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1-02(목)
 

이 글은 동학의 영성적 측면을 매우 정확하게 말하고 있으며 짧은 글이지만 임팩트가 강해서 올립니다. 내용 중 (    ) 속은 글을 읽으며 나의 언어로 이해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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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영성운동

-내면에서 찾은 역설적 중심

 

성해영(서울대 조교수)

 

 

인간 내면에 자리하는 한울님에 대한 인식을 핵심 증거로 삼아 당대의 위기를 돌파하려는 시도는 현실에서 좌절되었지만, 수운이 만들어낸 울림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수운의 중심 찾기가 모든 인간과 존재의 내면에서 초월적 차원의 중심이 현현되게 함으로써 각자의 존재를 중심으로 만드는 역설적인 것이자 시대를 초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사에서 거듭 확인되듯이 어느 누구도 자신이 허락하기 전에는 우리 내면에 자리한 초월적인 중심을 빼앗아 갈 수는 없다. 우리 각자의 마음 깊은 곳에 결코 흔들릴 수 없는 초월적인 중심이 있다는 것이 바로 신비주의적인 종교성의 핵심이다.

수운이 경신년에 만난 상제가 그의 마음이 빚어낸 환상이 아니라 실제 지고 존재였는지를 단정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그것은 환상도 실재도 아닌 의식이 확장된 궁극의 지고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기치 못했던 상제와의 만남은 수운과 그를 따랐던 제자들 그리고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던 수많은 사람의 삶과 그들이 몸담았던 공동체의 모습을 뿌리째 흔들었던 것은 분명하다. 수운의 역설적 중심 찾기는 놀라운 자유와 해방의 힘을 그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당대인에게 주었던 것이다. 그 힘은 수운에게 홀연히 나타나 우리 모두가 한울님이자 우주의 궁극적 중심이라는 앎을 전해주면서 본격화되었던 것이다.

수운은 한울님이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신비주의적 깨달음(내면에 잠재된 신성의 발견)이 개인의 삶은 물론 공동체를 바꾸는(개인 삶과 사회적 삶의 변혁) 강력한 근거가 될 수 있음을 그의 삶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지금 이곳에 서로를 얼마나 많이 존중하는가가 우리가 천도를 따라 사는지 여부를 결정짓는다는 것이 수운의 핵심적인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수운의 가르침을 깊게 쫓아가면 역설적으로 우리가 결코 내면의 중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모든 존재가 애초에 궁극적 중심에 깊이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다. 이기심(에고)으로 인해 우리가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궁극적 중심(신성, 지고의식)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로 말미암아 지금 이곳에 의식적으로 드러내지 못할 수는 있어도 말이다.

 

 

19세기 조선에서 등장한 동학은 우리 모두의 마음에서 개인이 존중되어야 할 불변의 자리를 찾아냈다는 점에서 동양과 서양, 공간과 전근대/근대라는 시공을 초월한다. 만약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는 인간의 확장된 자기 정체성을 찾아내려는 시도를 영성이라고 정의한다면 동학은 수운에게서 시작된 토착화된 영성(단군 시절의 경전인 삼일신고나 천부경에 나타나는 내재된 신성)의 재발견 노력이었다. 그리고 그 노력은 인간 존중과 평등이라는 근대적 원칙에 입각해 운영되는 공동체를 구현하려는 실험에 다름 아니었다. 그점에서 서구사회와 다른 결을 지녔지만 매우 흡사한 근대적인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비록 현실적 차원에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후로 한반도에서 결코 간과하기 어려운 거대한 울림을 만들어 냈던 영성 구현 운동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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