 소비를 우리 세대, 시대의 과제로 생각합니다. 아무리 재생에너지를 100% 사용한다 한들 ‘과도한 소비’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요. 어느 기후 과학자가 말하듯 지금의 인류가 생활 습관을 바꾸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는 말을 허투루 듣지는 말아야 하겠어요. 연대의 재발견 얼마 전 퇴사 소식을 전체 직장동료들에게 알렸을 땐 서로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실내 책꽂이에는 <<함께가는 길>>, <<세월호>>, <<노동인권>>이 꽂혀 있고, 귀퉁이에는 순례 깃발과 몸자보가 놓여있는 치료실 풍경. 아이들은 깃발을 흔들고, 부모님들은 순례 잘 다녀오라고, 동료들은 조심히 다니고 밥 잘 먹어야 한다고... 눈앞을 스쳐갑니다. 쉬운 일이 아닌데도 늘 응원하고 함께하는 동지가 되어 있는 치료실 사람들. 연대의 재발견입니다. 오늘도 뚜벅뚜벅 ‘새, 사람 행진’ 길을 걸으면서 생존의 갈림길에 서 있는 수라 갯벌의 뭇 생명과 함께 걷고 있는 행진단 분들, 한국옵티컬의 노동자 분들, 노리벗 아동발달센터의 동료와 아이들, 부모님들, 이 글을 봐주시는 독자님들을 생각합니다. ‘빛나는 연대’를 이뤄주신 여러분 고맙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생명이 ‘누구나 즐거운 삶’이 이뤄지기를 다시금 꿈꾸어 봅니다. 수라갯벌 보전하라! 새만금 신공항 취소 판결하라! 새, 사람 함께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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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연대 순례하는 청명2] 새, 사람 함께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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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어난 삶: 이인순 할머니의 기억
-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어난 삶: 이인순 할머니의 기억 구례 냉천리 이인순(1933년생) 님 인터뷰 8월 말이었다. 냉천리 마을회관 옆집이라는 말을 듣고 마을회관 옆에 주차했다. [구례 냉천리 이인순(1933년생) 님. 사진김인호] 냉천리는 구례읍에서 가까운 마을로, 화엄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제법 큰 마을이다. “니 어머니 찾아 묻어 두었응께 언능 가서 찾아 묻어 줘라잉.” 1948년 구례는 밤낮으로 좌와 우가 바뀌는 사상 전선에 격전지였다. 낮에는 경찰이 빨치산의 흔적을 찾아 마을을 헤집고 밤에는 빨치산이 굶주린 배를 움켜쥐며 먹을 것을 찾아 산에서 내려왔다. “우리 어머니는 빨갱이가 아니었어요” “군대 간 오빠 친구들이 찾아와서 밥을 달랑께 준 것이 전부였죠”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챙겨 주면 총살을 당한다고 말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빨갱이가 아니라 며칠을 굶었는지 모르는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찾아온 군대 간 아들의 친구들이었다. 밥을 챙겨 주는 것은 당연한 인지상정이었을 뿐이었다. “알았다면 그렇게 했겠어요.” 서시천에서 끌려가 차가운 총알이 가슴을 관통할 때까지 그 누구도 그 일로 그렇게 허망하게 인생이 끝나 버릴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명지 누빔 저고리를 입고 있었지” “보통 여자가 아니구나! 생각이 들어서 따로 묻어 두었다고 했어!” “그래서 어머니 시신을 수습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어요!” 어머니의 장례는 어떻게 하셨나요? "아버지는 한학자였습니다. 구례에서 꽤 유명하신 분이었죠." “어머니가 평생 고생만 하다 죽은 것이 너무 미안하다면서 아버지는 가장 좋은 땅을 찾아다녔어요" "그리고 또 빨갱이라고 해코지나 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어" "어머니를 지리산 어디 좋은 곳에 묻어 두었다는 말만 했어요." "좋은 곳이니 찾지 말라고 아버지가 그랬어." "그래서 어머니 무덤이 어디 있는지도 몰라…" "잘 계시겠지.” [우리 어머니도 빨갱이는 아니었고 그냥 정이 많은 사람이었을 뿐이었어요. 사진김인호] "어머니를 고발한 사람은 김 형사라는 사람이었어요." "광의면에서 살던 형사였는데 나보다 10살쯤 많았어요." "그놈이 어머니를 밀고했죠." "어머니가 빨치산들에게 밥을 해줬다고…….그때 내 나이가 17살이었어요." 어머님 때문에 그 이후에 피해를 보지 않았어요? 빨갱이 딸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한다거나 하는 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저는 빨갱이라면 아주 싫어했어요." "우리 어머니도 빨갱이는 아니었고, 그냥 정이 많은 사람이었을 뿐이었어요." "그래서 그랬는지 별 피해를 보고 살지는 않았어요." "제 아버지가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거든요." “역사에서 혁명으로 성공한 사람은 없다.” “항상 조심하면서 살아라.” [저는 아버지 말대로 좌익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사진김인호] “저는 아버지 말대로 좌익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중학교 다닐 때도 학생동맹 같은 것을 만들어 활동하는 친구들이 있기는 했지만, 나는 관심이 없었어요." "제가 중학교 3학년까지 다니다가 중퇴했거든요." "제가 구례 중학교 1회 입학생입니다." "해방이 되고 나서 구례에 중학생을 모집한다는 공고나 나왔는데 아버지가 여자도 배워야 한다고 중학교를 보냈어요." "아마 구례 중학교에 여학생이 50여 명 되었을 겁니다." "제가 25번이었어요." “제가 좀 예쁘게 생겼었는지 선생님들이 항상 예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공부도 아주 잘했고요” “3학년이 되니까 남자들이 가만 두지를 않아요” “광의에서 구례읍까지 걸어 다니니까…” “아버지가 위험하다고 졸업을 얼마 남겨 두지 않고 그만두게 되었어요” “그리고 서당에 가서 한문도 배우고” [제가 총부리를 붙잡고 그랬어요." “울 엄니는 빨갱이가 아니라고. 사진김인호] "처음 어머니를 잡으려고 경찰이 찾아왔어요." "어머니에게 총을 겨누고는 빨갱이를 잡으러 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총부리를 붙잡고 그랬어요." “울 엄니는 빨갱이가 아니라고” “그랬더니 경찰이 움찔하더라고” “내가 너무 당차게 말하니까 그날은 그냥 갔어요” “얼마 지나서 구례지역 5개 마을에서 사람들을 차에 태우고 서시천 다리 밑에서 총살해 버린 거야” “빨갱이인지 아닌지 확인도 안 하고….” [1948년 여순 사건으로 죽은 시체를 확인하고 있다.] [구례경찰서 경찰은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7월까지 사찰계가 중심이 되어 구례군 일대에서 반군과 좌익에 대한 협조 혐의로 민간인을 구례경찰서와 각 지서로 연행 하여 구금하였다. 구례경찰서 사찰계는 연행된 민간인을 고문․취조한 후, 사살대상자를 정하여 구례경찰서 옆 공터, 구례읍 봉성산, 섬진강 양정지구, 서시천 변(서시교 아래) 등 지에서 사살하였다]당시 신청인들이 주장하는 피해 이유는 대체로 반군과의 관련성 여부에 집중되어 있다. [▲사진=LIFE, 촬영일 1948.10. 사진기자 칼 마이던스] 첫째는 가장 일반적인 반군 협조 혐의로서, 숙식이나 식량 제공․노무도원․반군과의 연락이나 반군 은폐 등이 대표적이었다. 여기에는 반군이 활동한 작전지역에 거주한다는 이유로 희생된 경우도 포함된다. 둘째는 남로당 등 좌익 단체에 가입한 혐의로 희생당한 경우이다. 이러한 경우 좌익 혐의로 지목되었다는 추정만 있을 뿐, 구체적인 가입 사실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군경의 가해는 자의적인 성격이강했다. 셋째는 본 사건 자체와 무관한 대살(代殺)로, 좌익과 입산자 가족 또는 동료라는 이유로 희생된 경우이다. 이 밖에도 연행 이유와 피해 이유를 모르거나, 무고와 모략, 고문으로 희생된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당시 군경이 민간인을 자의적이며 무리하게 연행 및 취조하고 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출처] 구례 지역 여순사건 보고서| 당시 17살이었던 이인순의 어머니 김애남(49세)씨는 한 발의 총성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차가운 바람이 지리산에서 화엄사 계곡을 따라 구례로 불어왔다. 수많은 영혼이 골짜기로, 강으로, 산으로, 바람처럼 사라져 갔다. 이름만 들어도 눈물 나는 어머니, 든든한 아버지, 생각만 해도 좋은 아들, 그리고 가여운 딸들이 그렇게 죽창과 총으로 허망하게 쓰러져 사라졌다. 하지만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인순씨의 결혼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큰오빠는 낙동강 전선에 육군으로 참전해 행방불명이 되었다. 해군이었던 작은오빠는 밤재에서 빨치산 공격으로 사망했다. 어머니는 빨갱이로 몰려 총살 당하고, 큰오빠는 육군으로 징집되어 낙동강 전선에서 행방불명이 되었고 작은 오빠는 빨치산에게 죽은 것이다. 하지만, 죽은 사람은 다시 살릴 수 없고, 산 사람은 억지로라도 잊으며 또 살아야 한다. 인생의 시간에 따라서 삶은 계속 변해간다. “어머니가 죽고 2년이 지나 19살에 결혼을 했어요." "구례 중학교 동창이었죠." 이인순씨의 남편은 일본에서 학교에 다니다가 해방이 되고 돌아왔다. 남편의 고향은 제주였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넘어가 메리야스 공장을 해다고 한다. 해방이 되고 구례로 장착했는데 화엄사에 아는 분이 있어 제주로 가지 않고 구례 냉천리로 왔다. “남편이 중학교 들어왔을 때 일본에서 온 학생이 있다고 해서 보러 간 적이 있었어요.” “내 생각에 시커멓고 잘생기지도 않고 뭐 그랬는데 그것도 인연이 되었는지 친척이 중매를 선다고 가보니 딱 그 사람이더라고요. “ "그렇게 인연이 되어서 6남매를 낳았어요. 자식들이 모두 똑똑하고 잘 되었어요. [징하게 힘들고 고생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또 행복했어요. 사진김인호] 아버지가 여자도 배워야 한다고 해 배운 것이 있어 무시당하지 않고 살았어요. 여기저기 글도 써서 상도 받고 그랬죠. 어렸을 때 교사가 되고 싶었는데 여기서 동네 사람들에게 한글도 가르치고 했으니까 그 꿈도 반절을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 고요. 내가 33년생이니까 올해로 94살인데 아직도 책도 읽고 노래도 부르고 건강하게 살고 있고요. 징하게 힘들고 고생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또 행복했어요. 그런데 어머니를 고발한 김 형사는 어찌 되었나요? “나쁜 짓 하고 살면 벌을 받는지 김 형사 엄마는 이웃집 똥통에 빠져 죽고 김 형사는 친구들하고 노고단으로 사냥하러 갔다가 친구들이 멧돼지인 줄 알고 총을 쏴 죽여 버렸어.” 할머니와 긴 인터뷰를 끝냈다. 연신 먹을 것을 챙겨 주며 먹고 가라고 하셨다. 아마 어머니를 닮은 것 같다. 대문을 나서며 하늘을 보니 여전히 불볕더위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멀리 보이는 지리산 노고단을 바라고 보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이 김 형사를 멧돼지로 오인해서 김 형사가 친구들 손에 죽은 이유가 혹시 지리산에 묻힌 원혼이 김 형사를 멧돼지처럼 보이게 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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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어난 삶: 이인순 할머니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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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혹은 20년 후 우리는 사과를 먹을 수 있을까?
- 사과는 과일의 대명사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기가 높다. 물론 우리 조상들은 사과가 아니라 능금을 먹었다. 카자흐스탄을 떠나 서쪽으로 간 녀석은 사과가 되었고 동쪽으로 온 녀석은 능금이 되었으니 둘은 형제라고 할 수 있겠다. 사과농사를 짓는 마용운님은 해가 거듭될수록 어려워지는 농사 환경 때문에 걱정이 많다. 이상기후로 작황을 예측하기 어렵고 비용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사과 상자가 가득 쌓인 그의 농장 작업실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먼저 어떻게 사과농사를 짓게 되었는지 물어보았다. ● 솔직히 별로 자의는 아니었어요. 부모님이 평생 사과 농사를 지으셨어요. 아마 64년부터 하셨을 거예요. 제가 태어나기 전이죠. 그러니까 저는 사과밭에서 나고 자란 셈이죠. 부모님들이 연세가 드시니까 더 이상 일하기가 어려우셨고, 제가 셋째 아들인데 당신들이 보시기에 어디 다니긴 다니는데 돈도 못 버는 것 같고 장가도 못 가고 사람 구실을 잘 못하는 것처럼 보이셨나 봐요. 돈 못 버는 건 사실이었을 것 같다. 그는 이때 환경운동연합에서 일하고 있었다. ● 부모님께서 내려오라고 좀 많이 말씀을 하셨어요. 저도 그때쯤 사무실에서 조금 어려움을 겪고 있던 상황이어서 그냥 내려오게 된 겁니다. 2011년 초의 일입니다. 마용운님은 이때부터 6천 평에 이르는 작지 않은 사과밭을 일구어왔다. 사실 질문을 하면서 그에게 사과를 선택한 계기에 어떤 낭만적인 요소가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지극히 현실적인 농부였다. 사과를 가꾸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지난 세월 사과는 가족의 생계를 이어주는 직접적인 힘이 되어주었다. 환경운동을 함께 하던 동지가 그를 따라 내려와 아내가 되었고 아이들은 지금 중학교 1학년과 초등학교 5학년이다. 사과 품종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 크게 세 가지 주요 품종이 있습니다. 후지 사과, 흔히 부사라고 불리지요. 그 다음에 추석에 먹는 홍로, 세 번째는 시나노스위트라는 품종이 있습니다. 그밖에 시나노골드라는 노랗게 익는 사과도 있고 홍옥이라는 100년도 더 전에 미국에서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새콤달콤한 사과도 100그루 정도 재배하고 있습니다. 마용운님은 우리나라 사과 품종의 단순함에 대한 우려를 곁들였다. ● 우리나라 사과 시장이 너무 단순해요. 다른 나라들 나가 보면 빨간 사과, 새빨간 사과, 노란 사과, 초록 사과 다 있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거의 다 빨간 사과잖아요. 9월쯤에는 홍로라는 빨간 사과, 10월부터는 전부 다 부사죠. 전체 사과 재배 면적의 65%가 후지 즉 부사가 차지하고 있거든요. 물론 부사가 워낙 달고 크고 저장도 오래 할 수 있기는 해요. 단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몇 가지 종류만 사과 시장에 남아 있는데 과거에 비해서 사과의 맛과 향이 엄청나게 단순화되어 버렸어요. 식물이 다양한 맛을 만들어내는 까닭은 그것이 진화에 유리하기 때문일 테다. 또한 사람은 오랜 세월 그 다양한 맛들이 가진 개성과 그들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독특한 풍미를 즐겨왔다. 그러나 오늘날 맛은 달콤함으로 수렴되고 있고 그것은 자연의 생태적 건강성의 척도라 할 다양성의 훼손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사과농부 마용운님으로부터 기후변화가 농사에 미치고 있는 영향을 들으면서 기후위기가 가져올 농업의 암울한 미래가 생생하게 다가왔다. ● 사과는 원래 시원한 기후를 좋아합니다. 고향이 텐산산맥이잖아요. 7~8천 미터 고봉들이 즐비한 그 동네가 고향인데 그래서 서늘한 기후를 좋아하게 되었겠죠. 그런데 지금 너무너무 더워지고 있으니까 나무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열매가 잘 크지도 않고 병도 많이 오고 빨갛게 착색되는 데에도 문제가 많이 생기고 있어요. 사과의 빨간 색은 안토시아닌이라는 색소 때문인데 이 색소가 만들어지기 위한 최적의 온도 조건이 섭씨 15~20도입니다. 더위 때문에 이 온도 조건이 충족될 수 없는 것이죠. 특히 홍로는 88년에 우리나라에서 개발된 최초의 사과인데 추석 시장을 겨냥한 품종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사과값이 제일 비쌀 때가 추석이고 두 번째로 비쌀 때가 설이에요. 사과는 추석 지나고 나면 품종 상관없이 가격이 절반으로 떨어지는데 그러니까 추석에 최대한 내다 팔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난해는 9월 말까지도 폭염이 지속되었잖아요. 그래서 반절 정도밖에 시장에 낼 수가 없었습니다. 손해가 컸죠. ● 안토시아닌 생성의 두 번째 조건은 햇빛입니다. 그래서 수확기가 되면 열매 주변의 잎을 따줘요. 그리고 바닥에 떨어지는 햇빛을 반사시켜서 열매가 빛을 받도록 반사필름을 사용하는 겁니다. 저희는 작년부터 반사필름을 안 하고 있어요. 이게 다 플라스틱 쓰레기라서 환경적인 이유로 결심을 했습니다. 마음고생이 심했습니다. 추석은 다가오는데 열매가 빨갛게 변하질 않으니 속이 타들어갔어요. 사과 농장들이 북으로 북으로 올라가고 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사과 농사를 언제까지 지을 수 있을지 마용운 농부의 생각을 물었다. ● 한 10년은 버티겠는데 20년은 정말 장담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현재 경상도가 우리나라 사과의 주산지입니다. 사과 생산량의 60% 이상이 경북입니다. 그런데 경상도에서 사과 농사 짓던 농부들이 강원도로 많이 가 있어요. 저희 친형이 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형은 여기에서 부모님과 농사짓다가 2007년에 강원도 양구로 갔어요. 그래서 양구 사과의 선구자가 되었는데, 지구가 펄펄 끓고 있는데 강원도로 가봤자 얼마나 더 시원하겠어요. 저는 도찐개찐이라고 생각해요. ● 제가 기후변화의 충격을 정말로 심하게 받은 게 2018년입니다. 그해 폭염이 아주 대단했죠. 2019년에는 우리나라에 제일 많은 숫자의 태풍이 영향을 주었어요. 2021년은 또 기록적인 장마가 왔죠. 가을장마는 한 해 농사를 완전히 망쳐버려요. 정말 무섭습니다. 18년 이후에는 거의 해마다 아니면 한 해 걸러 한번은 굉장한 피해를 받아왔어요. 마용운님의 결혼기념일은 4월17일이다. 그날 이후에 사과꽃이 피고 사과꽃이 피기 시작하면 사과농부는 쉴 틈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사과꽃이 4월 초에 핀다. 그러니 냉해를 피해가기가 너무 어렵다. 마용운님의 사과는 시장의 여느 사과들만큼 크지 않다. ● 작은 사과가 훨씬 더 단단해요. 왜냐하면 사과는 한 알에 필요한 칼슘의 90%를 꽃피고 나서 30~40일 딱 이때에만 흡수합니다. 그래서 큰 사과나 작은 사과나 한 알에 들어있는 칼슘의 절대량은 거의 같아요. 결과적으로 작은 사과는 농도면에서 훨씬 진하고 그러니까 단단하고 튼튼하죠. 저는 한 사람의 사과농부로서 제가 살길은 착색이 잘 되고 맛있는 사과를 만들어 고객이 사서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관행대로 퇴비와 질소비료 많이 줘서 크기만 키우는 농사는 안 하려고 합니다. 판매는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다. ● 처음에는 상당히 어려웠어요. 부모님은 고정 거래하는 도매상이 있었어요. 제가 농사를 지으면서부터는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사과 좀 보내줘 하면서 시작이 되었고 서울의 농부시장 마르쉐에는 초창기부터 참여를 했어요. 거기서 고객들을 직접 만나는 기회가 생기기도 하고 그렇게 고객 폭이 넓혀졌던 것 같습니다. 환경운동가에서 사과농부로 변신한 이후 적지 않은 세월 일해오면서 마용운님의 생활이 간단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짐작을 해본다.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해마다 기후의 위협이 더해지고 있어 앞날이 걱정스럽다. 그이의 사과농장이 앞으로도 오래도록 건강하게 제 몫을 해내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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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혹은 20년 후 우리는 사과를 먹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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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27년
- 어떤 27년 동네 형이 한 명 있다. 나이는 나보다 5~6살 위다. 어려서 같이 놀았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나이 차가 있어도 다 같이 놀던 때다. 세월이 지나고 나는 밖으로 나돌았다. 익산 부산 전주 대전 일본 그리고 지리산으로 나는 17살에 집을 떠났다. 고향은 잠시 쉬었단 가는 곳이었다. 방학 때 몇 달 대학에 들어가기 몇 달 군대 가기 몇 달 제대 하고 몇 달이 전부다. 어려서 함께 놀기도 했지만 내가 컸을 때 그 형은 아마도 군대에 갔거나 나와는 이제 나이 차이가 나서 삶의 방향이 달랐을 것이다. 그래서 그를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그 형을 다시 만난 것은 아마도 내 친구 형의 장례식장이었던 몇 해전 이었을 것이다. "오랜만이야 형" "그래…. "너…. "어디 구례에 산다며" "어" "네 엄마에게 들었다." "형은 뭐 해" "농사도 짓고 일도 하고 " "아버지도 아프고 보살필 사람도 없고" " 뭐 그렇게 살았다" 나도 대충 어머니에게 그 형 이야기를 들었다. 그 형의 아버지는 오래전에 중풍에 쓰러졌다. 그 후로 형은 아버지를 보살피면 고향에 남았다고 한다. 어제 비가 오고 해서 전화를 했다. "엄마 " "어 "김제도 비가 많이 와" "어…. 조금 "야' "그 위 뜸에 그 양반 돌아가셨다." "어….""27년이라고 하더라" 27년 아버지를 돌보던 청년은 이제 곧 6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아픈 아버지를 돌보다 그는 결혼도 하지 못했다. 시골에서 농사짓고 아픈 아버지를 돌보는 남자에게 결혼할 여자는 없었을 것이다. 이제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던 그 나이와 비슷한 나이가 되었다. 아무도 그렇게 오랫동안 살 것이라고 아니면 그렇게 오랫동안 좋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병든 몸으로 27년을 살아온 그의 아버지와 병든 몸을 간병하기 위해 보낸 그의 27년 어느 누구에게 찾아올지 모르는 병든 시간....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 그건 건강 수명이 아니라 생존 나이다. 그의 병든 아버지는 91세에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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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연대, 순례하는 청명] 나에게 연대란
- [빛나는 연대, 순례하는 청명] 1 나에게 연대란 안녕하세요. 탈핵과 비움을 화두로 이곳저곳 다니고 있는 순례자 청명입니다. 꾸벅. ^^ 7월초에는 9박 일정으로 속초에 다녀왔어요. 박용성(바르나바) 신부님의 소개로 머물게 된 속초형제의 집에서 오전에는 이곳을 이용하시는 어르신이나 노숙인, 이주민과 함께하는 밥 나눔봉사를 하였어요. 오후에는 주로 설악산 케이블카, 삼척석탄화력, 홍천양수발전소 집회에도 참여하였구요. 오봉교회, 청년긴급행동, 지역 활동가들과의 만남도 가졌습니다. 반갑게도 멀리 청주와 공주의 지인들께서도 찾아주셨어요. 와우^^ 속초순례의 여정은 즐겁고 벅찬 연대의 기쁨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 만남의 이야기를 조금 들려 드리겠습니다. 산타 같으신 바르나바 신부님 ‘2025전국연대순례’ 길을 나서고자 했을 때, 처음으로 먹고 잘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셨어요. 신부님도 1년의 안식년을 가지면서 영성과 농촌공동체를 찾아 이곳 속초형제의 집에 머무르며 봉사와 기도생활을 하고 계신 터였습니다. 속초(주변)지역에서 벌어지는 불의에 맞서는 일에도 항상 함께하시고, 청주와 공주의 지인들의 지역순례도 안내해주셨습니다. 새벽 밥 봉사를 마치는 피곤함에도 9시부터 일을 시작하는 봉사자분들에게 음악과 원두커피도 제공하셨구요. 신부님의 식사기도에서는 ‘서로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에 대한 감사함을 말씀하시더군요. 지켜보며 그의 이러한 자상하고 정의로운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잠시 궁금해지기도 하였습니다. 살아가는 건 서로가 있기에 가능한 것임을 속초형제의 집을 운영하시는 가브리엘 신부님과 레이첼 팀장님 얘기도 해볼까요. 새벽부터 가마솥에 밥을 지으시는 가브리엘 신부님. 저의 ‘후쿠시마 오염수 NO’라는 몸자보를 보시더니 “진정한 활동가네”라고 한마디 하셨죠. 그리고 아침 한끼를 함께 나누시더니 먼저 자리를 뜨셨습니다. 그런데 밥짓기를 마치면 원래 식사를 안 하시고 곧장 수도회로 가신다는 얘기를 뒤늦게 듣고 그 마음을 생각하며 소화시키는 내내 울컥했습니다. 살면서 벽과 한계에 부닥친 어려운 이웃에게 다가서긴 쉽진 않습니다. 그런데 레이첼 팀장님은 기꺼이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행동을 살피며, 살아가는 건 서로가 있기에 가능한 것임을 따뜻한 밥 나눔으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형제의집 공간을 이용하시는 노숙인분들은 시간과 상관없이 들락날락 하매, 물과 커피를 마시며 더위를 잠시 식힐 뿐 오래 머물지 않더군요. 레이첼 팀장님은 “커피드시게요” “더워요. 물 드셔요”라며 마음까지 채워 주시는 분이였습니다. 진실한 대화는 이런 거지 속초지역에서 참치가게를 운영하시는 70대의 왕언니와 호주에 살고 있는 저스티나도 만났습니다. 설악산 케이블카 반대 피켓 연대를 가려는 제게 “그걸 왜 반대해요. 설치하면 좋지, 근데 후쿠시마 오염수 반대는 좋으네요”라고 자신의 생각을 말해주시는 왕언니. 반대의 의견이든, 같은 의견이든 누구나 생각을 쉽게 건네지는 않거든요. 귀찮아서, 반대되는 의견이라서, 생각이 없어서라는 이유로 저마다의 경계를 긋고는 하는데 왕언니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제가 하는 일에 말을 걸어 주셨고, 밥 나눔 일도 정성스럽게 온몸으로 하셨습니다. 진실한 대화는 바로 이런거지 라며 절로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저스티나는 호주에 살면서 개인적인 일로 한국에 머물 때마다 월, 화요일 봉사를 옵니다. 한가득 담긴 양파를 다듬으면서 “하루하루 일상의 고마움을 갖고 살아간다”는 그녀. 봉사자분들과 재료준비와 설거지를 나란히 하는 모습에서 남보다 먼저 앞서기를 바라지 않고 더 즐겁게 사는 사람으로 나란히 계신다는 생각에 희망이 피었습니다. 제가 ‘2025 전국연대순례’를 하기 위해 온 이곳에 그녀들이 함께 왔습니다. 왜가리, 꿈씨, 하이디, 후, 봄봄. 공주에서 청주에서 각자 할 수 있는 만큼의 일정을 잡고 연대를 온 그녀들. 옳은 일에, 해야만 하는 일에, 잊지 말아야 할 일에 언제나 음식으로 서 있는 왜가리의 진두지휘로 다음 날 먹을 깍두기도 담그었습니다. 순례를 하는 이유에 대해, 다양한 연대를 꾸리려는 내게 끝없이 질문을 아끼지 않는 후. 하기 어려운 과제도 해야 할 일은 해야지 라며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연대를 이어가는 봄봄. 바쁜 일상에도 의지를 다지며 순례에 참여한 꿈씨, 켈리그라피로 선한 곳마다 자신만의 패션을 거침없이 보여주는 하이디. 처음 만나는 낯선 자리의 연대였을 터인데도 ‘후쿠시마 오염수 NO, 신규핵발전소 이제 그만, 안전한 핵이란 없다, 공공재생에너지로’라고 쓰여진 몸자보와 깃발을 들고 사랑이 되는 길을 따라 묵묵히 걷는 그녀들. 아름다움이 넘치는 길을 봅니다. 경계에서 부딪히는 다양한 시선, 그리고 배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순례 중에 어느 생선메뉴가 있는 식당에서 밥 봉사자 분들과 식사를 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옆자리에서 여럿의 여행자분들이 계속 힐긋거리며 보고 있더라구요. 동행한 신부님을 아시는 분들인가 생각했는데, 식사를 마치고 일어선 저에게 할 말이 있다며 말을 건네었어요. 여행자1 : (울그락 불그락 화난 표정으로) 그런 글(앞뒤 후쿠시마 오염수 NO 몸자보)을 달고 왜 생선을 먹어요. 청명 : (당황해하지 않고 웃으며 여유롭게 ) 생선을 좋아해서요. 여행자2 : (또 울그락 불그락 화가 찬 표정으로) 밥맛없어요. 청명 : (친밀한 마음으로) 밥 맛 없게 해서 죄송해요. 근데 벌써 12번째 방류했어요. 가만히 보고 있을 순 없어서 이래 다녀요. 여행자1 : (불투명하게) 북한도 버렸잖아요. 서해로 바로 오는데 그건 왜 안 달아요 청명 : (친절하게) 확실히 밝혀지면 그것도 달아야죠. 그거 알아요. 남한도 오염수 버려요. 그것도 달아야겠어요. 근데 후쿠시마꺼를 지금 달고 다니는 건 도쿄전력과 일본정부가 대놓고 오염수를 방류한다고 말했잖아요. 여행자1 : (확언하듯) 일본은 물로 희석하잖아요. 북한은 그냥 버리고. 청명 :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희석하면 뭐 해요. 버리는 건 매한가지인데. 라면 스프를 넣고 짜다고 맨 물을 섞어 봐요. 버린 양은 같은데. 여행자2 : (여전히 짜증 섞인 목소리로) 알았어요. 여행자1 : (누그러진 마음으로) 알았어요. 청명 : (친절하게) 어쨌건 밥맛없게 해서 미안해요. 즐거운 여행 보내셔요. 글구 말 걸어주어 고마워요. 여행자1 : (다정하진 않아도 차분하게) 네. 여행자2,3,4,5,6 : (가만히 듣고 더 이상 째려보거나 울그락 불그락하지 않는다) 연대란 서로의 경계를 허무는 일 하하. 설레임으로 다가간 속초의 연대! 이번 순례를 통해서 서로가 낯섦이 마찬가지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만나고 여러 매개로 낯섦을 줄이는 이런 과정이 진정한 연대의 시작이라는 것을 다시금 알게 되었어요. 또한 마음을 내고 ‘지금-여기’서 다같이 즐거워야 연대는 확장된다는 것도요. 모두가 빛나야 합니다. 연대란 서로의 경계를 허무는 일, 그리고 그 지향은 ‘지금의 시스템으로 내면화된 불합리한 가치관인 물질과 권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겠지요. 이를 통해 희망을 가져본다면 그건 ‘그저 누구나 즐겁게 살기를 바랄 뿐이다’예요. 다시금 순례기간 반갑게 맞아주시고 힘이 되어 주신 속초의 모든 분들 고맙습니다. 그리고 글을 실을 수 있도록 마음의 손길을 내 주신 ‘지리산인’에게도 고마움을 전해요.^^ 앗싸 이땅에 탈핵!! <빛나는 연대, 순례하는 청명>의 연재를 시작합니다. "연대! 나의 순례는 탈핵과 비움의 길, 그리고 연대의 길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연대는 ‘각자 할 수 있는 역량과 방법으로 참여하고, 서로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다. 더하여 경계를 허문다는 것은 단절, 좁은 시야, 울타리, 권력, 불투명한 벽을 허물고 서로 공감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 여정이다.’ 한마디로 연대는 좋은 친구를 만들자는 것이라고 봅니다. 글을 실을 수 있도록 마음의 손길을 내 주신 ‘지리산인’에게 찐한 고마움을 전합니다." 순례자 청명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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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연대, 순례하는 청명] 나에게 연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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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곰1% 가게 유람기] 더도 덜도 말고 딱, ‘지리산 오여사’
- [반달곰1% 가게 유람기] 더도 덜도 말고 딱, ‘지리산 오여사’ 처음 보는 사람은 오여사, 라는 호칭에서 좀더 나이 든 부인을 상상했다가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내고 보면 오민애 님에게 ‘지리산 오여사’라는 호칭은 더 없이 알맞다. 손님이 줄줄이 들고 나는 좁은 가게가 복작복작하지만 정작 오여사는 여유롭다. 식사를 끝낸 손님들의 계산을 하면서 ‘맛있게 드셨어요?’라는 질문도 빼놓지 않는다. 10년이 넘는 장사내공이 느껴진다. 강산이 변하는 만큼 시간을 다진 사람 오민애 님은 원래 청주 사람이다. 2011년 3월부터 지리산이 좋아서 6개월여를 오가다가 임신 중에 악양으로 이사 와서 아기까지 낳았다. 그리고 아이를 키우면서 할 수 있는 일로 자영업을 선택했다. 워낙 음식에 자신 있기도 했고, 당시 자신이 살던 악양 화개 쪽에 맛있는 돈가스 집이 없어서, 에라이 내가 해야겠다는 마음이기도 했다. 구례에 둥지를 튼 것은 2014년 6월, 구례군 토지면으로 옮겨왔다. 지금의 오일장 가게로 온 것은 2016년, 그 이후 10여 년이 흘렀다. 지금은 성수기에 하루 100그릇 이상을 팔고 기다리는 손님들 때문에 웨이팅보드도 설치했지만, 2023년 전까지는 단골들을 대상으로 매장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이만큼 자리잡는 데 10년 걸린 것 같아요. 처음부터 이렇게 잘 되진 않았죠. 돈가스와 들깨칼국수는 계속 했던 메뉴이지만, 생선가스는 오일장으로 오면서 돈가스를 못 드시는 분들을 위해 시작한 거예요. 싱싱한 활어를 공급받을 수 있다는 오일장의 이점이 있었죠.” 생고기로 만드는 돈가스와 활어로 만드는 생선가스, 메밀면으로 만드는 들깨칼국수는 손꼽히는 맛이다. 음식에 구례스러움을 담기 위해 샐러드에는 산수유절임을 얹고, 소스에는 라임청과 매실청을 활용해 상큼함을 더했다. 밀가루를 못 먹는데 오여사의 들깨칼국수는 먹는다는 손님도 있고, 자신이 먹어본 돈가스 중에 최고였다는 말을 하는 손님도 있었다. 자신의 음식에 대한 자부심도 넘친다. 힘들었어도 선택에 후회는 없어요 그래서일까? 1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그녀다. 가게를 찾는 손님들은 늘 긍정적인 반응을 보냈고, 매출은 계속 상승세였으니 초심을 유지하면서 좋은 재료로 운영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게다가 자영업을 선택한 이유가 혼자서 아이를 키우기 위함이었고, 아이가 아프거나 학교에 일이 생겼을 때는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아이 곁에 있을 수 있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생기는 변수들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이 만한 일이 없다. 아직은 가게를 운영하는 일이 재미있다니 중학생인 아이가 앞으로 큰 사고 없이 자라주기만 한다면 후회 없는 선택이 될 듯하다. 그런데 몸이 고장났다. 목디스크가 오고 관절도 아프다. 23년부터 오일장날과 주말만 영업하고 있는데도 영업 준비를 하다보면 주 60시간 정도를 일하게 된다니 몸이 성할 리 없다. 일하는 시간을 조절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현실적으로 쉽지는 않은 일이다. 지금은 일주일에 하루 정도 온전히 쉴 수 있어서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데, 그럴 때는 좋아하는 등산이나 서예를 하고 있다. 가게에 보이는 메뉴판이나 글귀 등 먹글씨들은 모두 그녀가 직접 쓴 것들이다. 겨우 쉬는 하루인데 등산을 하고 오면 더 힘들지 않을까 싶지만, 오히려 산의 기운이 그녀를 치유하는 느낌이다. 별안간 그녀의 씩씩한 모습이 푸르고 청정한 산의 모습과 겹쳐진다. 무작정 산이 좋은 사람 전국의 산을 누비며 지리산 종주도 여러 번 했다는 그녀에게 어리석은 질문을 던져봤다. 산이 왜 그리 좋으냐고. 이유가 없단다. 그냥 좋단다. “중학교 때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는데 그게 첫경험인 것 같아요. 흔들바위까지 올라갔는데 너무 좋아서 다른 사람들 다 제치고 앞서 갔어요. 그냥 너무 좋았어요. 오르는 과정도 올랐을 때의 벅참도. 고등학교 대학교 다닐 때도 친구들과 버스 타고 산에 다녔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도, 임신, 출산 기간을 빼고는 항상 산에 다녔던 것 같아요. 지금도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산행을 해요.” 지리산 자락에 살면서 그녀는 늘 생각한다. 아, 여기 살기 참 잘 했다! 오민애 님에게 산은 마치 애인 같다. 맑은 날의 산도, 흐린 날의 산도, 비오는 날의 산도, 비 그친 후의 산도, 눈오는 날의 산도 볼 때마다 너무 이쁘다. 지리산을 바라보며 출근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그래서 반달곰 1% 가게 제안이 왔을 때 망설임 없이 수락할 수 있었다. 오히려 지리산을, 그 안에 살고 있는 반달곰을 보호할 수 있는 일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탤 수 있어서 감사했다. 반달곰에 대한 관심이 생기니 반달곰에 대한 지식도 더 많아졌다. 게다가 다른 반달곰 1% 가게에서 소개를 받고 손님들이 찾아오니 매출에도 도움이 된단다.(웃음)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산에 갈 때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고 쓰레기를 회수하고 화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 등의 작은 일이지만, 그녀는 이 작은 날갯짓들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안다. 그리고 끊임없이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낼 것이다. 마지막으로 손님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제발 드실 만큼만 가져가세요~!” 반달곰1%는 지리산권 가게들(현재는 구례)이 자발적으로 진행하는 공존프로그램이다. 반달곰1% 가게에 가면 반달가슴곰을 자연스럽게 만나고, 특별히 계획하지 않아도 반달가슴곰 보호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2021년 5개 가게로 시작한 반달곰1%는 2024년 현재 10개 가게로 늘어났다. 반달곰1%는 ‘유랑인증서’를 발행하고 있는데, 손님들이 반달곰1% 가게에 들러 물품을 먹거나 마시거나 구입하면, 반달곰1% 가게들은 수익금의 1%를 사단법인 반달곰친구들에 기부하고, 그 기부금이 모아지면 사단법인 반달곰친구들과 논의하여 올무수거 활동, 무인센서카메라 구입 등 반달곰 보전활동을 위해 쓰기로 약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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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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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곰1% 가게 유람기] 더도 덜도 말고 딱, ‘지리산 오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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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삶, 땅을 지켜온 삶
- ● 홍보하는 데는 내가 안 낫겠냐고 젊은 사람들이 그래가지고 이 인터뷰에 응하게 됐습니다. 선생께서는 방문자들을 만나자마자 첫 마디부터 이 만남, 인터뷰의 목적을 분명하게 지목하셨다. 그만큼 지금 절박하게 홍보하고 해결해야 하는 사안, 즉 차황면 골프장 문제에 마음을 모으고 계셨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태가 묻힌 곳, 평생을 살아왔고 40여년 세월 유기농으로 가꿔온 땅이 심각하게 망가질 위기에 처해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만난 분은 산청 차황면 골프장반대주민대책위원회 박찬술 위원장님이다. 현재 산청군은 환경을 파괴하는 개발주의의 망령이 세 방향에서 지역을 옥죄고 있다. 골프장, 케이블카, 지하수 난개발이 그것이다. 지난 6월 하지에 산청을 지키고자 몸을 일으킨 사람들과 이에 연대하는 이들이 함께 모여 축제를 벌였다. 아래 영상을 많은 이들이 보고 무지한 권력자들의 지리산에 대한 테러에 함께 대항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방문자들은 선생과 대화를 나누면서 고향을 지키며 긴 세월 땅을 살리는 농사에 천착해 온, 어쩌면 단순하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를 성찰하게 하는 인생 행로에 주목했다. 현대는 이동의 시대다. 삶터를 수없이 바꾸고 집과 일터 사이 먼 거리를 매일 같이 오가고 멋지고 화려한 볼거리가 있다면 자동차로 비행기로 시간을 아끼지 않고 달려간다. 이 문명에서 ‘성공’의 척도는 이동하며 허공에 뿌려댄 탄소의 양으로 측정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조차 든다. 한곳에 머물며 발 아래 땅을 살피고 계절에 따라 변하는 대자연의 숨결을 가슴 깊이 느끼는 삶은 어떤가. ○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 46년생이니까 내년이면 만 80이 됩니다. 선생은 이곳 산청군 차황면 철수리에서 태어나 군대 생활을 제외하고 고향을 떠나 산 적이 거의 없다. ● 부대 생활하면서 객지에 나갔었지. 그런데 우리는 남 밑에 있는 체질이 아니더라고. 자발적으로 내가 뭐 하고 싶은 거 하고 이래야 되는데 그러니까 직장생활을 못하겠더라고. 직장생활도 한 반년 해봤어. 그게 안 맞아서 여기서 계속 살았지. 금세 말씀이 편해지셨다. 스스로 행복한 삶이라고 여기실까 궁금했다. ● 크게 행복한 줄은 몰라도 뭐 크게 안 좋은 것도 없어. 불행하지 않으면 행복한 게 아닐까? ‘자족적인 삶’이란 표현이 떠오른다. 선생은 슬하에 6남매를 두셨다. 어렵던 시절 식구들이 함께 고생을 나누었지만 지금은 수도권과 영호남에 흩어져서 다들 잘 살고 있다. 큰딸만 사위와 함께 부모님 곁을 지키고 있다. 선생께서는 평생 농사를 지으셨다. ○ 농사는 언제부터 지으셨습니까? ● 젊어서부터 쭉 지었지. 주로 벼농사, 이제는 밭도 별로 없고. 젊어서는 그래도 밭농사를 꽤 했단다. 밭을 줄인 이유는, 사모님을 고생시키는 것이 가장 컸다고. ● 오만 것 다 하지. 감자부터 고추, 팥, 콩, 참깨, 들깨 뭐 우리가 먹는 거는 다 심어. 생강도 심고. 근데 집에 마누라가 너무 고생하는 거야. 나는 장비로 갈아주고 그랬지. 옛날부터 농사를 많이 지었으니까 웬만한 기계는 다 있었어. 밭농사 이런 거 짓지 말자 그랬는데 마누라가 밭만 갈아달라 그래. 그 정도는 해줘야 되지만...... 산청군 차황면은 2006년 지역 전체가 지리산유기농광역지구로 지정되었다. 전국 최초다. 지금은 ‘메뚜기쌀’이라는 브랜드명으로 소비자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 유기농은 언제부터 하셨어요? ● 나는 92년도부터 했어. 당시 내가 이장을 맡고 있었는데 경남먹거리 뭐라고 하는 단체에서 찾아왔어. 여기가 공기도 좋고 그런데 쌀을 좀 사가면 안 되겠느냐 그래. 여기가 해발이 좀 높거든. 아마 300이 넘을거야. 그 전에는 제초제도 조금씩 치고 그랬어. 전적으로 농약으로만 농사짓지는 않았지. 그렇지만, 그래 좋다 이제는 농약을 더 줄이고 저농약으로 농사를 짓자, 그것이 뭐랄까 친환경 농사의 시발점이었어. 나중에 부산 YWCA라고 하는 데서 우리 쌀을 모두 판매해 준다고 그래. 약을 안 치는 대신 가격을 더 주겠다, 그러다가 2천년대 초반 광역지구로 지정이 되었지. ◌ 우렁이 농법으로 하시죠? ● 제일 처음에는 오리농법을 했어. 오리로 하자면 울타리도 쳐야 하고 가을이 되면 나락 패기 전에 그걸 전부 다 처치를 해야 되거든. 한 3년은 했는가 몰라. 이래가지고는 안 되겠다, 해서 우렁이농법 또 쌀겨농법 알아요? 쌀겨를 이용하면 물 위에 층이 생기거든. 이게 햇빛을 가리니까 풀이 안 나거든. 그것도 했었지. ◌ 친환경 농업으로 하는 전체 농가 규모가 어느 정도일까요? ● 우리 친환경 작목반이 차황면에도 여러 개가 있어. 전체 규모는 나도 정확히 모르겠고 나는 한살림에 소속되어 있거든. 처음에는 한살림이 아니었지만. 지금 한살림으로 함께 하는 농가는 140~150명 정도 돼. 한살림이 가장 크기는 하지. ◌ 선생님! 아무래도 지금 골프장 문제 때문에 신경이 많이 쓰이시죠? ● 물론이지. 지역 주민한테 이득이 되는 건 하나도 없거든. 골프 치러 다니는지 모르겠지만(물론 방문자들은 골프를 치지 않는다!), 골프장은 농약 많이 치지 지하수 고갈시키지 좋을 게 뭐가 있겠나. 골프장이 쓰는 지하수가 하루 천 톤에서 천오백 톤이라는데 여기 농수로로 흘러가는 거는 평균 800톤이야. 결과적으로 지하수라는 것도 한정이 돼 있는데 그걸 빼가다 보면 고갈될 수밖에 없지 않겠나. 농약을 밤에 친다는데 그게 안개처럼 흘러가면 우리 유기농 농사를 망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지. 골프장 부지가 여기서 산 너머 직경 500m,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1km 안쪽이야. ◌ 주민들이 합심해서 잘 싸우고 계시는 것 같아요. 산청군은 어떤 분위기인가요? ● 골프장을 한다는 소문은 몇 년 전에 있었다가 취소가 됐는데 작년부터 다시 이야기가 나와가지고 금년 2월11일에 면사무소에서 주민 설명회를 했어. 창원에 있다는 송영개발이라는 회사가 했어. 군에서는 공무원 누구도 안 하고 그 개발회사가 한 거야. 그러니 군수가 나쁘지.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어떤 사업을 하려고 하면 먼저 주민, 가까이 사는 사람들하고 대화를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우리가 부랴부랴 주민대책위원회를 만들었어. ● 우리는 반대하는 명분이 있어요. 그런데 저 산청군수라고 하는 사람은 무슨 마음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어. 이런 소리를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세간에는 온갖 뜬소문이 있어. 군수가 개발회사에 투자를 해놓은게 있어서 적극적으로 밀어준다는 말도 있고 면에 사는 어떤 사람들도 역시 투자를 했다더라 하는 말도 있어. 억측이라고 나는 생각을 하지만 워낙 말도 안되는 일을 밀어붙이고 있으니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거지. ● 설명회에서 반대하는 사람 다섯이 발언을 했어. 그런데 찬성하는 사람은 발언을 하나도 안 했어. ◌ 선생님께서 태어나신 고향이어서 이 문제에 더 마음이 쓰이시겠어요. ● 그렇지. 이제는 뭐 애정이 있어 봤자지만, 그래도 나이 80 먹은 사람을 위원장이라고 세워놓은 이유는 그래도 동네에서는 어른이니까 그렇겠지. 말 한 마디 해도 다른 사람보다 훨씬 낫겠다고 추켜세우는 거라. ◌ 체험휴양마을을 운영하고 계시던데요. ● 펜션이라고도 하고 그래. 고구마도 캐고 이런저런 일들 하는데 그게 잘 활성화가 안 돼. 좀 젊은 사람이 해야 할텐데 여기 제일 젊은 사람이 60대야. 노인의 경험과 지혜는 젊은이의 힘과 기술에 접목될 때 힘을 발휘할 수 있을 터이다. 누구보다 차황면과 철수리에 대한 애정이 깊을 박찬술 선생님이지만 그가 발 딛은 땅을 살리고 오랫동안 가꾸어온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는 외부의 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들의 연대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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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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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삶, 땅을 지켜온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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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자락책방] 산내 찬장과 책장
-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싶어 하는가? 여러 가지 단어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의 대답을 받아 적고 공통분모를 낸다면, 아마도 두 단어가 가장 많을 것이다. 그 단어는 “행복”일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인가? 어떤 저명한 행복 학자는 그것을 “주관적으로 느끼는 자기 만족”이라고 했다. [남원시 산내면 찬장과 책장 책방지기 조회은 대표] 여름 같기도 하고 봄 같기도 한 5월의 어느 날, 지리산 아랫마을 산내를 찾았다. 그곳에 있다는 동네 책방을 찾아가기 위해서다.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주소로 가 보니, 책방 같기도 하고 공방 같기도 한 예쁜 건물 하나가 보인다. 잠시 고민하는데, 건물 앞에서 작은 글씨로 ‘책방’이라는 문구가 보인다. 맞구나 싶어 주차를 하려는데, 주인장이 문을 열고 나온다. 딱 봐도 책방을 할 것 같은 인상이다. 책방 주인장 조회은 님은 진주 출신으로, 서울에 살다가 2007년에 남원 산내로 귀촌했다고 한다. 그 일을 하기 전에는 녹색연합에서 일했고, 가능하면 환경 친화적인 삶을 살고 싶었다고 한다. '찬장과 책장'은 5년 전에 문을 열었다. 수·목·금·토요일 운영한다. [ 이 건물에는 민박용 방 3개, 책방지기의 살림집, 책방 겸 직조공방 공간이 있다] [책방은 언제 시작하셨나요?] 5년 전에 시작했어요. 책방은 제 오랜 꿈이었어요. 꼭 하고 싶은 일이었는데, 5년 전에 시작하게 되었죠. 어렸을 때 책을 좋아해서 막연하게 책방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가 산내에 살게 되었고, 작은 동네에 책방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처음 시작은 이 건물은 아니었어요.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던 시기에 다른 곳에 책방이 생긴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먼저 시작하게 되었죠. 꼭 경쟁을 해야겠다는 건 아니었고요. 나중에 하면 미안해질 것 같아서요. 그래서 서둘러 꿈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 건물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네, 책방 말고도 민박도 하고, 직조 공방도 하고, 또 살림집으로도 사용하고 있어요. 민박은 꽤 오래전부터 해왔고요. 직조는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이고, 책방도 그렇고요. 그나마 수익이 확실한 건 민박이에요. 민박으로 번 돈으로 책을 구매한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 책이 많이 팔리는 곳은 아니잖아요. 읍내도 아니고, 면 소재지에 있는 작은 책방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겠어요. 처음 책방을 열고 나서는 가능하면 하루에 한 명이라도 찾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점점 그런 생각도 줄어들더라고요. 손님이 오지 않는 날은 직조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해요. [찬장과 책장은 천 권 정도의 서적을 판매하고 있다] [주로 어떤 책을 판매하시나요?] 제가 좋아하는 책을 구매하는 편이에요. 일종의 책 편집숍 같은 거죠. 요즘 제가 가장 즐겨 읽는 소설이 가장 많고요, 환경, 가난, 여성주의, 그림책도 있어요. 대부분 제가 관심 있는 분야의 책을 주문해요. [책은 몇 권 정도 있나요?] 대략 천 권 정도 돼요. 작은 서점 대부분이 이 정도인 것 같아요. 예전에는 서점이라 하면 참고서나 수험서, 다양한 책을 판매하는 종합서점이었죠. 하지만 여기서는 그만한 공간도 안 되고요. 대부분 작은 책방들은 책방 주인의 취향이 담긴 책을 판매한다고 보면 돼요. 물론 온전히 제 취향만 있는 건 아니에요. 온라인 서점들의 추천서나, 사람들이 관심 있는 분야의 책들도 선택해서 들여놔요. 서점은 결국 책을 판매하는 곳이니까요. [책 판매가 쉽지 않은데, 대책은 있나요?] 남원시에서 진행하는 ‘책값 돌려주기’ 같은 행사도 도움이 됩니다. ‘책값 돌려주기’는 남원 시민이 지역 서점에서 도서를 구매하고, 한 달 이내에 읽은 후 공공도서관에 반납하면 책값을 남원사랑상품권으로 돌려주는 제도예요. 책을 구매하려던 분들이 저희 서점에서 사게 되니까 도움이 되죠. 또 지역의 학교 도서관에 책을 납품하기도 해요. [저에게 책을 하나 추천한다면 어떤 책을 추천하시겠어요?] 『모든 것의 이름으로』를 추천합니다. 800페이지가 넘는 소설인데, 읽자마자 푹 빠졌어요.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소설이에요. [책소개] 19세기 식물학자 앨마 휘태커의 장대한 일대기를 그립니다. 앨마는 식물에 대한 깊은 애정과 지적 호기심으로 가득 찬 여성으로, 식물 표본 수집과 연구에 일생을 바칩니다. 그녀는 당시의 사회적 제약을 넘어 과학적 발견과 사랑, 좌절을 경험하며 진정한 ‘앎’의 의미를 탐구합니다. 이 소설은 한 여성의 삶을 통해 지식과 열정, 그리고 자연과의 교감을 장엄하게 펼쳐 보이는 대서사시입니다. [ 직접 만든 직조물이 천장에 전시되어있다] [책방을 하면 좋은가요?] 책방을 찾는 손님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 중 하나예요. 그리고 또 하나는, “여기 있는 책을 다 읽었냐”는 질문이죠. 책을 다 읽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어떤 책들이 있고, 대략의 내용은 알고 있어요. 읽은 책을 판매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살짝 보거나, 도서관에 그 책이 있으면 빌려 보기도 해요. 도서관 추천 도서로 신청하기도 하고요. 가급적 책방의 책들을 다 알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요. 그리고 책방을 하면 좋냐는 질문에는, 당연히 좋다고 말하고 싶어요. 제 오랜 꿈이었고, 책은 오래되어도 가치가 있다고 믿어요. 제가 좋아하는 일이니까요. 팔리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제 책이 되니까요. 그것만으로도 만족해요. 저는 사람이 꿈을 찾아 산다고 생각해요. 서점은 제 오랜 꿈이었고, 그 꿈을 이루었으니 그것만으로도 행복하죠. 그리고 저처럼 책을 좋아하는 분들이 찾아와 함께 이야기 나누는 것도 좋아요. 그래도 하나 바라는 게 있다면, 저의 책방에서 우연히 만난 책을 구매하는 손님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별 생각 없이 들어와서, 우연히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고 구매하는 기쁨을 주고 싶어요. 요즘은 인터넷 서점에서 원하는 책을 검색해서 사는 시대잖아요. 정해진 책이 아니라, 우연히 찾은 즐거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요. [그녀가 만든 꿈의 공간 찬장과 책장] [작은 책방을 꿈꾸는 사람에게 책방 창업을 추천하시나요?] 네, 저는 추천해요. 책방은 창업하기 쉬운 업종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공간이 있고, 책을 구매할 만한 돈만 있으면 가능하잖아요. 인테리어를 직접 하고, 책을 들여오면 큰돈이 드는 창업은 아니에요. 책은 식품처럼 유통기한이 있는 것도 아니라 재고 부담도 적어서 다행이죠. 하지만 ‘돈을 벌겠다’는 목적으로는 어렵죠. 책방이 돈 되는 사업은 아니니까요. 저 역시 서점으로 돈을 많이 벌려는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책이 많이 팔리면 좋죠. 나름 책을 판매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유유자적처럼보여도 고니처럼 물아래에서는 엄청 물을 박차고 있군요. 네. 그런 샘이죠. 민박으로 돈을 벌어 책을 구매하는 식이지만, 후회는 전혀 없었어요. 정말로요. 그래도 꿈이었고, 해보고 싶었던 일이라 좋아요. [ 책방이 없는 마을은 영혼이 없는 것과 같다.] [지역 책방이 꼭 있어야 할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시골에도 사람이 살고, 사람이 사는 곳에는 꼭 있어야 할 가게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중 하나가 저는 서점이라고 생각했어요. 도시에서 당연하게 누리는 것을 시골에서도 누릴 수 있었으면 했어요. 거창하지 않더라도, 사회적 가치가 있었으면 좋겠고요. 소소한 즐거움을 주는 가게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멀리 사는 친구들이 놀러 와서 “야, 우리 동네에 이런 가게도 있어.” 이렇게 자랑할 수 있으면 좋잖아요. [보통 작은 서점에서는 음료도 판매하던데, 여기는 없네요?] 네, 음료는 판매하지 않아요. 주변에 카페들이 꽤 많고요, 제가 음료를 팔면 그분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할 일이 많아요. 민박 손님이 오면 청소도 해야 하고, 직조도 해야 하고요. 음료까지 하면 제 용량을 초과해요. 그리고 하루 일이 끝나면 매일 남편과 산책도 해야 하거든요. [건물이 아주 예쁘네요?] 운이 좋았어요. 방송에도 나오는 건축가님이 설계를 해주셨거든요. 그래서 멋진 건물이 되었어요. 이 건물에는 민박용 방 3개, 저희 살림집, 책방 겸 직조공방 공간이 있어요. 월세를 내지 않으니 좀 더 마음 편하게 서점을 운영할 수 있었죠. 물론 은행 대출금은 남아 있지만요. 그래도 걱정은 하지 않아요. 어떤 소설에 “책방이 없는 마을은 영혼이 없는 것과 같다.” 는 말이 있더라고요. 제 책방도 우리 동네에 그런 영혼 같은 존재가 되었으면 해요. [ 막 피기 시작한 붉은 꽃양귀비가 지리산에서 불어온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찬장과 책장의 미래는 어떤가요?] 대부분 책방이 2년 안에 폐업한다고 하는데, 저는 벌써 5년째 하고 있어요. 앞으로 5년 정도는 더 하고 싶어요. 예전에 제주도에서 책방을 하던 분이 책방 문을 닫으며 “졸업하는 기분”이라고 했던 게 기억나요. 저는 아직 졸업 못 했어요. 앞으로 5년, 그러니까 총 10년 정도는 해보고 싶어요. “행복지수는 몇 점인가요?” 라는 질문에, 그녀는 1초도 고민 없이 “100점”이라고 했다. “지금 당장 죽어도 좋을 만큼 행복하다”고도 했다. 나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나는 몇 점을 줄 수 있을까? 오래전부터 나도 “행복하게 살 거야”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항상 ‘가능하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가능하면’이라는 단어는 늘 행동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가능하면’, ‘언젠가’라고 미루며 하고 싶은 일을 계속 뒤로 미뤘기 때문일 것이다. 가능한 그 시점, 가능한 상황, 가능한 날은 어쩌면 다시는 오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클지도 모른다. 삶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한다. 생계의 길과 꿈의 길이다. 생계의 길은 말 그대로 돈을 위해 사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달리는 삶. 돈을 벌지 못하면 불행한 삶이 된다. 꿈의 길은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것을 찾는 것이다. 그 일이 돈벌이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 왜냐하면 그 길이 행복의 길이기 때문이다.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누구에게나 선택의 자유는 있지만,누구나 선택하지는 못한다. 책방지기는 인터뷰가 끝난 후 자신의 작은 정원을 보여줬다. 막 피기 시작한 붉은 꽃양귀비가 지리산에서 불어온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작은 텃밭에는 봄에 심은 가지와 상추, 고추가 자라고 있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찬장과책장독립서점 Jirisan Bookcase 영업 매주 수·목·금·토 / 12시~5시 운영 주소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대정방천길 1-4 (산내면) 전화010-8250-6230 [사진 김인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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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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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자락책방] 산내 찬장과 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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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곰1% 가게 유람기]도로 위의 심산, 깨달음이 있는 오차공방
- [반달곰1% 가게 유람기] 도로 위의 심산, 깨달음이 있는 오차공방 “원래 제가 산을 참 좋아해요. 예전에 선생님이 너는 산에 풀어놓으면 제일 좋아해, 라고 하셨는데 인연을 따라 오다 보니 도로 위에 자리를 잡게 되었네요. 저는 여기가 내 산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산속이라면 혼자서도 잘 논다는 오차공방의 주인장 오은주 님은 지리산으로 오기 전에는 강원도에 살았다. 그러다가 화개로, 그리고 지금은 구례, 오차공방이라는 자신만의 산속에 산다. 공방이라는 산 속에서 숨을 쉬고 손을 움직여 수행하는 삶을. 공방에 울리는 만트라는 세상의 번다함을 이기고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 평안하고 순탄하기를 바라는 그녀의 주파수에 맞추어 흐르고 있었다. 임산부와 아이에게도 내어줄 수 있는 차 오차공방의 이름은 깨달을 ‘오(悟)’와 ‘차(茶)’의 두 음을 합쳐서 ‘오차’, 공방을 겸하는 공간이어서 ‘공방’이라는 두 글자를 더했다. 차를 깨닫는다는 건 어떤 걸까. “저는 손님들을 기억할 때 그 분이 드신 차로 기억을 해요. 한 분 한 분 사진처럼 기억이 나거든요. 가게에 와서 차를 드신 분들이 몸에 도움이 되었다고 말씀하실 때 좋죠. 가게를 시작하면서부터 그래도 일관되게 지켜온 건, 아이들이 오거나 임산부가 왔을 때도 내가 편안하게 내어드릴 수 있는 메뉴들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문을 연 지 벌써 10년이 되었다는 오차공방의 메뉴는 오은주 님이 블렌딩한 차들이 대부분이다. 손님들이 뭔가 부족한 것을 표현하면 그것을 고민해 하나씩 채워온 것이 지금의 차 메뉴들. 20여 년 전 직접 차를 배운 그녀는 손님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차를 만들고 있다. 예를 들어 ‘히말라야 설국차’라는 메뉴를 이야기하자면, 설국차는 높은 산에서 자란 야생국화인데, 특이하게도 잎차가 갖고 있는 약성과 맛, 수색(水色)을 지녔다고 한다. 꽃차인데 몸에 열을 내는 발효차와 같은 효능이 있어 모든 분들이 평이하게 좋아할 수 있는 메뉴라는 설명이 이어진다. 그 외에도 탄산이 없는 야생화 꽃잎에이드, 산딸기에이드, 돌배모과차, 지리산 야생녹차 등 다른 찻집에서 보기 힘든 메뉴들이 여럿 있어 오차공방만의 색을 더하고 있다. 오차공방의 유명인사, 볼 오차공방에는 이렇게 직접 블렌딩한 차 외에 유명한 존재가 또 있다. 볼, 13세의 불테리어. “볼은 빠다틱하게 지은 이름인데, 영어로 ‘공(ball)’이 우리말 공으로 하면 둥글다, 비어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불테리어는 원래 힘이 좋은 견종인데, 저 아이는 힘을 스스로 조절할 줄 아는 것 같아요. 언젠가 멀리서부터 저를 향해 달려오는데, 직선으로 달려오다가 중간에 서있는 아이를 피해 돌아서 달려오는 걸 보고 생각했어요. 아, 저 아이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구나 하고.” 그렇다면 볼은 오차공방에 너무 잘 어울리는 녀석이다. 불테리어는 공격성이 강한 맹견 중 하나인데, 볼은 이 개가 불테리어 종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순박하고 우직하다. 나이가 들어 그런가 했는데 원래 그런 성품이란다. 얼굴은 웃는 표정이고 아는 손님이 오면 꼬리치며 다가가 몸으로 부딪히며 알은체를 한다. 쓰다듬으면 마다하지 않고 드러누워 순순히 손길을 받아준다. 그래서 오차공방 손님들에게 인기짱이다. 볼을 형상화한 조각이나 그림이 여럿 있는 것도 손님들이 선물한 것들이 많다. 이제는 볼에게 오차공방의 지분이 어느 정도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 은주 님이 가게 쪽방에 들어 있어 손님이 오는 걸 눈치 채지 못할 때는 주인을 부르러 오기도 한다니, 오차공방을 지키는 또 다른 사장님이라고 할 법하다. 언제나 산과 함께 하고픈 마음으로 차가 다니는 도로 위에 10년을 있으면서도 오은주 님은 한 번도 지리산과 단절되어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한다. 본인은 언제나 그 속에 있었다고. 그러니 반달곰1%에 참여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제안이 왔을 때 90%는 윤주옥 님에 대한 믿음으로, 그 분이 하시는 일이니까 지지하는 마음으로 고민 없이 수락했어요. 산을 품은 분이니까. 그리고 나머지 10%는 자연에 대한 공감이었죠.” 아니다 싶은 일은 절대 못한다는 그녀의 선택이었다. 반달곰1%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좋은 점을 물었더니 손님들이 가게를 지리산과 연결되어 있다고 친밀하게 느끼는 것 같아서 좋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반달곰 하면 자연스럽게 지리산이 떠오르고 자연, 생태계와 연결해서 생각하니까. 게다가 처음에는 직접 반달곰1%를 소개해야 했는데, 지금은 알고 찾아오시는 분들이 훨씬 많아진 느낌이다. 시간이 가져온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젊은 분들은 가족이나 지인들한테 소개하기도 한다고. 덕분에 가게도 홍보가 된다. 그러니 반달곰 1% 프로그램을 시작하길 잘했다. 은주 님의 ‘산이 숨이 되고 내가 되었고 지금은 공방이 숨이 되고 내가 된다’는 말은 그녀가 얼마나 산을 사랑하는지에 대해 알게 한다. 우리 모두가 그녀처럼 산을 사랑했다면 산도 그 안의 생명체들도 힘들지 않았을 텐데. 모두가 그녀의 마음을 닮아갔으면 좋겠다. 반달곰1%는 지리산권 가게들(현재는 구례)이 자발적으로 진행하는 공존프로그램이다. 반달곰1% 가게에 가면 반달가슴곰을 자연스럽게 만나고, 특별히 계획하지 않아도 반달가슴곰 보호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2021년 5개 가게로 시작한 반달곰1%는 2024년 현재 10개 가게로 늘어났다. 반달곰1%는 ‘유랑인증서’를 발행하고 있는데, 손님들이 반달곰1% 가게에 들러 물품을 먹거나 마시거나 구입하면, 반달곰1% 가게들은 수익금의 1%를 사단법인 반달곰친구들에 기부하고, 그 기부금이 모아지면 사단법인 반달곰친구들과 논의하여 올무수거 활동, 무인센서카메라 구입 등 반달곰 보전활동을 위해 쓰기로 약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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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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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곰1% 가게 유람기]도로 위의 심산, 깨달음이 있는 오차공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