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1-02(목)
 

지리산방송국

 

 

여보, 노랑이 눈이 왜 이래?”

마당 어귀 가마솥 앞에 앉아 메주콩을 삶는 아내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부지깽이로 불잉걸을 툭툭 치며 손바닥만 바라보던 아내는 그러나 내 큰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또 귀에 이어폰을 꽂은 모양이다. ‘쯧쯧혀를 찼다. 바깥마당 길고양이 노랑이 눈에 안약 넣어줄 궁리를 하며 아내께로 다가가 어깨를 흔들었다. 화들짝 놀란 아내가 뒤로 나자빠지는 듯했다.

엇따야, 경기하겠네. 뭘 듣기에 그리 푹 빠졌어?”

아유, 좀 가만가만 말로 하지. 지금 소설 듣고 있거든.”

지난봄 유튜브 방송 가운데 책 읽어주는 방송이 있다는 말이 퍼뜩 떠올랐다. 그때부터 아내는 유튜브 방송에 빠져 살았다. 이른 아침 정치방송에서 시작된 아내의 유튜브 사냥은 저녁때까지 계속되었다.

처음엔 그런 아내가 못마땅했다. 흥미를 끌어 돈벌이하려는 유튜버가 대부분일 거라 믿었다. 거기 나오는 정보가 옳을 리가 있나. 허접한 몸짓과 익살스런 표정으로 관심 끌기에 혈안이 된 돈벌이광기의 도가니일 거란 생각이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진실은 드러나고 진정은 느껴지기 마련이다. 몇몇 좋은 방송을 만나면서부터 나 또한 유튜브 채널의 중독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국민 여러분. 지금 국회로 나와 주십시오. 이 나라 민주주의를 지켜 주십시오.”

야당 정치지도자의 다급하고 처절한 목소리가 유튜브 방송을 타고 흘러나왔다.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무장한 경찰과 군인이 국회를 막아섰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국민은 국회로 나갔고 이 나라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그 자리를 지켜낸 국민 모두가 기자였고 기록자였다.

밤새 텔레비전을 켜두고 있었지만 정작 눈과 귀는 손바닥 속에 든 유튜브 방송에 열려있었다. 명망 있는 독점언론 독점방송의 시대가 저무는 것을 느꼈다. 누구나 방송인이 되어 주관을 밝힐 수 있는 방송국이 내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낮은 곳에서 느리게 살자는 맹세를 하면서 지리산에 들어온 지 스무 해가 다 되었다. 그러나 세상은 내 삶을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괭이 하나에 의존했던 농사에 관리기를 더했고 농사는 늘었다. 자꾸 위를 향하는 숨 가빠지는 세월이었다.

내 삶만 그랬을까. 곳곳이 갈라지고 파이는 국토와 이리저리 떠밀리며 착취당하는 이웃들, 서식처를 잃고 쫓기는 가녀린 생명들, 이 문명은 우리들을 느리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지리산 여기저기 함성은 끊임없이 들끓었다. 누구는 케이블카반대를 외쳤고, 어디서는 골프장반대를 외쳤다. 저 언덕엔 산악열차가 저 골짜기엔 양수발전소가 들어올 거라는 말이 들렸다. 이 광란의 문명은 삶터를 지키려는 우리들 저항의 돛을 꺾고 노를 부러트리기 일쑤였다.

 

여기 와보세요. 저 아름다운 숲을 보세요. 거기 깃들어 사는 무수한 생명들 순수무구한 눈빛을 봐주세요. 저들과 함께 살아가는 길을 열어주세요. 그 길을 여럿이 함께 따박따박 걸어주세요.’

이런 말을 해주는 방송이 있으면 좋겠다. 구상나무 떡갈나무 사이를 오가는 하늘다람쥐의 비행과 연하능선 흐드러진 범꼬리 산오이풀 현란한 춤사위를 보여주는 방송이 있으면 좋겠다. 덕산장 인월장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람들 살아가는 이야기가 흐르는 방송이 있으면 좋겠다. 낮은 곳에서 느리게 살아 더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을 전해주는 방송이 있으면 좋겠다.

유튜브 방송채널에 아내가 즐겨 만날 지리산방송국이 더해지면 좋겠다. 지리산의 노래와 시와 함성과 소곤거림이 세상천지에 메아리치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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