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 4
이 민 숙
민들레 씨앗은 어디로 날아갈까
알려하지 말아라
멀어서 황홀한 그대 살빛 너머에는 45억 년을 기어와 지금도 기어가고 있는 달팽이의 설움이 있다 흙빛 설움, 바람 부는 허공을 바라보며 가슴을 털어 비우고 있다 텅빈 산정에 흐르는 구름 한 잎,
허공이 황홀이다
염려하지 말아라
민들레 씨앗도 너무 멀리 날아가서 기진할까 봐 피아노 건반을 건너뛰지 않는다 베토벤의 한 손가락도 놓치지 않는다 음표 하나가 영원인, 민들레 깃털 되어 날아가는 고흐의 귀! 아무 것도 들을 수 없는,
절벽이 황홀이다
꿈꾸지 말아라
꿈이 아니다 사랑은, 민들레 씨앗보다 꿈보다 더 멀리 날아가는 그리움의 수액을 받아마셔라 대지의 몸이 척박해질 때 노랗게 기진하는 그리움을 뿌려라 차마고도의 끝에서 걸어온 낙타가 짐을 부리고 잠이 드는,
사막이 황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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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민들레’를 소재로 해서 시인 내면의 어떤 사유를 ‘황홀’이라는 시어로 집약해낸 것으로 보인다.
자유로운 생명을 상징하는 민들레 씨앗이 날아가는 곳이 어디일까. 그 생각은 45억년의 우주적 시간 속 존재의 설움까지 나아가고 가슴 속 그 설움을 허공을 바라보며 비워내다가 허공처럼 그렇게 모두 비워내는 것이 삶의 극치에 이르는 ‘황홀’ 아니겠냐고 말한다. 불가에서 ‘공空’이르는 깨달음의 황홀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다시 허공으로 사라지는 민들레 씨앗을 보며 저 생명이 (건반을)건너뛰지도 않고 무엇 하나 놓치지 않는 삶의 과정 속에 있는 엄혹한 현실, 절벽 같은 그 현실 자체에서 다시 꽃을 피우는, 차라리 ‘황홀’이라고 말한다. 생명을 가진 존재는 생명이 붙어있는 지금의 현실만이 전부이며 그것이 아무리 힘들고 절벽 같은 절망 속에 있다 해도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황홀’이며 기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현실은 결코 꿈이 아니며 현실 속의 사랑 또한 꿈이 아니니 그것들에 대한 현실적 갈망, 근원적 그리움을 따라 걷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런 갈망과 그리움의 짐을 싣고 걸어와 잠이 드는 그 사막 또한 ‘황홀’이라고 말한다. (박두규. 시인)